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회색 가방
가방이 웃고 있다. 열어봐도 된다고.
그동안 조심스러워 가방째 장롱 깊숙이 간직하고 있다가 이제야 꺼내 봤다. 노트 세 권이 보인다. 겉장을 들춰보니 아버지의 낯익은 글씨가 가득하다.
2007년 6월 14일 10시 30분(목) 역촌 성당 예비 신자 교리반 입교라는 제목과 함께 교리 내용이 빽빽하게 적혀 있다. ‘어쩜 그리 꼼꼼하고 깔끔하게 정리를 잘해 놓았는지 경건해진다. 날짜를 보니 어머니 가시고 딱 12일 만이다. 그렇게 고집을 부리고 외면하시더니 웬일? 믿기 어려운 상황이다.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혼자서 성당에 가셨다는 게 놀랍다.
‘입교하신 동기가 뭡니까?’ 하는 질문에 ‘ 사망 전 카타리나(어머니 세례명)와 아이들의 권유로 입교하게 됨’이라고 적혀 있다.
아버지는 가족이 믿는 종교를 무시하는 줄 알았다. 기회 있을 때마다 권해도 가타부타 대답이 없던 아버지, 답답했지만 참기로 했다. 난 어머니에게 더 이상 권하지 말라고 말씀드렸다. 아버지의 자유의사를 속박하고 싶지 않아서다. 그러나 어머니는 달랐다. 팔십을 넘기고부터는 현실적인 문제를 구체적으로 말씀하며 세례받기를 권했다.
“우리가 가면 쟤 혼자 어떻게 해요. 당신이 믿어야 하느님이 도와주시죠.”
그 말을 알아들을 리 없는 아버지는 표정 하나 안 변했다. 그런 아버지가 아내가 떠난 후 곧바로 신자가 되기로 결심한 그 뜻을 누가 알까, 아버지의 속내를 짐작하니 가슴이 아린다.
나에게 아버지는 늘 큰 산이었다. 키도 크고 몸체가 좋아 유난히 옷태가 좋으신 아버지, 그 아버지를 난 좋아했다. 고등학교 때 우리 집에 드나들던 내 친구들은 아버지를 그 시대 명배우 ’그레고리 펙‘ 닮았다고 했고 우리 앞집 은행 다니던 언니들은 출근하는 모습을 보려고 창문을 빼꼼하게 열고 몰래 내다보곤 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생각해 보니 그때 아버지의 나이가 20대 후반, 나를 20대 초반에 낳았으니 한창 외모에 자신 있을 때다. 솜씨 좋고 살뜰한 어머니가 와이셔츠도 만들어 입혔다고 하니 오죽 단정했을까. 어렴풋한 기억으로 하얀 와이셔츠, 페이즐리 무늬 넥타이, 감색 신사복에 중절모, 까만 가방을 들고 출근하는 아버지가 내 눈에도 근사해 보였다. 내 딸도 그 할아버지를 세상에서 제일 멋쟁이로 알고 있다. 그래선지 초중고등학교까지 학교 행사에 참석하는 분은 늘 할아버지였다. 유치원 갈 때 자전거 뒷자리에 태우고 가시기도 했고 과제물을 잊고 가도 학교까지 갖다 주는 것은 할아버지 몫이었다. 그래서 둘이는 비밀도 많고 통하는 뭔가가 있었다. 그런 분인데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여느 아버지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무뚝뚝하고 말이 없는 거목일 뿐이었다. 사랑한다는 표현도 할 줄 몰랐고 희로애락을 나타내지도 않았다. 그래도 아버지는 누구보다 나를 사랑하고 내 편이라고 생각한 것은 왜일까. 마치 나뭇가지 사이로 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처럼 마음을 녹여주는 부드러움이 느껴져서였나보다
동생과 나, 딸만 둘인 우리 집은 호랑이 할머니 앞에서 어머니는 늘 죄인이었다. 할머니가 억울한 소리로 괴롭혀도 이상하게 아버지는 입을 다물고 계셨다. 그런 아버지 태도가 비겁하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랬음에도 아버지의 그런 태도를 당연하게 받아들였으니 그것도 아이러니다.
거슬러 생각해 보니 우리 할머니의 말씀이 법이었고 집안 분위기가 그랬다. 30대에 혼자되어 아들 하나를 금지옥엽으로 키우셨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만 우리 엄마가 무슨 죄가 있다고 다른 사람이 지은 죄까지도 짊어져야 하는지 말 없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울 때도 여러 번이다. 그럼에도 우리 자매는 할머니 편을 들어야 했다. 그래야 할머니 잔소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살아서 그런지 아버지는 늘 표현에 인색했다. 아내를 끔찍하게 좋아하면서도 그렇지 않은 것처럼 했고 딸들을 애지중지하면서도 사랑을 감췄다.
아버지 노트를 들춰 보니 2008년 새해 아침에 드리는 첫 기도가 적혀 있다.
’저의 첫 소망 하나를 간구드립니다. 뉴욕에서 공부를 마치고 영화감독을 희망하는 저의 외손녀 엘리사벳 소원대로 이루게 해 주시고 건강하게 귀국하기를 소망합니다.‘ 눈물이 왈칵 솟는다. 이렇게 섬세한 속내를 감추고 계셨구나. 바위처럼, 거목처럼 크게만 느껴지던 분의 안쪽에 감춰졌던 여린 속살을 보고 나니 아버지 마음 안에 오로지 우리 모녀를 위한 사랑과 헌신만 들어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 머리가 숙어진다.
아내 보내고 1년 동안 한 주도 거르지 않고 묘소에 찾아가서 풀도 뽑고 봉분도 어루만지며 마나님이 살아있는 듯 다독이시던 아버지의 작아진 등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등은 우리 가족이 힘차게 날 수 있게 도와준 디딤목이었음을 이제야 알겠다.
아내가 가고 12일 만에 가방과 노트를 챙겨 들고 성당 문을 여신 아버지의 깊은 마음이 이해된다.
(2024. 5.28)
첫댓글 엄희자 안젤라 누님께는, 늘 큰 산과 같으셨고 그레고리 펙을 닮으신 그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그런데 따님에 대한 사랑의 세밀한 감성을 가지신 분, 어머님께는 지극한 배우자의 성실함을 묘지에서 풀 봅으시며 보여 주신 아버님의 등-- 가슴이 뭉클해 지는 글, 잘 읽고 갑니다^^
안젤라 선생님,
아버님에 대한 글을 읽고 숙연해지네요. 아내를 떠나 보내고 성당에 입교하신 내용, 새해 첫 기도문에 마음이 뭉클했어요. 겉으로 드러내진 않으셨지만, 아버님의 깊은 속 마음, 집안 분위기, 선생님 모녀가 얼마나 사랑 받으셨는지 충분히 읽혀지네요.
잘 감상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