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정 |
일 시 |
장 소 |
비 고 |
집결지 집결 |
~10:00 |
안성 IC 출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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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금광면으로 이동 |
10:00 ~ 10:30 |
금광면 한운리로 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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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승계공 참배 |
10:30 ~ 11:00 |
금광면 한운리 |
봉익대부판도판서 |
휘 성복공 참배 |
11:30 ~ 12:00 |
금광면 배어리 (저수지 건너) |
판사재감사 |
점 심 식 사 |
12:30 ~ 14:00 |
- |
금광면 |
휘 현공단비 참배 |
14:30 ~ 15:30 |
금광면 석하리 |
공조전서 |
휘 효통공단비 참배 |
“ |
“ |
집현전직제학 |
휘 목로공 참배 |
“ |
“ |
성균관직강 |
휘 집공 참배 |
16:00 ~ 16:30 |
안성 사곡동 |
승지 |
휘 숙공 참배 |
“ |
“ |
통덕랑. 파조 |
충문공(휘 언호)참배 |
17:00 ~ 17:30 |
안성 대덕 건지리 |
충문공(관 좌의정) |
해 산 |
17: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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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기 일정은 사정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 안성 선조 묘소
① 휘 승계(봉익대부 판도판서), 배위 신평이씨
- 묘소 : 경기 안성시 금광면 한운리
※ 판도판서(版圖判書) : 고려(高麗) 중엽의 관직의 하나. 판도사(版圖司)의 으뜸벼슬. 31대 공민왕11(1362)년 호부상서(戶部尙書)를 고친 이름. 뒤에 호조전서(戶曹典書)로 고쳐졌다가 조선(朝鮮)시대(時代) 3대 태종 때에 호조판서(戶曹判書)로 됨.
② 휘 현(공조전서) : 자료는 안성의 유원재 회원이 제공하기로 함.
③ 휘 효통(집현전직제학) : 자료는 안성의 유원재 회원이 제공하기로 함.
④ 휘 목로(성균관 직강 : 자료는 안성의 유원재 회원이 제공하기로 함.
⑤ 휘 성복(판사재감사), 배위 신평이씨
- 묘소 : 경기 안성시 금광면 배어리(묘소가 저수지안에 모셔져 계셔서 배를 이용하지 않으면 참배에 어려움이 있으나 금번 참배시에는 안성지역종친회(회장:유장근, 총무 유병용 군기시사공파화수회장)의 협조로 가능할 것으로 사료됨)
※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 : 고려시대 통훈대부, 정3품 벼슬, 고려시대 궁중에서 필요한 해산물(海産物)과 하천(河川)의 교통을 맡아본 관청인 사재시(司宰寺)의 수장. 본래는 判司宰寺事(판사재시사)라고 하였다. 1369년(공민왕 18) 사재감(司宰監)등으로 고치면서 判司宰監事(판사재감사)로 하였다. 1372년에 다시 사재시로 환원되어 그 수장을 判司宰寺事(판사재시사)라고 하고 고려 말까지 존속되었다.
⑥ 휘 집(증 승정원 좌승지), 배위 장기오씨
- 별도의 자료는 없으며 묘소는 경기 안성시 사곡동에 모셔져 계심.
※ 승정원은 조선시대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던 관청이며 좌승지는 정3품벼슬임.
⑦ 휘 숙(통덕랑-통덕랑파조)
- 묘소 : 경기 안성시 사곡동 考墓하
※ 통덕랑 : 조선(朝鮮) 시대(時代)의 정5품(正五品) 문관(文官)의 품계(品階). 통선랑(通善郞)의 위, 조산(朝散) 대부(大夫). 조봉(朝奉) 대부(大夫)의 아래.
※ 통덕랑공 묘비건립 경위 : 통덕랑공묘비가 실전된지 수백년이 흘러 묘지를 찾으려는 노력끝에 모든 전설과 기계유씨 후손들의 많은 협조와 배려로 1995년 7월에 비로소 찾게 되었다. 따라서 종중협의하에 후손들의 성금으로 묘역을 정화하고 표석을 건립하였으며 시향일자도 음 10월9일로 정하였다.
(부운보 제47호 : 2000.3.25)
⑧ 휘 언호(의정부 좌의정, 호 즉지헌 , 시호 충문공)
- 묘소 : 경기 안성시 대덕면 건지리
<충문공 약력>
자 사경(士京). 호 즉지헌(則止軒). 시호 충문(忠文). 1761년(영조 37)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검열(檢閱)·설서(說書) 등을 지냈다. 벽파로서, 시파 홍봉한(洪鳳漢) 중심의 척신정치를 없애는 것이 청의와 명분을 살린다고 생각한 정치적 모임인 청명류(淸名流) 사건에 연루되어, 붕당을 타파하고자 한 영조로부터 흑산도로 정배 명령을 받았다. 정조 즉위와 함께 시파로 태도를 바꾸어 정조의 총애를 받고, 《명의록(名義錄)》 편찬을 담당하였다. 이듬해 이조참의로 발탁되었으며, 이조참판 등을 거쳐, 1781년(정조 5) 형조판서가 되었다. 1787년 우의정으로서 동지 겸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중추부판사로서, 조덕린(趙德?)사건으로 제주 대정현(大靜縣)에 위리안치되었다. 1791년 풀려나오고, 1795년 좌의정에 올랐으나 사퇴, 돈령부영사(敦寧府領事)에 이르렀다. 정조 묘정에 김조순, 김종수와 배향되었다. 문집에 《즉지헌집(則止軒集)》, 저서에 《연행록(燕行錄)》 등이 있다. 공은 연암 박지원과 친분이 두터워서 연암이 개성에서 어려운 생활을 할 때 개성유수를 자처에서 부임하여 연암을 도운 유명한 일화가 있다. 공의 묘소는 안성군 대덕면 건지리에 모셔져 있는데 정조임금의 어제사비문이 음각된 묘비가 있다
※ <충문공 초상화는 카메라 옵스큐라 기법을 활용했다>
충문공(휘 彦鎬)의 영정이 지난 2006년12월29일자로 국가지정문화재 보물제1504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미술사가 이태호 교수(명지대)는 최근 완성한 ‘조선 후기에 카메라 옵스큐라로 초상화를 그렸다(2004년)’라는 논문에서 조선 정조시절 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증언과 궁중화가 이명기의 초상화 기법을 통해 19세기 후반에 카메라 옵스큐라 기법이 활용됐음을 실증해 보였다. 李교수는 먼저 다산의 산문들에 나타난 카메라 옵스큐라에 대한 증언을 예로 들고 있다. 여유당전서에 실린 ‘칠실관화설(漆室觀火說)’은 다산이 카메라 옵스큐라를 구체적으로 실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칠실관화’는 카메라 옵스큐라의 한자말.
李교수는 이 중 유언호 초상화를 카메라 옵스큐라를 적용한 구체적인 사례로 꼽았다. 옷주름의 선명한 입체감, 생동감 있는 눈동자, 투시도법이 활용된 의자·족좌·화문석의 배열 등이 기존 초상화와는 다른 변화를 보여준다는 게 李교수의 설명이다. 그러나 이교수가 가장 결정적인 증거로 든 것은 초상화 여백에 써놓은 짧은 글.
“(그림의) 얼굴과 몸의 길이와 폭은 원래 (유언호) 신장의 절반으로 줄어 보인다”라는 내용에서 이명기가 카메라 옵스큐라를 이용, 유언호의 실제 키와 그림의 키 배율을 계산해 그렸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교수는 “다산의 증언과 이명기의 초상화는 조선 후기 화단에 카메라 옵스큐라가 활용됐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며 “이러한 증언과 증거를 구체적으로 남긴 일은 세계과학사나 회화사에서도 소중한 기록”이라고 밝혔다. - [경향신문 2004.8.18자 기사 인용]
<카메라 옵스큐라 기법이란?>
‘어둠 상자’라는 뜻의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는 암실이나 밀폐된 공간에 작은 구멍을 통과해서 들어온 빛이 형상으로 변하는 자연현상을 응용한 광학기구. 서양에서는 이 장치가 사물의 윤곽을 쉽게 그릴 수 있다 해서 화가들 사이에 인물화나 풍경화에 입체감과 투시원근법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널리 활용됐다. 풍경화가인 베르나프도 카날레토나나 인물화가인 얀 베르미어 등 17~18세기의 많은 서양화가들이 카메라 옵스큐라를 이용해 그림을 그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최근 번역, 출간된 데이비드 호크니의 ‘명화의 비밀’은 이같은 광학기술 등 자연과학을 그림 그리기에 활용한 사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의 카메라는 이 원리를 이용해 만들어졌다.
<이명기 : 조선 정조 궁중화가>
본관 개성. 호 화산관(華山館). 벼슬은 화원으로 찰방(察訪)을 지냈다. 특히 초상에 뛰어나 1791년(정조 15)에는 정조어진 원유관본(遠遊冠本) 도사(圖寫)의 주관화사(主管畵師)로 활약하기도 했다. 산수화는 초상화에 미치지 못했다는 평을 받고 있으며, 화중 인물과 바위의 모습, 필법 등이 김홍도(金弘道)의 화풍을 많이 따르고 있으나, 석양의 뱃놀이를 소재로 한 《장범선유도(張帆船遊圖)》에서는 괴석(怪石)의 명암을 효과적으로 살려 양감을 나타내는 등 단편적으로나마 서양화법을 받아들인 흔적이 엿보인다. 이 밖에도 채접(彩蝶)을 잘 그렸다고 하나 전하는 작품은 없다.
※ 기계유씨카페 안성 참배에 안내 등을 하여 주신 안성종친회(회장 유장근)일가분들께 뜨거운 감사를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