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섬 연홍도와 남도를 다녀와서
초등학교 동창부부 10명이 연흥도와 남도를 갔다.
거금도 서쪽 끝 신양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조금 떨어진 곳에 작은 섬 연홍도가 있다. 연홍도는 폐교를 활용하여 만든 연홍미술관과 마을 골목마다 예쁘게 그려진 담장벽화가 아름다운 섬이다. 섬과 바다가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휴식 공간이다.
인근 바다는 들량만 수역의 나들목으로 조류가 빠르고 수심이 깊어 갯바위 낚시를 즐기기에 좋은 곳이다. 대다수 가구가 어업과 손바닥만 한 밭을 병행한다. 이곳은 농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소를 이용해 밭을 경작하고 있다. 도착하여 처음 벽화에 박지성 축구선수의 공차는 그림이 있고 마을회관 앞 벽면 타일 벽화에 주민들의 사진과 김일 레슬링 선수의 얼굴과 그 시절 생활상이 그려졌다.
김일 레슬링 선수가 태어난 곳으로 챔피언이 되고 청와대에 초청되어 박정희 대통령이 소원을 물었을 때 전기가 필요하다고 하여 인근보다 일찍 설치되었다.
골목은 깨끗하게 단장 되어있다. 노란 봄꽃이 관광객을 맞이한다. 인구는 100여 명이며 주로 노인들이다.
해변 포토존이 설치된 곳에서 사진 촬영과 군데군데 벽화와 은빛 물고기(수상 조형물), 젊은 연인들은 언약 포토존에서 사진을 찍었다. 해안 전망대와 펜션이 있다. 연홍아 놀자(해변 조형물이) 눈길을 끈다.
연홍미술관은 폐교를 개조하여 교실 두 개 정도, 전시실에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회화 작품 150점이 교체 전시됐다.
마당에는 꽃밭과 쉼터가 조성되어 있고 해송 두 그루와 이순신 장군 동상, 학교 종탑이 있다. 이곳은 예술인들의 체류 창작 활동, 단체연수, 주민 생활복지시설로 활용된다. 친구들과 단체 사진과 부부 사진을 찍었다.
바닷바람이 옷깃을 스치고, 해안 둘레길을 걸을 때 갈매기들이 동료를 부르며, 노래하는 것 같다.
연홍도는 전라도‘가고 싶은 섬’으로 선정된 ‘예술의 섬’이란 주제로 섬 전체가 하나의 미술관이다.
노령산맥의 서남단 끝자락에 있는 유달산은 기암괴석으로 절경을 이루고 있다. 목포 시내와 다도해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목포의 명산이다.
새천년 시민의 종은 새천년을 기념하는 종각으로 노적봉 앞에 위치하고, 있다. 현판은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친필 저자 하였다. 노적봉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 이 군량미를 쌓아 놓아 큰 노적처럼 보이게 하여 왜군을 물리쳤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 해발 60m의 유달산 등구 좌측에 솟아 있는 큰 바위 봉우리다.
친구들과 일행은 아름다운 경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목포의 눈물 노래비는 1930년 가수 이난영이 불러 인기를 끌었던 노래 ‘목포의 눈물’이다. 1934년 조선일보사가 일제의 탄압으로 억눌려 있던 우리 만족의 고유한 정서를 북돋우기 위한 사업으로 향토 신민요 노래 가사를 공모하여 문일석의 가사가 당선됐다. 손목인이 작곡하여 출시되자 대 희트를 기록하여 오늘날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 부른다. 해상 케이블카에서 보는 바다와 유달산은 아름답다.
다산은 네 살 때 천자문을 배우고 열 살 때 자작 시집을 낼 만큼 총명하였다. 성호 이익의 저서를 접하고, 실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783년 진사과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게 되는데,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규장각 초계문신을 거쳐 동부승지, 병조참의, 우부승지 등의 벼슬을 지냈으며 배다리, 수원화성, 거증기, 설계 등 기술 관료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경기도 암행어사 시절에는 백성들의 고통을 보고 목민관 의 의무를 절실히 깨닫게 된다.
천주교 사건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유배 왔다. 강진에서 18년 유배 생활을 학문 연구와 저술 활동으로 승화시켜 500권의 방대한 저술을 이루게 된다. 해방 이후 고향으로 돌아간 다산은 자신의 저작을 총정리한 여유당집을 완성하고, 1836년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목민심서는 수령이 지켜야 할 지침을 밝히면서 관리들의 폭정을 비판한 저서다.
마과회통은 홍역 치료에 관한 의학서적으로 당시까지 홍역에 관한 국내외 책 오류를 비판하고, 새로운 치료법을 제시하였다.
아학편은 아동 한자 학습서이다. 천자문이 아동의 발달과정 등을 무시하고 있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상권에는 명사를 정리하고, 하권에는 개념이나, 동사, 형용사를 제시했다.
요조첩은 친구 윤사유가 재혼하자, 다산의 작은 아들 정학유와 제자들이 재혼을 축하하기 위해 지은 가사와 곡조를 보고 다산이 발문을 써서 이를 모은 자료다.
다산 간찰은 다산이 장흥에 유배 중이던 이관기에게 보낸 편지다. 내용은 다산이 의술에 밝다는 소문이 퍼져가면서 찾아오는 사람이 늘어나자, 자신의 거처가 병원이 된 것 같다며 증세를 자세히 써서 보내주면 처방을 보내겠다는 내용이다.
정조대왕 어필 첩은 추사의 아버지 김노경에게 정조가 보낸 6통의 편지를 역은 첩이다.
다산 사 경첩은 다산초당의 4경을 시로 묘사한 첩으로 첩의 뒤쪽에는 제자 윤종진을 격려한 순암호기와 해방 후 고향을 방문한 제자 윤종삼, 윤종진에게 쓴 글로 합철 되어있다.
다산초당은 정약용 선생의 18년 유배 기간 중 마지막 10여 년 동안 생활하며 제자들을 가르치고 500여 권의 책을 저술한 곳이다. 원래는 목조 초가였으나 1936년 노후로 인해 붕괴 되 1957년 강진 다산 유족보존회에서 목조 와가로 중건하였다. 다산 선생이 살았던 동암 제자들이 지냈던 서암을 비롯하여 돌에 새긴 정석, 차를 끓이기 위해 물을 뜨던 약천, 솔방울을 지펴 차를 끊이던, 다조, 직접 돌을 나르고, 만들었던 연지석 사산 등의 다산 사성이 남았다.
백련사는 만덕산에 위치해 만덕사로 불렸다. 839년 무연선사가 창건한 사찰로, 고려 시대에 팔 국사를 배출하고 신앙 결사 운동이자 불교 정화 운동인‘백련사, 의 본거지다. 주위에 오래된 동백나무가 숲을 이루어졌다. 다산 선생은 백련사에서 ‘주역’ 놓고 밤새 대화를 나눴고 혜정 선사는 큰 깨달음을 느꼈다고 한다. 다산 선생에게 혜장은 외로운 귀양살이를 잠시나마 있게 해준 귀한 벗이다. 친구 부부와 같이 부처님께 가족의 건강과 평안을 빌고 절을 하였다.
가우도는 전라남도의 ‘가고 싶은 섬’으로 선정된 강진의 8개 섬 가운데 유일한 유인도로 강진 대구면과 도암면을 잇는 출렁다리가 양쪽으로 연결되어 있다. 해안선을 따라 조성된 생태 탐방로‘함께해 길’은 산과 바다를 감상하며 걸을 수 있는 천혜의 트레킹 코스다.
친구와 바다와 산을 감상하며 걸으니 날아가는 것 같다. 걸으며 김영랑 시인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시를 감상하며 동상 옆에서 사진을 찍고, 시를 암송하니 학생시절 이 떠 오른다. 구수한 남도 사투리로 현대 서정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영랑(김윤식) 선생의 생가를 원형 그대로 보존한 곳으로 영랑의 시혼과 발자취를 엿볼 수 있다. 나오며 친구와 같이 부두에서 싱싱한 해삼과 멍게, 낙지를 소주와 같이 먹으니 맛이 일미다. 즐겁고 의미있는 여행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