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 24:1
바벧론 왕 느부갓네살이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냐와 유다 방백들과 목공들과 철공들을 예루살렘에서 바벧론으로 옮긴 후에. - 유다 왕 "여고냐"를 위시하여,"방백들과 목공들과 철공들"이 바벧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될 일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하여 벌써 예언하신 바이다(22:24-30). 예레미야 시대의 사람들은 이렇게 예언의 말씀을 친히 들었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시대에 그대로 이루어지는 사실까지 목도하게 되었다. 그만큼, 하나님 말씀의 진실성을 당대(當代)에 체험할 수 있었다. 그러니만큼 그들은, 이제 사로잡혀간 뒤에라도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합당한 자들이 되었어야 할 것이었다(4-6). 그러나 이런 사실을 친히 목도하면서도 끝까지 회개치 않는 자들도 그 시대에 있었다. 그들은 본장 8-10절에 묘사되었다. 꼭 같은 하나님의 말씀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 중에는, 그 말씀으로 인하여 회개하는 자들도 있는 반면에 도리어 강퍅해지는 자들도 있는 것은, 전도자들이 늘 경험하는 사실이다(고후 2:15,16참조).
"철공들"이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마섹겔인데 수놓는(刺繡) 사람, 조각(彫刻)하는 사람, 보석 만드는 사람을 의미한다는 학자가 있으나, 뿌레이니(Blayney)는 갑옷(甲衣) 만드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한다. 유대인들은 이런 무기(武器) 제조자들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런 기술자들을 모두 그들 가운데서 제거(除去)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이 그를 믿는 대신에 다른 것들을 의지할때 그 모든 것들을 빼앗아 가신다(사 3:1,2). 왕하 24:16을 보면, 그 때에 이런 기술자 1천명이 바벧론으로 포로되어 갔다고 한다.
예루살렘에서 바벧론으로 옮긴 후에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전 앞에 놓인 무화과 두 광주리로 내게 보이셨는데. - 유대인들이 바벧론으로 포로되어 가자, 하나님께서 이런 계시(啓示)를 보여주신 것은, 또 다시 그의 자비(慈悲)를 우리에게 보여 주심이다. 그가 범죄한 백성(그의 택한 백성)을 부득이 벌하시지만, 뒤이어 그들을 향한 그의 자비심은 불일듯이 일어나신다. 택한 백성이 수난(受難)할 때에 하나님의 마음은 그들과 함께 하신다. "무화과"(테에님)는 가나안 땅의 특산물(特産物)로써(신8:8), 6월에 첫 열매가 익고(사 28:4), 늦은 열매들은 8월부터 익기 시작한다. 이 과수(果樹)는 매우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되어 온다(렘 5:17; 욜 1:12). 무화과 나무 아래 앉는 생활은 평화와 행복의 상징(象徵)이다(왕상 4:25; 미 4:4). 그런데, 여기서는 무화과로 유대 민족을 상징한다(마 21:18-22, 24:32-35; 눅 13:6-9 참조).
렘 24:2
한 광주리에는 처음 익은 듯한 극히 좋은 무화과가 있고 한 광주리에는 악하여 먹을 수 없는 극히 악한 무화과가 있더라. - "처음 익은 듯한 극히 좋은 무화과". 여기"처음 익은"(바쿠로-드) 무화과는 6월에 나타나는 것으로 희귀한 것이니 만큼, 사람들은 얼른 따 먹기를 원한다(사 3:14; 호 9:10; 나 3:12).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 바벧론에 잡혀가 회개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희귀하게 생각하시며 좋게 여기실 것이라고 한다. 그들이 바벧론으로 잡혀 갈 그 당시에, 유다 본토(本土)에 남아 있는 자들은 그들(잡혀 가는 자들)을 보다 불행한 자로 여겼다. 그러나 그들이, 그 당한 환난 때문에 저희 죄를 회개한다면, 도리어 그들(바벧론에 잡혀간 자들)은 축복을 받을 것이다. 잡혀 가는 것 같은 외부적인 환난이나 불행이 문제가 아니라, 회개 여부(與否)가 문제이다. 바벧론으로 잡혀간 자들의 회개 여부는, 시편 137편이 보여 준다. 사람이, "처음 익은...무화과"를 불일듯이 따 먹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회개자들을 화급(火急)히 돌아보신다.
"악하여 먹을 수 없는 극히 악한 무화과". 이것은, 바벧론에 사로잡혀가지 않고 유대 땅에 당분간 머물러 있게 된 시드기야 왕과 및 백성들을 비유한다. 이들은, 아직 그 땅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앞서 사로잡혀 간 자들을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자만(自慢)하였다. 사람은 평안하면 교만해지는 것이 상칙(常則)이다. 교만은 실물(實物)에 따르는 그림자와 같이 사람을 따른다. 교만은 멸망의 앞잡이다(잠 16:18).
렘 24:3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 하나님의 계시(啓示)가 이상(異象)으로 임하는 것은, 그 계시를 확고히 인(印)침과 같이 하려는데 있다(Calvin). 그리고 그것이 문답식(問答式)으로 나타나는 목적은, 그 계시를 받는 자로 하여금 더욱 자세히 깨닫게 하려는데도 있다.
렘 24:4,5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이곳에서 옮겨 갈대아인의 땅에 이르게 한 유다 포로를 이 좋은 무화과 같이 보아 좋게 할 것이라. - 선지자 예레미야가 전한 예언이, 순전히 하나님의 말씀뿐이고 인간의 사상을 섞지 않았음을 보장(保障)하는 의미에서, "여호와의 말씀이...임하"였다하고(4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말하노라" 라고 하였다(5절). 이런 중언체(重言體)는 언제나 역설체(力說體)이다.
5절에 이른바, "보아 좋게 할 것이라" 함은, 히브리 원어로 아키르...레토바이니, 누구를 좋게 여긴다는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로잡혀 간 자들의 회개함을 보시고 좋게 여기심을 가리킨다. 이것은 다음 절 말씀, 곧, "내가 그들을 돌아보다"("나의 눈을 그들에게 붙임")란 말씀과 같은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귀히 여겨 열심히 보호하실 것을 가리킨다. 징계(懲戒)를 달게 받는 자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법이다. 렘 31:20참조.
렘 24:6
내가 그들을 돌아보다 좋게 하여 다시 이 땅으로 인도하고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심고 뽑지 아니하겠고. - 이 말씀은, 물론 포로 되었던 유대인들이 본국으로 돌아올 것을 가리켰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귀환(歸還) 사건의 주지(主旨)는, 실상 장차 신약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될 영적(靈的) 운동을 가리키는데 있다. 그러므로 바이제르(Weiser)는, 바로 말하기를, "예레미야는 여기서 순연히 종교적으로 말한 것 뿐이다. 이 구원 약속의 성취는 사람들이 전심으로 여호와에게 돌아옴이다. 이런 종교적, 도덕적 운동은 인간적 노력의 결과가 아니고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다"-(意譯)(Jeremia denkt hier ausschliesslich in religi sen Kategorien. Die "Bedingung f r die Erf llung der Heilszusage ist die "Bekehrung zu Jahwe von ganzen Herzen", wie sie der alten Bundesordnung entspricht. Aber auch das religi se und sittliche Bekenntnis des neuen Gottesvolkes zu Jahwe ist nicht das Ergebnis und Verdienst menschlicher Anstrengung, sondern im lesten Grund Geschenk der g ttlichen Gnade, die das Volk zur Busse leitet, indem sie ihm ein "Herz" schenkt, das das wahre Wesen Jahwe erkennt.-Artur Weiser, Das Buch des Propheten Jeremia, p. 215)라고 하였다.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심고 뽑지 아니"한다 함은, 하나님께서 일단 그 백성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신 다음에는, 영원히 멸하지 아니하시는 궁극적 구원(窮極的救援)을 비유한다고 볼 수 있다. 그 구원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고 영적의 것이다. 다음 귀절이 이 사실을 보여주는데, 이것이야말로 신약 시대에 더욱 현저히 실현된 것이다.
렘 24:7
내가 여호와인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로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 여기서는, 신약 시대에 이루어질 구원의 세 가지 방면을 보여준다. 곧, (1) "마음"으로 하나님을 "아는"사실. 여기 "마음"이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레브니, 심장(Heart)으로 상징(象徵)되는 생명과 애정(愛情)으로써 인격(人格)의 중심 부분이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아는 신앙(단지 理智的으로 하나님을 아는데 그치지 않음)이야말로 구원(救援) 받는 신앙(信仰)이다(롬 10:10). (2) 위에 관설된 것과 같은 마음은, 사람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셔서" 된 것.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단독 사역주의(God's Monergism)의 구원이다. (3) 하나님 자신을 구원으로 삼는 구원관(救援觀). 곧,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란 말씀이 그 뜻이다. 이것은 기독교 구원관에 있어서 언제나 주장하는 같은 말씀이다. 그리스도 재림(再臨) 이후에 이루어질 구원관도 이와 같은 것이다(계 21:30). 그러므로 현세(現世)에서 내세의 구원을 맛보려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제일로 여기는 생활을 가져야 된다.
렘 24:8
위(2, 3절)에 벌써 관설된 "악한 무화과"는 무엇을 가리킴인지 여기서 설명된다.
"악한 무화과"로 비유된 자들은, 예루살렘에 아직 남아 있는 자들이며, 또는 바벧론을 두려워하여 애굽 땅으로 도망간 자들이다. 그들은, 저희보다 앞서 바벧론에 잡혀 간자들을 보고 마땅히 겸손해지며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만 바라보고 그에게로 돌아왔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도리어 교만해져서 자기들에게 무슨 공로(功勞)나의(義)가 있어서 사로잡혀 가지 않은 줄로 잘못 생각하였다. 이 점에 대하여 눅13:1-5을 읽어 보아라. 사람들은 평안을 누릴 때에 이렇게 위대한 심리를 가지게 되나니, 그들이 도리어 환난(患難)을 당하는 것이 유익한 점도 있다.
바벧론 군대를 피하여 애굽 땅으로 간 자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애굽을 의지하던 자들의 취한 행동이다. 그들은 이 행동에 의하여 더욱 불신앙으로 굳어졌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들을 가리켜서도 "악한 무화과 같이 버리"시겠다고 하신 것이다.
렘 24:9,10
위의 8절에 관설된 바, "악한 무화과 같"은 자들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에게서 버리심을 당한다. 그것은 곧, (1) "모든 나라 중에 흩어"짐. (2) "환난을 당"함. (3) "치욕(恥辱)을 당"하며, "말거리가 되"며, "조롱과 저주를 받게"됨. (4) "칼과 기근과 염병"을 당함 등이다. 위의 몇 가지 재앙들은, 그들이 언제나 구원을 받지 못한 사실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