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8장 아아 혼돈지연(混沌之淵)!
(무엇인가 있다.) 걸음을 옮기던 능천한은 멈칫 멈추어 섰다. 이곳은 아주 어두운 어둠 속의 석로(石路)였다.
헌데 지독한 어둠이 이 석로에 깔려 있었다. 기이하게도 천년내공을 지닌 능천한이건만 간신히 일 장 앞을 내다볼 수가 없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단순히 빛(光)이 차단된 곳이라 하여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섬뜻한 기분…
어둠 속에 무엇인가 도사리고 있었다. 금시라도 달려들어 목덜미를 물어뜯을 듯이 몸을 움츠린 그 무엇인가가 있었다.
스물… 스물! 형체도 소리도 없는 중에 그것은 벌레가 기어들 듯이 파고들어 왔다. 어지간한 능천한이건만 소름이 오싹 끼쳤다.
(무엇인가? 무엇이 있기에… 이토록 섬칫한 느낌을 주는가?) 능천한은 눈에 힘을 주고 전면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역시 일 장 이상은 꿰뚫어 볼 수 없었다. 그때, 사르르! 환몽천후가 능천한의 팔을 끼며 바짝 다가섰다. 능천한은 그녀의 교구가 바들바들 떨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환몽… 감정이 없는 환몽의 메마른 심령마저도 위축시키는 그 무엇이 저 안에 도사리고 있다.)
스윽! 능천한은 일보를 내디뎠다. 사가가가각!
(우웃!)
순간 능천한은 휘청했다. 그 기분 나쁜 기운이 강렬해진 것이다. 피부에 소름이 오싹 끼쳤다. 전신이 음침한 기도에 오그라들고 모발이 쭈뻣쭈뻣 일어섰다.
{음!} 능천한은 신음했다. 금시라도 날카로운 칼이 목을 푹 찌를 것만 같은 섬칫함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는 모르고 있었다. 공력이 아무리 높은 자리도 일반인들이었다면 이미 피를 토하며 나뒹 굴었을 것을…
이 일 장 이상을 볼 수도 없는 석로(石路)에는 사상 최악의 안배가 있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중에 사람의 심기를 갈가리 찢어놓을 수 있는 것이었다.
{흠…}
능천한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무엇이든… 나의 발걸음을 돌리게 만들지는 못한다!}
능천한의 눈에서 뇌전이 쏟아졌다. 누군가 있어 그것을 보았으면 태양이 떠오른 줄로 착각 했을 것이다. 능천한의 눈빛은 그만큼 강렬했다.
뚜벅! 뚜벅!
능천한은 천만 근의 무게를 두 발에 담고 안으로 걸어들어 갔다.
푸스스슥! 그의 일보 일보마다 석로의 바닥이 푹푹 꺼졌다. 그와 함께, 츠츠! 스스! 무형의 살벌한 기도가 칼날같이 능천한의 전신으로 쏟아졌다. 능천한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 살벌하고 섬뜻한 기도에 전신이 베어져 나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무형의 기도는 능천한이 일보를 움직일 때마다 배로 강해졌다. 그러나 주르르! 능천한은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푹! 푸스슥! 그의 걸음마다 다섯 치 깊이의 족인(足人)이 새겨지고, 무섭게 부릅뜬 그의 시선은 오직 전면만을 노려보았다.
우우웅! 츠츠!
무형의 살벌한 기도는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져 갔다. 금시라도 전신이 난도질당한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능천한의 발걸음은 머뭇거림이 없었다. 이것은 공력(功力) 이전에 정력(定力)의 문제였다.
범인이었다면 이미 몇 번은 피를 토하고 쓰러졌을 지독한 안배였다.
(어쩌면… 천마(天魔)가 자신의 영면(永眠)을 지키기 위해 베푼 안배인지 모른다.)
어둠 속을 노려보는 능천한의 두 눈이 횃불이었다. 그는 피가 터지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천마이든 누구이든… 패하지 않는다.)
뚜벅 뚜벅! 우수수수! 푸스슥!
능천한의 발걸음도 점점 더 깊게 파여졌다. 그만큼 그의 발길을 방해하려는 기도가 강해졌음을 말한다. 그리고 문득,
-크크크크! - 컬컬컬… 여기가 어디인 줄 알고 오느냐?
-크크크! 돌아가랏! 그렇지 않으면 목을 따버리겠다.
스스스! 마침내는 환청(幻聽)까지 일어났다. 아수라(阿修羅)와 지옥의 온갖 악귀들이 구름같이 일어나 능천한을 가로막았다.
-켈켈 켈켈!
-크크크 크크크!
꿈에 볼까 두려운 악귀들 망령들… 생각하기도 싫은 호나상이 뭉클뭉클 치솟아 능천한을 뒤덮어 씌웠다. 그것은 섬칫한 기도에 부합하여 능천한을 사정없이 죄어왔다. 능천한의 일신이 식은땀으로 질퍽해졌다. 그리고,
{물러가랏! 마계(魔界)의 망령들이여!}
능천한이 벼락같이 일갈을 터뜨렸다. 그의 일갈에는 만사(萬邪) 만마(萬魔)를 깨쳐 부수는 대정지기(大正之氣)가 있었다. 다음 순간,
스스스-! 모든 환상과 환청이 거짓말같이 사그러들었다. 그와 함께, 파앗! 스스! 갑자기 석로를 뒤덮고 있던 칙칙한 어둠이 확 가셔 버렸다. 그러자 석로 주변이 일시에 환 해졌다.
의아해하던 능천한의 안색이 갑자기 목석같이 굳어져 버렸다. 그는 천만 근의 무게가 실린 시선으로 전면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높직한 석문이었다. 시커먼 묵강옥(墨剛玉)으로 만들어진 것이데, 일견하여 낙서와 같은 큼직한 문양이 그 묵강벽에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갑골문자(甲骨文字)였다. 능천한은 그 갑골문자를 읽어보았다.
<천마지벽(天魔之壁)>
{우웃!}
글을 읽던 능천한은 뇌전에 맞은 듯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마기(魔氣)! 능천한이 이제껏 상상도 못해봤던 지독한 마기(魔氣)가 그 네 글자에 집약 되어 있는 듯이 보이는… 그런 가공할 마기가 그 네 자의 글에 실려 있는 것이다.
{으음!}
그러나 능천한은 점차 평정을 되찾았다. 천극대정신맥(天極大正神脈)을 지닌 능천한이다. 마 (魔)가 강하면 강할수록 강해질 수 있는 것이 능천한의 장점이다.
{천마지벽!} 능천한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천마가 잠든 곳이… 이 너머에 있으리라. 모든 마기가 이곳에서 흘러나오니…!}
능천한은 묵직한 시선으로 천마지벽을 바라보았다.
스스스! 우우웅!
그와 함께 능천한의 일신에서 지극히 크고 정대한 기운이 무지개같이 피어올랐다. 바로 천극대정신맥에서 우러나오는 대정지기(大正之氣)가 그것이다.
{진정, 천마가 고금제일마종(古今第一魔宗)이었다면… 극정(極正)의 큰 기운에 자신의 문(門)을 열 만한 큰 아량이 있으리라!}
능천한은 담담히 중얼거렸다. 그의 중얼거림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그그긍! 우르르!
천마지벽에서 웅혼한 진동이 일어났다. 그와 함께, 츠츠! 스스스! 침중한 광휘가 새어나오며 천마지벽이 둘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역시…!}
능천한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영웅지혼(英雄之魂)은 천세(千世)을 격하고도 이어지는가? 천마지벽이 갈라진 것이 우연이었는지 안배에 의한 것이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스스슥! 능천한은 환몽천후와 함께 천마지벽(天魔之壁)의 갈라진 사이로 걸어들어 갔다. 그들이 들어가자 천마지벽은 소리 없이 합쳐졌다.
그리고 능천한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곳은 아무런 특징도 없는 석실이었다. 다만 석실 전체가 시커먼 색으로 칠해져 있다는 것이 기이할 뿐이었다. 한데 석벽을 등진 석상(石床) 위에 일 인(一人)이 좌정하고 있었다. 그 인물은 일신에 고풍 스런 묵의(墨衣)를 걸친 중년인이었다.
(음! 기도가 엄청나다. 하늘을 보는 듯하다.)
능천한의 검미가 부르르 떨렸다. 능천한은 묵의중년인의 모습에서 하늘을 보았다. 천지를 가득 메우는 가공스런 기도(氣道)! 그것은 정사(正邪)를 따지기 그 이전의 기도(氣道)이다. 만상(萬象)을 포용하고, 만천하(萬天下)를 뒤덮어 버릴 만한 엄청난 무형기도(無形氣道)!
능천한은 숨이 탁 막힘을 느꼈다.
(이제껏… 이만한 기도를 보지 못했다. 혈마지존이 몸속에 감춘 그 엄청난 기도도… 이 인물의 그것에는 비교되지 않는다.)
능천한은 자기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만큼 묵의 중년인은 능천한을 압도하는 기도를 지닌 것이다. 어찌보면 평범하나 만세지존(萬世至尊)의 기품이 그에게 있었다.
{이 분이 고금제일마라는 천마(天魔)이시리라.}
능천한은 시선을 옮겼다. 그의 시선은 묵의중년인의 가슴에 이르러 멈추어졌다. 묵의중년인의 가슴에는 한 자루 비수(匕首)가 손잡이만 남긴 채 박혀 있었다. 아수라의 형상 이 조각되어 있는 비수의 손잡이에서는 칙칙한 마기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천마지존비(天魔至尊匕)! 설마 이 분은… 스스로 자결하셨단 말인가?}
능천한의 시선이 흔들렸다. <천마지존비(天魔至尊匕).> 바로 그것이었다. 중년인의 가슴에 손잡이만 남기고 박혀 있는 비수가 바로 천마지존비였다. 사대마병(四大魔兵)의 으뜸으로 오직 저 천지십병의 서열 제 일위인 무명기병(無名奇兵)에게만 그 상좌를 양보한다는…
문득 능천한은 석상(石床) 밑의 바닥을 주시했다. 그곳에는 글이 있었다. 모든 글이 갑골문자로 쓰여 있으나 능천한은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야심으로 하여… 적수를 찾아 천하에 나섰도다. 그러나… 없었다. 적수는 고사하고 본인이 일초반식을 받는 자도 없었다. …(中略)… 이에 백 년을 횡행하다가 이곳에 천마총(天魔塚)을 짓고 스스로 목숨을 끊도다. 천세(千世) 후에라도 본인의 적수가 천하에 나기를 기대하며… 천마(天魔)가 적노라.>
{으음! 역시…}
능천한은 글에서 시선을 떼고 천마를 올려다보았다.
<천마(天魔).>
천하가 고금제일마(古今第一魔)라고 부르는 인물!
그가 실상은 너무도 고독하고 불행하였음을 천하는 모른다. 그는 자신의 적수를 기다리며 일백 수십 년의 세월을 무림 위에 있었다. 그러나 끝내 천마 의 적수는 나타나지 않았다. 천하에 오직 혼자만이 독존 군림한다는 것. 범인(凡人)은 그것을 동경(憧憬)하지만 그 경지 에 이른 절대자(絶代者)는 진정 고독해 진다. 자신과 뜻을 나눌 단 일 인도 없다는 것은 너 무도 불행한 일이기에…
능천한은 천마를 올려다보았다. 그 자신도 이미 절정에 접근해 있는 인물이다. 자연히 그 옛날 천마가 느꼈던 그 처절한 고독(孤獨)의 그림자를 그는 이해할 수 있었다.
{선배의 생전 심정을 압니다. 천하 위에 홀로 서셨던 그 처절한 고독을 이해합니다.}
능천한은 천마를 향하여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다른 시대에 나서 다른 길을 걷고 있으나… 후배가 가히 선배에게 찾으시던 적수가 되어 보겠습니다.}
능천한은 말을 하고 굳게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흘렀다. 능천한은 결연한 눈빛으로 천마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미련 없이 고개를 돌렸다.
{다시 올 때는… 선배만큼 강해져서 올 것입니다.}
능천한은 중얼거리며 천마를 감아보았다.
-천마지존비(天魔至尊匕). 천하인이 눈에 불을 켜고 얻으려는 그 절대신병(絶代神兵)도 능천한을 유혹하지는 못했다.
(천마지존비보다 백 배 귀중한 것을 얻었다. 그것은 정사(正邪)를 초월한 대도(大道)가 있음을 본 것이다.)
염두를 굴리며 능천한은 굳혀진 천마지벽 앞으로 다가섰다. 헌데 바로 그 때였다.
{후후후…!}
돌연 한 소리 웃음소리가 천마지벽 저쪽에서 들려왔다.
(혈… 혈마지존(血魔至尊)!)
능천한은 직감적으로 천마지벽 저편에 혈마지존이 와 있음을 깨달았다.
그그그릉!
그 순간 천마지벽이 쩍 갈라졌다. 츠츠! 그와 함께 천마지벽 사이로 시뻘건 기류가 노도같이 번져 나왔다.
{우웃! 자전개벽참(紫電開闢斬)!}
쿠쿠쿵! 능천한도 벼락같이 우수를 쏟아내었다.
콰콰쾅 꾸꾸꿍!
천지개벽하는 듯한 엄청난 광음이 터져 나왔다.
{크흑…!}
화르르! 능천한은 가슴을 철퇴로 가격당한 충격을 느끼고 쓰러질 듯이 비틀거렸다.
{허허! 욕심이 없군. 천마지존비에 손도 쓰지 않다니…!}
스스스! 껄껄 웃음소리가 들리며 한 줄기 백영이 천마 앞으로 다가갔다. 물론 혈마지존(血魔至尊)이었다.
{안 가지겠다면 본종이 가져주지.}
혈마지존은 서슴없이 천마의 가슴에 박힌 천마지존비를 쥐었다.
{안 돼! 손을 떼랏!}
위이이잉! 능천한이 벼락같이 외치며 혈마지존에게 덮쳐갔다.
짜자작! 츠파파!
능천한의 전신이 거대한 검형(劍形)이 되어 혈마지존을 무찔러 갔다.
{호! 천형제왕검(天形帝王劍)까지?}
스윽! 혈마지존은 중얼거리며 천마지존비를 잡아 뽑았다. 다음 순간,
슈파아앙! 화르르!
갑자기 마기(魔氣)가 석실을 가득 메웠다. 다섯 치가 채 안 되는 천마지존비의 날(刃)이 나타난 것이다.
(우웃!) 허공에 뜬 능천한은 천마지존비의 마공에 접하자 전신이 터져 나가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그만큼 천마지존비의 마기는 대단한 것이었다. 스스스슥! 츠파파파!
능천한의 천형제왕검과 혈마지존이 휘두른 천마지존비의 비영(匕影)이 허공에서 작렬했다. 사가각! 일순 천형제왕검이 천마지존비에 두 동강 나버렸다. 위력을 따지기 그 이전에 공력상의 문제였다.
{과연 천마지존비!}
스스스슥! 능천한은 냉갈하며 지면으로 내려섰다. 능천한은 몸을 세우며 소매에 한 손을 집어넣었다.
(보통의 무공으로는 이 자를 죽일 수 없다.)
능천한은 무겁게 눈을 빛내며 혈마지존을 노려보았다.
{고인의 유물에 함부로 손을 대다니…! 용서할 수 없다.}
{그래서… 책벌을 할 것인가?}
혈마지존은 천마지존비를 만지작거리며 대꾸했다.
{천마선배를 대신하여…}
위이이잉! 갑자기 능천한의 몸에서 지극히 허허로운 기운이 구름같이 일어났다.
혈마지존도 흠칫했다. 능천한의 기도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때문이다.
{만겁패천초극류(萬겁覇天超極流)!}
슈아아앙! 스스스!
능천한은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거창한 륜영(輪影)이 환상인 듯이 일어났다. 혈마지존의 안색이 일변했다.
{패천제육식(覇天第六式)이 있었는가?}
위이이잉! 츠츠츠!
그와 함께 혈마지존의 일신에서 폭풍이 일어나듯이 실로 엄청난 기류(氣流)가 일어나 내뻗쳤다. 그것은 천마지존비의 섬칫한 마기에 곁들어 태산을 둘로 갈라놓을 기세였다.
-만겁패천초극류(萬겁覇天超極流).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졌으되, 아직 한 번도 펼쳐져 본 적이 없는 초절기(超絶技)다. 뚜렷한 형채는 없는 중에 일시에 석실 전체가 패천신륜(覇天神輪)의 그림자로 뒤덮였다. 어떤 기공(奇功), 어떤 호신지기(護身之氣)라도 부수어 낼 수 있는 위력이 그 그림자에 있었다. 그러나,
츠츠츠츠! 섬칫한 마기(魔氣)가 구천(九泉)의 마성을 흩뿌리자 패천신륜의 거대한 륜영(輪影)의 일각이 너무도 허무하게 베어져 나갔다. 천마지존비의 그 처절한 마력(魔力)이 떨쳐지는 것이다.
파가가각! 츄아아앙!
천마지존비는 정확히 가슴으로 날아들었다.
(졌다!)
륜영이 둘로 쩍 갈라짐을 보며 능천한은 패배를 직감했다. 한순간, 푸학! 얼음보다도 싸늘한 가슴을 가름을 능천한은 느꼈다.
{천마… 지존비!}
능천한은 중얼거리며 뒤로 넘어졌다.
쿠우웅!
마치 거목이 쓰러지듯이, 능천한의 몸이 그대로 위로 쓰러지며 선혈의 혈향(血香)이 석실을 가득 메웠다.
{흠…!}
스으윽! 뒤이어 혈마지존도 침중한 신음을 흘리며 천마지존비를 거두어들였다. 그의 가슴이 패천신륜의 예기에 쩍 갈라져 선혈이 흐르고 있었다. {음! 극마지체(極魔之體)인 본종에게 상처를 입히다니…!}
혈마지존은 가슴을 누르며 능천한을 바라보았다. 쓰러진 능천한은 가슴이 쩍 갈라져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어린놈이나 본종의 적수가 될 유일한 제목이었는데…!}
문득 혈마지존의 눈에 한 줄기 안타까운 빛이 흘러 지나갔다. 그 역시 범상한 마두는 아니었다. 적수를 알아보고 아낄 줄 아는 대마두인 것이다. {네가 재생하든지… 천마와 함께 뼈를 묻든지는 천운(天雲)에 달렸다.}
혈마지존은 중얼거리며 몸을 돌렸다.
스스스슥! 휘르르!
그 자의 신형은 신기루같이 변하여 천마지벽(天魔之壁) 밖으로 사라져 갔다.
그르르릉!
혈마지존이 사라지자 천마지벽은 굉음과 함께 다시 닫혔다. 그리고 석실에는 다시 죽음의 적막이 깔렸다. 어떤 소음도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정적이 뒤덮인 것이다. 번쩍! 문득 먹물을 가득 채워 놓은 듯한 어둠 속에서 서서히 번져 나오는 한 쌍의 빛이 있었다.
아! 그것은 눈빛(眼光)이었다! 천마(天魔)! 그의 감겼던 눈이 떠지며 하늘을 꿰뚫을 강렬하기 이를 데 없는 안광이 흐른 것이다.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 천마는 이미 수천 년 전에 죽었거늘… 어찌 눈을 떠 안광을 떨쳐 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사실은 사실이었다. 천마의 두 눈에서 횃불같은 안광이 일어났던 것이다. 천마는 쓰러져 있는 능천한과 돌로 깎은 듯이 묵묵히 서 있는 환몽천후를 바라보았다.
{과연… 사부의 말씀대로구나. 삼천 년의 세월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우리 혼돈일맥(混沌一脈)의 진정한 후계자가 나온다 함은…!}
웅웅거리는 웅혼한 음성이 석실을 울렸다. 천마는 전혀 입술을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음성이 흐르는 것이다.
헌데 천마! 고금에 다시 적이 없다는 이 마중마에게도 스승이 있었는가? 누가 있어서 이 고 금제일마를 가르칠 수가 있었단 말인가? 또 혼돈일맥(混沌一脈)이란 또 무엇인가?
모를 일이다. 천마총(天魔塚)에 덮여 있는 진정한 신비가 어디까지 이어지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기나긴 세월… 헌원천황벽(軒轅天荒壁)과 천극(天戟)을 지닌 인재가 찾아오기를 기다리며… 너무도 긴 세월을 영면에 들지 못했다. 허허… 이제야 비로소 구천(九泉)에 들 수 있으리 라!}
스스스! 천마의 몸에서 강렬한 광휘가 쏟아졌다.
그그그긍! 그러자 갑자기 석실의 바닥이 쩌억 갈라졌다.
쿠우우! 그러자 갈라진 석실 바닥 저 아래로부터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빛이 번져 흘렀다. 어찌보면 아무 광채도 없는 듯하고, 또 어찌보면 마주 보기도 힘든 엄청난 밝기의 빛이었다.
그 신비하고도 기괴한 빛의 소용돌이가 천마총의 바닥이 갈라진 곳 저 아래에서 맹렬히 휘 돌고 있는 것이다.
화르르! 능천한과 환몽천후의 몸이 둥실 떠올라 석실의 바닥이 갈라진 틈으로 떨어져 내려갔다.
{저 아이라면… 혼돈의 진정한 정수를 얻을 것이고…}
쿠르르!
천마의 중얼거림 속에 석실 바닥은 능천한과 환몽천후를 삼킨 채 다시 하나로 합쳐졌다.
{진정한 고금제일존(古今第一尊)이 탄생하리라. 허허! 아울러 고금제일미인(古今第一美人)도 함께…!}
천마와 웃음소리가 석실을 웅웅 울렸다.
스스스! 그와 함께 천마의 형형하던 안광이 급격히 사그러들어 갔다.
{인세(人世)에서 나의 할 일은 완전히 끝났다. 이제 구천(九泉)에 이를 시간이다.}
스스슥! 안광이 마침내 사그러들었다. 그러자 천마의 시신에 변화가 일었다.
스스! 휘르르!
그의 시신이 머리 쪽으로부터 먼지보다도 곱게 부수어져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화르르! 마침내 천마의 시신은 완전히 가루로 사그러들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믿어지지 않는 괴사가 일어났던 천마의 석실은 다시금 적막에 뒤덮였다.
그곳은 공(空)이었다. 그곳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빛(光)도 없으며 대기(大氣)도 없으며 삼라만상의 그 무엇도 없었다.
그곳은 그저 공(空)일 뿐이다.
우르르! 위이이잉! 그곳에는 모든 것이 있었다. 모습은 없으나 소리(聲)가 있고 형체를 이루지는 못했으나 삼라만상(森羅萬象)의 근원인 대 혼돈이 있었다.
만상(萬象)의 모태(母胎)!
대혼돈(大混沌)의 힘이…!
-태초(太初) 그 이전에 만상(萬象)의 모태가 된 지극히 큰 기운이 있었느니라. 이를 대혼돈 (大混沌)이라 하며 이는 삼라만상을 탄생시킴으로 사멸되도다.
억겁(億겁)을 이르러 대혼돈의 정화인 혼돈지기(混沌之氣)가 흩어지지 않고 쌓인 곳이 있으니 이를 일컬어 혼돈지연(混沌之淵)이라 하도다! 이것이 기이록(奇異錄)의 제일기이(第一奇異)이니라.
<혼돈지연(混沌之淵).>
그렇다! 그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한 모금만 취해도 신(神)의 경지에 들 수 있다는 천지창조 의 무한한 능력 혼돈지기(混沌之氣)가 억겁을 변치 않고 쌓여 있는 곳!
빛도 형체도 없는, 그러나 분명히 도도하게 물결치는 대천황지기가 고여 있는 곳, 그 혼돈지 연이 이곳이었다.
기이록의 제일장을 장식하고 있는 혼돈지연이 이곳인 것이다. 지금 그 혼돈지기의 도도한 흐름 속에 둥실 떠있는 인물이 있었다.
피에 젖은 황초를 걸친 검미(劍眉)의 청년. 바로 능천한이었다.
콰르르! 능천한의 주위로 여신 거창한 광풍노도가 일고 있었다.
콰자자강! 쿠쿠쿵!
천지지간에서 가장 빠르다는 낙뢰(落雷)보다도 오히려 빠른 탕류가 능천한의 몸을 뚫고 지나쳤다. 거침없고 막힘이 없는 거대한 역류, 그것이 바로 혼돈지기의 흐름이었다.
스스스! 츠츠! 입술을 굳게 다문 능천한의 대천황지기를 끝없이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의 몸은 바닥이 없는 거대한 그릇(器)같았다. 그 끝도 없을 것 같은 천황지기를 막힘없이 몸 안으로 빨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위이이잉! 스스스!
천황지기의 흡수가 진행됨에 따라 능천한의 몸에서는 지극히 광명정대한 광휘가 흘러 넘쳤다.
-천극대정신맥(天極大正神脈).
그 천고(千古)의 절대신맥의 모든 능력이 천황지기를 접하여 일어나는 것이다.
우르르릉! 쿠르르!
혼돈지기의 격랑은 능천한을 신인(神人)으로 단련시키고 있었다.
천마총(天魔塚)!
세상 사람들은 꿈에도 천마총이 곧 혼돈지연(混沌之淵)의 입구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더욱이 그 안에서 거룡(巨龍)이 대천룡(大天龍)으로 자라나고 있음은…
-황원(荒原).
거치른 난석과 시든 잡초들로 뒤덮인 황량한 고원이었다.
휘이이잉! 츠츠츠!
겨울의 문턱을 들어서자 삭풍이 뼈골을 시리게 하며 불어온다. 중원천하(中原天下)는 유달리 일찍 찾아온 강추위에 시달리고 있었다.
화르르! 쐐애액!
돌연 황원을 가르며 세 줄기의 인영이 허공을 갈랐다.
선두에 선 인물은 타는 듯이 붉은 홍포를 걸친 장한이었다.
무섭게 입을 악다문 장한은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전면을 쏘아보고 있었다. 허공을 가르는 장한의 오른손에는 길이 일 장의 시뻘건 신창(神槍)이 들려 있었다.
-태양천화신창(太陽天火神槍).
바로 사대신병에 드는 절대신창(絶代神槍)이 그것이고, 그 주인인 홍포의 장한은 태양신존 (太陽神尊), 변황제일인(邊荒第一人)이 바로 그였다.
스스슥! 휘르르!
무섭게 달리는 태양신존을 두 명의 인물이 땀을 뻘뻘 흘리며 따르고 있다. 남황야수신(南荒野獸神), 해천신검제(海天神劍帝), 변황삼대거파의 종주들이었다.
스스슥! 문득 태양신존이 표표히 날아 내리며 몸을 멈추었다.
화르르! 스슥! 남황야수신과 해천신검제는 그 뒤를 따라 몸을 멈추어 세웠다. 그곳은 까마득히 지평선이 보이는 황원의 중간쯤이었다.
휘이이잉! 차가운 삭풍을 받으며 태양신존은 북쪽을 바라보았다.
{검제(劍帝)!}
태양신존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옛! 속하 여기 있습니다.}
햐천신검제가 공손히 대답하며 허리를 숙였다. 태양신존은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사란과… 밀후에게 연락은 제대로 보냈겠지?}
{그렇습니다. 신존. 지금쯤 연락이 닿았을 것이고… 이 겨울이 가기 전에 일만의 풍운철기대 (風雲鐵騎隊)가 중원으로 들어올 것입니다.}
{음!}
태양신존은 아주 무거운 안색이 되었다.
{혈종문의 힘이 그토록 강하다니…! 십만의 변황의 용사들이 그토록 허무하게 쓰러질 줄이야!}
태양신존은 탄식을 했다. 해천신검제가 그런 태양신존을 위로했다.
{신존! 심려를 푸소서. 이제 딩도할 풍운철기대는 일기일인(一騎一人)이 천인(千人)의 발굽 아래 초토가 되고 말 것입니다.}
남황야수신도 우직한 음성으로 해천신검제를 거들었다.
{그렇습니다, 신존. 크게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두 사람의 위로의 말을 귓전으로 흘리며 태양신존은 황원의 저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스스슥! 그곳에는 하나의 점이 나타나고 있었다.
(사람이다. 그것도… 가공할 경공을 지닌…)
태양신존의 눈빛이 형형하게 타올랐다. 황야의 끝에 나타난 하얀 점은 바로 사람의 그림자였던 것이다.
한데, 휘이이! 그 인영(人影)은 가공할 경공으로 태양신존 자신들에게 폭사되어 오고 있었다.
이윽고 태양신존은 다가오는 인영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그 자는 아주 청수한 인상의 백의노인이었다.
화르르! 쐐 애액!
{허허허!}
선풍을 일으키며 백의노인은 삽시에 태양신존 앞으로 날아 내렸다.
{어린 아이야, 네가 태양신존(太陽神尊)이란 아이렷다?}
백의노인은 아무렇지 않게 태양신존에게 말했다.
{발칙한 자…!}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화르르! 츠츠츠! 쐐애액!
대노한 남황야수신과 해천신검제가 일시에 백의노인에게로 달려들었다.
쿠르르릉! 그들 양인의 합공은 가히 경세적이었다. 그러나,
{날뛰지 말고… 누워 있거라!}
백의노인은 담담히 말하며 달려드는 남황야수신과 해천신검제를 바라보았다.
{으악!}
{아악! 눈… 눈이…!}
쿵! 쿠쿵! 그러자 남황야수신과 해천신검제는 처절한 비명과 함께 눈을 감싸 쥐고 나뒹굴었다. 태양신존은 그 모습을 보고 안색이 일변했다.
{사안파령소(死眼破靈笑)! 당신은…!}
{허허! 본종을 굳이 알려고 할 필요는 없고… 다만 자네는 본종을 따라가 주어야겠네!}
{음!}
백의노인, 혈마지존(血魔至尊)의 말에 태양신존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剛한 자다. 어쩌면 패할지도…!)
우르르! 화르르!
태양천화신창(太陽天火神槍)에서 폭풍이 일었다. 시뻘건 구양지기가 삭풍을 가르며 수십 장 까지 뻗쳐 나갔다.
{본존을 데려가고 싶으면… 태양천화신창을 눌려야 할 것이오!}
태양신존이 태양천화신창을 겨누며 말했다. 그러자 혈마지존은 껄껄 웃었다.
{허허! 어려운 일이 아니지.} 혈마지존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슈팡! 콰콰콰쾅!
{크 흑!} 태양신존은 느닷없이 가슴에 일장을 맞고 십여 보 물러섰다. 혈마지존의 무공이 이심제기 (以心制氣)의 지경에 들었음을 알지 못하고 당한 것이다.
태양신존이 몸을 채 바로잡기도 전이었다.
위이잉! 츠츠츠! 일시에 천지사방이 숨막히는 마기(魔氣)로 뒤덮였다.
스악! 그와 함께 한 자루 시커먼 비수(匕首)가 태양신존의 가슴을 그어갔다.
{헛! 태양뢰폭(太陽雷瀑)!}
태양신존은 다급히 태양천화신창(太陽天火神槍)을 휩쓸어 내었다. 그러나, {흐훗!} 파가가각! 츠츠츠!
혈마지존의 손에 들린 비수, 천마지존비(天魔至尊匕)는 여지없이 태양신존의 가슴으로 파고 들었다.
파파파팟! 푸하악!
{크으으! 당하다니…!}
타당! 태양천화신창이 요란하게 땅으로 떨어졌다.
쿠우웅! 그와 함께 태양신존은 가슴에서 선혈을 내뿜으며 나뒹굴었다.
우우우우! 피맛을 본 천마지존비가 섬칫한 울림을 내었다.
혈마지존은 그런 천마지존비를 쓰다듬으며 청수한 얼굴에 미소를 띄웠다. {후훗! 다시는 이백 년 전같은 좌절을 당하지 않는다. 천하를 철저히 본종의 손에 넣어 영세 군림(永世君臨)할 것이다.}
혈마지존은 두 눈에서 광휘를 쏟아내며 중얼거렸다. 그의 눈빛이 이 순간 만은 사악한 야심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패천지존(覇天至尊)과 구천독종(九天毒宗)이 제거되었고… 이제 태양신존(太陽神尊)마저 제압하였으니…! 천향염후(天陽艶后)만 굴복시키면 무림은 본종에게 대항할 힘을 상실한다.}
혈마지존의 눈빛은 아주 형형하게 빛났다.
{후후 무림이 본종의 손에 들어오게 되면… 그다음 목표는 태상존황(太上尊皇)이 된… 패천황룡(覇天皇龍)이다.}
혈마지존은 음침한 표정이 되었다. 그는 황원의 저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패천황룡의 사라진 황실(皇室)은 사상누각일 뿐이고… 후후훗 그렇게 되면…}
혈마지존(血魔至尊)! 이 자는 도대체 어떤 야심을 지니고 있기에 황실마저 넘본단 말인가?
{으하하! 이제 곧 천하가 본좌를 신(神)으로 모시게 되리라.}
혈마지존의 웃음소리는 아주 멀리멀리로 퍼져 나갔다. 그것은 혈종천하(血宗天下)를 예고하는 웃음이었다.
힘과 피가 모든 것을 말하는 무법의 시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