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쌍계정의 역사와 의의
Ⅰ서론
호남에는 예로부터 삼대명촌(三大名村)이 전해오고 있다. 나주의 금안마을, 영암의 구림마을, 정읍의 태인 원촌마을이다.
명촌은 풍수지리와 관련 있다. 풍수는 대체로 마을 뒤로는 산이 있고 마을 앞으로는 냇물이 흐르는 소위 배산임수(背山臨水)를 말하는데, 마을 안에는 강학을 할 수 있는 정자가 있고, 마을 앞으로 넓은 농토가 펼쳐져 있으며 마을 안에는 우물〔井〕 샘〔泉〕이 있어야 풍수상으로 취락(聚落)의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우물〔井〕은 움푹 파인 곳에 고인 물을 말하고 샘〔泉〕이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물을 말한다. 사람이 성곽 안에 갇혀 살 경우 먹는 물이 얼마나 주요하면 성곽 안에 우물〔井〕이 몇 개요 샘〔泉〕이 몇 개라고 표기해 놓았다. 나주읍성의 경우 맨 먼저 성곽의 둘레와 높이를 표기하고 이어서 우물〔井〕이 20개요 샘〔泉〕이 12개소라고 써놓았다. 이처럼 우리나라 취락은 먹고 마시고 사는데 편리한 곳에 취락의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나주 금안(金鞍)마을은 금성산 산맥의 동쪽 편 양지바른 곳에 취락을 형성하였는데 지형이 서고동저(西高東低)이기에 물은 서입동출(西入東出)로 흘러가 영산강 본류와 합친다. 이 마을에 고려충렬왕 때 원나라 황제가 제수한 한림학사 나주정씨 정가신이 태어났고, 나주정씨 가문에서 연이어 인물배출하고, 혼맥으로 이어진 고령신씨 처가마을로서 암헌공 신장과 신숙주를 포함한 다섯 아들이 태어나고, 여기에서 태어난 픙산홍씨 홍천경은 문과 장원급제하는 등 인물 배출이 연이어지니 마침내 호남 3대 명촌 중에 하나로 꼽히고 있다.
아무리 풍수지리가 좋아도 인물배출이 없으면 어찌 이런 명성을 얻겠는가? 그렇다면 인물배출은 명촌으로 지정받는 필요충분조건이다. 거꾸로 보면 훌륭한 인물 배출이 연이어지니 풍수가들이 여기에 맞추어 풍수지리를 부풀려 칭송한다. 이른 바 밭이 좋아야 씨앗이 잘 자라듯이 밭은 풍수이고 씨앗은 사람이다. 그러나 아무리 밭이 좋아도 좋은 씨앗을 심지 않고 잡초만 무성하면 그 터가 이름이 나겠는가? 그러므로 선행적으로 먼저 훌륭한 인물이 배출되어야 그 마을을 풍수적으로 보아 명촌으로 불려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풍수와 인물 배출이 모두 충족할 때 비로소 명촌으로 알려지게 되고, 인물의 배출이 이어지고 배출된 인물이 정치 사회적으로 거물이 되면, 마침내 구전으로나마 명촌으로 소문이 나게 된 것이다. 호남 3대 명촌 중에 하나인 금안마을은 이러한 명촌 조건을 모두 갖추었다.
나주 금안 마을 풍수 조건은 옛 그대로인데, 오늘날 탈농이촌(脫農離村), 이촌향도(離村向都)하는 성향 때문에 금안마을도 쇄락해져 가고, 다만 쌍계정이 옛 영화를 말없이 웅변하고 있다.
호남 3대 명촌이었던 금안 마을에 가보면 해묵은 쌍계정의 겉모습만 보인다. 그 속에 숨겨진 옛 사람의 향취를 찾아내지 못하면 명촌이라 소문났던 마을과 여타 일반 마을이 별반 다를 게 없어, 방문객들에게 감동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그래서 쌍계정에 숨겨진 옛 사람의 이야기를 펼쳐 보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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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호남의 명촌, 금안마을
금안(金鞍)마을은 먼저 금안이라는 마을 유래를 알아야 한다. 금안(金鞍)은 황금으로 꾸민 안장이란 뜻이다. 금안이 마을명칭이 되는 유래는 다음과 같다. 금성읍지 명기(名基)란에 금안동(金鞍洞)을 수록하였는데 “고려 충렬왕 때인 1290년 정당문학(政堂文學) 벼슬을 하던 정가신이 왕세자를 모시고 원나라 사신으로 가, 원나라 세조 황제로부터 한림학사로 제수되어 돌아오는 길에 금안장(金鞍裝)과 비단수레(金鞍繡轂)를 받았으며, 고국에 돌아와 금안장에 비단수레로 동네를 출입하므로 동네 이름을 금안동이라 하였다”라 하였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보면 정가신은 1284년, 1290년과 1296년 3회에 걸쳐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1290년(충렬왕16, 원 세조10)은 세자가 원나라에 갈 때 세자의 스승으로서 민지(閔漬)와 함께 수행하였는데, 1291년 원나라 황제의 성절(聖節/황제의 생일 명절)에 정가신이 황제의 명을 받고 오언절구 시한수를 지었다. 이 시를 짓게 된 배경은 고려사절요에도 있고, 정가신이 황제의 명의 지은 시는 중국 포털사이트에도 실려 있다. 내용을 요약하면
「황제가 세자에게 특진상주국 고려국왕 세자(特進上柱國高麗國王世子)를 제수하고 금인(金印)을 하사하였으며, 이어 수정배(水精杯)ㆍ서각연엽잔(犀角蓮葉盞)ㆍ옥배(玉杯)ㆍ진미(珍味) 등을 주어 총애하였다. 자단전(紫檀殿)으로 불려 들어가니, 황제의 책상 앞에 물건이 있는데, 크고 둥그스름하면서 약간 뾰족하고 빛깔이 정결하며 단단한 것이, 높이가 1척 5촌 가량 되고 그 안에 술 두어 말쯤이 들어갈 만하였다. 이는 마가발국(摩訶鉢國)이 헌납한 낙타조(駱駝鳥)의 알이었다. 황제가 세자에게 이것을 보이라 명하고, 이어서 세자와 시종한 신하에게 술을 내리며 정가신(鄭可臣)에게 명하여 시를 지으라 하니, 정가신이 시를 지어 올리기를,
알이라 했지마는 크기는 항아리라 有卵大如甕
그 속에 간직한 건 늙지 않는 청춘이리다. 中藏不老春
원컨대 황제께서 천세 수를 누리시고 願將千歲壽
황제의 훈훈함이 고려인에게도 미치소서. 醺及海東人
라 하니 황제가 가상하게 여겨 어갱(御羹/황제가 먹는 국) 한 그릇을 주었다」라 하였다. 충렬왕은 고려가 원나라의 부마국이 된 후 첫 번째 왕이니 왕비가 원나라 사람이기에 세자는 원나라 황제 세조의 외손자가 된다.
이 시의 제목을 「낙타조의 알을 읊다〔咏駱駝鳥卵〕」라고 하는데 낙타조는 타조를 말한다. 이 시를 음미해 보면 마가발국(摩訶鉢國)에서 황제에게 바친 ‘타조 알이 항아리처럼 크고 알은 늙지 않은 청춘을 의미한다 하면서, 황제도 타조 알처럼 천세를 누리시라 기원하고 축하의 술잔을 받은 황제가 취기가 돌아 기분이 좋아지면 그 기분이 해동인 즉 고려인에게도 미치소서’라 하였으니, 황제가 극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정가신이 원나라 체류 중이라 어갱(御羹)을 내려 주었지만 귀국길에는 금안장(金鞍裝)을 내려 주었을 것이다. 원나라로부터 금안(金鞍)을 받는 자라고 고려사에 기록 된 자는 시중(侍中) 김방경(金方慶)만 있다. 정가신의 금안(金鞍)은 전설처럼 구전되어 오늘날까지 사람들의 입에서 회자(膾炙)되고 있으니 흥미로운 일이다.
정가신은 1255년(고종42)에 문과급제하고 살아생전에 보문각대제, 승지, 정당문학, 첨의찬성사 세자이사, 지공거, 첨의중찬 판전리사사 세자사, 벽상삼한삼중대광 수사공((壁上三韓三重大匡守司空)을 하였으니 금안동은 과연 그 풍수에 정가신이란 인물 배출로 고려시대부터 명촌이 된 것은 분명하다.
<해설>
정가신 : 1244 –1298(향년75세). 1255년 문과급제, 본 나주, 아들 : 정탁(鄭倬)·정전(鄭佺)·정길(鄭佶)·정억(鄭億)·정엄(鄭儼)
중국 포털사이트 : 바이두/http://www.baidu.com/, 검색일 2020.12월 15일, 검색어 郑可臣 또는 咏駱駝鳥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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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안마을 풍수지리의 공간적 구조를 살펴보자.
금안 마을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금성산맥으로 이어져 있는데 가암산 –병풍산- 망산- 민등산 –옥산 –금안동(金鞍洞) –금성산(해발450m)- 장원봉(壯元峰)- 월정봉- 재신산(宰臣山)이 남북으로 4km 정도 길게 뻗어 있다.
가암산은 금성산맥의 북쪽 편으로 용의 꼬리에 해당하고, 금성산 주봉은 용의 머리 뿔에 해당하고 재신산은 남쪽 편으로 영산강을 마주한 용의 머리 부분이다. 그런데 뿔 부분인 주봉에는 마사일 기지가 들어섰고, 눈과 입 부분에는 나주시청과 전라남도 사격장이 들어서 나주 땅을 지휘하며 한편으로 우레 같은 총소리와 번쩍 빛나는 화약 불빛이 끊임없이 나온다.
금안마을은 용의 목덜미 뒷부분이다.
금안마을을 중심으로 보면 서쪽 편은 가칭 금성산 산맥이라는 용의 몸체가 길게 버티어 뻗어 있고 동쪽 편은 가칭 금안평야가 광활하게 펼쳐져있어 과거 농경사회에서는 풍요로움을 느낄 만하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이 있듯이 먼저 배가 불러야 공부를 하든, 일을 할 수 있다. 더더욱 금안마을에는 두 개의 물줄기가 하천이 서입동출(西入東出)로 흘러가는데 이 두 개의 물줄기는 금안마을 안에서 합쳐져 한 개의 큰물기가 되어 가칭 금안평야를 적신다. 이 두 개의 물줄기가 합쳐진 곳에 정자를 짓고 쌍계정(雙溪亭)이라 하였다.
쌍계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현재는 마루형으로만 되어 있는데, 이 마을 지킴이 홍각희(洪珏憙)가 쌍계정을 설명하면서 쌍계정은 맛배 지붕인데 남쪽과 북쪽 편에 처마를 달아내어 남쪽 방은 남하실(南厦室)이라 하여 스승이 묵었고, 북쪽편의 방은 북하실(北厦室)이라 하여 학동(學童)들이 묵으면서 공부하였다고 한다. 현재는 양쪽 하실(厦室)이 없어졌지만 기둥에 집을 덧달아냈던 자국이 옛 기둥에 흔적이 남아 있었다. 오늘날 쌍계정은 다만 풍류객들이 시주(詩酒)를 즐기는 곳으로 보이지만 과거에는 강학(講學)의 장소 기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해설>
홍각희(洪珏憙) : 당년 68세, 금안동에 보한재 학당을 개설운영하고 있음. 금안동의 다양한 자료를 수집 보관하고 있음. 나주시 문인협회 회장임. e-메일 : mdhon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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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안마을은 한림학사 정가신의 고향이지만 신숙주가 나주정씨 외가 마을에서 태어났기에 금안동이 고향이 된 것이다. 오늘날에도 신숙주의 생가 터가 발굴되어 언젠가는 관광 상품으로 개발하려고 계획 중이다.
신숙주의 아버지 신장(申檣)은 1402년(태종2)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吏曹正郎)으로 있던 1411년(태종11) 4월 감찰 신홍생(辛鴻生)의 사령장 처리를 지연시켰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그리하여 나주 처가〔羅州鄭氏〕마을인 금안동으로 낙향하여 쌍계정에서 1411년부터 1417년까지 학인(學人)들을 모아 예(禮)를 익히고 학문을 가르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또한 신숙주의 생년이 1417년이니 신장이 쌍계정에서 강학할 때 태어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쌍계정은 이미 1411년 이전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측되어 고려 충렬왕 6년이 정가신이 건립하였다고 추정하고 있다.
나주정씨 대종회장을 역임했던 정군섭(鄭君燮)씨가 쌍계정 문적(文籍)과 나주정씨 보첩을 참고해 쓴 『내 고향 명촌 금안동』이라는 글은 다음과 같다.
“쌍계정은 고려 충렬왕 6년 무렵(1280년) 나주정씨의 금안동 정착 선조인 설재공(雪齋公) 정가신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그 무렵 문정공 정가신(文靖公 鄭可臣)과 문숙공 김주정(文肅公 金周鼎)과 문현공 윤보(文顯公 尹珤)가 서로 학문을 연마하고 도(道)를 강설하였기에 삼현당(三賢堂)이라고도 한다. 조선조 초기부터 인조조(仁祖朝)에 이르기까지 호조판서 정초(鄭初) · 예조판서 정극기(鄭克己) · 현감 정계함(鄭繼咸) · 참판 겸 집현전제학 신장(申檣) · 병조판서 정식(鄭軾) · 성천부사 홍수(洪樹) · 함평현감 정서(鄭鋤) · 문충공 신숙주(申叔舟) · 귀래정 신말주(申末舟) · 문도사 성진(成晉) · 감찰공 정확(鄭穫) · 이조판서 송천희(宋千喜) · 왕자사부 김건(金鍵) · 이조정랑 정심(鄭諶) · 호조정랑 정상(鄭詳) · 형조참판 홍심(洪深) · 호조참의 홍천경(洪千璟) · 경원부사 정여린(鄭如麟) · 남강(南岡) 김려(金礪)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여기에서 강학하였다.”라고 하였다.
고령신씨 역대 족보에도 이와 같은 기록이 있다. 1754년(영조30)에 간행된 고령신씨세보인 진주보(晉州譜)의 신장(申檣)란을 보면 다음과 같이 써져 있다.
“임술년(1382) 윤2월23일 자시에 태어나 21세 때 성균관 생원이 되고 동진사(同進士, 1402년 식년문과)에서 4위를 급제하여 25세에 주서(注書), 29세에 이조정랑(吏曹正郎), 30세에 관직에서 파직되어 나주 금안동으로 물러나 괴목나무 아래〔槐樹下/느티나무〕 강단을 설치하고 일찍이 문생들과 겸손하게 예도(禮度)를 익히고 예(禮)를 강학하며 경서의 뜻을 이해시키고 품행과 도의를 신칙하고 격려하는 것을 날마다 일상화하니 마을사람들이 그 강단을 가리키며 존경으로 우러러 본받으니 공자(孔子)와 주돈이(周敦頤)ㆍ정호(程顥)ㆍ정이(程頤)의기풍이라 하였다.”
라 하였다.
여기에서 강학의 장소가 ‘괴목나무 아래(槐樹下)’라고 하였는데 바로 쌍계정 위치를 말한다. 오늘날에도 쌍계정에는 괴목 나무가 우뚝 섰는데 그 수명이 5백년이라는 말이 있으니 1280년경에 심었던 어미나무는 죽고 그 새끼나무가 다시 거목(巨木)으로 우거져있다고 보아야 한다.
한편, 쌍계정을 삼현당이라 불리는 이유를 추론해 보자.
삼현은 정가신, 김주정, 윤보를 두고 한말이다. 당시 쌍계정의 주인은 정가신이었을 것이다. 정가신은 문과 급제 후 충열왕 때 벼슬을 하며 원나라 사신으로 세 번 다녀왔다. 김주정도 문과 급제 후 원나라에 사신으로 두 번 다녀왔다. 윤보는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 윤보의 초기 기록이 누락되어 겨우 과거급제 기록은 있지만 연도를 모르고, 벼슬 경력도 1297년 밀직학사(密直學士)부터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 상황논리로 추론해보면 정가신, 김주정, 윤보가 서로 도의적 교류를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쌍계정의 주인인 정가신이 쌍계정에서 학당을 열고 김주정과 윤보를 초빙하여 특강을 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이 쌍계정을 삼현당이라 별칭한 것으로 여겨진다.
<해설>
김주정 : 1228-1290, 광주(光州) 사람, [고려문과] 원종(元宗) 5년(1264) 갑자(甲子) 갑자방(甲子榜) 을과(乙科) 1[壯元]위(1/25), 본 광산, 左副承旨, 右副承旨, 判密直, 文翰學士 承旨, 忠淸·全羅·慶尙道計點都指揮使,
윤보 : 1252-1329, 본 파평, 초명 尹文玉인데 과거급제 후 윤보로 개명, 列傳 卷第十七에 ‘詹事府錄事尹文玉’란 기록 있음. 성균감대사성(成均監大司成), 수문전학사(修文殿學士), 서북면도지휘사(西北面都指揮使), 수첨의찬성사(守僉議贊成事), 영평군(鈴平君) 역임
3) 족보 원문 : 洪武 壬戌 閏二月二十三日 子時生 二十一以成均生員 中同進士第四 二十五注書 二十九吏曹正郞 三十罷官 退去于羅州之金鞍洞 設壇槐樹下 嘗與門生 揖遜肄禮 禮訖講學 開發經義 飭勵行誼 日以爲常 鄕人指其壇而敬慕之 謂洙泗濂洛之風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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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쌍계정과 역사 인물
옛글에 보면 입향조(入鄕祖)란 말이 있다. 말 그대로 마을에 처음 정착한 성씨의 조상이다.
과거에는 백성들의 거주 목적의 이전이 제한되어 있었다. 거주지를 제한하는 것이 소위 본(本) 제도이다. 고려 시대의 본(本) 제도는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본관(本貫)이란 말로 등장한다. 조선조에는 본(本) 제도를 이어받아 호패법(號牌法)으로 주민의 거주 이전을 통제하였다. 당시에는 주민통제의 수단이 없기 때문에 국가가 지정하는 지역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 본(本) 제도이다
조선조의 호패법은 조선 전기에는 유이민(流離民)의 이탈방지를 위해 1413년(태종13)처음 실시되었고, 이후 잠시 중단되었다가 1459년(세조5)에 다시 시행한 후 조선 후기까지 실행되었다. 백성들의 거주지가 일정해야 부역을 균일하게 부과하기 때문이다. 남자 16세 이상이면 반드시 호패를 지니고 다녀야 했다.
조선조에는 3년마다 호주가 호구단자를 작성하여 지방 수령에게 신고하는 호구조사를 하였기 때문에 거주지 제한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거주지를 이전하려면 관아(官衙)의 승인을 받아야 했는데, 당시 혼인을 통해 거주지 이전의 수단으로 활용되었기에 남자들이 처가동네로 옮겨 살 수 있었다.
과거시험 합격자 방목(榜目) 기록에 반드시 본(本)이 기록되는데 여기의 본(本)은 혈통의 본(本)이 아니라 거주지 제한의 본적(本籍) 의미란 것을 알아야 한다. 성씨별로 본(本)을 받으면 그 후손들은 모두 그 본(本)에 소속된다. 그래서 과거에는 자자일촌이 많았던 것이다. 조선조 하반기 각성씨별 족보를 만들면서 본적 의미의 본(本)은 혈통 의미의 본(本)으로 바뀌었으며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 모든 백성은 성(姓)과 본(本)을 가질 수 있었다.
이상의 옛 풍습을 먼저 이해해야 쌍계정이 있는 금안동에 마을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
쌍계정에는 사성강당(四姓講堂)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이 말은 네 성바지가 강학(講學)했던 집이란 뜻이다. 네 성바지는 나주정씨, 풍산홍씨, 하동정씨, 서흥김씨를 말한다. 그렇다면 금안동은 네 성바지만 살았겠는가?
기록으로 보면, 금안동에는 나주정씨 제일먼저 입향 정착하고, 다음으로 고령신씨, 서산정씨, 풍산홍씨, 하동정씨, 서흥김씨 등이 혼인을 통해 혈연을 맺어 금안동에 들어와 살았다.
혼인은 거주지 이전의 수단도 되었으니, 금안동에 입향하는 성씨별 혼맥을 살펴보자.
고령신씨 신장(申檣,1381-1433)은 나주정씨 정유(鄭有)의 따님과 혼인하여 일정기간 처가살이를 하였다. 처가동네에서 다섯 아들을 낳았는데 모두 훌륭하게 입신출세하여 훗날 금안동 마을을 오룡동이라 별칭하는 말이 있다. 이조정랑 때 파직된 신장은 1411년 금안동으로 들어와 쌍계정에서 강학을 하다가 1417년(태종17) 12월경에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로 복직되어 상경하였으나 오룡동의 전설이 맞다면 막네 아들 신말주가 태어난 1429년까지 처가동네에 신장의 집이 있어 오간 것으로 보아야 맞다.
신숙주의 문집인 보한재전서의 연보에 보면 신숙주 7세에 청향당 윤회(尹淮) 문하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마침내 그 집안 사위가 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7세가 되는 해는 1423년이고 막네 신말주는 1429년에 태어났으니 대략 이 시기에 나주를 떠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령신씨는 금안동에 뿌리 내리지 않고 신말주 출생이후 모두 떠났기에 대동계에 고령신씨는 전혀 참여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한편 금안동은 지형이 배〔舟〕 형국이어서 동네 안에 기와집을 짓지 못하도록 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배 형국인 동네 안이 무거워지면 배가 가라앉기 때문이었다. 신장(申檣)은 처가동네가 배〔舟〕 형국이기 때문에 다섯 아들 이름에 주(舟)자를 넣어 맹주(孟舟), 중주(仲舟), 숙주(叔舟), 송주(松舟), 말주주(末舟)라 이름을 지었다. 그런데 신장은 물론 숙주, 송주, 말주가 문과 과거에 급제하였고, 신숙주의 세 아들 정(瀞), 준(浚), 형(泂)도 문과에 급제하였다. 거물급 인물이 연이어 배출된 것이다.
<참고자료>
윤회(尹淮) : 1380-1436, 호는 청향당, 병조참의, 예문관제학, 대제학, 병조판서를 역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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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1> 혼맥으로 본 금안동 입향조 | |||||||||
세 | 나주정씨 | 서산정씨 | 세 | 풍산홍씨 | |||||
4 | 可臣(가신) | ||||||||
5 | 佶(길) | ||||||||
6 | 文振(문진) | ||||||||
7 | 초(初) | 유(有) | |||||||
8 | 극기 (克己) | <婿> 서산인 정계함 (鄭繼咸) | 자신 (自新) | <婿> 고령인 신장 (申檣) | 서산정씨 정계함 (鄭繼咸) | 6 | 이(伊) | ||
9 | <婿> 창녕 성유수 (成有守) | 식(軾) | 외손 : 맹주,중주, 숙주 송주,말주 | <婿> 하동 정씨 서(鋤) | <婿> 풍산 홍씨 수(樹) | 7 | 수(樹) | ||
10 | 연필 (延弼) | 외손 성진 (成晉) | 승현 (承賢) | 8 | 귀지(貴枝) | ||||
11 | <婿> 창녕 成霖 | 관(觀) | <婿> 퍄평 尹愼德 尹宗孫 | 9 | 한량 (漢良) | <婿) 서흥 김씨 11세 감(鑑) | |||
12 | 염조 (念祖) | 10 | 효손 (孝孫) | ||||||
13 | 심(諶) 상(詳) | 11 | 응복 (應福) | ||||||
14 | 여린 (如麟) | 12 | 천경 (千璟) |
<표1>에서 본바와 같이 금안동에 맨 처음 정착한 성씨는 나주정씨란 것은 고려 충렬왕 때 정가신의 고향이란 점에서 짐작할 수 있다. 정가신의 증손자 유(有)는 사위로 고령인 신장(申檣)을 맞이하였다. 신장은 결혼하여 처가동네에서 살아서 다섯 아들이 금안동에서 태어났고, 훗날 다섯 아들 모두 훌륭히 자라서 다섯 용을 낳았다고 빗대어 일명 금안동을 오룡동으로 불렀다. 신장은 21세 때 과거 급제하였는데, 당시 남자 나이 15세〔지학(志學)〕이고 여자 나이 16세〔과년(瓜年)〕이라 하여 혼례를 하던 관습으로 보아 신장은 결혼 후 처가동네에서 살며 공부를 하여 마침내 21세 때인 1402년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고 추론된다. 그후 신장은 이조정랑으로 일할 때 파직되어 처가동네로 내려와 7년간 쌍계정에서 학동들에게 강학을 하였던 것이다.
또한 정가신의 증손자 초(初)는 서산인 정계함(鄭繼咸)을 사위로 맞이하였는데 정계함은 금안동 처가 동네로 입향 하여 살았다. 서산정씨 정계함은 풍산홍씨 수(樹)와 하동정씨 서(鋤)를 사위로 맞이하였는데, 이 두 사람도 처가동네인 금안동에 입향 하여 살았다.
풍산홍씨 홍수의 아들 홍귀지는 1480년(성종11) 식년시 사마시 시험에 합격하였는데, 이와 관련한 기록은 당시 나주향교 교수로 제자 10명을 한꺼번에 합격시킨 박성건(朴成乾)이 지은 금성별곡(錦城別曲에 사마시 합격자 10명 중에 홍귀지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
홍귀지는 영암 영보리에 사는 서흥김씨 10세 김유(金愉)의 아들 감(鑑)을 사위로 맞이하였는데 감(鑑)은 처가동네로 입향 하여 살았다.
정가신의 현손자 극기(克己)는 창녕인 성유수(成有守)를 사위로 맞았는데, 처가동네인 금안동에 뿌리를 내렸기에 금안동지 좌목에 성유수와 그의 아들 성진이 수록되어 있다. 금안동이 태생지인 성진의 호가 보한(保閑)인데, 금안동이 태생지인 신숙주의 호가 보한재(保閑齋)인 것과 무엇인가 일맥상통하는 점이 보인다. 더더욱 정극기의 외손자 성진이 1465년(세조11)에 문과 장원 급제하였는데 이때 신숙주는 영의정으로서 과시(科試)를 관장했던 책임자였다. 이 당시 금안동 출신 신숙주는 영의정을 하고, 금안동 대동계 회원인 성진은 문과 장원 급제하였으니 아마도 금안동의 명성이 전국에 쩌렁쩌렁 울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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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안동 역사는 쌍계정에 보관된 옛 서지류(書紙類)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서지류는 모두 옛 선인들이 직접 쓴 한자(漢字)로 되어 있다. 해방 후 한글세대를 위하여 알기 쉽게 이를 탈초(脫草)하여 현대 인쇄술로 간행하였는데 이때 판심제(版心題)를 쌍계정지로 썼는데, 어떤 이는 이를 쌍계정지로, 어떤 이는 금안동지라 책표지를 만들어 보관하였기에 금안동에는 책 표지 제목이 이처럼 두 가지가 있으나 두 책은 내용이 똑 같다는 점을 말해 둔다. 필자는 쌍계정을 금안동이 보듬고 있기에 금안동지라 하여 글을 썼음을 말해 둔다.
금안동지를 보면 1601년(선조 34) 임진왜란 직후 금안동의 사족인 나주 정씨, 하동 정씨, 풍산 홍씨, 서흥 김씨 등 4성씨가 주축이 되어 동중규약을 다시 재정비하고 예로부터 금안동 계에 참석하였던 인물을 열기해 놓고 이를
「동중구좌목(洞中舊座目)」이라 하였다. 좌목이란 말은 계원으로서 앉을 자리의 차례를 기록한 것이므로, 여기에는 충렬왕 때의 정가신부터 기록되었으며, 서문을 지은 장상 자신을 포함하여 117명이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구좌목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현존하는 금안동지에 실린 「동중구좌목」과 「동중규약」에는 금안동의 과거 모습을 유추할 수 있는 암호가 숨겨져 있다고 보아야 한다.
금안동지 「동중구좌목」에 나주정씨는 가신-길-문진-초·유-극기·극종·자신-식·로-석필로 이어지는 7대가 참여하였으며, 풍산홍씨는 수-귀지-한량·한의·한지·한신-효손-응복-천경으로 이어지는 6대가 참여했으며, 창녕성씨는 유수–진·정의 2대가 참여했으며, 서흥김씨는 입향조 김감의 둘째아들인 응전-봉수·봉기 2대가 참여했으며, 서산정씨 입향조 정계함도 참여하고, 정계함의 사위가 된 하동정씨는 서-확-효종-직(稷)·직(稙)의 4대가 참여하였음을 구좌목 명단에서 확인하였다. 그렇다면 다른 성씨도 대를 이어 대동계 참여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죽오당 김건과 그의 아들 김응련과 김응란이 구좌목에 실리지 않은 것으로 보아, 김건은 금안동에 거주 목적으로 이거한 것이 아니라 쌍계정에서 유숙하면서 학동들을 가르치러 온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금안동지 앞부분 쌍계정 유래에서 설재 정가신, 어은 정서, 죽오당 김건, 반환 홍천경의 약력을 소개한 것은 쌍계정 학당의 주된 스승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형 김감은 처가동네로 와서 거주를 하였기에 금안동 계에 참여하고 그의 아들들도 참여한 것이 구좌목 명단에 기재되어있다. 그러나 죽오당 김건은 영암 영보리 사람이었기에 금안동계에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분석된다.
이상과 같이 혼인에 의해 나주정씨, 풍산홍씨, 하동정씨, 서흥김씨가 처가동네에 이거를 하여 뿌리를 내렸음을 알 수 있다.
<해설>
책 말미에 인쇄처 「청우당출판사」 광주시 서석동24번지2호, 대표 유제구, 전화번호 ②6746만 기록되어 있다. 간행연도가 없으나 옛 전화번호로 보아 1960연대쯤으로 추정된다. 표지 제외 총133장이니 266쪽에 달한다. 옛 문집 간행형식을 취하였는데, 사주쌍변계, 쪽당 13행, 1행당 28자, 상2엽화문어미, 판심제는 ‘쌍계정지’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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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금안동 출신 인물을 살펴 보자.
앞서 언급하였듯이 원나라 개국 후 고려 충열왕 때 정당문학 벼슬의 정가신이 1290년 세자를 모시고 원나라를 갔다. 세자는 곧 원나라 황제의 외손이 되므로 황제가 묻기를 “너는 어떤 책을 읽고 있느냐?”라 하니 세자가 대답하기를 “스승으로 삼는 유학자 정가신이 있어 효경, 논어, 맹자를 배운다.”라고 하니, 마침내 정가신은 원나라 황제로부터 한림학사 가의대부(翰林學士 嘉義大夫)의 벼슬을 제수 받았다. 그래서 정가신을 한림학사라 호칭하는 것이다.
정가신의 증손 정초(鄭初)는 태종실록에 보면 도진무(都鎭撫)를 역임했으며, 제주 목사 선생안을 보면 제9대 목사로 1409년 윤4월-1410년 1월까지 9개월을 재임하였다고 하였다.
그후 정식(鄭軾), 정심(鄭諶)과 정상(鄭詳) 형제, 정운형(鄭運亨), 정재교(鄭再僑), 정진(鄭珒) 등이 문과급제를 하였다. 정식은 예조좌랑, 이조정랑, 국정도감 판관, 의정부 사인,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 동부승지, 우부승지, 형조참판, 함길도 도관찰사(咸吉道都觀察使),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병조판서(兵曹判書), 중추부 지사(中樞府知事)을 역임하였다. 이 당시 내종사촌간인 신숙주도 함께 조정에 근무하였고 신숙주가 세조 조에 영의정을 하였으니, 당시의 금안동은 명성이 자자했을 것이다.
더더욱 조선 초기 왕조실록에 공조참판 신장(申檣)의 졸기(卒記)〔1433년(세종15) 2월8일 세종실록〕, 중추부 지사 정식(鄭軾)의 졸기 〔1467년(세조13) 3월10일 세조실록〕, 영의정 신숙주(申叔舟)의 졸기〔1475년(성종6) 6월21일 성종실록〕가 실릴 정도이니 이 정도가 되면 당시의 금안동 위상을 짐작할 만하다.
오늘날 쌍계정을 말없이 대변하고 있는 것은 눈과 비 그리고 바람에 오랜 세월 묵묵히 서있는 기둥과 들보아래 게시한 시판(詩板)이라 할 수 있다.
현재 게시된 시판을 보면 정가신이 원나라에 체류 중에 고향을 그리워하며 썼던 사향시(思鄕詩)가 가장 오래된 시이다.
그 외 시판을 보면 어은 정서(漁隱 鄭鋤,1410-?)의 시가 있고, 조선 전기 때의 인물인 사암 박순(思庵 朴淳,1523~1589)의 시가 있다. 나머지는 조선 하반기 때 인물로 풍산 홍윤주(洪崙周,1874~?), 풍산 홍승수(洪承受,1874-1947), 하동 정득채(河東 鄭得采), 나주 정우선(鄭遇善), 하동 정순규(鄭淳奎), 나주 정행면(鄭行勉) 서흥 김희덕(金煕德)이니 사성강당(四姓講堂)에 걸맞게 네 성씨 후손들 시를 볼 수 있다.
가장 오랜 된 정가신의 사향시(思鄕詩)를 살펴보자.
고려 우리나라 남쪽에 금성산이 있는데 海東南有錦城山
산 아래는 나의 초가집 두어 칸이 있네. 山下吾廬草數間
골목 버들과 마당의 복숭아를 손수 심었으니 巷柳園桃親手種
봄이 오면 응당 주인이 돌아오길 기다리겠네. 春來應待主人還
이 시를 짓는 배경을 짧은 서문〔幷序〕으로 기록된바 “선생께서 공거(貢擧) 때문에 중국에서 벼슬살이를 하면서 고향의 향수를 술회한 것이다. 그리고 정자는 선생께서 지었기 때문에 이 시를 걸어 둔 것이다.”라 하였다.
이 말을 풀이하면 정가신은 원나라 과거 시험 고시관(考試官)이 되어 중국에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다는 말이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충렬왕의 세자를 모시고 원나라에 갔는데 세자는 원나라 태조의 외손자가 되고, 외손자인 세자가 정가신을 세자 스승이라 하였더니, 정가신의 사람됨과 깊은 지식에 감동하여 원나라 과거 시험 고시관 벼슬을 준 것이다.
아마 원나라 체류기간이 해를 넘겨 길어지기에 향수병에서 이 시를 지은듯하다. 정가신이 세 번이나 원나라에 갔다. 고려사 기록을 보면 그중에 가장 오래 체류된 것은 첫 번째 방문인 것 같다. 1290년에 원나라에 가서 1291년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는 기록과 또 황제와 일본 정벌을 논하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해를 넘겨 원나라에 체류하였음을 볼 수 있고, 아마 이때 사향시를 지은 듯하다.
<해설>
1) 제주 목사 선생안을 보면 제9대 목사로 1409년 윤4월-1410년 1월까지 9개월을 재임하였다고 하였다. : <출처>https://storyjeju.tistory.com/175, 2021년 12월19일 검색, 검색어/조선시대 제주목사
2) 공거(貢擧) : 지공거(知貢擧)와 같은 말로 과거(科擧)를 보이던 고시관(考試官)의 고려 때 명칭이다.
3) 선생께서 지었기 때문에 이 시를 걸어 둔 것이다 : <원문> 先生因貢擧 仕於中國 述鄕思 而亭卽先生所構 故仍以揭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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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오래된 시로 어은 정서(漁隱 鄭鋤)의 시가 시판으로 걸려있다.
푸른 산속 조릿대 난 곳을 녹문으로 삼아 碧螺簇處鹿爲門
이름난 정자를 중심으로 한 마을이 모였네. 中有名亭會一村
홍천으로 술을 빚어 아름다운 술을 거르고 釀得紅泉篘美酒 향도를 낫으로 베어 와서 진수성찬을 차리네. 鎌來香稻爨珍餐 글 읽는 소리 자리에 가득하니 학문을 알겠고 咿唔滿座將知學 화려한 글귀가 걸린 난간에 오르니 비로소 글이 보이네. 華句登欄始見文
그대여! 내가 여기에 멀지 않은 곳에 인접해 있는데 君若無遐於此接
어찌 화죽나무 동산 절반을 나눠주기 어려워하는가? 何難花竹半分園
하동정씨 정서(鄭鋤)에 대한 정보는 매우 적다. 다만 금안동지 기록을 참고할 밖에 없다. 금안동지를 간행하면서 정상(鄭詳)이 서문을 썼는데 이때가 1601년이다. 1601년에 간행하면서 쌍계정 유래와 설재(雪齋)선생, 어은(漁隱)선생, 죽오당(竹梧堂)선생, 반환(盤桓) 선생을 수록해 놓았다.
정서(鄭鋤)의 “자는 보민(保民), 호는 어은(漁隱), 하동정씨로 태종 경인년〔1410년〕 광주 편방(片坊)에서 태어나 늘그막에 나주 금안동으로 이거하였다”라 하였다.
위 시를 음미해보면 제7연의 ‘그대여!’에서 그대는 누구를 지칭하겠는가?
제1연과 2연을 보면 금안동 마을을 마치 녹문산 고사와 비유하며 얼핏 쌍계정이 마을 중심임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쌍계정 주인이 누구이겠는가? 바로 정식(鄭軾)이다.
정식은 1407-1467년대 인물이니 어은공보다 3년 선배이다. 5연 6연에서 쌍계정이 공부하는 곳임을 말하고, 당시에도 많은 시판(詩板)이 걸렸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그대여!’는 정식을 말하고, 어은 내가 금안동에서 멀지 않은 광주 편방면(片坊面)에 사는데 ‘어찌 화죽나무 절반을 주지 않겠는가’ 라 하였다. 이 시를 지은 후에 어은공은 금안동으로 이거한 듯하다.
금안동지가 소개하는 죽오당(竹梧堂)은 김건(金鍵)으로 입향조 김감(金鑑)의 동생이다. ‘자는 중견(仲堅), 호는 죽오당, 서흥김씨로 영암에서 나주로 이거하여, 중종 갑오년〔1534년〕에 진사 시험 합격하고 1540년 왕자사부(王子師傅)를 하였으며, 1543년 예산(禮山)현감을 하였다. 남긴 문집이 있으며, 나주 다시면 기흥리에 유허비를 세웠다.’라고 하였다.
반환(盤桓) 선생은 홍천경을 말하는데 “자는 군옥(群玉), 호는 반환(盤桓), 풍산홍씨로 선조25년〔1592년〕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공훈을 세우고, 광해 기유년〔1609년〕 문과 급제하여 인조 갑자년〔1624년〕에 통정대부 호조참의를 하였다. 월정서원과 금산대첩단에 배향되었으며, 남긴 문집이 있다. 금안동에 유허비를 세웠다.‘라고 『금안동지』에서 설명하고 있다.
<해설>
1) 녹문(鹿門) : 세상을 피해 숨어 지내는 곳을 말한다. 후한(後漢) 말에 방덕공(龐德公)이 처자를 이끌고 녹문산(鹿門山)으로 들어가 약초를 캐며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았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後漢書 卷83 逸民列傳 龐公》
2) 홍천(紅泉) : 신선 세계에 있는 샘을 말하는 것으로, 상대가 은거하는 곳에 있는 샘물을 비유한 말이다. 한(漢)나라의 동방 삭(東方朔)이 어릴 때 우물에 빠져 지하로 떨어졌는데, 어떤 사람이 그를 안내하여 선초(仙草)가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 다. 중간에 홍천이 막혀서 건널 수가 없게 되자 신발 하나를 동방삭에게 주어 마침내 그 샘을 건너서 선초가 있는 곳에 이 르러 캐서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酉陽雜俎 卷19》
3) 향도(香稻) : 벼의 한 가지로, 까끄라기가 붉고 낱알이 희며 향기로운 맛이 있다.
4) 광주 편방(片坊) : 광주목읍지에 보면 片坊面으로 기록 되었는데, 오늘날 광주시 북구에 해당한다.
5) 1540년 왕자사부(王子師傅)를 하였으며, 1543년 예산(禮山)현감을 하였다. : 2010년 서흥김씨 대동보 김건 란의 기록은 금안동지에 소개된 글과 같다. 그러나 방목에 보면 김건은 1496년(연산2) 식년시 진사 2등(二等)16위(21/100)으로 합격하였으며 자는 저허(子虛), 호는 죽오당(竹梧堂)임을 확인하였다. 중종 갑오년〔1534년〕 진사시에 합격했다는 족보 기록, 금안동지 기록은 틀린 것 같다. 왕자사부를 역임했다면 연산군의 아들 중에 한 왕자를 가르쳤을 것이고, 왕자사부 이후에 예산현감으로 내려갔으나, 연산군의 패악한 정치를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쇄신하였기 때문에 중종 때 일기청 당상(日記廳唐上)을 임명한 것으로 보아 연산실록이 되지 못하고 연산군일기로 격하 되면서 많은 자료들을 빼버린 것으로 여겨져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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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오래된 시는 사암 박순이 지은 「제홍천경쌍계정(題洪千璟雙溪亭)」이란 제목으로 시판이 걸려 있다. 「제홍천경쌍계정」을 해석하면 겉모습으로 보면 ‘홍천경의 쌍계정을 짓다’라고 후세 사람들이 풀이를 하여 이 시의 진위여부로 말썽이 있었던 것 같다.
오늘날은 문학, 사학, 철학을 대학에서 구분하여 공부하는데, 옛날에는 문사철(文史哲)이 셋이 아닌 하나로서 공부를 하였다. 그러므로 과거 급제자는 나라가 인정하는 문학가요, 나라가 인정하는 사학가요, 나라가 인정하는 철학가였다. 그리므로 ‘제홍천경’처럼 홍천경의 이름을 넣을 수 있는 것은 어린 아이를 호칭할 때나 쓰는 기법이다. 만약 홍천경이 벼슬을 하고 어른일 경우는 호나, 자, 또는 벼슬을 붙여 호칭한다. 이것이 문사철의 문장 기법이다. 홍천경은 1609년(광해1)에 문과 장원급제하였으며, 자는 군옥(群玉), 호는 반환(盤桓), 벼슬 경력은 남원교수에, 첨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그렇다면 호칭을 홍군옥(洪君玉), 홍반환(洪盤桓), 홍교수(洪敎授)등으로 해야 맞다. 이렇게 호칭치 못하는 때인 유년의 학동시절이기에 본명을 넣어 시를 지은 것이다.
필자가 추측건대 사암 박순과 동시대의 나주정씨 어느 인물이 박순을 쌍계정 학당에서 학동들에게 특별 강론을 해주도록 초청했을 것 같다. 적어도 박순과 그런 관계가 성립되려면 나이와 벼슬이 박순과 대적할만해야 한다. 바로 정상(鄭詳)이 그런 사람으로 보인다. 정상은 1533년생이니 박사암보다 10년 연상이나 과거급제는 박사암이 1553년이니 정상보다 21년 먼저 했다. 그리하여 박순이 고향 내려오는 길에 쌍계정 학당으로 정상이 초청했다고 보아야 한다. 초청하지 않으면 갈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때 시기는 기록은 없으니 홍천경이 쌍계정에서 학동(學童)으로 공부할 때이니 홍천경 나이 10∼20세 때라면, 박순은 40∼50세일 때이다.
쌍계정에 와서 강학할 때는 명종∼선조 초기 때 정도이니 박순의 벼슬이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을 거쳐, 그 뒤 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사헌부 집의(執義) 정도이다. 여기서 박순의 내면의 고민거리를 알면 이 문제가 쉽게 풀린다. 박순은 딸 하나만 있고 아들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쌍계정에 와서 특강을 할 때 홍천경이라는 어린 학동이 자신의 강론을 잘 알아듣고 질문도 하였을 것이다. 아들이 없던 박사암은 홍천경이 너무나 영리하고 모습도 출중하여 예뻐한 나머지 「제홍천경쌍계정」이란 시를 지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시 제목의 해석을 ‘쌍계정에서 공부하는 홍천경을 짓다’라 하면 당시 상황논리에 맞아 떨어진다.
박순이 예의주시했던 홍천경은 박순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박순이 세상을 떠난 3년만인 1601년(광해1)에 문과 장원급제하였다.
박순이 지었다는 시는 「사암선생문집(권3)/칠언율시」에 수록되어 있다. 시문을 살펴보자.
시냇가에 임한 정자 열려 산문을 마주하고 臨溪亭敞對山門
좋은 모임은 항상 한마을 사람들로 이루어지네. 好會尋常自一村
겨우 벼와 기장으로 들 술자리를 베풀고자 했는데 纔足稻梁供野酌 채소와 죽순을 거두어 반찬을 갖추었네. 祗收蔬筍備盤餐
단사에 우물 있어 사람들 장수하고 丹砂有井人多壽
과거에 장원하려 학문을 숭상하네. 黃甲標名俗尙文
내 홍군(洪君)을 좇아 결사를 함께 하고자 하는데 我欲從君同結社
다행히도 꽃과 대나무가 더불어 동산에 연해 있네. 幸分花竹與連園
이 시를 음미해 보자. 제5-6연에 보면 금안마을의 모습과 마을사람이 학문의 기풍이 과거 급제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제7연은 홍천경이 소속해 있는 금안동 대동계에 박순 자신도 함께 하고 싶다는 뜻이다. 얼마나 학동 홍천경이 예뻐 보였으면 자기 속내를 다 털어 놓았을까?
현재 쌍계정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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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자치와 협력의 공동체, 금안동계
금안동 대동계는 언제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초창기 대동계는 나주정씨 형제들이 시작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쌍계정 대들보 다락방에 보관되어 전해오는 ‘쌍계정 문서’에는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을 한 창주 정상(滄洲 鄭詳)이 1601년에 쓴 「금안동좌목중수서(金鞍洞座目重修序)」가 있다. 좌목중수서(座目重修序)란 금안동 대동계의 계칙(契則)을 중수할 때 참여한 명단을 열기 작성하고 그 글 앞에 써 넣은 글을 말한다. 추측컨대 임진왜란 7년 전쟁동안 대동계 계칙이 없어졌거나, 또 계칙이 있다 하여도 마을 여건이 바뀌어 계칙을 다시 수정하는 것도 중수에 해당한다.이런 시각으로 보면 금안동 대동계의 계칙을 두 번째 만드는 과정임을 알 수 있다.
이후 계원들의 모임에는 동중좌목으로 되어 있으니, 그때그때 모임 후에 참여자를 기록하기 때문이다.
호남은 1597년 정유재란 때에 영산강을 거슬러 남원으로 진격하는 침략 노선에 금안동이 있었기에 왜군의 노략분탕질이 있었을 것이다.
정상은 임진왜란 때 정운(鄭運) 송희립(宋希立) 등과 함께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서 싸웠으나 한산도대첩 때 병(病)으로 인하여 집으로 돌아갔다. 이후 이순신의 군진(軍陣)에 아들 정여린(鄭如麟)과 종손(從孫) 정란(鄭瀾)을 시켜 쌀을 보냈다는 내용이 창주집(滄洲集)에 실려 있다.
금안동의 대동계는 송나라의 남전여씨향약(藍田呂氏鄕約)에 뿌리를 둔 것 같다. 남전여씨 향약의 덕목은 덕업상권(德業相勸) 과실상규(過失相規) 예속상교(禮俗相交) 환난상휼(患難相恤)이다. 이러한 덕목은 사람 사는 세상에서 지켜야할 도덕적 기준이다.
금안동지에는 금안동민이 지켜야할 덕목을 수록해 놓았는데 다음과 같다.
①부모에게 효순하고〔孝順父母〕
②어른과 위 사람을 존경하고〔尊敬長上〕
③이웃과 화목하고〔和睦鄕里〕
④자손을 교훈하고〔敎訓子孝〕
⑤각자 살아가는 도리가 편안하고〔各安生理〕
⑥해서는 안 될 일을 하지 않는다〔毋作非爲〕
이 덕목은 명나라 태조 고황제가 백성을 위해 널리 깨우치는 말〔太祖高皇帝聖諭〕이다. 정가신 이후 초창기 금안동계에서는 이 정도의 덕목으로 마을주민들이 지켜야할 수신제가(修身齊家)해야 할 덕목으로 여겼던 것 같다.
그러나 고려 말의 혼란기 시대, 조선 개국의 시대, 조선초기의 왕자의 난, 단종 복위 사건, 중종반정, 병자호란과 임진왜란을 겪으며 사람과 사람사이의 갈등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다만 도덕적 기준인 덕목으로만 마을을 편안하게 유지할 수 없었기에 임진왜란이 끝 난 이후 마을 규약을 좀 더 세밀하게 정해졌다. 덕목이 마을의 법률이라면 동중약규는 법률의 시행세칙이다. 마을 덕목을 어떻게 지켜야하고 지키지 않은 자는 어떻게 조치한다는 내용이 열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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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계정 다락방 속에 간직된 정상의 「금안동좌목중수서」와 당시 참여자가 만든 동중규약 15개 조항이 이를 반증해 주고 있다. 규약은 다음과 같다.
➀좌수(座首)는 연령순에 따라 4∼5명, 장의(掌議)1명, 상하 유사(有司) 각1명씩 돌아가면서 정한다.
➁선한 일을 한자 악한 일을 한자를 기록하는 장부를 각각 비치한다.
➂상례(喪禮) 는 사람 된 도리를 다해야 한다.
➃매장(埋葬)하는 날에는 쌀3되, 술1병, 과일 등으로 부의한다.
➄자녀의 결혼이 있으면 닭, 물고기, 과일, 채소, 쌀, 베 등을 자기의 힘에
따라 돕는다.
➅봄가을로 강신(講信)을 하는데 3월3일과 9월9일 날 행한다.
➆ 3월3일과 9월9일 날에는 내외가 함께 한다.
➇과거급제 경사에는 술 석잔으로 축하하고 환난에는 힘을 모아 구원한다.
➈봄여름에는 물고기와 노루, 가을 겨울에는 닭과 소를 잡아 잔치를 한다.
➉그릇은 규약에 들지 않은 사람은 빌려주지 말고, 멍석은 해마다 바꾼다.
⑪공적 모임은 기약하는 날 열리고 이유 없이 2회 불참하면 벌칙을 논한다.
⑫나이순에 따라 앉는다.
⑬명령을 어긴 자는 벌칙을 정한다.
⑭가장 중한 벌칙은 술 한 동이에 안주를 낸다.
⑮제명된 자는 동중계원들과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할 수 없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 고향으로 돌아온 정상은 1601년에 마을 동민들과 함께 마을을 재건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상의 동규(洞規)를 보면 송나라의 남전여씨 향약보다 규약의 조항도 많고 규약을 매우 세밀하게 정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1609년 장상이 졸한 이후 1635년〔숭정8, 을해〕 9월27일 동중좌목에는 40명이 참여하였고 이들이 서약한 글〔약문(約文)〕에는 향약 때 술 마시며 계를 맺는〔講信〕 예절, 초상이 나면 부의〔賻喪〕하는 예절, 혼인할 때 예절, 환난이 생겼을 때 서로 구해줄 때 예절, 잘못을 서로 고쳐주는 예절, 축하하고 위로 하는 예절 등의 방법을 기술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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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난 후 아마 고마청(雇馬廳)에서 말을 징발하는 비용을 백성들로부터 거두기 위해 금안동 마을에 분담금을 1636년 10월에 내렸는데 그 수합 결과를 1639년〔임인년〕에 남겼다.
고마조(雇馬租)는 고마청에서 내린 분담금을 곡식으로 국가에 바치는 것을 말한다. 분담금은 대동계 회원 약250여 명에게 분담시켰는데 1인당 1두에서 5두까지 노비들도 분담하였다. 노비의 이름 앞에 노(奴)자를 써 놓은 것이다. 거두어들인 총 수량이 10석10두5승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특이한 점은 노비들의 고마조도 말미에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사례를 하나만 들어 보자. “노비 인안(仁安)은 세곡 2석을 저당 잡혔는데, 지난 정축년〔1637년〕 여름에 지은 보리농사로 5석을, 금년 가을 세곡으로 10석을 작석하여 납부하였다”라 하였다. 또 다른 노비는 “노비 득선조(得善租)”, “노비 岩哲租(암철조), ”노비 만수조(萬守租)“라고 호칭하며 세곡의 상황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250명 중에 이와 같은 노비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이후 동규(洞規)는 1681년(숙종7)에 향약상계(鄕約上契/양반신분이 지켜야 할 향약)로 바뀌어 미풍양속의 진작에 중점을 두었다. 마을 공동체 조직의 동규는 1712년 동약 또 향약이란 이름으로 대동계가 결성되어 마을에 소요되는 공동비용을 확보키 위해 계원자녀의 상속 가입 때 벼 한말, 형제의 가입 때 벼 닷 말, 타관 전입자의 가입 때 벼한 말을 내놓도록 하여, 당시에 마을에 부담되는 고마전(雇馬錢)등을 공동 납부하였다. 1663년에 작성된 ‘권학안(勸學案)’에 따르면 동네에서 정기적으로 백일장을 열어 학문하는 기풍을 높였다.
1715년에 만든 ‘금송동약서(禁松洞約書)’에 따르면 이미 1699년 이전에 산림보호에 대한 규정을 마련하고 산림을 남벌한 자를 벌을 주도록 하였다.
①어린 소나무 한주를 베면 매질 10번
②살아있는 큰 소나무를 베면 매질 15번
③소나무 뿌리 하는 파내면 매질10번
④솔밭에 불을 지른 자는 매질 20번
위와 같이 소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소나무를 베거나 불 지른 자에게 어떻게 벌한다는 내용을 자세한 열기해 놓았다..
위와 같은 덕목과 시행세칙인 동중약규는 어찌 14세기 사람에게만 적용되겠는가? 15세기에서 20세기까지도 적용되었던 덕목이며 22세기 미래 사회에서도 지켜야할 덕목이다. 쌍계정 대들보 아래 숨겨진 다락방에 보관된 금안동지가 이를 웅변하고 있지만, 세상이 변해 오늘날 다락방에서 세상 밖으로 나올 기회를 잃어버린 듯하여 참으로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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Ⅴ 맺음말
오늘날 지방자치 시대가 전개 되자 지방 스스로 국제무대로 나아가려 하고, 지방의 스토리텔링으로 지방을 파는 상품으로 개발하고 있다.
금안동 마을은 스토리텔링의 보물창고이다. 금안동(金鞍洞)이라는 유래, 정가신이 원나라에서 고향을 그리며 썼다는 사향시 유래, 신숙주의 고향이란 유래, 신숙주의 아버지 신장이 쌍계정에서 강학했던 유래, 금안동 대동계의 유래 등은 TV 드라마로 엮어 낼만한 상품이다.
또 그렇게 되도록 분위기를 조성해 가야 한다.
역사기록으로 보면 금안동은 양성지(梁誠之, 1415-1482)가 쓴 동국여지승람의 정가신편을 보면 金安洞이라 하였다. 1789년(정조13) ≪호구총수≫에도 나주목 금안면(金鞍面)으로 되어 있고 나주의 대표 지리지인 『금성읍지에도 金鞍洞으로 되어 있다. 현재 법정동명은 金安里으로 되어 있다. 옛날에는 禽安洞이란 별칭도 있었다. 얼마나 새들이 사는 낙원이었으면 이렇게 불렸을까? 오늘날 자연 지향적 시민들 성향에 걸 맞는 소재거리이다.
또한 여기에 부응하는 금안동 8경이 전해 오고 있다.제1경이 훼손되었지만 나머지 7경은 쉽게 복원해 낼 수 있다. 팔경은 다음과 같다.
제1경 오리 길을 잇 달은 숲쟁이 〔五里林亭〕
제2경 금안동 마을 어귀의 선돌 〔千年石柱〕
제3경 청산골 산 주막으로 가는 행인 〔山店行人〕
제4경 배뱅이골을 넘어 다보사로 돌아가는 스님 〔寶寺歸僧〕
제5경 무제봉 바위에 걸린 반달 〔半月懸岩〕
제6경 쌍계정 앞으로 흐르는 여울물소리 〔雙溪鳴瀨〕
제7경 금성산을 붉게 적시는 저녁노을 〔錦城紅濕〕
제8경 금성산에서 바라보는 무등산의 아지랑이 〔瑞石晴嵐〕
요즈음 도시는 사람이 넘치고 시골은 사람이 갈수록 줄어든다. 인구는 생산기반이면서 세수기반이 되고 소비시장을 촉진한다. 금안동 마을처럼 스토리텔링이 넘치는 마을부터 연중 도시 사람이 찾는 상품 가꾸기를 먼저 해야 한다. 쌍계정과 쌍계정을 둘러 싼 이야기 거리가 금안동 8경과 어우러져 팔 수 있는 상품이 될 때, 금안동은 다시한번 호남 명촌 소리를 들을 것만 같다.
그러한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는 곳이 바로 금안동이다.
□참고문헌
<대동보>
o 나주정씨 대동보 편찬위원회, 나주정씨대동보 권1, 나주정씨 대동보 상계편, 회상사, 1992. pp. 1-9
o 풍산홍씨대종회, 풍산홍씨대동보 권1, 풍산홍씨대동보상계편, ㈜가승미디어, 2008. pp. 6-27.
o 서흥김씨대동보판찬위원회, 서흥김씨대동보 권1, 엔코리안(주), 2010. pp.11-15
o 하동정씨경렬공파대동보편찬위원회, 하동정씨경렬공파권지1 낭주인쇄사, 1995. pp 11-12
<읍지 및 동지>
o 금성읍지
o 남평읍지
o 금안동지 광주 청우당출판사, 발행일 미상,
<단행본 책자>
o 향토문화진흥원, 호남3대명촌 금안동, 김정호 외 마을 취재반, 1992.
< 인터넷 사이트>
o 중국 포털 사이트 http://www.baidu.com/
o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o 한국역대인물정보시스템 http://people.aks.ac.kr/index.aks
o 시민의 소리 http://www.siminsori.com/news/articleList.html
-2017. 10.11 게재된 나주팔정 기사 중 쌍계정 참조(필자 본인이 집필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