하나님 나라와 로마서 5(Kingdom of God and Romans) 로마서에 나타난 하나님 사랑의 강도(强度)
할렐루야!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나라와 로마서를 온 세상의 사람과 같이 배우면서 로마서를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의와 사랑을 그 주제로 보면서 이해하게 해 주신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로마서 하면 이제는 이신칭의가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의로 인정하고 이를 은혜로 받은 성도가 이제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파송하신 성령님과 함께 교회 안에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서로 어떻게 사랑하며 그리고 성도가 세상에 나가서 역시 성령님의 인도로 어떻게 죄와 사망의 법을 극복하고 승리를 하면서 사랑을 실천하고 의롭게 살 수가 있는지로 인식할 수가 있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교회를 통해서 온전히 이루어질 수가 있게 역사하여 주옵소서! 오직 믿음으로 실천도 없고 그렇다고 법도 없이 그냥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온 세상의 법을 잘 배우고 지키는 크리스천이 없게 하시고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의 법인 율법을 잘 배우고 이를 성령을 통해서 자발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율법이 완성이 되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속히 건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샬롬!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크신 사랑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같이 배우고 그리고 로마서를 하나님의 나라와 함께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신칭의 중심의 로마서만 우리가 배우고 접하다가 이렇게 로마서에 나와 있는 이신칭의와 다른 다양한 주제를 접하면서 다소 이상하게 생각하실 분들도 계시겠지만 저는 틀림없이 로마서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주제는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의의 새로운 나타남과 이를 통해서 예수님을 믿는 자를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믿기만 하면 의롭게 된다는 의미를 예수님의 사역과 그 사역을 하게 하신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의의 측면에서 살펴보면서 특히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자세하게 설명해 드렸고 그리고 이신칭의의 이해를 로마서 4장 17-22절에 나타난 의롭게 인정을 받는 아브라함의 시간이 가도 변치 않는 믿음과 그리고 로마서 1장 17절의 하박국서 2장 4절의 인용에 대해서 하박국서를 통한 의인의 의미와 의롭게 되는 믿음의 삶에 대해서 자세하게 살폈고 그리고 이신칭의는 절차적인 측면이 있으며 이 측면을 반드시 잘 이해를 해야 된다고 하면서 이렇게 이해된 이신칭의는 믿음과 행동이 함께 있어야 되는 성도의 행동하는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의에 대한 인정으로 이렇게 이해를 통해서 천주교의 이해와 별 차이기 없다는 점과 그리고 로마서와 야고보서가 특별히 다른 부분도 없다는 점을 분명하게 말씀을 드렸는데 오직 성경의 한 구절에 열광해서 그 구절이 의미하는 온전하고 세밀한 이해를 절대로 놓쳐서는 아니 됨을 말씀을 드렸는데 이는 성경을 이렇게 반드시 읽고 정리를 해 보아야 이렇게 이해가 쉽게 될 수가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이 이해가 올바른 로마서의 이해임을 온 세상의 사람이 다 알게 되는 날이 분명하게 올 것임도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두 번째 주제는 역시 로마서에 나타난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에 대해서 전번 시간에 말씀을 드렸는데 사도행전의 바울의 모습과 사복음서의 예수님의 사역과 그리고 로마서 5장에 나타난 예수님의 사역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의 확실한 증거를 말씀을 드렸고 이런 하나님의 예수님을 통한 사랑으로 이를 믿는 성도가 누리는 세 가지 자유에 대해서 로마서 5-7장에 설명이 된 죽음으로부터의 자유, 죄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자세하게 설명을 드렸고 특히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에 대해선 조심해서 접근하고 잘 이해를 해야 됨을 말씀을 드렸는데 예수님의 사복음서의 율법에 대한 가르침을 먼저 깊이 생각하고 이 예수님의 말씀을 절대로 어긋나지 않는 로마서의 율법에 대한 이해를 해야 되고 그리고 에스겔서 34장과 36장에 나타난 성령을 받은 사람이 마음이 부드럽게 되고 이를 통해서 율법을 잘 지키게 된다는 말씀과 로마서의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란 말씀을 함께 설명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에 앞서서 로마서의 특징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면서 빙산의 일각, 혹은 압축된 파일로서 로마서 등을 파워포인트 자료로 설명을 드리면서 로마서의 이해를 하기 위해서 다른 성경의 이해가 선행이 되어야 함을 설명했고 특히 갈라디아서와 하박국서의 이해와 함께 사복음서 그리고 사도행전의 이해도 어느 정도 선행이 되어야 비로소 로마서를 올바로 이해를 할 수가 있음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는 바울의 로마서가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이방인의 사도로서 활동을 시작해서 아시아와 그리스에 교회들을 세우고 이 교회들에 편지도 보내고 교회의 문제가 있을 경우에 해결을 해야 했으며 이런 과정에서 로마에 비록 아직 가지는 않았지만 제2 차 전도여행 시 기원후 약 57년 경에 로마교회와 성도들에게 쓴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사도로 임명이 되어 적어도 20여 년을 활동을 한 후에 교회에 보내는 편지이기에 그간 바울 사도가 겪은 일들과 예수님에 대한 이해와 그리고 교회에 대한 이해와 그리고 이미 자신이 알고 있던 구약의 이해가 함께 어우러져서 매우 깊은 영적인 이해를 로마서로 기록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앞에서 살펴본 다양한 성경과 그리고 당시의 로마와 당시의 유대인과 그리고 역사적인 배경도 함께 배워야 비로소 로마서의 이해가 온전히 될 수가 있고 그리고 성령을 받은 전도자의 글이기에 역시 성령을 받고 전도를 한 신자가 로마서를 다른 성도보다 이해가 더 잘 되는 것이 당연한 일임도 지적했습니다.
오늘은 로마서 8장에 있는 하나님의 성도에 대한 사랑의 강도(强度)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마도 제가 생각하기로 당시에 있던 온 세상의 핍박과 그리고 유대인의 방해 그리고 로마서를 보낸 후 약 7년 뒤에 시작이 되는 네로 황제의 핍박을 견디게 하는 가장 중요한 로마서의 내용이 여기에 있다고 믿는데 우리가 로마서 하면 이해하고 알고 있는 이신칭의의 지식만으로 이런 생명을 앗아가는 당시 지구 최강의 국력과 권력과 군사력을 가진 로마와 폭군 네로 황제의 핍박을 절대로 이길 수가 없고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통한 성도에 대한 놀라운 사랑의 능력이 그리고 이를 믿은 우리의 믿음의 선진의 인내가 이를 가능하게 했으리라 믿는데 바로 그 내용이 우리가 배울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통한 사랑의 강도입니다. 우리도 이를 로마서를 통해서 잘 이해를 해서 당시의 피를 흘리게 하고 육체의 고문과 그리고 순교를 하게 하는 핍박과 비교를 해서 지금 믿는 우리가 극복해야 되는 너무나 약한 경제적인 유혹 즉 물질에 대한 유혹을 반드시 극복함으로써 기필코 우리가 사는 이 한국 땅에 그리고 온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가 건설을 해야 될 것입니다. 로마서를 통해서 당시의 우리의 믿음의 선진이 순교를 하면서도 신앙을 지키게 했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귀한 말씀을 로마서를 통해서 같이 이해하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를 배우면서 이신칭의를 넘고 넘어서 하나님의 의를 알아야 하고 그리고 또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하는데 이 모두가 예수님을 통해서 일어남을 또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하며 오늘 우리가 배울 역시 예수님 안의 절대로 이 세상의 무엇도 끊을 수가 없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하나님의 우리 즉 성도에 대한 사랑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8장에 있는 내용을 저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는 말씀 그대로 믿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읽으시고 그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이해하시고 믿으셨으면 하는 바람으로 세 가지 버전으로 보여 드립니다. 개신교의 개역개정. 그리고 천주교의 공동 번역 그리고 개신교의 표준 새 번역으로 본문을 소개하는데 그대로 하나님의 예수님을 통한 우리에 대한 사랑을 믿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이 말씀을 굳게 믿고 이 시대 우리가 싸워야 하는 로마 당시와 너무나 작은 싸움인 물질과의 싸움에서 그리고 세상 법과의 싸움에서 그리고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 그리고 세상의 안목과의 전쟁에서 우리 모두가 승리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제가 여기에 오시는 모든 분들을 위해서 쉬지 않고 기도하고 있으니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부족한 저를 위해서도 꼭 복음을 잘 전하도록 기도해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로마서 8장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
롬 8: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하느님의 사랑
31. 그러니 이제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 되셨으니 누가 감히 우리와 맞서겠습니까?
32.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당신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느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무엇이든지 다 주시지 않겠습니까?
33. 하느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누가 감히 고소하겠습니까? 그들에게 무죄를 선언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신데
34. 누가 감히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단죄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셨을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셔서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35.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
36. 우리의 처지는, "우리는 종일토록 당신을 위하여 죽어갑니다. 도살당할 양처럼 천대받습니다."라는 성서의 말씀대로입니다.
37.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도움으로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38.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신들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능력의 천신들도
39.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한 역경보다도 강하다
31. ○그렇다면, 이런 일을 두고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32. 당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주신 분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거저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33.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누가 감히 고소하겠습니까? 의롭게 하여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34. 누가 감히 그들을 정죄하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는 죽으셨을 뿐 아니라, 오히려 다시 살아나셔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시며,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하여 주십니다.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핍박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
36. 성경에 기록된 바 "우리는 종일 주님을 위하여 죽임을 당합니다. 우리는 도살당할 양과 같이 여김을 받았습니다" 한 것과 같습니다.
37.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분을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습니다.
38.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39.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로마서를 배웁니다. 먼저 시간에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통한 사랑에 대해서 같이 살려 보았는데 저와 여러분 그리고 이 세상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예수님을 통해서 십자가로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 이렇게 하나님께서 먼저 저와 여러분 그리고 온 세상의 사람인 모든 죄인을 사랑하신 사실을 먼저 믿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예수님을 통한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있게 되고 이를 믿는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심도 역시 믿어야 합니다. 로마서는 이신칭의로 소개가 되어서 모든 로마서 16장을 이신칭의의 틀안에서 모두가 이해를 하려고 했고 이런 시도는 너무나 이신칭의의 주제보다 큰 하나님의 예수님을 통한 의와 사랑에 대해서 침묵하게 했습니다. 제가 이를 모든 분이 알기 쉽게 그림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대한민국 하면 우선 일본과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 있는 한반도를 떠 올리고 그리고 이를 다시 남과 북이 분단이 되어 있고 남쪽은 서울을 포함해서 8도로 나누어지고 북한은 평양을 포함해서 역시 8도로 나누어져 있으며 남한의 주요 도시는 서울을 비롯해서 부산, 인천, 대구, 대전, 광주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북한은 평양, 개성 등의 주요 도시로 구성이 되어 있고 그리고 그 인구는 남한이 약 5천만 명 북한이 약 2천5백만 명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고 하면 큰 부분과 조금 더 작은 세부적인 부분이 고루 잘 설명이 되어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헌법상 보장된 국가의 영토와 그리고 국민에 대해서 어느 정도 파악이 되게 됩니다. 물론 우리 헌법이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부속도서로 한다로 해서 북한의 영토도 같이 엮어서 설명을 하지만 북한은 김정은의 통치로 갈 수도 그리고 서로의 대화도 어려운 상태에 있는 것이 또한 분명해서 실질적으로 주권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로 설명합니다.
이와 똑같이 로마서도 신약 성경에 있는 서신서로 사도 바울이 57년에 썼고 16장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그중에서 첫 8장은 교리 부분이고 나머지 또 9-16장 즉 후반부 8장은 실천 부분이다. 그런데 1-8장까지는 그 주요 내용이 하나님의 의와 사랑으로 크게 설명을 할 수가 있고 이 하나님의 사랑과 의는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났다. 하나님의 의를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이 나타났으며 이를 믿는 사람은 의롭게 된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통해서 십자가에 나타났으며 이 사랑을 통해서 성도는 세 가지 자유를 지니는데 죽음과 죄와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누리게 된다. 1-8장에는 하나님의 의와 이신칭의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그 사랑으로 성도가 누리는 자유, 그리고 성령을 통한 궁극적인 승리와 합력성선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강도 즉 이 세상 무엇도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성도를 끊을 수 있는 것이 존재하지 아니한다. 그리고 후반부 9-16장에는 이스라엘의 회복 문제와 함께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성도가 전도를 함으로써 사랑을 실천하는 부분과 예수님의 몸 된 교회에서 서로 형제로 사랑하는 부분과 성도가 세상에 나가서 성령의 인도로 예수님과 동행하며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고 의롭게 사는 방법 혹은 예가 설명이 되어 있다 라고 로마서를 조용 조용 설명하면 위의 한국에 대한 설명과 같이 제대로 된 로마서의 짧은 요약 혹은 설명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이 어떤 모습입니까? 혹은 한국은 어떻게 설명이 가능합니까? 혹은 한국은 어떤 나라입니까 하고 어떤 한국에 대해서 잘 모르는 분이 물었는데 이를 답하는 사람이 서울입니다. 혹은 평양입니다 하면 틀리지는 않지만 한국의 작은 부분만 설명한 것이 되어 이를 듣는 이가 한국에 대해서 올바로 이해를 할 수가 없게 됩니다. 이와 함께 누가 로마서에 대해서 물을 때 이신칭의입니다. 하고 답을 하는 것은 로마서 16장에 대해서 지극히 일부 혹은 작은 주제에 대해서 설명을 하는 것으로 절대로 로마서를 올바로 설명하고 소개하는 것이 못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500년의 세월을 로마서 하면 누구나 한치도 망설임이 없이 로마서는 이신칭의입니다. 하고 대답하고 그렇게 가르쳐 왔습니다. 절대로 이런 이해로 로마 교회에 당시에 살던 성도가 네로의 핍박을 견디며 신앙을 지킬 수가 없었으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이제 오늘 배우는 하나님의 사랑의 강도 즉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랑의 강도에 대해서 배우면서 로마서의 진수를 그리고 큰 주제를 똑바로 이해를 하고 이제 로마서 하고 누가 물으면 하나님의 사랑과 의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진리를 기록한 책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통한 최후의 승리와 성령의 인도로 성도가 교회에서 세상에서 서로 사랑하며 의롭게 사는 것을 기록한 신약의 서신서입니다. 이렇게 좀 더 정확하게 설명하고 좀 더 짧게 그 주제를 묻는 분께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의와 사랑입니다로 대답하고 그리고 좀 더 길게 대답을 한다면 이에 덧붙여 성령의 사역과 성령의 인도로 성도가 사랑과 의를 실천하는 모습을 기록했습니다 라고 대답을 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하나님의 의가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났으며 이를 믿는 이를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같이 공부를 했고,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의 그리스도를 통한 확실한 증거를 배운 뒤에 그 사랑의 강도가 어느 정도인가 하고 성경 본문을 통해서 같이 배우고 있으며 이 부분이 로마서의 핵심 중의 하나로 당시의 참혹한 박해를 견디게 했던 원동력이 되었으리라 믿고 배우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 31-39장의 내용은 우리가 그대로 앞에서 배운 하나님의 예수님을 통한 사랑의 확실한 증거와 같이 모든 것을 제쳐두고 믿어야 하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신 예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으로 역시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 것이니 모든 일에 앞서서 우리는 이제라도 속히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로마서 5장에 있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사랑의 강도에 대한 설명인 로마서 8장 31-39절의 말씀을 그대로 굳게 또 믿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시련을 능히 극복하고 모든 핍박을 이길 능력의 말씀으로 우리는 속히 굳게 믿어야 할 것입니다. 누가 로마서 하면 그리고 우리가 로마서를 생각할 때 바로 생각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이며, 그리고 그 사랑은 예수 안에서 그 무엇도 우리와 하나님과 관계를 갈라 놓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과 핍박과 시련을 모두 이겨 내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보면 로마서만큼 유대인과 온 세상에 믿지 않는 분들께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을 통한 구원에 대해서 설명을 잘 할 수가 있는 좋은 책이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믿는 성도의 이신칭의로 로마서를 이해를 해서 믿는 사람에게 어떤 해방을 주는 책을 넘어서 믿는 자, 믿지 않는 자 모두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가장 좋은 전도서가 바로 로마서 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실로 놀라우신 하나님은 은총이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며 그리고 성령님의 감화와 감동임이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성경을 가지고 읽을 수가 있게 수많은 기독교인이 노력을 했고 그리고 성경을 모든 종족 민족이 읽을 수가 있게 다양한 버전으로 번역하고 발행한 분들의 노고로 과거 500년 전에 오직 라틴어 성경만을 가지고 일부 특권의 사람이, 이도 소유하고 읽을 수가 있어 누가 무어라 하면 그냥 맹목적으로 성경도 없이 따라간 것과 너무나 다르게 이제는 모든 사람이 다 누가 성경의 내용을 어떻게 이야기하면 우리 스스로 그 내용이 올바른지 살펴서 올바른지 아닌지 분별을 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진리를 접할 수 있는 좋은 시대에 성경을 다양하게 읽고서 누구든지 올바른 진리의 세계로 마음껏 깊이 헤엄쳐 갈 수가 있고 영적인 세계의 올바른 이해가 누구나 가능한 너무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의 시대에 우리 모두는 특별히 태어나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귀한 자신에게 주어진 100년도 아니 되는 짧은 시간을 아직도 물질에 취해서 명예에 취해서 혹은 세상의 정욕에 취해서 살고 있으면서 500년 전 성경도 없고 검증도 불가능한 시대에 어떤 사람의 외친 교리에 아무런 스스로의 그 주장의 진위에 대해 노력도 없이 모든 정력을 다 기울이고 이를 맹목적으로 믿고 살고 있다면 이는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를 검증도 없이 믿고 또 가르치고 있다면 만약에 그 내용이 옳지가 않다면 이렇게 하시는 모든 분이 너무나 큰 죄를 쉬지 않고 범하고 있는 것이 될 것입니다. 무엇이 자신을 그렇게 500년 전의 주장에 얽매이게 하고 있는지 속히 살피고 그 잘못된 길에서 자신도 떠나고 자신에게 배우는 사람들도 떠나게 해야 될 것입니다. 이제 바울 사도가 로마에 보낸 로마서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그 사랑의 놀라운 무엇도 끊을 수가 없는 강도를 믿고 인내하며 승리한 믿음의 선진들이 겪은 당시의 참혹한 네로의 박해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다음 백과사전에서 그대로 옮겼습니다.
로마 대화재와 기독교인 박해
편견 때문에 누명을 쓴 사람들(바이성의 세계사 다음 백과사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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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남아 있는 로마 시대의 웅장한 석조 건물만으로 고대 로마 제국을 상상하면 큰코다치기 십상이다. 로마 제국의 모습은 하나의 사건 이전과 이후로 확연하게 구분되기 때문이다. 예수가 탄생한 뒤 64년 여름, 제국의 심장 로마에서 큰 불이 났다. 인구 100만이 넘는 도시의 절반 이상이 완전히 파괴될 만큼의 대화재였다. 당시 통치자는 네로 황제였다.
네로는 도시의 재건을 위해 황제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쏟아부었다. 화재 진압을 진두지휘하고 이재민 대책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그 결과 로마는 세계의 수도에 걸맞은 위용을 갖추며 새롭게 태어났다.
그렇지만 당시 로마 시민들은 황제의 이런 노력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황제가 일부러 로마에 불을 질렀다는 것이다. 왜 네로는 그런 의심을 샀을까? 의심이 그치지 않자 네로는 말했다. “방화는 미신을 믿는 자들의 소행이다.” ‘미신을 믿는 자’는 다름 아닌 기독교인들이었다.
로마의 절반을 태운 불
사방으로 격렬히 타오르던 불꽃은 처음에는 도시의 낮은 지역을 공격한 뒤 높은 곳으로 번져갔다. 그러나 다시 낮은 지역을 삼키면서 불은 인간의 진화 노력을 좌절시켰다. 불길이 번지는 속도가 너무나 빠른 데다가 로마의 골목들이 좁고 복잡하고 불규칙해서 대화재에 취약했다. 공포에 질려 울부짖는 여자들과 허약해 움직이지도 못하는 노인들,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대는 아이들, 자신의 목숨을 구하려고 우왕좌왕하는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을 도우려 애쓰는 사람, 연약한 사람들을 끌고 가는 사람, 힘없는 사람들이 따라오길 기다리는 사람, 걸음을 재촉하는 사람,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 모두 서로를 방해했다. 어딜 가나 혼란과 좌절뿐이었다. 막 빠져나온 위험을 뒤돌아보며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 그 불길이 자신들의 앞과 옆에서 날름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만약 사람들이 바로 옆으로 도망쳤다면, 아마 혀를 날름거리는 화마에 이미 먹혔을 것이다. 멀리 떨어져 있어서 화재로부터 안전할 것 같았던 곳까지도 금방 같은 운명에 처하고 말았다. 사람들은 도로에 밀치락달치락하다가 땅 위에 구르고 쓰러졌다. 어떤 사람은 전 재산을 잃어 하루분의 식량도 없었다. 구해줄 수 없었던 가족을 가엾게 여겨, 피할 수 있는데도 목숨을 끊는 사람도 있었다. |
로마의 역사가이자 정치가인 코넬리우스 타키투스는 저서 《연대기》에서 64년 7월 18일에 발생한 로마 대화재를 영화의 한 장면처럼 묘사했다. 제국의 심장에 대화재가 발생한 것은 타키투스가 아홉 살 때, 네로 황제가 즉위한 지 10년째 되는 해였다. 전차 경기와 검투사들의 피 튀기는 대결이 펼쳐지던 막시무스 대경기장 아래에 있는 한 가게의 기름 창고에서 불이 났다. 방화인지 실수인지 역사는 기록하지 않았다. 로마는 여름에 주로 서풍이 불어 서늘한 편이지만, 주기적으로 아프리카에서 발생한 남서풍이 지중해 너머 반도에 닿으면 바람은 거세지고 기온은 급격히 올라간다. 이 바람이 며칠 동안 계속해서 부는 경우는 별로 없지만, 그해 여름은 달랐다. 불은 바람을 타고 인근 지역을 삽시간에 삼켰고, 태울 수 있는 모든 것을 태우며 퍼져나갔다.
불은 열흘 남짓 타올랐다. 당시 로마에는 소방대원이 7000명이나 있었지만, 테베레 강물을 담은 양동이를 일렬로 날라 옮기는 진화 방식으로는 불의 속도를 따라잡기에 역부족이었다. 불을 끄는 것은 포기하고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온전한 건물들을 부수었다. 하지만 이 작업은 나중에 네로가 불을 질렀다는 소문이 나돌게 만든 한 가지 원인이 되었다. 6일이 지난 즈음에 불길이 잡혔다. 그러나 이도 잠시, 이번에는 동풍이 불어 불길은 방향을 틀었다. 사나흘 동안 로마는 다시 불길에 휩싸였다.
불은 철저하게 로마를 유린했다. 1차 화재로 14개 행정구역 가운데 도시의 중심지인 3개 구가 전소했고, 4개 구가 반소했다. 북서쪽에 있는 2개 구는 2차 화재로 반소되었다. 포로 로마노와 신전이 밀집한 카피톨리노 언덕은 중심지였음에도 불구하고 대리석으로 지은 덕분에 그나마 화를 적게 입었다. 무사했던 구는 겨우 4개 구에 불과했다. 모두 로마 외곽이었고, 기독교인들이 유독 많이 모여 살던 곳도 그중 하나였다.
고대 로마 조감도
로마는 자연발생도시로, 건물이 매우 밀집된 데다 목재를 많이 사용한 탓에 불이 나면 걷잡을 수 없었다. 열흘 남짓 계속된 화재는 인구 100만이 넘는 대도시의 절반 이상을 완전히 파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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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기능이 마비될 정도의 대화재 소식을 들은 식민지 시민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로마군은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면서 동시에 도로와 도시를 건설했다. 파리, 런던, 바르셀로나, 쾰른 등 유서 깊은 유럽의 대도시 대부분을 로마군이 설계했으며 이들은 특히 뛰어난 석조 건축술로 유명했다. 그런데 제국의 심장에서 어떻게 그렇게 큰불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로마인들은 식민지나 속주의 도시 건설에는 뛰어난 재능을 보였지만 계획도시가 아닌 자연발생도시인 고향에서는 이를 발휘하지 못했다. 제국의 영토가 확장될수록 로마를 종착지로 하는 도로가 유럽 곳곳에 퍼졌고, 이는 로마의 인구 유입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대화재 시기에 로마는 100만 명이 넘는 세계 최대의 도시였다. 늘어나는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집권자들은 ‘인술라’라는 5~6층짜리 공동주택을 건립했다. 벽은 석조였으나 바닥과 천장은 목재를 사용했고, 도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서로 빈틈없이 다닥다닥 붙여놓았다. 이 주택 사이를 가로지르는 도로는 좁고 구불구불했다. 귀족들이 사는 집 역시 대리석으로 지었지만 기둥과 기둥 사이를 잇는 들보는 나무였고, 문이나 창틀도 마찬가지였다. 불길이 번지면 막을 방법이 없었고, 지붕이 내려앉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대경기장, 신전, 황궁 등 웅장한 석조 건물과는 다른 이면이었다. 이전에도 로마의 골목에서는 붕괴 사고와 화재가 하루가 멀다 할 만큼 자주 발생했다.
네로 황제는 화재 진압과 이재민 대책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그런데도 시민들은 그를 좋게 보지 않았다. 심지어 황제가 직접 불을 질렀으며 타오르는 로마를 보고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불렀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로마 시민들은 왜 네로를 의심했을까?
패륜과 쾌락의 황제 네로
네로는 황제로 즉위하기 이전부터 장안의 화제였다. 네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는 로마 역사상 가장 야망이 큰 여자였다. 그녀는 제국 제일의 명문 카이사르 집안을 배경으로, 홀몸이 된 클라우디우스 황제와 재혼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에게는 이미 아들이 있었지만 아그리피나는 네로를 황제의 양아들로 들인 후 황제의 딸 옥타비아와 결혼시키는 등 자신의 아들을 황제에 앉히기 위한 계략을 차근차근 밟아나갔다.
54년,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독버섯 중독으로 죽었다. 사람들은 아그리피나를 의심했지만 증거가 없었다. 제일 먼저 근위대장이 네로를 ‘황제’라 불렀고, 이어서 세네카를 위시한 원로원도 그를 황제로 추대했다. 모든 것이 아그리피나가 짜놓은 각본대로였다. 원로원이 선대 황제의 아들을 제쳐둔 것은 근위대와의 싸움을 피하고 싶었을 뿐만 아니라,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원로원을 무시하고 측근 중심으로 로마를 다스렸기 때문이었다.
어린 네로에게 월계관을 씌워주는 어머니 아그리피나
야심이 컸던 그녀는 황제와 결혼하여 아들을 황제 자리에 앉히는 데 성공했지만, 아들에게 결국 죽임을 당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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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네로의 나이는 17세, 나라를 다스리기에는 아직 어려 아그리피나의 섭정을 받았다. 황태후의 권력은 어린 황제를 능가했다. 그녀는 아들에게 “내 덕분에 네가 황제가 되었다.”라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강조했다. 황제보다는 시인과 배우, 예술가가 되고 싶었던 감수성 깊은 소년 네로는 많은 군중이 보는 앞에서 어머니에게 꾸중을 듣기 일쑤였다. 네로는 그런 어머니를 향해 반항심을 키워나갔다.
네로는 황제로서 자기 위치를 확인하고 싶었다. 먼저 어머니의 심복을 상의 없이 황제의 직권으로 해임했다. 생애 첫 패배를 아들에게서 맛본 아그리피나는 하늘을 찌를 듯 분노하여 그를 향해 온갖 저주의 말을 쏟았다. 그러고는 전대 황제의 아들 브리타니쿠스를 황제 자리에 앉히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네로는 사람을 보내 브리타니쿠스를 암살하고, 아그리피나를 황궁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쫓아냈다. 즉위한 지 1년 만에 네로는 어머니의 손길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결혼 생활이 시들시들하던 황제는 스무 살 때 어릴 적 친구의 아내 포파이아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 네로는 친구를 속주 총독으로 보내고 그녀를 차지했다. 그러나 포파이아는 네로에게 공식적인 황제의 아내, 즉 황후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네로는 골머리를 앓았고, 이 소식이 어머니에게 들어갔다. 당연히 아그리피나는 강력하게 반대했고, 포파이아는 아직도 어머니의 품에서 놀아난다며 네로를 조롱했다. 그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나폴리에서 열린 미네르바(아테나) 여신의 축제에 네로는 어머니를 초대했다. 이제 22세가 되어 황제의 위용을 갖춘 그는 어머니의 손을 부축하며 공손하게 대접했다. 축제가 끝나고 바닷가 별장으로 돌아가는 선착장에서 모자는 마지막이 될 포옹을 나누었다. 얼마 후 아그리피나를 태운 배는 네로의 계획대로 구멍이 나 침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영 실력이 뛰어난 아그리피나는 모든 계획을 다 알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며 자신은 무사하다고 아들에게 편지를 썼다.
어머니의 부음 소식을 학수고대하던 네로는 이 편지를 보고 공포에 떨었다. 암살 시도라는 것을 눈치채고 어머니가 자신에게 복수할 것이라고 생각한 네로는 서둘렀다. 동이 트자 황제의 심복들은 아그리파나의 별장으로 말을 몰았다. 침상을 에워싼 그들을 본 아그리파나는 체념하고 “네로가 들어 있던 여기를 찔러라!”라며 아랫배를 가리켰다. 그날 오후 네로의 정치 멘토인 세네카는 황태후가 반역죄로 처형당했다고 발표했으나, 그 말을 믿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네로는 안 좋은 여론과 죄책감으로 밤마다 어머니의 망령에 시달려 주술사를 부를 정도로 괴로워했다. 그러다 어렸을 때부터 좋아하던 그리스 문화에 위로를 받고 더욱 심취했다. 그리스인처럼 턱수염을 기르고, ‘로마 올림픽’을 성대하게 열었다. 이 기간 동안 목욕탕, 극장 등 로마의 모든 공공시설이 공짜로 개방되었다. 대중은 환호했고 이를 ‘네로의 제전’이라고 불렀다. 자신감이 붙은 네로는 아내이자 의붓동생인 옥타비아를 누명 씌워 처형하고, 임신한 포파이아와 결혼했다. 이로써 네로는 자신의 의붓동생이기도 했던 전대 황제의 아들과 딸, 그리고 자기 어머니까지 죽인 패륜의 주인공이 되었다.
64년 로마 대화재가 발생하기 전 네로는 나폴리에 있었다. 나폴리는 그리스인이 세운 도시다. 이탈리아 반도에서 그리스 문화가 가장 융성한 곳이어서 네로는 가슴이 설렜다. 그리스 시를 낭송하길 좋아하던 황제는 이곳에서 가식적인 박수와 환호가 아니라 자신의 예술적 기량을 진정으로 인정받고 싶었다. 네로는 황제의 ‘계급장’인 보랏빛 옷과 황금 월계관을 떼고 무대에 올랐다. 극장은 황제의 신기한 모습을 보려는 관중으로 들어설 곳이 없었다. 수수한 옷차림에 현악기 리라를 든 네로가 등장하자 대중은 환호했고, 시 낭송이 끝나자 더욱 큰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예술가로서 성공적으로 데뷔한 네로는 자신이 다음에 설 무대는 로마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서 급보가 날아왔다.
화재 수습은 잘했지만······
로마에 큰불이 났다는 소식을 들은 네로는 직접 전차를 몰아 로마로 달려갔다. 젊은 황제는 이재민 대책을 진두지휘했다. 모든 공공건물을 수용소로 개방하고 근위병들에게 임시 천막을 치게 했다. 동원 가능한 식량을 신속하게 모아 무료로 배급하고, 피해를 입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식료품 가격을 3분의 1 수준으로 내렸다.
신속하고 원만하게 상황을 수습하면서 네로는 도시 재건에 돌입했다. 이를 위해 속주와 식민지에 의연금을 요청했고 화폐개혁도 단행했다. 네로는 백지 위에 로마를 새로 그릴 수 있는 기회가 자신에게 온 것을 신성하게 생각했다. 그는 도로를 직선화하고 폭을 넓게 만들도록 했다. 또한 주거용 건물의 높이를 제한하고, 건물 사이에 충분한 공간을 확보하도록 했으며, 외벽 공유를 금지했다. 들보에는 석재를 사용하고, 인술라에는 저수조를 설치한 안뜰을 배치하는 등의 규정을 세웠다. 지정된 기간 내에 규정에 맞는 저택을 짓는 조건으로 장려금 제도를 창설했으며, 주택에 방화 처리를 하는 비용은 국고에서 부담하기로 했다. 도시 건설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로마의 기술자들은 황제가 기대한 것 이상으로 빠른 공정을 보여, 도시는 신속하게 재탄생하고 있었다. 네로에게 비판적이던 타키투스도 “이러한 조치들은 실용적인 견지에서 취해졌지만 새로운 수도의 미관에도 공헌했다.”라고 칭찬했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고대 로마의 수도 시설, 건물, 도로 등 유적과 흔적은 상당수 네로의 작품이다.
네로의 이재민 대책과 도시 재건은 일반 로마 시민도 기꺼이 동참할 만큼 환영을 받았다. 그렇지만 네로는 한 가지 매우 큰 실수를 저질렀다. 그는 단순히 도시 기능을 재편하고, 제국의 심장부를 화재에 강한 곳으로 거듭나게 하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로마 대화재 이전부터 짓고 있었던 궁전이 대화재로 그 일부가 소실되었는데, 이참에 아예 새롭게 설계하고 건설에 더욱 박차를 가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는 그리스인들이 이상향으로 생각하는 ‘아르카디아’를 로마에 세우고자 했다. 푸른 초원과 잔잔한 호수 위에 동물과 인간이 어우러지는 세상, 네로는 궁전의 이름을 황금 궁전이라는 뜻의 ‘도무스 아우레아’라 붙였다.
도무스 아우레아는 로마 중심부 50만 제곱미터 대지에 들어설 예정이었다. 낮은 곳에는 인공 호수를 배치하고, 궁전의 정면은 이를 향하게 하며, 궁전 한가운데에는 네로의 황금 동상을 세우기로 했다. 회랑의 길이는 모두 1.5킬로미터이며, 로마의 첨단 건축 기술이 총동원된 본관은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었다. 방이 150개 들어서고, 그 중심에 있는 팔각형 홀의 10미터 높이 천장은 회전하면서 사람들의 머리 위에 꽃잎을 뿌리도록 설계했다. 본관 배후에는 동물들이 뛰어노는 초원과, 포도 같은 과실수를 비롯한 온갖 진귀한 식물이 자라는 식물원을 건설할 예정이었다. 비록 황제가 거처하는 궁전(도무스)이었지만 네로는 이곳에서 로마 시민들이 여유를 누리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울타리도 벽도 없앴다.
그러나 도무스 아우레아 건설이 실수였던 것은 그 용도가 아니라 시기였다. 대화재 직후 화려한 궁전을 짓는 데 주력하는 황제를 너그러이 받아줄 시민은 별로 없었다. 더욱이 황금 궁전이 들어설 자리는 대부분 전소한 지역과 맞붙어 있어서, 황제가 재건 작업을 빌미로 집을 부수고 궁전 터를 확보하려 한다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기 딱 좋았다.
이러한 우려는 네로가 자신의 궁전을 짓기 위해 일부러 불을 질렀다는 소문을 낳았다. 그리고 화재 당시 황제가 언덕 위의 별궁에서 리라 소리에 맞춰 호메로스의 작품 《일리아드》의 트로이 함락 장면을 읊었다는 구체적인 증언도 나왔다. 목마에 숨어 있던 그리스 군이 야밤에 트로이를 불바다로 만든 것처럼, 그리스 예술을 동경하는 네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시민들은 생각했다. 게다가 어머니까지 죽인 패륜아 이미지가 더해져 소문은 급속히 로마 전역에 번졌다.
로마 대화재를 다룬 영화 〈쿠오바디스〉(1912)
‘네로 황제가 로마를 불태우고 노래를 불렀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그 헛소문은 네로가 자초한 것이었다. 대화재 이후 전소된 지역 바로 옆에 화려한 ‘황금 궁전’ 건립을 추진한 것이 화근이었다. 물론 후대의 이야기꾼들에게는 그 헛소문이 훨씬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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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로는 황제로 즉위한 이래 처음으로 시민들의 반감을 피부로 느꼈다. 비록 패륜과 기행을 일삼았지만 황제 역할은 훌륭하게 수행했던 그였다. 잠재적 적국이었던 파르티아와 아르메니아 문제를 해결하여 로마의 평화를 한동안 보장했고, 올림픽과 검투사 경기를 자주 열어 시민들에게 오락거리도 충분히 제공했으며, 살육적인 검투사 경기를 없애고 시와 연극을 장려했다. 스스로 배우가 되어 시민들에게 즐거움을 주기까지 했다. 세금도 감면했으며, 심지어 노예가 부당한 주인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법률도 시행했다.
네로는 시민들이 자신을 존경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자신이 불을 질렀다는 소문이 돌다니? 당황한 네로는 이 소문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멘토 세네카는 이미 은퇴해 그의 곁에 없었다. 네로는 이번에도 암수를 썼다. 방화범이 기독교인이라고 누명을 씌운 것이다. 그는 왜 기독교인을 지목했을까?
범인은 기독교인이노라!
로마는 다신교를 믿는 사회여서 제국의 통치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지만 않는다면 각 지역 고유의 종교를 인정해주었다. 켈트, 유대 같은 여러 민족들은 로마의 신들이 아닌 자신들만의 신을 믿을 수 있었다. 티베리우스 황제 때 유대의 총독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를 처형한 것도 종교적 이유가 아닌 속주의 질서를 위한 방편이었다.
신 앞에 누구나 평등하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예수의 메시지는 피지배계층에게 매우 호소력이 있었다. 팔레스타인에서 탄생된 이 새로운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점점 많아졌고, 예수가 죽은 후 30여 년 만에 로마의 황제까지 그 이름을 알 정도로 팽창했다. 종교에 관용적인 태도를 보인 로마 통치자들이었지만, 평범한 로마인이 보기에 이들이 눈에 거슬린 것은 사실이었다. 다른 신들을 부정하고 자신들의 신을 믿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기독교인의 배타적 신앙관은 로마와 어울리지 않았다.
기독교인들의 일상생활도 로마인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로마인들에게 가장 인기가 높았던 곳은 극장, 경기장 등이었다. 신전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유피테르(제우스), 아폴로(아폴론), 미네르바 등 신들을 찬양하는 행사가 의례적으로 열렸다. 물론 로마인들이 그 신들을 기독교의 신처럼 전지전능한 존재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행사였다. 검소를 강조하는 그들이 볼 때 로마는 쾌락과 사치로 물든 곳이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그들끼리의 생활공간을 유지하며 따로 살았다.
신흥종교 대부분이 그렇듯 기독교에는 교리 외에도 이상해 보이는 구석이 많았다. 밤에 비밀리에 모여 예배를 하고, 노예와 여성도 존중하는 종교적 태도는 숱한 억측을 낳았다. 인육을 섭취한다는 소문이 가장 대표적이었다. “빵은 나의 몸이요, 포도주는 나의 피요.”라는 만찬 기도는 처음 듣는 사람들이 충분히 경악할 만했다. 세례는 “갓 태어난 아이의 온몸에 밀가루를 바른 뒤 신비한 입회의 상징으로 입교한 자의 칼에 맡긴다.”라는 왜곡된 소문으로 퍼졌다. 한밤중에 예배가 끝나면 “어둠 속에서 형제와 자매, 아들과 어머니 사이에 근친상간 난교가 이루어진다.”라는 소문은 제3자를 형제 자매라고 부르거나 가족끼리 평화의 입맞춤을 나누는 행위에서 나왔다. 기독교인에 대한 이러한 편견은 로마의 지식인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타키투스는 기독교인을 두고 “해롭기 짝이 없는 미신을 믿는 자들”이라고 비난했다.
로마에 들어온 기독교인들은 로마 시민들을 끊임없이 간섭했다. 마침 네로가 통치하던 시기에 베드로를 비롯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로마에서 왕성한 선교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눈에 띌 수밖에 없었고 회자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소수였고 외톨이였으며, 불행하게도 소문은 좋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그들이 집단으로 살고 있는 제12구가 화재 피해를 입지 않았다. 불이 났을 때 그들이 불렀던 찬송가는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기쁨의 노래로 들릴 수 있었다. 그렇게 네로는 “방탕하고 버림받은 비천한 무리를 발견했다.” 황제는 방화죄뿐만 아니라 확인되지 않은 소문에 근거하여 ‘인류 전체를 증오한 죄’로 기독교인들을 직접 고발했다.
황제의 고발장을 집행하기 위해 병사들은 제12구로 출격해 기독교인들을 차례차례 체포했다. 군사작전을 펼쳐 한꺼번에 일망타진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독실한 신자들은 30여 년 전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 부인한 전철을 밟지 않고자 자신의 신앙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신앙 형제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원래 로마에서는 혐의자를 심문할 때 고문하거나 채찍질할 수 없었다. 반역죄가 아닌 이상 사형 선고는 금지되며, 사형 선고를 내렸더라도 십자가형 형벌은 내릴 수 없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방화죄 외에 ‘인류를 증오한 죄’ 혐의까지 받은 데다, 그것도 황제가 직접 고발했으니 정상적인 사법절차는 무시되었다. 잇따른 고문으로 인해, 잡아당기면 나오는 고구마 덩굴처럼 숨어 있던 기독교인들이 차례차례 검거되었다.
한편 너무나 큰 재난을 당한 로마 시민들은 그것이 우연히 발생한 재앙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반드시 방화범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줄줄이 끌려가는 기독교인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반응은 매우 차가웠다. 안 좋은 소문의 주인공인 기독교인들은 그런 대재앙을 충분히 일으킬 만하다는 생각이 퍼졌고, 황제의 혐의는 흐려져갔다. 로마 시민이 자발적으로 기독교인을 고발하는 횟수도 많아졌다. 이렇듯 네로의 계획은 처음에는 성공적이었다.
네로는 한발 더 나아갔다. 사실 그는 향락과 쾌락을 즐기지만 피는 싫어했다. 그렇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기독교인들의 처형 장면을 로마 시민들에게 인상 깊은 구경거리로 제공하기 위해 많은 연출을 시도했다. 검투 경기가 열리는 경기장에서 처형이 실시되었는데, 방화범이자 인류 전체를 증오한 죄인들의 처형을 구경하기 위해 많은 로마 시민이 경기장에 운집했다. 물론 입장료는 받지 않았다. 로마가 처형 장면을 공개하는 경우는 많았지만, 100명이 넘는 사람을 로마 한복판에서 한꺼번에 처형하는 것은 평소에 볼 수 없는 구경거리였다.
이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당했는지 역사가들은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처형 장면은 상세하게 묘사했다. ‘범인’들은 결박된 후 짐승의 모피를 뒤집어쓴 채 경기장에 입장했다.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은 사납고 굶주린 개였다. 기독교인들은 물리고 찢겨 죽었다.
일부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 네로는 십자가에 박힌 사람들에게 초로 만든 옷을 입혔다. 그 이유는 밤이 돼서야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어두운 경기장을 밝히는 인간 등불이 되었다. 네로는 십자가에 매달린 이들이 산 채로 불타는 장면을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경기장에 전차를 이끌고 들어갔다.
대화재 방화범으로 몰려 화형당하는 기독교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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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잔혹한 처형 방식은 적어도 로마에서는 예전에 볼 수 없었다. 네로는 로마 시민들이 불타는 방화범을 보고 복수하는 쾌감을 느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대화재로 추락한 자신의 인기가 더 높아지고, 로마 재건에 박차를 가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렇지만 이런 장면을 목격한 로마인들은 타키투스의 표현에 의하면 “연민의 감정을 품기 시작했다.” 이어서 “그토록 잔혹한 운명을 내린 것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 한 사람의 잔인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임을 알았다.
로마 시민들은 그 잔혹함에 치를 떨었다. 더욱이 기독교인들은 죽어가면서도 찬송가를 불렀고, 화형당하면서도 살려달라고 몸부림치기는커녕 의연했다. 죽어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갈 것이라는 순교적 태도는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는 네로의 의도에 어긋난 것이었다. 다시 네로가 불을 질렀다는 소문이 돌았고, 수백 년이 지난 뒤에도 논쟁거리로 남았다. 기독교에서는 이 사건을 로마 황제가 저지른 최초의 박해로 규정했다. 그러나 그것은 방화죄를 전가하려는 속셈이지 종교적 탄압은 아니었다. 대화재 이후 네로가 기독교를 박해한 기록은 없다.
이때 처형당한 기독교인의 수는 얼마나 될까? 기독교 최고(最古)의 저작인 유세비우스의 《교회사》에서는 “네로의 비이성적 광기 때문에 수천 명이 죽었으며, 이때 바울이 로마에서 참수되고 베드로도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고 전해진다.”라고 기록했다. 출처는 불분명하지만 베드로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십자가에 매달릴 수 없으니 거꾸로 매달려 죽게 해달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교회사》가 최초 출판된 시기는 대화재가 일어난 지 한참 뒤인 312년으로, 대화재 당시 로마에 그렇게 많은 기독교인이 살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이 기록을 액면 그대로 믿기는 힘들다. 로마 외의 지역에 있는 기독교 공동체의 규모 등을 고려하여 현대의 연구자들이 계산한 결과, 당시 로마에는 기독교인이 3000여 명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여러 기록을 종합하면 그 10분의 1인 200~300명이 희생당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인용문
타키투스의 《연대기》에서
황제의 비참한 최후
대화재 이후 네로는 인기가 전보다 많이 떨어졌지만 여전히 지지자가 많았다. 그러나 소심한 황제는 떨어진 인기를 만회하려 했다. 예정되었던 제2회 로마 올림픽을 더욱 성대하게 개최했고, 노래 경연 대회에 자신도 참여하겠다고 선언했다. 나폴리에서의 박수갈채를 기억하는 황제는 우승할 자신이 있었다. 원로원은 황제의 권위가 실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미리 네로를 우승자로 결정해버렸다. 그러나 네로는 이를 거부하고, 다른 출전자들과 대등하게 겨루어 오로지 실력으로 월계관을 쓰겠다고 선언했다.
3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폼페이우스 극장은 황제의 참가 소식으로 만원을 이루었다. 황제로서의 모든 특권을 버리고 오직 실력으로 승부하겠다는 네로의 모습에 관객은 큰 박수를 보냈다. 성적은? 역사는 이를 제대로 기록하지 않았지만, ‘가수’ 네로는 “제멋에 겨운 풋내기” 또는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지만 성량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실력을 떠나 네로의 인기가 누구보다도 높았을 것이라는 짐작은 쉽게 할 수 있다. 28세의 네로는 이번 무대에 대단히 만족했다.
비록 평민이나 서민에게는 인기 있었지만 상류층에게 네로는 황제로서의 자질을 의심받기에 충분했다. 마침 로마 제전이 열리던 해에 황제 암살 음모가 발각되었다. 주동자는 귀족과 원로원 의원 20여 명이었다. “폐하를 증오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폐하가 황제답고 존경할 만한 분이었을 무렵에는 저희만큼 폐하에게 충성스런 부하도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폐하가 어머니를 죽이고 운동경기와 가수 노릇에 열중하고 심지어 방화까지 저지른 뒤로는 폐하에게 증오를 느꼈습니다.” 반란자들은 암살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놀랍게도 세네카도 연루되었는데 네로는 그래도 예를 갖추어 스승에게 자결을 명령했다.
65년에 네로에게 또 하나의 불행이 닥친다. 아내 포파이아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짧은 간격을 두고 스승과 아내를 잃은 네로는 극심한 외로움에 시달렸다. 극단적인 탐미적 취향은 더 심해졌고, 그럴수록 네로는 로마가 싫어졌다. 그는 평소 동경하던 그리스로 여행을 떠났다. 황제의 순시가 아니라, 노래하는 가수로서 예술의 본토에서 인정받고 싶은 불같은 욕망에 떠난 길이었다. 응원단을 데리고 가서 원래 올림피아 제전에는 없던 음악 경연 종목을 황제의 이름으로 추가하고, 이 종목에 출전하여 황금 월계관을 썼다. 이를 기념해 그리스 각지의 도시에 ‘자유 도시’의 특전을 주었다. 내정의 자치를 인정하고, 속주세를 면제해준 것이다. 한편 네로는 그리스에 머무는 동안 라인 강 8개 군단의 사령관 두 사람과 시리아 속주의 총독을 불렀다. 그리고 아무런 설명 없이 그 세 사람에게 자결을 명령했다. 암살 음모에 그들의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다.
네로는 1년 반 만에 귀국하여 개선식을 거행했다. 개선식은 전쟁에서 이긴 자만이 할 수 있었으나 그에게는 대신 음악 경연 대회의 우승이 있었다. 로마 시민에게 자신의 귀향을 알리면서 또 하나의 구경거리를 제공하고자 한 것이었다. 개선식 하이라이트는 황금 월계관 1808개를 받쳐 든 사람들의 행렬이었다. 이 진귀한 구경거리로 로마는 또 한 번 떠들썩했다. 네로는 개선식을 마치자마자 다시 나폴리로 갔는데, 갈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했다.
반란의 주인공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빈덱스라는 갈리아 속주의 총독이었다. 빈덱스는 “네로는 어머니를 죽이고 제국의 유능한 인재까지도 국가 반역죄로 죽였다. 게다가 가수로 분장하여 연주와 노래 실력을 뽐내고 있다. 로마 제국의 지도자로는 어울리지 않는 이런 인물은 한시라도 빨리 퇴위시켜야 한다.”라는 격문을 썼다. 휘하에 병사 10만 명이 삽시간에 운집했다. 빈덱스는 에스파냐 동북부 속주의 총독 갈바에게 서한을 보내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하지만 갈바가 답장을 하기도 전에 반란군은 로마 정규군에게 허망할 정도로 빠르게 진압되었고, 빈덱스는 자결했다. 비록 진압은 했지만 반란의 여파는 컸다. 네로에게는 더 이상 제국의 통치자 자격이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갈바는 빈덱스가 자결하자 “속주 총독은 황제가 아니라 원로원과 로마 시민에게 충성한다.”라고 선언했다. 이에 몇몇 총독들이 동조했다. 빈덱스와는 달리 갈바는 로마의 정통 귀족 출신이고, 휘하의 병력도 정예군이었다. 상황이 급변하자 네로는 더 이상 나폴리에 머물 수 없었다.
원로원은 갈바를 ‘국가의 적’으로 규정했다. 그런데 로마 시민들은 다른 사건으로 네로에게 화가 나 있었다. 그해 흉작으로 밀 값이 치솟자 시민들은 대화재 때 베풀었던 황제의 선정을 기대했다. 그러던 중 항구의 한 배에서 많은 양의 포대가 하적되었다. 그러나 시민들의 기대와 달리, 그 속은 밀이 아닌 네로의 경기장에 쓰일 모래로 가득 차 있었다. 분개한 시민들은 네로의 동상에 낙서를 하고 그를 조롱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원로원은 갈바와 비밀리에 연락을 취했고, 갈바는 병력을 이끌고 로마로 진격했다. 이윽고 1만 병력을 지휘하는 근위병 사령관도 네로 곁을 떠났다. 결정타는 원로원이었다. 그들이 이번에는 네로를 ‘국가의 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모든 일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시민과 원로원이 네로에게 등을 돌렸고 그를 지켜줄 군대도 없었다. 네로의 신변을 지켜준 사람은 하인 네 명이 전부였다. 네로는 로마에서 북쪽으로 6킬로미터 떨어진 해방노예의 집으로 긴급히 피신했지만, 그곳에서 “이로써 한 예술가가 죽는구나.”라는 말을 남기고 칼로 자신을 찔렀다.
네로의 죽음으로 도무스 아우레아도 완공되지 못했다. 인공 호수의 예정지에는 콜로세움이 들어서고, 네로의 황금상 머리는 태양신으로 교체되었다. 정원 자리에는 목욕탕이, 본관 자리에는 대목욕탕과 신전이 들어섰다. 그리스 전역의 자유 도시 지정도 폐지되었다.
기독교의 승리
대화재의 희생양이 되었지만, 그것은 오히려 기독교의 교세 확장에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방화범이라는 누명을 벗자 기독교인들은 로마 시민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잔인한 처형에서 비롯된 동정심으로 로마 시민들은 벽을 허물었다. 좋지 않은 소문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네로 황제 역시 대화재 이후로는 기독교인들에게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그 후 기독교는 몇몇 황제에게 박해를 받았지만, 306년 콘스탄티누스가 황제에 오름으로써 결국 박해는 끝이 났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는 서민 출신으로, 오래전부터 기독교인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아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다른 황제보다 훨씬 적었다. 서부 로마 제국의 패자에 오른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모든 로마인은 원하는 방식으로 종교 생활을 할 수 있다.”라는 밀라노 칙령을 313년에 발표했다. 형식적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을 뿐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친기독교 칙령이었다. 몰수했던 교회 재산을 돌려주고 황제의 사비를 털어 교회를 지었으며, 기독교 지도자들의 조언에 따라 노예 및 죄수 학대 금지법을 제정했다. 또한 황제는 예수를 신과 동일하게 간주하는 아타나시우스파의 주장을 정통으로, 신에 가까운 인간으로 보는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규정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인정한 배경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어렸을 때부터 기독교를 믿었거나, 분열된 로마의 통합을 위한 정치적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기독교인 수가 로마 제국 인구의 10분의 1을 차지했을 만큼 기독교의 영향력은 커져 있었다. 황제는 죽기 직전에 세례를 받아 공식적인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리고 380년에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언함으로써 로마 사회에서 다른 신들은 배척되었다. 이후 다신교적 다양성을 기반으로 한 로마의 종교관과 세계관은 근본적으로 붕괴되기 시작했고, 그 자리를 기독교가 대체했다.
로마의 국교가 되자 기독교는 점점 권위의 외피를 쓰기 시작했다. 황제가 교리와 교회의 내정에 간섭하면서 기독교 내의 자유는 이전보다 축소되었으며, 순교자적인 신앙심도 자취를 감추었다. 또한 헬라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다른 언어로 해석하는 것은 금지했다. 당시 라틴어를 쓰고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권력자나 학자 등 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에, 이는 많은 사람이 《성경》에서 멀어지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윽고 황제나 왕이 아닌 교황이 세속을 지배하는 시대가 도래하자, 기독교인은 그들의 선조가 맞았던 채찍을 자기 손에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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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가 57년에 보낸 로마서를 통해서 모든 로마의 성도가 읽고 각성을 했으리라 믿습니다. 신령한 영적인 은사를 바울이 나누어 줌으로써 당시의 성도는 힘을 내었습니다. 당시에 아직도 사복음서는 기록이 되지 않은 상태였고 성도들이 구전에 의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듣고 믿고 있었고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의 사역을 본 분들도 있었고 그리고 베드로 등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고 성령을 받고 예수님을 믿던 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복음을 전해서 믿는 이들이 늘게 되고 바울도 편지를 보내게 되고 베드로 사도 등도 로마로 갔고 바울 사도도 사도행전의 기록대로 로마에 도착해서 성도를 격려하고 가르치고 하다가 네로 황제의 박해를 받고 순교를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첫 박해를 잘 견디어 내었습니다. 로마서는 이렇게 현실의 핍박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오직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고 의롭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절대로 그 구원은 취소가 없게 되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되니 행위는 필요가 없고 구원받고 천국이 보장되며 행위는 다만 천국에 가서 받을 복을 결정할 뿐입니다.라고 당시의 그 칼과 피가 튀는 현장에서 사는 성도에게 베드로와 바울이 가르치고 이들이 행동하지 않고 뒤로 빼고, 성도들도 천국에 예수를 믿기만 하면 가는 것이 보장이 되는데 왜 순교를 하지 하고 모두가 도망을 갔을 것이고 또 살기 위해서 잠시 예수를 믿는 것을 부정했을 것입니다. 이 가르침은 온 개신교의 기둥이라는 가르침이고 현 한국의 목사 신학자 대부분이 믿고 가르치는 가르침인데 이 가르침으로 자본주의 물질의 우상과 죽도록 싸워야 하는 신도가 도리어 물질의 노예가 되어서 너도 나도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경제적으로 잘 살겠다고 가난한 이웃도 형제도 모두 외면하고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헌금하고 장로로 권사로 안수집사로 잘 살고 있으니 이들은 로마서 8장 이후 즉 성령의 인도로 교회에서 세상에서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내용을 기술한 로마서 9-16장의 말씀은 대부분 무시하고 지키지도 않고 살고 있고 이런 1000만의 신도의 행위로 세상과 교회는 분별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도리어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고 있으니 이런 현상이 되도록 가르친 목사와 신학자들은 자신들이 성도들에게 그렇게 가르친 책임을 절대로 벗어날 길이 없을 것입니다. 정신을 차려서 내 영혼이 천국에 가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가르침에서 천리 만리 떠나시고 오직 로마서에 있는 가르침대로 사랑하며 살고 정의롭게 사시기를 진실로 권합니다. 속히 회개하시고 사랑을 실천하고 정의롭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어느덧 인생의 황혼이 되신 모든 분들께 천국에 가는 길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잘못 믿고 잘못 산 죄를 회개하고 선한 길로 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보시기 바랍니다. 이 나라는 이제 소망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집값이 내리는 추세가 계속되는데 집을 가진 이도 하루하루 어려운 시대로 가고 있고 집이 없는 이도 역시 불안하기 마찬가지이나 이런 집을 가진 이들을 배려할 1%의 여유도 없습니다. 집이 없이 서럽게 50-60년을 산 사람은 집값이 쉬지 않고 떨어지길 너무나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이런 마음을 지닌 국민이 국민의 약 50%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정부는 모든 권위가 상실이 되었습니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정부와 대통령을 이제 밀어내려고 하고 온 매체가 그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번에 선거에서 진 정당이 다시 정권을 잡는다고 무슨 희망이 보입니까? 그리고 중국과 미국의 패권 다툼은 이제 어느 한 쪽이 망해야 끝이 날 것이기에 앞으로 더 무서운 국제 정세가 전개가 될 것입니다. 팬데믹으로 모든 세계인이 백신을 맞고 살고 있지만 미국과 유럽에서 그리고 온 세상에서 2차 대전으로 죽은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백신의 결과도 아직 검증이 되지 않았기에 살아남은 사람도 어찌 될지 모릅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이요, 그리고 온 세상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이런 위기를 인식하고 이런 위기에서 이길 말씀이 우리가 배우는 로마서의 하나님의 사랑과 그 사랑의 강도입니다. 우리가 믿을 곳은 오직 하나님이시고 우리 주가 되신 예수님이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인도와 하나님의 말씀의 올바른 이해와 실천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반드시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 놀라운 강도의 사랑을 체험하고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 안에 있어야 함을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반드시 이해를 해야 되고 우리는 예수 안에 있어야 합니다. 예수 안에 있어야 그 놀라운 강도의 사랑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가장 쉽게 예수 안에 있다는 말은 죄악에서 떨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도 죄를 짓고 어제도 죄를 짓고 있는 성도는 아무리 예수를 믿는다 해도 예수 안에 있다고 말을 하기 쉽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서운 죄로 인해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의로우시며 사랑이신 하나님과 인간은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뿐인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죄는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합니다. 죄에 합당한 벌이 있으니 그 삯은 피 흘림과 죽음입니다. 우리는 피를 흘리고 죽게 되었고 이미 죽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 모습이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린 우리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서 수고하며 서로 다투며 살다가 곧 죽는 것입니다. 모든 인류가 처한 불행한 모습이며 아무런 소망이 없는 모습이며 아무도 벗어날 수가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원수가 된 죄인인 저와 여러분 그리고 모든 인류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시기로 하셨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정의를 행하셔서 벌을 우리가 죄에 합당하게 받고 죽게 되었는데 그 벌을 그 죄의 대가를 독생자로 받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피를 흘리시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희생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시고 그리고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실히 증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고 역시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셔서 모진 고초를 견디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피를 흘리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런 사실을 믿고 예수님을 믿고 우리의 죄를 돌아보며 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세례를 통해서 우리는 죄를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습니다. 우리의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한 용서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 하나님께서 바로 벌을 하시며 죄에 합당한 다양한 고초나 불행이나 혹은 생명을 속히 버려야 하는 운명에 처했지만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우리의 죄를 간과하셨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역으로 위의 절차를 통해서 우리의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 벌을 하지 않으시고 용서를 하신 것이며 죄의 문제가 해결이 된 우리는 성령을 선물로 받아 거듭나게 되며 또한 의롭다 인정을 받게 되었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의 시민이며 영생을 누리게 된 새로운 창조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예수님께서 직접 피를 흘리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그리고 성령께서 선물로 오셔서 이렇게 죄를 용서받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물이 우리입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하니 이 삶을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과 동행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인도입니다. 이렇게 살면서 우리가 하는 일이 우리를 구원하신 분의 놀라우신 은덕을 찬양하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한 삶을 살고 예수님의 증인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일어나는 일이 율법이 완성이 되는 일이며 이렇게 사는 우리가 모여서 교회를 형성하고 이런 교회들이 모여서 이런 성도가 세상에 살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건설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나라는 에스겔서에 기록된 말씀과 같은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주안에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이런 의미를 다 포함하는 말입니다.
겔 11:19.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20.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겔 34:23.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24.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겔 36:24.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인도하여 내고 여러 민족 가운데에서 모아 데리고 고국 땅에 들어가서
25.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게 강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밖에 있으면즉 아직도 하나님의 놀라우신 인류에 대한 사랑을 거부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과 대속의 은혜를 거부하는 사람은 여전히 죄가 있기에 죽어 있는 상태이고 영생도 없고 거듭남도 없고 죄의 용서도 없고 의롭다 인정도 없는 그리고 성령도 없는 자신의 마음대로 자신의 믿음대로 사는 죄인에 불과하고 하고 예수 밖에 있으니 하나님의 강한 사랑도 역시 없습니다. 믿지 않는 이들이 이러한 처지에 놓였는데 만약에 우리가 예수를 믿고 위에서 언급한 놀라운 축복을 받고 새롭게 창조가 된 하나님의 작품이 되었는데 이를 망각하고 과거와 같이 믿지 않는 이와 같이 늘 죄를 짓고 산다면 절대로 예수 안에 있다고 말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정의롭고 사랑이시고 그리고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신데 그분 안에는 죄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거룩하신 예수님 안에 죄가 함께 거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해서 죄가 없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죄는 여전히 하나님과 관계를 단절시키고 있는데 모든 환란이나 모든 고초나 모든 피조물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 낼 수는 없지만 죄를 스스로 쉬지 않고 짓는 예수님 밖에 있는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에 대해선 우리는 깊이 생각을 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고 또 죄를 지을 수가 있지만 늘 회개해서 하나님의 용서를 또 받아야 하는데 그런데 정도가 지나쳐서 죄를 늘 믿지 않는 사람과 같이 짓고 산다면 우리는 이런 사람이 거룩하신 예수님 안에 있다고 어떻게 말을 할 수가 있습니까? 혹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가 용서를 받았다고 주장을 하는 분도 있습니다. 우리가 매우 잘 아는 목사님께서 그렇게 주장을 하십니다. 그렇다면 아래의 에스겔서의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이해를 하십니까 하고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겔 33:12. 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이르기를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공의가 구원하지 못할 것이요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는 날에는 그 악이 그를 엎드러뜨리지 못할 것인즉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의로 말미암아 살지 못하리라
13. 가령 내가 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살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그 공의를 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지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곧 그 안에서 죽으리라
환란과 핍박 그리고 유혹이 우리를 넘어뜨리려 옵니다. 예수 안에 있다는 표현은 여전히 그런 환경 속에서 믿음을 지키며 예수님과 동행하며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는 것이고 그렇게 살면 죽을 수도 있고 또 고문을 받을 수도 있고 모든 재산을 다 빼앗길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일들이 절대로 우리가 예수 안에 있으니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스스로 죄에 빠지고 유혹에 빠지고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길에서 멀어지면 그런 분들을 예수 안에 있는 분이라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를 깊이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부활을 하셨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예수님과 함께 세례를 통해서 죽었으므로 틀림없이 우리가 믿음을 지키며 살면 우리도 죽은 후에 부활할 것이 분명합니다. 죽음 이후에 부활이 보장이 되어 있습니다. 죽음이 우리를 하나님과 갈라 놓을 수가 없습니다. 또 우리가 견디기 힘이 드는 육체적인 고문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기 때문에 오는 고난입니다. 이 고난도 넉넉하게 이기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고난이 올 때 무서워하며 피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함께 하실 것을 굳게 믿고 이 고난도 이겨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다양한 마귀의 유혹이 있고 또 고초가 있고 낭패가 있고 또 실패가 있고 왕따가 있고 그리고 견디기 어려운 조롱과 멸시와 천대가 있을 수가 있지만 절대로 이런 환란이 주님을 믿고 견디는 우리를 하나님과 멀어지게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그냥 네 마음대로 네가 지켜야 하는 국가의 법대로 살아라 하고 내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시고 우리를 복음의 열매를 맺게 하시고 우리를 악에서 건져서 승리하게 하십니다. 그 사랑이 우리가 예수 안에 있기만 하면 이 세상 그 무엇도 우리를 넘어지지 않게 할 만큼 강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강력한 하나님의 사랑을 꼭 믿고 절대로 예수 안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늘 받고 예수님과 늘 동행을 하고 그리고 성경의 말씀을 잘 배워서 말씀 안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늘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우리의 욕망과 세상의 자랑에 목을 매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는 성령을 선물로 받고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하셨습니다. 구원을 받은 백성을 천국에 갈 때까지 그냥 두시지 않으시고 늘 함께 예수님께서 하시고 그리고 성령께서 감화와 감동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배운 바와 같이 이 세상 무엇도 끊을 수가 없는 강력한 하나님의 사랑이 또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우리가 늘 예수 안에 있어야만 합니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서 있습니까? 죄악의 길에 있으면 속히 예수님께로 예수님 안으로 즉 죄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내가 죄악 중에 있는지 혹은 주안에 있는지 분별이 되지 않으시면 주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어 보시면 바로 분별이 됩니다. 그리고 특별히 무엇이 죄인지 규정한 율법을 읽으시면 바로 나의 행동에 대해서 죄인지 아닌지 분별이 됩니다. 율법이 죄를 밝혀 준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가장 좋고 멋있는 길은 일생을 예수님을 믿고 성령의 인도대로 사는 것일 것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신앙의 모습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죄를 짓게 되면 속히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받고 관계를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와 같이 회개하고 그리고 죄 중에 있는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울 사도와 같이 우리는 용기를 내어서 건져 내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사랑의 가장 큰 행위요 그리고 성령께서 어제나 오늘이나 인도하시기를 좋아하시는 영혼의 구원의 길 즉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잘 살고 하는 것들은 중요한 일이 아니라 했고 걱정도 말라고 했으니 오늘도 부지런히 예수님을 전하는 일일 해야 될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로마서 10장 전체가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주님과 함께 착한 일을 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정의롭게 살아야 할 것인데 이에 대해서 로마서 12-16장으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신칭의 하나로 모든 것이 끝이 나는 것이 절대로 아님을 아시게 되었으리라 믿습니다. 이제 9-12장에 있는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모습에 대해서 잘 배우고 그렇게 살아야만 되는데 성령께서 힘을 주시고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고 그렇게 사는 우리에게 천국에서 영생의 기쁨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 이렇게 살고자 하는 바울에게 닥친 곤고와 이를 성령의 인도로 극복하는 승리의 비결과 그리고 모든 것이 부르신 이에게 합력해서 선을 이루는 모습과 그리고 교회 안에서 그리고 세상에서 어떻게 우리가 살아야 하는지를 로마서 후반부 즉 실천에 대해서 설명하는 9-16장의 말씀을 함께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사랑도 무엇인지 조금도 몰랐고 그리고 사랑을 1%도 실천하지 못했던 완벽한 죄인이 저였습니다. 그리고도 스스로 죄가 없고 의롭다 생각하며 멋대로 살았던 흉악한 죄인이 저였습니다. 이런 저에게 전도자의 전도를 통해서 성경이 오게 되었고 이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저의 모습을 거울과 같이 보게 하시고 죄인임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고린도 전서 13장 사랑의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살고자 몸부림쳤습니다. 과거의 저의 모든 모습을 다 버리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렇게 5년을 산 뒤 1991년 5월 19일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김해 장유 반석교회 성경석 목사님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 봄에 신림동 선민 교회에서 박기수 원로 목사님께서 설교하실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입에서 빨간색의 불을 제 가슴에 뿜어 주셨습니다. 제 가슴에 작은 촛불과 같은 불꽃이 몇 개가 일었습니다. 그리고 손에서 땀이 나고 믿는 이가 아프면 그 사람에게 손을 대면 나으리라는 믿음도 함께 왔습니다. 다양한 기적이 있고 행정고시 1차에 붙어서 2차 준비로 여념이 없던 제게 목사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을 잊고 3일 동안 천국에 있는 것과 같았습니다. 이런 일이 어떤 일이고 그 의미도 알 수가 없었지만 굉장히 좋은 일이 제게 일어난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리고 행시 2차에서 1점 차 낙방하고 목사가 되기로 마음먹고 세상에서 삶이 시작이 되었는데 모든 일이 실패로 끝이 났습니다. 그렇지만 전도는 늘 쉬지 않고 했고 아프신 분들을 다양하게 주님께서 고쳐 주셨습니다. 방언이 어떤 경우엔 통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쉬지 않고 주님께서 제게 위로하셨습니다. 힘을 내라 늘 쉬지 않고 말씀하셨고 또 사랑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고 정리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전도와 성경을 읽고 정리하는 일 외에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고 모든 일이 실패했습니다. 청춘을 바친 고시 실패에 이어서 결혼도 실패로 끝이 났고 세상에서 먹고살고자 하는 모든 일이 잘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은행에서 83년도에 나온 이후 약 40년을 한국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으로 늘 쪼들리며 살았습니다. 그렇게 극빈한 삶을 대학원을 두 곳이나 나온 사람이 살면서 이 세상의 불의를 너무나 생생하게 경험적으로 보았습니다. 제 마음에 의에 대한 굶주림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율법을 보았을 때 완벽하게 의로운 법을 보면서 새 소망이 생겼습니다. 이런 가난과 고난의 시간이 없었다면 절대로 죽어도 볼 수가 없는 불의에 대해서 깨닫게 되고 이 불의는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을 믿고 우리가 신자가 되고 그리고 성령을 선물로 받아서 성령의 인도로 율법을 완성하는 삶을 살 때 비로소 의로운 세상을 만들 수가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로서 의와 평강과 희락의 나라가 됨을 보았습니다. 바닷가에 어부의 아들로 태어난 무지 몽매한 죄인을 이렇게 인도하신 사랑의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을 찬양합니다. 흉악한 죄인을 피를 흘리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구원하신 우리 주 예수님의 은혜를 영원토록 찬양합니다. 그리고 늘 함께 하시며 쉬지 않게 기도하게 하시고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감화와 감동과 인도하심을 찬양합니다.
평범한 한 인간을 구원 하사 로마서를 이해하게 하시고 온 세상에 전하게 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리고 놀라우신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감동이 오천만의 로마서를 방문하시며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께 영원토록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을 증거하고 서로 사랑합시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