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마음으로 듣다(태을금화종지) 4/4
도교와 탄트라는 입장이 완전히 다르다. 그들은 말한다. 하늘이 준 것은 무엇이든 간에 변형시키라고 조잡한 물질이라도 그 속에는 거대한 보화가 감추어져 있음에 틀림없다. 그대가 만약 호흡하는 방식을 바꿀 수 있다면 성적인 에너지는 변형될 수 있다. 호흡을 조절함으로써 분노도 변형된다. 분노가 솟구칠 때 호흡이 어떻게 변하는가를 살펴보라. 그리고 다음번에 화가 나거든 그대가 화가 났을 때 숨 쉬던 방식으로는 호흡하지 말라. 그대는 놀라게 될 것이다. 물론 그대는 화를 낼 수 없다. 그런 식으로 호흡을 하면 분노가 지탱하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다. 분노 대신에 연민이 생긴다.
그와 같이 성욕도 사라진다. 성욕 대신에 사랑이 솟아난다. 사랑은 정말 인간적이다. 그러나 성욕은 인간적이 아니다. 그것은 동물적이다. 그리고 어떠한 동물도 사랑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성은 동물적이고 사랑은 인간적이며 기도는 신적(神的)이다. 성은 사랑으로 변형되어야 하며 사랑은 기도로 변형되어야 한다.
성행위 가운데 호흡은 무질서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어떠한 목적을 갖고 혼돈 명상(chaotic meditation)을 선정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정화(catharsis)이다. 혼돈 명상의 무질서한 호흡은 그대에게 억압되었던 모든 분노와 성과 탐욕과 질투와 증오들을 뒤흔들어 표면으로 드러낸다. 그것은 하나의 크게 씻어 내는 과정이다. 성 속에서 호흡은 무질서하다. 사랑 속에서 호흡은 음악적이다. 기도 가운데서는 호흡이 거의 정지한다.
마음과 호흡은 서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빛의 회전과 호흡의 조절이 일치되어야 한다.
숨을 내쉴 때는 양 눈에서 빛이 흘러나오게 하라. 숨을 들이쉴 때는 그 빛을 도로 흡수하라. 호흡 작용과 빛의 회전 사이에 고리를 만들어라. 이 방법이 그대로 하여금 호흡에 다른 무언가를 상상하지 않도록 해 줄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상상이다. 그대는 무언가를 부여하였다. 그래서 조사께서는 인간은 생각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적어도 처음에는 말이다. 상상을 떨쳐 버릴 수 있는 것은 가장 높은 단계에서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이용할 수 있다. 그것을 디딤돌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숨을 내쉴 때는 빛이 나가고 있다고 상상하라. 들이쉴 땐 빛이 들어온다고 상상하라. 어렵게 생각할 것은 없다. 그대의 상상은 곧 호흡과 연결되어 하나가 될 것이다. 그렇게 이용하는 것이다. 이제는 호흡이 보다 고요해지고 평온해지도록 하라. 요가의 호흡조절(pranayama)과 같은 특별한 호흡법을 연마할 필요는 없다. 사람은 각자 자신에게 맞는 호흡의 리듬이 있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호흡도 또한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그대는 천천히 자신의 것을 찾아야 한다. 이것을 유념하라. 호흡은 고요하고 평온하며 음악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이를 위해서는 귀의 빛(light of the ear)이 전적으로 필요하다.
이제 조사께서는 또 다른 것을 소개하고 있다. 양 눈을 통해 빛이 들어오고 나가듯이 양 귀를 통해서도 빛이 들어오고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대는 빛이 귀를 통해 들어오고 나간다는 소리에 놀랄 것이다. 그러나 현대 과학자들에게 물어 보면 소리라는 것은 전기의 작용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소리는 하나의 전기이다. 조사께서는 그것을 옛날 언어로 빛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소리는 귀를 통해 들어오고 나간다. 눈이 신체의 남성적인 부분이라면 귀는 여성적인 부분이다.
눈이 밖으로 향한다면 귀는 안으로 향한다. 그래서 세상에는 두 종류의 명상법이 존재하고 있다. 눈에 관한 것과 귀에 관한 것이 그것이다.
귀의 에너지(earenergy)에 관한 명상법들은 여성적이고 수동적이다. 단지 듣기만 하는 것이다. 다른 것은 할 필요가 없다.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 나무들 사이로 바람이 스쳐가는 소리, 또는 음악이라든가 차량들의 시끄러운 소음 등 그저 듣기만 할 뿐 다른 것은 하지 않는다. 그러면 거대한 침묵이 찾아들고 엄청난 평화가 그대 위에 쏟아진다. 귀를 통해 가는 것이 눈을 통해 가는 것 보다 쉽다. 귀는 수동적이고 공격적이지 않기 때문에 더 쉬울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으면서 단지 그것이 일어나게만 해 준다. 귀는 받아들이는 문인 것이다.
눈의 빛 (light of the eye)이 있고
귀의 빛 (light of the ear)이 있는 것이다.
눈의 빛은 바깥에 있는 일월(日月)의 광(光)이 결합된 것이요,
귀의 빛은 안에 있는 일월의 정(精)이 결합된 것이다.
이와 같이 정 (seed)이라고 하는 것은 응집의 형태의 빛이다.
근원은 같으나 이름만 다를 뿐이다.
빛과 소리는 이름만 다를 뿐이다. 인도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조만간에 과학은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할 것이다. 어떤 종류의 선율이 연주되면 불이 켜진다는 것이다. 연주자가 초를 앞에 놓고 어떤 곡(rage)을 연주하면 초에 불이 켜지는 것이다. 지금은 그것이 불가능하게 여겨질 것이다. 단지 하나의 전설이나 비유로 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소리도 하나의 전기인 이상 일정한 형태의 진동음은 그것을 해낼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실험들이 진행 중에 있다. 머지 않아 그것을 과학적으로 해내는 일이 가능해질 것이다.
군인들이 다리 위를 행군해 갈 때 규칙적으로 걷던 발걸음을 맞추지 말라는 지시를 받는다고 한다. 보통 그들은 일정한 리듬에 맞추어 걷는다. 왼 발 오른 발, 왼 발 오른 발, 그런데 부대가 일정한 리듬에 맞추어 다리 위를 걸어 갈 때 다리가 무너지는 일이 여러 번 있었다. 그래서 부대가 다리 위를 이동할 때는 발걸음을 맞추지 말라는 지시를 받는 것이다. 어떤 일정한 진동이 다리를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캐나다에서는 식물과 음악과의 관계에 대한 실험이 있었다. 작은 실험이었지만 엄청난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그들은 같은 종류의 꽃나무를 같은 시간에 같은 거름을 주어 각각 두 곳에 심고는 같은 정원사로 하여금 가꾸게 했다. 모든 조건이 두 개의 화분에 똑같이 적용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한 화분에는 라비상카라(Ravi Shankar)의 영창(sitar)이, 그리고 다른 화분에는 팝 음악이 줄곧 연주되게끔 장치를 했다.
그러자 매우 놀랄 만한 현상이 일어났다. 줄곧 팝 음악만 듣고 자란 꽃나무들은 마치 도망치고 싶은 듯이, 그것에 식상해서 듣고 싶지 않다는 듯이 기계 장치의 반대편으로 뻗어 나갔다. 게다가 그들은 피는데도 시간이 더 걸렸을 뿐만 아니라 꽃들도 작고 볼품이 없었다. 다른 화분의 두 배에 달하는 시간이 걸릴 정도였다. 한편 라비상카의 시타 음악을 듣고 자란 꽃나무들은 기계 장치 쪽으로 뻗어가기 시작 했다. 그들은 마침내는 기계 장치를 둘러싸고 포옹하더니 완전히 덮어 버렸다. 그들의 성장은 다른 것의 두 배나 되었고 꽃들도 훨씬 컷으며 생각보다 일찍 피었다.
식물조차도 소리와 파장의 차이를 느낀다. 오늘날은 하늘을 나는 비행기의 소음이 사람들을 미치게 만들고 있다. 그 소음들이 너무 급격히 불어나고 있어서 인간이 견디고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은 거의 기적이 될 것이다.
근원은 같으나 이름만 다를 뿐이다.
사실 삼라만상은 똑같다. 빛, 불, 전기 등 그대가 무엇으로 부르든 간에 그들은 똑같은 것으로 만들어져 있다. 다른 것은 오직 겉모습뿐이다.
그러므로 들음匿諦과 봄(明)은 똑같은 영묘(靈妙)한 빛이다.
이해(understanding)는 귀를 통해, 명료함(clarity)은 눈을 통해 얻어진다. 명료함은 남성적이며 이해는 여성적이다. 그래서 나는 항상 여성이 제자가 되는 것이 더 쉽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성은 남성보다 더 복종할 줄 알고 더 이해할 줄 안다. 남성은 논리적인 명료함, 합리적인 확증을 요구한다. 그러나 여성은 무언가 다른 것, 즉 분위기 있는 것을 요구한다. 여성은 직관적으로 들으며 말하는 사람의 진동을 느낀다. 무슨 내용인가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녀의 관심은 그것을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어떻게 말하는가, 어디로부터 그것이 발원되는가에 가 있다. 남성은 문자에 몰두한 채 남아 있다.
모든 사람이 쉽게 구할 수 있는 책자 형태의 인쇄물과 경전들로 인하여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원래 모든 가르침은 스승의 입을 통해서만 전수되었다. 그것은 말로 전달이 되었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중심은 귀였다. 이제 책들이 보급되었다. 이전에는 크리슈나(krishna)가 말을 하면 아르쥬나(Arjuna)가 그것을 들었다. 귀로 전달이 되고 커다란 이해가 생겨났다. 변화가 일어났다. 아르쥬나는 여성적으로 접근한 것이다.
오늘날 그대는 기타를 읽는다. 읽는 것은 눈을 통해 일어나지만 그 눈은 이해와는 거리가 멀다. 눈은 논리적인 명료함을 원한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접근이다. 수세기에 걸쳐 세계의 모든 종교들은 자기들의 경전이 문자로 쓰여져서는 안 된다고 고집을 하였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일단 그것이 문자로 정착이 되면 눈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고 귀는 밀려나게 된다. 나의 말을 듣는 것과 나의 강의를 읽는 것은 전혀 별개의 일이다. 읽을 때 그대의 마음은 남성적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귀로 들을 때는 여성적이 되는 것이다.
좌선(sitting down)할 때는 눈꺼풀을 내리고 양 눈을 사용하여 기준을
정한 뒤 시선을 아래로 향한다. 그것이 잘 되지 않으면 마음을 돌려
호홉에 귀 기울인다. 그 호흡의 들고 나는 소리가 귀에 들려서는 안 된다.
소리 없는 호흡을 듣는 것이다. 호흡에 소리가 있게 되면 호흡은
거칠고 얕아져서 깊게 뚫지를 못한다. 마음은 아주 가볍고 미미해져야 한다.
마음은 놔버려지면 놔버려질수록 미세해지고 미세해지면 미세해질수록
고요해진다.
호흡에 귀 기울여 보라. 만약 소리가 들린다면 그것은 거칠다는 의미이다. 호흡의 들고 나는 소리가 귀에 들릴 때 그것은 거친 것이다. 단지 느낄 수만 있을 뿐 들리지는 않을 때, 그것은 잠잠하고 고요한 것이다. 그것이 그대 자신과 존재와 실재가 조화 속에 머무는 올바른 길이다. 호흡이 깊어질수록 그대 자신도 깊어진다. 그리고 때때로 멈출 때..... 그렇다. 그것은 정말 멈춘다. 그것은 여기 있는 제자들에게 많이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그들이 내게 와서 묻는다. 호흡이 멈추면 자신이 죽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두려워해서 말이다.
극도로 고요해진 마음은 홀연히 멈추게 된다.
그때는 진식이 나타나고 마음의 본체가 의식되기에 이른다.
그대가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래서 나는 사구나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멍청이 같은 사구나여, 그대는 놓쳐 버렸다. 다음에 그것이 일어날 때는 놓치지 말아라." 호흡이 멈출 때 참 호흡(true breathing)이 나타난다. 호흡에 의존하지 않고 영원하며, 육체에 구속되지 않고 이 몸이 먼지가 되어 사라지더라도 부서지지 않을 영원한 삶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그 순간 찬란한 의식이 빛을 발한다. 그것이 불사(不死)요, 불멸이요, 영생(永生)이요, 무량수(無量壽)다. 그대는 붓다가 된다. 완전히 얼 차린 존재, 완전히 깨어 있는 존재, 그것이 바로 붓다의 의미이다.
마음이 미세해지면 호흡도 미세해진다.
마음의 조그만 움직임도 기(氣)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호흡이 미세해지면 마음도 미세해진다.
기의 조그만 움직임도 마음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기부터
조절해 나가야 한다. 마음을 직접 조절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기가 조절 수단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응집된 기를 유지해 나가는 방법이다.
제자들이여, 그대들은 움직임의 본성(The nature of movement)을 아는가?
움직임은 외적 수단에 의해 야기될 수 있다. 그것은 지배
관계를 일컫는 말일 뿐이다. 단순히 뜀박질만으로도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있다. 그런즉 고요한 집중으로 그 움직임을 멈추게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마음과 기가 어떻게 서로 영향을 미치는가를 알았던 대성인
(大聖人)들은 후세 사람들을 위하여 보다 쉬운 방법을 고안해냈던 것이다.
그대는 알고 있다. 뜀박질을 할 때면 호흡이 매우 거칠어지고 점점 빨라진다. 따라서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마치 석고상처럼 완전한 침묵 속에 앉아 있는 연화좌(lotus posture)와 같은 요가 자세는 뜀박질의 반대이다. 그것은 단지 그대의 호흡이 고요해지도록 돕는 보조적 수단이다.
뜀박질만으로 빨라지는 호흡이라면 반대로 돌부처처럼 앉아 있을 때는 고요해질 것이다. 아무런 몸의 움직임도 없이 바늘 끝만큼이라도 움직이지 않고 앉아만 있으면 분명히 호흡은 아주 느려지다가 나중에 가서는 아예 멈출 것이다. 처음에는 그것이 단지 몇 초밖에는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심장마비나 또는 어떤 잘못된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두려워 하지 말라. 그것은 심장의 발작(heart-attack)이 아니라 신의 발작(god-attack)이다.
"암탉이 계란을 부화시킬 수 있는 것은
그 마음으로 항상 듣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중요한 비결이다. 기(氣)를 따뜻하게 함으로써 암탉은 계란을
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따뜻한 기는 단지 알껍질만 덥히는데
그친다. 그 내부에까지는 침투할 수 없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그
기를 이끄는 것이다. 그것은 들음으로써 된다. 그렇게 일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마음이 들면 기도 들게 되어 온기曠鐵를 얻은
병아리는 자라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암탉은 둥우리를 떠나면서도
항상 귀를 기울여 듣는 자세를 늦추지 않는다. 그와 같이 정신의
집중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암탉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암컷, 모든 여성, 모든 어머니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다. 그녀가 깊은 잠에 빠졌을 때는 뇌성벽력이 쳐도 들리지 않지만 아이가 울거나 뒤척거리면 마치 계속 주시하고 있었던 것처럼 즉시 일어난다. 기차가 지나가고 비행기가 씽씽대도 깨어나지 않던 그녀다. 그러나 아이가 조금만 뒤척거려도 그녀는 즉시 깨어나는 것이다. 엄마의 모든 청각은 아이에게 집중되어 있다. 엄마는 귀를 통하여 아이와 마음이 통해 있다. 엄마는 마치 아이의 고동 소리를 듣는 것처럼 끊임없이 귀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정신의 집중이 깊어지면 자신의 호흡과 심장의 고동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다는 것, 이것이 바로 모든 수행자들이 귀와 연결되고자 하는 이유이다. 처음에는 호흡이 거칠기 때문에 그것이 귀에 들릴 것이다. 그러나 계속해서 듣고 있노라면 그 노력 자체가 고요함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리하여 듣는 것이 깊어지고 무르익어, 이제는 어떻게 깨어 주시하는가를 깨닫게 되었을 때 모든 소리는 사라질 것이다. 바로 호흡이 멎는 순간이 찾아오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환희와 통찰, 견성(見性)과 삼매의 위대한 순간이다.
정신의 집중에 끊어짐이 없고 따뜻한 기도 밤낮 단절됨이 없기 때문에
영혼이 소생하게 된다. 영혼이 소생한 것은 먼저 마음 작용(心)이
소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명상 속에서는 갑자기 심장이 죽어가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것을 심장 발작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호흡이 멎어갈 때 그대는 마음도 죽어나감을 느낄 것이다. 사실 그것은 죽어가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마음이 생겨나려는 징조인 것이다.
사람이 마음을 죽일 수 있을때 원신(元神)이 소생하게 된다.
마음을 죽인다는 것은 그것을 말라 시들어 버리게 한다는
말이 아니라 갈라지지 않고 모여 하나가 되게 한다는 뜻이다.
만약 마음이 죽어진다면 꽃은 피어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태을금화종지』의 비밀이다. 그대는 그대 자신이 가루도 존재도 없이 사라지듯 죽어 없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그대는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 올 수 없다." 고 한 말의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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