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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으러 나온 몇몇 장로들(에스겔 20:1-4)
1. 여기에는 본장에 나오는 메시지의 계기가 나타나 있다. 우리가 18장에서 볼 수 있는 저 설교는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잘못된 비난에서 기안하였었다. 그러나 이번 것은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위선적인 질의에 기인하였다. 각각은 그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예언은 정확한 날짜로, 에스겔이 예언하기 시작한 이태가량 후, 즉 포로기의 "제 7년" 에 선포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포로 생활이 얼마나 계속될지를 알려 주려 하셨었다. 그것은 비록 매우 느리지만 세월이 흘러 그들의 구원이 눈 앞에 와 있음을 저들로 깨닫게 하려 해서였다. "이스라엘 장로 두어 사람이 여호와께 물으러 왔는데" (3장 1절에서처럼), 정기적인 방문이 아니라 우발적으로 특별한 일로 온 듯하다. 그들이 당시 포로로 있던 자들이었는지, 혹은 업무차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온 장로들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이 예언자가 그들에게 하는 말로 미루어 보아(32절),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의 질문은, 자기들이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있는 동안 성전 뿐만 아니라 회당조차도 없으니 하나님께 예배 드릴 장소가 없는 이역만리에서, 저들의 군주와 지배자의 환심을 살 수 있도록 "이 나라의 가족들처럼 목석을 숭배하는" 것이 합법적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일은 나아만이 엘리사더러 림몬당에서 허리를 굽히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했듯이, 왕께 대한 치하일 뿐이라고 변명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질문이 그런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 계속 죄짓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요, 더욱이 그들이 우상 숭배로 인해서 환난을 당하고 있는 그런 때에 그러는 것은 저들의 마음이 악으로 완악해졌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들은 와서 태연하게, 경건한 모습을 가장하고, "예언자 앞에 앉았다" (33:31).
2. 이 메시지의 요지가 나와 있다.
(1)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노하신다" 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그들이 아직도 죄악을 계속하기로 고집하고 있으면서도 자기에게 물으러 온 것을 모욕으로 간주하신다.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내게 묻기를 내가 용납하지 아니하리라" (3절). 그들의 경건한 허세는 하나님께 받으실 만한 것도 못되고 그들 자신에게도 이익이 못되리라. 하나님께서 그들의 질의에 관심하지 않으시며 그들에게 어떤 만족스런 대답도 해 주지 않으리라. 하나님과 그의 규례에 대한 한 위선적 참여는 그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 되기는 커녕 화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을 명심하자.
(2)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노하심이 정당함을 깨달아야 한다(4절). "인자야, 네가 그들을 국문(재판)하려느냐? 너는 한 예언자이나, 너는 하나님과 그들 사이의 중재자로서 그들을 위해 호소하지 말지니라. 오히려 너는 하나님을 위한 한 심판관으로서 분명히 그들에게 선고를 내릴지니라. 보라, 내가 너를 열방 위에 세웠노라. 너는 그들에게 여호와의 심판을 선포하지 않으려는가? 그러므로 그들로 하여금 그 열조의 가증한 일을 알게 하라." 이제 이전처럼(16:2) 영이 내렸으니, 에스겔은 그들에게 "그들 자신의 가증함을 알도록" 해야 한다. 비록 그들 자신의 가증한 일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엄히 다스리시는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지만 "그 열조의 가증한 일" 도 아는 것이 좋다. 그것은 처음부터 그처럼 패역했던 백성을 이제 와서야 멸절시키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공의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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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에서의 은혜(에스겔 20:5-9)
이스라엘 백성의 배은과 반역의 역사는 처음부터 시작된 것이다. 인간이 그의 조물주를 배신한 역사도 그러하다. 우리의 첫 조상의 창조 이야기를 읽자마자, 곧 우리는 그들의 반역의 이야기에 직면하게 된다.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처사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개입, 그 양자에 있어서 인류 전체를 대표하도록 지정되었던 백성이 이스라엘도 그러함을 여기서 본다.
Ⅰ. 바로 왕의 씨종이 되었던 곳, 애굽에서의 이스라엘에 관한 하나님의 율법에서 은혜로우신 목적을 엿보자. 그것은 값없이 주시는 은총의 불멸의 영예를 위해 발설되었고, 기록되었다. 그 때 거기서,
1. 비록 그들의 처지가 딱했고, 그들의 성격이 방종스러웠으나 그 양자를 다 고치는 영광을 취하려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기의 선민으로 선택하셨다. 그들이 "야곱" 곧 "하나님과 더불어 왕인 자(" 하나님과 겨루어 이김" 을 KJV는 이렇게 해석했음-역주)의 집의 자손" 이므로, "그들의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고(신 7:7, 8)" 하나님은 그들을 택하신 것이다.
2. 하나님은 그의 이름 "여호와" (새로운 이름이었다. 출 6:3)에 의해서 "그들에게 자기를 알리셨다." 당시는 저들이 노예 상태에 있었으므로 그들의 열조에게 알려졌던 이름, 곧 "전능하신 하나님" 게 대한 지식을 몰랐을 때였다. 우리의 축복의 근원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심에 있듯이, 그 축복에 이르는 첫 단계도 역시 하나님게서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심에 있다는 점을 명심하자. 그리고 우리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다 해도, 우리가 어떤 비통 속에 빠져있다해도, 애굽 땅에서도 이스라엘에게 스스로를 계시하신 그분은 우리를 찾아내사, 그의 은혜의 크신 발현으로 우리를 쫓으신다는 점을 명심하자.
3. 하나님은 그들에게 자기는 그들과 계약을 맺은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계시하셨다. "내가 그들에게 내 손을 들어," 그것을 말하고 맹세로 확언했으니, "나는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라. 너희는 나에게 경의를 표해야 하며, 나로부터 그리고 내 안에서 너는 축복을 기대해야 한다" 고 이르셨다.
4.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기로 약속하셨다. 그리고 그는 약속한 바를 실행했다. 그는 "그의 손을 들어," 즉 그들에게 맹세하기를, 그들을 구원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전혀 자격이 없었고, 그 구원은 매우 불확실하게 보였으므로, "맹세에 의해 확언되어야" 했다. 혹은, 그가 "그의 손을 든" 것은 구원을 이루려고 그의 전능하신 힘을 발휘하셨다는 뜻이다. 그는 "펴신 팔로" 그리하셨다(시 136:12).
5.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소유하게 하겠다고 확인하셨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을 애굽으로부터 인도하여, "그들을 위하여 찾아 두었던 땅에 이르게 하였다." 이곳은 제2의 에던 동산이요, "모든 땅 중에 아름다운 곳" 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것을 찾아냈으니, 그 기후는 온순하고, 토양은 비옥하고, 상태는 쾌적하며 모든 것이 합당한 곳이었다(신 8:7; 11:12). 또는 주위 사정이야 어떻든간에, 하나님은 그 땅에다 자기 성소를 세우심으로써 그렇게 만들었다.
Ⅱ. 하나님이 그들에게 준 합당한 명령과, 당시에 그와 그들과의 계약에 따른 평이한 조건들을 보자.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했으므로, 다음으로는 그가 그들에게 기대하는 것 전부가 무엇인지를 이야기한다. 그것은 이러한 것외에 아무 것도 아니니(7절), "너희는 각기 예배용으로 쓰는 하나님의 형상들을 버리라. 그것은 장식품이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가증한 것에 틀림없느니라(우리 번역과 다소 다름-역주). 하나님은 그것들을 혐오하니, 그의 눈 앞에서 없애버리고, 애굽의 우상들로 스스로를 더럽히지 말라." 그들 중 다수가 이런 것들을 좋아했던 것 같다. 저들이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구원받았을 때, 황금 송아지도 그 중 하나였다. 특히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해 내려고 "애굽의 신들에게 벌을 주시사" (민 33:4), 그것으로써 하나님 자신은 우상들보다 뛰어나심을 친히 보여 주셨던 때에는, 애굽의 우상 숭배를 떠나라는 것이야말로 정당하고 합리적인 요구였다. 또한 설자 어떤 다른 우상들을 섬기고 싶어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들에게 속박의 집이 되었던 애굽의 신들에 대해서는 애굽 때문에라도 뿌리 깊은 혐오감을 가졌을 것이라고 누구나 생각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이러한 주의를 주어야 했고, 거기에 합당한 이유까지 첨부해야 했다. "나는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니," 돕는 자를 필요로 하지도 않으며, 경쟁자를 용인하지도 않느니라.
Ⅲ. 이 명령에 대한 그들의 부당한 불순종을 본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의 백성을 이루자마자 곧 잘라버렸어야 좋았을 것이다(8절). "그들은 하나님께 패역하였다." 그의 특별한 교훈을 좇기를 거절했을 뿐더러, 충성심을 포기하며, 사실상 그들은 자기들이 좋아하는 하나님을 경배할 자유를 누리겠다고 하나님께 말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하시려고 내려오시사, 모세를 보냈을 때조차도, 그들은 "애굽의 우상을 버리지 않으려 했다." 아마 그들이 "애굽의 파" (민 11:5)를 특히 좋아한다고 했던 것은 다른 것들 중에서도 특히 애굽인들이 파를 섬겼기 때문이리라. 애굽의 온갖 재앙이 그들을 "애굽의 우상들" 에게서 치료하지 못한 것은 이상한 일이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아직 "애굽 땅 한가운데" 있을 때에, "자기의 분을 그들에게 쏟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애굽인들과 함께 죽게 하리라" 고 하셨다 해도 그것은 정당한 일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의 풍요를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이 파멸되어야 합당한 때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위해 그처럼 위대한 구원을 기꺼이 베푸신 것이다. 모세가 잘 말했듯이 "그것은 너희의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로다" (신 9:4, 5).
Ⅳ. 하나님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놀라운 구원을 베푸셨다. 그들은 아직 은혜가 임하고 있는 동안에 그 은혜를 상실하였고, 또 하나님께서 "그들을 치료하고자 하셨을 때" 그들의 "죄악이 드러났으나" (호 7:1), "긍휼이 심판을 물리치고 승리했으며," 하나님께서는 순전히 "그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9절) 계획하셨던 일을 행하셨다. 우리들 속의 아무 것도 그가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야 할 이유를 제공하지 않는 때에, 그는 스스로에게서 이유를 발견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첫 아들이니, 그들을 가게 하여, 나를 섬기게 하라" 는 말을 공개적으로 바로에게 명령을 하라고 모세에게 이르신 그 때에, 하나님 스스로 "이방인의 목전에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러므로 만일 이스라엘이 그 사악함을 인해서 멸망당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애굽인들은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비난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마땅히 거룩히 여겨져야 할 그의 이름이 더럽혀졌을 것이다. 교회는 비록 타락했을 때에라도 보호를 받으니, 그 까닭은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영예를 확보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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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서의 은총과 배신(에스겔 20:10-26)
이스라엘이 스스로를 망치려고 범했던 죄와,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하시고 복 주시려 했던 긍휼 사이의 투쟁의 역사가 여기서 계속된다. 또 이 대목에 나타나 있는 투쟁의 본보기들은 광야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 투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주며, 이스라엘을 수치스럽게 만든다.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구약에서 뿐 아니라 신약에서도 자주 지적되니(고전 10장과 히 3장), 그것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도 경고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특별히 이 대목에 관심을 갖게 된다. 다음을 살펴보자.
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셨던 위대한 일들을 상기시킨다.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의 은총을 그들에게 베푼 것이 아까와서가 아니라 그들이 얼마나 배은망덕했던가를 알려 주기 위해서이다. 사람을 은혜 모르는자라고 욕하는 것은 가장 나쁜 욕이라고들 한다. 다음은 큰 은혜였다. 곧
1. 하나님께서 비록 그들을 "광야에 이르게" 하셨고 즉시 가나안으로 인도하지 않았으나, "그들을 애굽 땅에서 나오게" 하셨다는 사실이다. 풍성한 땅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 것보다 광야에서 자유로운 것이 더 낫고, 군중 속에서 하나님과 나 자신을 잃는 것보다 고독 속에서 그 양자를 누리는 것이 더 낫다. 그러나 광야의 곤란에 직면했을 때 다시 애굽으로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 같은 점을 이해하지 못할 만큼 천한 노예 근성을 가졌던 자들이 그들 중에는 많았다.
2. 하나님은 시내 산 위에서 그들에게 율법을 주었느니(11절), 그들에게 선과 악에 관해 가르쳤을 뿐더러, 그의 권위로써 그들로 악을 떠나 선에 매이게 하셨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들에게 자기의 율례를 주었다." 그것은 가치있는 선물이었다. "모세가 우리에게 율법을 명하셨으니 곧 야곱의 총회의 기업(유산)이로다" (신 33:4). 하나님께서 "그의 규례를 알게 하였으니," 그들을 위해 율법을 제정했을 뿐더러, 그 율법의 합리성과 공평성을 보이사, 그 율법이 어떤 법도로 이루어졌는가를 분명히 보이셨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율법들을 주고, 그것들을 준수하고 순종하라고 격려하셨다. 왜냐하면, "사람이 준행하면 그것으로 인하여 삶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데는 충만한 위로와 큰 대가가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일 영생에 들어가고자 하면, 계명을 지키라" 고 하셨다. 비록 가장 엄하게 순종한 자라도 마땅히 해야 할 의무 이상을 하지 못하는 무익한 종에 불과하지만, 거기에는 이처럼 풍족한 보상이 있다. 즉 "이를 행하라. 그러면 네가 살리라." 갈대아역판은 "그가 그것들(계명) 안에서 영원한 삶을 살리라" 고 했다. 성 바울은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나," 완전한 순종의 조건하에서는 생명을 제시한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감당할 수 없으므로, 복음의 은혜에 귀의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 이를 인용하고 있다(갈 3:12). 이 은혜 없이는 우리는 모두 멸망한다.
3. 옛 제도인 안식일을 부활시켰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그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동안 완전히 잊혀졌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일을 시키던 감독들이 결코 제7일 하루를 쉬도록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광야에서는 참으로 매일 매일이 안식의 날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만나를 먹고 살았으며 그 의복이 낡아 떨어지지 않았으므로 일할 필요가 어디 있었겠는가? 그러나 일곱째 날 하루는 거룩한 안식일로 지켜야 했다(12절). "또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알게 하려 하여, 내가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노라(안식일의 제정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의의 표징이었고, 그들이 그것을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경의의 표징이었다).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그가 그들을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시고, 그들을 그 자신을 위한 특수한 백성으로 만드실 계획을 하셨음을 밝히신 것이다. 그리고 안식일에 행해지는 엄숙한 희집을 통한 하나님 예배로 인해서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늘고, 그의 거룩하게 하시는 은혜의 능력과 기쁨에 대한 체험적 지식이 늘게 되었다.
이제 다음을 주목하자.
(1) 안식일은 특권이다. 또 그렇게 여겨야 한다. 교회는, 이것과 평행되며 이것을 지적하는 듯한 저 구절(느 9:14), "당신은 당신의 거록한 안식일을 그들에게 알리셨나이나" 라고 하는 말을 크나큰 은혜인 것으로 시인한다.
(2) 안식일은 표징(signs)이다. 즉 안식일을 의식적으로 거룩하게 지킬 때는 인간은 종교적 의식(意識)을 가지고 있는 것이며, 나아가 그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선한 교제가 있게 됨을 말해 주는 표징이다.
(3) 만일 올바로 성화(聖化)된다면, 안식일은 우리의 성화의 방편이 된다. 만일 우리가 그날의 의무를 행한다면,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이 땅에서 우리를 거룩하게(곧 참으로 행복하게) 하시며, 이후로 우리에게 행복을(즉 완전히 거룩하게) 예비해 주시는 "여호와" 인 줄을 알게 되리라.
Ⅱ.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불순종적이고 의무감 없는 행동을 보자.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과 계약을 맺자마자 그들을 그 계약의 울타리에서 쫓아내셨더라도 그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그들이 광야에서 내게 패역하였도다" (13절). 그들은 그처럼 많은 긍휼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곳, 그를 그처럼 의지하였던 곳, 또 가나안으로 가는 도중이었던 곳, 그곳에서 그들을 인도하시고 먹이셨던 하나님께 반역하며, 공공연한 많은 보반을 일으켰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례를 준행치 아니했을" 뿐더러 "그의 규례는" 준수할 가치가 없는 것이라 하여 "멸시하였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는 대신에 오히려 더럽혔으며, 그것도 크게 더럽혔다. 뗄감나무를 주으러 가는 사람도 있었고, 만나를 주으러 가는 자들도 많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이미 종종 그들을 멸절시키려 하셨었다. 그는 여러 번 "그들을 광야에서 멸하리라" 고 말씀하셨었다. 그러나 모세가 중재함으로써 하나님 자신의 긍휼을 더 힘있게 하였고, 무엇보다도 그의 영광을 높이게 하여, "그의 이름을 열국 앞에서 더럽히지 아니하려 하였다" (14절). 하나님이 이처럼 이스라엘을 멀리 인도해 낸 것은 벌을 내리기 위함이라든가 그가 그들을 더 이상 인도할 수 없다거나, 또는 그들을 인도해 가기로 약속했던 그러한 좋은 땅이 없어서 그렇다고 하는 애굽인들의 비난을 막기 위해서였다(출 32:12; 민 14:13 등등).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긍휼에 대한 가장 강력한 이유는 그 자신의 영광을 위함이라는 데 있음을 명심하자.
Ⅲ. 광야에서 그들의 세대를 멸절시키려 했던 하나님의 결심을 보자. 그들을 위해서 "손을 드셨던" (6절) 이가 이제는 "그들에 대적하여 손을 드셨다." 맹세로써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시겠다고 약속을 확인하셨던 이가 이제 맹세로써 그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지 않겠다고 위협을 확인하셨다(15, 16절). "내가 그들에게 손을 들어 말하되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한 자들은 내가 그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하게 할 것이다" (민 14:22, 23; 시 95:11). 하나님의 율법, 특히 그의 안식일을 멸시함으로써 그들은 자기들의 문에 빗장을 걸었다. 더구나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불순종과 그의 율례에 대한 경홀의 밑바닥에 있는 것은 애굽의 신들에 대한 은밀한 연모이었다. "그들이 마음으로 우상을 쫓았다" 고 했다. 세상과 육신 돈과. 배(腹)(영적인 우상의 두 가지와 큰 대상들)로 향한 끌림은 하나님의 법에 대한 온갖 불순종을 유출하는 쓴 뿌리이다. 우상들을 쫓는 마음은 하나님의 심판도 멸시한다.
Ⅳ. 새로운 시험을 통해서 용납되어야 할 씨(자존)의 보류와 그 씨에게 주어진 교훈(17절)을 보자. 비록 그들은 이처럼 파멸되어야 하며, 그런 운명의 나락에 빠졌으나 "내가 그들을 아꺼 보았다" (나의 눈이 그들을 아꼈다). 그들을 보았을 때 그는 그들을 동정하였고, "멸하여 아주 없애지 않고," 새 세대가 자랄 때까지 좀더 참으셨다. 하나님이 오래 전에 "우리를 멸하여 아주 없애지" 않은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긍휼 까닭이라는 점을 명심하자. 이 새 세대는 잘 교육된다. 모세는 신명기를 통해서, 애굽에서 나왔던 저들에게 주어졌던 율법들을 글로 기록하고 강화하여, 그들의 자손이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에 마치 저들이 직접 들은 것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조처하였다(18절). "내가 광야에서 그들의 자손에게 일렀으니 곧 모압 평원에서 너의 하나님의 율례를 쫓고, 네 열조의 율례를 쫓지 말라고 했다. 그들의 미신 숭배를 모방하지 말며, 그들의 어리석은 악습을 따르지 말라. 너의 조상의 물려준 것 외에 말할 여지가 없는 그들의 헛된 말들을 떠나라(벧전 1:18). 그 우상들로 너희 자신을 더럽히지 말지니, 그것들 때문에 하나님께 돌아 간 그들의 가증함이 얼마나 큰가를 보았음이라. 오히려 내 규례를 지키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할지어다" (19, 20).
만일 부모가 부주의하여 마땅히 해야할 선한 교육을 자녀에게 하지 않는다면 그 자녀는 성장하였을 때 스스로 더 주의깊고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함으로써 그 부족을 채워야 한다. 또 어버이의 나쁜 본보기를 모방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경계로 삼아 선용해야 하겠다.
Ⅴ. 그 다음 세대는 하나님을 모반한다. 이로써 그들은 또한 스스로 하나님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그 자손도 내게 패역하였도다" (21절). 그리고 아비들의 패역에 대해 언급된 것과 동일한 말이 여기서 "그 자손들의 패역" 에 대하여 언급되니, 그들은 행악자의 씨였기 때문이다. 모세는 그들에게 그가 "그들의 패역함과 목이 곧은 것을 안다" 고 말했다(신 31:27). 그리고 신명기 9장 24절에는 "내가 너희를 알던 날부터 보니 너희가 항상 여호와를 거역하였느니라" 고 했다. "그들이 가는 율례를 쫓지 아니하였도다(21절). 아니 오히려 그들이 나의 율례를 멸시하였다" (24절). 하나님의 율례를 불순종하는 자들은 그 율례를 멸시하는 것이요, 그들이 그 율례를 주신 자와 그 율례를 아울러 조잡한 것으로 여김을 보여 준다. 그들은, 그 조상들처럼 "하나님의 안식일을 더럽혔다." 안식일을 더럽히는 것은 모든 불경건의 시발점이 된다는 점을 명심하자. 거룩한 시간을 더럽히는 자들은 어떤 것도 순수하게 보존하지 못할 것이다. 그 조상들은 "마음으로 우상을 좇는다" (16절)고 했었다. 그런데 그들도 우상들에 대한 사모 때문에 우상을 섬겼다. "눈으로 그 열조의 우상들에 대한 사모하였다" 고 자손들에게 대해 말했다(24절). 그들은 성장하여 무신론자가 되었고, 어떤 다른 신들에 대한 사모함 때문이 전혀 아니라, 그 우상들은 조상의 것이요 자기들 목전에 놓여 있다는 이유로 "그들의 조상의 우상들" 을 섬겼다. 그들은 그것들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만일 그들은 신들을 소유해야 한다면 볼 수 있는 신, 만질 수 있는 신을 소유하려 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율례에 대한 그들의 불순종을 가중시킨 점은, "그들이 준행하면 그로 인하여 삶을 얻을 것이며" (21절), 행복하게 흥성하는 백성이 되었으리라는 점이다. 의무와 반대로 행하는 자들은 그들의 이익에도 반대로 행한다는 점을 명심하자. 그들은 순종하지 않을 것이며, 그리스도에게 오지 않을 것이니, 그리하면 생명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요 5:40). 그리고 그에 따라 순종 안에 살 수 있는 데도 그처럼 살아 흥성하지 않으려는 자들은 그들의 불순종 속에서 죽고 멸망하고 말아야 합당하다.
이제 저 세대의 패역과 우상 숭배의 경험에 대한 중대한 실례는 그들 조상의 경우는 "금 송아지" 였던 것에 비해, 이들은 "브올의 범죄" 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 (민 25:3). 그래서 여호와의 회중에게 재앙이 있었다. 만일 비느하스의 죽음에 의해 적시에 멈춰지지 않았더면 그들 모두가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호수아의 때에도 그들은 "오늘날까지 그 죄에서 정결함을 얻지 못하였다" 고 공언했다(수 22:17; 시 106:29).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니, 그는 "자기의 분을 그들에게 쏟고" (21절), 그들이 두 번째로 막 가나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을 때 "그들을 이방 중에 흩으시려고 광야에서 그들에게 손을 드셨다" 고 하셨다. 바로 이 말씀은 모세가 그들과 작별하는 마당에서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는 것이다(신 32:20). 그들이 "그를 진노케 하여 이상한 신들에게 질투케" 했으므로, 그는 "내가 나의 얼굴을 그들로부터 숨기리라" 고 하셨다.
그리고(26, 27절) 그는 "만일 내가 원수의 진노를 두려워하지 않았더면 그들을 사방으로 흩었으리라" 고 말했는데 이는 "내가 내 분을 그들의 위에 쏟을" 것이나, 내 이름을 인하여 내 손을 금하였다" (21, 22절)는 말을 설명해 준다. 가시적 교회의 부패가 이렇게 극심하므로 그의 전적인 파멸을 두려워해야 하지만, 우리는 간신히 위로를 받을 수 있으니, 하나님께서는 그의 뜻을 이루시사, 세상이 지속하는 한 그 속에 교회를 두시어 자신의 영예를 확보하시리라고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Ⅵ. 그들의 패역에 대해 내리신 하나님의 심판을 보자.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의무를 규정해 주신 그 은혜와 규례를 중시하지 않고 오히려 멸시하였다. 이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선하지 아니하며, 능히 살게 하지 못할 규례와 율례를 주셨다" (25절). 이로써 광야에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들을 벌하셨던 몇몇 방법들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그들에게 임하였던 재앙, 불뱀 등등. 이것은 그들이 깨뜨린 율법을 암시하여 "율례" (영어로는 "심판" 의 뜻)라고 불리는 것이니, 그것은 하나님의 정의가 부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것은" 규례" (법도)라고 불리었는데, 그가 그들에 관하여 명령을 내렸고, 때때로 구원을 명하셨던 것처럼 황폐를 명하셨으며, 애굽에게 재앙을 내리셨듯이 이스라엘에게 재앙을 명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내가 순식간에 그들을 멸하려 하노라" 고 말씀하셨을 때(민 16:21), 또 "백성의 두령을 잡아 그들을 목매어 달라" (민 25:4)고 하셨을 때, 또 저주로써 그들을 위협하고 그들로 하여금 모든 저주에 대하여 "아멘" 이라고 말하라고 강요하셨을 때(신 27:26), 그 때 그는 "그들을 살려 주지 못할" 규례들을 그들에게 주었던 것이다. 이 구절에는 겉으로 표현된 것 이상의 뜻이 함축되어 있다. 그것들은 그들을 죽이는 율례들이었다. 율법의 교훈에 메이지 않으려 하는 자는 율법의 선고를 당하리라.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임할" 것이기 때문이다(슥 1:6).
영적인 심판이 가장 가공할 만하다. 이방인들이 그들의 우상을 숭배하는 데 있어서 준수한다는 율례와 규례는 선한 것이 아니었으며, 그것들을 실행하면 그들이 살지 못하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렇게 하도록 맡기셨다.
그는 그들의 죄가 그들의 벌이 되게 하셨고, 그들을 "불신하는 마음" 에 내버려 두었다. 마치 이방의 우상 숭배자에게 행하시듯 하셨고(롬 1:24, 26), 그들을 자신의 마음의 욕정대로 내버려 두시면(시 81:12), 자연(본성)의 참된 빛과 법에 거역하는 자들에게 맡겨버림으로써, 기록된 율법에 거역하는 저 미신적 습관을 벌하셨다. 그는 그들을 내버려 두사 저들 스스로가 가장 불순한 우상 숭배의 범죄를 행케 했으니, 바알브올에 대한 경배에 있어서와 같다. 하나님은 "그들을 더럽혔다." 즉 그는 그들이 그 예물로 스스로를 더럽히는 것을 묵인했다(26절). 또 하나님께서 특별한 소유권을 주장하신(" 네 첫 소생은 내게 바치라") 그들의 첫 아들을 특히 "불을 통과하게" 함으로써 우상의 희생 제물이 되게 하였을 때에 그러하였다. 그들은 몰록에게 예배드릴 때 그런 야만스런 짓을 행함으로써 더럽혀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들을 황무하게 했으니," 그 하신 일이 정당할 뿐더러, 그것은 그들 자신의 손으로 한 것이다. 이것은 분명 그들의 가족들에게 큰 재앙이었으며, 그들의 국가의 명예와 국력의 감소였음에 틀림없다. 하나님께서는 가끔 죄 자체가 벌이 되도록 만드신다. 그러나 죄의 저작자는 아님을 명심하자. 그리고 인간을 스스로의 악한 욕망과 정욕에 내버려 두는 것보다 인간을 더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결코 없다. 그들로 자신들의 모략에 빠지게 하라. 그러면 그들이 스스로를 망치며 스스로를 황무케 하리라. 이리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이 여호와이시며, 의로우신 하나님이심을 그들로 알게 하시니, 그들 스스로가 그들의 고의적인 범죄가 얼마나 스스로의 멸망을 자초하는 가를 자인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드신다. 하나님을 여호와, 곧 자기들의 통치자로 시인하지 않으려는 자는 이미 너무 늦은 때에서야 그를 여호와, 곧 자기들의 심판자임을 시인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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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에서의 죄악(에스겔 20:27-32)
여기서 예언자는 그들의 수치를 나타내 주는 배신의 이야기를 계속한다. 그것은 저들을 더욱 겸손케 하기 위해서다.
Ⅰ. 그들은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에도 배신 행위를 지속했다. 비록 하나님께서 그처럼 수차에 걸쳐 그들의 악한 행실에 대한 분노를 증거하셨으나, "너희는 열조가 나를 참람하게 한 이것에서(즉 꼭 같은 일로)나를 계속 모욕하며 내게 범죄하여 나를 욕되게 하였느니라" (27절). 사람이 앞서간 자들에게서 죄의 불행한 결과를 보고 경고를 받지 않으려 하면 죄를 더욱 악화시킬 뿐임을 명심하자. 이는 "하나님을 참람케 하는" 일이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의 율례를 아무 것도 아니며 고려할 가치도 없는 것인 양 비방하는 것이다.
1. 하나님은 자기 약속을 실행하셨다. 그는 그들에게 주기로 맹세했던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였다." 비록 그들의 불신앙과 불순종이 그 실행을 느리게 했으며, 많은 일이 그것을 지체케 했으나, 그것이 "약속을 무효화하지는" 못하였다. 그들은 번번이 광야에서 거의 멸절될 뻔했으나, 죽음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마침내 그들은 가나안에 도착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조차 지옥문을 거쳐 하늘에 이르른다는 점을 명심하자. 허물이 많고, 부패가 극심하므로, 그들이 마침내 행복하게 되는 것은 자비의 기적인 것이다. 이는 마치 위선자가 하늘문을 지나 지옥으로 가는 것과 비교된다. "의인도 겨우 구원받는다." Per tot discrimina rerum tendimus ad coelum- 즉 만 가지 위험이 하늘가는 길을 메우고 있다.
2. 그들은 가증한 우상 숭배를 통해 하나님의 훈계를 깨뜨렸다. 하나님께서 모든 우상 숭배의 유품을 파괴하여 그의 성소를 더럽히는 유혹에 빠지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 같은 유품을 멸시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것들과 사랑에 빠졌다. 그들은 즐거운 전망을 가질 수 있는 "모든 높은 산," 그리고 쾌적한 그늘을 얻을 수 있는 "모든 무성한 나무" (전자는 그들의 자만하는 우상숭배를 보이려는 것이요, 후자는 그들의 수치스러운 우상 숭배를 감추려는 의도이다)을 보고는, "거기서 제사를 드리고 분향하였으니," 오직 하나님의 제단에만 바쳐질 수 있는 것을 거기다 바친 것이다. "거기서 그들은 격노케 하는 제물을 올렸다" (28절). 즉 그들의 제물은 하나님을 진정시키거나 기쁘게 해 드리는 대신 매우 격노케 하는 것이었다. 비록 값진 것이었으나, 잘못 자리잡음으로써 여호와께 가증한 것이 된 희생이었다.
3.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모든 충고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완고하게 고집했다. "내 종인 예언자들에 의하여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다니는 산당이 무엇이냐 하였노라(29절). 아니 오히려 나는 그들로 하여금 그것을 숙고하게 하고,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 즉 너희가 다니는 높은 처소가 무엇이냐고 물음으로써, 그들 자신의 양심을 물었다. 너는 거기서 얼마나 매혹적인 것을 발견하였기에 하나님께서 너의 참예를 요구하시는 그의 제단을 떠나, 경배하지 말라고 금지한 그와 같을 장소에 자주 드나드느냐? 너는 저 산당들이 이방인들의 착취의 장소이며, 그들이 희생으로 드리는 제사는 하나님이 아니라 악마들에게 바치는 것인 줄을 모르느냐? 모세가 너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더냐?(신 32:17). 너는 마귀에게 제사하느냐? 네가 하나님의 제단에 등을 돌릴 때, 너희가 가는 저 높은 처소(산당)는 무엇이냐? 오 어리석은 이스라엘이여, 누가 혹은 무엇이 너를 홀려, 생명의 샘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예배 대신에 깨어질 물통을 취하며, 그가 금지하고 증오하고 벌 주는 것을 택하게 했느뇨?" 그리고 "그것을 오늘날까지 바마라 일컬느니라." 그들은 그들의 길을 가라. 하나님과 그의 예언자들이여, 그들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 주라. 그들은 "신당과" 연합하였다. 가장 착실한 지역에서조차 산당이 제거되지 않았다. 너는 그들의 입에서 바마(" 산당")이라는 이름을 제거할 수 없었다. 그들은 여전히 예배의 장소에다 그 이름을 붙이려 하고 있다. 죄와 죄인을 헤어지게 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Ⅱ. 이 세대는 미정착된 이후로 계속 똑 같은 근성, 곧 우상 숭배에 대한 부패된 성향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30절). 에스겔은 몇몇 대표 장로들이 이제 자기앞에 앉아있는 상황에서, 현재의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해야" 했다.
"너희가 열조의 풍속을 따라 스스로를 더럽히느냐? 하나님께서 계속적으로 선지자를 통해 너희에게 말씀하시고, 일련의 율례를 통하여 너희에게 행하신 바를 차지하고, 너희를 경계하지 않으려느냐? 너희는 네 열조들처럼 더욱 악하게 되고 그들이 범한 것과 똑같은 가증한 일을 범하려느냐? 내가 보니 너희는 그러려고 한다. 너희는 옛 가증한 일로 되돌아가려 하는도다. 너희는 산당에서 너희 예물을 드리며, 너희 아들들로 불을 통과케 한다. 너희는 그것을 실제로 하고 있거나 의도하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함으로 너희는 오늘날까지 우상 숭배를 계속하고 있도다."
이 장로들은 이방인과 연합할 계획을 짠 것 같다. 그들의 마음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위해 보류할 것이나, 그들의 무릎은 그들이 살고 있는 열방의 신들에게 굽힐 생각이고, 그들 중에서 더 많은 존경과 더 나은 원조를 받으려고 한다. 여기서 예언자는 이런 계획을 짜면서, 하나님과 바알 사이의 문제를 혼란케 하고 있던 자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을 명령받는다. 즉 그런 자들은 그 어느 쪽으로부터도 한 푼의 위로나 이득을 얻지 못하리라.
1. 그들이 은밀히 여호와의 예언자들과 자문한다 해서 아무 이득을 보지 못하리라.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우상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아무 상관이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내게 묻기를 용납하지 아니하리라" (31절). 이렇게 하는 것이 얼마나 의로운가는 이미 앞에서 자세히 말했었다(3절). 여기서 되풀이하여 말함은 그가 앞으로 계속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물으러 왔다하여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생각을 말게 하라. 그들이 계속 우상들과의 사랑과 동맹을 유지하는 한 하나님으로부터의 평화의 대답을 기대하지는 못할 것이다. 신앙에 있어서 전적이며 신실하지 못한 자는 그들의 종교에 의해 어떤 유익도 거둘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하자. 예배라는 의식을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는,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내면적인 정직을 지키지 아니하는 한, 아무런 유익이 없다. 우리의 신앙 고백이 단지 고백에서 끝난다면 그것에서 아무 것도 취할 것이 없게 된다. 나아가,
2. 그들이 공공연히 그들의 이웃의 관습에 순응한다 하여도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하리라(32절). "현재 당면한 어려운 사태로 인하여 정교한 술책으로써 너희 마음에 품은 것, 그리고 너희 자신의 보존을 위하여 하려고 했던 것, 그리고 유별나게 됨으로써 너희 자신이 모욕을 당하지 않으려는 것, 그것은 결코 이루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너희에게 아무런 득이 되지 못함이 판명되리라. 너희는 말하기를 이렇게 하리라. 우리가 이방인같이 되자. 그들의 신들을 예배하는 데 동참하자. 그것들은 신들이 아니다. 단지 목석에 불과하다고 우리는 믿는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우리도 열국 족속같이 여겨질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유대인인 줄을 모르거나, 잠시 동안은 잊을 것이며, 그들 국민과 동등한 특혜를 우리에게 허락하리라.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라신다. 이 기도는 결코 이루어지지 못하리라. 그들의 이웃이 그들이 함께 예배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지도 않을 것이며, 또 그렇게 한다 해도, 그로 인해 그들을 잘보기 보다는 더 나쁘게 볼 것이다. 그들을 분리주의자로, 믿지 못할 자들로, 하나님께 지극히 거짓되고 이웃을 속이는 자로 여길 것이다."
죄악된 화합에 의해서는 얻어지는 것이 없다. 그리고 위선자의 속된 계획은 결코 그들을 부지해 줄 수 없으리라. 사람을 보전하고, 그로 하여금 하나님과 사람에게 서게 해 주는 것은 오직 정직과 방정함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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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과 자비(에스겔 20:33-44)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꾸미고 있는 고안은 열방 중에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그들의 모든 특성을 포기하고 그들이 살고 있는 현지의 사람들과 부합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계획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리라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32절). 하나님은 이 대목에서 특히 그것이 어떻게 좌절될 것인가를 보이신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자손과 열방의 자손과 혼합할" 것을 목표하였다. 그러나 그 착상에 있어서 악한 이스라엘인은 그 연합에도 불구하고 저들의 번영에는 동참하지 못하고 구별되어서 멸망케 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배교한 우상 숭배자 이스라엘인들은 의의 길을 도무지 몰랐던 우상 숭배자 바벨론인보다 더 조속히 그리고 지독하게 벌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들에게 내려진 저주스런 운명을 읽고 떨지어다. 그것은 변경될 수 없는 맹세로써 뒤받침되어 있다.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니라." 이렇게 이렇게 그들을 취급할 것이라고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루살렘과 바벨론 양자 사이에서 머뭇거림으로써 양편 모두 자기들의 친구로 만들 생각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양편 다 결코 그들의 안식처나 피난처가 될 수 없으리라고 경고하신다.
Ⅰ. 바벨론이 그들을 변호하지 않을 것이며, 이방 중 어느 나라도 그렇게 하지 못하리라.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기 보호권에서 추방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군주, 어떤 백성, 어떤 장소가 그들에게 성소로 사용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옛 왕이셨으니, 만일 그들이 그의 충성스러운 신하이기를 계속했다면 그는 그들의 유익을 위해 보살핌과 온유로 "그들을 다스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편 팔로 분노를 쏟아 그들을 다스릴 것이다" (33절). 그들의 보호를 위해 행사되어야 했을 저 힘이 그들의 멸망을 위해 작동되리라. 하나님의 주권을 떨쳐버릴 수는 없다는 점을 명심하자. 그는 황금홀로 혹은 쇠막대기로 다스릴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은혜의 힘에 굴복하려하지 않는 자는 그의 분노의 힘에 의해 가라앉혀질 것이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에 대해 진노하셨다. 비록 그들은 흩어진 이방의 무리 가운데서 숨어있으니 하나님이 못찾아 내리라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그들은 실망할 것이다. 왜냐하면(34절), "내가 너희를 흩어진 열방 중에서 몰아낼"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반란군이, 전쟁 중에 흩어질 때 전쟁의 칼을 피한 자를 그 흩어진 곳에서 추적하여 색출해 내고, 의의 칼로 징벌하는 것과 흡사하다. 그들은 "열국 광야에" 이르게 되리니(35절), "광야" (19:13)와 "바다의 황야" (사 21:1)라고 불리우는 바벨론으로, 혹은 백성으로 가득하나,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후에 있었던 광야와 같은 그런 장소로 인도되었다. 이 장소는 하나님께서 "애굽 땅 광야에서 그들의 열조를 국문함 것같이, 그들을 대면하여 국문하실" 곳이다(36절). 곧 그들의 시체가 떨어질 장소요, 그가 그들의 열조에게 결코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을 맹세했듯이, 그들에 대하여 그들이 결코 가나안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을 맹세하실 곳이며 그가 시내 광야에서 했던 것과 같은 공포로 그의 율법의 파기를 보복하실 곳이다. 하나님은 배교자에 대하여 마땅한 조치를 취하신다. 그는 그러기 위해서 국문하시기에 적당한 시간 뿐만 아니라 장소도 찾아 내실 것이니, 그 목적을 위하여 열국 중에조차 광야를 찾아 내시리라.
Ⅱ. 이스라엘은 바벨론이 할 수 없었듯이 그 자신을 더 이상 보호할 수 없으리라. 또 우상 숭배자와 맺은 이스라엘의 화합이 이 세상에서 그들을 튼튼히 해 주지 못했듯이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이 저 세상에서 그들을 튼튼히 해 주지 못하리라. 더욱이 그들은 행악자들이 회중에서도 서지 못하듯이 "의인의 회중" 에서도 서지 못하리라. 이는 구별하시는 날이 올 것임이니, 그때 하나님께서 귀인과 악인을 분리시킬 것이다. 그는 목자가 자기 양을 다루듯이 십일조를 취하실 때처럼(레 27:32) "그들을 막대기 아래로 지나게 하여" 하나님께로 향한 자를 점검하시리라. 하나님께서 그들 각각을 하나하나, 마치 양을 세듯 특별한 주의로 살피시며, "계약의 줄로 맬 것이다" (37절). 그는 그들을 시험하시고, 언약의 취지에 따라 그들을 심판하시며, 언약의 축복과 저주에 의하여 이 무리와 저 무리를 구별하리라.
혹은 이 말씀은 그들 중에서 회개하고 개심한 자들을 지칭할 수도 있다. 그는 그들로 하여금 고통의 막대기 아래로 지나게 하여, 그것으로써 그들에게 유익을 주시며, 다시 그들에게 "유익을 주시며" 다시 그들을 "계약의 줄로 맬"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계약의 하나님이 되며, 그들을 다시 "약 속의 상속자" 로 삼으시리라.
1. 그는 그들중에서 악인을 분리해내실 것이다(38절). "내가 너희 가운데서 패역한자를 제하여 버리리라. 그들은 너희에게 슬픔과 치욕거리였으며, 그들의 반역에 의해 이 모든 환난이 너희에게 초래된 것이니라."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을 찾아내실 것이다. 그들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호칭된다는 것이 그들의 피난처가 되지 못하리라. 그들은 "그 우거하는 땅에서 나오게" 될 것이며," 스스로에게 기약했던 저 안식을 그들 중에서 누리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스라엘 땅에도 들어가지 못할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약속하신 저 안식의 혜택을 즐기지 못할 것이다. 비록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이 세상의 재난에 있어서는 악인과 함께 하나, 악인은 하늘이 가나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와 함께 몫을 차지하지 못할 것임을 명심하자. 그러나 그들이 "그들로부터 제하여 버림을" 받으리라는 것, 즉 밀로부터 가라지를, 곡식으로부터 쭉정이를 가려내는 것은 저 세상의 축복의 일부일 것이다(13:9) 그러나 이 "이스라엘 족속" 의 우상 숭배자들이 하나님과 자기들의 우상을 동시에 숭배하는 데 몰두하여 양자를 기쁘게 할 생각을 하는 곳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가 그의 이름으로 했듯이, 그것에 대하여 도전하신다. "만일 여호와가 하나님이거든, 그를 쫓으라. 만일 네가 우상을 섬기려거든 그리하고 그 결과를 취하라. 그러나 하나님과 관계가 있거나 그에 대한 신앙심이 있는 체하지 말며, 그의 제단에서 너희 예물로 그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말지니라."
영적 심판은 가장 쓰라린 심판이다. 그런 종류의 심판 두 가지가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열방의 신들 사이에서 방황하는 자들을 향해 선고되어 있는 곳이 이 구절이다.
(1) 그들은 그들의 우상에 대한 섬김에 탐닉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반어적으로 말했다.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아니하려거든, 가서 각각 그 우상을 섬길 것이며, 이제 그것이 너희 이익을 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후에도 그리하려므나. 너희는 그것을 계속할 것이다. 에브라임이 우상에 연합하였으니, 그를 홀로 있게 하라. 그로 하여금 마음대로 가게 하며, 결국 그것으로 인해 어떤꼴이 되는가를 보라." 죄를 통해서 자신들을 돌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마침내 죄에 종노릇하게 되는 자신들을 발견하게 되리라는 점을 명심하자.
(2) 그들은 하나님의 섬김과 하나님과의 영교로부터 단절되리라. "너희는 헛된 제물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말 것이니라(사 1:11). 너희는 손에 예물을 가지고 나를 영화롭게 하는 척하며 오지만, 그와 같은 때에도 너희는 마음에 우상을 품고 오며, 따라서 단지 나를 더럽힐 뿐이니, 이는 내가 더 이상 참지 못할 일이로다" (암 5:21, 22). 하나님의 집을 더럽히는 자에게 그 집 출입을 금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점을 명심하자.
2. 그는 다시 그들을 분리시켜 그에게로 회복하시리라.
(1) 하나님은 긍휼로 "그들의 흩어진 열방 중에서 모아낼 것이다." 이는 마치 가망없는 자가 진노의 그릇에 모여지는 것처럼 긍휼의 기념비가 되리라(4절). 하나님의 보석 중 단 하나도 이 세상의 폐물 중에서 잃어버려지지 않으리라.
(2) 하나님은 "그들의 열조에게 주기로" 약속했던 "이스라엘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내리라." 그리고 그들의 소유권의 불연속이 그들의 권리의 박탈이 되지는 않으리라. 그것은 아직도 "이스라엘의 땅" 이며, 그리로 하나님께서 다시 그들을 안전하게 인도하시리라(42절).
(3) 그는 그들에게다 그의 규례를 재확립하며, "이스라엘의 높은 산" 이라고 지칭되는 그의 거룩한 산에 그의 성소를 세울 것이다. 비록 시온 산은 높은 산에 속하지 않으나 거기 있는 성전은 이스라엘 최고의 영예 중 하나였다. 자기들의 정직을 보존하며, 다른 땅에서도 우상들을 섬기려 하지 않는 자들은 다시 융성해지며, 그들 자신의 땅에서 참 하나님을 섬기게 되리라는 점이 약속되었다. "그 땅에서 그들 모두가 다 나를 섬길 것이다." 백성에게 하나님을 섬기려는 경항이 편만할 때, 그것은 그 백성의 참 행복이며, 그들의 축복의 확실한 징표일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하나님께서 우상 숭배자들이 그들의 예물을 제단에 가져 오는 것을 금하신 반면, 이들에게는 "예물과 첫 열매를 요구하실" 것이며, 또 그것들을 받으시리라(40절). 그는 요구하시지 않는 것을 받지는 않으실 것이지만, 그의 훈계를 생각하고 행해지는 것을 매우 즐거워하시리라. 그는 "그들을 향기, 혹은 안식의 향기로 받을" 것이니(41절), 그에게 매우 감사하는 표시로써 받을 것이며, 그것을 자랑하게 된다. 반면, 위선적인 우상 숭배자들에게는 "내가 너희의 엄숙한 집회에서 흠향하지 않으리라" 고 말씀하신다.
(4) 하나님은 죄에 대한 참된 통회를 그들에게 허락하실 것이다(43절). 그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얼마나 은혜로우신가를 발견할 때, 그들은 그의 친절에 의해 굴복되며, "지극히 좋으신 하나님" 을 향한 그들의 나쁜 행위를 생각하고 부끄러워할 것이다. "거기 나의 거룩한 산에서, 너희가 그 특혜를 다시 즐기게 될 때, 거기서 너는 너희가 더럽혔던 모든 행위를 기억할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죄의 흉악한 성격을 더욱 알게 되리라는 점을 명심하자.
거기서 "스스로 미워하리라." 솔직한 복음적 회개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죄로 인하여 스스로를 미워하게 만든다는 점을 명심하자(욥 42:5, 6).
(5)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줄 것이다. "그들이 체험에 의하여 그가 여호와인 줄," 즉 그가 그의 백성에게 친절하시고 그들과 맺은 계약에 충실하신 전능하며 다함없는 선하심을 지닌 하나님이신 줄을 알리라.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바 모든 은혜는 우리를 그와의 더 친숙한 사귐으로 인도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자.
(6) 하나님은 그들의 무자격과 악함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하실 것이다(44절). 그는 "그들과 함께 행하셨도다." 즉 그들을 위해서, 그들 편에서, 그들에게 동조하여, 그들의 노력을 따라서 함께 행하셨다. 그러나 그는 순전히 "그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행하셨다. 그의 이유들은 모두 그 자신에게서 도출된다. 그가 "그들의 악한길과 더러운 행위대로" 대하셨다면, 비록 그들이 이스라엘 족속 중에서는 보다 착실하고 신실한 자들이었어도 다른 자들처럼 흩어져 길을 잃도록 버려두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회복하시고 돌이키사 "더렵혀" 지지 않도록 했을 뿐더러(14절), "그들로 말미암아 그의 거룩함을 열국의 목전에서 나타낼" 것이며(14절), "자신을 거룩하게" 하셨다. 이는 그 자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백성에게 선을 행하사, 그것으로 인한 영광을 취하시며, 자신은 죄를 용서하시고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임을 밝히신다. 그래서 그의 백성이 그를 찬미하며, 그들의 이웃들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포로를 돌려보내셨음을" 알게 되리라. "그때에 열방 중에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해 위대한 일들을 행하셨다" 고 말하였도다" (시 1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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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의 경고(에스겔 20:45-49)
여기서는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진노의 예언에 접한다. 이는 본장의 결론이라기보다는 다음 장의 시작이라고 말하는 것이 적당하겠다. 왜냐하면 이 내용은 이전에 나온 내용에 달려있지 있고, 다음 장의 처음에서 계속되는 내용에 대한 설명이기 때문이다. 그때 백성들은 이것을 보고 이해하지 못할 비유라고 불평하였다. 이 비유 속에서
1. 경계의 대상이 되는 것은 바로 "남방 삼림" 즉 유다와 예루살렘이다. 이들은 지금 에스겔이 있는 곳, 곧 바벨론 남단에 위치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그의 얼굴을 남으로 행하였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진노하사 그의 얼굴을 그들에게로 향하셨고, 그들을 증오하사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였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비록 그는 그가 전해야 할 것이 진노의 전언일지라도, 그것을 온유와 평온의 말로 전해야 한다. 그는 "남으로 향하여 예언해야" 한다. 그의 가르침은 "내리는 비" 와 같으리니(신 32:2) 사람들의 마음을 그것으로 인해 부드럽게 하려는 것이다. 마치 "들의 초장에 떨어지는 하나님의 강" 옆에 있는 땅과 같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남쪽의 땅은 이 같은 비를 특별히 더 필요로 한다(수 15:19).
유다와 예루살렘을 "삼림" 이라고 불렀다. 거기는 삼림의 나무처럼 사람으로 가득 했을 뿐더러, 지금까지 열매가 없었기 때문이다(열매맺는 나무들은 삼림에서 자라지 않는다). 그리고 삼림은 비옥한 들에 반대되는 것으로 간주된다(사 32:15). 여호와의 정원과 그의 포도원으로 여겨져 왔던 자들이 아주 "엉겅퀴와 가시가" 무성한 삼림과 같이 되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자들, 즉 의의 열매를 산출치 못하는 자들을 쳐서 하나님의 말씀이 예언된다.
2. 예언의 내용은 그 삼림에 붙는 불이다(47절). 도회나 촌이나 모조리 황폐하게 태워버렸던 저 모든 심판 -칼, 기근, 질병, 포로됨 등이 이 불로 상징되었다.
(1)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붙이시는 불이다. "내가 너희의 가운데 불을 일으키리라." "여호와의 호흡" 이 방울 같지 않고 "유황개천 같아서," 그것을 사르리라(사 30:33). 예루살렘 주위에 불이 일지 않도록 예방하셨던 자가 이제는 그곳을 사르는 불이 되셨다. 이 불의 노기, 그리고 특별히 그들이 이 불의 연료로 제공한 죄악과 이 불이 가져올 황폐를 비교해 봄으로써 "그 불을 불붙이신" 분은 "여호와" 시요(48절) 자기의 침해된 명예를 위한 정당한 복수자이시라는 것을 "모든 육체가 알리라."
(2) 이 큰 불은 보편적이리라. 인간의 모든 질서와 등급이 그것에 삼켜지리라 -노소, 빈부,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불이 쉽사리 붙지 않는 "푸른 나무" 조차 이 불에 살라진다. 그들 중에 있던 몇몇 선한 사람들조차 이 환란에 접하게 될 것이다. "푸른 나무가 이러하다면 마른 나무야 어떠하겠느냐?" 마른 나무들은 이 불에 마치 불쏘시개 같은 것이다. "가나안 남방에서 북방까지," 브엘세바에서 단까지, "모든 얼굴들이 그을릴지니라."
(3) 그 불은 "꺼지지 아니하리라." 그것의 파괴를 통제할 어떠한 시도도 성공치 못하리라. 하나님께서 어느 민족을 파멸시키려 하신다면, 누가 혹은 무엇이 그것을 구할 수 있으리요?
이제 다음을 살피자.
1. 이 설교를 계기로 예언자에 가해지는 백성들의 비난을 보자. 그들은 "그는 비유를 말하는 자가 아니냐?" 고 말했다. 이것은 그들의 무지나 불신앙(가장 단순한 진리가 그들에게 비유와 같았다), 혹은 예언자에 대한 그들의 앙심에서 나온 말이었다. 흔히 그 말을 듣지 아니하려는 자가 말에 시비를 거는 법이다. 이 말은 너무 단순한가 하면 너무 모호하며, 너무 까다로운가 하면 너무 쉽고, 너무 일상적인가 하면 너무 특유하다. 그래서 무엇인가가 거기에 잘못이 있다는 식으로 시비를 건다.
2. 하나님께 향한 예언자의 불평을 보자. "오호라 여호와여 ! 그들이 말하기를 나에 대하여 이러이러하나이다.
사람들이 부당하게 우리를 비방할 때, 우리에게는 불평을 직고할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로 위로를 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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