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와 중진, 신예의 시적 풍경 (조명제/시인, 문학평론가)
이 시대를 산다
최 호 림
요나라의 허유가
지금 우리나라에 태어났다면
귀를 씻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귀 씻은 그 물이 더럽다고
소에게 먹일 수 없다고 상류로 간
소부도 없었을 것이다
더러움을 넘어서서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머리들이 되겠다고
다투어 이간질 모함을 일삼는
입만 열면 거짓말 뿐인데도
백성들의 이목구비가 건재하다니
허유와 소부가 아니더라도
맹고불이 없는*
얼마나 살기 좋은 세상인가?
*조선 세종 때 정승 맹사성
( 한국시학 2023년 여름호 발표)
고대 중국 요나라의 허유(許由)와 소부(巢父)는 세속의 명리(名利)를 탐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살았던 고결한 선비였다. 요(堯)는순(舜)과 함께 이상정치의 상징으로 일컬어지는 성군인데, 자신의 후임으로 당시 최고의 명망에 오른 허유에게 왕위를 선양(禪讓)하려 하자, 허유는 즉시 거부하고 기산(箕山)이라는 곳으로 숨어들어 갔다. 이후에도 재차 요 임금의 선양 제의가 들어오자 허유는 다시 그 소리조차 듣고 싶지 않아 기산의 영천(潁川)에 귀를 씻고 있었다. 소를 몰고 나와 물을 먹이던 친구 소부가 귀를 씻는 허유의 사유를 듣고서는, 허유가 자신의 몸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어 스스로 명예를 구한 것이나 마찬가지니, 내 소의 입만 더럽혔다며 소를 끌고 상류로 더 올라가서 소에게 물을 먹였다는 고담(古談)은 두루 아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고결한 은사(隱士)의정신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정치권력이나 정치판이라고 하는 것은 온갖 몰염치와 탐욕으로 얼룩져 어차피 더러운 세계이며, 참된 선비는 결코 근접할 곳이 못 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것도 가장 태평성대했다는 요 임금 시대의 이야기이고 보면 더욱 그러하다. 최호림 시인은 요나라의 고사(高士)허유와 소부가 지금 우리나라의 사람으로 태어나 살고 있다면, 결코 귀를 씻고, 소의 입이 더러워졌다며 소를 상류로 끌고 가서 물을 먹이는 일은 아예 없었을 것이라는 날카로운 풍자를 하고 있다. 썩은 냄새가 진동하고, 입만 열면 거짓말이요 모함과 이간질뿐인 정치꾼 행태에도 국민들의 이목구비가 멀쩡하다니, 소부 허유, 조선의 청백리의 상징인 고불 맹사성이 없는, 얼마나 살기 좋은 세상이냐는 것이다. 패륜적 정치를 거부할 선비, 스스로 콧대 높은 선비, 온몸으로 비판하고 저항할 선비 하나 없는, 참담한 오늘의 현실에 대한 시니컬한 풍자가 극한의 팬덤 정치로 몰락해 가는 시국을 생각하게 한다.(최호림 부분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