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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사향은 1929년 평양의 보수적인 집안에서 태어나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랐다. 1946년 상공부 섬유국 영문 타이피스트로 근무하던 중 주변 사람의 추천으로 럭키레코드가 주최한 ‘전국 가수 선발 경연대회’에 출전했다. 타고난 목소리 덕분에 조선 13도에서 1등을 했고, 중앙방송국(현 KBS) 전속 가수 1기로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그녀 나이 19세. 데뷔곡 ‘첫 사랑’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을 때 한국전쟁이 터졌다. 그래도 그녀는 노래를 포기하지 않았다. 1954년 부산에서 도미도 레코드사를 통해 대표적인 히트곡 ‘홍콩아가씨’를 취입했다. 이 노래가 전국적으로 히트를 하며 ‘국민가수’로 급부상했다. “당시는 공연만 하는 가수와 레코드 취입만 하는 가수가 있었어요. 나는 운이 좋았지. 무대 오르면서 레코드까지 취입했으니까. 레코드는 영원히 기록이 남잖아요. 그때 무대에는 올랐지만 이름 한 자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분들이 많아요.” 금사향은 이후 ‘잘 나가는’ 가수가 됐다. 작은 체구 때문에 한국 여자가수로는 처음으로 하이힐을 신었고, 공작 깃털로 멋을 낸 공단드레스를 입었다. 그녀의 말을 빌려 “남부럽지 않은 화려한 생활”을 영위했다. 금사향이 더욱 사랑 받을 수 있었던 건 어떤 무대든 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군위문단으로 최전방에 갔었을 때였을 거야. 공연을 하다가 알게 된 젊은 군인이 있었는데 노래를 정말 잘 불렀어요. 그런데 다음날 무장공비의 습격으로 그만 유명을 달리했어요. 그 상황에서도 우리는 무대에 올랐어요. 다들 말렸지만 전우를 잃은 이들의 마음을 모른 척 할 수 없었죠.” # “평생을 국민을 위해 노래했는데 우리의 현주소는 너무 비참” 역사의 한복판에서 서있던 그녀였지만 현재 금사향은 경기도 일산의 한 가건물에 홀로 거주하고 있다. 좁은 계단을 한참이나 올라가야 나오는 집은 비가 내리면 비가 샐 정도로 열악하다.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 곳에서 한때 ‘국민가수’로 불렸던 이가 살고 있는 것이다. “집이 너무 엉망이라 차마 공개를 못 하겠다”고 말하는 금사향은 좁은 병실로 기자를 불렀다. 인터뷰 3일 전부터 다리가 급격하게 나빠져 입원했지만 이 역시 일산 한 병원의 지원이 없었으면 치료조차 받을 수 없었다. “진실을 말하면 우울해진다”며 한사코 자신의 처지를 입 밖으로 내지 않던 그녀는 “비참하다”는 말로 고충을 털어놨다. “비참하죠. 나뿐 아니라 많은 원로가수들이 힘겨워하고 있어요. 국민을 위해 평생을 노래했는데 우리의 현주소는 이래요. 나는 괜찮아요. 하지만 힘겨워하는 우리 시대 가수들을 정부 차원에서 도와줬으면 좋겠어.” 인터뷰 시작부터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았던 금사향은 자신과 과거 동료 가수들의 현실에 대해 얘기를 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래서 얘기 안 하려고 했는데…”라며 핀잔을 주며 눈물을 급히 훔쳤다. (인터넷에서 퍼오다.) |
아니 1946년, 18살에 상공부 섬유국에 ‘영문 타이피스트’라니 놀랠 노자이다. (1943년 4월 1일, 수업연한을 4년으로 단축했다니까 좀 일찍 졸업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여간 타자기도 그 당시에는 많지 않았을 터인데 취업을 잘 한 것이리라. 그냥 노래만 잘하는 여자는 아니었다는 이야기이다.
<친구 만평>
강부웅과 공성현
둘 다 중학교 3학년 4반 같은 반이었다. 강부웅은 나 다음 번호이었으니 옆자리이다. 가까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부웅이네 집에도 한번 갔다. 가을인 것 같다. 시청에서 중앙일보 쪽으로 가다가 큰길에서 오른쪽 안으로 들어간 순화동 주택가이다. 그리고 중학교 졸업 후 그날 둘이서 사진을 찍는다고 덕수궁으로 들어가 많이도 찍었다. 그 사진들이 지금도 모두 남아있다.
부웅이는 고등학교에서 방송반을 했다. 그래서 아나운서처럼 마이크를 잡고 방송을 하기도 했다. 그런 모습이 굉장히 멋져 보였다. 나는 등산반을 하였지만 부웅이는 공부를 하느라고 같이 산에 간 적이 없다. 성현이는 48번이니 좀 떨어져 앉았다.
그런데 졸업 후 나에게 연락이 와서 같이 산을 가자고 한다. 암벽등반을 하고 싶단다. 어떻게 준비를 하였는지 부웅이가 자일(등산용 줄)까지 준비 했을 것이다. 그래서 도봉산을 간 것이다. 공성현이도 함께 갔다. 성현이가 사진기를 가지고 왔다. 그래서 도봉산 선인봉 측면을 셋이 같이 올랐고 정상에서 찍은 사진이 있다. 그렇게 사진기를 가지고 암벽등반을 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같이 자주 만났던 서울사대부고 팀과 어울려 사진까지 찍은 것이다. 그리고 한 탕 더해서 도봉산 뒤쪽에 있는 작은 주봉까지 같이 올랐다. 주봉에서 성현이는 같이 안 오르고 사진만 찍어주었다. 성현이 덕에 등반 사진이 오롯이 남아있는 것이다. 바위 건너편 산으로 올라가 찍은 것이다. 성현이도 같은 반을 한 적은 있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지낸 시간은 많지가 않았다. 성현이는 좀 조용하고 사색적이지 않았나 싶다.
사진을 보면 알지만 주봉은 약간 기울어져서 오르기는 쉽지 않은 곳이다. 특히나 오르다가 우측으로 돌아서 올라가는 곳이 침니(chimney, 벽이 양쪽으로 갈라진 곳)인데 바깥쪽은 넓고 안쪽은 좁다. 무서우니까 안쪽으로 들어가서 올라가면 좁아서 오르기가 어렵고 나오면 넓어서 오르기는 편하지만 아래로 미끄러지거나 떨어질 수가 있다. 다행이도 오르는 길이(높이)가 길지는 않다. 황석영의 데뷔작 「입석 부근」의 소재가 된 바위이다. 주봉(柱峰)을 입석(立石)으로 쓴 것이다.
주봉 정상 강부웅과 함께
주봉에서 내려오는 나, 올려다보는 강부웅, 위 사진의 줄과 아래 사진의 줄이 같은 줄. 공성현 촬영
왼쪽 앞줄 유정민, 내 뒤가 공성현, 강부웅 촬영, 옆은 서울사대부고 등산반 출신 친구들 도봉산 선인봉 정상
처음으로 올라 주봉 정상으로 고개를 내밀고 오르는데 저녁이라 해가 지는 모습을 본 첫 번째 등반은 언제나 나에게 살아갈 용기를 불어넣어주었다. ‘해가 지는 순간까지 열심히 하면 무엇인가 이룰 수 있을 것이다’라는. 정상에서 아래로 내려오면 점점 바위와 멀어져 공중에서 뱅뱅 돌면서 내려와야 한다. 허공을 내려오는 기분이다.
성현12.03.14. 14:07 김낙춘 교수님! 방금 가입인사 올리고 귀하의 그림을 난생 처음 보았습니다! |
위의 글은 좀 시간이 지났지만 감낙춘 형과 나눈 댓글이다.
그림에 대한 식견이 남다르다는 것이 느껴진다. 근래의 성현 형을 엿볼 수 있는 대화이다.
10.08.15 | 2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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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인 김낙춘 칼럼 공지사항 참조
이주래
이주래는 사실 36회이다. 무슨 사유인지까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티를 가능한 한 내려고 하지 않았다. 그냥 같이 어울리려고 많이 애썼을 것이다. 티를 내면 낼수록 우리와는 거리감이 생기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어느 선생님께서 수업 중 무엇을 주려고 이주래를 찾는다.
“이주래가 어느 줄에 앉았느냐?”
“이주래가 이 줄에 앉았습니다!”
선생님이 서계신 바로 앞 줄이다.
그래서 금방 폭소가 주변에서 터져 나왔다.
이주래10.08.15. 16:30 언론인으로 보면 조선일보의 김대중 선생님이나 선우휘 선생님 이규태 선생님 그리고 한국일보의 예용해 선생님들은 자유인 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심연섭 선생님은 자유인 이셨습니다. 그 분이 백수이실 때 잡지사에서 연락이 왔답니다. 직업란을 어떻게 쓸가요? "칼럼니스트" 라고 써주세요. 이렇게 해서 한국에서 최초로 "칼럼니스트" 라는 업종이 생겼다고 심 선생님이 말씀 하셨었습니다. 명 칼럼 이셨죠. 그 분의 특징이 "자유인" 이셨는데 같은 자유인을 표방하는 김낙춘 교수의 명 칼럼을 기대 합니다. 그리고 房 이 하나 생기심을 축하드립니다 |
위의 글도 같은 곳 이주래 형이 감낙춘 형에게 쓴 댓글이다. 글의 내용이 그냥 넘어갈 글이 아니다. 내공이 느껴진다. 근래의 주래 형을 엿볼 수 있는 대화이다. 어떻게 글을 쓰다보니 성현 형과 주래 형의 글을 쓰게 되었는데 낙춘 형의 글을 읽다가 같은 글에 다른 댓글(아래 연결 참조)을 보고 이곳으로 옮겼습니다.
10.08.15 | 2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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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인 김낙춘 칼럼 공지사항 참조
문영부
‘문영부’하면 무엇이 제일 먼저 생각나니? 그래 맞아, 키가 작다는 것이지. 나도 작았지만 영부는 나보다도 더 작았다. 작은 아이들은 작은 아이들끼리 놀았다. 감히 키 큰애들 근처에도 사실 가기 어려웠다.
우리 사람은 자라면서 2번의 신장기가 있단다. 먼저 비대기가 있고 신장기 또 비대기가 있고 신장기, 이렇게 옆으로 퍼졌다가 자라고 또 퍼졌다가 자란단다.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번호가 33번이니까 간신히 중간은 했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는 그만 자라지 않았으니 제 1신장기만 있었나보다. 우리 어머니가 작으셨으니까 내가 더 클 수가 없었을 것이다.
영부네는 광화문으로 오는 길 왼쪽에서 가게를 하셨다. 영부도 키에 대한 콤플렉스가 많았을 텐데. 주소가 미국이다. 그곳에서 잘 살고 계시겠지!!!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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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학창시절 극장에 몰래 입장해서 보던 핵생입장 불가 영화가 참 재미있었지. 가끔씩 학교에서 단체로 가기도 했는데 단성사에서 서부영화 '쉐인'을 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네. 당시 장비도 열악했을 시절에 도봉산 암벽등반 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네. 쳐다만 봐도 오금이 저리는 암봉들인데 용기가 대단하군.
김 형, 반갑습니다. 이야기를 쓰다보니 반복되는 부분이 있게되는군요. 가능하면 새로운 이야기를 쓰려고 합니다. 연관되어 말이 나오니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그 이상이 없었으니 다 그렇게 바위에 오르고 또 올랐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