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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제 1부 제 3장 쇠퇴하는 신비신학 ㅣ 하느님을 어떻게 체험하고 계십니까
무심.보조.고문단(SG)추천 0조회 22324.05.29 09:51댓글 9북마크기능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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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범식 신부의
6.[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절망의 순간 내 손 잡아 주신 분, 가슴으로 느끼는 주님 사랑
지도사제 18.04.23 10:01
[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절망의 순간 내 손 잡아 주신 분, 가슴으로 느끼는 주님 사랑
일상 속에서 하느님 사랑 구체적으로 느끼고 맛봐야
기도는 ‘지식’ 아닌 생생한 느낌… 은혜 증거하는 방법
발행일2017-02-12 [제3031호, 16면]
찬미 예수님.
지난 주에 우리는 일상 안에서의 체험들을 통해
하느님을 느끼고 알아듣는 부분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이 체험에 대해서 조금 더 말씀드리려고 하는데요,
우리 신앙 생활, 영성 생활에 있어서 체험이 차지하는 비중이 굉장히 크기 때문입니다.
쉬운 예를 들어볼까요?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라는 말씀 다 아시죠?
성경의 장·절까지는 모른다 치더라도 천주교 신자로서
이 말씀을 모르는 분은 안 계실 겁니다.
혹시 이 말씀에 동의를 못 하겠다거나 반대하시는 분 계신가요?
이런 분도 아마 안 계실 겁니다.
신자라면 누구나 다 쉽게 동의하고 또 자주 되뇌는 말씀이죠.
그런데, 만일 누군가가 “좋습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은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하느님이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으세요?” 라고 물어본다면
그땐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라는 말은 수도 없이 들어왔지만,
막상 “사랑이신 하느님이 나랑 무슨 상관이 있지?” 라고 묻게 되면
그때부터 우리 머릿속은 복잡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찾게 되는 것이 바로 체험입니다.
즉,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을 머리로 알고 있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하느님을 내 삶 안에서 구체적으로 체험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일상 안에서,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맛보는
체험이 없다면, ‘하느님은 사랑’이시라고 아무리 매일 같이 말하더라도
그 말은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하나의 지식으로만 남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 신앙 생활에 체험의 요소가 필요하다는 것은
신학적으로도 인정되는 부분입니다.
현대 영성신학자인 샤를 앙드레 베르나르 신부는 영성신학이라는 학문을
“계시 원리에 입각하여 그리스도인의 영적 체험을 연구하고
그 점진적 발전을 기술하며 그 체험의 구조와 법칙들을 파악하고자 하는
신학의 한 분과”라고 정의합니다.
결국 영성신학이라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우리들의 체험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말입니다. 다른 영성신학자들의 정의도 크게 다르지 않죠.
영성신학뿐만 아니라 영성이라는 것 자체가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체험이 없다면, 영성 생활, 영성신학이라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하느님 체험에 있어서 좋은 예를 보여주는 글이 하나 있습니다.
이미 읽어보신 분도 계시겠지만,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참 고마운 글이라는 생각에
이 지면을 빌어서도 다시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이 글은 지난 2015년 9월 20일자 서울대교구 주보
‘말씀에 이삭’ 난에 실렸던 김석환(요셉)님의 글입니다.
“무비(無比). 이것은 13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법명이었습니다.
예 맞습니다. 아버지는 평생 불교 신자셨죠. 홀로 아이 셋을 키우시느라 고생도 많으셨습니다.
그러던 아버지께서 어느 날 뇌졸중으로 쓰러지셨습니다.
집에 뇌혈관 질환 환자가 있는 집이라면 아시겠지만, 뇌졸중은 참으로 잔인한 병입니다.
한 사람의 인간적 존엄을 지키기 힘들게 할 뿐만 아니라, 한 가정의 존립마저 위태롭게 하는 병이죠.
아버지께서 쓰러지셨을 당시, 아버지 곁에는 고시 준비생인 저와 100만 원에 10만 원짜리
사글셋방이 전부였습니다. 몇 년간의 병 시중 끝에 남은 것은 더 심각해진 후유증과 많은 빚뿐이었습니다.
사법시험이란 꿈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어서 복지단체를 찾아봤습니다. 요양원은 꿈도 못 꿀 처지였으니까요.
평생을 불교 신자로 살아오셨던 터라, 그때 처음 불교계에서 운영하는 복지단체를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어서 각 종파 종단에 모두 문의해 봤지만,
불교계에서는 그런 복지단체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중략)
그런데요, 정반대로 개신교 단체에서 운영하는 복지단체는 정말이지 손닿는 곳마다 있었습니다.
극도로 곤궁하고 힘들었기에 그곳의 문을 두드렸는데, 가는 곳마다 한결같이 두 가지를 요구하더군요.
아버지의 종교를 바꿀 것과 담배를 끊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우리가 이 사업을 하는 이유는 전도이기 때문에 개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시더군요. 한참을 생각하시던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저도 차마 개종을 말씀드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함께 굶어 죽더라도 그냥 이대로 살아요.’ 하면서 포기하려던 찰나,
동네 아는 아주머니께서 수원 경로수녀회를 알려주셨습니다.
이미 몇 개월간의 경험으로 마음에 상처를 입을 대로 입은 상태였기 때문에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매우 냉소적인 마음으로 찾아갔습니다.
나이 지긋하신 수녀님께서 저희를 맞아주셨습니다.
대략 사정설명을 들으시더니 인자한 미소를 띠며 딱 한마디 하시더군요.
“오세요.”
저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수녀님 저희 아버지께서 불교신자….”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마디 더 하시더군요.
“오세요.”
다시 저는, “수녀님 저희 아버지께서 담배를 피우….” 다시 한마디 하셨습니다.
“그냥… 오세요.”
저와 아버지는 원장 수녀님의 세 번의 “오세요”를 듣고 그 자리에서 무너져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느꼈던 한없는 포용이 하느님의 마음이라고 전 지금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친절한 말 한마디가 순교보다 위대하다’는 데레사 수녀님의 말씀을 가슴 깊이 느낍니다.
그리고 그 큰 은혜로움을 증거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어떠세요? 어떤 마음의 울림이 있으십니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저도 이 글을 다른 분들께 읽어드리는데, 아무리 여러 번을 읽어도
글 마지막에 수녀님께서 “오세요”라고 말씀하시는 부분을 읽을 때면 늘 목이 메곤 합니다.
아마 우리 신자분들께서도 그러셨을 겁니다.
그런데, 이 일을 글로만 읽는 우리들 마음도 이러한데
직접 이 일을 경험하신 이 분은 어떠셨을까요?
하느님의 사랑, 용서, 조건 없는 받아들임!
머리로만 알고 있던 이런 것들을 이 분은 직접 자신의 삶 안에서
체험할 수 있으셨을 것입니다.
당시 처해 있던 상황 안에서, 원장 수녀님의 눈빛과 태도 그리고 응답을 통해서
직접 겪은 체험이죠.
나 자신과는 별 상관이 없는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의 그 하느님이 아니라,
내 옆에 계시면서 ‘나’를 사랑하시는, 다른 누구의 하느님이 아닌
‘나의 하느님’에 대한 생생한 체험인 것입니다.
이런 체험을 예수님께서도 당신 제자들에게 요구하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 8,29).
누구나가 다 이야기하는 그런 하느님 말고,
여러분 각자의 하느님은 어떤 하느님이십니까?
그 하느님을 어떻게 체험하고 계십니까?
민범식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서품을 받았으며
로마 그레고리오대학에서 영성신학 박사와 심리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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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맡김 영성 ■
내맡김의 영성은 "새로운 영성"이 아닙니다.
지도사제 10.08.21 17:16
참으로 영성은,
"우리를 내신 하느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인정하여 받들고,
그분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겨 드리고,
그분만을 사랑하며,
그분과 뜨거운 사랑을 서로 나누며 사는 것"
그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님을 널리 가르쳐 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영성신학"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학문이 되어야지,
"하느님을 가르치는 학문의 가르침"이 오히려 "하느님에 대한 앎"을
방해하고 어렵게 해서는 절대로 아니 됨을
이 기회에 하느님을 가르치는 많은 교사들께 정말 크게 강조 하고 싶습니다.
영성을 가르치는 교사가 "영성을 사는 것"이 곧 "가르침"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교사가 사는 삶이 곧 "神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배우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더 알고 배우려 신학교나 신학원을 찾는 분들이 적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을 더 알고 배우기 위해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야
하느님을 더 알게 되고 배울 수 있는 하느님이라면,
그런 하느님은 믿을 필요가 없는 하느님입니다.
공부해야 알 수 있는 그런 하느님은 이미 하느님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지식"의 하느님이 아니시고 분명 "사랑"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결코 인간의 "대가리"로 얻을 수 있는 하느님이 절대 아닙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뜨거운 가슴"으로 느껴야 얻어지는 그런 하느님이십니다.
사람이 사람을 뜨겁게 사랑하듯이 하느님을 뜨겁게 사랑할 때 얻어지는 하느님이십니다.
적어도 저의 경우는 그렇습니다.
제가 유아세례 후 오십여 년을 살아오면서 얻은
지금까지 최후의 하느님에 대한 신앙의 결론입니다.
당신의 결론은 어떠하시다고요?
당신의 그 결론으로 하느님을 얻으셨으면 그 결론을 대중께 알려 드려야 합니다.
물론 저에게도 알려 주시고요.
당신이 얻으신 하느님을 가르치는 것이
바로 "靈性神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제 지론입니다.
제가 얻게 된 하느님!
하느님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내맡김"입니다.
저는 "내맡김"을 했고 "내맡김의 삶"을 살기에
"내맡김의 영성"을 떠들고 있는 것입니다.
"내맡김의 영성"은 절대로 "새로운 영성"이 아닙니다.
제가 만들어 낸 영성도 아니요, 어디서 만들어진 영성을 각색한 영성도 아니요,
내맡김의 영성은 "모든 영성의 원조"입니다.
무심.보조.고문단(SG)작성자 10:00 새글
첫댓글
아빠아버지, 아버지의 사랑에서 나오는 성령의 선물로 주어진
거룩한 내맡김의 삶으로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를 살게 해 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 그러나 애석하게도, 학교에서 열심히 가르치던 토마스의 후계자들은
공동본성, 그리고 사랑에서 나오며 성령의 선물로 주어지는 지식에
관한 스승의 가르침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
아멘, 아멘!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민범식 신부님은
< 거룩한 내맡김 영성 >에 어떠한 하자도 없음을 증명해 주신 분이십니다.
[ 무심.보조.고문단(SG) 22.12.08 18:55
지난 17년 11월 9일(목) 서울대교구 교구청 단체사목부를 첫 방문하여
< 끊임없는 기도모임 > 단체 승인에 대해 나누었던 기억이 참 새롭게 떠오릅니다.
그때 담당 신부님과 담당 직원께서 몹시 난처해 하시며
'이런 경우'가 처음이어서 이에 해당하는 안내가 없다고 함께 마련해 보자고 하셨었어요.
이런 경우란,
on-line 다음 카페 <마리아처럼>이 설립(2009년 12월)된 후
전국에 흩어져 있는 회원들의 뜨거운 요청에 의해
<끊임없는 기도모임> 이라는 단체가 만들어진 경우를 말하는 것이었답니다.
기존 단체들의 경우는 통상, 단체가 먼저 설립된 후 필요에 의해
on-line 카페나 블로그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슈가 된 이유는, 우리의 경우
전국 거의 모든 교구를 망라한 신자들의 모임이 주가 되는 단체인지라
'속지주의'에 기반한 감시관리 차원에서 어려움이 있고
더군다나 이런 예가 없어 교구 내에 메뉴얼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담당하신 직원분이 "앞으로는 우리 교회도 분명 이렇게 나아갈 겁니다.
그런데 지금은 선례가 없어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셨었는데요.
결국 18년 1월, < on-line 마리아처럼 >과
< off-line 끊임없는 기도모임 >을 분리해서 활동할 것을 요청하며,
서울대교구 평신도 (사립)단체 인준심사위원회에서
단체승인 '보류'를 결정하였습니다.
이에 교회의 모든 지시에 순명하여 저희는 < 끊임없는 기도모임 > 단체에
합당한 '끊기모 카페'를 개설(18년 4월)하였고, 18년 8월 '예비승인' 결정을 받았습니다.
<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민범식 신부를 통해
"거룩한 내맡김 영성"에 어떠한 하자도 없음이 증명되었습니다.
▲정식으로 '예비승인' 받았으므로
1.서울주보 홍보 가능합니다.
2.가톨릭 회관 모임 가능합니다.
3.담당지도 신부님 전국구 강의 가능합니다. >(단체인준 심사위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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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가 다 이야기하는 그런 하느님 말고,
여러분 각자의 하느님은 어떤 하느님이십니까?
그 하느님을 어떻게 체험하고 계십니까? >(민범식 신부님)
이 질문에, 이제는 뜨거운 마음으로 진심 다해 답할 수 있는
아버지의 참 자녀 되었음이 너무나도 감사하고 기쁩니다.
누가 뭐라 해도, 부족한 저희 < 내맡긴 영혼 >들이
아버지 체험의 살아있는 증인들입니다.
아버지께서 변화 시켜 주신 부족한 저희 내맡긴 영혼들의 삶이
오늘도 이 땅 위에 이렇게 살아 움직이는데 이 이상 더 무엇이 필요할까요.
거룩하신 아버지,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이끌어 주시는 사랑하는 아빠아버지!
부족한 저희들이 정말 원하는 것은 이것 하나뿐입니다.
부족한 저희 모두가 죽도록, 죽기까지 아버지만을 뜨겁게 뜨겁게 사랑하게 하소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 지도사제 2018.07.26
주님께 한번 내맡기면 끝이에요.
제가 전하는 내맡김의 영성이 하느님에 대한 신앙의 시작이에요.
아브라함의 신앙이 내맡김이에요.
성모님도 그렇고 예수님도 그렇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마지막 하신 말씀,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께 맡깁니다.'
내맡기는 것 밖에 없어요.
내맡기면 모든 것이 만사 형통이에요.
내맡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냐!
오늘 복음 환호성,
'아버지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나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 귀가 열려 가지고, 그냥 알아듣고, 그냥 따라서 하면,
천국이 열리는 것, 탄탄대로~~~에요.
탄탄대로가 뭔지 아세요?
하느님뜻대로! 大路! 에요.
하느님뜻대로 살면
내맡기기 까지 좁은문이고 그걸 지나면, 일사천리에요.
점점 영적으로 부자가 돼요.
하느님밖에 없어요.
수도자 사제보다 더 영적으로 뛰어난 삶을 살고 있다는 것!
내맡김 영성을 판단해 주신, 신학교 영성신학교수님이신,
민범식 신부님이 처음으로 내맡김 영성을 인정해 주셨어요.
하느님 사랑하는 사람들은 알아들어요.
빨려 들어 가지고, 완전히 자빠졌대요.
그 글이 완전히 자기 것이 되는 거죠.
철부지들이에요.
오늘 복음처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왜 많은 의인과 예언자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였다는 거에요?
철부지가 못되고, 자기 머리로 판단하려고 했기 때문에...
자기 모든 것을 하느님께 내맡기면,
자기 생각과 경험들을 바꾸어 주셔요.
완전히 바뀌어 주세요.
과거의 생각들을 유용하게 변형 시켜 가지고, 선으로 이끌어 주셔요.
철부지가 하느님 나라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된다는 거에요.
눈과 귀를 열어 달라고,
주님께 청원하는 기도가 바로 화살기도예요.
끝없이 다른 것 생각하지 말고,
하느님만 갈망하고 찾는 마음으로 화살기도를 해보세요.
언젠가 눈을 열어주시고 귀를 열어주세요.
아~저 신부가 하는 이야기가 그것이구나!
그때부터는 성경 공부 안 해도, 어려운 신학 서적도 다 눈에 들어와요.
무릎 치는 것이 갈수록 끝이 없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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