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사물의 생성원리(生成原理)
3.자연(自然)과 인간(人間)
자연은 무엇이고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은 어떤 존재이며 자연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확실하게 인식하는 문제는 인간과 자연의 공존이라는 면에서뿐만 아니라 각개인의 인생이나 인류문명의 미래를 위해 매우 중요한 일이다. 자화론(自化論)에서의 자연이란 조화원(造化元)의 원계(元計)가 자화요건(自化要件)의 성숙에 따라 스스로 체화(體化)한 화체(化體)라 정의한다. 즉, 자연(自然)은글자가 뜻하는 그대로 스스로 그렇게 된 존재들의 집합체를 말하는 것으로, 그 화체들이 모여 있는 곳을 크게는 우주라 하고, 작게는 지구라 하며, 아주 좁은 의미로는 생명체들이 살고 있는 천연의 터전을 자연이라 한다. 거의 2천년 동안 서양의 우주관(宇宙觀)을 지배했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천하(天下)의 자연계는 물.불.공기.흙의 네 가지 원소로 이뤄진 불완전한 세상이고, 천상(天上)의 완전한 세계는 에테르(Ether)라고 하는 제5원소로 이뤄졌다고 믿었다. 그러나 태양계 최초의 고체물질로 이루어진 콘드라이트(Chondrite), 소행성에서 일어난 화산 폭발로 형성된 화산암인 유크라이트(Eucrite), 소행성 핵과 맨틀의 경계에서 만들어진 팔라사이트(Pallasites)등 여러 종류의 운석(隕石, Meteorite)을 분석한 결과 원소 면에서 우주전체가 공통된 원소로 만들어 졌음을 확인하여 천상과 천하의 구분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1백 년도 채 안 된다고 한다. 인간을 포함한 자연의 모든 존재 간의 관계는, 서로 형상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각기 존재 이유가 다르지만 태생적 인연 면에서는 모두가 근원이 같기에 동근일체(同根一體)이며 다같이 조화원의 기운인 원기(元氣)가 내재(內在)하였으므로 동기일신(同氣一身)이다. 인간이 상상할 수조차 없는 가장 큰 단위인 우주도 따지고 보면 결국 하나다. 그 안에 품고 있는 생물과 무생물, 유정물(有情物)고 무정물(無情物),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그 모두가 생성의 원천이 같고 부분과 전체가 유기적으로 순환하며 다른 형상, 다른 형체가 되어도 결국 본질은 하나다. 그러나 인간들은 자연속에 살면서도 자연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이는 자신과 자연을 분리시키면서 그 관계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 아만(我慢)때문이다. 하지만 자연에 제대로 눈을 뜨게 되면 나와 남, 그리고 세상과 우주가 하나라는 것을 절로 깨닫게 될 것이다.
자연의 모든 사물은 그것이 규모가 엄청나게 큰 존재든 아주 보잘것없이 작은 존재든 모두가 조화원(造化元)의 원능(元能)에 의해 생성되고, 변화하고, 존속하고, 그리고 소멸한다. 인간이 계획한 아주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의 성사(成事)는 인간의 능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조화원(造化元)의 원능에 상합(相合)하면 이루어지지만 원능에 상충(相沖)하는 것이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뿐아니라 현재 온전하게 존재하고 있는 사물도 조화원의 기운인 원기(元氣)의 세계에서 이탈하게 되면 그 순간 중단되고, 변형되고, 실패하고, 파괴되고, 소멸하게 된다. 그러므로 세상에는 원능에 의해 높고 낮음이 있고 크고 작음이 있으며 멀고 가까움이 있는 가운데 물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고 또 흘러 급기야 큰 강과 바다를 이루는 이소성대(以小成大)의 교훈이 있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종(種)이 혼재(混在)하여 먹이사슬을 형성하는 가운데 희생의 제물이 되면서도 서로 조화를 이루고 공존하면서 살아 가고 있다. 자연은 서로 질서를 지키면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쉼 없이 변화하고 성장하고 있다. 단 몇 분이라도 그 자연의 질서가 무너졌다고 상상해 보자. 아마도 세상은 순식간에 아수라장(阿修羅場)이 되고 말 것이다. 1978년 영국의 과학자 제임스 러브록이 「지구상의 생명을 보는 새로운 관점」이라는 저서를 통해 주장한 가이아 이론(Gaia theory)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살아가는 생활권이 마치 하나의 유기체(有機體)처럼 작동하며 스스로 지구환경을 변화시켜 생물이 살기에 적합한 환경을 유지해 나간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의 핵심은 지구는 단순한 평형상태(平衡狀態)가 아니라 이러한 항상성(恒常性)을 위해 수많은 되먹임(Feedback)고리가 있다는 것이다. 즉 지구에 생명이 탄생한 이래 유입된 태양에너지는 25%정도가증가했지만 전 지구적인 표면온도는 일정하게 유지되었다. 또한 지구의 대기는 약 79%의 질소, 20.7%의 산소, 0.03%의 이산화탄소 등의 비율로 비교적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다. 바다의 염도 또한3.4%로 일정하다. 지구상의 생물의 존재를 배제하고 단순히 화학적으로만 본다면 이러한 상태들은 안정이 유지될만한이유가 없다. 그러나 지구에서는 생물이 호흡과 광합성을 통해 산소와 이산화탄소를 순환시키고, 공기의 질소를 고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또 화산활동은 이산화탄소를 대기 중으로 방출하고, 비와 강물은 이산화탄소를 녹여 석회석이나 조개류의 껍질 등을 통해 탄산칼슘 형태로 고정시킨다. 이러한 작용들은 서로가 되먹임고리를 통해긴밀하게 연결되어 자가조절능력을 보인다. 이산화탄소가 증가하여온실효과로 지구에 축적되는 열이 증가한다면 이산화탄소를 소모하는 생물들이 늘어 나서 대기의 이산화탄소 농도를 낮추고, 반대로 이산화탄소가 감소하여 기온이 떨어지면 이를 소모하는 생물이 줄면서 다시 농도가 올라간다는 이 원리가 원능(元能)에 의한 자화(自化)의 본질인 것이다.
자연은 평화롭고 사랑이 가득한 곳인가, 아니면 처절하고 잔혹한 곳인가? 이 문제는 보는 관점에 따라 평온한 곳이기도 하고 잔악한 곳이기도 하다. 황조롱이 한 마리가 풀숲에서 제 새끼들을 먹여 살리겠다고 열심히 먹이 활동을 하고 있는 들쥐를 그 억센 발톱으로 움켜 채서는 제 새끼들이 기다리는 둥지를 향해 나무숲으로 날아가 버린다. 그뿐인가, 갓 태어난 짐승의 연약한 새끼나 약하고 순한 짐승만을 골라 물어 죽이고, 숨이 채 멎기도 전에 산채로 살점을 뜯어먹는 포식자들은 저주스런 악(惡)의 표상이다. 털이 있는 벌레를 이르는 모충(毛蟲)은 식물의 잎을 갉아 먹고 산다. 식물은 먹힘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갉힌 상처에서 화학물질을 분비하여 냄새를 풍기므로 해서 근처에 있는 말벌에게 모충의 존재를 알리게 된다. 말벌은 겹눈이므로 물체를 자세히 식별하는 능력이 홑눈의 동물에 비해 훨씬 뒤떨어지므로 식물의 신호가 없으면 번식을 위해 필요로 하는 모충을 찾을 수가 없다. 말벌은 그 식물의 원한과 복수에 찬 저주에 힘입어 모충을 찾아내고 그의 몸체에 알을 낳아 자기의 종족을 보존할 수 있게 되는 반면 모충은 그로 인하여 죽게 되므로 결과적으로는 식물은 보호를 받게 되는 셈이다. 이렇듯 살기 위해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은 다른 생명을 위해 나를 내어 주는 거룩한 희생인가, 아니면 내가 살기 위하여 남의 생명을 빼앗는 살육인가? 자연계의 위계적(位階的) 먹이사슬은 최상위층인 인간을 포함한 육식동물은 중위층인 초식동물을 먹이로 하고 중위층인 초식동물은 하위층인 식물을 먹이로 한다. 그 아래에 분해자(分解者)들이 있다. 생(生)과 사(死)가 순간에 교차되는 참으로 처참한 이 죽음의 향연이 생명세계에서의 생존법칙이다. 그러니 어쩌랴! 한 생명은 다른 생명의 희생이 있어야만 살아 남을 수 있도록 설계된 원계(元計)에 충실한 지극히 정상적인 생존방법인 것을…….
대자연은 무궁한 진리(眞理)가 현상화(現象化)한 것이기 때문에 모든 사물이 눈에 보이는 그대로 진실이라 굳게 믿지만 인간으로서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헷갈려 속기 쉬운, 묘한 일들이 많이 있다. 그 예로, 십오야 밝은 저 선아(仙娥.달)의 얼굴은 고금을 막론하고 뭇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비탄에 젖어 한숨 짖게도 하고, 대상 없는 야속의 눈물샘이 되기도 하며 전설의 고향으로, 계수나무아래서 토끼 한 쌍이 떡방아를 찢는 동화의 나라로, 추억의 이야기보따리로, 무언지 모를 환희로, 후덕한 새댁의 환한 용모로 묘사되던 그 자태! 그뿐이랴! 칠흑의 그믐을 넘어 오롯이 떠오른 수줍은 아가씨의 실 눈썹과도 같은 초승달은 가슴속 저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연민을 일깨워 마음을 산란하게 한다. 그러나 선아의 그 청초하고 애잔한 얼굴이 정녕 보이는 사실 그대로던가? 달은 핵융합반응으로 스스로 빛을 내는 항성(恒星)이 아니라 단지 태양의 빛을 받아 반사하는 행성(行星)이란 사실은 우주과학자들에 의해 익히 알려져 있다. 아폴로11호를 타고 달에 간 닐 암스트롱(Neil Alden Armstrong)과 에드윈 올드린 쥬니어(Edwin Aldrin, jr)는 1969. 7. 20. 22:56분 달 착륙선 이글호로 역사적인 달의 고요의 바다에 착륙한 후 선장은 전인류를 향한 메시지로 “한 사람에게는 작은 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거대한 도약이다(That’s one small step for a man, one giant leap for mankind)”라고 가슴 벅찬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호사가들이 가슴 설레며 그렇게도 기대했던 다이아몬드나 황금, 그리고 이세상에서는 보지못했던 색다른 보석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달의 표면은 생명체 하나 없는 어둡고 삭막한 돌무지요 바위 너덜뿐인 흉측한 몰골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우주인이 남긴 발자국은 인간이 우주에 저지른 만행을 영원의 시간 속에 고발이라도 하려는 듯 그 증거를 100만년 동안이나 없어지지 않게 보존할 것이며 그들이 일으킨 먼지입자 또한 사라지지않고 떠있는 그 자리에서 영생을 누리는, 건조하기 짝이 없는 황량무비 그 자체임이 확인되었다. 전인류의 꿈과 동경의 대상이었던 달나라! 그 달나라의 월궁항아(月宮姮娥)를 그리는, 그리고 월궁항아를 자처하며 백마 탄 왕자를 애타게 기다리는 물오른 선남선녀(善男善女)들의 기대를 무참히 무너트린 참으로 원망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연은 모든 생명체의 삶의 터전이다. 조화원(造化元)은 세상의 모든 생명들에게 부족함이 없는 풍족한 삶의 터전이 되도록 모든 존재들이 서로가 서로를 위한 되먹임 고리를 통해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도록 설계하여 놓았다. 인간 역시 욕심 부리지 않고 자연의 순리를 따른다면 인간이 살아가는데 부족하여 고통 받는 일 없이 잘 살 수 있다. 자연은 진리의 세계이기 때문에 정직하여 거짓이 없다. 콩 심은 데 콩이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난다. 심은 대로 거두고 노력한 만큼 소득을 얻는다. 1986년의 우루과이라운드(Uruguay Round)이후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말이 크게 유행한 적이 있었다. 신토불이란 중국 불전(佛典)인 노산연종보감(廬山蓮宗寶鑑)에 있다는 말로 뜻을 풀이하면, 인간과 자연은 하나라는 뜻이지만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자신이 사는 땅에서 생산된 농수산물이 체질에 맞아 좋다’는 설명으로 국내산 농수산물의 애용을 권장하는 캠페인 용어로 사용한 것이므로 그 옳고 그름은 차치(且置)하고,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가장 바람직한 먹을거리는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제철에 생산된 농산물이라는 말에는 모두가 공감한다. 과거 우리의 주식(主食)을 예를 보면 겨울에는 쌀이고 여름에는 보리이다. 추운 겨울에 쌀을 주식으로 먹는 이유는 벼가 양의 계절인 봄에 싹이 트고 여름의 강렬한 햇볕을 받아 자라고 여물어 음(陰)의 계절인 가을에 추수하는 쌀은 따뜻한 성질을 가졌기 때문이며, 더운 여름은 양(陽)이므로 보리는 음의 계절인 가을에 씨를 뿌려 그 싹이 추운 겨울을 나고 봄에 자라 초여름에 여물고 수확하므로 차가운 음의 성질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인간과 지역과 계절과 농산물과의 관계에 있어 음양의 오묘한 조화는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조화원의 배려인 것이다.
자연은 각자 자기 혼자만을 위한 이기적 행위가 없다. 남보다 더 부(富)를 갖고자 경쟁 하지도 않고 좀더 남을 앞서고자 안달복달하지도 않으며 앞날을 위하여 고민하며 예비 하지도 않는다. 그저 주어진 환경과 여건에 순응하며 현재에 만족하며 살아갈 따름이다. 그런 가운데 인간을 포함한 이웃에 많은 도움을 준다. 그 한 예로 피톤치드가 있다. 이 말은 1937년경 러시아 생화학자 토킨(Boris P. Tokin) 박사가 식물이 상처를 입으면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주위의 미생물을 죽이는 물질을 만들어 내는 현상에 착안하여 이름 붙인 것으로 피톤(Phyton)은 식물, 치드(cide)는 ‘죽인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미생물에게는 유독하지만 인체에는 유익하여 사소한 피로나 감기 그리고 우울감이나 스트레스는 숲 속에 머물러있으면 그 증세가 상당부분 완화된다. 뿐만 아니라 수목이 울창한 산속을 걸으면 누구나 상쾌한 기분이 되어 휴양의 일환으로 삼림욕을 즐기게 된다. 원적외선(Far infrared ray)은 태양광선의 불가시광선 중에 적외선이 있는데 이 적외선은 파장의 길이에 따라 근적외선, 중적외선, 그리고 파장이 제일 긴 원적외선으로 구분한다. 원적외선은 인체에 전혀 해가 없으며 피부 깊숙이 침투하여 열 작용을 하므로 몸이 따뜻해 진다. 이 열 작용은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되는 세균을 없애는데 도움이 되고 모세혈관을 확장 시켜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하며 또 세포를 구성하는 수분과 단백질 분자에 닿으면 세포를 1분에 2,000번씩 미세하게 진동 시켜 세포조직을 활성화시키고 노화방지. 신진대사 촉진. 만성피로 등 각종 성인병 예방에 효과가 있다. 그 밖에도 발한작용 촉진. 통증완화. 중금속 제거. 숙면. 탈취. 방균. 제습. 공기정화. 기타 건축자재. 생활용품. 의료기구. 찜질방 등의 여러 분야에 쓰이고 있다. 또한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모든 음식물은 에너지 공급원뿐만 아니라 질병을 예방하고 치유를 돕는 약선(藥膳)이 대부분이다. 자연에서 난 것들은 죽어서 모두 자연으로 돌아가 자연을 비옥하게 만들고 다른 생명체의 생명력이 되어 자연에 이바지한다. 자연 속의 개체들은 자신만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어우러지면서 서로 다름 속에서 상생(相生)의 어울림으로 전체에 기여하는 생명의 공동체가 된다. 그러므로 자연은 서로를 위하여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 받으며 살아간다. 어느 것 하나 독야청청(獨也靑靑)하며 홀로 살아갈 수 없다. 우리가 집안에서 기르고 있는 화분에 심겨진 화초나 분재들도 같이 모아 놓아야 서로 교감 되어 잘 산다고 한다. 먹이 사슬이 그렇고 자연의 정화(淨化)가 그렇다. 더러운 곳에만 사는 지렁이를 보라. 징그럽다고 처다 보기조차 싫어하는 한 낱 미물이지만 자연에 대한 그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하고 대단한가! 이렇듯 자연은 이타적(利他的) 존재이다. 자연속에는 도움과 감사의 철학이 존재하므로 인간들은 자연에서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기업을 경영하든 아니면 직장생활을 하든 어떤 일이든 간에 성공하려면 상대방 또는 주변사람에게 도움이나 이익을 줄 것을 먼저 생각하여야 한다. 그렇게 하면 그에 대한 보상은 달라고 안달하지 않아도 스스로 따라오게 되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인간의 두뇌는 현대 생활에서와 같은 기계적으로 통제되는 그런 세상이
아닌 자연 중심적인 세상에 적합하도록 진화되어 왔기 때문에 첨단과학시대인 지금도 우리는 휘황찬란하게 꾸며 놓은 인작(人作)의 조형미보다는 양지바른 산모퉁이 좁다란 개울가에서 기나긴 엄동설한의
사납고 매섭던 칼 바람을 견뎌내고 얼음장 속으로 졸졸 졸 물이 흐르는, 아직 찬기가 가시지
않은 이른 봄날에 따사로운 봄볕을 받으며 온몸에 솜털을 휘감고 살포시 피어난 털북숭이 버들강아지를 보면 가녀린 아기 볼같이 애잔한 해맑음과 몹시도
기다렸던 반가움이 무언지 모를 환희가 되어 가슴속에서 솟아 오르고, 노송이 빼곡한 산중턱 모퉁이에 제멋대로
생긴 커다란 이끼 낀 바위들이 여기저기 무질서하게 누워있는 바위틈을 비집고 휘돌아 바닥의 모래알까지 속이 환히 들여 다 보이는 작은 웅덩이에 이르러
잠시 쉬고 있는 계곡청수(溪谷淸水)를 보고는 그 신선함에
나도 모르게 야……아! 하고 탄성이 튀어 나오고
그 수정같이 맑고 깨끗한 물에 손을 담그는 순간 형언할 수 없는 청량감에 내 심신에 쌓여 있던 오예(汚穢)가 모두 정화되어 문뜩 청정인간이라도 된 듯한 느낌을 갖게 되고, 나무가
울창한 깊은 숲 속이나 한적한 바닷가에서 더할 수 없는 마음의 평온을 누리게 되는 것은 자연과 인간의 본향(本鄕)이 같기에 그러하리라. 본디 자연은 아름답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은 인간이다. 인간의
움직임은 변화무쌍한 우주의 춤사위다. 그것이 정(情)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천상의 아름다움처럼 깊은 감동을 선사한다. 하지만
자신이 대자연의 중심이라는 자만과 욕심이 지나치면 그 아름다움은 스러지고 그 자리에 속임과 갈등, 쟁투와
살상이 난무하게 된다. 어진 사람이 행하는 모든 일은 도의에 따라 행동이 신중하고 덕이 두터워
그 마음이 산과 비슷하므로 산을 좋아한다는 인자요산(仁者樂山)이란
말처럼 자연은 인도(人道)의 근원이기도 하다.
우주 속에서 아주 작은 것이라 해도 그것이 사라지거나 또는 그 양태가 달라진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만약 지구의 위성(衛星)인 달이 사라진다면 우리에게 어떤 변고가 생길까 하는 의문에 대하여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혹 태양이 없어진다면 몰라도 무수히 많은 별 중에 그까짓 조그마한 것 한 둘쯤 없어진다고 해서 무슨 대수겠냐마는 하물며 조그만 달쯤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가 않다. 지구가 23.5°의 기울기를 유지하고 안정적으로 자전하는 것은 달의 중력이 붙잡고 있기 때문이며, 달이 없으면 지구의 자전축 각도는 0~85°사이에서 요동치고 자전축이 바뀌면 지구는 극심한 기후변화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큰 재앙을 겪게 된다고 한다. 바다는 밀물과 썰물이 사라져 갯벌이 사라지게 되고 바닷물의 순환에 변화가 일어나 오염물질의 정화가 이루어 지지 않아 어패류가 없어지게 되며 또 밤에는 칠흑 같은 어둠이 뒤덮여 야행성 동물의 생태계가 변하여 사라지게 된다. 그러면 우주의 변화가 아닌 지구상의 생물종(生物種)의 일부가 사라지거나 그 양태가 변하였을 경우엔 또 어떤 문제가 발생할 것인가. 즉, 지독히 추울 때와 더울 때를 감안하여 지구의 온도가 한 10°C 쯤 상승하거나 하강한다면, 또는 너무도 오랫동안 보아왔으니 이제 지구상의 풀이나 나무의 색깔이 녹색에서 가장 화려하고 정열적인 색깔인 빨간색으로 변한다면, 또 해마다 홍수로 피해가 막심한데 그 지긋지긋한 물이 지구상에서 반으로 확 줄어드는 변화가 온다면 바라는 것처럼 인간의 삶에 아무런 영향 없이 자연재해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하버드대 교수인 에드워드 윌슨은 그 의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고 한다. “우리가 생물의 다양성 및 생태계의 훼손을 방치한다면 멀지 않은 장래에 엄청난 잠재적 가치를 지닌 풍요로운 생물상(生物相)이 파괴됨으로 해서 새로운 의약품. 농작물. 목재. 기호품 등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자연의 현 상태가 때로는 인간에게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주기도 하지만 그래도 우주의 만유(萬有)가 조화원(造化元)의 생성설계인 원계(元計)에 따라 원력(元力)이 서로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현상이 유지되고 인간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존재양태가 변하여 그 균형이 무너진다면 이 세상은 정상적으로 유지될 수 없게 되는 것이므로 세상에 존재하는 것 하나하나가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이 살아가는데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삶의 조건이 되는 것이다. 하버드대 교수인 에드워드 윌슨이 정리한 ‘바이오필리아(Bio-philia)’가설(假說)은 자연이 인류가 생존유지와 종족번식을 위해서 필요로 하는 물질자원의 공급원이라는 피상적인 관념을 훨씬 넘어서서 인간은 심미적. 지성적. 인지적. 그리고 정신적 안정과 만족을 위해서도 자연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고 선포한다.
생물의 다양성은 한번 훼손되면 결코 다시 회복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지구의 일부 지역만이라도 종(種)의 다양성이 야생 상태를 그대로 유지될 수만 있다면 언젠가는 생물권이 다시 회복될 것이며 우리 후손들은 자연이 제공하는 모든 혜택으로 인하여 참살이(well-being)를 누리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와 반대로 현재와 같이 인간의 필요에 따라 개발이란 명분으로 무분별하게 자연을 파괴하고 공해를 배출하여 원계(元計)에서 일탈하는 행위와 원계를 왜곡하여 인간의 욕심에 의해 만든 프로그램에 따라 잔인한 방법으로 자연을 학대하여 억지로 만들어 낸 소득이 과연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게 될 것이며 축복이 될 것인지, 그 결과가 앞으로 어떤 형태로 세상에 나타나게 될 것인지 사뭇 걱정스럽다. 지구상에서는 최소한 십여 차례에 걸쳐 생물이 크게 멸종하는 대참사가 발생했는데 그 가운데 가장 큰 대멸종(Mass extinction)사건이 다섯 차례 있었다고 한다. 그 첫 번째가 4억4천3백 만년전의 오르도비스기 말. 두 번째가 3억7천 만년전의 데본기 말. 세 번째가 2억4천5백 만년전의 페름기 말. 네 번째가 2억1천5백 만년전의 트라이아스기 말. 다섯 번째가 6천6백 만년전의 백악기 말에 발생한 사건이다. 물론 현생인류(Homo sapiens)의 조상으로 여겨지는 크로마뇽인(Cro-Magnon man)이 약 1만 ~ 4만5천년 전 지구상에 출현하기 훨씬 전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이 겪은 참사는 아니었지만 참으로 두려운 자연의 대반란이라 아니할 수 없다. 오늘날 영악한 인간들의 놀라운 과학기술에 의해 자연이 정복당하고 파괴된 결과로 지구촌에 살고 있는 대다수 인간 자신들의 육체가 파괴적으로 병들고 정신이 황폐화하여 인간성을 상실한 사실에 스스로 경악하고 있다. 이대로 자연생태계가 파괴되고 기후가 변화하게 된다면 결국 여섯 번째의 생물멸종이란 파국적 위기가 들이 닥치는 대재앙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지? 안타깝게도 그 우려는 지금도 진행 중 이다. 인간들에 의한 지구온난화가 계속되어 남극의 펭귄 새끼들은 눈이 아니라 내리는 비에 의해 얼어 죽고 있다고 한다. 실로 믿기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지구상의 모든 생물이 다 사라지고 인간만이 홀로 살아 남는 ‘고립기(Eremozoic Era)’가 올 것이란 것이 학계의 공통된 전망이다.
자연은 인간이 마냥 누리기만 하는 곳이 아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자연의 일원으로써 동기일신(同氣一身)인 구성원들과 얼마나 상부상조하고 있을까? 안타깝게도 자연에 대한 인간의 기여는 원천적으로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필요에 따라 인위(人爲)를 가한 자연과 자연물에 인위를 가한 가공물(加工物)에는 본래의 물성(物性)이 소멸하였기 때문에 자연이면서도 자연과 친화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연을 해치는 독소로 작용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인간은 지구의 질병이고 암세포다’라는 말을 듣게 된다. 인간들은 자연을 단순한 물질로만 보고 그것을 사용 관리하여 얻는 가시적인 물질적 유익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을 뿐, 공존의 절대 필요성에 대하여는 그 동안 너무나 무지하고 무관심하였다. 자연의 구성요소들은 완벽한 조화 속에 균형을 이루며 상호 연결되어 있고 상호 의존되어 있어서 그 중 가장 사소한 부분 하나를 해치는 것 만으로도 전체의 균형을 위협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이 자연의 구성요소 중 한 부분으로 다른 요소들과 서로 연결되어 있고 상호 의존관계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서로에 대한 이기주의적 태도가 환경적 위기와 같은 문제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른 자연물과는 달리 끊임없이 자연체계의 균형을 깨뜨린다. 이에 대응하여 동, 식물들은 본능적으로 자연의 균형을 유지하도록 움직여지는데 반해 인간은 자유의사와 자유선택에 의해서만 자연과 균형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재앙들은 인간이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지 않고 거역하였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문명(文明)이란 인간이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위해 자연에서 터득한 과학을 생활에 활용하는 것이지 인간이 첨단과학으로 자연을 정복하여 필요나 기호에 맞게 자연 그대로보다 개선된 상태를 만드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유의사와 자유선택에 따라 자기 나름의 방법대로 살아갈 수 있는 무한자유를 누리기에 인간에 관한 천작(天作)의 사전규제는 없으나 자행자지(自行自止)의 자유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한 책임이 따르는 것이 자연의 섭리이므로 제 스스로 지키지 않음에 따라 제 스스로 만드는 자작지얼(自作之孼)이 있게 마련이다. 때늦은 관심이지만 지금부터 라도 우리 인간들이 다같이 자연과 함께하는 노력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소이가 바로 여기에 있으며 대자연의 일원인 우리 인간들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참 이치를 자연 속에서 배워 깨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