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508
귀향
김하임
그가 돌아왔다. “난, 가고 싶어.” 이 한마디로 돌아왔다.
“행복 찾아 집 떠난 파랑새처럼 여지없이 귀환한다. 입때껏 밖에서 행복의 꼬투리를 찾아 헤매던 궤적에서 선회해, 이윽고 희망은 '나'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희망이 돌아온다? 옳다. 거역할 수 없는 자연의 순리 속에서 어김없이 귀환한다.” 차동엽 신부의 『희망의 귀환』에 나오는 문구이다.
그가 그랬다. 그는 내 육촌 오빠이다.
한국에 사는 그의 아들 성현은 올해 일월에 미국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심을 문자로 친척들에게 알리고 어머니가 계신 미국으로 떠났다. 어머니는 아들이 도착하기 전까지 걱정이 많았다. 남편은 낯선 이국땅에 묻히기보다 행복 찾아 떠난 파랑새가 집으로 돌아오듯 고향 선산 부모님 곁으로 돌아가 함께 눕고 싶어 했다. 아들은 이국땅에서 화장(火葬)하고 투명 비닐백에 넣어 압축하여 그 위에 미국시민권, 사망신고서, 화장서류를 붙인 후 비행기를 타고 혼자 모셔왔다. 뒤늦은 아버지의 한국 귀환이다.
소 문중의 종친회장은 선산으로 모실 수 있도록 신속하게 조치했다. 오후 늦게 인천공항에 도착한 아들을 서울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회장의 생각에는 아파트에 사는 아들이 자신의 집으로 아버지를 모시고 가는 것보다 경험이 많은 자신이 수고하는 것이 도울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사전에 서로 이야기를 나눈 터이다. 회장은 그 밤에 이국에서 온 투명 비닐봉투 속 형님을 정중히 모시고 기차로 목포에 내려갔다. 너무 늦은 밤이어서 기차역 근처 여관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날 미리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과 준비한 묘원으로 일찍 모시고 떠났다. 형님 아들의 가족들이 다음날 모이고 나서야 모두가 보는 자리에서 형님을 안치(安置)했다. 이렇게 이역만리에서 오신 분을 모시고 나니까 든든한 마음이다.
육촌 오빠는 젊어서 훤칠하게 키가 크고 잘 생겼다. 몸집이 좋아 고등학교 때는 힘깨나 쓰는 서클의 유혹이 많아 학교를 몇 군데 옮겨 다녀야 했다. 대학교 때는 사촌오빠와 같은 대학이었다. 사촌오빠가 ROTC 훈련받느라 구보를 하고 있으면 벤치에 앉아 열심히 하라고 웃으며 소리치던 서글서글한 사람이었다. 그랬던 그가 젊은 날을 이국에서 살았으나 그래도 부모님 가까이 영원히 눕고 싶어 찾아 왔다.
해마다 사월, 마지막 토요일이면 고향에는 소 문중의 시제로 모인다. 남은 어르신들도 차례로 떠나고 점점 사람이 귀해진 지금의 시제는 옛날과 많이 달라졌다. 흩어져 사는 친척은 일 년에 한 번 모이나 사는 곳, 종교, 연령이 달라 저마다 예식의 방식을 가지고 오랜만에 모여 제(祭)를 올린다. 음식을 나누어 먹고 젊은 자손들과 그들의 아이들이 게임과 상품을 받고 즐거워하는 모습은 현대적인 다른 만남의 장소로 변모되고 있는 셈이다. 올해 시제는 새로 입성한 육촌 오빠의 희망대로 투명 비닐봉투에 담겨서 와서 이번에 다시 뵙게 된 것을 조상님께 고하고 자손에게도 알리는 셈이다. 아마 선산에 계신 어르신과 부모님, 참석한 후손은 멀리서 온 육촌 오빠를 환영하는 마음의 자리였을 것이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런 모습이 그려서 집으로 올라오는 내내 훈훈한 특별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