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부호 崔浚의 생애와 독립운동
권 대 웅*
연 구 논 문
1. 머리말
2. 출생과 성장
3. 대한제국기의 계몽운동
4.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과 경제운동
5. 맺음말
55)
1. 머리말
汶坡 崔浚은 9대 진사와 12대 만석 재산을 누린 경주 교동의 속칭 ‘崔
富者’집 장손으로 태어났다. 그는 가문의 방대한 경제력을 기울여 독립운
동과 기업 활동, 그리고 교육·언론·문화 활동에 참여하였던 만석꾼의
마지막 주인이었다.
최준은 한말·일제강점기의 격동과 수난기, 그리고 행방정국의 혼란기
를 살면서 독립운동 단체 참여와 후원, 민족기업 백산상회 참여와 경제
활동, 그리고 교육·언론·민족문화 사업을 지원하거나 후원하였다.
최준은 자신의 행적을 일체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사람들이 膾炙하
* 대경대학교 교수.
278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45집
는 그의 행적은 대부분 풍설처럼 기록되거나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그
래서 그의 행적은 과도하게 포장되기도 했고, 혹 폄하되거나 비난받기도
했다. 이런 연유로 최준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지금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1)
이 글은 風說처럼 기록되거나 전해지고 있는 최준의 행적을 조사·정
리하였다. 이 과정에서 필자는 식민지 통치권력에 대응하여 독립운동 세
력을 후원하는 한편, 경제적 부를 유지해야만 했던 최준의 처신을 객관
화시키고자 했다. 이것은 대부호 최준의 행적에서 나타나는 양면성이었
고, 그가 당면해야만 했던 이중의 과제였기 때문이다.
최준과 관련하여 볼 수 있는 자료는 관변자료와 재판기록, 그리고 매
일신보·동아일보������·조선일보·중외일보 등의 기사, 그리고 근래
간행된 관련 자료집 등이 있다.2)
2. 출생과 성장
崔浚(1884.7.27~1970.10.13)은 慶北 慶州市 校洞 69번지에서 진사 崔鉉
軾과 豊山 柳氏 사이의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乃允이며,
호는 汶坡였다.
1) 외솔회, 나라사랑 (백산 안희제 선생특집호) 제19집, 1975.
조기준, 韓國企業家史, 博英社, 1973.
배동환, 「浚公略傳, 校村의 얼, 1998.
이동언, 「白山 安熙濟硏究」,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8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
동사연구소, 1994.
오미일, 「일제시기 안희제의 기업활동과 경제운동」, 國學硏究 第5緝, 국학연구소,
2000.
권대웅, 1910년대 경상도지방의 독립운동단체 연구, 영남대 박사학위논문, 1993.
권대웅, 1910년대 국내독립운동,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2008.
권대웅, 「박상진의 생애와 독립운동」, 동학연구 28, 한국동학학회, 2010.
2) 慶尙北道警察部, 高等警察要史, 1934. 國史編纂委員會,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
(國權恢復團Ⅱ)7·8·9, 1988, 金喜坤編, 朴尙鎭資料集, 2000.
경주 부호 崔浚의 생애와 독립운동 279
그의 집안은 경주최씨 司成公派 중 佳巖派이다. 孤雲 崔致遠의 28대손
이며, 임진왜란 때 宣撫原從功臣 貞武公 崔震立(1568~1636)의 11대손으로
이른바 ‘최부자’집이다. 원래 內南面 伊助里에 세거하다가 증조부 世麟
때 경주향교 옆 校洞으로 이거하였다.
그의 조부 晩喜는 世龜의 독자로 태어나 백부 世麟에게 入系하였고,
아들로 鉉軾(1854.11.12~1932.10.1)과 鉉敎(1857~1924.1.15)를 두었다. 현식
은 4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장남 浚을 비롯하여 潤(1886.3~1969.10)·
浣(1891~1926)·淳(1892~ )이었고, 사위는 李泰大와 柳慶佑였다. 현교는 3
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泳轍·泳祿·泳學이었고, 사위는 朴尙鎭과 孫
晉久였다.3)
그는 1898년 안동군 풍산면 오미동의 雲齋 金秉璜의 손녀이며, 金鼎
燮(1862~1934)4)의 딸 錫允과 결혼하였다. 조선국권회복단의 단원이며,
1919년 3월 14일 출범한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법무위원 金應燮이 처
삼촌이다.
최준은 일찍이 족숙인 修軒 崔鉉弼(1860.11.30~1937.1.29)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5) 그는 정무공 최진립의 넷째 아들 東吉의 후손으로 見谷面
鍾洞에 살다가 유년에 경주 교동으로 이거하였다. 1891년 文科에 급제하
여 承文院 正字에 임명되었다가 1895년 갑오개혁에 즈음하여 벼슬을 버
리고 귀향하였다.6)
최현필은 경주 교동에 은거하면서 勉庵 崔益鉉7)을 비롯하여 안동유림
3) 慶州崔氏司成公派譜 卷八, 369쪽.
4) 김정섭은 안동군 풍산면 오미동에서 풍산김씨 雲齋 金秉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우로는 履燮·應燮·奎燮이 있었다. 예안의진의 副將 李中麟은 그의 장인이며, 안
동의진의 都摠 柳蘭榮은 그의 외종조부이다(김희곤·강윤정 지음, 오미마을 사람
들의 민족운동, 2009).
5) 배동환, 「浚公略傳」, 校村의 얼, 1998.
6) 脩軒文集, 「後記」, 788~789쪽.
7) 附錄 卷三, 「年譜」, 勉菴集, 庚子 五月(1900. 5). 최익현은 1900년 5월부터 8월까지
문인 李章宇 등과 함께 경기도 포천에서 강원도 춘천·홍천과 경기도 지평·충청도
제천, 그리고 경상도 영주·안동 등지를 거쳐 경주 교동의 최현식을 방문하였다. 최
익현은 상당한 기간 최현식의 사랑에 머물며 그의 증조부 龍庵 崔祈永의 龍庵詩集
280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45집
李忠鎬·李中喆·金鼎燮·趙承基 등과 교유하였다.8) 이들은 외세 침략에
즈음하여 衛正斥邪論을 견지한 보수적인 유림이었다. 이와 같이 최현필
은 최익현과 이충호를 비롯한 안동유림의 위정척사사상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소년기의 최준은 최현필의 문하에서 유학교육을 받은 유생으
로 위정척사사상을 인식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최익현이 남긴 기록
에 의하면 ‘경주 교촌 최현식의 사랑에서 시국을 비롯하여 많은 것을 이
야기하였는데, 그 집 젊은 종손이 며칠이고 진지하게 경청하였다’는 이야
기를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9) 최준은 대부호였던 부친 최현식의 사랑을
방문한 각처의 유생들과 우국지사들을 통해 풍전등화와 같은 조선의 현
실을 인식하였을 것이다.10)
그러나 최준은 4촌 자형인 朴尙鎭(1884~1921)과 처삼촌인 金應燮(1878~
1957)으로부터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가 15세 되던 1898년 울산 송정
의 박상진이 숙부 崔鉉敎의 장녀 永伯과 결혼하였으니 4촌 자형이다.11)
서문과 당숙 崔晩善의 묘갈명을 썼다. 그리고 경주의 西岳書院과 龍山書院 등을 돌
아보았다. 이 여행에서 최익현을 비롯한 그의 문인들은 안동·경주·대구 등지를
전전하며 의병의 거의를 준비하였다.
8) 脩軒文集, 「書」참조.
9) 면암 최익현의 현손 崔昌圭가 최준의 손자인 崔炎에게 말하기를 ‘면암이 경주를 방
문하여 崔鉉軾의 사랑에 머물고 있을 때, 젊은 종손이 며칠이고 진지하게 경청했다’
는 기록이 있다고 하였다.
10) 申乭石將軍實記 (盈德郡, 救國倡義錄, 1990) 趙東杰, 「光武農民運動과 申乭石 義
兵」, 한국근현대사학회, 한국근현대사연구 제19집, 2001. 또 최준은 申乭石
(1878-1908. 12)과 같은 의협적인 인물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신돌석은 1896년 전기
의병에 참여하였으며, 1906년 4월에는 영해에서 창의하여 “寧陵義兵將”의 기치를 걸
고 활동하였다. 신돌석은 1903년 淸道·釜山·蔚山·慶州 등지를 다녀온 것으로 전
한다. 申乭石將軍實記 에 의하면 “청도에서는 경부선 철도공사장을 지나던 중 일
본인 관원이 못 가게 금지하고 포착코자 하니 전신주를 뽑아 일본인 수 명을 타살
하였다”는 이야기와, “울산 송정 某家에 투숙하니까 주인이 日本兵站所에 通奇하여
왜병 10여 명이 습래하여 도망하던 신돌석에게 부딪친 담장이 무너져 왜병 7·8명
이 몰사했다.”는 이야기가 주목된다. 그리고 부산에서 배를 수리하는 일본인을 죽이
고 배를 뒤집어 버렸다는 이야기와 경주의 ‘최부자’집에 머문 이야기 등도 있다.
11) 金喜坤編, 朴尙鎭資料集, 「年譜」, ⅹⅹⅶ, 2000.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은 울산 松
亭에서 朴時奎와 여강이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나 백부 朴時龍에게 입양되었다.
경주 부호 崔浚의 생애와 독립운동 281
그리고 최준도 같은 해 풍산 오미동의 김정섭의 딸과 결혼하였으니 김응
섭은 처삼촌이다.12)
최준은 박상진과 김응섭의 영향으로 민족의식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
가 대한협회와 교남교육회, 그리고 1910년대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도 박
상진·김응섭 등과 맺어진 인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와 같이 소년기 최준은 스승인 최현필의 유학을 통해 유생으로 성장
하였고, 박상진·김응섭 등과 함께 대한협회와 교남교육회 활동을 통해
계몽운동에 참여하였다.
3. 대한제국기의 계몽운동
1904년 최준은 부친 崔鉉軾으로부터 경주 교촌 ‘최부자’집의 가사를 물
려받았다.13)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위로는 일본의 국권 침탈이 한층 노
골화 되었고, 아래로는 국가의 독립을 회복하기 위한 한국인의 반일운동
이 확산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최준과 인연을 맺고 있던 주변
인물들은 의병전쟁과 계몽운동을 통해 현실을 타개하고자 하였다.
박상진은 5세가 되던 1889년부터 사종형 朴煃鎭의 문하에서 가학을 계승하였다.
1898년 박규진이 경북 眞寶郡 興丘로 이거하자 흥구로 따라가서 수학을 계속하던
중 1899년 흥구에서 旺山 許蔿의 제자가 되었다. 1899년 3월 허위가 圜丘壇 參奉에
임명되어 상경하자, 1902년 상경하여 그에게 정치와 병학을 배운 뒤, 1908년 양정의
숙 전문부를 졸업하였다.
12) 慶尙北道警察部, 高等警察要史, 1934. 김희곤·강윤정 지음, 오미마을 사람들의
민족운동, 2009. 金容達, 「秋岡 金祉燮의 生涯와 獨立運動」, 安東史學 第六輯,
2001. 1919년 4월 13일 대한민국임시정부 법무위원 김응섭은 雲齋 金秉璜의 차남이
다. 1907년 12월 법관양성소를 졸업하고 대한제국기 함흥재판소 검사·영변군 재판
소 판사를 거쳤다. 경술국치 후 평양지방법원 검사로 임명되었으나 1911년 4월 사
직하고, 평양에서 법관양성소 선배인 洪震(일명 鎭)과 함께 변호사 사무소를 개설하
여 활동하였다. 그 뒤 대구로 변호사 사무소를 옮겨 활동하다가 1919년 4월 상순 조
선국권회복단의 밀사로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기 위한 유림단의 파리장서를 상해
로 가져갔다.
13) 慶州崔氏校村宗親會, 校村의 얼, 1998.
282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45집
1900년 경주 교동을 방문했던 면암 최익현은 1906년 4월 泰仁의 武城
書院에서 창의하였고, 1903년 경주 교동을 방문했던 신돌석은 1906년 3월
寧海에서 창의하였다. 그리고 4촌 자형 박상진과 처삼촌 김응섭 등은 상
경하여 신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다.
박상진은 1902년 왕산 허위를 따라 상경하여 1905년 2월 養正義塾 전
문부에서 법률과 경제학을 전공하여 1908년 졸업하였다.14) 또 김응섭은
1905년 12월 法官養成所에 입학하여 1907년 12월 졸업하였다.15) 1908년
박상진과 김응섭은 신교육을 이수하던 중, 서울에서 구국운동을 전개하
고 있던 영남 인사들과 교유하며 교남교육회에 가입하는 등 계몽운동에
참여하였다.
이즈음 최준은 경주에서 서울을 내왕하며 상경 활동하고 있던 영남 인
사들과 교유관계를 넓혀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1908년 3월 설립된 嶠
南敎育會 가입과 1908년 11월 大韓協會 慶州支會 설립을 통해 계몽운동
을 전개하였다.
교남교육회는 1908년 3월 15일 서울의 普光學校에서 발기인 朴晶東·
尙灝를 비롯한 145인의 재경 영남 출신의 인사들이 창립하였다. 교남교
육회의 임원은 48명이었고, 동년 4월 25일까지 가입한 회원은 384명이었
다.16) 최준은 교남교육회 창립 때부터 회원으로 참여하여 박상진·김응
섭 등과 함께 활동하였고, 安熙濟·徐相日·南亨祐 등의 계몽적 인사를
만나는 등 광범한 교유관계를 맺었다.17)
최준과 함께 교남교육회에 가입하였던 경주 출신의 인물은 평의원 朴
重華와 鄭錫圭, 일반회원 朴起遠·盧性昌·李源斗·鄭巘敎·文宗煥·朴
時遠·朴弼煥·金敎鴈·鄭基洛·孫秉厦 등이다. 이 중에서 1908년 11월
14) 金喜坤編, 朴尙鎭資料集, 「略史」, 344쪽.
15) 舊韓國官報, 1908년 1월 4일, 「學事」.
16) 權大雄, 「韓末 嶠南敎育會硏究」, 重山鄭德基博士華甲紀念 韓國史學論叢, 1996.
17) 嶠南敎育會雜誌 第1卷 第1號(隆熙3年4月), 「任員錄」·「會員名簿」·「義捐錄」,
55~62쪽. 안희제는 보성전문학교 경제과에서 양정의숙으로 전학하여 졸업하였고,
서상일은 1907년 보성법률전문학교에서 수학하고 있었다.
경주 부호 崔浚의 생애와 독립운동 283
대한협회 경주지회의 부회장 정기락과 평의원 손병하가 주목된다.18)
최준은 1908년 11월 숙부 최현교와 함께 대한협회 경주지회를 설립하
였다. 1907년 11월 설립된 대한협회는 대한자강회 지회의 조직 일부를 인
수하였다. 경상도의 경우 대한자강회 동래·김해지회가 대한협회로 계승
되었으며, 1910년 대한협회가 해산될 때까지 대구·김천·경주·자인·
성주·안동 등 경북 10개 군, 창원·진주·남해 등 경남 7개 군에 지회가
설립되었다.19)
1908년 11월 12일 열린 대한협회 경주지회 발기회에는 회원 60여 명 중
40여 명이 출석하였다.20) 최준은 대한협회 경주지회의 幹事員으로 활동
하였다. 경주지회의 임원으로는 회장 崔鉉敎·부회장 鄭基洛·총무 金振
瑢·회계 朴文瓘·서기 徐相稷 등이 선출되었다.21)
대한협회 경주지회 임원
회 장: 崔鉉敎
부회장: 鄭基洛
총 무: 金振瑢
회 계: 朴文瓘
서 기: 徐相稷
평의원: 孫秉奎·張志夏·孫永默·李正久·孫秉濬·李義榮·李圭晟·
金淙壎·孫秉厦·崔世杰·孫承祖·徐道洙·孫奭奎·金頤善·
金基豊
간사원: 南敎淳·崔浚·孫秉允·李圭現·洪琪燮·孫晉夏·朴文瓘·孫
命淳·具蘭書·柳寅浻
최준은 교남교육회와 대한협회 활동을 통해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18) 嶠南敎育會雜誌 第1卷 第1號(隆熙3年4月), 「任員錄」·「會員名簿」·「義捐錄」, 55~
62쪽.
19) 大韓協會會報 第1號(隆熙2年4月), 「會中歷史」, 40~44쪽.
20) 大韓協會會報 第9號(隆熙2年12月), 「會中歷史」, 55쪽.
21) 大韓協會會報 第9號(隆熙2年12月), 「會員名簿」, 65쪽.
284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45집
그는 계몽운동의 목표인 경제적 구국운동의 일환으로 1908년 숙부 최현
교와 함께 權寧澤이 설립한 慶州興業의 중역으로 참가하여 사회 활동과
경제 활동을 시작하였다.22)
최준은 유학적 소양을 가진 유생으로 교남교육회와 대한협회 등을 통
해 계몽운동에 참여하였다. 이 과정에서 상경활동하고 있던 계몽적인 지
식인들과의 교유하면서 접한 새로운 사상과 지식을 통해 국가와 민족이
처했던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계몽운동에 참여하는 과
정에서 민족지사들과 맺고 있었던 인맥은 그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동지적 관계로 발전하였다.
4.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과 경제운동
1) 독립운동
1910년대 국내의 독립운동은 비밀결사적인 독립운동 단체의 활동에 의
해 전개되었다. 경상도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는 의병계열의 大韓
獨立義軍府·豊基光復團·大韓光復會·民團組合 등과 계몽운동계열의 大
東靑年團·達城親睦會·朝鮮國權恢復團 등이었다. 최준은 대동청년단·
조선국권회복단·광복회 등의 독립운동단체에 참여함으로써 독립운동세
력을 지원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23)
1909년 10월 결성된 대동청년단은 안희제를 비롯한 서상일·남형우·
최병찬·김사용·박중화·이우식 등 교남교육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조직
되었다. 최준이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는 기록은 없다. 그렇
지만 그는 안희제가 독립운동의 정보연락과 군자금 마련을 위해 설립한
白山貿易의 取締役社長 및 支配人이었고, 아우 崔浣(1891-1926)이 대동청
22) 皇城新聞, 1908년 12월 18일, 「廣告」.
23) 권대웅, 1910년대 국내독립운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8.
경주 부호 崔浚의 생애와 독립운동 285
년단의 단원이었다는 점에서 볼 때, 그와 대동청년단은 단원 이상의 관
계를 맺고 있었을 것이다.
최준은 1915년 정월 15일 국권회복을 목표로 결성된 조선국권회복단의
단원이었다. 조선국권회복단은 서상일을 비롯하여 박상진·김응섭·남
형우 등의 達城親睦會 회원들이 결성한 독립운동 단체였다.
조선국권회복단은 먼저 국내에서의 團勢를 확장하고, 해외의 독립운동
세력과 연계하며, 최후로 독립을 쟁취한다는 것을 그 목표로 삼았다. 그
조직과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24)
조선국권회복단의 조직과 구성원
통 령: 尹相泰(달성)
외교부장: 徐相日(대구)
교통부장: 李始榮(대구)·朴永模(합천)
기밀부장: 洪宙一(청도)
문서부장: 李永局(대구)·徐丙龍(대구)
권유부장: 金 圭(충남 아산)
유세부장: 鄭舜泳(대구)
결사대장: 黃炳基(전라도)
마산지부장: 安 廓(마산)
동 역 원: 李亨宰(마산)·金基聲(마산)
단 원: 禹夏敎(달성)·裵相淵(성주)·徐昌圭(대구)·片東鉉(영일)·趙
弼淵(상주)·尹昌基(대구)·金在烈(고령)·張錫英(성주)·裵
相濂(성주)·朴尙鎭(경주)·鄭雲馹(大邱)·申相泰(칠곡)·李守
黙(칠곡)·金應燮(대구)·曹肯燮(달성)·崔浚(경주)·鄭龍基
(대구)·南亨祐(고령)·徐相懽(통영)·裵重世(마산)·李舜相
(마산)·徐相灝(통영)·卞相泰(진해)·黃炳基(전라도)
조선국권회복단은 1919년 4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만주
의 독립군 양성, 그리고 영남유림의 독립청원운동 등을 지원하였다. 최준
24) 慶尙北道警察部, 高等警察要史, 1934, 183쪽.
286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45집
을 비롯한 裵相淵·徐相懽·徐相灝 등 각 지역의 지주 및 부호들이 해외
독립운동세력을 지원하기 위해 군자금 모집에 참여하였다. 최준은 지배
인으로 있던 백산상회와 서상일이 운영하고 있던 태궁상점을 이용하여
1918년 성주의 지주 배상연 5,000원, 통영의 부호 서상환·서상호는 각각
할당액 6만 원 중 일부 1만원을 군자금으로 모집하였고, 그리고 자신도
출연하였을 것으로 보인다.25)
한편, 1915년 7월 15일 박상진이 광복회를 결성할 때, 최준은 김재열·
정운일·이시영·홍주일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26) 그는 광복회의 설립
초기 본부의 財務部長을 역임하였다. 우재룡의 자서전 白山實記 에서
는 광복회의 조직과 주요 인물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27)
광복회의 조직과 구성원
사령관: 朴尙鎭
지휘장: 禹在龍·權寧萬
지부장: 蔡基中(경상도)·金漢鍾(충청도)·李秉燦(전라도)·金善浩(경
기도)·崔鳳周(함경도)·趙賢均(평안도)·李海量(황해도)·金
東浩(강원도)
본부회장: 朴尙鎭 이하 崔浚·李福雨 등
만주사령관: 李奭大
국외: 만주 안동여관 孫晦堂·봉천 삼달양행정미소 鄭舜永 등
광복회 본부의 회장은 박상진이었고, 재무부장은 최준, 사무총괄은 이
복우가 담당하였다. 광복회의 본부는 박상진이 경주와 대구를 왕래하며
활동했기에 경주의 박상진가와 대구의 상덕태상회가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광복회의 본부를 움직였던 박상진·최준·이복우는 혈연관계로 맺어
25) 慶尙北道警察部, 高等警察要史, 1934, 184쪽.
26) 권대웅, 1910년대 국내독립운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8, 114쪽.
27) 禹在龍, 白山實記.
경주 부호 崔浚의 생애와 독립운동 287
진 사이였다. 박상진은 최준의 사촌 자형으로 광복회 총사령이었고, 이복
우는 최준의 종내외종으로 광복회의 사무를 총괄하였다. 이복우는 1921
년 최준이 설립한 경주상회의 사장을 역임하였고,28) 박상진의 가까운 친
척으로 1913년 박상진이 만주 등지를 여행할 때 동행하였다.29)
최준은 본부의 재무부장으로 박상진·이복우 등과 광복회의 본부를 운
영하였다. 1913년 7월 대구은행의 발기인이었던 최준은 1917년 안희제가
설립한 白山商會(합)의 주주로 참여하였고, 1919년에는 개편된 白山貿易
(주)의 취체역 사장 및 지배인을 역임하였다. 따라서 최준은 경주를 중심
으로 대구와 부산을 내왕하면서 대동청년단의 상업조직인 백산무역(주)
을 통해서 조선국권회복단의 상업조직인 윤상태의 香山商會, 서상일의
太弓商店, 박상진의 尙德泰商會 등을 서로 조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최준은 1915년 11월 17일 경주에서 우편마차를 공격하여 8천 7백 원을
탈취하는 데 관여하였다.30) 즉 경주 광명리에서 일본인이 징수하여 마차
로 운송하던 경주·영일·영덕군의 세금 8,700원을 우재룡·권영만 등과
함께 습격하여 탈취하였다.31) 이른바 ‘慶北郵便馬車暗襲事件’으로 불리
는 이 의거는 우재룡과 권영만이 계획하고 관련 정보는 최준이 제공하였
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시 우재룡과 권영만은 광복회 본부조직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들은 탈취한 자금을 가지고 경주 祿洞의 박상진의
집으로 귀환하였는데, 이 자금은 최준이 맡아 관리하였다.32)
최준은 광복회 본부의 재무부장으로 자금을 수합하고 관리하였다. 광
복회가 각처 부호들에게 발송한 포고문에서 特定配當金證을 光復會財務
部의 이름으로 발송하였는데, 광복회 본부의 재무부와 그 부장인 최준이
모든 자금을 관리하였다.33) 최준이 백산무역의 취체역 사장 및 지배인이
28) 朝鮮銀行會社要錄(1921년판).
29) 梁漢緯, 梁碧濤公濟安實記.
30) 매일신보, 1915년 12월 26일, 「慶州阿火間에서 官金逢賊」.
31) 朴孟鎭, 「固軒實記略抄」; 禹在龍, 「禹在龍은 古友 朴尙鎭의 略曆을 手抄」; 金厚卿·
申載洪, 獨立運動功勳史, 1971, 364쪽.
32) 朴孟鎭, 「固軒實記略抄」.
288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45집
었으므로 자금의 관리가 용이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밖에 최준은 1919년 9월 대동단 의거와 1919년 9월 강우규 의거에 연
루된 것으로 일본 경찰은 파악하고 있으며, 그리고 1921년 11월 태평양회
의에 이승만 등이 진정서를 제출할 때 경주군 대표로 서명하였다.
조선민족대동단은 1919년 3월 말 독립의 달성을 위한 조선민족의 정신
통일과 실력양성을 표방하며 전협·최익환 등이 결성하였다. 대동단은
선전활동과 제2회 독립만세시위를 추진하여, 선전활동을 위한 선전물로
巴里講和會議와 미국 윌슨 대통령 앞으로 우리의 독립을 주장한 ‘陳情書’
를 작성하였다. 대동단은 전협을 미국으로 파견하여 이승만과 모의할 계
획을 세우고 그의 渡美를 위한 여비를 조달하였는데, 최준이 연루된 것
으로 일본 경찰은 파악하고 있었다.34)
또 최준은 1919년 9월 2일 강우규의사가 조선총독 齋藤實 일행을 향해
폭탄을 투척한 의거에 연루되었던 것으로 일본 경찰은 파악하였다. 즉
강우규가 9월 2일 남대문정거장에서 齋藤實 일행의 마차에 폭탄을 투척
하기 직전에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경주읍 최준에게 “我等의 행동을
찬조하여 독립운동자금을 송부해 달라”는 공한을 許炯에게 건네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 경찰은 9월 8일 허형이 “이 편지를 휴대하고 경주로
내려갔으나 최준은 부재중이었으므로 그의 아우 崔淳에게 전해졌다.”는
것으로 파악하였다.35)
최준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1921년 9월, 군비축소와 태평양지역 문제
를 토의하기 위하여 1921년 11월 워싱턴에서 열리는 태평양회의(워싱턴
군축회의)에 이승만·서재필 등을 대표로 파견하여 독립청원서, 즉 太平
洋會議書를 제출할 때, 경주군 대표로 서명하였다. ‘태평양회의서’ 연명부
33) 姜德相編, 現代史資料 25, 35쪽, 「高第174號 國權恢復을 標榜한 不穩團體員發見處
分의 件」.
34) 靑柳綱太郞, 朝鮮獨立騷擾史論, 1921, 188쪽; 國會圖書館, 韓國民族運動史料
(三·一運動篇) 二, 1992, 545쪽, 「李堈公事件」.
35) 國會圖書館, 韓國民族運動史料 (三·一運動篇)二, 1992, 392쪽, 「總督에 對한 兇行
犯人逮捕의 件」및 417쪽, 「總督에 對한 兇行犯人逮捕의 件」(第二報).
경주 부호 崔浚의 생애와 독립운동 289
에는 각계각층의 단체대표와 전국 각 지역을 대표하는 총 372명이 한국
인민대표로 서명하였다. 최준은 지역 대표 271명 중 경상북도 경주군 대
표로 서명하였다. 최준 외에 한익동(경북)·서상일(대구)·최태욱(청
도)·배상연(성주)·윤현태(양산)·정재완(사천) 등이 서명하고 있는데, 이
들은 당시 대동청년단·조선국권회복단·광복회 등의 독립운동단체나
백산무역(주)에 관계하면서 해외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있었다.36)
뿐만 아니라 최준은 백산상회의 주주이며 대동청년단의 단원인 아우
최완을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파견하였다. 당시 일본 경찰은 “경상북
도 경주의 부호 최준의 동생 최완과 같은 자는 2만 원의 현금을 휴대하고
있었다.”37)고 파악하였다. 최완은 대동청년단의 단원 윤현진(내무위원)·
김응섭(법무위원)·남형우(법무차장) 등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
여하였다. 그는 1919년 4월 13일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財務委員에
이어 4월 23일 의정원 議員과 財務部委員 등을 역임하였으나,38) 1926년
36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한편, 최준은 조선총독부의 회유와 압박에 직면하였다. 일제는 1920년
부터 소위 문화정치의 일환으로 행정자문기관인 道評議會를 설치하고,
1930년에는 의결기관인 道會를 설치하였다. 최준은 청도출신의 광복회 회
원 이정희와 함께 1920년 제1기 민선 경상북도 道評議員으로 참여하였다.
광복회의 주요 구성원이었던 최준과 이정희의 도평의원 참여는 피할
수 없었던 선택으로 보인다. 이때는 광복회사건으로 1920년 9월 총사령
박상진 등 5명이 사형을 언도받아 집행을 기다리고 있었고, 최준·이정
희 등도 함께 연루되었다가 면소된 상황이었다.
최준은 1920년 12월 10일 실시된 도평의원 선거에서 청도의 이정희와
36) 梨花莊所藏 雩南李承晩文書:東文篇 8, 390-393쪽; 高珽休, 「한국인민치태평양회의
서」(1921)의 진위 논란과 서명인 분석」, 한국근현대사연구 58, 한국근현대사학회,
2011, 64쪽.
37) 1919年 5月 13日 騷密第2219號, 「獨立運動에 關한 件」, 한국독립운동사자료 4(임정
편Ⅳ) 국사편찬위원회 , 1991년, 47쪽.
38) 在上海日本總領事館警察部, 朝鮮民族運動年鑑, 1932년, 9~11쪽.
290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45집
함께 도평의원이 되었다. 박상진은 최준의 사촌 자형이었고, 이정희의 사
돈이었을 뿐만 아니라, 광복회의 총사령이었다. 최준과 이정희는 박상진
을 구명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더욱이 일제
의 회유와 압박에 직면하고 있었다.39)
그 후 최준은 조선총독부가 식산은행장 有賀光豊을 통해 中樞院 參議
를 제의하였으나 거절하였다.40) 그러나 아우 崔潤이 1927·30·33년 경상
북도 도의원을 거쳐 1936년 중추원 참의로 식민통치의 하부기구에 참여
하였다.41)
이와 같이 최준은 조선국권회복단과 광복회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 세
력을 지원하였지만, 조선총독부의 회유와 압박도 피할 수 없었다. 이것은
최준의 양면성이었고, 그를 비판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요인이었다.
2) 경제운동
1904년부터 최준은 경주 교동 최씨가의 가사를 전담한 후,42) 아우 崔
潤·浣·淳과 더불어 殖産興業에 관심을 기울였다. 1907년 10월 아우 최
윤이 설립한 慶州金融組合과 1908년 최준 자신이 중역으로 참여한 慶州
興業은 이 집안이 처음 시작한 근대적 기업이었다.43)
39) 조선총독부 경무국, 「경상북도정치범검거」, 朝鮮治安狀況, 1922, 208~238쪽, 朴淳
碩, 梅雲義士李公傳(1980)에 의하면, “이정희는 사돈인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의
구명을 위해 1919년 渡日하여 일본정계의 거물들을 만나 교섭한 후 귀국한 바 있고,
1920년 12월 경상북도 초대 도평의원에 피선된 후, 1921년 재차 일본시찰을 떠나 일
본 정계의 요로를 순방하였다. 이때 光復會事件에 對하여 植民地 民族의 獨立運動
에 對한 當爲性과 政治犯에 對한 極刑의 不當性을 痛論說得함과 동시에 在野與論을
喚起시켜 日本 識者層과 言論界의 相當한 理解와 支援을 얻어 必死的 노력으로 東
奔西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40) 동선희, 식민권력과 조선인 지역 유력자(道評議會·道會議員을 중심으로), 선인,
2011.
41) 朝鮮總督府官報, 1936년 6월 3일, 「敍任及辭令」.
42) 慶州崔氏校村宗親會, 校村의 얼, 1998.
43) 朝鮮銀行會社組合要錄, 1929년판.
경주 부호 崔浚의 생애와 독립운동 291
최준은 1908년 숙부 최현교와 함께 權寧澤이 설립한 慶州興業의 중역
으로 참가하여 사회 활동과 경제 활동을 시작하였다.44) 그 후 1917년 10
월경부터 합자회사 白山商會의 주주를 거쳐, 1919년 1월부터는 주식회사
白山貿易의 취체역 겸 사장으로 민족기업의 설립과 경영에 참여하였다.
그 외에도 鷄林貿易(1918)·大東貿易(1920)·慶北産業(1920)·高麗窯業
(1920)·慶州商會(1921)·慶州産業組合(1927) 등의 회사를 직접 설립하거
나 유력한 회사의 주주로 참여하였으며, 慶南銀行(1921)·大邱銀行
(1921)·慶尙合同銀行(1928)·慶一銀行(1920)·海東銀行(1920) 등의 이사
및 대주주를 역임하였다.
백산상회는 1914년 중국에서 귀국한 안희제가 1916년 독립운동의 정보
연락과 군자금 마련을 위해 설립한 소규모의 개인상회로 시작하였으나
1917년 10월 자본금 14만 원의 합자회사로 전환하였다.45) 백산상회는
1918년 11월경에 주식회사 설립을 신청하여,46) 1919년 1월경 인가를 받았
고, 같은 해 5월경 자본금 100만 원의 백산무역(주)으로 전환하였다.47)
1917년 10월 설립된 백산상회(합)의 대표는 윤현태, 주주는 안희제를
비롯하여 최준·윤현태·최완·김용조·정순모·성태영·이정화·유덕섭
·안담·허걸 등 11명이었고,48) 1919년 1월 백산무역(주)의 사장은 최준,
전무는 윤현태, 이사는 안희제 등 7인, 감사는 윤상은 등 3인이었다.49) 백
산무역(주)은 부산의 본점과 원산의 지점, 그리고 대구·서울·봉천 등에
연락사무소를 두고 있었다. 백산무역(주)의 경영진 및 주주 구성은 다음
과 같다.
44) 皇城新聞, 1908년 12월 18일, 「廣告」.
45) 朝鮮銀行會社要錄, 1921년판.
46) 매일신보, 1918년 11월 3일; 오미일, 「일제시기 안희제의 기업활동과 경제운동」,
國學硏究 第5緝, 국학연구소, 2000, 17쪽.
47) 朝鮮銀行會社要錄, 1921년판; 매일신보, 1918년 5월 31일.
48) 國史編纂委員會,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國權恢復團Ⅱ)8, 「증인 安熙濟 신문조
서」, 94쪽.
49) 朝鮮銀行會社要錄(1921년판).
292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45집
백산무역(주)의 경영진 및 주주
취체역 사장: 최준
취체역 전무: 최태욱
취체역: 윤현태·안희제·강복순
이사 지배인: 최순
감사: 전석준·김시구
주식상황: 주식수 20,000주, 주주수 182인
대주주: 안희제(2,560)·최 준(1,800)·안익상(850)·정상환(640)·이우
식(600)·이종화(560)·허 걸(550)·정재완(500)·정재원(500)
·윤현태(400)·문영빈(390)50)
최준은 백산무역(주)의 취체역 겸 사장을 역임하며 안희제의 독립운동
과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는 백산무역(주)의 사장이
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조선국권회복단 회원 및 광복회의 본부 재무
부장으로써 독립운동에 깊이 관여하며 지원할 수 있었다. 더욱이 윤상
태·서상일·박상진 등이 주도하던 조선국권회복단과 광복회의 국·내외
거점인 香山商會·太弓商會·尙德泰商會 등의 상업조직과 직·간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었다.51)
최준은 1919년 1월부터 백산무역(주)의 대주주로서 사장을 역임하였으
며, 아우 최완과 최순은 백산무역(주)의 이사로 그를 보좌하였다. 최완은
1917년 백산상회가 합자회사로 전환된 이후부터 1919년까지 이사를 역임
하다가 1919년 임시정부 의정원 재무부위원으로 망명하였고, 그 후 아우
최순이 이사로 경영에 참여하였다.52)
최준은 백산무역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자본을 출자한 실질적
인 경영인이었고, 나아가 안희제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한
동지였다. 최준은 1919년부터 백산무역(주)을 통해 대지주 등 유력자를
연결하는 상업조직을 통해 방대한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여 송달하였다.
50) 國史編纂委員會, 위와 같은 책, 「증인 尹炳浩 심문조서」, 91~92쪽.
51) 권대웅, 1910년대 국내독립운동, 159쪽.
52) 朝鮮銀行會社要錄(1921년판).
경주 부호 崔浚의 생애와 독립운동 293
그는 항상 장부상 거래의 형식을 취하여 독립운동자금을 송달함으로써
일본 경찰의 수사를 피할 수 있었다. 백산무역을 통해 해외로 송금된 독
립운동자금은 100만 원이 넘는 거액이었다.53)
1921년 8월 백산무역(주)은 자금난으로 경영 위기에 봉착하였다. 사장
최준은 안으로는 업무를 정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재산 대부분
을 담보로 맡기고 식산은행에서 자금을 대출받아 회사경영에 전력을 다
하였으며 서울에도 백산무역(주)의 지점을 개설하였다.54) 아우 최순이
상무 취체역으로 승진하고, 조선은행에 근무하던 일본인 眞禹與吉이 신
임 지배인으로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백산무역에 대한 식산은행의 간섭
내지 감시가 시작되었다.55) 왜냐하면 백산무역(주)이 영남지방의 대지주
자본으로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는 등 민족기업으로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25년 10월 주주들의 불신임으로 최준은 사장 및 지배인에서 물러났
다. 즉 동년 7월 31일 제6차 정기총회에서 취체역 최준·최순·문상우·
이우진·김효식, 감사역에 문영빈이 선출된 뒤 주주와 중역들 사이에 알
력이 표출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 회의에서 주주들은 1917년 백산상회
(합) 창립 당시의 부채 문제와 사장 최준·최순 형제 문제 등을 내세워 4
명의 검사역이 장부조사를 실시하였다.56) 9월 12일 감사역 문영빈이 취
체역 최준·최순·안희제·윤병호·최태욱을 ‘사기횡령죄’로 부산지방법
원에 고소했다. 고소 내용은 최준 등 5인이 회사 재직 중에 96,170원을 횡
령했다는 것이었다.57)
결국 1925년 10월 20일 임시주주총회에서 이우식·최태욱·윤병호·안
희제가 중역으로 선출되었고, 1927년에는 사장 안희제, 이사 이우식·정
53) 이동언, 안희제,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0, 63~65쪽.
54) 東亞日報, 1921년 8월 17일, 「釜山白山會社擴張」.
55) 이동언, 안희제, 60쪽.
56) 東亞日報, 1925년 9월 7일, 「釜山白山貿易會社의 株主와 重役의 軋轢」.
57) 東亞日報, 1925년 9월 20일, 「白山重役被訴」.
294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45집
재완, 감사 윤병호·최태욱이 선출되었다. 이리하여 최준은 사장 및 지배
인에서 물러났고, 내부 분열을 계속하던 백산무역(주)은 1928년 1월 29일
파산하였다. 최준은 1928년 1월 백산무역의 해산과 파산으로 부채 130만
원을 지게 되어 조선식산은행과 경상합동은행으로부터 모든 재산을 압
류당하고 말았다.58)
최준은 조선국권회복단의 단원과 광복회의 재무부장을 역임하면서 독
립운동을 재정적으로 후원하였다. 뿐만 아니라 셋째 아우 浣을 상해 대
한민국임시정부의 재무위원으로 파견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하여 다수
의 사건에 연루되었다. 그는 기업 활동을 통해 자신을 위장하고 독립운
동세력과 그 조직을 후원하였다. 그의 백산무역 사퇴, 그리고 백산무역의
해산과 파산은 이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1928년 4월 최준은 박상진의 양부 박시룡으로부터 토지매입에
대한 불복 신청을 받는다. 박상진은 1912년 곡물상 상덕태상회와 포목상
내외물산을 설립하면서 三井物産에 토지 등을 근저당하였는데, 곧 포목
상 경영에 실패하고 삼정물산에 근저당된 토지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재
산처리문제를 최준이 맡게 되었다. 그런데 1921년 8월 11일 대구감옥에
서 박상진이 순국한 뒤,59) 최준은 박상진이 삼정물산에 근저당했던 토지
를 매수하였고, 이에 대해 1928년 4월 박상진의 양부 박시룡이 불복을 신
청했던 것이다.60)
한편, 최준이 직접 설립했던 회사는 계림무역(주)과 경주상회(합), 그리
고 경주산업조합이었다. 주식회사 鷄林貿易은 1918년 12월 崔寅國 등과
58) 최준은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조선식산은행장 有賀光豊에게 협조를 요청하였고, 有
賀光豊은 정치적 목적으로 부채문제를 처리하였다. 그의 모든 재산은 식산은행과
경상합동은행이 관리했으나 1945년 해방이 되자 되찾았다.
59) 동아일보, 1921년 8월 7일, 「光復團의 朴尙鎭 死刑執行在邇」.
60) 金喜坤編, 朴尙鎭資料集, 「추가불복이유의 신립서」, 271쪽. 박상진의 재산관리를
맡았던 최준이 합법적으로 인수한 것인지, 아니면 백산무역의 파산 등 경제적으로
곤경에 처한 최준이 가로챈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그 후 양 집안은 이
에 대한 송사문제로 서로 갈등을 겪고 있다. 이 문제는 한국독립운동사에 있어서
최준을 평가하는데 부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점이기도 하다.
경주 부호 崔浚의 생애와 독립운동 295
설립한 농림회사였고,61) 합자회사 慶州商會는 1921년 1월 일용잡화 도매
및 소매, 그리고 위탁판매를 위해 설립되어 1940년대까지 경영된 합자회
사였다. 사장은 鄭漢表(무한대표)·李福雨가 맡았고, 중역으로 사원인 최
준·孫秀文 등 5인 외에 무한책임사원 9명과 유한책임사원 200명으로 조
직되어 있었다.62) 慶州産業組合은 최준이 1927년 7월 鄭炳翰과 함께 경주
에서 설립한 산업조합으로 쌀·가마니·종이·비료 등을 거래하였다.63)
최준이 1925년 10월 주주들의 불신임으로 백산무역의 사장 및 지배인에
서 물러난 뒤 설립하여 직접 경영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최준이 주주 및 이사로 참여했던 회사는 경성방직(주)·대동무역(주)·
경북산업(주)·고려요업(주) 등이었다. 주식회사 京城紡織은 1919년 10월
金性洙가 창립하여 지방의 대지주들이 창립 발기인으로 참가하였는데,
영남지역에서는 최준·이일우·윤상은 등 영남지방의 대지주들이 참가
하였다.64) 주식회사 大東貿易은 1920년 5월 대구지역의 대지주 이종면·
정재학·최준·이병학 등이 무역·위탁판매·농림업 등 상업을 목적으로
설립하였다.65) 대동무역(주)은 1923년 5월 계림무역(주)과 합병하여 경북
산업(주)으로 개편되었다.66) 주식회사 高麗窯業은 1920년 6월 영남지역
의 대지주들이 설립한 자본금 20만 원의 요업품 제조판매 회사였다. 창
립총회에서 사장 李柄學, 이사 최준·김홍조, 전무 서병원·이상무, 감사
최순·양재하·김치평 등이 선출되었으나,67) 1921년 사장 宋秉畯, 부사장
白寅基, 이사 閔丙奭·尹德榮 등 서울을 비롯한 각 지역의 유력한 대지주
들로 중역이 모두 교체되었다.68)
61) 연표로 보는 현대사, 295쪽.
62) 朝鮮銀行會社組合要錄, 1923년판.
63) 朝鮮銀行會社組合要錄, 1935년판.
64) 仁村紀念會, 仁村金性洙, 1976.
65) 朝鮮銀行會社要錄, 1921년판.
66) 東亞日報, 1925년 6월 8일, 「兩會社倂合」.
67) 東亞日報, 1925년 6월 17일, 「高麗窯業創立」.
68) 朝鮮銀行會社組合要錄, 1923년판.
296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45집
최준은 백산무역(주)의 대표로 1921년 설립된 경남은행과 1921년 설립
된 대구은행의 발기인으로 대주주 및 이사를 역임하였다. 慶南銀行은
1912년 9월 경남지역의 대지주·상인층이 설립에 참여하였으며, 大邱銀
行은 1913년 5월 대구를 비롯한 경북지역의 대지주·상인층이 설립에 참
여하였다.69) 최준은 1928년 7월 경남은행과 대구은행이 慶尙合同銀行으
로 합병된 이후에도 대주주 및 이사를 역임하였다.70) 그 외 1920년 4월
대구에서 장길상이 설립한 慶一銀行과 동년 6월 서울에서 윤덕영이 설립
한 海東銀行의 주주로 참여하기도 했다.71)
한편, 최준은 朝鮮人産業大會와 經濟硏究會를 통해 경제운동에 참여하
였다. 조선인산업대회는 1921년 9월 조선총독부가 조선의 산업정책을 수
립하기 위하여 朝鮮産業調査委員會를 구성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그
위원회에 조선인들의 요구를 반영시키기 위해 발기하였다. 1921년 7월 30
일 발기총회에서 선출된 임원은 최준을 비롯하여 서상일·이영국·한일
동·이우진·김홍조·편동현(포항), 대회위원으로 서상일·이우진·최순,
그리고 지방위원 경북대표는 한익동 등이 선출되었다. 조선인산업대회
창립에 대구지역 참여자들은 대부분 민족운동에 참여했던 대지주 및 중
소상인자본가들이었다.72)
경제연구회는 1927년 10월 16일 발기총회에서 민중생활의 개선을 통한
경제의 발달을 표방하며 창립하였다. 경제연구회에는 30여 군에서 108명
의 발기인이 참여하였는데, 준비위원으로 최준을 비롯해서 이경희·박해
돈·이선호·이상린·장직상·이도화·최해종·김승묵·이근영·권태소
등의 대지주들이 선출되었다.73)
69) 朝鮮銀行會社要錄 (1921년판)에 의하면 대구은행은 1913년 5월 설립된 것으로 기
록하고 있으나, 朝鮮總督府官報(148)에 의하면 1913년 1월 설립된 것으로 기록하
고 있다.
70) 朝鮮銀行會社組合要錄(1931년판).
71) 朝鮮銀行會社組合要錄, 1935년판.
72) 東亞日報, 1921년 8월 1일, 「朝鮮人産業大會 創立經過」.
73) 東亞日報, 1927년 10월 19일, 「經濟硏究會」.
경주 부호 崔浚의 생애와 독립운동 297
회사명 설립일 자본금 대표자/중역/대주주 업종 주소
慶州興業(株) 1908.12.00
대표: 權英澤
중역: 崔鉉敎·崔浚 등 82인
상업무역 경주
慶南銀行
(株)
1912.9.21 1,000,000
사장/대표: 宋台觀
중역: (상무이사)全錫準·(이사)崔浚
등 7인·(감사)姜福淳·崔泰旭
대주주: 宋台觀·崔演國·白山貿易會社
·金弘祚 등 14인
은행 부산
大邱銀行
(株)
1913.5.29 2,000,000
사장/대표: 鄭在學
중 역: (이사)崔浚 등 5인
(이사지배인)古藤音麿
(감사)徐丙五· 朴基敦
대주주 : 鄭在學(7166)·李柄學(2050)
·崔浚(2040) 등 13인
은행 대구
白山商會
(合資)
1917.10.00 140,000
대표: 尹顯泰
주주: 崔浚·尹顯泰·崔浣· 金容祚·
鄭舜模·成泰永·李禎和· 柳德燮·
安湛·許杰
무역 부산
鷄林貿易(株) 1918.12.12 崔浚·崔寅國 등이 설립함 경주
白山貿易(株) 1919.5.28 1,000,000
취체역사장: 최준
전무취체역: 최태욱
취체역: 안희제·이종화·조동옥·
허걸·이우석·윤병호·정제원.
감사역: 윤상은·문영찬·김상원.
주주: 최준·안희제·윤현태 등 30명
무역/
위탁매매
/부동산
매매/
금전
대부업
부산
京城紡織(株) 1919.10.05
사장/대표: 朴泳孝
중역: (전무)朴容喜·(이사)金性洙 등,
(감사) 李宗勉 등 (최준·이일우 등
경북 자본가 참여)
경성
大東社
(株)
1920.5.00 700,000
사장/대표: 李宗勉
중역: (전무이사)李殷雨·(이사)秦喜葵
등 5인·(감사)李快榮 등 3인
대주주: 鄭在學(800)·片東鉉(700)·
李英勉(550)·崔浚·李柄學·李章雨·
李璨鎬(각 500) 등
무역/
위탁매매
/농림업
등
대구
高麗窯業(株) 1920.6.4 200,000
사장/대표: 李柄學
중역: (이사)徐丙元·金弘祚· 崔浚·
李相武· (감사)崔淳·楊在河·金治平
요업품제
조판매
대구
<표 1> 최준이 설립한 회사
298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45집
주주: 위의 중역
慶一銀行(株) 1920.4.28 2,000,000
사장/대표: 張吉相
중역: (전무이사)張稷相·(이사)李宣鎬
등 4인·(감사)岸本銳次郞 등 4인
대주주: 張吉相 등 20인(崔浚 포함)
일반은행
업무
대구
海東銀行(株) 1920.6.29 2,000,000
사장/대표: 高啓河
중역: (이사)趙東洵 등
5인(감사)張齊翰
대주주: 李仁稙(4650) 등 14인
(최준 1000)
은행 경성
慶州商會
(合資)
1921.1.31 77,000
사장/대표: 李福雨(2500무)
중역: (사원)崔浚·孫秀文(각 5000무)·
李錫模·金憲洙·崔鎭壽(각 2500무),
이외 무한 9명·유한 200여 명
일용잡화
도소매
및
위탁판매
경주
慶州産業組合1927.7.23 사장/대표 崔浚, 이사 鄭炳翰산업조합 경주
慶尙合同銀行
(株)
1928.7.31 2,250,000
사장/대표: 鄭在學
중역: (상무이사)上田直秀·
(이사)李柄學 등 (감사) 崔淳 등
대주주: 鄭在學(9855)등 (취재역 최준)
은행 대구
한편, 최준은 문화운동의 일환으로 교육·언론·민족문화 등의 사업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1919년 10월 김성수가 설립하는 경성방직(주)의
발기인으로 참여한 이래 문화운동이 확산되는 과정에서 1920년 1월 동아
일보 창간 발기인, 1922년 중앙학교 재단이사와 보성학교 이사 등을 역임
하였다. 한편으로는 1920년 경주청년회 지원을 통한 대중운동, 1930년 동
경통지의 편찬 주간으로 민족문화의 육성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다.
그는 1920년 1월 14일 東亞日報 발기인 총회에 참여하였다. 1920년 4월
1일 창간된 동아일보는 민족언론의 필요성을 인식한 김성수가 양기탁·
유근·장덕수 등과 함께 설립하였다. 최준은 백산무역의 대표로 安熙
濟·許傑·李鍾和·尹顯泰 등 백산무역 관계자들과 함께 참여하였다.74)
뿐만 아니라 최준은 대구의 부호 徐丙朝와 함께 1920년 6월 21일 朝鮮每
74) 仁村紀念會, 仁村 金性洙, 1976, 153~207쪽.
경주 부호 崔浚의 생애와 독립운동 299
日申報를 설립하기도 했다.75)
최준은 김성수가 1922년 11월부터 시작하는 민립대학 설립운동에 참여
하였다. 그는 1921년 中央學校의 이사로 재단운영에 참여하였고, 普成學
校를 후원하기도 하였다. 중앙학교는 김성수가 1915년 4월 인수하여 경
영하다가 1921년 4월 고등학교 인가를 받았다. 최준은 김성수의 요청에
따라 중앙학교의 이사로 재단운영에 참여하였다. 나아가 1922년부터 보
성학교를 후원하다가 1932년 김성수가 普成專門學校를 인수한 뒤, 도서
관 건립에 참여하여 기부금을 출연하기도 하였다.76)
최준은 향리인 경주에서 慶州靑年會를 후원하였다. 경주청년회는 1920
년 3월 설립되어 동년 7월 군수 등의 후원으로 황오리에 있는 漢文書塾
을 회관으로 확보하였는데, 이때 그는 운동장 부지 2천 평을 기부하였
다.77) 최준은 1920년 경주고적보존회의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13년 설
립된 慶州古蹟保存會는 경주지역의 고적을 조사·보존·전시하였던 경
주박물관의 전신이었다.78)
특히 주목되는 것은 1930년 간행에 착수하여 1933년 발간한 東京通誌
14권 7책의 간행이었다. 이것은 최준이 崔南善·鄭寅普의 편집 자문을 받
아서 東京雜記 를 수정·보완한 경주의 地誌이다.79)
이와 같이 최준은 백산상회의 사장 및 이사를 역임하면서 개인경영의
회사를 직접 설립하거나 운영하였으며, 유력한 회사와 은행의 대주주 및
이사를 역임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조선인산업대회·경제연구회 등을
통한 경제운동에 참여하였으며, 교육·언론·민족문화사업에 참여하거나
후원하였다.
75) 東亞日報, 1920년 6월 25일, 「朝鮮每日申報社許可申請」.
76) 仁村紀念會, 仁村 金性洙, 1976, 153~207쪽.
77) 東亞日報, 1920년 7월 10일, 「慶州靑年會發展」.
78) 東亞日報, 1923년 6월 23일, 「新羅古蹟觀覽者數」.
79) 배동환, 「浚公略傳」(校村의 얼, 慶州崔氏校村宗親會, 1998).
300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45집
4. 맺음말
崔浚(1884.7.27~1970.10.13)은 조선왕조 말기의 전환기에 태어나 한말·
일제강점의 격동과 수난기를 살았다. 그는 9대 진사와 12대 만석의 재산
을 누린 경주 교동의 속칭 ‘崔富者’집의 장손으로 태어났다. 그는 가문의
경제력을 독립운동에 바친 만석꾼의 마지막 주인이었으며, 노블리스 오
블리제를 실천한 인물이었다.
소년기의 최준은 족숙인 최현필의 문하에서 가학을 전승받았다. 그리고
경주 교동을 방문했던 최익현·신돌석 등의 민족지사, 박상진·김응섭 등
의 젊은 선각자들을 통해 국가와 민족이 처했던 현실을 인식하였다.
청년기의 최준은 국권회복을 위한 구국운동으로 교육진흥과 식산흥업
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교남교육회와 대한협회 활동을 통해 신사상과
신지식을 흡수하였고, 나아가 안희제·서상일·남형우 등의 넓은 인맥은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에서 동지적 관계로 발전하였다.
최준은 1910년 이후 민족운동으로서 독립운동과 기업 활동 및 경제운
동, 그리고 문화운동에 참여하고 후원하였다. 그는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
한 저항으로 독립운동단체에 참여하였고, 기업가로서 민족자본의 육성을
위해 기업 활동과 경제운동을 펼쳤다. 그는 대부호였을 뿐만 아니라 독
립운동가, 민족자본을 기반으로 한 경제적 독립을 지향한 근대적 기업가
였다.
그의 독립운동단체 참여와 후원 활동은 매우 광범위하고 다양하였다.
그는 조선국권회복단의 단원과 광복회의 재무부장을 역임하면서 민족지
사들의 독립운동을 재정적으로 후원하였다. 그는 세째 아우 浣을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재무위원으로 파견하였고, 국내·외에 걸쳐 전개된
독립운동을 지원하여 다수의 사건에 연루되었다.
그는 기업인으로서 백산무역 등 많은 기업의 설립과 경영에 참여하였
다. 그는 기업 활동을 배경으로 독립운동 단체에 참여하고 독립운동가들
경주 부호 崔浚의 생애와 독립운동 301
▪ 접수일 : 2013. 7. 10 / 심사완료일 : 2013. 8. 3
▪ 주제어 : 독립운동, 독립운동자금, 경제운동, 문화운동
을 후원하였다. 일제강점기 많은 독립지사들이 투쟁적인 활동을 전개하
였지만, 그는 기업 활동을 통해서 자신을 위장하고 독립운동세력과 그
조직을 후원하였다.
최준은 백산무역(주)의 사장과 조선국권회복단의 회원, 그리고 광복회
의 재무부장으로 국내외 독립운동가와 연락을 담당하고 독립운동자금의
지원에 주력하였다. 결국 1928년 1월 백산무역(주)의 해산과 파산으로 부
채 130만 원을 지게 되어 조선식산은행과 경상합동은행으로부터 모든 재
산을 압류당하고 말았다. 표면적으로는 상거래에서 물건 값을 회수하지
못한 것이 이유였지만, 실제로는 독립운동자금의 지원 규모가 방대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부채 130만 원의 대부분은 독립운동자금으로 백산무역
(주)을 통해 해외로 송금되었다.
최준은 조선총독부의 회유와 압박에 대응하여 타협하기도 했다. 즉 최
준 자신은 1920년 경상북도 도평의회의 도평의원이 되었고, 둘째 아우 潤
을 경상북도 도의원과 중추원 참의로 식민통치의 하부기구에 참여토록
했다. 이것은 독립운동과 기업 활동을 동시에 펼쳐야만 했던 그의 한계
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대부호 최준이 당면해야만 했던 이중의 과제는
독립운동의 투쟁성에 있어서 일정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302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45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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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45집
❂ 국문요약
경주 부호 崔浚의 생애와 독립운동
권 대 웅
崔浚(1884~1970)은 조선왕조 말기의 전환기에 태어나 한말·일제강점
의 격동과 수난기를 살았다. 그는 9대 진사와 12대 만석의 재산을 누린
경주 교동의 속칭 ‘崔富者’집의 장손으로 태어났다. 그는 가문의 경제력
을 독립운동에 바친 만석꾼의 마지막 주인이었으며, 노불리스 오블리제
를 실천한 독립운동가였다.
최준은 청년기 국권회복을 위한 구국운동으로 교육진흥과 식산흥업에
관심을 가졌다. 나아가 1910년 이후 민족운동으로서 독립운동, 기업 활동
및 경제운동, 그리고 문화운동에 참여하였다.
그의 독립운동단체 참여와 후원 활동은 매우 광범위하고 다양하였다.
그는 조선국권회복단의 단원과 광복회의 재무부장을 역임하면서 독립운
동을 재정적으로 후원하였다. 그는 셋째 아우 浣을 상해 대한민국임시정
부의 재무위원으로 파견하였고, 국내·외에서 전개된 독립운동을 지원하
여 다수의 사건에 연루되었다.
그는 기업인으로서 백산무역의 사장으로 많은 기업의 설립과 경영에
참여하였다. 그는 기업 활동을 통해서 독립운동 단체에 참여하고 독립운
동가들을 후원하였고, 언론·교육·문화사업에 관심을 기울였다.
1928년 1월 백산무역의 파산으로 조선식산은행으로부터 모든 재산을
압류당하고 말았다. 표면적으로는 상거래에서 물건 값을 회수하지 못한
것이 이유였지만, 실제로는 독립운동자금의 지원 규모가 방대했기 때문
이었다.
경주 부호 崔浚의 생애와 독립운동 305
최준은 조선총독부의 회유와 압박에 대응하여 일정하게 타협하기도
했다. 이것은 독립운동과 기업 활동을 동시에 펼쳐야만 했던 그의 한계
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부호 최준은 독립운동의 투쟁성에 있어서 일정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306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45집
❂ 영문요약
The life and Independence Movement
of Gyeongju Millionaire Choi Joon
Kwon, Dae-Woong
Choi Joon (July 27, 1884 ~ Oct. 13, 1970) was born in the transitional
period of the end of the Joseon Dynasty and has lived the tumultuous period
of the Japanese occupation. He was born as the first son in the family of
Gyeongju Choi millionaire, who has produced Jinsa(a person who has
passed the primary state examination only in the Joseon Dynasty) for nine
generations and been a millionaire for twelve generations. He was the last
host of the Choi millionaire who had contributed the economic power of his
family to the independence movement, and was a man of national
movement who has practiced the noblesse oblige.
In his youth, Choi Joon was interested in the education development and
industry promotion as a save-the-nation movement for the restoration of its
sovereignty. And he, after 1910, participated in the independence movement,
corporate activities, economic movement, and cultural movement as a
national movement.
His participation in and support for the independence movement
organizations were extensive and various. He supported the independence
movement financially while he served as a member of the Chosun
Sovereignty Restoration Association and a treasurer of Kwangbokhae. He
dispatched his third brother Wan to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in
경주 부호 崔浚의 생애와 독립운동 307
Shanghai as a member of financial affairs, and has been involved in various
activities by supporting independence movement both inside and outside of
the country.
As a businessman and the president of Baeksan Trade, he took part in
various foundation and management of many businesses. He participated in
the independence movement organizations and supported independence
activists through his business activities.
He had interest in the businesses of the press, education and culture as
a part of cultural movement, and has been interest in the nurturing of
national culture.
His property was attached by the Chosun Siksan Bank as the result of
bankruptcy of Baeksan Trade in January, 1928. It was partly because he did
could not collect money for goods in the trade, but it actually was because
his support for the independence movement was extensive.
Choi Joon sometimes took a compromising attitude toward the conciliation
and pressure of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which was his
limit in which he had to do both independence movement and business
activity. Therefore, the millionaire Choi Joon was obliged to have limit to
some extent in his militancy.
Key words: Independence Movement, National Movement, Noblesse Oblige,
Economic Movement, Cultural Mov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