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 장 궁서생은 진자앙을 찾아 산노인을 만나고 유소림은
매불염을 만나 진자앙을 놓치다.
1
맹방평은 호두태의 뜻에 따라 목숨을 잃은 바로 그 자리에 묻혔다.
“사부님은 평생 집을 가져 본 적이 없는 분이셨지……!”
호두태는 군중들이 사라져 이제는 조용해진 무덤 가에 주저앉아 멍한 눈으로 하늘을 보며 말했다.
“복건성 청하현에서 백여 년이나 포두 생활을 하시면서도 그 흔한 기와집 하나 못 갖고 늘상 포도아문 뒷방에서 사셨어. 한 달에 열 섬밖에 안 되는 봉록을 아껴 집 없는 아이들에게 나눠 주셨지. 그런 분이 사부님이셨는데……!”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그에게는 더 이상 흘릴 눈물이 남아 있지 않았다.
겨우 진정하고 다시 고개를 든 그의 두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생전에 늘 말씀하셨지. 언젠가 걸음을 멈추게 되면 그곳이 바로 무덤이라고. 여기 초총평은 사부님 마음에 꼭 드실 거야. 오늘을 기억하고, 사부님에 대해 들은 사람들은 오가다 술 한 잔이라도 바쳐 드릴 테니까……!”
진자앙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꼭 다시 오겠습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건방지게 들릴까 두려워 참고 있던 한마디를 토해 놓았다.
“영리충의 목을 들고 와서 제사를 지내 드리겠습니다. 맹 노대협이 하려 하신 일을 저라도 대신 꼭 이루겠습니다.”
호두태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자네가 나 대신 꼭 해주게. 이번 일은 자네가 사부님과 짝이 되어 여태까지 해온 일이니까 마무리도 자네가 하는 게 옳겠지. 난 우선 포두부터 돼야겠네.”
“정말 포두가 되실 생각이십니까?”
진자앙은 믿기지가 않았다. 지금은 재산을 다 잃었다지만 그래도 한때는 천하제일의 부를 소유했던 사람 아닌가.
밑천이 없어도 장사는 신용과 인맥만 있으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쪽이 호두태에게는 더 어울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호두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부님도 내겐 포두 일이 맞지 않는다고 말리셨지만 우선은 포두 일을 해볼 참이네. 나중엔 모르겠지만.”
그는 빙긋 웃었다.
“사실은 예전부터 한번 해보고 싶었어. 사부님이 멋있어서 그런 환상을 갖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무료하게 서 있던 진삼산이 불쑥 물었다.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냐? 호 장주도 너무 슬퍼하지만 말고 좀 쉬어야 할 테고……, 우리도 그렇다. 원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밟혀 죽을 뻔했네.”
그러고 보니 벌써 황혼이 지고, 다시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 하루 온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있었으니 진삼산이 조급해 할 만도 했다.
호두태가 일어나 먼지를 털었다.
“일단 성으로 돌아가지요. 저도 이번 어전시합은 구경하고 갈 참이었니 동행해도 괜찮다면 부탁드리겠습니다. 열흘 동안 열릴 모양이니 보고 돌아가도 광동성 포두 모집에는 늦지 않겠지요.”
“광동에서 하실 건가요?”
진청아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는 이 창백하지만 귀티가 흐르는 청년에게 어느새 호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사부님이 마지막으로 일을 하시던 곳이니까요. 게다가 거기 엔 진탁 진 대인도 계시고…… 사부님이 유일하게 칭찬한 관리지요.”
“그놈이…… 무슨!”
진삼산은 잠시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진자앙의 일로 그와 벌였던 한바탕 소동이 아직까지도 잊혀지지 않은 것이다.
그땐 간단한 일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고 타박을 주었지만 결국엔 잘된 셈이었다. 누가 진자앙이 이렇게 훌륭하게 제 몫을 해낼 줄 알았더란 말인가.
금강두……!
그리 듣기 좋은 별호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강호에 이름을 날렸고, 어느새 뇌공에게 뇌정추를 배워 구대흉신 중의 하나를 단숨에 때려 죽여 버렸다. 내공이 삼 갑자가 안 될 텐데 어떻게 뇌정추를 쓰는지는 진자앙 자신도 몰라서 대답을 못 하긴 했지만 아무러면 어떨 것인가. 꿩 잡는 게 매라고, 사내 녀석이 싸움만 잘 하면 그만 아닌가.
그는 자기도 모르게 히죽거리면서 고대랑에게 낮게 말했다.
“봐! 내가 아들놈 구박하지 말라고 했지! 크니까 제 몫을 다 해내잖아?”
“흥, 더 두고 봐야 알죠!”
고대랑은 콧방귀만 뀌고 있었다.
성에 도착하자 일행은 갈라질 수밖에 없었다. 각자 다른 객잔에 방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매불염도 거기에서 진자앙에게 작별을 고했다.
“또 보게 되겠지요.”
인사인지 바램인지, 아니면 예언인지 모호한 말 한마디를 남겨 놓고 그녀는 사인교의 주렴을 내렸고, 사인교는 곧 사람들 틈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 진자앙의 옆구리를 진청아가 찔렀다.
“너 저 여자를 좋아하는구나! 나이가 어떻게 되니? 용모는 어떻게 생겼고? 황사의 양녀라면 혹시 나이 많은 노처녀는 아니야?”
“몰라.”
진자앙은 고개만 흔들었다.
진청아는 그가 매불염의 얼굴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 기막혀 했다.
내일 있을 예선에서 보기로 약조하고 아버지 어머니 누나들이, 그들이 묵고 있는 객점으로 가고 난 후에도 진자앙은 그저 그녀가 사라진 방향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꼭 다시 만나게 되리라는 확신 비슷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매불염에게는 예언일지도 몰랐지만 그에게는 강렬한 바램이었다.
2
삼황야는 장안성 중심의 장락궁(長樂宮)에 살고 있었고 어전시합도 당연히 거기에서 열렸다.
평소에는 먼발치에서 구경만 할 뿐, 감히 그 궁문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던 사람들이 무리무리 모여서 궁 안으로 들어갔다.
그 중에는 진자앙과 호두태도 있었다.
시합 기간은 총 열흘, 엿새간의 예선, 다음엔 본선 나흘이었다.
예선은 장락궁 동쪽 연병장(練兵場)에 마련된 여러 개의 비무대 위에서 동시에 벌어지는데, 한 사람이 올라가 도전을 받아 연속으로 세 번 이기면 통과하는 방식이었다. 예로부터 이런 시합에서 많이 사용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나오는 사람이 한정 없이 많으면 안 되기 때문에 열여섯 명의 본선 진출자가 생길 때까지만 예선을 한다는 규칙도 따로 정해져 있었다.
본선시합의 방식도 간단해서 추첨을 통해 둘씩 짝지은 다음에 서로 싸워 이긴 사람이 올라가 다른 조의 승자와 겨루게 되어 있었다. 그렇게 하면 매 시합마다 반이 탈락되어 결국 네 번 싸워 이기면 최강자가 되는 셈이었다.
진자앙은 장락궁에 바글바글하게 모인 군중들을 보면서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
“이 많은 사람들 속에서 단 열여섯 명만이 본선에 참가할 수 있단 말인가요? 너무 적지 않습니까?”
호두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넨 무림에 고수가 얼마나 되리라고 생각하나? 이미 육대고수로 줄었지만 왕년의 십대고수를 포함해서 중원에 고수라고 불릴 만한 사람은 백여 명밖에 안 된단 말일세. 백 명이 넘으면 이미 고수라고 불릴 수도 없는 것이고, 위에서 백 명에 들어가면 그가 어떤 무공을 익혔건, 또 내공조예가 어떻게 되건 간에 이미 고수인 것이지. 숨은 고수라는 말도 있지만 그가 숨어 있는 동안 계속 숨은 고수일 뿐, 고수가 아니고, 그가 세상에 나오면 그냥 고수지 더 이상 숨은 고수가 아니니, 역시 백 명이라는 숫자에는 변동이 없네.”
그는 원래 변설(辯舌)을 좋아하는 모양으로, 얼핏 들어서는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도 못 알아들을 정도로 복잡한 논리로 자기 견해를 피력했다.
“강호에 나온 신진고수들, 사실 신진고수라는 말은 고수가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지 진짜 고수는 아니야. 이들 신진고수들이 진짜 고수가 되기 위해서는 소위 백대고수 중 하나를 꺾어 놓아야 비로소 고수가 되는 것이지. 그럼 그 백 명이 누군가?”
진자앙도 바로 그게 호두태가 피력한 논리의 문제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누가 백대고수를 정한단 말인가. 또 그게 어떻게 고정될 수 있단 말인가?
호두태는 거기에 대해서도 반박할 말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정해진 사람은 없지. 하지만 아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네. ‘저 사람은 열 명 중에는 못 들어도 백 명 중에는 분명히 들어’라고 사람들이 말하면 그는 백대고수 중 하나인 거야. 불확실하고 부정확한 것 같지만 소문은 의외로 정확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네.”
요컨대 그러한 백대고수 중에 열여섯 명이 여기 참석할 것 같냐는 것이었다.
“보통 비무대회가 한번 열리면 그 중에 정말 고수요, 손을 쓰는 것 한번만 보아도 혼자 십 년 수련한 것보다 배우는 것이 많을 그런 사람은 열 명이 채 안 되네. 나머지는 거의 허접쓰레기야.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배경밖에는 안 되는 것이지. 과연 누가 주인공인가를 가리기 위한 싸움은 정말 흔치 않다네.”
그 말이 옳건 어쨌건 진자앙으로서는 별반 반박할 말이 없었다. 대신 그는 다른 문제를 짚었다.
“그래도 이 많은 사람들이 모두 참가하면 열여섯 명만 뽑고 관둘 경우, 순서가 밀려서 본의 아니게 참가하지 못하는 진짜 고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따로 대책이 있겠지.”
과연 진자앙의 걱정에 대한 대책은 따로 있었다.
예선이 치러지는 시합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서 한편에는 비무대가 마련되어 도전자를 받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 도전자가 되기 위한 일종의 관문이 세워져 있었다.
순전히 호기심에 참가한 자격 미달자를 솎아 내기 위해 만들어진 세 개의 관문. 그 세 개의 관문을 통과해야 비무대에 올라갈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첫 번째 관문이 진자앙을 난감하게 만들었다.
첫 번째 관문은 오장의 거리를 두고 두 개의 선이 그어져 있는 것이었다.
규칙도 극히 단순했다. 한 선에서 다른 선까지 뛰어 넘어갈 수 있으면 예선은 통과였다. 한마디로 경신술을 시험하는 관문이었다.
진자앙은 한쪽에 서서 다른 쪽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오 장의 거리가 이렇게 까마득하게 멀어 보이는 것은 생전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가 가장 자신 없는 부분이 바로 이 경신술 분야가 아니었던가.
그래도 그는 심호흡을 하고 앞으로 나섰다. 잠시 거리를 잰 다음에 서너 걸음을 달려가서 뛰었는데 그대로 실패해 버렸다. 그는 단 삼 장도 제대로 날아가지 못했던 것이다.
구경꾼들 틈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진자앙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구경꾼들 보기가 창피해서가 아니었다. 언제 왔는지 그 구경꾼들 사이에는 그의 부모님과 누나들도 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가족들 보기가 그렇게 창피해서 얼굴을 물들인 것도 아니었다. 그가 정말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은 사부인 소삼중에 대해서였다. 십 년에 걸친 고련이 이 오 장의 거리를 두고 한 순간 물거품이 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이런 결과를 가지고 어떻게 살아 갈 수 있단 말인가.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기분으로 그는 터덜터덜 물러서다가 문득 고개를 들고 선 한쪽에 서 있는 시험관에게 물었다.
“한 번 더 해봐도 됩니까?”
시험관은 생쥐 수염을 한 문사였는데 탁자와 의자를 가져다 놓고 졸린 듯 앉아 있다가 그를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만족할 때까지 몇 번이건 뛰어 보게나!”
“뛰어오는 거리는 상관없겠지요? 그러니까……!”
한참 뒤에서 달려와서 그 힘으로 뛰어넘어도 되냐는 질문이었다.
생쥐 수염은 그제야 졸린 눈을 비비며 그를 힐끔 보고는 입가에 비웃음을 흘렸다.
“상관이야 없네만……, 그냥 돌아가는 것이 힘 빼지 않는 방법이겠군!”
다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진자앙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신중하게 거리를 재어서 뒤로 물러나더니 달릴 자세를 취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서서 옷자락을 끌어올리더니 팔다리에서 뭔가를 떼어 냈다. 여태 달고 다니던 납 덩어리였다.
사람들이 그를 비웃었다.
“보호대쯤 떼낸다고 무게가 가벼워지겠어?”
“아예 옷도 벗어 던지지 그래!”
언뜻 보기에는 전혀 무거워 보이지 않는 물건이었기에 그러는 것이었는데 그 말은, 그 구경꾼들 틈에 서 있는 진자앙의 가족에게는 송곳으로 찌르는 것처럼 얼굴이 뜨끔거리는 고통을 주었다.
“난 갈래요!”
돌아서는 고대랑을 진삼산이 잡았다. 진삼산의 얼굴도 썩은 간처럼 거무죽죽하게 변해 있었다. 극도의 울화를 참아 누르는 모습이었다.
“조금만 더 봅시다.”
평소 같으면 놀린 구경꾼을 잡아 죽이든지, 아니면 놀림당한 아들 자식을 때려 죽이든지 둘 중 하나를 했을 그였지만 그는 참고 있었다. 마음속에 그래도 아들에 대한 한 오라기의 기대를 가지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제자 악조린은 이미 가뿐하게 통과한 관문. 그 앞에서 허덕거리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진자앙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 것이다.
진자앙은 몸이 훨씬 가뿐해진 것을 느끼고 이번에는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백 근의 무게를 떼어 내고도 안 된다면 그 다음에는 시도할 방법도 없었다.
‘꼭……!’
그는 마음속으로 외치고 뛰기 시작했다. 선은 금방 눈앞으로 다가왔고, 그는 건너편으로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눈앞에 다시 땅이 보였다. 그는 그 땅위를 굴렀다.
“이번엔……?”
그는 시험관을 바라보았다. 주위는 조용했다. 시험관이 고개를 저었다.
“안됐네만 조금 모자라는군. 여긴 한 치라도 모자라면 통과가 안 된단 말일세!”
그는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극도의 실망감과 그 자신에 대한 모멸감이 홍수처럼 밀려왔다. 온몸의 힘이 한꺼번에 쭉 빠져 나가고 있었다.
그때 그의 귓전으로 가는 목소리가 들려 다.
“내 창랑보는 어디다 팔아먹고 안 쓰는 거야? 너 정말 바보냐?”
전음이었다.
진자앙은 누가 말을 했나 둘러보았다. 구경꾼들 틈에 낯익은 노인의 모습이 보였다. 궁서생 중자릉이었다.
진자앙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것을 써먹을 수나 있을 것인가. 오히려 망신만 더 사지 않을까?
그러나 그는 다시 일어나서 반대편 선으로 갔다. 사람들이 다시 손가락질하며 웃어대었다. 그래도 어떤 사람들은 응원도 보내었다.
“좋다! 포기하지 않아야 남자다!”
고대랑은 입술을 깨물었다. 눈물이 참을 수 없이 흘러나오고 손발이 부르르 떨렸다.
“이젠 진짜 가요.”
그녀는 돌아섰다. 진삼산이 그녀의 소매를 잡아 억지로 끌어당겼다.
“한 번, 한 번만 더 봅시다.”
그의 손도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광동 진가장의 수백 년 명예가 오늘 한 순간에 떨어지는 것을 그는 확인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확실히 봐둬야 한다고, 그래서 못난 아들에 대한 한 오라기의 기대마저 버려야 한다고 그는 다짐하고 있었다.
진자앙은 이번에는 선 바로 앞에 섰다. 별다른 자세도 취하지 않고 그는 그저 눈을 감고 있었다. 창랑보의 구결을 외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그가 눈을 떴을 때, 그의 몸은 번개처럼 사라져서 반대편 선을 훨씬 뛰어넘어, 둘러싼 군중들의 한가운데로 돌진하고 있었다.
“우왁`─`! 이놈이!”
“에구, 사람 죽이네!”
철탑 같은 덩치에 정통으로 얻어맞은 사람들이 죽어 가는 비명을 질렀지만 사람들은 환성을 질렀다. 그 환성 속에는 끝까지 지켜본 진삼산의 그것도 있었다.
이관문은 진자앙에게는 더없이 쉬운 것이었다.
청동으로 주조된 고대의 거대한 향로 하나가 관문의 전부인데, 그 향로를 집어 들고 열을 셀 때까지 땅에 떨어뜨리지 않으면 관문은 통과였다.
향로의 무게는 일천 근. 진자앙은 별로 힘도 들이지 않고 들어서 열을 셌다. 통과였다.
그렇게 통과하고 다음 관문으로 가면서 진자앙은 고개를 저었다.
“저야 경신술을 워낙 못 하니 그렇다고 쳐도 이런 식의 관문이면 적지 않은 사람이 통과할 것 같군요.”
“자넨 여기 몇 명쯤이나 참가한 것 같은가?”
호두태는 오히려 반문했다. 그리고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대답을 내놓았다.
“강호에 무공을 배운 사람이 모두 몇 명일까? 땅이 거칠고 인심은 험하니, 우리 백성들이 하나같이 호신을 위해, 혹은 무예를 좋아해서 배웠다고 쳐도, 병역을 가서 창 휘두르는 거나 조금 배웠거나 부엌칼이나 대충 휘두르는 어중이 떠중이를 빼면 일만을 안 넘을 걸세. 그래도 이만으로 잡아 보지. 그 이만 중에 몇이나 여기에 왔을까? 난 십분의 일만 잡아서 이천 정도라고 보네. 물론 이건 많이 과장해서 계산한 거야.”
진자앙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적어도 사오천은 넘는 군중들이 운집해 있었다.
“사오천은 넘어 보이는데요?”
“대부분 구경꾼이지. 자네, 관문 통과할 때 줄서서 기다렸나? 아니지. 그냥 세 번 연달아 했잖은가. 첫날이라 탐색을 하는 거라고 쳐도 이천 정도밖에 안 왔을 거야.”
“이천도 많지요.”
“그 이천 중에 일차 관문을 통과하는 사람이 몇일까? 오장을 뛰어넘는다는 건 결코 쉽지 않아. 보통 사람은 자네가 두 번째 했던 것처럼 죽을 힘을 다해 뛰어도 이 장은 어려워. 어쨌든 조금 후하게 쳐서 반은 통과한다고 하세.”
그는 그들이 방금 지나온 이관문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천 근을 든다는 건 어때? 쉬운 일인가? 소 한 마리를 잡으면 보통 고기 이백 근 정도가 나오지. 뼈와 내장을 합하면 아마 사백 근 정도가 될 거야. 황소 두 마리 반을 한 번에 드는 사람 본 적 있나? 나는 거기서도 반은 탈락할 거라고 보네. 그럼 오백 명 남았지? 이제 나머지 한 관문에서 다시 반, 혹은 그 이상이 탈락하겠지. 그럼 난 아무리 잘 봐줘도 백 명 이상 남는다고는 생각지 않아. 그 중에서 열여섯 명이 본선에 올라간다고 생각하면 결코 적은 수가 아니지.”
세 번째 관문은 비로소 사람을 상대로 하는 것이었다.
열 명의 무사들이 나란히 앉아 있는데, 이들은 장락궁의 호위무사들, 그 중에도 무공의 고수들을 골라 특별히 삼황야가 가까이 두는 친위무사들이었다. 이들 중 하나와 십 초를 겨루어지지 않고 견뎌야만 통과되는 방식이었다.
진자앙은 그들의 얼굴을 보다가 제일 앞의 사람을 가리켰다.
그 중 가장 젊었기 때문이었다. 젊어서 쉬울 것처럼 생각한 것이 아니라 나이 든 사람을 상대로 싸운다는 것이 어쩐지 미안해서 그런 것이었는데 일관문에서부터 그를 따라온 구경꾼들은 손가락질을 했다.
“쉽게 넘어가려고 고른 게 하필이면 친위대장이야? 재수도 없지, 참.”
생각해 준다고 한 말이었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자존심이 상할 수 있는 말이었고, 그 듣는 사람이 참가자의 부모일 경우에는 더욱 그랬다.
아까부터 참고 있던 진삼산의 울화가 드디어 폭발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벽력 같은 노성을 질렀다.
“어떤 놈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헛소리만 지껄여대고 있는 거냐? 이리 썩 나와!”
물론 아무도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진삼산은 화가 더욱 복받쳐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대체로 광동어로 표현되는 것은 욕설이고, 가끔 북경어도 들어갔는데 그중에 비발동자를 이긴 우리 아들’이라는 말이 들어 있었다. 그 말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럼 소협이 금강두 진자앙이란 분이시오?”
상대로 나온 청년무사, 정통 무가에서 태어나 황제 직속의 어림군(御臨軍)에서 제대로 무공을 배워 온 쌍창장(雙槍將) 양학림(楊學林)이 물었다.
진자앙은 포권해 인사하고 대답했다.
“광동 진가장 출신으로, 종화 금강당 오 대 당주인 진자앙이오. 금강두는 제 부끄러운 별명이 분명하오.”
양학림은 마주 포권하고는 말했다.
“쌍창장이라 불리는 양학림이오. 대명은 익히 들었소. 원래 상대가 못 되니 그냥 물러나는 것이 분수를 아는 행위겠지만 규칙에 따라 십 초를 공격하겠으니 이해해 주시길 바라오.”
“별말씀을……!”
그래서 강호에서는 이름이라고 했던가. 지금까지와는 달리 정중한 인사를 나누고서야 관문 시험이 시작되었다. 비웃음도 없고, ㄸ들썩함도 없이 모두들 긴장해서 최근 강호를 놀래킨 젊은 고수의 신위를 구경하는 것이다.
양학림의 창술은 기본적으로 양가창법에서 출발하는 것이었지만 한 가지 다른 것은 쌍창을 쓴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왼쪽 오른쪽의 수련을 동일하게 했다는 의미, 한 자루만 사용하는 경우와는 달리 그 변화가 신묘하고 허초(虛招)가 많아서 피하기 쉽지 않은 창술이었다.
그러나 진자앙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던 것이 어차피 피할 생각도 없었던 것이다. 그는 눈앞을 가리며 번뜩이는 창 그림자를 그저 보다가 간단하게 세 번이나 얻어맞았다.
양학림이 창을 거두고 물러섰다.
“제가 졌소이다. 과연 진 소협의 외공은 듣던 바대로군요.”
공격해도 다치질 않으니 더 싸울 방법이 없다는 뜻이었다.
함성이 일었다. 오늘의 다섯 번째 관문 통과자가 탄생한 것이다.
진자앙은 얼떨떨한 가운데 사람들에게 떠밀려 가서 예선 통과자의 방명록에 이름을 기입하고 다시 사람들에게 떠밀려 갔다.
그때 누군가가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돌아보니 중자릉이었다.
“갈 곳이 있느니……!”
그래서 그는 그 후 진삼산과 호두태가 아무리 찾아 다녀도 찾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어디로 간다고 말을 전할 틈도 없이 납치되듯 끌려가야 했던 것이다.
3
해는 서산으로 떨어지고, 달은 동해에서 솟아올랐다.
그 달밤에 진자앙은 중자릉과 함께 산길을 헤매 다니고 있었다. 그러다가 달마저 져버리니 도저히 더 움직일 수가 없어 그들은 모닥불을 피우고 앉아 쉬었다.
그때에야 중자릉은 그를 여기까지 데려온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올해 몇이라고?”
“스물하납니다.”
“그래……, 벌써 이십일 년이 흘렀군.”
중자릉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십일 년이라는 긴 세월을 그 한숨의 길이로 표현하려는 듯이.
“내가 네 인생에 어떻게 관여했는지는 알고 있느냐?”
진자앙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할아버님은 늘 말씀하셨지요. 궁서생 할아버님이 아니었으면 전 세상에 있지도 않았을 거라고……!”
중자릉은 진자앙의 말이 진심인지 보려는 듯 한참 바라보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숙이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다.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되었는지 잘 모르겠다만 다만 한 가지, 네게 미안한 일을 했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음……, 염정이라는 아이에게도.”
진자앙의 눈이 반짝였다.
“염정이요? 염정을 어떻게 아십니까? 그리고 염정에게는 왜 미안하십니까?”
“그야……! 너 그 일은 잘 모르고 있구나. 염정이랑 네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는 거. 근데 넌 염정을 어떻게 알지?”
두 사람은 서로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서로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두 사람이 동시에 감탄사를 외쳤다.
“그럼……?”
“그럼……!”
중자릉이 진자앙을 가리키며 놀라 외쳤다.
“그럼 네가 칠선관에서 염정이 도망갈 때 도와 줬다는 아이냐? 삼선녀에게서 얘기를 듣긴 했지만 난 그게 설마 넌 줄은 몰랐지.”
진자앙도 놀라 물었다.
“제가 태어난 날, 같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다는 여자아이가 염정이었습니까? 저희 사부님 따님인데요? 그리고 바뀌었다는 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뭐와 뭐가 바뀌어요? 아! 그럼……?”
진자앙의 머리가 지금처럼 빨리 돌아간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는 말을 하면서 동시에 깨달았다. 그의 출생과 체질에 대한, 사부 소삼중과 진가장 사이에 얽힌 묘한 꼬임들. 그리고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중자릉이 한 역할들을.
중자릉도 진자앙의 말을 들으면서 연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일이 꼬여도 그렇게 꼬일 수가 있나! 인연이 얽혀도 그렇게
까지 얽힐 수가 있나? 그것 참……!”
두 사람은 연신 말하며 동시에 듣고, 동시에 질문을 퍼부었다.
남들이 들었다면 두 사람이 싸운다고 생각했을 것이었다.
그리고 모든 일이 밝혀지자 두 사람은 다시 조용해졌다.
진자앙은 무릎 사이에 고개를 처박고 깊은 생각에 잠기고, 중자릉 역시 무릎 사이에 고개를 처박고 있었지만 진자앙과는 달리 깊은 죄책감에 잠겨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내 죄로다. 하아…… 알고 보니 내 죄가 적지 않구나! 이십일 년간 이 꼬인 매듭을 풀려고 이리저리 뛰었는데 단 하나도 푼 것이 없이 세월만 흘렀구나. 난 작은 실수에 보상은 크다고 생각했지만 죄는 크고 한 일은 없었어. 그 세월이 길다고 생각했더니 오히려 짧기만 했었구나.”
그렇게 한탄조로 감회를 토로하던 중자릉은 문득 진자앙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 미안해. 이 늙은이가 일을 제대로 못 해 네게 깊은 아픔을 안겨 주었다.”
진자앙이 펄쩍 뛰어 일어나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할아버님께는 죄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누구에게 진짜 잘못이 있는 것일까. 잘못이라고 말할 만한 것이 있기는 한 걸까?
“아무에게도 잘못은 없었습니다. 그저 운명이 그런 거죠.”
진자앙은 히죽 웃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덕분에 이만큼이나 컸을지도, 또 할아버님 말씀처럼 애초에 생명을 구한 것이 다 궁서생 할아버님 덕분이기도 하구요. 단지…… 염정만 찾을 수 있다면 모든 일은 제대로 돌아갈 텐데요.”
그는 아련한 눈빛이 되었다.
“염정이 진짜 진가장의 자손이면 좋겠습니다. 평생 부모님을 모르고 살았었는데 얼마나 좋아할까요? 저도……, 아니, 저희 사부님도 저승에서나마 외로워하진 않으시겠지요. 알든 모르든 간에 저랑 십 년 가까이나 같이 살았으니까요. 한 번도 아버님이라고 불러 본 적은 없지만.”
“그건 아직 모르는 얘기니까 함부로 단정 짓지 마라. 그리고 염정은 이미 찾아 놓은 것이나 진배없다.”
“정말이요?”
“물론! 지금은 어디에서 어떻게 사는지는 모르겠다만 그때 칠선관에서 도망간 후 그 애를 데려갔다는 고관이 누군지 알아 냈거든. 네 이번 일만 처리하면 바로 그를 찾아가 만나 볼 작정이었다.”
“그 고관이 누구……!”
묻다 말고 진자앙의 머리가 번개처럼 돌아갔다. 그는 불쑥 외쳤다.
“혹시 매요신 아닙니까?”
중자릉이 어리벙벙해서 그를 보았다.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 나도 얼마 전에 묘선고를 만나서야 겨우 알아 낸 건데?”
“그랬구나……! 그래서 그런 거였구나! 어쩐지 친숙한 느낌이더니!”
진자앙은 벌떡 일어나 뛰려고 했다. 중자릉이 얼른 그의 소매를 잡았다.
“어딜 가려는 게냐?”
“염정을 만나려고요.”
“그건 나중에도 괜찮다. 지금은 네 일이 급해!”
“제 무슨 일 말씀이십니까?”
“네가 어전시합에서 이기려면 꼭 해야 하는 일이다.”
중자릉은 말했다.
그는 원래 맺힌 구석이 없고, 매인 곳도 없는 사람이었다. 일처리가 트릿하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또 그리 큰 잘못을 저질러본 적도 없는 사람. 그런 그가 평생에 가슴에 사무친 것이 있다면 바로 진자앙과 염정의 일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그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이십여 년을 동분서주하면서 염정을 찾아 헤매었던 것이다. 여자아이를 안고 간 도사 하나를 찾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결국 찾아내었다.
그 일에 비하면 진자앙의 일은 누워 떡 먹기나 마찬가지로 쉬운 일이었다. 바로 체질을 고쳐 주는 문제였다.
처음엔 영약인 줄 알고 잘못 복용한 이화복령사의 독만 없애주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나중에는 이미 그것은 필요없어져 버렸고, 이젠 나름대로 길을 찾은 진자앙이 완성되도록 도와주기만 하면 될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를 이곳으로 데려온 것이다.
남악(南嶽) 화산(華山).
그 무수한 봉우리 중에 하나를 찾아 산노인(山老人)을 만나기 위해.
“그를 왜 만나야 합니까?”
“그가 반선이다! 네 금강불괴를 완성시켜 줄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하나뿐이지.”
진자앙은 어이가 없어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겁니까?”
정확한 나이야 알 수 없지만 금강당의 초대 조사인 대력금강 철우를 기준해 생각한다면 대충 이백 살은 넘고 삼백 살은 안 될 정도의 나이일 것이다.
중자릉은 그 비현실적인 일이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화산의 어느 봉우리에 신선이 산다는 얘기는 고래로부터 무수히 많이 전해져 왔다. 하지만 난 이 산노인의 얘기만큼 흥미로운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중자릉은 원래 도가의 불로장생술 같은 것은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산노인을 보고는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내공의 덕이겠지!”
내공을 익히는 데에는 어떤 방법이 있는가.
제대로 된 내공심법을 배워, 주야로 운기하는 것이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다. 이 방법을 따라 고수가 된 사람이 당대에는 진자룡이 있다. 영약을 먹어 내공을 끌어올리는 방법이 또 있다. 원굉도가 그 예였다.
사도에 가까운 일이기는 하지만 채음보양술, 혹은 흡정술을 사용해 내공을 무한대로 끌어올리는 경우도 있다. 영리충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것 말고는 없을까? 아니, 있다. 산노인이 그 나머지 한 방법의 유일한 실천자이자, 성공자다.”
이른바 천지의 정기를 수렴하여 몸에 쌓는다는 것이었다. 도가에는 아픈 사람이 건강한 나무를 안고 있으면 그 생명력이 전해져서 병이 낫고, 대신 나무가 시들해진다는 얘기가 전해 온다. 나무나 풀, 심지어 들과 하늘에서도 기를 받아 올 수 있다는 것이다.
유가에도 그런 것이 아주 없지는 않아서 아침이 오기 직전인 새벽녘, 밤의 기운이 극성이 될 때 조용히 좌정을 하면 소위 야기(夜氣)를 몸에 쌓을 수 있다고 한다. 맹자가 말한 바 호연지기(浩然之氣)도 단지 도덕적인 가르침만이 아니라 실제의 기를 몸에 쌓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산노인은 그것을 실천에 옮긴 사람이었다.
어느 해 약초를 채집하러 화산에 오른 사람이 한 골짜기에서 이상한 것을 보았다. 벼랑에 한 사람이 반쯤 박혀 있는데 나무뿌리가 그 몸에 뿌리를 박고 있으며, 하반신은 흙과 동화된 것처럼 보이더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벼랑에 새겨진 불상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호흡을 하고 있더라는 것.
약초꾼이 귀신을 만난 줄 알고 비명을 지르며 마을로 도망간 후 그 이야기는 전설이 되어 화산 아랫마을에 전해졌다. 이와 똑 같은 것을 목격한 사람이 그 후 백여 년 동안 열서너 차례나 있었으며 그때마다 그 벼랑 속의 사람은 살아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예전에 이곳을 지나가다가 그 소문을 들었지. 알다시피 나는 호기심이 유달리 왕성해서 궁금한 것이 있으면 그냥 넘어갈 수가 없는 사람 아니냐. 당장 산으로 올라가 봤지. 전설은 부정확하고 산에 골짜기는 많으니 열흘을 넘게 찾아 헤매었지만 비슷한 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밤이 오고 그는 길을 잃어버렸다. 화산의 최고봉은 연화봉(蓮花峰), 다섯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그 자체가 산과 다름없는 곳으로 거기 화산파가 자리 잡고 있다. 화산 어디에서든 그 다섯 개의 특징적인 봉우리만 찾으면 자기 위치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연화봉이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아늑한 골짜기 하나를 찾아 들어가 거기서 쉬기로 했다. 그러다가 그를 보았다. 산노인이었다.
“나는 그때 내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전설은 사실이었고, 더구나 그는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바로 반선이었던 것이지.”
반선을 그는 진자룡이나 소삼중과는 다른 경로를 통해 알고 있었다. 바로 그의 사조뻘인 유림의 거두 유장거사(儒長居士) 손이원(孫怡垣)의 오랜 친구 진양(眞陽) 도인(道人)이 바로 반선으로, 그도 어릴 적에 한두 번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전진파의 마지막 장로 진양 도인.
그는 한 가닥 가늘게나마 전해져 오던 전진파의 명맥을 마지막으로 이은 사람이라고 알려졌었다. 그 말은 중원의 정통 내가심법을 마지막까지 지키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더 이상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이 사람이야말로 우화등선(羽化登仙)했을 것이라고 했었다. 그리고 그를 마지막으로 전진교의 정통심법이 사라지게 된 것을 아쉬워했었다.
“그런데 그가 거기 있을 줄은 난 정말 꿈에도 몰랐었다. 아마도 뭔가 사이한 신공을 연마하고 있지 않을까 의심하기도 했지. 그러나 네 할아버지를 만나보고, 거기서 네 이야기와 금강불괴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니 모든 의문이 풀렸다. 그 또한 자기 방식으로 금강불괴에 도전하고 있었던 것이야.”
이야기는 그렇게 끝이 났고 진자앙은 갈등했다. 장안에서 화산 은 그리 먼 곳이 아니지만 오는 데 하루나 걸렸다. 다시 돌아가는 데에도 아마 그 정도는 걸릴 것이다.
그는 엿새, 아니 이미 하루는 지났으니 닷새 안에 장안에 돌아가 예선을 치러야 하는 것이다.
중자릉은 그것도 문제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가 어떤 해답을 가지고 있을지 난 모른다. 사실 숨은 쉬고 있지만 거의 죽은 것처럼 말도 없고, 반응도 없었지. 하지만 분명 죽은 것은 아니었어. 흔들어 보려고 건드렸다가 오히려 내가 죽 뻔했지. 그 엄청난 반탄력이라니……!”
그는 혀를 내둘렀다.
진자앙이 물었다.
“그런 상태라면 가봤자 별 볼일도 없지 않습니까?”
“나는 그에게 책의 나머지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인연에 따라서는 얻는 것이 다를 수도 있고. 그는 내가 예전에 사부님 아래 있을 때부터 날 별로 좋아하지 않았거든. 내가 보기 싫어 눈을 뜨지 않았는지도 모르지.”
그는 혼자 하하 웃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보다 그곳을 어떻게 찾느냐가 더 문제로구나.”
“연화봉 아닐까요?”
“뭐라고?”
“화산에서 연화봉을 볼 수 없는 곳은 연화봉 안에 있을 때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중자릉은 입을 딱 벌리고 한참을 있더니 갑자기 진자앙의 손을 잡고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과연 골짜기는 거기 있었다.
연화봉 북쪽 사람들이 흔히 다니는 길에서 얼마 벗어나지 않은 작은 골짜기였다.
“평범한 것 속에 담긴 진리를 보지 못하는 것이 사람이라더 니……, 정말 등잔 밑이 어둡구나.”
골짜기를 찾았으니 산노인, 반선을 찾는 것은 이미 일도 아니었다. 어슴푸레한 달빛 아래에서도 중자릉은 금세 산노인을 찾아 그 앞에 섰다.
들은 대로 산노인은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등은 돌 속에 파묻혀 있고, 아래는 흙과 풀 속에 묻혀 있는데 단순히 묻힌 게 아니라 마치 돌과 흙, 풀과 한 몸이 된 것 같았다. 게다가 바위틈에서 나온 나무뿌리는 산노인의 몸에도 파고 들어가 반대편에 그 끝을 보이기도 했다.
중자릉이 문득 말했다.
“절이라도 해봐.”
진자앙은 시킨 대로 했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대력금강 철우의 사대손이며 선인(仙人)께 오칠비결을 가르침받은 진자룡의 손자 진자앙이 선인을 뵈러 왔습니다.”
역시 아무 반응도 없었다.
“흠…… 역시 너로도 안 되는구나. 전에도 내가 별짓을 다 해봤지만 눈도 꿈쩍 않았거든. 나중에 건드렸다가 죽을 뻔한 뒤에는 포기를 했지만…… 아, 안 돼!”
뒤에 서 있던 중자릉이 머리를 긁적이며 난감해 하고 있을 때 진자앙은 산노인의 옆구리를 건드리고 있었다. 거기로 파고든 나무뿌리 하나가 아무래도 눈에 거슬렸던 것이다.
중자릉이 뒤늦게야 보고 소리를 쳤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진자앙의 손은 나무뿌리 어림의 옆구리까지 건드리고 있었고, 다음 순간 갑자기 번개를 맞은 것처럼 몸을 떨고 있었다.
중자릉이 급히 그를 잡아 떼려다가 입으로 피를 토하며 뒤로 날려갔다. 진자앙의 어깨를 잡는 순간, 아니, 거기 옷자락에 살짝 닿기만 했는데도 엄청난 충격이 그의 손끝을 마비시키고 가슴을 때렸던 것이다.
겨우 정신을 차린 중자릉은 다시 진자앙의 옆으로 다가갔다.
이번에는 감히 건드리지를 못하고 자세히 들여다보는데 진자앙은 고통스러운 듯 눈을 부릅뜨고 입술을 꽉 깨물고 있지만 동공이 열려 있어 죽은 것과 진배없는 모습이었다.
중자릉은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거 병 고치려고 데려왔다가 죽이고 마는구나! 네가 죽으면 난 자룡을 어떻게 보느냐. 나도 여기서 같이 죽는 수밖에 없지 않으냐!”
그러더니 그는 이번엔 산노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하기 시작했다.
“이것 보세요, 진양 도인 어른. 예전에 제가 도인 어른에게 말코도사라고 놀린 것은 벌써 백여 년이나 전의 일이고, 일전에 이미 사과를 했잖습니까. 아까 그 아이가 말한 것처럼 그 아이는 도인 어른과도 아주 관계가 없지 않은 두 사람의 마지막 씨앗인데 이대로 죽이시면 어쩝니까? 신선이 되더라도 혹시 황천에서 오다가다 그들을 만나기라도 하면 그 원망을 어쩌실 것입니까?”
그때 그의 머릿속으로 천둥 같은 음성이 들려왔다.
“버르장머리 없는 것이 선인이 참수하는 데 와서 평정(平靜)을 깨더니 별 시답지 않은 소리를 다 하는구나! 죽이긴 누가 누굴 죽인단 말이냐! 이 아이는 선근(仙根)이 있어 약간의 도움을 주려 니와 인연은 이것으로 끝이니 어서 데리고 썩 꺼져라! 나는 이제정말 동천(洞天)으로 가노니 다시는 여기 오지 말고, 이제 나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말아라!”
산노인이 눈을 번쩍 떴다. 그 눈에서 번갯불 같은 안광이 폭사되어 한 순간 골짜기가 밝아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중자릉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진자앙은 꼿꼿이 선 채 정신을 잃고 있었고, 그 손에는 낡은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산노인은 이제 진짜 시체가 되어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입을 다물어라! 죽어도 입을 열면 안 된다. 수행하는 사람은 입을 열면 신기(神氣)가 흩어지고, 혀를 놀리면 재앙이 생기는 법이다.”
불길과도 같고 번개와도 같은 강렬한 기운이 손끝을 통해 단전으로 밀려들고 다시 삼관(三關)을 지나고 명당(明堂)을 돌아 일곱 구멍을 밀어 열었다.
삼관은 뇌의 뒤쪽에 있는 옥침관(玉枕關), 등에 있는 녹로관(關), 신장과 심장 새에 있는 미려관(尾閭關)을 일컫는데, 달리 생사현관이라고도 하는 곳이다. 진자앙은 한 순간에 생사현관을 뚫고 내공을 몇 단계 증진시킨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손끝으로는 끊임없이 뇌전과 같은 기운이 밀려들고, 머릿속에는 우레와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위로는 니환궁(泥垣宮:정수리)에 이르고, 아래로는 용천혈(涌泉穴:발바닥)에 이르고, 신수(腎水)는 두루 돌아 화지(貨池:혀 아래에 들어가고, 간화(肝火)는 심장으로 들어간다. 단전(丹田)은 보를 얻어 더워지더라. 영아(孀兒:납)와 차녀( 女:수은)를 음양으로 배합하니, 납[鉛]과 수은[汞]이 합쳐져 일월(日月)로 나뉘고, 이용(離龍:팔괘의 하나, 불)과 감호(坎虎:팔괘의 하나, 물)를 조합 했더니, 영구(靈龜)는 금오(金烏)의 피를 빨더라. 삼화(三花:精, 氣, 神)는 정수리에 모여 뿌리 내리고, 오기(五氣:五行의 기운)는 원(元)으로 모이더라……”
영아와 차녀란 납과 수은을 도가(道家)에서 일컫는 용어. 납과 수은은 역시 도가에서 연단(煉丹)의 재료로 쓰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내공수련에 적용되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혹은 마음을 뜨겁게 하라는 뜻이 되었다.
그는 지금 전진도교의 심오한 내공심법을 듣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리 어렵지 않은 것은 이미 그가 알고 있는 오칠비결과 그 궤를 같이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또한 가장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원리로서 인체와 우주를 통괄하는 기의 원리를 설명한 것이기 때문에 근본을 파고 들면 모든 내공심법들과 같은 것이기도 했다.
단지 해석하는 방법에 있어서 불가의 것은 선(禪)과 오(悟)와
같은 불가의 용어를 사용하고, 도가의 그것은 영아와 차녀 같은 도가적인 용어를 사용하며, 유가의 것은 유가의 성(性)과 리(理)를 사용하여 해석하는 것만이 다를 뿐이었다.
그러므로 그 내공의 성격이 같다 다르다 하는 것은 강조하는 분야가 다름에서 비롯되는 것이요, 이해하기 쉽고 어려움은 이미 알고 있는 것과 해석하는 방법이 같고 다름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온몸의 구석구석을 찬물로 씻어 내리는 것과 같은 기의 폭우를 맞으면서 진자앙은 다른 한편으로는 발이 땅에서 떠 구름 위에 노니는 듯한 깨달음과 탈각(脫角)의 황홀경 속에 잠겨 있었다.
그의 눈앞으로 한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머리에는 두 개의 아계( :도사들이 하는 상투)를 짓고 몸에는 자투리 천을 이어 댄 백납의(百納衣)를 입고 손으로 어고간(魚鼓簡:한쪽을 고기의 껍질로 싼 두 개의 죽통)을 치고 입으로는 도정사(道情詞:도사가 부르는 악가)를 부르면서 그의 앞에 꿈결처럼 다가오더니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어떻게 보면 계피학발의 노인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붉은 얼굴의 청년도사 같기도 하며, 보고 있는 사이에 토실토실한 뺨의 어린 도동같이 보이기도 했다. 한 몸에 그가 살아 온 여러 시간의 흔적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어고간을 가볍게 한번 두들기더니 그에게 말했다. 예의 머릿속에서 울리는 음성이었다.
“당년에 나와 네 오대조, 그리고 고불화상(古佛和尙)은 무의 궁극이 무엇이냐는 문제를 놓고 칠 주야 간 논의를 했더니라. 결국 무의 궁극은 완전한 인간, 즉 금강불괴라는 데까지는 일치했는데 그 금강불괴가 어떤 것인가를 두고 다시 논쟁을 했었더니라. 네 오대조는 육신의 완벽함을, 나는 천지의 기와 하나되어 진정한 삼재(三才)의 하나로서의 인(人)이 되는 것을, 그리고 고불 화상은 깨어지지 않는 지고한 정신의 경지, 즉 부처가 되는 것을 주장했었으니, 그 생각들을 각자 저술하여 한 권의 책으로 묶은 것이 <금강불괴요결>이었다. 겉으로는 한 가지 결론에 합의한 것처럼 서술되어 있지만 우린 모두 각자의 생각이 옳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각자가 주장한 바대로 성취하여 다시 만나기로 결정하고 헤어졌더니라.”
그리고 나서 그는 이 골짜기로 와서 백수십 년을 참수했다는 것이었다. 모두가 꿈꾸었지만 아직 아무도 성취하지 못한 천지교류(天地交流)의 내공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처음에는 잘 되어 가는 듯했더니라. 십 년이 지나고 이십 년이 지나면서 나는 내공의 극을 달리게 되었으며 그 극 뒤에 또 다른 극이 있음을 보게 되었음이니…… 내 앞에서 인간의 한계와 모든 장벽들이 허물어지고 부스러졌으며 나는 뛰고 또 뛰어 장벽에서 또 다른 장벽으로 넘어가고 있었더니라. 그런데 어느 순간, 나는 인간이 아니게 되었음을 알았더니라. 끝없이 밀려드는 기의 홍수 앞에 나는 그저 한정 없이 받아들이고 몸 안에 쌓아 놓는 일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육신에 얽매이게 되었음을……!”
그렇게 백 년이 지나고 또 다른 백 년이 시작되었다. 그는 진정한 인간이 되고자 했지만 오히려 나무나 돌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거기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었다.
“그때 네가 나타난 것이니라. 나와 같은 성질의 내공을 익힌, 그러면서도 채워져 있지 않고 비어 있는 상태의 그릇을 가진 네가! 나는 네 그릇에 내 기운을 옮겨 담고서야 비로소 자유로워졌으니……! 비록 바다에서 한 그릇 물을 푼 것과도 같으나 그 한 그릇의 여유가 없어 여태 나무도 돌도 아닌 상태로 있었음이여. 나는 이제 진정한 자유를 찾았으니 동천으로 돌아가려니와 너는 네 오대조와 고불화상을 찾아 지난날 우리가 하려 했던 부질없는 짓에서 나는 빠져 나갔음을 알려 주려무나.”
도인은 천천히 뒤로 물러서며 흐릿해졌다. 그가 완전히 눈앞에서 사라졌을 때 진자앙의 머릿속에는 그가 남긴 마지막 한마디 도정사만 남아 울리고 있었다.
“가장 많은 것은 모자라 보이며 온전히 둥근 것은 이지러져 보이나니……!”
진자앙이 다시 현실로 돌아왔을 때 제일 먼저 본 것은 중자릉의 근심스런 얼굴, 그 다음에는 하늘에 뜬 달이었다.
“어이구, 겨우 정신을 차렸구나. 괜찮으냐?”
진자앙은 일어나 앉아 팔을 흔들어 보였다.
“괜찮습니다. 오히려 전보다 몸이 가뿐한 것 같군요.”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벼랑에는 여전히 산노인이 앉아 있었다. 그러나 이미 싸늘한 시체, 정(精)과 령(靈)을 잃은 껍데기에 불과했다.
그는 일어나 조심스럽게 절했다. 중자릉이 그에게 책 한 권을 넘겨주었다. <금강불괴요결>의 두 번째 부분, 연기편(練氣編)이었다.
진자앙은 그것을 펴보았다. 내용은 이미 짐작했던 대로 오칠비결이었다. 그 내용을 세밀하게 나누어 서른여섯 단계로 기술해 놓은 것이 금강삼십칠로(金剛三十七路)에서 칠십이로(七十二路)까지의 내용이었던 것이다.
그는 책을 품속에 간직하고 중자릉에게 말했다.
“이제 돌아가야겠습니다. 이제 새벽이니 저녁때쯤에는 장안에 도착할 수 있겠지요. 그럼 하루 쉬고 그 다음날 예선을 치르면 되겠지요.”
중자릉이 잠시 조용히 앉아만 있다가 긴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 설레설레 흔들었다.
“어전시합은 포기해라. 이미 늦었다.”
“예?”
중자릉은 더할 수 없이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늘이 우리가 장안을 출발한 지 육 일째 되는 새벽이란 말이다. 넌 오 일 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어!”
“예?”
진자앙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중자릉은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그냥 옮겨 갈까도 생각했지만 네 몸에서 이상한 기운이 느껴져서 손도 댈 수가 없었다. 미안하구나. 일이 이렇게 되다니.
나 혼자라면 반나절 만에 가겠지만 널 데리고는 아무리 달려도 밤게나 도착할 텐데……!”
그때는 물론 예선이 끝난 상태일 것이었다.
“강호에 이름을 날리는 일이 꼭 비무대회 우승밖에 없는 것은 아니다. 능력이 있으면 이름은 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는 것이지. 이번 비무대회는 너와 인연이 없는 것 같으니 포기하려무나.”
진자앙은 고개를 저었다.
“꼭 이름을 날리려고 어전시합에 참가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제 자신을 시험해 보고픈 마음이었고, 황사 매요신과도 관련이 있으니……!”
그의 머리에 순간적으로 번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비무대회는 삼황야가 개최했지만 그 배후에는 황사 매요신이 있다. 황사 매요신은 최근 무림에 깔린 음모의 배후라는 의혹이 농후하니 어쩌면 이번 비무대회에도 무언가 음모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되든 안 되든 한번 해보기는 해야겠습니다. 장안으로 가지요.”
말을 마치자마자 그의 몸이 번개처럼 사라졌다가 벼랑 한쪽에
부딪친 채로 나타났다.
중자릉이 그 옆에 섰다.
“너 무얼 생각하고 있는 거냐? 설마……?”
그 설마가 바로 정확한 답이었다. 진자앙은 어설픈 창랑보로 장안까지 뛰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진자앙은 다시 사라졌다가 나타났고, 그때마다 어딘가에 부딪친 상태였다. 그의 외공이 당년의 대력금강 철우에 가까울 정도로 발전되어 있지 않았다면 벌써 죽었을지도 몰랐다.
중자릉은 처음에는 말렸지만 결심이 이미 확고하니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는 말리는 대신 넘쳐나는 공력을 조절해서 제대로 창랑보를 사용하는 방법을 전수하려고 했다.
달리고, 부딪치고, 배워 가면서 진자앙은 장안으로 가고 있었다.
4
“겁나게 이쁘군!”
유소림은 한참이나 입을 벌리고 있어야 했다. 푸른 공단옷에 연분홍 겉옷을 걸친 그 여인이 보이기 시작한 때부터 그를 지나쳐서 사람들 속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사람 치료하다 말고 뭐 하는 거요?”
“응?”
그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그의 발치에 누운 사람을 보았다. 이름이 태악검객(泰嶽劍客) 단무흔(端無痕)이라고 했던 그 사내는 멋있는 이름만큼 무공이 세지는 못해서 방금 비무대에서 두들겨 맞고 떨어진 참이었다. 그리고 장락궁에 임시 고용된 떠돌이 의원인 그의 손에 그 치료가 맡겨진 것인데……!
유소림은 그에게 화타고 하나를 던져 주고는 일어섰다.
“그냥 조금 찢어지고 다친 것이니 내가 손댈 것도 없군! 찢어진 데는 이걸 바르고 멍든 데는 찬물로 찜질이나 하시오.”
그는 여인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단무흔이 어이없다는 듯 보다가 소리쳐 물었다.
“고작 그게 다요?”
“밥 잘 먹으면 나을 거요!”
유소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렇게 한마디 외치고는 사람들 틈으로 파고들었다.
어전시합의 예선 마지막 날 오후쯤 되면 그 동안 용기가 없어 나서길 망설였던 사람도 나서기 마련이고, 마지막의 화려한 등장을 위해 벼렀던 사람도 박수를 받으며 등장하기 마련이다. 구경꾼들은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래서 장락궁은 오늘따라 유난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유소림은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금방 푸른 공단옷의 여인을 찾을 수가 있었다. 사람들 틈에 섞여 있어도 그의 날카로운 눈은 놓치지 않을 것인데 하물며 그녀가 지체 높은 사람들을 위해 특별히 마련한 단상에 앉아 있음에야.
푸른 공단옷의 여인, 매불염은 평소에 항상 쓰고 다니던 면사를 벗고 단상 위에 홀로 앉아 있었다. 원래는 이번 시합의 공증인으로 초대된 명숙들과 삼황야가 앉을 자리로 마련된 단상. 아직 예선전에 불과해 아무도 나오지 않은 그 자리에 그녀 혼자 앉아 있는 것이다.
유소림은 그녀의 미모를 넋을 잃고 보면서도 어딘지 이상하다는 느낌을 가졌다. 이것은 마치 모든 사람에게 그녀를 보이기 위해 거기 앉아 있는 것 같지 않은가. 그 중에도 누군가에게 그녀 스스로를 보여 주기 위해.
시간은 흐르고 멀리 서쪽 하늘이 불그스레하게 물들기 시작했다. 예선은 해가 중천에 가기 전인 사시(巳時)에 시작해서 해가 지기 직전인 신시(申時) 말까지 행해진다. 이제 시간은 신시 중엽을 넘어 말엽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곧 나흘간에 걸쳐 벌어진 예선전이 모두 끝나고 열여섯 명만이 남아 본선을 치르게 되는 것이다.
유소림은 뭔가 부족한 것 같은 느낌에 자꾸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잊은 것 같은데……?”
그때 징이 울리고 예선전 첫 관문의 시험관인 생쥐 수염이 비무대 위로 올라갔다.
“에헴, 본인은 서삼락(徐三樂)이라 하고, 이번 예선전의 시험관을 맡고 있는 필부외다. 이제 예선전 시한이 일각여 가량밖에 남지 않았기에 이렇게 직접 나서게 되었소. 혹시 시간이 없어 여기 나서지 않았던 분들이나, 여태 나온 분들과 다 친분이 있어 나서지 않았던 분들이 있으면 이 일각 내에 나와 주시기 바라오. 간이 지나면 기회도 같이 없어지고, 그때 가서 후회해 봤자 만시지탄(晩時之嘆)에 불과하단 말씀이오.”
사람들이 혹은 웃음을 터뜨리고 혹은 다른 사람들을 보곤 했다. 그들 중에 누가 나설 사람이 없나 해서였다.
누군가가 물었다.
“아직 열여섯 명이 차지 않았단 말이오?”
서삼락이 어깨를 으쓱했다.
“거 이상한 일이지요. 오신 분은 많은데 인원은 안 차니 다들 겸양지덕이 많으신 것인지, 아니면 용기가 없어서 그런지 모르겠소이다. 제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시면 나오시오들.”
“사람이 부족하면 그냥 나오는 사람은 다 시켜 주면 어떻소? 선착순으로 말이오. 나도 다른 것에는 자신이 없어도 줄 서기는 꽤 고수급이라서 말이오.”
사람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서삼락이 짐짓 인상을 쓰며 손을 저었다.
“미안하지만 규칙은 끝까지 적용할 것이외다. 세 사람을 이기 어려워 나오지 않는 사람들의 실력이라면 삼황야 전하의 눈만 더럽히지 않겠소? 자 이제 시간이 대충 된 것 같으니 징을 치겠소. 세 번 칠 때까지 아무도 나오지 않으면 이것으로 예선전을 마치게 될 것이오. 하나!”
그의 구령에 따라 징이 울렸다. 그 징 소리가 유소림의 정신을 일깨웠다.
진자앙!
진자앙이 참석하지 않은 것이다.
누구의 말을 들어도, 그리고 그가 그 동안 본 것으로도 진자앙은 관문만 통과하고 예선엔 나오지 않았다.
지이이이이잉`─`!
두 번째 징 소리가 울렸다. 이제 한 번만 더 울리면 예선은 끝나고 진자앙은 참가가 불가능해진다.
그는 힐끗 단상을 보았다. 푸른 공단옷의 여인이 일어나서 두 손을 마주잡고 있었다. 먼발치로도 그녀가 극도로 불안해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도 설마 진 사제를 기다리는 것은 아닐 테지……!’
이제 곧 세 번째 징이 울릴 시간. 그때 굉음이 울렸다. 그러나 징 소리는 아니었다.
콰앙`─`!
유소림은 눈을 비볐다.
“이럴 수가……!”
그가 보는 앞에서 비무대 한쪽이 무너지고 있었다. 무언가가 번개처럼 날아와서 비무대를 부숴 버린 것이다.
나무 조각이 날고 먼지가 피어오르는 가운데 한 사내가 그 파괴의 현장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철탑처럼 큰 몸집의 사내, 진자앙이었다.
서삼락이 저만치 나동그라져 있다가 그를 보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또 자넨가?”
진자앙은 미안한 듯 머리를 긁으며 물었다.
“늦진 않았겠지요? 저도 예선에 참가하고 싶어서요.”
서삼락이 못마땅한 듯 사방을 둘러보며 외쳤다.
“이 사람이 마지막 도전자요. 이 사람을 시험해 볼 사람 없소?”
진자앙도 포권하며 주위를 향해 외쳤다.
“광동 진가장 출신, 금강당 오 대 당주 진자앙입니다. 가르침 바랍니다.”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진자앙이 맹방평을 따라다니며 벌인 활약과 관문 통과 때 벌인 사건은 중인들의 이야깃거리로 널리 돌아다녔었다. 이제 여기 참가한 사람이나 구경 온 사람 중에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고 해야 좋았다.
서삼락이 다시 외쳤다.
“나오는 사람 없소? 없으면 이 사람은 그냥 통과요. 나중에 불공평 하다 하지 말고 지금 나와서 실력을 발휘하기 바라오!”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징이 세 번 울리고, 진자앙은 예선을 통과했다.
유소림은 자기도 모르게 다시 단상을 보았다. 매불염은 단상에 이미 없었다.
그는 아쉬운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다가 고개를 돌렸다. 진자앙도 이미 없었다.
“이런 젠장!”
그는 사방을 둘러보며 진자앙을 찾았지만 어디에도 그 철탑 같은 체구는 보이지 않았다.
“작지도 않은 녀석이 빨리도 사라지네!”
투덜거렸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자리로 돌아왔다.
장락궁의 서리가 그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그를 고용한 자였다.
“아니, 바빠 죽겠는데 어딜 돌아다니는 거야! 여기 기다리는 환자들 안 보여? 잘리고 싶어?”
“자른다니 잘됐군. 돈이나 주쇼!”
하루, 그것도 반나절밖에 안 했기 때문에 보수는 보잘것없었다.
유소림은 그래도 자기가 남들 하루 종일 보는 것보다 더 많은 환자를 상대했으며 치료한 사람들은 다 쌩쌩하게 걸어 나갔다고 우겨 돈을 더 받아 내었다.
“다시는 오지 마!”
그는 서리의 욕설을 뒤로하고 장락궁을 나와 상춘대로(常春大路)를 걸어 내려갔다.
장안성 남서쪽은 북쪽과 동쪽에 비해 초라한 집이 많고, 그래서 허름한 객잔도 있었다. 그는 그 중 하나에 들어갔다. 거기가 바로 그가 숙박하는 곳이었다.
문을 열고 어두운 방안에 들어서서 그는 등잔부터 켰다.
그리고는 침상 쪽을 보았다. 한 사람이 누워 있다가 눈을 떠 그를 보았다. 퀭하니 뚫린 눈에 바짝 마른 몸매, 완연한 병자인데 눈만은 살아서 빛이 나고 있었다.
유소림이 그에게 투덜거렸다.
“깨어 있었으면 불이나 켜고 있지 그랬어요. 창문도 없는 방에!”
“자앙은……?”
침상에 누운 사람이 바싹 마른 입술을 떼어 묻고 있었다.
“자앙은 봤느냐? 어떻게 됐느냐?”
죽은 줄 알았던 소삼중이 거기 있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