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성 품산공 휘 직연 자술
(大司成 品山公 諱 直淵 自述)
신미(1811순조11)년 ~ 갑신(1884고종21)년
품산(品山) 김직연(金織淵)은 자(字)가 경우(景愚)이고 청풍(淸風)사람이다.
신미년(1811순조11년)12월17일에 광주 왕륜면 사근천리(廣州 旺倫面 肆覲川里) 댁에서 낳았는데, 출생 시에 아버님이 꿈에 우뚝한 큰 바위 하나를 보아서 품삼(品山)이라 불렀으니, 즉 암자(嵒字=巖字)이다. 이리하여 스스로의 호(號)를 삼았다.
올해년(1815순조15년) 5살 때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함에 출중히 총명하였다.
병자년(1816순조16년) 6살. 동몽(童蒙:서당에 입학한 어린이들의 교재. 중종(中宗) 때 박세무(朴世茂)가 지은 책)을 배우며 사략(史略:역사의 대략) 첫 권을 먼저 익힐 때 스승이 일일이 가르치지 않아도 능히 그 뜻을 이해하였다.
어른이 태고(太古)라는 제목을 주며 “내가 시를 지을 수 있느냐.”함에 즉시로 “태고(太古)적에 임금이 된 것은 누구인고. 하늘(요(堯)나라)과 땅(순(舜)임금)과 사람(우(禹)하왕조 시조)이라. 이삼 대 이전에 누구라고 써 놓은 것이 없어 후세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이 같이 써서 올리니 보는 사람이 혀를 내둘렀다.
정축년(1817순조17년) 7살. 통사(通史:고급 역사를 종합적으로 기술한 책)를 읽으며 많게는 삼사십 행을 무난히 낭독하며, 낮밤으로 쉬지 않고 부지런히 읽어 10권을 다하여 문리(文理)가 크게 진보함이, 사람들이 모두 신동이라 하였다. 부모는 몹시 기특히 여기면서 어린 나이에 너무 일찍 재조와 이름이 나니, 혹시 단명 하지 않을까 근심 하였다.
무인년(1818순조18년) 8살. 소학을 배우니 매양 한줄 해석과 주석에 의거하여 깊이 탐구하고, 스스로 그 뜻을 이해하고 난 다음에야 난해한 대목을 어른에게 묻는 것이었다.
기묘년(1819순조19년) 9살. 여름에 종백씨(從伯氏:사촌 큰형)를 따라, 화성척숙(華城戚叔) 정진사(鄭進士) 창진(昌鎭)에게 가서, 날마다 큰 기개(氣槪:씩씩한 기상과 절개)를 양성하고 주고풍(做古風)을 따랐고, 겨울에는 맹자와 대학을 읽었다.
경진년(1820순조20년) 10살. 여름동안 화성에서 공부하고 겨울에는 논어와 중용을 읽었다.
신사년(1821순조21년) 11살. 여름엔 과거 답안지의 시체(詩體)를 공부하고 겨울에는 시경을 읽었다.
임오년(1822순조22년) 12살. 윤삼월에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춘추가 갓 마흔으로 평소에 건강하셔서 고달픈 기색이 조금 더 없으셨는데, 이달 16일 새벽에 손님을 배웅하러 나가셨다가, 돌아와서 취침 하시니 아직 먼동이 트기전이다. 형님과 나는 옆방에서 독서하고 있는 터에 해가 뜨자, 어머님이 “여느 때는 이토록 늦잠 주무시는 일이 없었는데, 변고가 있는 게 아니겠느냐.” 하시는 말씀을 듣고 당장 들어가서 살피니, 오호 때는 이미 미치지 못하였다. 한 시간 동안 곁에 모시고 있는 사이에 훌쩍 떠나 가셨으니, 우매한 것이 그 기미를 살피어 알지 못하여 땅을 치며 하늘에 울부짖으며 기절했다가 깨어나기를 여러 번 하였다.
계미년(1823순조23년) 13살. 9월에 형님이 별세하셨다. 형님은 성품이 지성하여 아버님 상중에 애통한 나머지 예법의 절도를 넘으니, 호곡하다가는 피를 토하고 이로 말미암아 병이 깊이 들기 서너 달 이더니, 이 달 22일에 피를 토하며 혼절하고 운명하시니 슬픈지고. 슬픈지고! 연세 고작 열일곱이다. 오호, 그렇게 우애 돈독하고 한 책상에 같이 공부하며 한시도 서로 떨어지지 않았건만, 별안간 영이별이 되다니 슬픔이 북받쳐 살고 싶지도 않았다. 하학동(下鶴洞) 아버님 산소에서 이삼십 리 떨어진 언덕에 장사지내고도 생시에 형님 생각, 비 오나 바람 부나 가리지 않고, 날마다 아버님 산소에 뵈러 갈 때에 나도 함께 따라갔거니. 이제부터는 예전과 같이 산소에 가는 길이 나 혼자뿐이다. 지난날을 생각할수록 더욱 슬픔이 겨워 진종일 울며불며 돌아오는 것이었다.
갑신년(1824순조24년) 14살. 삼년 상례(喪禮:아버님)를 치르고 5월에 전라도 임실관청에 관사로 갔다. 나는 상사(喪事) 두 번을 당한 후로 몸이 몹시 상하여 원기가 온전치 못하여, 정기도 빠져 나간 것이 형체만 간신히 살아있을 뿐이므로 사람들이 위태하다 하였다.
고모부 하우(何愚)이공(李公)은 마침 임실현감으로 계실 때이라, 고모께서 사람은 시켜 말을 태우고 데려가게 하였다. 동행한 내종제 노화(內從弟 老華)는 갓 10살인데, 총명하기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여 문예(文藝)가 출중하였다. 책을 보면 그 자리에서 몇 행 줄줄이 읽어 내려갔으며, 한밤 지난 후에도 오륙십 행을 막힘없이 암송하여 하나도 틀림이 없건만, 나는 파리하니 기운이 빠지고 정신이 흐려져서, 3년 동안 독서를 폐하니 가슴에 글자 하나 없다. 책을 대하면 혼몽(昏懜:정신이 흐리고 가물가물함)하여, 앉으나 자나 백번은 읽어야 그 뜻을 알아 낭송할 수 있었다. 예전에 신동소리 듣던 총기가 오간데 없이 사라지고, 지금은 몹시도 우둔하니 생판 딴 사람 된 것이 원통하기 이를 데 없고, 아무리 기를 쓰고 분발해서 파악이 된들 이내에 잊어버리는 페인이 되었다. 선생도 안쓰럽게 여기여 시험해 보려고 후토(后土:토지의 신)란 제목을 주며, 즉석에서 응답하되 운(韻)은 매(妹)자로 하라함에 나는 곧 “천왕이 토지신의 왕후로 맞이하였으니 묻노니 있는지 뉘 집 딸인고. 이어서, 그 아래에 십여구(十餘句)를 입으로 읊었더니 선생이 빙그레 웃으면서, “대단히 진부하여 날카로운 새 맛은 없으나 그 가운데는 숨은 재주가 있어 또한 쓸 만하다.” 하셨다.
병술년(1826순조26년) 16살. 고모를 모시고 상경하고 가을에 사향(沙鄕)본 집에서 관례의식을 거행하다. 하우공(何愚公)이 경상도 금산군수로 전직되자 고모를 모시고 가서 군수 관사에서 지냈다.
정해년(1827순조27년) 17살. 충청도 황간 창촌 조씨 댁에 예물을 보냈다. 조씨는 매계(梅溪)의 후손인데 대대로 금산의 봉계(鳳溪) 매계(梅溪)의 산소 아래 살고 있고, 창춘은 봉계에서 5리 떨어진 곳이다. 그때는 나도 이미 성장하여 하우공이 나의 배필을 골라 3월 3일에 혼례식을 거행한 후, 신부 친정부모를 뵈러 갔다가 사향(沙鄕)으로 돌아오고, 다시 금산관사로 갔다. 4월에 하우공이 익종대왕(翼宗大王) 정시(庭試)의 대리로 발탁되어, 특별히 교리를 배명 하시고, 나는 고모를 모시고 상경하였으며 실인(室人:집사람 또는 처)은 사향으로 돌아왔다. 가을에 감시(監試:생원, 진사의 과거. 국자감시)에 응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하우공이 경계하시며 남의 문장을 빌리지(표절) 말라는 말씀을 듣고 끝내 자작자서(自作自書)하였다. 옆의 사람이 속히 답안지를 받치고자 나의 시문을 빌리려고 하였는데, 한구절도 쓰지 않고 있다가 시편 하나의 구상과 자구배치가 완성된 후에 쓰는 것이었으니, 좌우 사람이 좀 보이라고 아무리 재촉하여도 요지부동으로 정서하는 데는 글자 한 획도 빠뜨리지 않고, 답안지를 바쳤을 때는 과장에는 한 사람도 없고 이미 하오 5시 무렵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답안제출 시간이 지난 다음인데도, 끝까지 눌어붙어 앉아서 답안을 완성하는 것을 보고, 평범한 정신력으로는 미치지 못하는 바이라 하였다.
경인년(1830순조30년) 20살. 여름에 몹시 앓기를 서너 달 동안은 거의 소생 못 할 것 같은 지경이다가 가을에야 다소 회복하였을 뿐이라 감시(監試)에 응시 못하였다.
신묘년(1831순조31년) 21살. 하우공(何愚公)이 여주현감(驪州縣監)으로 부임하시니 고모를 모시고 가서 관사에 있었다.
임진년(1832순조32년) 22살. 하우공(何愚公)이 식구들 모두 거닐고 고향으로 돌아오시니 고모를 모시고 광주 노곡(廣州 老谷)으로 가 있었다.
계사년(1833순조33년) 23살. 6월 10일에 고모님이 돌아가셨다. 갑신년 후 10년 동안 나를 쓰다듬으며 키워주시고, 나에게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 주신 것이 당신이 나으신 것과 다름이 없어, 내가 죽게 된 것도 되살아나게 해 주신 분이건만 나의 운명이 기박하여 별세하시니, 어머님을 여읜 듯한 아프고 원통한 심정에 살고 싶은 마음도 없으나 어찌 할꼬. 대공(大功)의 법으로 아홉 달을 굵은 베의 상복 입는 것을 어길 수 없고, 또 참아 심상한 상복으로 지네 수도 없어, 장사(葬事)전에는 소복(素服:흰 옷)을 입었고, 장사(葬事)후에는 연복(練服:소상 뒤에 있는 상복)을 입었다.
갑오년(1834순조34년) 24살. 3월에 예부(禮部:예조(禮曹))에서 행하는 시험에 응하였다가 실패하니, 하우공이 내가 받쳤던 답안에 시초를 보시고 한탄하시며 말씀하셨다. “사오십년 이래에 이 같은 수작이 없었구나, 만약 시험관이 공평무사 하였다면 낙방할리가 결코 없을 것이었다.” 그리고, 과거 볼 때에 주의할 점을 일러주면서 위로하며 권장하셨다.
을미년(1835헌종1년) 25살. 감시(監試)에 응하였으나 실패하자 하우공(何愚公)의 말씀이 “너를 시켜서 자작자서하게 한다면, 마감 시간까지 답안지를 제출할 수가 없구나.(답안의 문장을 구성하고, 짓고, 그것을 정서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므로.) 네 아우 식연(植淵)이 과거체(過擧體)도 잘 쓸 터이니 아우보고 한번 쓰게 하려무나.” 이로부터 예측되는 출제에 대한 답안을 써서 주었는데, 그것을 암송하고 있던 아우가 시험에 나아가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한 것을 보고는 그 흐뭇이 기뻐하였다.
병신년(1836헌종2년) 26살. 감시(監試)에 나갔다가 마지막 시험장에서 참여했던 아우를 만나, 파주 임진 신씨(臨津 愼氏)댁으로 장가들기로 하였으니 신씨(愼氏)는 곧 중종의 부인인 신수근(愼守勤)의 후손이다.
정유년(1837헌종3년) 27살. 회시(會試)에 응시하였다가 실패하였다. 어머님 환갑생신이 2월 28일이어서 이달엔 일가친척들이 모이는 까닭에, 이번엔 합격해서 생신날 어머님은 기쁘게 해 드리고자 남몰래 희망하고 있던 터이건만, 내 노력과 정성이 부족하고 운수도 기박하여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4월에 광주 궁평(宮坪)으로 이사 했으니 노곡리에서 십리 되는 곳이다. 살림이 지극히 비난하고 어머님 연세도 많으셔서 곁을 떠날 수가 없는데다 하우공과도 차마, 서로 떨어지지 못하여 부득이 그 가까이에 옮겨서 수시로 왕래하기 위함이다.
기해년(1839헌종5년) 29살. 신대장(申大將) 빈집을 빌려들었다. 고향을 떠나서부터 살길이 더욱 궁색하여 가옥, 대지를 싸게 팔아서 고작 50금이었다. 마침 동네에 신대장경(申大將 絅)의 집으로 전에 묘막이었던 것이었다. 집주인이 원하는 사람에겐 빌어 살게 하였는데, 도깨비장난의 재앙으로, 두 번이나 주인이 바뀌었으니, 혹은 목을 매달아 자살한 사람, 혹은 미쳐서 울부짖다가 병들어 죽은 사람이 있어서, 종내 흉가라 하여 집을 헐 작정이었다. 이런 까닭에 본래 집주인에게 싼값으로 빌어서 이사하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변고가 날 것이니 위태하다고 수군거리다가, 한참 지나서는 모두가 감탄하며 말을 주고받았다. “그전에는 도깨비불이 밤마다 뒷산에서 떼 지어 내려와서 법석을 떨며 이 집에 들어 닥치면, 집주인은 어김없이 발광하여 소리소리 온 밤중 외쳐댔었지. 그러던 것이 요즘엔 그 도깨비불이 이집 뒤에 와서는 훌쩍 꺼지기도 하고, 제 풀에 돌아서 슬며시 가기도 하니, 거 참 이상한 노릇이네.”
재작년 봄에는 내종제(內從弟:고종사촌 아우)가 사마(司馬:진사(進士))시에 합격하여, 이로부터는 과거준비의 공부에만 전력할 수 없기로 집에서 매일 같이, 독서하려고 빌려온 고문기서(古文奇書)와 고문잡저(古文雜著)가 한 권 있다.
경자년(1840헌종4년) 30살. 3월에 누이 혼인으로 면천(沔川) 객포(客浦) 이씨(李氏) 집에 들렀다. 즉 용재(容齋:좌의정(左議政) 이행(李荇)의 호)의 후손이다.
신축년(1841헌종7년) 31살. 충청도 처가댁에 갔다가 돌아왔다. 내 혼인 후로 15년 동안 한 번도 가지 못하였다가, 정월에 처형 조진사 형제가 하인과 말을 거닐고 와서 장인께서 나를 한번 보고 싶어 하신다기에, 동행하여 창촌(倉村)에 머무르기를 수십일, 2월에 돌아온 것이다. 3월에 하우공(何愚公)의 상을 당하여, 총복(銃腹:총열의 빈속이나 속표면)에 가마(加麻:소렴때에 상제가 처음으로 수질을 머리에 씀)차림으로 서울에서부터 영구(靈柩:시체를 담아 넣는 관)를 따라 내려와서 노곡(老谷)에 머물러 있었다. 내 14살 이후로 유달리 키워 주신 은혜가 친아들에게 베풂과 같아서, 일마다 때마다 일러주시고 경계하여 주신 분인데, 지금 갑자기 내 마음의 의지를 읽고 나니, 옛 일의 서러움에 내 슬픔이 덮쳐 견딜 수가 없다. 예법으로는 아버님과 진배없는 어른이기에 3년 상복으로 받들어야 마땅하건만, 스스로의 재량에 성심도 부족하여 이해 못 할 것이므로, 3년 대신 석 달만 상복 하고 4월에 졸곡한 후 집으로 돌아왔다. 3월에 정시(庭試)가 있었으나 장래 전이라서 가지 않았더니, 하우공(何愚公)의 종씨인 이상서 경재(李尙書 經在)께서, “고모부 장례를 지켜서 일생의 대사인 과거도 보류하는 이러한 의리와 예의는 옛 현인들도 실행하기 어려웠던 일이라.”며 감탄하였다.
임인년(1842헌종8년) 32살. 2월에 이씨댁(李氏宅)으로 출가한 누이가 병이란 소식을 듣고 면천(沔川) 객포(客浦)에 가서 데리고 왔다. 8월에 어머님이 세상 뜨셨다. 어머님은 춘추 66세에서도 기력이 강건하셨는데, 7월부터 이질로 편찮으시더니 못난 내가 신명(神明)에 죄가 많아, 8월 14일에 끝내 돌아가시게 하였다. 오호 뼈저린 서러움에 울며불며 9월에 집뒤에 임시 장사지냈다.
계묘년(1843헌종9년) 33살. 4월에 이매(李妹:이씨로 시집간 누이)가 작고(作故:사람이 죽음). 누이는 수년 동안 중병으로 앓다가 끝내 이달 27일에 절명하니, 가슴 찢어지는 아픔을 어찌 감내할 고. 관을 집 앞 빈소에 안치하였는데 7월에 그 사돈어른 와서 영구를 싣고 객포(客浦)로 돌아갔다. 8월에 어머님 산소의 면례(緬禮:무덤을 옮기고 다시 장사지냄)를 이천(利川) 오천역(午川驛)의 뒷산 기슭에 터 잡고, 26일에 안장하였다. 이달에 안질(眼疾:눈병)을 알아 두 눈이 거의 실명할 지경이었다가, 12월에야 병세가 다소 호전되었다. 나는 본래 남다른 안광이 있어 밤하늘을 우러러 별자리 찾기를 시험할라치면, 딴 사람은 보지 못하는 곳까지 나는 번번이 발견하는 것이었건만, 상사(喪事)의 불행을 거푸 겪었고, 예학(禮學)책의 잔글자를 베껴 쓰다가 안질이 생겼으며, 다행히 실명 하지 않았으나 갑자기 눈에 정기가 없어지니, 물체를 보아도 다시는 그 전과 같지 않았다.
갑진년(1844헌종10년) 34살. 어머님의 3년상을 마치고 내종재 노화(老華)와 종인 고산(古山) 주교(周敎)와 종중서당 선생인 박용담(朴龍潭)과 노곡에서, 회동하여 돌아가면서 글을 짓고 토론하니 위로는 하늘로부터 인간이 부여받은 성명으로부터, 아래는 역대 태평정치와 혼란시대의 자취에 이르기까지, 고금에 인간과 사물에 관하여 강구하지 않은 것이 없어, 두 권으로 편집하여 화동필담(華東筆談)이라 이름 붙였다.
을사년(1845헌종11년) 35살. 가을에 감시(監試:생원, 진사를 뽑던 과거)에 나갔으나 실패하였다. 좌우 내 옆에서 접촉한 사람들로 심심풀이로 쓴 나의 시편원고를 구경삼아 읽어본, 사람들은 다섯 명이나 합격되었건만 나만 꺾이었다.
병오년(1846헌종12년) 36살. 2월 25일 정시(庭試)에 나아가 병과(丙科:조선시대 과거 급제의 등급 중 셋째등급)에 제3인으로 합격하였다. 3월 21일 방이 난 이튿날 은혜를 사례한 후에 희정당(熙政堂)에서 상감을 뵈온자리에서, 승정원(承政院)의 가주서(假注書:정7품, 기록관의 임시직)에 으뜸 추천되어 낙점 되고, 예규(禮規)에 따라 부역에 증발되지 않으며 살인죄 외의 죄는 체포감금 되지 않는 특전을 받았고, 3일 동안 유가(遊街: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광대들에게 풍악을 울리며 선배 친척들을 찾아보는 일)한 후에 궁평으로 돌아와서 오천(午川) 아버님 산소에 과거급제를 아뢰고, 신월리(新月里)에 가서 제문을 지어 하우공(何愚公) 산소에 고 하였다.
4월에는 또 사향(沙鄕)에 선조산소에 참배하여 여쭙고, 양천(楊川) 외조모 산소에서 배례하였다. 이달에 내종제가 식구를 거느리고 상경하였다.
5월에 서울에 가서 신문(新門)밖의 내종제집에 머무르고 6월에 집으로 돌아왔다.
7월에 창촌(倉村)에 갔다가 8월에 돌아오고, 9월에는 면천(沔川) 큰 형수님을 뵈오러 갔고,
10월에는 충주 능암에 사천선생(沙川先生) 산소에 배례하여 고하고, 12월에 상경하고 승문원(承文院)의 부정자(副正字:종9품)로 배정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정미년(1847헌종13년) 37살. 5월에 상경하여 가주서(假注書)로 임명되었다. 때에 헌종(憲宗)께서 “말직가관(末職假官)의 기록이 서투른 것을 엄히 밝히시어, 이들의 과실을 의금부(義禁府)에서 심리(審理)하게하고, 계속해서 분부하시기를 서울에 있는 사람으로서, 적격자를 추천해 올리되 향리사람은 새삼 천거하지 말라.”하심에 명대로 다섯 사람이 지정되어 번갈아서 이행하기를 서너 달에 도승지(都承旨) 조봉하(趙鳳夏)가 아뢰어, “이것은 결정해놓고 오래 시행할 일은 아니옵니다. 청컨대 향리에 있는 사람으로서 문학이 합당한자를 골라 뽑아서 시키시옵소서.”하여 내가 그 제일인자로 낙점 되었고, 6월 7일에 이르러 비로소 교체되었다.
10월에 고동(雇洞)에 초가집 한 채를 사고 식구들 모두 상경하였다.
12월에 숭능(崇能:헌종(憲宗))의 별검을 배명하였다.
무신년(1848헌종14년) 38살. 5월에 팔능(八能:함경도에 있는 태조의 4대 추종왕 및 왕비의 여덟 능) 보수공사의 감독관으로 임무를 다하여 승진되어 5위의 정6품 사과(司果)가 되고, 6월에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로 7월에 교체되었다.
기유년(1840헌종15년) 39살. 4월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정5품)을 배명하고, 헌종께서 승하하심에 곡하는 반열에 들었다. 철종(哲宗)이 즉위하시고 순원왕비(純元王妃:순종의 비)께서 수렴청정하시니, 나아가 경하(慶賀)드리고 성복(成服:초상이 나서 닷새 후에 상복을 처음 입는 일) 후에 대청에 모여 함께 상주하는데 참가하였는바, 국청을 설치하여 의관들을 신문하여 헌종(憲宗)의 병환에 약을 잘못 쓴 실정을 밝히고, 책임자인 제거(提擧)를 귀양 보낼 것을 청하였다. 며칠 지나서 내의원(內醫院), 사헌부(司憲府) 양사(兩司)의 벼슬을 바꾸라고 하명이 있었다.
경술년(1850철종1년) 40살. 4월의 무과복시(武科覆試)의 시험관이 되었다.
신해년(1851철종2년) 41살.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에 딸린 경기도사(京畿都事:종5품)를 배명 하였다가, 2월에 군직(軍職)으로 바뀌었다.
계축년(1853철종4년) 43살. 정월에 문신 겸 선전관(宣傳官)으로 임명되었고, 2월에 병조이군색정랑(兵曹二軍色正郎:2군색은 병조(兵曹)에서 군인(軍人), 군마(軍馬), 군복(軍服)을 관장하는 부서)로 바뀌고, 8월에는 어가를 모시고 창릉(昌陵)에 갔다 오고, 10월에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종6품)을 배명하였다. 때에 죄인 김수정(金守禎)이 있어 국청을 마련하라는 명을 따라 국청에 나가 앉았다.
11월에 국청에서 상주(上奏)한대로 판결하는 명이 내림으로, 분부 따라 시행할 것을 아뢰고 비답(批答)을 받고 내전 앞에 엎드렸고 교체되었다.
갑인년(1854철종5년) 44살. 4월에 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종4품)을 대명하였는데, 그때 사헌부 사간원(司憲府 司諫院)에서 이미 처벌된 죄인의 이름을 적어서 올린 문서 중에서, 이서구(李書九)의 이름을 빼라는 명이 있어 양사에서 연명으로 상주하였더니 교체되었다. 10월에 내종제의 집을 빌려 들었으니, 당시 내종제는 태인현감(泰仁縣監)으로 나가 있었다. 아버님 산소의 면례를 이천으로 봉행하여 어머님과 합장하였다.
을묘년(1855철종6년) 45살. 4월에 평양에 갔다. 그 무렵 송서공 이경재(松西公 李景在)는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있었기로, 그 백씨인 이참판 창재(李參判 昌在)가 동행하자 하여 여러 명승지에 유람하여 열흘 만에 돌아왔다.
정사년(1857철종8년) 47살. 2월에 정시문과초시(庭試文科初試)의 시험관을 맡았고, 윤5월에 장악원정(掌樂院正:정3품)을 배명하였다. 8월의 순원왕후(純元王后)께서 승하 하셨다.
11월에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배명하고, 12월 국장에 어가를 배종하여 인릉(仁陵:순조)에 갔다 왔다.
무오년(1858철종9년) 48살. 정원의 장령(掌令)에서 교체되어, 4월에 특별히 홍문관 부교리(弘文館 副校理)에 임명되었다가, 바뀌어 5월에는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종3품)을 배명하였는데, 6월에 상주(上奏:임금에게 아룀)하여 교체되고, 동지사(冬至使:해마다 동짓달에 중국으로 보내는 사신)의 서장관(書狀官)을 배명하고, 8월에 홍문관(弘文館)의 수찬(修撰)으로 전직 되었다.
9월에 고동(顧洞)으로 이사하고, 10월에 사복시 정(司僕寺 正:국왕을 호위 정3품)을 배명하여 12월에 바뀌었다. 10월 26일에 출발하여 12월 25일에 북경(중국의 황성)에 도착하였다.
기미년(1859철종10년) 49살. 2월 4일 북경 출발, 3월 19일에 돌아와서 복명하였다. 이번 길에 기행문(紀行文)이 있으니 연사록(燕槎錄) 즉 북경(北京:연경(燕京))에 가고 온 기록이다. 이달에 수찬(修撰)을 배명하고 4월에 바뀌었다.
경신년(1866철종11년) 50살. 3월에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을 배명하였는데, 윤 3월에 인릉(仁陵)에 납시었는데 호종(扈從)하였고, 4월에 다시 사간으로 돌아오고, 5월에 경우궁(景祐宮) 행차에 배종관(陪從官)으로 차출되었다. 6월에 부수찬(副修撰)을 배명하고, 9월에는 큰 형수님 상을 맞아 10월에 사천으로 가서 장례를 치렀다. 11월에 전직 되어서 부수찬에서 교리(敎理)에 임명되고 12월에 바뀌었다.
신유년(1861철종12년) 51살. 정월에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종3품)을 대명하고, 이어서 전라도경시관(全羅道京試官)에 임명되었다가, 2월에 와서 다시 사헌부집의로서 전라도순창(全羅道淳昌)으로 선비시험의 시험관(試驗官)으로 갔다. 한 결같이 공정하고 강직하게 하여서 온갖 청탁을 일절 뿌리쳤다. 부시험관(副試驗官)인 강진(康津)사람 신명화 부관(申命和 副官)이 자기가 15명을 쓰려고 하다가 못 하게 되자 못된 거동이 많았다. 그러나 합격자 발표가 난 후에 시험에 낙제한 자들도 그 결과를 보고서는 억울하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만고공도 일단청풍(萬古公道 一團淸風)』이 여덟글자를 써서 장대 끝에 높이 걸고 풍악을 잡히고 크게 즐겼다. 3월에 돌아와서 복명하고, 4월에 충청도 영춘(忠淸道 永春)에 갔다. 작년에 백모(伯母)가 별세 하시고, 누님은 영춘 한곡(永春 閑谷)으로 이사 가셨는데 한번 간다고 벼르기만 하다가 이번에야 나선 것이다. 백모(伯母) 궤연에 곡(哭)하고 누님을 뵙고 5월에 돌아와서 당숙이 타계하셨다는 소식을 받았다. 전년에 집의(執義) 아우가 당숙의 양자로 들어갔는데, 이에 상을 당한 것이다. 사천(沙川)에 가서 상복 하고 돌아왔다. 6월에 사간원도정(司諫院道正)을 배명하고 승지(承旨)로 물망에 오르더니 교리(校理)로 임명되었다가 7월에 교체되었다. 8월에 종숙(從叔)의 장례에 참여하고, 9월에 돌아오고, 충주 지장리(忠州 地藏里) 족제(族弟) 상연(翔淵)의 둘째아들을 양자로 삼고 이달에 데려왔는데 나이 열두 살이다.
임술년(1862철종13년) 52살. 4월에 교리(校理)를 배명하고 5월에 교체되었고, 7월에 부수찬(副修撰:종6품)에 임명되었는데, 국청에서 죄인 이하전(李夏銓)을 제주로 귀양 보내는 일로 삼사연명(三司聯名)으로 상주 한 다음 상감과 대면하기를 청 했다가 삼사를 다함께 인사이동 시키라는 명을 받았다.
계해년(1863철종14년) 53살. 7월에 어영청 대장(御營廳 代將) 김병기(金炳冀)가 사퇴함에 8월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정6품)을 배명하였다가, 바뀌어 어영청 어랑(御營廳 御郞)으로 임명한다는 말씀을 받고 공손히 감사하였는데, 전에 사간원 때 일에 혐의를 피하고 상주하여 교체되었다. 12월 8일에 상감께서 승하하심에 궐 밖에 엎드려 곡 하였다.
갑자년(1864고종1년) 54살. 정월에 부교리(副校理)를 배명하고 바뀌어, 3월에 집의(執義:종3품)을 배명하였다. 때에 심의면(沈宜冕) 부자와 김시연(金始淵) 일로 3사가 연명으로 상주하여, 모두 파직시키라는 명을 받았는데, 그 이튿날엔 그대로 복직시킨다는 분부가 내렸다. 8월에 집 아이의 혼례에 장단의 윤씨 집에 들렀다 윤씨는 곧 오음(梧陰:선조떄 영의정을 지낸 윤두수의 호)의 후손이다. 9월 전날에 후보자로 천거 되었던 나를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 同副承旨:정3품)로 하명하시니 각별한 은혜이다. 이때에 칙사(勅使)의 행차가 있어 명을 받들어 어가를 배종하여, 모화관(慕華館:중국의 사신을 접하던 곳)으로 감에 부호군(副護軍:외직의 종4품)으로 교체되었다.
을축년(1865고종2년) 55살. 3월에 혼인 후 1년 친정에 있다가, 시댁인 우리 집에 온 자부의 신행례식(新行禮式)을 치렀다. 9월에 누님의 별세 소식을 들었다.
병인년(1866고종3년) 56살. 8월 양요(洋擾:프랑스 군함의 강화도 침입)로 말미암아 시장에 쌀이 없어 굶게 되었으므로, 집사람을 사천(沙川) 아우 집으로 보냈다. 9월에 양적이 강화도를 점령하며 영문(榮問:사령부)를 설치하였다. 10월에 양선이 물러났으므로 진지를 철수하고, 이것을 위에 보고하고 사천(沙川)으로 들어와 통산(通山)에 집을 빌려 살았다.
기사년(1869고종6년) 59살. 정월에 화제를 만났다. 점포 뒷집을 빌어 살았다. 2월에 병조참지 (兵曹參知:정3품)을 배명하고, 이어서 참의(參議)로 올렸는데 서울 사대문 밖에 거주자라는 이유로 교체되었다. 4월에 백운산 아래에 집을 짓고 이사하였다. 6월에 돈녕부 도정(敦寧府 道正:정3품)을 배명하였으나 문 밖에 거주라는 이유로 교체되었다. 12월에 당질의 혼례식을 광주 복평(廣州 福坪)에 이씨 집에서 거행하였다. 신부는 감역(監役) 호석(鎬奭)의 딸이다. 3일 후에 새색시가 처음 올 때에 올리는 신부예의식(新婦禮儀式)을 거행하였다.
병오년(1870고종7년) 60살. 3월의 제주(祭主) 이름을 바꾸었다. 형님이 돌아가신 후 40년을 내가 임시로 선조 제사를 받들고 왔거니와, 형수께서 생존 시에 내아우의 아들인 동섬(東暹)을 종손으로 하였는데 이제 다 자랐기로 제주(祭主) 이름을 동섬(東暹)으로 갈게 된 것이다.
신미년(1871고종8년) 61살. 12월에 환갑 생일을 지냈으니, 친지들의 축하시문(祝賀時文)이 더러 있었다.
임신년(1872고종9년) 62살. 9월에 소실(小室)을 데리고 상경하여 정동(貞洞) 셋집에 들었다. 당질(堂姪)인 동섬(東暹)이 이미 종사를 받들고 있으나, 집도 땅도 없으므로 집과 메마른 땅 몇 마지기를 마련해주고, 서울 와서 객지생활을 하게 되었고, 오직 몇 말 안 되는 박봉만이 목숨을 붙이는 생계이었다.
계유년(1873고종10년) 63살. 8월에 유동(鍮洞) 내종재의 작은 집으로 이사 갔다. 내종재가 마침 담양 현감(潭陽 縣監)으로 나가 있었으므로 빌어 들렀다가, 9월에 제동(齊洞) 초가집을 사서 이사하고 사향(肆鄕)의 집 식구들을 데리고 왔다.
갑술년(1874고종11년) 64살. 10월에 형님의 면례(緬禮:무덤을 옮기고 장례를 치루는 일)를 거행하여 형수 오른쪽에 합장하였다. 전날에 천거되었던 동부승지(同副承旨)를 배명하고,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올랐다가, 갑자기 동부승지(同副承旨)로 강등되고 11월에 그 직도 바뀌었다.
병자년(1876고종13년) 66살. 3월에 홍현(紅峴)으로 이사하였다.
정축년(1877고종14년) 67살. 11월에 집사람을 사향(肆鄕)으로 보내고 소실을 데리고 맹현(孟峴)으로 이사하였다.
무인년(1878고종15년) 68살. 도정(都正:정3품직으로 종친부(宗親府) 또는 훈련원(訓鍊院)에 속한 벼슬)으로 함경도 안변부사(安邊府使)를 배명하여 8월에 부임하였다. 10월에 왕대비전(王大妃殿)의 장례에 제관으로 차출되어 상경하여 능 아래, 곡반(哭班:국상 때에 곡을 하는 벼슬아치)에 참여하고 임지로 돌아갔다.
기묘년(1879고종16년) 69살. 정월에 생원, 진사시험의 부감독관으로 차출되어 순찰사가 집무하는 순영에 갔다가 왔다.
병진년(1880고종17년) 70살. 2월에 생원 진사 시험의 부감독관으로 순영(巡營)에 갔다가 왔다. 12월에 도목정사의 법규에 따라 안변부사 직이 만기가 되어서 교체되었다.
신사년(1881고종18년) 71살. 정월에 사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떠났다. 8월에 노화(老華)의 병 소식을 듣고 서울에 갔다가 며칠 후 돌아왔다. 9월에 별세 소식을 받고 그의 영전에 가서 곡 하였다. 나와 노화는 내종사촌 아우로서 정의(情誼)는 한 몸이었다. 제문을 지어 한 자리 통곡하고 돌아와서 석 달 동안 흰 상복을 입고 그를 잊지 못하는 예절을 다하였다.
노화(老華)는 어려서부터 어버이사랑 할 줄 알아 부모가 하시고자 하는 일에는 비록, 저는 하고 싶지 않아도 반드시 부모의 뜻에 순종하였으며 부모가 원치 않는 일이면, 제가 비록 간절히 원하더라도 반드시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낮밤으로 자자근근(孜孜勤勤) 공부하여 쉼이 없었으니 오로지 부모의 마음을 즐겁게 해 드리기 위함 이였다. 동리 아이들이 옆에서 떠들썩하게 놀이 하고 있어도, 그저 책을 붙들고 있는 것이었으며 아예 함께 어울리는 일이 없었으니 또한, 부모들이 그것을 바라지 않는 까닥이다. 이럼으로써 일일이 깨우치고 타이르지 않았어도 어른으로부터 꾸중 듣는 일이 도무지 없었다.
돌아가신 형님은 효도와 우애가 감천(感天)할 만큼 지성이어서 10살 되면서부터는 엄숙하기가 어른과 같았으며 항상 말하였다. “글을 읽고 공부하는 것은 옛 현인의 사업을 실행하기 위함이다. 그렇지 않다면 독서는 해서 무엇 할 것이고 비록, 우리가문이 영락 하였으나 문호를 일으켜 세우는 책임이 우리 형제에게 있으니, 인격을 수양하는 것과 과거시험공부를 아울러 힘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한 책상에서 공부하여 수시로 격려하며 노력하는 것이었으니, 그런 거로 서로서로 전심전력 애쓰고 공부해 전진하기를 침식을 거의 잊었으며 잠시도 떨어지지 아니하였다. 임오(壬午)에는 어머님 상을 당하여 형님은 예법의 절도를 집행함에 대단히 엄격하였는데, 나 또한 따라서 이행하였다. 형님은 끝내 생명을 잃게 되었고 나는 우둔한 것이 죽지 않고, 구차스럽게 한 줄기 연명하고 있으나 정신은 사그라져 나갔고, 형체와 뼈 많이 남아 있으니 신명께 죄 지은 것이 이다지 심하여 외로운 몸이 살아가는 낙이 없어 평생의 서러움이다.
나는 임오년 열두 살 때의 아버님 상과 그 이듬 해 계미년에 형님 상을 내리 당한 후 몸이 극도로 쇠약하여, 날마다 피를 토하며 거의 죽게 되었는데, 고모와 고모부인 하우 선생의 은혜의 덕으로 사람답게 소생 하였다. 고모가 돌아가신 후에도 하우 선생은 여전히 서로 떨어지기를 차마 못하였다. 내가 스스로 생각에 어머님 연세도 이미 많으시고 집안형편 영락 하였으나, 하우공 곁을 하직하고 갈 수는 없고 이래저래 정의가 절박하여서 궁평(宮坪)으로 이사 갔으니 노곡(老谷)으로부터 십리 되는 곳으로 왕래하기 편하고자 함이었다.
궁평은 본시 일반 서민들의 마을인데 부근 사대부 집안으로부터 학대받고 착취당한 일이 쌓였던 곳이라, 내가 거처를 정하고 살고 있음에 무슨 불구대천의 원수를 보듯하여, 같은 이유 지간에 물과 불도 서로 통하지 않는 듯하였다. 그러므로 나 또한 문을 닫고 들어앉아서 독서만 할뿐 저들의 짓거리에 아예 개의치 않았으며, 어머님께서는 천성이 티 없이 맑고 대범하시면서 예법에 엄정하셔서 비록, 씻은 듯이 가난하여 조석 때 굴뚝에 연기 나는 일이 없을 때도 동리사람들에게 손톱만큼도 요구하지 않으셨다. 이 같이 지내기를 여러달 하니 동리의 세력 꾀나 부리는 자들이 서로 경계하며 타이르기를 “김 아무개 이 분이 끼니를 설치면서도 꿋꿋이 염치를 차리고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거동을 보아하니, 그동안 우리가 이 양반에게 우악하게 대접하는 것이 마음에 부끄럽지 않을 수가 없네.” 그리고는 스스로 적대 감정을 거두니 촌사람들이 감화하여 나에게 와서 곡식생산을 늘리며 먹고 살아갈 방도를 의논하는 것이었다. 즉 “이 동리에 먼 곳에 사는 사대부집 농토가 있는데, 농군이 갈지 않는 고로 황무지가 되어버리니 본 주인이 헐값에 팔아버리려 하나 사려는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 이것을 사둔다면 세끼 먹는 밑천으로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리하여 백금을 꾸어 주었더니 그 토지를 사서 온 마을 사람이 협력 합심하여 개간하여 한해 추수가 30포대 인지라, 이로부터는 끼니를 거르는 고생을 모면하였으니 마을 사람들의 힘이다. 무릇 내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마을 사람들은 시키지 않아도 순종하였고, 그러기 위해서는 펄펄 끓는 물속도 훨훨 타는 불속도 피하지 않는 듯하였다. 한 번은 하우선생께서 한 겨울에 누워 않으셨는데 민물고기가 먹고 싶다 하셨으나 구할 수가 없었다. 집에 와서 실인(室人:자기 아내)에게 얘기하며 탄식하였더니 마을사람들이 듣고는 뒤질세라 다투어나가서 도끼로 얼음을 부수고 구멍을 파서 맨발로 들어가서는 큰 대접 가득이 고기를 잡았다. 그때 하우 선생께서 기뻐하시며 말씀하셨다. “나는 물고기 얻는 것이 기쁜 것이 아니라, 네가 능히 사람들을 기꺼이 이와 같이 복종하게 한 그 덕을 기뻐하는 것이다.”
내종재 노화는 재능이 탁월하고 식견이 해박하고 기상은 상쾌하며, 가문에 교훈을 고이 익혔고 말하는 것과 의논하는 것이 명실상부하여 정대하였다. 나와는 한 책상 한 밥상에서 20여년 지내기를 동기 형제와 같았을 뿐더러 서로가 지기 사이였다. 하우 선생께서 훈계 하신 일이 있다. “너의 형제는 서로 함께 노력하고 협력하여 매사에 상의하여 과실이 있으면 서로 뉘우쳐서 바로잡으며 지낸다면 세력에 밀려서 자빠지거나 모함에 빠지는 일이 거의 없을 것이다.”
나는 과거급제 후로 세 임금님을 섬기는 동안 임금님 앞에서 경서를 강론할 때는 글의 뜻을 분석하고 가려내어 간곡히 해명하여 왕도에 덕을 아뢰어 경계말씀을 드릴라치면 임금님께서 매양 귀담아 들으셨다. 동료가 간혹 그 뜻을 틀리게 상주하면 그 즉시에 다시 올바르게 아뢰었으니, 그 동료가 물러난 후에 나를 비난하는 사람이 글 뜻을 틀리게 여쭌 사람의 마음을 어찌 편안하리까. 하기에 나는 말하였다. “임금님께 경서를 강론하여드리는 황송한 자리에 있으면서 조그만 협의에 구애되어 임금님께 착오가 있게 하는 일은 내가 감히 할 수 없는 일이라오.”
독서에는 침식을 거의 잊고 길을 가거나 잠이 들면서도 묵묵히 경서(經書), 혹은 고문(古文)을 수십 편 중얼거리는 습관을 늦더라도 끊이지 않았다. 이전에 벗들과 경서에 참뜻을 문답하여 그것을 편찬한 것이 몇 권 되었는데 어떤 사람이 빌려가고는 잃어버렸다. 나는 벼슬의 진취에는 담박하여서 세상 변동에 따라 하지 못했고, 한 번도 고관을 찾아가서 승급을 바라는 말을 한 일이 없었으니 간혹, 옆의 사람이 처세하는 데에 옳지 않다고 귀띔하면 “영달하고 안하고 에는 천명에 달린 것이요.” 하였다. 그러므로 비록 늙어서 출입이 불편해졌어도 누구를 그 무엇을 원망하거나 야속히 생각하는 일이 없었다. 안변부사가 된 것 역시 공정한 의논이 상감님 뜻에 통한 것인즉 특별한 은혜이다.
기질은 맑고 약하였으나 심지를 갖기는 견고하였다. 나이 열댓이었을 때 관상쟁이가 나를 보고 “입술에 검은 사마귀가 있으니 이것은 술 벌레라. 술을 엄청 많이 마실 상이요.” 하였기로 고모부 하우 선생이 시험하려고 서너 잔 술을 마시게 하였는데도 취하지 않자 몹시 근심하여 말씀하셨다. “사람이 어쩌다 주색에 빠져버리면 패가망신하기 십상이니 나머지야 쓸 만한 것을 볼 것이 없다.” 그러나 나는 혼자 생각하기를 이런 일은 의지에 달려 있는 것인즉, 무엇을 걱정 하랴. 하고 이로부터는 술을 입 근처에 대지 않았으며 중년 이후의 간혹, 시 짓고 술 마시는 모임이 있어 옆 사람이 술잔을 권하면 반잔을 넘기지 않았다. 젊어서부터 여색은 가까이 하지 않았으니, 간혹 외지 고을에서 창기들이 애교를 떨며 다가와도 동침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것은 대체 한번 지키고자 결심한 것은 절대 흔들리지 않으려는 오기 까닥이다.
젊어서부터 가난한데다가 생업에는 어수룩하여 오직 실인(室人:아내)의 내조 덕으로 굶주림을 면하였다. 안변부사(安邊府使)를 그만두고 돌아온 후로는 고향 사향(肆鄕)에 깊이 묻혀 살며, 가사는 아들에게 맡겨두고, 산골짜기 오솔길을 거닐고 냇가 물고기와 노닐기도 하면서 자연과 어우러져 편안히 한 세상 떠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
추 기(追 記)
공의 자술(自述)은 공이 평소 기록하여 둔 것을 후손이 정리하여 유고의 말미에 붙인 것으로, 공이 삶을 통하여 자손에게 커다란 교훈을 남기신 것이다. 공의 효행과 형제의 우애, 인척간의 우위와 사우간의 신의며 관직생활의 청렴은 후손들의 본이 되었으며, 굳은 의지는 만인이 우러러 보게까지 한다.
공은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諱 仁伯)공 8세 손이며, 아버님은 종악(鍾岳)이고, 어머님은 원주원씨(原州元氏)로 정로(正魯)의 따님이며, 예조참판(禮曹參判) 계영(啓英)의 손녀이다.
공은 갑신년(甲申:1884고종21년) 10월 4일 돌아가시니 수가 74세요. 묘소는 화성군 일왕면 왕곡리 백운산 불당곡(現 京畿道 義旺市 旺谷洞 白雲山 佛堂谷) 자좌(子坐)이다.
배위는 숙부인 창녕조씨(淑夫人 昌寧曺氏)로 순명(舜明)의 따님이며, 정묘년(1807순조7년)에 나시고, 기축년(己丑:1889고종26년) 1월 20일 돌아가시니 수가 83세요. 묘소는 공과 합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