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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칼린 감독 인터뷰입니다.
▲ 이름이 세 개라 들었습니다.
= 공식적인 비자에 찍혀있는 박칼린, '칼린 수'가 있고, 어릴 때 한국 이름을 재미삼아 지어주신 것 같아요.
박영미가 있고, 그 다음에 저희 집안이나 저하고 가까운 사람들, 미국에서 썼던 이름 22. 번호 ..
그 이름이 있어요. 미국 학교에서는 다 K라 불렀어요. 그냥 글자 K.
(K는 그렇다치고 참 특이하다 22라니...그냥 그 번호가 좋았단다)
▲ 태어나기는 LA에서 태어나셨는데 한국식으로 얘기하는 고향은 어디로 생각하고 계세요?
= 아 그게요,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없는데.. 저는 어디가도 편하거든요. 근데 대 때 머리가 성장을 많이 하잖습니까? 그래서 머리 쪽으로 해야되는 것들은 미국이 되게 편하구요, 감성 쪽으로 해야되는거는 열살 이전에
생기지 않습니까. 음식이나 정서... 그것은 또 한국에 있었으니까 양쪽이 편해요.
그런데 어떤 공부, 학설, 시스템과 과학, 머리를 써야 되는 철학 이런 것은 다 서양이 편하구요.
거기가 고향 같고. 지금도 여권이 그래서 그런지. 어쨌든 법적으로는 제가 미국 사람이니까.
그런데 미국 사람이라고 하지만 정서는 아마 한국적일거에요.
▲ 저는 사실 처음 ?을때는 한국말 되게 잘하는 미국 사람인줄 알았거든요, 물론 미국사람이시지만.
국적으로만 따지자면... 외모가 서양인에 가까우신데 그래서 한국 생활하시면서 덕을 많이 보셨어요, 손해를 많이 보셨어요?
= 두가지 다에요. 덕을 보면 되게 덕보고요, 손해보려면 되게 손해보는. 남들보다 언제나 극적이에요.
사실 저희 세대는 지금의 다문화 가정하고는 달라요. 왜냐면 이게 40년 전 이야기잖아요.
그때 잠깐 생각을 해보시면, 1970년대 초반, 박정희 대통령 정권, 연탄때던 시절 부산...
지금와서 저희같은 사람들이 "아..당신같은 사람 참 많죠"하지만, 지금 많이 생긴거죠...
외국인들이 와서 한국말 잘하고 그런 경우는 제가 어릴 때는 아무도 없었어요.
그래서 수없이 설명을 해야되는 그게 제일 힘들었어요. "너 왜 부산말하냐"
부산말 하는것도 어떤 이슈가 됐어요. 모든 게 이슈... 그래서 걸어가기가 힘들었어요.
택시 그래서 안타요. 택시타면 하도 물어봐서 안타고 아무튼 이해시켜야된다는거...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건 당연한데.. 우리로서는 너무 너무 피곤한 거에요.
그리고 법이 그때는 저희들을 수용할수있는 법이 없었어요. 이제 이주민들도 많이 생겼고
법도 문화에 따라서 바뀌어가는데 법이 문화를 배경으로 따라가야되는데
60년대 법을 80년대에 아직 적용하고 있었으니까 너무너무 힘들었어요 일하는것도...
▲ 서울대 국악과를 가신 이유는 뭐죠?
= 어릴때 한국무용을 했잖아요. 조기 교육이 그래서 중요한가봐요. 배어있어요 .저희언니도
꽤 오랫동안 한국무용을 했거든요. 큰언니가 지금해도 동작이 바로 나와요. 그걸 못 잊어버리는거죠.
저도 꽤나 하다가 그 둘 중에 음악을 택해버린거죠. 피아노하고 한국무용을 했는데 음악을 택하게 된거죠.
"그게 지금 중학교때 얘깁니까?" 아뇨 초등학교 이전부터. 저희는 한 대여섯살때부터 했었으니까..
저는 대학 때는 서양 음악만 관심있던게 아니라 다른나라에 민속음악을 깊게 팠어요.
그런데 한국피가 흐르니까 한국 음악을 안했겠어요? 그러니까 다 했죠. 그래서 고등학교때도 계속
민속 학원다니고 북치고 장구치고 다 했죠.
"그래도 재밌으셨나봐요, 한국음악과 무용 이런 것들이?"
한국이란게 중요했던게 아니고 다른 나라의 무엇이든 관심있었어요. 그래서 저는대학 내내 했어요.
아프리카 음악, 인도네시아 음악...선생님들이 명인들이셔서 저희 학교에서 되게 깊게 했어요.
▲ 명창 박동진 선생을 사사하신건 맞나요?
= 네. 3년 넘게는 매일 꾸준히 갔죠..매일. 선생님께서는 언제나 그 말씀을 하시거든요.
"다섯 바탕 다 하기전에는 절대 소리한다라고 말하지마라" 그래서 어디가서 소리한다고 말하기
참 부끄러운 사람인데 배운 거는 맞는말이고요. 그리고 더 깊게 들어갈라고 했었는데
제가 한국국적이 아니다보니까 전수자로서 이름을 못 올리셨어요.그렇게 이름을 올려주고 싶으셨나봐요.
어느 날에는 선생님께서 "칼린, 참 내가 이렇게 대한민국에서 인간문화재인데 뭔 힘이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원하는 전수생을 전수자라고 붙이지도 못하고..." 그래서 미안하다고 그러시더라구요.
이건 처음 얘기하는건데... 그래서 난 그 얘기만 듣고도 너무 뿌듯했어요.
제가 그 정도로 깊게 진짜, 내가 나이 50되면 한복입고 소리할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지금은 소리한다고 하기에는 부끄러운데 적벽가를 그렇게 좋아해요.
▲ 제자들한테 무섭고 엄격하다...심지어 찾아온 사람들한테 "너는 재능이 없다"는 말까지 한다고 들었습니다.
= 재능없다라고 한 적은 한번도 없어요. 저는 제 꿈에 있어서 아무도 제재한 적이 없거든요.
제가 아마 제재를 받았으면 자살을 했을지 몰라요. 너무 절망적일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누구보고 "넌 하지마라" 한 적은 한번도 없어요.
"그럼 뭐라고 하시나요?"
하려면 똑바로 해라. 그렇게 무지하게 패대기는 했지만... 저는요, 사람 살아가는것 중에
제일 중요한 것 중 하나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된다고 생각해요. 그만한 힘은 없습니다.
하기 싫은 일은 두드려패도, 그사람이 안 즐기면 절대 퀄리티 있는 일 안나와요. 재능 없어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면 그 사람은 에너지를 쏟아붓거든요. 그러면 그 사람은 그날 밤 자기가 못해도
10등 100등 1000등이어도 1등이 안되더라도,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으니까 행복하게 잘할 수 있어요.
행복을 안겨주는게 지구의 평화를 안겨준다고, 해결해준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사람이 재능이 없어도 하고 싶어하는 일이라면 전 안말려요. 그대신 어마어마하게 열심히 해라.
달려가라.. 그렇게 패대기는 하죠.
▲ 조승우씨와 비에게 보컬을 가르친 것 맞나요?
= 비 같은경우는 비 되기 전에 왔었으니까...박진영씨가 열 명을 보낸다고 했어요.
그 친군 절 기억도 못할 거에요. 무슨 이상한 여자가...^^ 되게 노력파였어요.
되게 성실했다는 거, 되게 착하고. 노래는 처음 그렇게 뛰어나지는 않았었는데 보아하니
몸 쓰는 친구인 것 같더라구요.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나 웃깁니까? 그 때 당시 누군지도 모르고
"너 춤좀 추니?" 물었어요. 왜냐하면 노래는 안되니까.. 진영씨를 아니까 분명 재능있는 애를 뽑았을텐데..
보아하니 그때는 노래는 아니었으니까... '아..춤때문에 뽑았나보다...'
이 말을 되게 냉정하게 뱉었을거에요. 지금 생각해보면 웃기지만 얼마나 춤 잘춥니까?
근데 아무튼 그래서 몇 번 가르쳐주고 그 다음에 음반이 나왔던것같아요. 그래서 이미 자기 세상에 갔고...
승우는 우리 캐스팅할 때 우연찮은 기회로 사람을 잘못 캐스팅해서 걔가 온거에요.
그런데 재능이 너무 있어서 되게 유심히 지켜본 친구죠. 사적으로도 친했고, 개를 워낙 좋아해서 삽살개...
▲ 가수한다고 온 친구한테 "넌 춤때문에 왔니?" 이런걸 보면 엄격한 것 맞네요...
= 아니 왜냐면, 우리가 거짓말하면 들통나거든요. 진실은 제일 큰 종교중에 하나에요.
제 생각에는 이 진실의 힘이 대단하더라구요. 그 친구가 정말 다른게 다 좋았기 때문에
자기 노력으로 어마어마한 인물이 됐고... 승우도 되게 똑똑해요 .주문을 하는 것에 대한
이해력이 되게 빠르고 그 다음에 다 받아들이지 않고 딱 걸러서 생각해서 듣고 표현을 하는 친구고
결국 머리좋은 친구들이 살아남는 것 같아요. 그리고 노력하고 인격...
(2008년12월4일)
[출처] '자유인' 박칼린 (킥 뮤지컬 스튜디오) |작성자 kyyker "괜찮아요. 열심히 행복하게 살았는데. 신장 이식을 하지 않으면 투석도 해야된대요. 그런데 안 할 거예요. 아휴, 차라리 그냥. 잘 살았으니까. 뭐." 웃지도, 찡그리지도 못하는 기자에게 그녀는 말을 이었다. "잠도 못자고 피로에 억눌려 산 지 25년이 넘었으니 그 때문이 아닐까요? 제가 할 일을 못했으면 억울할텐데 하고 싶은 일에 열정을 다 쏟은 대가로 이 병을 치르는 거잖아요."
그녀가 자신의 병을 안 지는 6년 전. 늘 두통을 달고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눈이 안 보였다. "초점을 맞추는 부분은 안 보이고 주변만 보이고. 검사를 해보니 신장 이상으로 혈압이 200까지 올라서 그렇게 됐대요. 가족들은 신장을 내주겠다고 하는데 뭘 그런 걸 꼭 해야되나 싶고."
잔인할지도 모를 질문을 그녀에게 던졌다. "만약 5분 뒤에 죽는다고 해도 후회가 없겠어요?" "후회 없어요. 진짜 저는 후회 없이 살았어요. 남들이 나만큼만 행복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전쟁이 없을 것 같아." 득도? "그렇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하하."
이 짧은 5분간의 대화만큼 박칼린에 대해 잘 설명해줄 수 있는 것이 없을 듯싶다. 그녀는 "삶의 목표로 세웠던 건 다했다"고 했다. 아홉살 때 만들었다는 5가지 꿈. '삽살개 키우기', '샹그릴라 찾아가기', '우주여행', '비행기 조종'. 그녀는 청계산 기슭에서 삽살개와 둘이 산다. 미국에서 아홉살때부터 시작한 첼로 공부를 중단하고 우주비행사가 되겠다며 우주공학을 전공하는 학교로 옮기기도 했다. 백인들로 가득 찬 답답한 캠퍼스가 싫어 여성 비행학교에서 1년간 조종 연수를 받으며 단독비행까지 통과했다. '명성황후' 음악감독 제의로 한국에 들어오면서 규정 비행시간을 채우지 못해 조종 자격증을 따지 못한 게 아쉽다고.
그녀는 자신만의 '샹그릴라'를 찾았다는 사실에 행복해했다. "무엇을 하느냐는 상관이 없어요. 요리를 하든, 무용을 하든, 사업을 하든간에 노는 것도 '실컷' 놀고, 일할 때도 '실컷' 하고. 다 쏟아붓고나면 마음 속에 남는 게 없잖아요. 밤마다 바보처럼 행복해하며 자는 거죠. 내 모든 걸 다 쏟아부었다는 흐뭇함과 만족. 남들이 부럽지 않고, 비교도 하지않고. 모든 잣대가 내 자신이구나. 내 중심이 거기에 있구나 하는 게 있더라고요. 그게 제 샹그릴라예요. 그래서 전 삶이 되게 즐거워요." 살아있다면 10년 후 그녀는 어떤 모습일까. "글을 쓰고 있을 것 같아요. 워낙 글쓰는 걸 좋아해요. 적막하고 바람소리만 나는 고요한 숲속 어딘가에서 개, 고양이 기르면서 살고 있겠죠. 글이나 작품처럼 오래 시간이 걸리는 것들을 하고 싶어요."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 박칼린은?=1967년생. 뮤지컬 음악감독, 킥 뮤지컬 대표, 동아방송대 공연예술계열 뮤지컬전공 전임교수. 한국인 아버지와 리투아니아계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성장 궤적은 종횡무진 그 자체다. 아홉살부터 첼로를 시작했지만 무용과 연기도 했고, 한국으로 건너와 경남여고 2학년 때인 1984년 청소년연극제에서 연기상을 받았다. 전공하던 첼로를 그만두고 우주공학과 경비행기 조종을 익혔고, 통역 아르바이트를 하다 명창 박동진 선생으로부터 소리를 배우기도 했다. 캘리포니아 예술대에서 첼로 전공으로 학사과정을 마친 뒤 다시 한국으로 와 서울대 대학원에서 국악작곡 석사과정을 밟았다. 부산시립극단에서 배우로 활동하다가 대학로로 자리를 옮긴 뒤, 1987년 연극 '불의 가면'으로 음악감독의 첫발을 디뎠다. 1995년 창작뮤지컬 '명성황후'를 통해 뮤지컬 음악감독 1호가 됐다. 이후 50여편의 뮤지컬 음악 작업을 했으며 연기, 연극 연출, 영화 음악 편곡, 프로듀서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내 안의 샹그릴라를 찾다 - 뮤지컬 음악감독 박칼린
- 방송일시 : 2009년 4월 28일 (화) 밤 11시 30분(KBS 1TV)
- 출연자 : 박칼린 (뮤지컬 음악감독)
CIA 요원, 우주비행사를 꿈꾸던 소녀는 자라서 뮤지컬 음악감독이 되었다.
<명성황후><댄싱 섀도우><아이다>등 동서양의 문화를 아우르며 한국 뮤지컬의 지평을 넓혀 온 그녀! 박칼린 감독이 삶에 주어지는 도전을 마치 퍼즐 풀 듯 즐겨온 이야기를 전한다.
“3일 혹은 100번을 고개 숙이고 진지하게 무언가를 한다는 것.
숫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연습에 임하는 마음과 반복, 그리고 습득이 가장 중요할 뿐이다…”
갈색머리에 파르스름한 눈동자의 박칼린 감독이 처음 낭독하는 글은, 진심으로 자신에게 당당할 수 있을 만큼 노력해야 한다는 자신의 에세이 「3일 또는 100번」. 스포츠만큼이나 육체적으로 힘든 훈련을 반복해야 좋은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스스로 체험한 후 배우들에게 가장 많이 강조하는 이야기가 됐다. 15년 전 창작뮤지컬 「명성황후」로 음악감독의 길을 시작한 그녀, 공연 장면 중 가장 애절한 노래라며 즉석에서 무대의 한 장면을 선보인다.
어려운 벽에 부딪치고, 큰 문제를 해결할수록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 같다는 박칼린 감독. 두 번째로 펼친 『시간의 지배자들』은 그런 그녀가 몇 년에 한번 씩 꼭 꺼내본다는 책으로 어릴 적 품었던 우주의 꿈이 담겨있다. “발전보다는 변화가 중요하다”며 그녀가 털어놓는 다양한 경험들이 객석에게 또 다른 넓은 우주를 선물한다.
“다음 밀가루를 체에 걸러 곱게 하든지 말든지……
그리고 생각나면 소금도 체에 거르든지…
뭐 상관있겠나? 위스키 맛이나 한 번 더 확인한다.”
이어 꺼내드는 글은 손때 묻고 얼룩진 두꺼운 책 한 권. 요리를 좋아하셨던 외할머니에게 물려받은 요리의 즐거움이 담긴 책에서 그녀는 아주 특별한 음식「크리스마스 과일케이크」를 만드는 독특한 요리비법을 낭독한다. 위트와 재치, 때론 엉뚱하면서도 즐거운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박칼린 감독의 매력이 담겨있는 맛있는 낭독에 객석에서는 연신 웃음이 터진다. 이어지는 낭독 무대는 박칼린 감독이 초대한 뮤지컬 신예 배우 최재림. 지난 해 뮤지컬 ‘렌트’로 데뷔한 그는 누구보다 무섭지만 완벽한 작품을 위해 열정을 다하는 스승 박칼린 감독의 모습을 솔직 담백하게 이야기 한다. 영화 ‘물랑루즈’중에서 서로를 애절하게 사랑하는 연인의 노래「Come what may」를 열정적으로 부르는 두 사람의 울림에 마치 뮤지컬의 한 장면을 보는듯한 감동과 설렘이 낭독 무대를 감싼다.
'자유인' 박칼린
"내 딸이 저렇게 자라도 괜찮겠다"
박칼린씨는 그런 생각이 들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단 한가지, 불혹이 넘도록 혼자 사는 것만 빼고요.(물론 본인만 편하다면야 상관없겠지만)
국내 뮤지컬 음악감독 1호로 불리는 박칼린씨는 독립적이고 열정적인 자아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생각이 분명한 그는 어떤 질문에도 재거나 하는 것 없이 편안하지만 확신에 찬 답변을 내놓았습니다.
공연장에서 그를 보면서 '누구지?'하는 호기심이 늘 들었습니다.
서양 사람같은데, 성씨는 박이고, 웬만한 뮤지컬 제작진에는 다 이름이 올라있고….
결정적으로 박칼린 감독을 인터뷰하려고 생각한 건 그가 처음으로 뮤지컬 연출에 나섰다는 나름의 계기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 인터뷰 기사에서 박칼린 씨가 "당장 뮤지컬을 그만둬도 괜찮다"고 한 말에서 몹시 시원함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또 박칼린씨가 사는 서울 근교의 집 마당에 감나무가 있다는 것도 구미를 당겼습니다.-써놓고 보니 진짜 '구미'를 당겼네요^^)
애착이 있으니까 지금까지 뮤지컬과 각종 공연을 해왔을텐데, 무슨 뜻으로 한 이야기냐고 물어봤습니다.
"제가 어떤 작품은 글로 표현하고 싶고 어떤 작품은 옷으로, 어떤 작품은 색으로, 전 유화를 한번도 안 배워도 하거든요. 그냥 사서 그리고 싶은거 다 그리고 해요. 옷도 디자인해서 그냥 '이것 좀 만들어주세요. 이런 선이 좋습니다' 해서 시카고 공연 때 입었던 옷도 제가 이렇게 만들어달라고 해서 입은 거고."
"어떤 때는 내가 요리사가 되고 싶고, 어떤 때는 내가 먹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고…분야마다 달라요. 그래서 저는 계속 옮겨다니지 꼭 음악으로만 표현하면 불행할 것 같아요. 한가지만 하고 살아야한다는 이론을 세워버린 사람은 그 이론에 맞게 살면 좋은데요, 저한테는 너무 틀이 작은것같아요. 그렇게 사는 건…인간이 그 것보다 감정이 더 많지 않습니까?"
박칼린씨는 '해태'라고 이름 붙인 삽살개 한 마리와 ( 해태가 뭔지 몰랐으면 이름 못붙였을, 진짜 해태처럼 생긴) 살고 있었습니다.
마루 벽에 붙어있는 각종 탈들, 오래된 재봉틀에 판자를 덧붙여 만든 식탁, 수수하고 소탈한 느낌을 주는 인테리어. 박칼린씨는 취재팀에게 손수 말차와 카푸치노를 정성스레 타 내놓았습니다.
스스로 요리를 잘한다고 할 정도니 진짜 요리를 잘 하는 모양입니다.
책 읽는 모습을 촬영했으면 한다고 하자
흔히 '오지'라고 말하여지는 곳, 아무도 찾지 않는, 사람들의 발길이 거의 닫지 않는 곳을큼직큼직한 사진과 글로 소개한 책이었습니다.
사람들과 부대끼며 뮤지컬 음악감독, 보컬 코치, 연출가, 작가 등등 여러 역할을 하며 살지만 언젠가는 강릉에서 빵집을 하고 싶다는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진정 자유로운 사람같은 박칼린 감독에게 썩 어울리는 책이었습니다.
남자의 자격 보다가
카리스마도 그렇고 찾아보니까 ㅇㅇ..
참 멋지신 분인듯
저렇게 하고싶은일 하면서 후회없이 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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