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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의 울타리와 나의 바구니
- 바구니 시대의 기독학교의 위상
장주경
바야흐로 지금은 ‘바구니’의 시대가 된 것 같다. 사람들은 자신을 구속하는 ‘울타리’보다는 내가 마음대로 골라 담는 바구니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너도나도 바구니 하나를 옆에 차고 세상을 돌아다니며 내가 원하는(I want) 것들을 골라 담으며 살아가고 있다.
전통적으로 튼튼한 보호막이 되어주었던 ‘울타리’들은 바구니 족들에 의해 모두 약화되고 있다. 아님, 울타리가 약해져서 바구니 족들이 늘어난 것일 수도 있겠다. 가정, 교회, 국가와 같은 기본적인 삶의 울타리들은 아직 존재하고는 있지만, 모두 엄청 허물어졌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가정의 울타리를 갖기를 두려워, 아니 싫어하는 것 같다. 가정은 너무나 당연한 울타리였는데 가정을 이룰 것인가 말 것인가가 선택 사항이 되었다. 돈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치관이 변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남녀간의 사랑이 가정의 울타리를 짓기 위한 전(前) 과정이 아니라 사랑(?) 자체가 목적이 되었다. 이 사람 저 사람,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내 바구니에 담았다가 버리면 그만이지, 그 사람과 함께 가정의 울타리를 만들기는 싫다.
가정의 울타리, 곧 결혼을 통한 언약의 관계로 가정을 형성한다고 해도 그 울타리가 참 허술해졌다.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살면 되지 굳이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가정의 울타리를 지켜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사랑’이 식으면 또 다른 사랑을 찾아가야 하기에 가정의 울타리는 내 자유를 구속하는 걸림돌이 되었다.
사랑의 관념도 매우 ‘바구니’적으로 변하고 있다. 내가 좋아하면 그건 모두 사랑이 된다. ‘책임’과 같은, 그동안 ‘사랑’과 같이 따라다니던 울타리적인 개념은 ‘비추’다. 동성간 사랑도 사랑이면 고귀하다는 식이다.
따라서 결혼 만이 ‘성’의 조건이라는 기독교의 울타리성 주장은 구태의연하다 못해 ‘비인격적’이고 ‘비인권적’인 것이 되었다. 결혼을 통해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을 낳아 가정의 법과 질서 안에서 사랑으로 양육한다는 기독교적 가정관이 심히 흔들리고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가정 안에서 부부와 자녀는 하나님이 주신 가정의 법과 질서에 순종하며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믿는 MZ세대가 몇 퍼센트나 될지 궁금하다.
교회라는 울타리는 또 어떤가. 사람들은 요즘 예수님을 믿어도 교회에 잘 가지 않는다. 교회라는 울타리를 거부하는 것이다. 하나님도 믿고 예수님도 좋은데, ‘교회’는 싫은 사람이 많다. 교회에 가면 교회의 법과 질서에 따라야 하는데, 사람들은 ‘순종’이나 ‘훈련’ 같은 울타리가 너무 싫다. 설사 교회에 가더라도 주일 예배만 듣고 오는 식으로, 딱 내가 하고 싶은 것만 참여하고 싶은데 교회는 부담스럽고 귀찮게 한다. 구역예배에도 나가야 하고, 제자 훈련도 받아야 하고, 봉사도 해야 한단다.
대신 내 바구니 안에 신앙을 담으면 참 편하다. 내 ‘스타일’의 유튜브 설교를 담고, 내가 가고 싶은 집회를 담고, 구독하고 좋아요를 누르면 그만이다. 훌륭한 목사님들의 설교를 골라 담아 듣다 보면 나 또한 그분만큼 고매해진 것 같은 만족감에 항상 내 바구니는 은혜의 말씀들로 넘쳐난다.
어떤 경우에는 내 바구니 안에 교회의 울타리 자체를 담기도 한다. 주일학교가 좋은 곳, 영어예배가 있는 교회를 골라서 내 바구니에 담으며 이 교회 저 교회를 옮겨다닌다. 교회는 울타리가 커서 내 바구니에 잘 들어가진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교회 안의 여러 서비스들을 골라내어 내 바구니 속에 분리수거한다. 그러다 그 울타리가 내 바구니를 너무 많이 빠져나가면, 즉 내 바구니에 담지 않고 싶은 것들이 그 교회 안에 있으면 나는 얼른 그 교회의 울타리 자체를 바구니에서 버리고 다른 교회를 주워 담는다.
내 신앙의 바구니에 너무 좋은 것들이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즉 나는 하나님도 잘 믿고 신뢰하기 때문에, 내가 바구니에 어떤 교회를 담는 행위, 곧 기존 교회를 떠나서 다른 교회로 옮기는 행위조차 하나님의 뜻, 혹은 은혜이기에 충분하다. 하나님에게만 순종, 충성하고, 교회에는 충성하지 않는 자의적으로 정당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졌다.
바구니 신자들을 바라보며 안타깝지만 딱히 할 수 있는 말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교회의 울타리를 박차고 나간 데는 역으로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이 교회는 이것이 치명적인 문제이고 저 교회는 저것이 치명적이었다. ‘경험’을 통해 교회의 울타리가 얼마나 허물어져 있는지를 바구니 교인들은 이미 알아버렸다. 바구니 교인들 탓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가 대중들을 모으고자 스스로 복음의 울타리를 약화시킨 측면이 있다. 사람들은 교회를 통해 본질적인 진리를 얻고자 하는데 교회는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울타리를 스스로 약화시켰다. 그러니 교회에 실망하고 울타리를 벗어나는 것이다.
또 하나는 교회 안에서 삶의 깊은 차원을 나누기 어려워진 면이 있다. 사람들의 실질적인 삶의 문제에 해답을 주지 못한다고나 할까. 교회 쪽에서도 교인들의 삶에 깊이 관여하지 않게 되었다. 내 삶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깊이 파고들지 못하는 교회로부터 사람들은 또 등을 돌리게 된다. 사람들은 간섭을 싫어하고 교회는 사람들이 떠날까봐 두렵다. 이렇게 눈치 보는 교회를 사람들은 또 떠난다.
사람들의 바구니화와 교회 울타리의 약화가 서로 맞물리며 결과적으로 교회라는 울타리는 점점 더 허물어져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세 번째로 중요한 울타리가 국가이다. 국가는 근대에 이르러 완성되었기 때문에 국가는 인간의 기본 울타리가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는 무정부주의자들도 있지만, 실제적으로 국가는 우리의 삶을 지키는 가장 강력한 울타리로 기능한다.
국가 없이 떠돌아다니는 난민들을 생각해보면 우리가 평소에 잘 느끼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국가라는 울타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그래서 더욱 우리 대한민국의 건국 과정이 소중하게 느껴지고 건국의 주역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든다.
그런데 또한 많은 경우에, 아마도 우리가 너무 충분한 자유와 민주를 누리고 있기 때문이겠지만, 이러한 국가의 울타리, 즉 대한민국의 기본적인 법과 질서를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다. 냉혹한 국제 질서 속에서 우리나라가 국민들에게 튼튼한 울타리가 되어줄 때 나라도 번영하고 그 안에 있는 개인도 성장할 수 있는데 말이다.
뭐든 내 바구니에 넣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국가의 법에 반하는 사상, 우리나라의 건국을 부정하는 이념들도 내 바구니에 넣고 국가 자체를 비판하곤 한다. 아무래도 선진화된 이후로 더욱 이런 무정부적인거나 반정부적인 사상들도 팽배해지지 않을까 싶다. 풍요 속에서 국가의 울타리가 더욱 튼튼해져야 하는데, 풍요 속에서 자란 세대들에 이르러 되려 국가관이 흔들리고 있는 현상이겠다.
점점 더 튼실해져가야 할 가정, 교회, 국가의 울타리가 모두 약화되고 심지어 허물어지고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런데 울타리가 허물어지면 그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고 양육받아야 할 다음 세대들이 위태로워진다. 그래서 우리는 바구니 시대가 되어버린 지금 이 자리에서 다시금 울타리에 대해 깊이 숙고해야 한다.
울타리란 무엇인가. 울타리는 무엇보다 법과 질서를 의미한다. 울타리가 튼튼해야 그 안에서 ‘자유’와 생산, 번영이 가능하다. 이는 하나님의 법칙이다. 에덴동산을 만들고 법과 질서를 세우셨는데, 그 법을 어기면 에덴의 복락이 사라진다.
하나님 나라에는 항상 이 울타리가 존재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단지 울타리만 쳐놓고 어기면 벌 받는다고 엄포를 놓는 그런 분이 아니다. 울타리를 순종하고 지키면 그 ‘안’에서 풍성한 바구니의 복을 허락하신 분이다.
최근의 공교육 현장에서 보여지는 가슴 아픈 일들도 사실 ‘울타리’가 무너진 데서 비롯된 현상으로 본다. 학교의 법과 질서가 튼튼하게 세워진 상태에서 아이들을 인격적으로 대하고 인권을 존중하는 것이 학교의 기본적인 모습이 되어야 한다. 울타리는 없는데 아이들과 학부모의 ‘바구니’만 내세우다 보니 혼란과 무질서, 심지어는 ‘악’까지 횡횡하게 되었다.
학교의 주축을 이루는 교사의 권위와 학교의 질서를 배제한 채 학생의 인권이란 것만 중시할 때, 교육이 잘 안된다의 차원을 넘어 사회에 악이 만연해진다. ‘약자’, ‘소수자’의 인권을 부각하는 것은 선진국으로 가는 필수적 과정이겠지만 이것이 ‘울타리’ 자체를 허무는 데까지 이르면 되려 구성원의 인격이 망가지는 무서운 결과를 낳게 된다. 인격이 무너진 자리에 악이 퍼져간다.
무너진 울타리를 다시 세워야 한다.
기독학교도 하나의 울타리이다. 기독학교는 앞으로 가정의 울타리를 만들고 지키고, 교회의 울타리를 세우고 전하며, 국가라는 울타리를 지키고 번영하게 하는 일을 해야 할 아이들을 기르는 곳이다. 기독학교의 존립 이유는 바로 이러한 가장 중요한 울타리들을 세워가야 할 다음 세대들을 키우는, 또 하나의 울타리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기독교 대안학교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크신 하나님의 은혜이고 축복이다. 왜냐하면 우리나라가 앞으로 전 세계로 복음을 전하는 제사상 나라로서 기능하고, 다른 선진국이 간 길로 가지 않고 ‘가정’을 굳건히 지키는 나라가 되고, 살아있는 교회를 통해 열방으로 복음을 전하는 나라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린 시절에 아이들을 세상의 가치관으로부터 지켜주며 하나님 나라의 법과 질서를 가르쳐 훈련하는 학교의 울타리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의 공교육으로서는 도저히 담당할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위하여 30년 전부터 이 땅에 기독학교의 울타리를 허락하셨다. 시대가 악해질수록, 가정과 교회, 나라의 울타리가 허물어져가는 것을 목도하면 할수록, 더더욱 이 시대에 기독학교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기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독학교의 울타리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법과 질서를 배우고 장차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필요한 자질들을 훈련해야 한다. 법과 질서는 우리가 순종해야 할 울타리이면서 동시에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보호막이기도 하다. 이 보호막 속에서 세상의 악한 가치관으로부터 아이들을 지키면서 앞으로 세상으로 나갔을 때 필요한 자질들을 훈련하는 곳이 바로 기독교학교이다.
그런데 이 기독학교의 울타리 또한 울타리이지 ‘성벽’은 아니라는 점은 유의할 필요가 있다. 기독학교는 제도권 교육의 ‘시스템’이 아니기 때문에 그 울타리 자체를 세우고 지키는 일이 기존의 학교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다는 점이다.
하지만 놀라운 일은 하나님께서 이 허술한 울타리 속에서도 당신의 자녀들, 곧 다음 세대에 가정과 교회와 나라를 일으킬 일꾼들을 싱그럽고 아름답게 자라게 하신다는 것이다. 단 그 울타리가 하나님 나라의 울타리임이 분명할 때에만 그렇다.
기독교 학교가 생겨나기 시작한 시점과 우리나라가 근대적 울타리 중심 나라에서 포스트모던한 바구니 중심 사회로 이행하는 시점이 거의 일치하는 것도 우연이 아닌 것 같다.
하나님은 울타리가 약화되고 있는 시대에 기독학교를 세움으로써 절대 지켜야 할 세 가지 울타리에 대한 당신의 뜻을 보여주셨다.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무장하지 않고, 울타리 안에서 법과 질서를 지키는 것을 훈련하지 않고, 앞으로의 세계, 이른바 AI 시대에도 흔들리지 않을 지성과 영성을 길러내지 않고서야 어떻게, 가정과 교회, 이 나라를 세우고 지키고 번영하게 할 수 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데, 기독교학교가 세워져 확대되고 있는 21세기의 대한민국은 그 어느 때보다 바구니적인 삶의 방식이 폐부까지 깊숙이 침범해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학교들이 가장 많이 생겨나고 있는 지금이 사실 그 어느 때보다도 ‘기독교학교’의 울타리를 지키기가 어려워진 것도 사실이다.
소명은 분명한데 여건은 녹록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항상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고자 하는 현장에서 나타나는 동일한 모습이다. 이스라엘의 광야에서의 성막이 그러했고 초대교회가 그러했으며 종교개혁이 그러했고 우리나라의 선교의 역사가 그러했다.
기독학교가 울타리라고 해서 그 안에서 자라는 아이들의 바구니에 대해 소홀해선 안된다. 울타리를 튼튼히 하고 바구니를 인정하고 귀하게 여겨주는 것이 참 ‘인격적’인 교육의 모습이다. 울타리에만 연연하여 바구니를 누리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도 안되고 바구니 때문에 울타리를 위반하는 죄를 범해서도 안 된다. 어느 쪽도 하나님 나라의 모습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의 법과 질서의 울타리 안에서 아이들에게 순종을 훈련하고, 저마다 아이들의 바구니에 알짜배기 열매들을 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곳으로서 기독학교가 이 시대에 귀하게 쓰임 받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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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귀한 글 감사합니다. 산돌자연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우리 아이들과 학부모님들께 부어지는 은혜가 큽니다. 가정과 학교와 교회와 국가의 울타리가 잘 세워져 가길 기도하겠습니다
울타리속에 바구니. 참 탁월한 비유이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