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줄이 당기고 밀고 2
태극도포까지 차려입은 보천자가 방으로 들어와 경의상과 인사를 나누었다. 보천자는 경의상의 품에 안겨있는 운청산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음! 가주께서 귀기가 느껴진다 하더니---.”
보천자가 말끝을 흐리자 경의상과 운녹산이 초조한 눈빛을 드러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보천자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두 손을 모아 수결을 짚었다가 손가락으로 감은 두 눈을 쓰다듬더니 다시 운청산을 향해 활짝 펴며 중얼거렸다.
“천존(天尊)께 비오나니 천정(天頂)을 열어 머리를 맑게 하시고 눈을 깨끗하게 하시어 온갖 요마사귀를 보게 하소서.”
명목망귀술(明目望鬼術)의 주문을 외운 보천자가 눈을 번쩍 떴다. 그의 두 눈에서 태양광을 방불케 하는 찬란한 금광이 뿜어져 나왔다. 순간 운청산이 자지러지게 울기 시작했고, 그의 얼굴만 뚫어지게 바라보던 경의상도 즉시 눈을 감았다. 비스듬히 앉아있던 운녹산만이 실눈을 뜸으로서 겨우 빛을 감당해 내었다.
잠시 후, 눈두덩을 자극하는 밝은 기운이 사라지자 경의상이 눈을 뜨고 운녹산이 얼굴을 폈다.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오직 보천자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보천자는 엄숙한 표정을 거두고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잠시 뜸을 드린 후 그가 입을 열었다.
“가주께서 제대로 느끼신 겁니다.”
경의상은 아득해지는 정신을 추스르기 위해 지그시 눈을 감았다. 저주를 입었다는 말을 전해는 들었지만 믿지 않았었다. 눈길과 손길이 떨어질 때 우는 것 말고는 외관상으로 별 다른 점을 찾을 수가 없었던 탓이었다.
그러나 보천자가 누구인가. 무당의 재전장로로서 그 법술이 특출나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그가 말했다면 틀림없는 사실이리라.
한편 전후사정을 모르는 운녹산은 경의상에 비해 침착한 모습을 보였다. 그 역시 초조한 빛을 드러내기는 하나 경의상과는 달리 되물었다.
“정확히 보셨다 함은 무슨 뜻입니까?”
보천자는 짧은 신음과 함께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에 차분히 말했다.
“세간에서 흔히들 귀신에 씌었다고 하지. 이 아이의 경우는 세간의 말과 같으면서도 많이 다른 경우네. 무슨 말인고 하니---.”
보천자는 운녹산과 경의상의 심각한 표정을 살피면서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운녹산을 보며 말했다.
“사람이 죽게 되면 신(神)은 의미가 없어지고 정기마저 흩어지니 그 정기에서 파생된 혼백(魂魄)마저도 분리된다고 보지. 이 혼백 가운데 혼은 원래 양기가 정과 어우러져 생성된 것으로 그 성정이 밝고 가볍고 청정하고, 백이라는 것은 음기와 정이 어우러져 생성된 것으로 그 성정이 무겁고 탁한 것으로 보네. 만약 혼이 천부(天賦)의 수명을 다한 사람에게서 분리된 것이면
원과 한이 많지 않을 테니 그 성정에 따라 곧 다음 생을 구하기 위해 영계로 진입하나, 객사를 하거나 급사를 하거나 칼 맞아 죽거나 사고로 죽게 되면 스스로의 죽음을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오로지 원과 한만 남으니 시신과 함께 땅에 묻히는 백의 주변을 떠나지 못하고 방황하게 된다네. 백과 분리된 가볍고 청정한 혼을 신명(神命)이라 부르는데, 백성(魄性)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혼을 일러 흔히들 귀신이라고 하지. 무슨 말인지 알겠나?”
보천자가 다시 반응을 살피자 운녹산은 고개를 끄덕여 따라가고 있다고 표시하고 경의상은 진지한 얼굴 그대로 침을 꿀꺽 삼켰다.
보천자의 말이 이어졌다.
“신명이야 그 성정이 가볍고 청정하니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마는, 문제는 귀신일세. 음기와 정 사이에서 파생된 백성의 영향을 받아 점차 음습하고 탁하고 감정적으로 변하네. 이성은 없고 오직 죽을 당시의 고통과 분노와 원한만 기억하지. 이미 육신을 떠났으니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생각을 못하고, 죽기 직전의 살아있었던 삶을 그대로 기억하고 떠돈다는 것이지. 이 귀신이란 것은 곧잘 정기가 약한 사람에게 들러붙어 존재하지도 않는 고통을 호소하고 풀 수 없는 분노와 원한을 풀어보려 하네. 이를 일러 귀신에 씌었다 하지.”
보천자는 잠시 말을 끊어 한숨을 내쉬고 운녹산과 경의상의 반응을 살핀 후에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 이 아이가 그러한 상태에 있네. 내 아까 말하기를, 같으면서도 다르다 했지? 내가 보니 이 아이는 그 정도가 심하여 무려 아홉이나 되는 귀신들이 들러붙어있구먼. 물론 그럴 수도 있어. 하지만 귀신에 씌었다 해도 본인은 대개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주변 사람들이 이상하다 생각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 아이는 이상하게도 귀신의 영향력을 받기 보다는 그것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일세. 그러니 늘 울밖에. 한이 맺힌 귀신의 모습은 죽을 당시의 모습 그대로이며 아픔도 그대로이고 그 기운도 참으로 어둡고 칙칙할 테니, 아이가 어찌 참을 수 있겠나? 정감어린 사람의 목소리보다 귀신의 음침한 소곤거림을 먼저 느낄 테니 얼마나 고통스럽겠나? 어떻게 이 어린 것에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을까? 참으로 묘한 일이야.”
보천자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고서 경의상과 운녹산의 반응을 살폈다. 경의상은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은 한숨을 내쉬며 운청산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운녹산은 기이한 눈빛으로 운청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경의상은 간절한 목소리로 보천자에게 물었다.
“어떻게 이 아이를 구제해 줄 방법이 없겠습니까, 진인?”
보천자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빈도와 같은 사람이 천도재(遷度齋)를 열고 귀신을 불러, 이미 죽었으니 고통과 원한을 잊고 내생을 기약하라, 달래고 타이를 수 있습니다. 그리하면 대개의 귀신들은 쉽게 수긍하고 신명으로 화하여 영계로 올라가지요. 하나 앞서 말했다시피 이 아이의 경우는 특이합니다. 아홉 귀신이 있는데 그 가운데 오직 하나뿐인 여귀만이 아이에게 스스로 붙어 설득이 가능할 뿐, 나머지 남귀 여덟은 자의가 아니건만 금제되어 붙은 것이니 해원(解怨)이 불가능한 지경이지요. 떠나려 해도 떠날 수 없는 귀신들이란 말입니다.”
경의상은 질끈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저주라 하더니---.”
순간 보천자가 급히 물었다.
“저주라는 것을 아십니까? 그럼 그 내용도 아시는지요? 원인을 안다면야 해원이 불가능하지도 않지요.”
경의상은 지푸라기라도 잡은 듯 급히 입을 열려다가 갑자기 운녹산을 바라보며 주저했다. 그러나 곧 결심을 한 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눈으로 보지 않아 믿지 않았습니다만, 전해 듣기로 이 아이의 어미는 임신 초기부터 땅에 두 발이 묶여 있었고 출산 당시에는 하반신이 나무와 같이 변했더랍니다. 결국 출산을 위해 자신의 배를 갈랐다 하더군요. 이 아이를 길러준 사람이 부족의 현자에게 물으니, 저주일 것이라고 했답니다.”
말을 마친 경의상은 흥건하게 물기 고인 눈으로 운녹산을 살폈다. 운녹산은 너무나 크게 충격을 받은 듯 두 눈을 부릅떠 운청산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경의상이 보천자에게 다시 물었다.
“어떻습니까? 해원이 가능하겠습니까?”
보천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제야 이해가 되는군요. 수령신입니다. 자신의 영역에서 피 흘린 혼귀들을 이용하여 저주를 내렸습니다. 그러니 풀어줄 수 없지요. 그런데 무슨 까닭으로 신령이 저주를 내렸을까요? 허! 문제로고. 신령이라면 웬만해서는 인간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데, 무슨 까닭이었을까? 어찌한다? 태 내림이니 어미가 살아있어야 시도라도 해볼 텐데?”
처음에는 경의상의 물음에 답하던 보천자가 나중에는 홀로 중얼거리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보천자의 반응에 절망한 경의상은 눈물을 흘리면서 운청산을 토닥였다.
“불쌍한 것! 이 어린 것이 무슨 죄가 있다고---.”
그때 운녹산이 보천자에게 물었다.
“아홉이라 하셨지요? 그들이 생전에 누구였는지는 알 수 있겠습니까?”
보천자가 갑작스런 질문에 의아해 하며 운녹산을 응시하자 그는 급히 말을 덧붙였다.
“아이에게 해코지하지는 않을는지요?”
보천자가 무슨 의미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서 말했다.
“정확히는 알 수 없네. 허나 여혼에게는 아직도 신명이 느껴지네. 내 눈을 피하지 않는 그 부드러운 눈빛하며 아이를 바라보며 다시 나에게 보내는 간절한 눈빛으로 미루어 보아, 아이의 모친이 아닌가 싶으이.”
순간 경의상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뜬 후에 손을 뻗어 판자 하나를 앞으로 당겨왔다. 경의상은 판자를 보지도 않고 단지 표면을 더듬는 것만으로 읽어나갔다.
“몸은 먼저 가게 되었지만 가가 곁에 아이가 있는 한 청수도 함께 있습니다. 아이가 행복하면 청수도 행복합니다. 그냥 한 말이 아니었어. 약속을 지켰어. 이런 아이가 또 있을까?”
경의상의 감겨진 눈에서 끊임없이 눈물을 새어나왔다. 반면에 운녹산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있었다. 두려운 듯, 운청산을 바라보지도 못했다. 그는 살며시 입술을 깨물고 보천자에게 다시 물었다.
“나머지 여덟 남귀들은 어떻습니까? 어떤 모습을 하고 있습니까? 아이에게 큰 해가 되지는 않겠습니까?”
보천자는 운녹산의 창백한 얼굴과 다급한 음성이 아비로서 당연하게 느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들은 감히 나를 보지 못하고 밀착하여 여인의 뒤로 몸을 숨기려 해서 얼굴을 보지는 못했네. 행색을 보니 살아생전에 무인인 듯 했어. 정확한 것은 아니나 전원 녹의를 입은 듯 했고, 모두가 극심한 자상을 입고 있네. 그들끼리 다투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니 생전에 절친한 사이인 듯 하고, 귀기 또한 크게 드러내지 않으니 아직은 아이에게 큰 해가 되지는 않을 듯 하네. 한 가지 의문스러운 점이 있다면 그들이 여인을 해코지하지 않는 것일세. 앞서 말했듯이 귀신은 이성을 간직하지 못한다네. 자신들끼리도 쉽게 다투는데, 신명에 가까운 기운을 지닌 여인을 쫓아내지 않는 것이 이상하구먼. 여인이 금제에 걸린 것은 아니니 그들의 힘이면 못할 것이 없는데, 이상해.”
말을 끝내고 난 후, 보천자는 운녹산의 얼굴을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잠시 흘끔거리는 것만으로도 경의상의 표정은 한결 가벼워졌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귀신들이 운청산에게 해코지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는 말에 조금은 안심한 듯한 기색이었다. 그런데 운녹산은 오히려 조금 전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다.
운녹산은 보천자의 눈길을 의식하고 급히 표정을 바꾸어 물었다.
“혹시 귀신들이 우리들의 말을 듣고 있을까요? 의사소통이 될는지요?”
보천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이의 눈을 통하여 볼 수는 있을 것이네. 아이의 능력이 곧 그들의 능력이지. 그러니 보는 건 가능해도 그들이 지금 당장 우리와 의사소통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 그러나 그들도 한때 사람이었으니 아이를 통해 알아들을 수는 있겠지. 하지만 인간의 말과 귀신의 말은 크게 다른 탓에 과연 아이의 입을 빌어 정확한 의사전달을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로군.”
운녹산이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일 때, 경의상이 이어 물었다.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다 하셨습니다. 귀기를 드러내지 않으니 큰 위해를 하지는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허면 이대로 큰다 해도 무탈하다 이 말씀이신지요?”
보천자는 미안하다는 표정을 드러내며 고개를 저었다.
“귀신은 귀신이지요. 아무리 얌전한 귀신일지라도 오랫동안 같이 있으면 아이의 건강에 좋을 까닭이 없지요. 귀신은 그 자체로 음기나 마찬가지인 탓입니다. 아직 어린 동안에는 보약으로 양기를 보하고 나이 들면 양기를 취하는 호흡법을 가르치는 것이 좋을 겁니다. 그러나 그것도 과하지 않아야 합니다. 양기가 강해져서 귀신이 견뎌내지 못하고 날뛰게 되면, 빠져나가지 못하니 아이가 힘들게 되겠지요. 빈도가 보기에는 아마도 여인이 여덟 남귀들과 아이 사이에 완충 역활을 하는 것 같은데 양기가 강해지면 여인도 힘들어질 터이니, 허허 이거 진퇴유곡(進退維谷)이라 하겠습니다. 원시천존, 원시천존!”
보천자는 안타까운 듯 원시천존을 연호하며 경의상을 보면서 계속 머뭇거리는 듯한 인상을 드러냈다.
경의상이 얼굴에 절망감을 드리우며 물었다.
“더 하실 말씀이라도---?”
보천자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고서 입을 열었다.
“빈도가 보기에도 대부인의 기운이 무척이나 강하면서도 따뜻합니다. 혹시 대부인의 손길과 눈길이 미치지 않으면 아이가 심하게 울지 않습니까?”
보천자가 거의 단정을 짓다시피 물었다. 경의상이 고개를 끄덕이자 보천자가 다시 말했다.
“아마도 귀신들마저 대부인의 기운에 감화되어 아이와 같은 기분을 느끼는 것 같군요.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수고스럽더라도 아이는 대부인께서 손수 키워야 할 것 같습니다.”
경의상은 겨우 그런 말이었느냐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리 하기로 작정을 보았습니다. 어차피 할 일 없는 늙은이, 기운이 닿는 데까지 힘껏 키울 것입니다.”
보천자가 여전히 얼굴을 펴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러하시다니 다행입니다. 허나 아이가 커서 말하고 움직일 수 있게 되면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귀신들이 다투어 아이의 몸을 빌려 제 뜻을 이루고자 할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정신력으로 과연 얼마나 버텨낼 수 있을지---.”
순간 경의상은 운청산을 끌어안고서 앞뒤로 달아 흔들며 넋두리처럼 말했다.
“아이고, 불쌍한 것! 세상에 나면서부터 이런 혹독한 형벌을 받다니, 불쌍해서 어찌하누? 어찌해?”
눈물을 뚝뚝 흘리던 경의상이 번쩍 머리를 쳐들고 보천자에게 사정하듯 물었다.
“진인! 정녕 이 불쌍한 것을 구제해 줄 방도가 없겠습니까? 건강하게 사는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마음 편하게만 살게 해주십시오. 제발 방도를 찾아 주세요, 진인!”
보천자는 눈을 감고 천장을 바라보며 연신 원시천존을 연호했다. 그리고 한동안 생각하는 듯 하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
“빈도가 조언을 드릴 수 있는 것은, 아이가 거동할 수 있게 되면 기운이 맑은 산에 위치한 도문이나 사찰로 보내어 도사나 승인으로 만들라는 것뿐입니다. 소산생귀요 대산성선이란 말처럼 선기가 가득한 큰 산에서는 귀기가 힘을 쓰지 못하는 법입니다.
귀신들을 얌전하게 만들어 살아있는 동안은 친우처럼 함께 살아나가는 방법뿐이군요. 그 경우 혹시라도 연이 닿아 삼라만상(森羅萬象), 천지자연(天地自然)의 이치를 꿰뚫는 선인을 만난다면, 선인께서 아이에게 얽힌 인과(因果)를 읽고 악연의 매듭을 풀어줄 수도 있는 일이지요.”
경의상은 또 다시 한숨을 내쉬고 손바닥으로 운청산의 볼을 쓸었다. 그때 운녹산이 붉어진 눈으로 보천자에게 물었다.
“진인 아니 처숙어른! 귀신들이 제 마음을 읽을 방도는 없는 것입니까? 이 찢어지는 아비의 마음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까?”
보천자는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귀신이 자네나 나 같이 정기가 세찬 사람의 마음을 엿볼 수는 없는 일이네. 감히 근처에 접근할 꿈도 꿀 수 없지. 지금은 어쩔 수 없겠으나 아이가 스스로 움직일 때가 되면 자네를 피할 걸세. 그것은 아이의 뜻이 아니라 귀신들의 뜻일 테지.”
운녹산의 두 눈에서 마침내 주르륵 눈물이 흘러나왔다. 보천자는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워 운녹산의 얼굴을 외면하며 연신 도호를 외웠다.
운녹산은 눈물 가득한 얼굴로 운청산의 얼굴을 한없이 응시했다.
잠시 동안 앉아있던 보천자는 자신의 무능력함을 사과하며 조용히 방을 나섰다.
보천자를 배웅한 운녹산이 붉은 눈시울을 훔치고서 경의상에게 말했다.
“어머님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다가갈수록 청봉이 힘들어진다 하는데 제가 어찌 그 아이를 안으려 할 수 있으오리까. 그저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겠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못난 아들이 다 커서까지 어머님을 편히 모시지 못합니다.”
경의상은 눈물 어린 눈으로 운녹산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 이 어미, 십 수 년은 끄떡없다. 청봉이 되도록 편히 살아갈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하여 키울 것이니, 넌 네 할 이나 신경 써라. 처숙어른을 보아서라도 며늘아기에게 잘 하고. 네가 편하면, 이 어미는 오직 이 아이에게만 정성을 쏟을 수 있지 않겠느냐?”
운녹산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경의상이 다시 말했다.
“내일부터는 할 일이 많다 들었다. 네가 힘든 건 안다만 이럴 때 더 잘해야 하느니라. 언젠가는 네 아버지도 마음 풀릴 날이 있을 게다. 참아라. 지금 당장은 하루하루 최선만을 생각하고 살아라. 가 보아라. 편히 쉬고, 내일 처숙어른께서 일보시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만전을 기하여야 할 게다.”
“명심하겠습니다. 물러가겠습니다.”
운녹산은 경의상에게 깊숙이 고개를 숙이고 나서 잠깐 동안 운청산을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방을 나선 운녹산은 의미모를 긴 한숨을 내쉰 후에 굳게 닫힌 경의상의 방문을 바라보았다.
‘몇 년이나 기다려야 할까? 오 년? 아니면 십 년? 마음을 엿보지 못한다니 다행이긴 한데, 그래도 청봉을 볼 때마다 좌불안석(坐不安席)할 수밖에는 없겠구나. 어디가 좋을까? 나를 위해서도 또 아이를 위해서도 먼 곳이 좋으련만---. 처숙의 무당? 그곳은 안 되지. 아직은 시간이 있으니 찾아봐야지.’
운녹산은 경의상의 방문 위에 불현듯 나타난 여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흠칫 몸을 떨었다. 다시 보았다. 허상이었다.
‘청수야. 너만은 아니다. 네게만은 내 마음을 엿보여 줄 수 있으면 좋겠다. 오직 너에 대한 내 마음만.’
운녹산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곧 감상에서 벗어나려고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이청수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산 사람 곁에 죽은 사람이 방황한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섬뜩한 일이었다. 그러나 운녹산은 자신도 모르게 경의상의 방문을 다시 바라보았다.
붉은 노을을 흩뿌리는 태양과 그려놓은 듯한 하얀 만월이 공존하는 유시 중반경이었다. 뜨는 달과 지는 태양이었건만 그 기세는 오히려 태양이 더 등등하다.
붉은 노을 등지고 검각산 칠십이봉 동향의 마지막 봉우리를 빠져나온 보천자와 두 제자 그리고 운녹산이 길도 아닌 봉우리 초입에서 멈추어 섰다.
보천자가 운녹산에게 손을 내밀었다.
“참요검을 주게.”
운녹산은 보천자에게 참요검을 건넸다. 살펴보니 사척의 양인검(兩刃劍)인데, 검배(劍背)에는 벽사주인(辟邪朱印)이 새겨져 있고 검격(劍格)에는 삼두육비(三頭六臂) 괴인의 형상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보천자는 오른손을 참요검을 세워들고 왼손으로 검결지를 지어 검격에서부터 검첨까지를 부드럽게 훑으면서 중얼거렸다.
“탁탑천왕의 영력을 빌어 요괴사마의 출입을 봉하려 하니 힘 잃은 산신은 망령되이 놀라지 말고 영력을 받들어 율령처럼 급히 행하소서.”
보천자는 말이 끝나는 즉시 검파를 놓았다. 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순간 뭉툭한 참요검의 검파가 아무런 저항도 없이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남은 것은 서늘한 은광을 뿌리는 이척 정도의 검신뿐이었다.
보천자는 두 팔을 옆으로 펼치며 뒤로 물러섰다. 두 제자와 운녹산도 뜻을 알아차리고 그의 팔 뒤로 물러섰다.
순간 검배에 조각된 벽사주인에서 찬란한 노을이 칼날같이 뻗어 나와 좌우로 펼쳐졌다. 그 노을은 봉우리 하단부를 따라 한없이
뻗어나가서 마치 붉은 비단을 펼쳐 놓은 듯 산의 위쪽과 아래쪽을 가르는 붉은 장막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붉은 장막은 어느 순간 눈앞에서 사라져버렸다.
보천자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참요검을 향하여 손을 뻗었다. 참요검이 반쯤 묻힌 그 자리에서 여섯 치 가량의 노란 종이부적 한 장이 튀어 올라 보천자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보천자는 괴황지로 만든 종이부적을 운녹산과 두 제자들에게 보이고 특히 운녹산을 주시하며 말했다.
“요물들 가운데 상당히 강한 놈이 이 근처에 있는 것 같더니만---. 자네에게 주기 위해 참요검을 빌리고 이 벽사퇴마부(辟邪退魔符)로 하여 자리를 메웠건만, 반나절 만에 이리 되어 버렸어. 약해진 것을 알고 집중공략한 모양이야.
새벽녘까지 돌아오지 못했다면 참요검 봉산 결계에 구멍이 뚫릴 뻔 했군.”
법술에 대해서는 상식 이상의 지식을 지니지 못한 운녹산도 부적을 보는 즉시 고개를 끄덕여 수긍의 뜻을 표했다.
보천자가 검을 빌리면서 피로서 벽사퇴마부를 그리는 동안 그 역시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니 그 뜻을 알지는 못해도 어떤 모양이었는지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운녹산이 보는 부적은 그 모양이 많이 훼손되어 피빛 문양이 흐려진 것은 물론이고 하단부의 상당부분이 사라지고 없었다.
보천자가 앞서 걸었다. 두 제자와 운녹산도 따랐다. 보천자가 뒤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어땠나? 자네도 무언가 느꼈을 텐데---.”
운녹산이 지체 없이 대답했다.
“귀기라면 잘 모르겠으나 뒷머리가 간지럽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습니다. 그리고 두어 번은 등골이 오싹해진 적도 있었지요.”
“그렇지. 양광 아래서는 요마사귀가 함부로 날뛰지 못하는 것이 보통인데, 오늘 보니 조금만 약한 모습을 보여도 금새 달려들 것 같은 놈들이 몇 보이더군.”
운녹산이 눈을 치뜨며 물었다.
“그 정도로 심각합니까?”
보천자는 앞을 보는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칠 년 전, 가주께서 이상한 기운을 간과하지 않으시고 나를 청하신 것은 참으로 현명한 결정이었네. 참요검으로 봉산결계(封山結界)를 치지 않았다면 오늘 날 요물들의 기세는 그 때와 또 달랐을 것이야. 아마도 수 년 후에는 적지 않은 마물들이 출몰하여 이곳 검각현에는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네. 자네 집안의 어른들이나 살아남으시겠지. 다행히 오늘 보니 참요검의 영능이 참으로 뛰어나더군. 참요검의 영기에 상처를 입은 요물들이 감히 산을 벗어나지는 못하고 길길이 날뛰었어. 우리 정도의 기운을 느꼈으면 당연히 몸을 숨기고 기척을 드러내지 않았을 미천한 요물마저도 은근한 살기를 드러냈네.”
운녹산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요물들이 살기를 드러낸다면 오히려 나쁜 징조가 아닐는지요?”
보천자는 흐릿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다행이지. 그것은 발악일세. 감당하지 못할 능력자를 만나면 숨어야 할 놈이 살기를 드러내니 처리하기가 쉬울 밖에. 미물들에게 있어 본능이야 말로 생존을 가능케 하는 최대의 무기 아니겠는가? 약자가 본능을 넘어선 행동을 하니 결과는 죽음뿐. 물론 현민들에게는 극도로 위험한 상황이긴 해도 이미 요물의 출입을 금하여 놓았으니 결계 안으로만 들어서지 않는다면 안전할 걸세.”
운녹산은 쉽게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보천자가 말했다.
“허나 내가 느끼기에도 만만치 않은 요물이 셋은 되는 것 같더구먼. 자네들 젊은이들은 그들을 처치함에 있어 각별히 주의해야 할 걸세. 만에 하나 놓쳐서 결계 밖으로 나가기라도 한다면 정녕 적잖은 피를 볼 걸세.”
“명심하겠습니다.”
그렇게 이야기 하는 사이에 보천자 등은 이미 검각현의 초입에 들어섰다. 드문드문 보이는 민가들은 텁텁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굳게 문이 잠겨있었고 문의 좌우에는 천사지인과 종규의 그림 같은 온갖 부적들이 덕지덕지 발라져 있었다.
보천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현민들의 삶이 참으로 고달프구먼.”
운녹산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벌써 오래 전부터 현 외각에 사는 사람들은 해가 지면 방문 밖 출입을 아예 하지 않는다 들었습니다.
대소변까지 방안에서 해결한다 하니 요새 같이 더운 날씨에는 그 고생이 참담할 지경이겠지요.”
보천자가 문득 웃으며 말했다.
“이번 일이 끝나면 검각산 근동에서 운가를 칭송하는 소리가 하늘에 닿게 될 걸세. 그 동안 참으로 곡절이 많았으니 더욱 더 뜻 깊은 일이 될 게야.”
곡절이라 함이 금의대의 몰살을 의미하는 것임을 즉시 깨달은 운녹산은 슬픈 눈빛을 드러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천자는 실언했음을 깨닫고 웃음을 거두며 운녹산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픈 데를 건드렸군. 하나 불행 중 다행이 아닌가. 만월이 뜨는 모레가 지나면 검각산 주변의 수많은 민초들은 두 발 뻗고 편히 잘 수 있을 게야. 장차 민초들이 운가를 진정한 협가(俠家)로 칭송하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고, 자네도 조금은 마음이 편해 질 걸세. 그들의 희생이 헛된 것이 아님이 드러나는 일이니.”
운녹산은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한숨을 토해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이 오가는 사이에 보천자 등은 어느새 운가의 정문에 이르러 있었다.
여느 때와 달리 운가의 아침이 부산스러웠다. 젊은이들이 대연무장으로 모여들었고, 장년인들과 초로인들이 천의각 근처에 몇몇씩 무리를 지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천의각의 문이 열렸다. 다섯 명의 초로인과 장년인들이 이야기를 멈추고 천의각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로 억지로 표정을 드러내지 않고 외로이 서있던 운녹산이 따랐다.
운검정의 집무실에 들어서니 이미 운검정과 보천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운검정의 손짓에 따라 초로인과 장년인들이 탁자 위에 놓인 검각산의 모형 주위에 둘러섰다.
주위를 둘러보던 운검정이 운녹산을 발견하고서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너는 되었으니 나가 있거라.”
순간 방안의 공기가 싸늘하게 냉각되었다. 초로인과 장년인들이 운검정의 눈치를 보며 운녹산을 힐끔거렸다. 그들의 눈에는 여실한 동정의 기운이 감돌았다.
장차 운가를 계승할 후계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아이처럼 취급되니 안쓰러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들이 처음부터 그러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 가운데는 금의대에 속해있던 젊은이의 아비 되는 사람들도 있었으니, 운녹산이 살아 돌아왔을 때 분노하여 책임을 묻자고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운녹산에 비견될 만한 자질을 가진 젊은이도 없는데다가 운검정이 무참하게 홀대를 하는 것을 보다 보니 차마 공론화시키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렇게 이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도 운검정의 박대는 심해져만 가서, 옆에서 보는 이들은 그 누가 되었건 간에 운녹산을 측은해 하지 않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그런데 운녹산에게는 개인적으로 처숙이 되는 보천자가 자리한 곳에서마저 드러내놓고 박대하니 안절부절못하는 이들은 오히려 초로인과 장년인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 냉기를 깨고 나선 이가 보천자였다.
“소가주에게 물어 볼 것도 있고 하니 동석했으면 좋겠습니다, 가주.”
보천자는 운녹산이 아직 공식적으로 소가주가 된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이들에게 운녹산을 칭할 때면 언제나 소가주라 불렀다. 하지만 거기에는 누구도 따로 토를 달지는 않았다.
운검정은 미간에 잡힌 주름을 반 정도 풀고서 턱짓으로 빈자리를 가리켰다. 운녹산은 참담한 심정을 억누르며 보천자의 맞은 편 자리에 섰다.
보천자가 운녹산에게 흐릿한 미소를 지어보이고서 운검정에게 말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운검정이 목례해 보이고 말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보천자가 목례로 답해보이고서 검각산의 모형을 둘러싼 사람들의 면면을 훑어 그들의 시선을 한데 모았다.
“하루 이틀 전에 생겨난 문제가 아니니 모두들 대충은 아시리라 믿습니다. 빈도가 어제 소가주와 함께 검각산의 봉산결계를 점검하고 산의 기운을 느껴보고 돌아왔습니다. 다행히 결계는 무탈했으나, 참요검 결계의 기운에 상처 입은 요물들의 살기가 빈도의 뼈골까지 와 닿더이다. 조금만 더 지체한다면 요물들로 인한 폐해가 천북 땅 곳곳에서 나타날 뻔 했습니다. 그래서 내일, 만월이 되어 음기가 최고조로 달하면 운가의 정예들이 모두 입산하여 요물들을 일거에 퇴치하기로 하였습니다.”
보천자가 잠시 말을 끊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동요하지 않았다. 다만 소소한 질문이 던져졌다.
“대체 요물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진인?”
백염이 군데군데 섞인 멋들어진 수염에 호안(虎眼)을 지닌 초로인의 질문이었다. 그가 바로 운검정의 둘째 동생이며, 무림에서는 호협(虎俠)이라고 알려진 운한정(雲寒精)이었다.
보천자는 그 내용의 질문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서 바로 대답했다.
“빈도가 참요검의 영력으로 결계를 친 지도 벌써 일 년이 지났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 참요검이지만 악기나 살기를 지닌 원혼들은 감히 그 기운에 대항하지 못하고 힘을 잃고 말 테지요. 문제는 원래부터 산에서 살아가던 생명들입니다.
이 검각산은 예로부터 많은 피를 본 곳이고 또한 도적들이 들끓던 곳이었으니, 그동안 쌓인 피와 원한과 살기가 어찌 적다고 하겠습니까? 애초에 산세 자체가 살기를 품고 있는데, 시신을 파먹은 동물들과 피와 주검들의 원백(怨魄)을 영양분 삼아 자란 수목들이 어찌 미물다운 삶을 살아가겠습니까? 그것들이 제 수명을 잊고 호귀(狐鬼), 사귀(蛇鬼)는 물론이요, 황귀(黃鬼)와 백귀(白鬼) 그리고 회귀(灰鬼)들이 되어 들끓고 있더이다. 또 그것들이 제 본분을 잊고 수목귀(樹木鬼)가 되어 피를 갈구하고 있더이다. 그러니 지금의 검각산은 달리 요마산(妖魔山)이라 불러도 가히 틀린 이름이 아니올시다.”
“어허, 이런! 내 안 그래도 예전부처 검각산을 볼 때마다 기분이 찜찜하더니만---. 코앞에서 그 따위 요물들이 들끓고
있었구나. 허면 진인! 우리가 내일 일제히 산으로 가서 그깟 미물들을 상대해야 한다는 말이오? 여우와 뱀이야 원래 요물 소리를 들으니 그렇다 쳐도 족제비나 고슴도치는 물론이고 쥐까지---, 쯧쯧쯔.”
운한정이 얼굴을 찡그리며 혀를 차는 순간, 단정하고 차분한 모습의 초로인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따위 미천한 요물들을 상대하기 위해서 꼭 참요검 봉산결계가 필요했을까요, 진인?”
낮았다고 들리지 않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더 명료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보천자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초로인의 얼굴을 주시했다.
자신이 한 일의 당위성을 의심받아서 당황한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 대해서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에 주저 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보천자는 다만 초로인이 다른 누구도 아닌 금의대원 운명산의 아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대답을 잠시 늦춘 것뿐이었다.
그의 어조 속에서 느껴지는 억제된 슬픔을 동정하기에,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을 따름이었다.
그때 운검정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기정!”
그저 이름을 부른 것뿐이었건만, 운검정의 첫째 동생이며 강호에서는 다정검객이라 불리는 운기정은 눈을 감았다 뜨고 나서 보천자에게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결례했습니다, 진인.”
보천자는 같이 포권을 취해 사과를 받고 다시 운한정과 운기정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게 창피해 하거나 간단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올시다. 고양이가 아무리 사나워도 몽둥이 하나 든 장정 앞에서는 여전히 고양이일 따름입니다. 그러나 방안에 갓난아이밖에 없을 때는 다른 문제지요. 그와 다를 것이 없는 이치입니다. 검각산의 요물들 가운데 가장 미천한 요력을 지닌 회귀라 할지라도 두엇만 모이면 장정 하나 발기발기 찢는 것은 문제도 아니올시다.
그것들은 또 영악하여 자신보다 강한 기세를 드러내는 인물에게는 몸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산의 인근 마을을 돌아다닌다고 생각해 보시지요. 그 결과는 명약관화한 일이 될 것입니다.”
보천자는 잠시 말을 끊고 좌중의 반응을 살폈다. 운기정을 포함한 모두가 알아듣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보천자는 운기정에게 눈길을 주며 다시 말을 이었다.
“빈도가 참요검 봉산결계를 펼친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사악한 기운이 산 밖으로 나오는 것을 막는 것이 첫째요, 지속적으로 상처 입혀서 화를 돋우는 것이 둘째며, 요물들을 소탕하는데 있어서 주무기로 사용하는 것이 셋째입니다.
이미 언급했습니다만, 오늘 산을 살펴보니, 봉산결계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목적은 충분히 달성되었더이다. 이제 남은 것은 소탕하는 일뿐이지요. 그러나 내일 저녁 그것들을 처치하려면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준비는 요물들을 감당하지 못할까봐 걱정이 된 까닭이 아니고, 한 놈이라도 놓쳐서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할까봐 두려운 탓입니다. 소가주, 준비하라 한 것은 모두 구했던가?”
운녹산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이르신 대로 길이 아홉 치가 넘는 동경 이백 개에 모두 칠성을 새겨 마련해 두었고, 괴황지(槐黃紙)와 경면주사 역시 넉넉히 준비해 두었습니다만, 시간이 촉박하여 가로 한 치에 세로 한 치 반의 목패 이백여 개를 만들만큼의 벽조목(霹棗木)을 구하지는 못했습니다. 해서 미처 여쭙지 못하고 나머지 백 사십여 개의 목패는 벽조목 대신에 도화목로 만들었습니다.”
보천자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말했다.
“그렇지. 벼락 맞은 대추나무를 그 짧은 시간에 쉽게 구할 수 있겠는가? 복숭아나무로 대체한 것은 잘한 일이네. 효력이 떨어지기는 하네만 그것만한 것도 없지. 역시 일을 맡길 만 하구먼.”
운녹산은 송구하다는 듯 살짝 고개를 숙여 보천자의 웃는 눈을 외면했다. 그때 운검정이 건조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 정도는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일이지요. 계속하시지요.”
운녹산은 운검정의 무정한 눈길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보천자는 운녹산을 안쓰럽게 바라보다가 말했다.
“오늘 내일, 빈도는 소가주가 준비한 것들로 벽사퇴마부와 명목망귀부를 만들 것입니다. 그것들과 동경 그리고 참요검이 있다면 능히 요물의 간사함을 알아차리고 남김없이 처치할 수 있을 겁니다. 다만 이곳과 이곳 그리고 이곳 등 몇몇 곳의 요기가 제법 강하니 가주께서는 인원 편성에 주의를 기울이셔야 할 겁니다.”
보천자가 검각산의 모형에 손가락을 짚어가며 설명을 끝내자 운검정이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그간의 희생이 적지 않은데 어찌 가볍게 일을 처리하오리까? 걱정하지 마시오.”
말끝에 운검정의 눈길이 운녹산에 이르러 차갑게 변했다. 그러한 행동은 작은 듯하지만 누구나 쉽게 눈치 챌 수 있는 일이기도 해서 방안의 공기는 다시 싸늘하게 냉각되었다.
운녹산은 절로 악다물어지는 이빨을 힘겹게 벌리고 슬픈 눈빛으로 하소연하듯 운검정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운검정의 눈빛은 변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