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 시집 『시간의 빛깔, 시간의 향기』
불투명한 시간의 그물 속에서 참된 자아(自我) 찾기
현 희(시인)
1.시간은 인간을 지배한다
인간을 움직이거나 지배하는 것이 무엇일까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대답하는 사람의 수만큼이나 다양할 것이다. 인간을 둘러싼 외부 상황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사회나 역사의 흐름을 좌우하는 정치나 권력의 헤게모니를 내세우고, 막대한 자연의 폭력에 휘둘려 본 사람들은 자연 현상 너머에 초월적 힘으로 도사리고 있는 절대자를 내세울 수도 있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임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은 사회에서 맺는 인간관계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고, 나아가 인간관계의 가치 지향적 결정체인 사랑을 내세울지도 모른다. 또한 개인의 심층 심리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억압된 무의식 깊숙이 자리 잡은 강렬한 욕망의 에네르기를 동인(動因)으로 내세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까지의 경험과 지식 체계, 인생관이나 세계관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일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김송배의 일곱 번째 시집 『시간의 빛깔, 시간의 향기』를 읽으면서,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바로 ‘시간’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사실, 우주의 시작은 시간의 시작과 더불어 전개되었으며, 우주의 소멸 또한 시간의 소멸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인간의 탄생과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을 둘러싼 환경인 시대나 사회, 역사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된다. 자연 현상도 하루나 계절 혹은 일 년의 주기적 순환을 통하여 절대적인 질서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누구에게나 하루 24시간의 동일한 물리적 시간이 작용하지만, 욕망의 생성, 변화, 소멸에 따라 개인이 느끼는 주관적 시간은 달라진다. 시간이야말로 우주를 지배하고, 자연을 지배하고, 사회와 역사의 흐름을 지배하고,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실체로 본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인지 시간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오래 전부터 시작되어 왔다. 고대 철학자뿐만 아니라 근대와 현대의 과학자들까지 ‘시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이 해명하기 힘든 과제의 정체를 벗기기 위하여 주력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개념 정의에서부터 많은 논란과 시비가 끊이지 않고, 우주과학, 철학적, 종교적, 사회 ․ 역사적, 심리학적 접근 등 그 다루어지는 범주 또한 광범위하여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며, 앞으로 계속 탐구해야 할 영원한 숙제로 남아 있다.
시간에 대한 연구가 문학에서 거의 황무지에 가깝고 시도된 역사가 그리 길지 않은 것도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전히 시간의 문제를 외면할 수만은 없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생활하고 시간은 여러 이미지로 변형되어 우리와 같이 호흡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시간은 공간과 함께 인간의 존재를 규정짓는 한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김송배가 시간에 관심을 갖고 이에 천착하는 것은 매우 긍정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우주라든지 철학적 테마로서의 시간의 문제보다는 인간 사회와 인간을 둘러싼 시간에 한정하여 시간은 인간에게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어떠한 형태로 제시되고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시간으로부터의 소외, 시간으로부터의 자유
『시간의 빛깔, 시간의 향기』에서 김송배가 얼마나 진지하게 ‘시간’의 문제를 천착하고 있는가는 「시간에 대하여」라는 20편의 연작시에 잘 나타나 있다. 연작시는 시적 대상을 여러 각도에서 고찰하여 다양한 인식과 사고를 포괄하려는 의도에서 채택되는 시 형태에 해당한다. 그만큼 시인의 의식구조가 고도로 집중되고 성숙해야만 쓸 수 있는 장르라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시적 대상 그 자체가 연작시를 요구하기도 한다. 다시 말하여 한 작품으로 처리하기 힘든 상호 모순적 속성을 띌 경우, 그것을 다 포괄하면서도 변증법적인 사고 과정을 통해 일관성도 벗어나지 않고 글의 통일성도 헤치지 않으면서 시인의 의도와 복잡한 테마를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장점이 때문이다.
그가 ‘시간’을 ‘시간의 신비’와 ‘시간의 무게’로 거칠게 나누어 동시에 포착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시간의 신비는 무엇으로도 쉽게 규정할 수 없고 베일을 벗길 수 없음에서 비롯되며 시간의 무게는 그 속에서의 인간 삶의 덧없음, 고통과 절망스러움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주목한 것이다.
그가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섬광으로 분해된 우주의 한켠에서 스스로 사그라지고 혹은 새로운 변신으로 생성되는 태초의 어둠에 서부터 그는 몸짓으로 또박또박 걸음마를 시작했을 것이라는 막연한 유추로 아아, 그렇게 조화스런 신비 그 측면에 불투명한 그물막을 드리운 채 사람들은 어지럽게 생사고락의 굴레를 씌워. 아, 그래 그래
그는 무엇을 위해 어디로 갈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꽁꽁 얼어붙은 대지에 천둥 번개에 놀란 미물들이 어스스 꽃잎을 피워 내고 저마다 교감된 사랑의 밀어가 풋과일 영글쯤 해서 천천히 시 한 편 마지막으로 정리하여 다시 원점으로 회귀하는 순환의 섭리를 순응하는 성스러운 침묵이 어둠과 섞이는 그런. 아무렴, 그래
그는 먼 길을 왔지만 잠시의 휴식도 잊은 채 또 갈 길 멀어 재촉하는 우둔함으로 그나마 영원한. 하모, 그 래
그가 남기고 간 귀중한 유품은 모두 바람뿐이었다. 암, 그래.
--「시간에 대하여 ․ 1」 전문
시간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지만, 그 실체 또한 뚜렷하게 말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그는 시간을 ‘나그네’에 비유하여 난해한 철학적 명제를 명징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가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는 무엇을 위해 어디로 갈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 ‘그는 먼 길을 왔지만 잠시의 휴식도 잊은 채 또 갈 길 멀어 재촉하는’ 나그네의 모습을 통하여 시간의 시원(始原), 무목적성(無目的性)과 비예측성(非豫測性), 그리고 계속성(繼續性), 영원성(永遠性)과 무한성(無限性) 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 우리 곁을 지나가고 있지만 시간의 시작과 끝을 알 수 없고 나아가는 방향과 목적을 알 수 없다는 것은 인간이 얼마나 불확실하고 예측 불가능한 시간(세계) 속에 내던져진 피투성(被投性)의 존재임을 말하는 것이다. 정체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은 두려움을 동반한다. 그런데 이처럼 모호하고 불투명한 속성이 우리와 직접 연관되면서 삶을 제한하거나 변형시키고 ‘생사고락의 굴레’를 씌우는 힘으로 작용할 때 그 두려움은 더욱 증폭될 수밖에 없다. 시간의 무게 역시 이에 따라 증가할 것이다.
그대는 물이다 아니 조용히 흐르다가
휙휙 흔적 없이 사라지는 한낱 바람이다
물소리 바람소리 지워진 빈 자리
가끔은 아아로운 추억더미 아픔으로 메워지고
그대 남긴 굴레의 끝자락에는
나의 작은 뜰 안으로 뒹구는 낙화가 안쓰럽다
--「시간에 대하여 ․ 10」중에서
벽시계가 갑자기 멈춰 섰다
---(중략)---
1998년 7월 29일 새벽
가슴 철렁한 형님의 부음이 전해지고
시간은 먼동으로 둥둥 떠 있었다
죽음의 순간
그래도 시간은
멈춘 시계를 멀리 피해가고 있었다.
--「시간에 대하여 ․ 4」중에서
앞 작품에서 시간은 ‘물’, ‘바람’ 등으로 달라지면서 삼라만상의 조락(凋落)과 소멸을 주재하고 있다. 그것이 뒷 작품에서는 ‘죽음’ 이미지로 변주되고 있다. 죽음은 한 생명체에 주어진 시간의 끝을 의미하며 이로 인해 존재는 부재의 상황으로 바뀌게 된다. 시간은 인간의 삶에 상처를 주고 정신을 박살내고(「시간에 대하여 ․ 2」) 궁극에 가서는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넣어 소멸시킴에도 불구하고 피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벽시계의 멈춤(형님의 죽음)’에서 보듯 인간의 시간은 유한하지만, ‘시간은 멈춘 시계를 피해가고 있다’는 구절을 통해 우주의 시간은 무한하다는 것 등에서 우리가 시간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시간으로부터의 소외는 여기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은 삶을 지배하는 일상의 이미지로 변형된다. ‘언제나 그러하듯 불투명한 일상의 연속’(「시간에 대하여 ․ 8」)이라든지 ‘시계바늘에 매달고 다녀야 할 약속들’(<「시간에 대하여 ․ 9」>), ‘쫓기면서 살아가는 시간의 마력 앞에 / 준비되지 못한 그 길을 힘겹게 나서고 / 다시 제 집을 찾아 돌아가는 무거운 발걸음만/ 이 세상 어디에나 질펀하다’(「시간에 대하여 ․ 2」)에서 보듯이 이미 주체는 사라지고 일상에 갇혀 시계 자판이 가리키는 창백한 시침과 분침에 의지하여 하루를 견디어내는 피동적 삶을 제시한다. 반복되고 자동화되고 무의미한 일상을 통하여 자유로운 시간으로부터 소외당한 현대인의 삶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왜 그토록 그가 집요하게 시간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지 어느 정도 명확해진다. 시간의 신비는 인간의 존재 조건, 시간의 무게는 인간 삶의 존재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인간은 불투명한 시간의 그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존재임을 간파하고 있는 것이다. 늘 깨어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시간의 신비와 무게에 대한 천착은 흐름, 즉 끊임없이 유동하는 상황 속에서 실존을 규정하려는 몸짓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삶은 시간의 연속체>라고 볼 때 부재나 무의미를 향해 흘러가는 시간(삶)에 저항하여 자아를 인식하고 발견하고 성찰함으로써 정체성을 확인하며 실존을 탐구하려는 진지한 태도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논의에서 인생을 좀더 보람 있고 아름답게 살고자 하는 욕망이 표출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는 ‘시간에는 향기와 빛깔이 없다’(「시간에 대하여 ․ 17」)라고 말하고 있지만,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진 무채색의 물리적 시간에 향기와 빛깔을 부여하는 일은 개인 각자의 몫으로 남겨둔 것이다. 인생은 시작도 끝도 선택할 수 없고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삶을 헛되지 않게 밀도 있게 살려는 의지와 노력을 통해 충분히 삶의 질은 개선될 수 있으며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담겨 있다. 따라서 그의 시는 시간으로부터의 소외를 극복하고 시간으로부터 자유를 추구하며 참된 자아를 찾아가려는 간절한 바램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3. 빛의 시간을 찾아서
그러나 그는 아직 소외된 시간에 유폐되어 있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얼어붙게 하는 지금의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상황을 겨울로 설정하고 있다.
역사(驛舍)의 불빛은 지워지고 있었다
누군가 쉬엄쉬엄 거쳐 간 한때
아쉽던 사랑의 밀어가 눈발로 흩어지고
이제는 기다리는 사람도
떠나보내는 그대의 그림자도 없다
그냥 존재 이유를 체념한 듯
매우 찬 바람에
별빛 하나 으스러지고 있었다.
--「겨울 詩 몇 편(4) -간이역에서」 전문
위 작품은 겨울철의 간이역을 배경으로 씌여진 시이다. ‘불빛도 희미해지고 사랑도 떠나버리고, 존재 이유를 체념한 듯 찬바람에 으스러지는 별빛’을 통해 점차로 존재 의미를 상실해가는 간이역의 살풍경을 보여주며 시인이 처한 정신적 상황을 암시한다. 물론 IMF 한파가 가져온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로 인한 불안과 경제적 몰락으로 암담한 사회 분위기, 분단 현실이 가져오는 아픔과 한(恨) 등 사회 ․ 정치적 상황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체로 그의 시에서 주류를 이루는 겨울 이미지는 인간관계가 휴지조각처럼 나부끼고, 진실하고 순수하리라 믿었던 사랑마저 부재하며 다만 견디어내야 할 황량함과 어둠만이 가득하다.
이와 같이 김송배가 사회․정치적 상황보다 인간관계나 사랑의 부재 등에 더 관심을 가지는 것은 전자는 후자에 의해서 충분히 극복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현실이 부조리하고 피폐될수록 그러한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따뜻한 믿음과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타자와의 이러한 믿음과 사랑이 충분히 숙성된 바탕 위에서만 자아는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끊임없이 과거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환기해 내고 그 회복을 갈망하는 것은 사랑이 세계와의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길이며 참된 자아 찾기로 이어지는 길이기 때문이다. 다음 시들은 이를 잘 보여준다.
서툴기만 한 기지개 아아,
새 생명의 환희, 그 예비된 순수
먼발치, 하얀 네 옷자락에 묻은 사랑
--「봄 詩-잔설을 보며」 일부
풀꽃은 풀꽃으로 피어나는
벌레는 벌레로 태어나는
따수움
--「봄 詩-봄볕 뜨락에 내려」>일부
절망적인 겨울의 한복판에서 봄을 기다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그가 바라는 봄은 지금까지 어느 시인이 노래한 봄과도 다르다. 특히 ‘풀꽃’은 풀꽃으로, ‘벌레’는 벌레로 다시 태어난다는 부분이 그렇다. 일견 평범해 보이는 구절이지만 본래적 자아를 회복할 수 있는 시간으로서의 봄에 대한 갈망이 은은하게 빛을 발한다. 그는 외부 상황이 나아짐은 물론이고 그것이 나의 본질과 존재 의미를 회복시켜야만 진정한 봄이 왔다고 본다. 나아가 ‘봄이 왔는데도 어쩐지 봄을 느낄 수 없’다거나 ‘될 일이 안되고 오히려 안 되어야 할 일이 쉽게 풀린다’(「봄 詩-어쩐지 봄을 느낄 수 없는」)에서는 생의 아이러니를 벗겨내고 순리와 질서가 제자리를 찾는 것이 봄임을 역설하고 있다. 김송배의 봄이 가진 개성적 면모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볼 때, 그가 지향하는 봄은 현재의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시간을 극복하고 빛이 있는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상황으로 돌입하여 자아를 회복하고 구원해 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현재→미래>를 지향하는 낙관적인 사고방식이 내재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생관은 대립과 갈등 없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겨울의 시간에서는 <과거←현재>를 지향하고 있다. 과거가 사랑이 있던 순수하고 실존하는 삶이었다면, 현재는 그렇지 못한 동토(凍土)의 시간이다. 현실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볼수록 과거 지향적 삶의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다. 현재는 개선되지 않고 미래의 전망은 보이지 않으며 역사의 진보를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러하기 때문에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는 계절의 순환적 패턴에 의거하여 고통스런 삶을 견디어 내고 새로운 삶을 이끌어야 한다는,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당위적(當爲的)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절망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서 심리적이고 의도적이고 당위적 차원에서 낙관적이고 미래지향적 태도로 전환하고 있는 것이다.
어둡다
저문 산사(山寺)풍경(風磬)소리 까맣게 차가웁다
---(중략)---
아, 언제쯤 지혜의 영원을 찾을 것인가
산문(山門) 밖 개울물 속
야윈 육신 다 녹아 흘러 버린 채
어인 까닭이냐, 제 영혼만 건져 다시
아제아제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내 걸어야 할 겨울길 아직도 멀다
--「겨울 詩 몇 편(11)-한행(寒行)」 일부
위의 시에서도 그런 태도가 잘 나타나 있다. 차갑고 어두우며 결핍과 허무만이 가득한 겨울이지만, ‘지혜의 염원’을 찾고 ‘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육신이 다 녹아 없어지도록 걸어야 하는 존재가 인간임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이 ‘한행(寒行)’이라는 작품을 통하여 춥고 어두운 겨울의 시간을 인내하고 수양하여 자기를 진정으로 구원하려는 준엄한 몸짓과 대결의식을 절절이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서 글쓰기가 지니는 의미가 무엇인지도 충분히 암시받을 수 있을 것이다. (’99. 6. 『예술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