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정정리:2002.1.5(토)
09:00백무동-09:40하동바위-10:00참샘-10:20소지봉-10:55망바위-11:20장터목산장-12:10천왕봉-13:10장터목산장(중식)-14:00장터목출발-14:10연하봉-14:40촛대봉-14:45세석산장-15:00출발-15:45한신폭포-16:05지계곡 갈림길-16:50백무동
어젠 서울에서 목포행 완행열차가 아닌 목포행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었다. 오랜만에 목포를 들러 영산강 하굿둑과 해남의 화원반도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땅끝의 해남. 두륜산과 달마산, 대흥사와 미황사는 잘 있는지. 진도가 눈앞에 보이던 성산 앞바다와 벽파진. 그리고 세찬 급류를 일으키며 무섭게 흘러가던 거친 물살의 우수영 울돌목.
아주 오래전 그곳에서 교사 초년시절을 보냈던 기억을 되살리며 추억에 잠기기도 하였다. 학교 뒤편의 소나무밭 언덕 너머에는 우항리 바닷가가 있었고, 그 건너 항구도시 목포가 멀리 있었다. 함께 생활했던 코흘리개 꼬맹이들은 벌써 훌쩍 30대 중반의 나이가 되었다. 녀석들은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제는 어엿한 성인이 되어 모두 결혼을 했고, 자녀를 생산하고 성공해서 잘살고 있겠지. 세월을 유수라 했던가. 그것이 벌써 이십 년 전의 일이었다.
목포에서 모처럼 후배들을 만나 바다 내음이 물씬 풍기는 바람을 맞았으며, 3차에 걸쳐 푸짐한 술대접을 받았고, 연말연시를 맞이하며 연일 계속되는 교육과 술자리에 파김치가 된 채, 내일 토요일 산행을 위해 자정이 되어 다시 광주로 떠난다. 한국의 남성들은 40대부터 건강에 적신호가 온다고 하던데, 나도 몸이 걱정되기도 한다. 그래서 신년 들어 담배도 과감히 끊었다. 내일은 사감 선생을 기사로 채용하여 지리산으로 신년 산행을 떠나기로 약속이 되어있다.
몸이 피곤하여 이른 새벽에 일어나지 못하고, 캄캄하다고는 하나 아침 7시가 되어서야 떠나니 지리산행으로서 시간이 빠른 것은 아니다. 상식적으로 겨울 산행은 일찍 시작하여 일찍 끝내는 것이 기본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나 늦잠을 자서 어쩔 수 없는 일. 사감 선생과 백무동에 9시에 도착하여 산행을 시작한다. 토요일이지만 매섭게 춥고 바람 부는 날씨에 산행에 부담감을 느꼈는지 산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백무동 초입은 을씨년스럽고 상점도 추운 날씨에 문을 꼭 닫고 있어 적막감이 감돈다. 터벅터벅 걸으며 우측 아래를 내려다 바라보니 계곡의 유수가 강추위에 얼어 두꺼운 얼음 바닥이 되었고, 그동안 지리산 자락의 날씨가 매우 추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게에 들러 사감 선생의 아이젠과 스패치를 구매하고 비상식을 챙기고 장터목을 향해 오른다.
매표소는 먼저 있던 곳에서 얼마 전 야영장 앞 길목에 새로이 만들어졌다고 들었는데 오늘에서야 직접 내 눈으로 확인을 한다. 오늘은 새해를 맞아 신년 산행이라 무조건 천왕봉을 오르고 싶었다. 과거 자주 이용했던 코스이지만 산의 모습은 계절에 따라, 날씨에 따라 달리 보이는 법이라 새로운 맛을 느낄 수 있다.
한신계곡 길을 버리고 마지막 매점을 지나 철다리를 건너면서 본격적인 하동 바위 코스의 산행은 시작된다. 초입의 산길은 그다지 많은 눈이 쌓이지 않아, 아이젠을 할 필요는 없다. 하늘을 향해 치솟은 푸르른 좌측의 대나무밭을 지나 본격적인 하동 바위 코스의 상징인 돌밭 길이 시작된다. 지난여름에 관리공단에서 등산로 정비를 깨끗하고 걷기 좋게 정비를 해놓았었는데, 지금은 그 정다운 돌길이 눈에 덮였고, 수많은 산님들의 발걸음에 밟혀 반질반질하여 미끄럽다.
십여 분도 안 되어 구슬땀을 흘린다. 재킷을 벗어 배낭에 매달고 아이젠만 등산화 바닥에 채웠다. 사감 선생에게도 아이젠을 착용하라고 권고하였지만, 사감 선생은 사양한다. 후의 일이지만 놀랍게도 사감 선생은 천왕봉 오름길과 험난하고 미끄러운 한신계곡의 하산길도 아이젠 없이 미끄러지지 않고 쉽게 치고 내려가는 괴력을 발휘하였다.
하동 바위부터 참샘과 소지봉까지는 역시 가파른 된비알. 이곳을 처음 찾는 초보 산님들에게는 힘든 구간 중의 하나이다. 참샘에 들러 휴식을 취하고 귤을 까먹으며 물통과 수통에 물을 넉넉히 채운다. 참샘은 파이프에서 떨어지는 물이 얼음이 되어 그 주위가 풀빵처럼 부풀었고, 그 주변이 결빙되어 넘어지지 않고 물을 받으려면, 몸의 균형을 잡고 조심스럽게 받아야 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소지봉을 오른 후부터 장터목 산장까지는 비교적 손쉬운 산행이 이어진다. 능선 길 왼편 쪽으로는 하봉에서 내려선 초암능선이 보였고 그 끝자락에는 중봉과 천왕봉이 형제처럼 사이좋게 모습을 드러낸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았으나 평상시 지나쳤던 망바위에 모처럼 올라 조망에 열중한다. 아아. 광활한 지리산이여. 우측으로는 반야봉과 만복대가 솟았으며, 솜처럼 포근한 흰 눈을 뒤집어쓴 바래봉과 지리산 막둥이 덕두산의 기나긴 서북 능선이 북쪽으로 길게 이어진다. 그리고 좌측 정면으로는 중봉과 천왕봉, 제석봉, 장터목의 안부와 우측으로는 연하봉, 영신봉에서 반야봉으로 이어지는 주 능선이 눈앞에 가깝다.
한참을 넋이 나가 조망하며 여유를 누리다가 장터목을 향한다. 주능 산정에 가까워지니 갑자기 바람은 거세어진다. 점점 더 다가오는 제석봉을 시야에서 확인하며, 훤히 보이는 장터목 산장에 도착한 시간이 11시 20분. 백무동 주차장에서 2시간 20분 걸렸으니 비교적 빠른 산행이다. 동행한 사감 선생은 영원한 해병 출신으로 잘 빠진 몸매에, 산꾼으로서의 기본 소양과 체력을 가져 차세대 지리 산꾼으로 성장이 생각되는데, 과연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 같다. 시간이 부족한 오후 산행도, 그의 빠른 결단력과 거침없는 행군으로, 많은 적설과 험난한 한신계곡도 2시간도 안 돼 주파하는 뛰어난 체력을 보여 주었다.
장터목 산장은 평상시 같으면 많은 산님으로 붐빌 토요일이었으나, 한겨울이라 전혀 그렇지 않다. 취사장을 들여다보니 간식을 먹으며 식사를 준비하는 산님만 서너 명만 있을 뿐이다. 일단 천왕봉을 향하여 제석봉을 오른다. 강렬한 바람이여. 수목들이 없는 제석봉은 그야말로 바람 피할 곳이 없다. 아주 매섭고 강한 겨울의 북풍이 사정없이 얼굴을 때려, 입이 얼고 귀가 시려 온다. 그 강한 바람은 세차게 몰아쳐 윈드 스토퍼의 고소모도 여지없이 그 기능을 무시하고 있었다.
미끄럽게 얼어붙은 통천문을 지나 천왕봉에 오르니 기다리는 것은 역시 강한 바람. 그 강한 바람에 몸이 흔들린다. 그러나 탁 트인 천왕봉에 다시 올라 마음이 상쾌하다. 사위를 살피며 특히 동부 능선 조망에 집중한다. 천왕봉에는 몇몇 산님들이 강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신년 겨울 산행의 감동을 유감없이 즐긴다. 지리 산신이여. 올해에도 가족들 모두 건강하고 무탈하고 아름답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지혜의 길을 열어 주소서.
장터목 산장에 내려와 중식을 먹고 시간을 살핀다. 오후 2시. 혹시 세석에서 백무동까지 하산 시간이 부족하지는 않을까. 해가 긴 여름이면 걱정할 것이 없는데 지금은 겨울이라 해가 쉽게 떨어진다. 더구나 한신계곡의 길 상황도 알 수 없는데. 그렇다고 올라왔던 하동 바윗길로 하산하면 너무 밋밋하지 않겠는가. 사감 선생의 과감한 결단에 동의하고 세석으로 방향을 잡는다. 장터목에서 다시 이어지는 주능 길은 제법 많은 눈이 쌓였으나, 그동안 바람에 많이 날리고 얼어 있고 러셀이 잘 되어있어 쉬운 산행이다.
곧 연하봉에 올라 선다. 걸어온 길 뒤에는 흰 눈을 수북이 뒤집어쓴 제석봉 위로 천왕봉이 우뚝하다. 천왕봉 아래 벼랑의 통신골은 산사태로 눈 내린 자리가 더욱더 선명하다. 가야 할 정면에는 특이한 모습의 촛대봉. 촛대봉에 곧 도착한다. 장터목 산장을 출발한 지 불과 40분 만이다. 촛대봉에서 내려다본 설경의 세석산장이 이국적이며 아름답다. 한동안 호통치던 강한 바람은 세석에 와서 다소 진정되었고 따뜻한 햇볕이 더해 세석고원이 마냥 포근하다. 주말의 오후건만 붐비던 세석산장은 조용하며 여유롭다. 겨울의 지리산이기도 하지만 성삼재 도로가 결빙되어 종주 산행으로 이어지지 못하기 때문에 산님들이 뜸한 것이다. 결국은 성삼재 관통 도로가 지리산 종주를 하는 관문으로 지리산이 몸살을 앓게 된 것이다.
주능에서 북사면 한신계곡을 내려서자 곧 기온이 급격히 떨어진다. 그리고 많은 눈과 계곡이 꽁꽁 얼었다. 같은 겨울의 지리산이라도 이렇게 햇볕의 영향을 받는 북사면과 남사면은 크게 다른 것이다. 곱게 핀 설화와 백설의 풍광에 넋을 빼앗기며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험난한 한신계곡이지만 산님들의 러셀에 길은 잘 나 있다. 미끄럼을 타기도 하며, 눈밭에 뒹굴며 한겨울 심설 산행의 느낌을 만끽한다. 한신 폭포 직전 세석으로 오르는 대학생 산님 5명을 만나, 그들의 투지를 칭찬하고 격려하며 하산길은 이어진다.
많은 적설과 빙폭을 이룬 한신계곡. 지금 칠선계곡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지난여름 장마철 칠선계곡 하산길에 마폭에서 만난 폭우에 몸을 떨었고, 계곡이 범람하여 정신이 아뜩하여 구사일생으로 칠선계곡을 간신히 빠져나왔다. 그 생각을 하면 지금도 가슴이 떨린다. 그랬던 칠선이지만 그 품 안이 다시 또 그립다. 올겨울에 칠선을 찾을 기회가 있을까.
완전히 결빙된 한신 폭포를 지나 한신계곡은 계속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한여름에 자주 볼 수 있었던 크고 작은 소(沼)와 폭포가 여지없이 두껍게 얼었고, 깨진 얼음장 사이로 보이는 계곡물이 오싹하게 느껴진다. 알탕을 좋아하는 필O님은 겨울에도 산행 후 차가운 저 물에 몸을 담갔다니 그저 놀랍다. 장터목 산장으로 직등하는 한신 지계곡 갈림길에서 휴식을 취한다. 세석산장에서 이곳까지 하산 시간은 불과 1시간. 많은 적설 속 겨울 산행으로는 빠른 하산길이었다. 여름철에는 바로 이 지계곡 갈림길까지 휴가객들로 붐비는데 한신계곡이 몸살을 앓는 곳이다.
인적없는 깊은 한겨울의 지리산은 이래서 좋다. 한겨울이야말로 지리산이 마음껏 쉴 수 있는 진정한 휴식의 시간이 아닐까. 오늘의 산행은 신년 산행에 의미를 두었고, 천왕봉에 올라 소망을 이루고자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한겨울의 정취를 간직한 한신계곡도 만나 보았다. 벌써 땅거미가 내린다. 내일은 일요일. 처남과의 지리산행이 또 예정되어 있다. 아마 오늘 저녁도 광주에서 처남과 술 한잔해야 할 것 같다. 신년 들어 처음 만나니 속이 쓰릴지라도 권주와 덕담을 하며 환한 웃음을 전해야 하지 않겠는가.
첫댓글 8년전쯤, 지리산 대간길,
새해 첫날이였는데 한겨울의 지리산도 무시무시할만큼 미끄러워서 혼이났던 기억이납니다.
아이젠에 익숙하지 않아서 버티고버티다가결국은 늦게 차고 걸었지만 이미 체력저하로 천왕봉 못오르고 수없이 자신을 자책하며 속상해하며 아쉬워하면서 내려왔던 시간들이 생각납니다.
그리운 님!!~ 천왕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