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최고의 문과대학 - 북경대학(北京大學)
“베이징따쉐(北京大學)” 는 북경 서북쪽의 중관촌(中關村 - 중국의 ‘실리콘밸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원명원(園明園), 서쪽으로는 이화원(頤和園), 동쪽으로는 청화대학(淸華大學),
남쪽으로는 인민대학(人民大學)과 인접해 있다.
북경대학의 역사를 살펴보면, 1898년에 설립되어 초기에는 “찡스따쉐탕(京師大學堂)” 으로
불리웠고, 중국 최초의 국립 종합대학 이었으며, 당시 최고의 교육 행정기관 이었다고 한다.
신해혁명(辛亥革命)이후, 현재의 북경대학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북경대학은 신문화운동(新文化運動)과 5·4운동의 근원지로 중국공산당(中國共産黨)의 최초
활동기지였다고 한다.
1917년 교육가(敎育家)이자 민주주의 혁명가(民主主義 革命家)인 채원배(蔡元培)선생이
교장으로 선출되었고, 혁명가이자 문학가인 이대교(李大钊), 모택동(毛澤東 - 북경대학
도서관의 사서로 일했다고 한다), 현대 문학가인 노신(魯迅), 근대 사상가인 호적(胡適)등
중국사(中國史)에서 영향력이 있는 인물들이 이곳에서 일을 했거나 교편을 잡았다고 한다.
1937년 노구교(盧泃橋)사변이 일어나 북경대학, 청화대학, 남경대학(南京大學)등이 남쪽
지방인 장사(長沙)로 옮겨 장사(長沙) 임시대학을 세우고, 1938년에 다시 곤명(昆明)으로 내려가
국립서남연합대학(國立西南聯合大學)으로 명칭을 바꾸게 된다.
1945년 일제의 항복과 동시에 해방을 맞이하면서 북경대학은 다시 북경으로 옮기게 되고,
1946년 10월에 다시 학교를 열게 된다.
신 중국 성립이후 5월 4일을 학교의 개교기념일로 정하였고, 1998년에 개교 100주년을
맞이하였다. 2000년 4월에는 북경의과대학(北京醫科大學)을 합병하였다.
현재 북경대학의 총면적은 2백6십 여 만 평방미터이고, 교직원 수는 약 1만 6천 여 명,
학생 수는 약 3만 여 명에 달한다. 도서관은 1902년에 건립되어, 현재 약 600만 여 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최근 중국에서 발표한 중국 대학의 서열 순위에서 북경대학은 청화대학에 이어 2위에 올랐다.
물론 중국은 학교마다 특성화가 되어 있어 서열이 무의미하지만, 북경대학 측의 입장에서 보면
그리 달가운 일은 아니다.
한국도 세계화에 발맞추어 교육제도를 개선하고, 청화대학과 북경대학을 능가하는 세계 속의
대학으로 발전하길 기원해 본다.
북경대학의 정문이라 할 수 있는 남문(南門).
남문을 따라 학교로 들어가는 길이다.
북경대학 100주년을 기념하여 건립한 "100주년 기념관" 이다.
이곳에서는 주로 각종 기념식을 비롯하여, 평소에는 영화, 연극, 음악회 등 예술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대자보를 붙이는 게시판에 각종 게시물이 빽빽하게 붙어 있다.
주로 학원(영어)선전과 아르바이트(家敎 - 가정교사) 게시물이다.
북경대학 내에 있는 연남원(燕南園)이라는 곳의 어느 건물.
건물이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곳은 도서관의 맞은편에 위치한 지학루
(地學樓 - 아마도 지리학과, 혹은 지질학과의 건물이 아닌가 싶다.)
도서관 전경.
이 건물은 1998년에 새로 지어진 신관이다.
총 면적은 5만 평방미터에 달하고 4,000 여 석의 열람좌석이 갖추어져 있는
대규모 도서관이다.
1902년에 건립되어, 1975년에 증축한 구관은 신관 뒤쪽에 위치하고 있다.
북경대학의 교실 내부 모습.
휴일임에도 불구하고 각 교실마다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다.
중국 전역에서 가장 촉망받는 영재들이 모여 있는 학교인 만큼 학구열도 대단한 것 같다.
참고로 중국에서는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학생들도 있지만, 도서관은 책을 빌리거나 빌린
책을 열람실에서 보는 정도이고 자기 공부를 하는 학생들은 이렇게 교실에서 공부를 한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위해 이렇게 교실을 늦게까지 개방하고 있다.
북경대학 명소 중의 하나인 미명호(未名湖).
들리는 말에 의하면 이 호수의 경관이 너무 아름다워 호수에 어울릴만한 명칭이 없어,
말 그대로 “이름 없는 호수” 라고 불렀단다.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가는 시간이 되면 호수에 길게 드리워진 낙조(落照)의
모습에 정말 미명호(未名湖)라는 말이 실감이 날 정도란다.
호숫가 주변으로 난 산책로를 따라 많은 연인과 노인들이 산책을 한다.
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것은 미명호(未名湖)를 내려다보고 있는 박아탑(博雅塔).
중산복의 나이 드신 노인께서 미명호(未名湖) 푯말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북경대학의 연구생원(硏究生院 - 대학원) 건물.
학교의 거리 곳곳에는 이렇게 각종 북경대학 기념품을 수레에 진열하여 팔고 있다.
북경대학의 로고가 새겨진 편지봉투, 그림엽서, 뺏지, 열쇠고리, 책갈피, 기념패 등등
없는 것이 없다.
그야말로 여느 관광지에서 볼 수 있는 기념품들을 교육의 공간인 북경대학에서도
판매하고 있는 것을 보니, 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나 보다.
학교안의 길거리에서는 이렇게 초상화를 그려주는 사람도 있다.
그 유명한 “중국의 붉은 별” 저작자이자, 모택동과 대장정을 함께한 미국의 저널리스트로,
한 때 북경대학에서 교수를 역임했던 ‘에드가 스노우’ 의 묘지이다.
미명호(未名湖)의 바로 옆에 있다.
북경대학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만들어진 ‘북경대학 역사박물관’ .
뒤로 보이는 건물은 어문관(語文館)이고, 앞에 보이는 것은 “화비아오(華表)” 이다.
華表는 중국의 5,000년 역사를 상징하는 일종의 표식이고, 천안문 앞에도 이러한 華表가
세워져 있다.
그 유래를 살펴보면 여러가지 설이 있다. 예를 들면, 건물을 세울 당시를 기념하는 기념물,
방향을 표시하는 기둥, 토템신앙(한국의 장승과 비슷한 개념이다.)을 나타내는 상징물,
옛날 황실에 간언(諫言)을 하기위해 글을 써서 이곳에 걸어두는 일종의 신문고와 같은 조형물,
옛날 악기에서 유래 되었다는 조형물, 천측기구 등등 정말 다양하기도 하다.
뒤에 보이는 건물은 “빤꽁로우(辦公樓 - 사무처 건물)” 이다.
건물 앞 화단에는 젊은 부부가 앉아서 잠자는 아이를 안고 다정하게 바라보고 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혹 이 아이가 자라서 이곳 북경대학(北京大學)에 다니는 상상을 하는 것은 아닌지...
이곳은 북경대학의 동문(東門).
학교가 워낙 넓어 자세히 살펴보려면 하루 온종일 돌아다녀야 한다.
어느덧 태양은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가고 많은 사람들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