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본성을 찾아서
본성을 찾고 싶단 생각을 58살이 되어서라도 할 수 있었던 건 다행이었다. 모지스 할머니의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라는 책을 읽고 나니, 감동이 밀려왔다. 본성을 지금에라도 찾을 수 있다는 건 크나큰 행운에 속한다. 가장 행복했던 어린 시절 기억의 조각을 찾아서 ‘난 어떤 아이였지?’란 질문을 스스로 했다. ‘지금부터 나의 본성을 찾는 여행을 떠나보자!’꼭 좋은 본성만이 아니더라도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계산하지 않는 순수함을 찾고 싶다.
10대 시절엔 칭찬보다는 혼날 때가 훨씬 많았다. 아니 칭찬과 격려는 나완 먼 얘기였다. 2살 많은 언니는 부모님께 혼난 기억이 없다 한다. 하지만 난 행동이 과했던 탓에, 엄하고 보수적인 가정 분위기에 스며들지 않고 따로 동떨어진 아이였다. 유일하게 아버지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아침 식사 시간이 하루 중 제일 따분했다. 아버지께 시끄럽다는 꾸중을 듣고 입을 다물고 있으려면, 속이 터질 듯이 답답했다. 얘기하는 사람은 나 혼자이니까 나만 입을 다물면 식탁에 평화가 감돈다. 사실 목소리가 크고 활달하단 건 그만큼 에너지 넘친다는 것이니, 다른 가정에서라면 그리 혼날 일도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부모님들은 ‘ADHD’란 병도 잘 모르셨고, 나도 어린 시절의 과잉 행동이나 충동성이 어쩌면 그 병으로 인해서였는지도 모르겠다는 걸 지금의 나이가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가이드 포스트’에 나오는 어느 ADHD 환자의 수기에서 보면, 자신이 몸을 움직이고 싶어서 괴로워하면, 선생님은 보조 교사에게 나머지 아이들을 잠시 부탁하고, 자신의 손을 잡고 산책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게 했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ADHD를 감기 정도로 여기고 어릴 때부터 약을 먹여 전두엽에 신경전달 물질을 보충하게 하고, 성인이 되어서도 여러 프로그램을 거치며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하지만 나 어린 시절엔 우리나라에선 그 병 자체를 몰랐었고, 선생님들도 과잉 행동이나 충동성에 대해선 엄한 체벌을 통해서만 교육을 하셨다. 우리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부모님이 따뜻하게 이해하고 감싸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아이의 열등감이 나날이 커져 자신감이 낮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계셨다. 엄마는 여러 가지 일을 하시느라 몸이 여러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셨고,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셨기에 늘 귀가가 늦으셨으니까. 놀리는 오빠들을 나무라시지도 않으셨다. 우리 남매들은 정서적으로 안정되진 못한 환경에 놓여 있은 셈이다.
좁은 마당을 거의 차지하다시피 한 탁구대가 있었다. 내 딴엔 열심히 서브를 넣고, 공을 받으려고 뛰어다니는데도, 돌아오는 건 오빠들의 비웃음 소리뿐이었다. ‘이상하다. 왜 나 할 때만 유독 저렇게 웃는 걸까 ? ’오빠들은 공을 다루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도 않으면서 웃음으로만 대꾸했다. 내 동작이 엉성하다는 걸 그땐 당연히 눈치채지 못했다. 결혼하고 나서 ‘국민체조’ 영상을 보면서 열심히 동작을 따라 하고 있을 때였다. 남편뿐 아니라 아이들까지 마치 개그 프로를 보는 것처럼 배를 잡고 깔깔대는 걸 보고서야 깨달았다. ‘아! 난 몸치였구나! 어릴 때도 오빠들이 놀리려고 웃었다기보다는 몸동작이 너무 희한해서 저절로 웃음이 났었던 거라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오빠들은 얼굴형으로 별명을 지어 불렀다. 언니는 동그랗다고‘보름달’이고, 난 네모나다고 ‘납작달’이라 했다. 외모 가지고 놀릴 때는 정말 싫어서 귀를 막고 싶었다. 좀 똘똘했더라면 정색을 하면서, “오빠! 엄마가 이렇게 낳아줬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자꾸 놀리는 거야? ”라며 따졌을 것이다. 만만하게 보지 않게 따끔한 소리도 하지 못한 채 바보처럼 쓴웃음만 지었다. 듣기 좋은 꽃 노래도 한두 번이면 족하다는데, 매일 같이 놀림을 당하다 보니, 외모에 대해 자신감이 없어지고 말았다. 거울 속의 내 모습이 그저 한없이 흉해 보였다.
언니와 같이 피아노를 배워도 음표가 그게 그것 같아 잘 모르겠고, 재미도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그림 그리기였다. 그림을 그릴 땐 집중할 수 있었고, 제법 잘 그린다는 소리도 들었다. 시를 지어 상을 받기도 했다. 책을 특히 좋아했다. 하지만 중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턴 학교다 과외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생활이 반복되었다. 그렇게 좋아하던 친구 책도 저 멀리 던져버리고, 성적이 오르지도 않는데도 자나 깨나 공부에만 내몰렸다. 지쳐서인지 가정교육의 영향인지 겉모습은 부모님이 바라시던 모습으로 차츰 변해갔다. 이제 사람들은 내가 얌전하게 생겼다고 말하곤 한다.
결혼 후 어느 날 초등생 딸과 함께 식당에 갔을 때였다. 한참이 지나도 종업원이 바쁜지, 물을 가져다주지 않았다. “물 좀 주세요!”라고 말하는 내 목소리는 이내 소음에 파묻혀 버렸다. 꽤 여러 번 옹알거렸다. “엄마! 우리한테 소리 지를 때처럼 좀 큰 소리로 말해보세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 ‘찌리릿!’하는 전율이 일었다. ‘아! 맞다. 다른 사람을 의식해서 집에서와 다르게 말하고 있었구나. 딸아이가 한 말은 “엄마의 본성을 찾으세요!”라는 듯이 들렸다.
시어머님은 외동 며느리를 사랑하지는 않으셨지만 마치 리모컨처럼 편리하게 누르셨다. 똑똑하시고 말씀도 잘하시고, 운전도 잘하셨지만, 혼자 하실 수 있는 일도 며느리에게 의존을 많이 하셨다. “난 들어도 잘 모른다. 넌 기억을 참 잘하더라!”라는 당근을 주시며, 비서처럼 어딜 가나 같이 가주길 바라셨다. 그날도 어머님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한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한 자도 놓치지 않으려 열심히 받아 적고 있었다. 온 김에 너도 진맥해보자고 하셨다. 맥을 짚어보시더니“본성과 달리 사시느라 몸이 약해졌네요.!” 이 한마디에 눈물이 핑 돌았다. 시어머님을 모시고 다니는 건 고역이었다. 항상 불평과 불만이 많으셔서 밖으로 다 쏟아내시기 때문이다. 종일 모시고 이곳저곳 다니며 비위를 맞추다 보면 진이 다 빠지고 만다. 하지만 싫다는 거절을 하지 못하고 직설적인 어머니의 말씀은 비수가 되어 마음에 내리꽂혔다. ‘본성대로 한다면 시어머님과의 관계도 잘 대처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잃어버린 본성을 되찾을 수 있을까?’
드디어 본성을 찾을 수 있는 순간이 내게로 다가왔다. 자랄 땐 순탄치 않은 사춘기를 거듭 겪으면서 부모 속을 태우기만 하던 딸내미가 어느 날 “엄마, 내가 하려고 신청한 건데, 책 읽는 거예요. 난 시간도 맞지 않는데, 엄마가 나 대신에 하시겠어요?” 어떻게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응! 해볼래!”라고 말한 건지. ‘책’이란 단어를 사랑하던 마음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했나 보다. 천만다행이었다. 처음엔 읽지 않은 세월이 길어서인지 머리가 지끈거려, 30분을 채 읽지 못했지만, 차츰 적응되었다. 다시 찾은 어릴 때 친구와의 만남이 너무 좋아서, 잡은 손을 다시는 놓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친구들은 “이미 끝난 인생처럼 말하기도 한다. 60이 넘으면 어떤가. 나이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동안의 삶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살았다면 후회는 조금만 하고, 이내 툴툴 털고 일어나는 게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방법이 아닐까? 책과 여행을 통해 본성을 되찾은 지금이 내 생애에서‘화양연화’이다. 더 이상의 바람은 없다. 현실에 만족하며 하루를 잘 꾸려 행복으로 채우려 노력하면서 살고 싶다. 그토록 바라던 본성 찾기의 꿈이 이루어졌으니 이보다 감사한 일이 또 있을까?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긴 세월, 세상과 타인이 요구하는 모습으로 살다 가면을 벗고 거울 앞에 선 모습이 그려집니다. 본성을 찾아 하루하루를 알차게 살아가는 선생님을 응원합니다.
본성에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없습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성질이 본성입니다.
성질이란 사람이 지닌 마음의 본바탕이지요.
자기가 가진 마음의 본바탕을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앞으로 삶의 질을 높이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어릴 때는 활달한 성질을 갖고 있었군요.
그러나 가족들의 도움이 없어 발달하지 못했네요.
지난 시간에 공부한 그림자가 되어 마음속에 억눌려 있었습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좀 늦었지만, 이제라도 본성을 찾아 책 읽기, 여행하기 등을 마음껏 하면서
인생의 ‘화양연화’를 누리고 있으니까요.
이런 이야기를 자서전에서 한다면 독자의 삶에 많은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ADHD’가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란 것도 알게 되어 고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