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무자의 시세계 인식의 현장성 혹은 시적 진실 김 송 배 (시인. 한국문인협회 시분과회장) 1. 현장 인식과 사회성 진단 현대시의 시적상황이 적시하는 그 원류에는 시인들의 정서가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설정한 후 몇 갈래의 지향적 사유(思惟)로 정립되어 정련된 언어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시적 시공(時空) 개념은 오래전부터 우리 시인들이 이미지뿐만 아니라, 주제의 착상에도 상당한 열정을 투자하고 있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만약 사람이 이 마력적인 시의 의미를 알게 되는 순간부터 그대는 아름다운 생(生)을 알게 될 것이라는 비장한 언지(言旨)처럼 우리들의 시적 애정으로 투영하는 현실의 수용이 어쩌면 시공의 범주(範疇)에서 삶의 상관관계를 긍정하고 있음을 현시(顯示)하고 있다. 여기 최무자 시인의 시집『밥, 꽃이 되다』를 일별(一瞥)하면서 이와 같은 시공의 범주에서 전개하는 현장성의 인식이 곧 최무자 시인의 시적 진실과 무관하지 않다는 필자 나름대로의 해석을 설정하고 그의 시 읽기를 진행하고자 하는 저의를 실토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최무자 시인은 먼저 그의 정서의 골 깊은 원천(源泉)에는 이미 그가 ‘시인의 말’에서 말했듯이 ‘내가 처한 곳은 어디든 감사의 땅이었다’는 긍정과 수용미학이 잠재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看過)할 수가 없다. 이는 ‘그 곳은 늘 살아있는 현장으로 나는 그들과 같이 호흡하고 싶었고 / 내 망막 속의 셔터는 언제나 열려 있었다’는 전제가 바로 그의 시적 지향점의 출발이며 주제와 메시지의 창출 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현장은 다음과 같이 사회적 현실이 적나라(赤裸裸)하게 그의 심성과 상관하면서 시의 사회성이라는 또 다른 인식의 축을 형성하고 있다. 환전되지 않을 땅 억(億) 소리 없는 세상 여깄나 싶더니 내 사랑 김포 그 처녀 하루아침에 눈 먼다. 누군가 자꾸 흔들어 깨우는 반도의 땅, 한반도 최초의 벼 재배지에서 조차 쌀들은 이제 노래하지 않는다. --「김포 일기」중에서 비 내리는 바다 월미도 선착장 유람선에선 홍안의 러시아 무용수들 온몸 흔들며 어부가 된다. 필리핀 곡예사도 어부가 된다. 난장의 박수 소리 따라 건져 올리는 하루의 양식 - 싱싱한 활어 코리안 머니, 머니, 머니. --「그 바다」전문 이렇게 시적 상황(situation)은 다분히 사회성을 포괄하고 있다. 지금 살아가고 있는 현실의 모습이 어떤 갈등과 고뇌와 교차하고 있다. 인간은 혼자 고립된 상태의 생활이 불가능하다. 어떤 형태로든지 상호 교류하면서 집단을 이루면서 사회를 형성한다. 현대시의 구도도 이처럼 그 사회에서 분리될 수 없다. 시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사회의 현실에 직면하면서 끊임없이 주제를 탐색하는 특성이 있다. 우리의 현실은 더욱 복잡다단하고 거기에는 모순과 불합리 등이 심리적으로 위협하는 상황으로 변하고 있기 때문에 시인들은 자기 내면에 침잠할 때 갈등은 심화하고 있다. 최무자 시인도 이처럼 그 복잡한 사고(思考)가 시의 구도에서 표현의 한 축으로 설정되어 있다. 곡창지대 김포평야가 ‘신도시 개발’과 더불어 안온한 정경이 사라지는 안타까움이 지적인 혜안(慧眼)으로 분해되고 있다. 또 한편 ‘러시아 무용수들’이나 ‘필리핀 곡예사’가 자본주의의 ‘코리안 머니’를 위해서 ‘월미도 선착장 유람선에’서 절감하는 사회성을 의미심장한 의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천박한 자본주의라 일컫지 마라 / 오늘의 사람 노릇은 / 명분보다 / 기름진 자본에 있다는 것을. / 하느님도 많이 드리는 자 앞에서 / 더 겸허한 눈빛 아니시던가.(「미녀와 야수」중에서)’라는 언술과 ‘어쩌지요 / 날마다 치워도 눈처럼 쌓이는 / 스팸 아닌 저 슬픔의 곰팡이꽃들을. / 꽃들이 묻는 안부 속엔 / 번쩍이는 칼을 든 어설픈 자본의 웃음과 / 성공학 강사의 입술이 둥둥 떠내려 오기도 하네요.(「바보가 된 청소부」중에서)’라는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서 감지할 수 있는 ‘자본주의’의 한 단면을 용해함으로써 최무자 시학에서 시의 사회성은 절정에 이르고 있다. 시는 본질적인 면에서 인생의 비평이라고 말한 매슈 아놀드()의 이론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하드라도 인생과 사회의 분리는 애매해진다. 시인들이 일반인으로서의 공통성의 상위에 서고 그 작품의 주제가 사회에 대해서 다루는 능동성일 때 시의 사회성은 비평기능도 포함하게 된다. 이러한 능동적 의식이 그의 정서나 사유의 측면에서 강렬하게 분사(噴射)하는 인식의 단정은 다음과 같이 현현되고 있다. 그래도 아직은 내 안의 피 따듯하거든. 저 땅속에 촘촘히 박힌 별들도 따듯하고 지하 깊숙히 흐르는 물소리도 들리네 그러니 너무 서둘러 날 거리의 부랑자라 부르진 마 잠시 지상의 번호를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니. --「노숙지(露宿))에서」중에서 우리 시인들이 응시(凝視)하는 외적 상황과 대칭하는 사유의 원류에는 언제나 그의 철학이 내재하고 있다. ‘노숙지에서’ 절감한 화자(話者)의 인식은 ‘거리의 부랑자라 부르지 마’라는 극단의 처방을 적시하고 ‘지상의 번호’라는 생존의 형태와 교합하지 못한 ‘잠시’의 오류가 있을 뿐이라는 희망을 메시지로 띄우고 있다. 2. ‘고장난 네 시계’의 물음 최무자 시인은 사회적 인식에서 약간 불안한 표정이 나타났다면 다시 현실과 자신의 밀접한 관계에서 파생되는 실제 상황이 시의 구도에 어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첨단문명들과의 갈등이나 고뇌가 시적 진실과 융합하면 어떤 현상이 나타날까. 단축번호 1이 말한다- 나는 태양이라고. 2가 말한다 -나는 달, 3은 별, 그리고 행성 지구엔 온갖 이름 모를 번호들의 아우성. 지구 번호 4는 너. 5는 사랑, 6은 가족, 7은 통장 비밀번호, 8은 새 집을 기다리며 줄 서있는 사람들의 청약번호, 9는 죽은 나무, 거기 기생하는 딱정벌레와 흰개미들의 거래 암호들. 하늘도 땅도 온통 세상은 숫자 뒤에 가려져 숨 쉬고 있는데 나는 아직도 내가 나를 부를 그 고유번호를 알 수가 없다. --「번호로 살아 있다」전문 하늘높이 떠있는 사람의 요새 그 성 문 앞에서 우리는 잠시 망설인다 굳게 닫친 철문의 몸은 완강하다 아버지는 우물 정井 아들은 샾# 이라 더듬으며 성 문의 부호를 기억한다 먼 하늘에서 두레박처럼 승강기가 우리를 실어다 주었다. 아버지의 집이 심연의 우물이면, 아들의 집은 아직 분분한 소리의 시간 공중 정원에 착지한 우리는 해와 달, 별을 보며 서로 다른 창을 연다. 별이 진 밤 어쩌면 갑갑해진 우물 속 메아리는 아들의 방문으로 흘러들거나 아들의 목마른 노래 하나 아버지의 우물가를 기웃거리겠다. 그리하여 날이 새면 서로의 목이 조금씩 길어져 있는 살붙이 눕다간 흔적만이 적요로운 아득한 사람의 집. --「아득한 집」전문 최무자 시인의 의식은 새 문명과 그의 이기(利器)를 적절하게 활용하면서도 현실에 대한 지적 감도가 아직도 미확인이며 불확실성에 정치(定置)하고 있으나 이를 위한 의문이 상존하고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이는 그가 ‘단축번호’에서 ‘거래 암호’가 제시하는 이미지는 바로 현실적 사고의 복합성이 보편성을 추월하는 지성적이며 지향적인 현실 비평류에 속한다. 시적 자아는 ‘나(혹은 내)’라는 의인화로 ‘나는 태양이’며 ‘달’로 분화하여 ‘통장 비밀번호’이거나 ‘새집을 기다리며 줄 서 있는 사람들의 청약번호’로서 ‘죽은 나무, 거기 기생하는 딱정벌레와 흰개미들의 거래 암호’로 ‘온통 세상은 숫자 뒤에 가려져’ 있어서 ‘나는 아직도 내가 나를 부를 그 고유번호를 알 수가 없다’는 의문형 결론을 적시하여 ‘나’와 현실 문명과의 가시적인 심리적 충돌양상이 예감할 수 없는 상황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형상화하고 있다. 또한 그는 ‘아득한 집’이라는 미지의 공간에 존재하는 ‘하늘높이 떠있는 사람의 요새 / 그 성문 앞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세대 차이에 의한 ‘우물 정井’과 ‘샆#’이라는 ‘성문의 부호’를 통한 현실적 갈등요소들이 형상화하는 경향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영국의 시인 존슨(B. Joonson)의 언지대로 시란 이성의 조력에 상상력을 동원하여 진리와 즐거움을 결합시키는 예술이므로 시의 본질은 어떤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예기치 않은 것을 산출함으로써 경이와 환희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무자 시인은 다시 ‘싸이버’의 세상에서 절감하는 현대의 감응(感應)이 다양하게 접목되어 지금까지 우리들의 보편적 사유를 승화하고 변화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심도 있게 농축시키고 있다. 내가 걸어야 할 길들이 먼저 와 있다. 나는 모르는 길들이 응축되어 캡술에 들어 있다. 언제라도 냉동고 문만 열면 나보다 먼저 온 정보의 알집들이 언 채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별로 할 일이 없다. --「사이버 냉동고」전문 느린 것은 거추장스러운 것. 클릭! 클릭! 순간의 타전으로 그대의 오장까지 엿볼 수 있는 광속도의 사랑, 아니 거래. 빛의 암호로 만나는 싸이버 바다에서 언제나 가슴 없는 익명의 난민들 - 그들만의 문법 혹은 부호. 속도의 투사들만 살아남는 수상한 세월 앞에 느린 것들의 향방은 어디? 정말 빠른 것은 좋은 것이야? --「빛바랜 사진」중에서 그렇다. 첨단 싸이버 시대에서 실감할 수 있는 소재와 주제는 새로운 감각의 시적 형태를 제시하는 특성을 이해하게 된다. ‘70년대 아날로그 사랑법’에 비하면 ‘우리는 별로 할 일이 없다’ 그러나 ‘정말 빠른 것이 좋은 것’인지는 최무자 시인이 앞으로 궁극적인 그 해법을 찾아 나서야 할 것이다. 이렇게 아날로그 시대가 디지털시대로 전환하는 현실적 사회상이 다변적인 정서로 환기하면서 현대시의 이미지나 상징도 다양하게 변모하여 시성의 구성요소와 주제의 설정 그리고 시적 진실이 새로운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작품「유효기간」에서도 ‘유효기간 2015년’이란 시간성과 접하면서 ‘저. 치밀히 계산된 숨막히는 시간’과 ‘죽어서도 썩지 못하는 형벌의 시간’ 혹은 ‘그 시간 앞에서 비로소 안도하는’ 현상들은 어쩌면 그의 심저(心底)에 축척된 평소의 순정성이 외적(外的) 사물들과의 융합이나 화해의 의식으로 흐름을 유지하려는 강한 시적 욕구이기도 할 것이다. 그는 결론적으로 지나간 시간과 현실의 괴리(乖離) 등에서 생성하는 갈등들이 ‘추억이 다시 묻는다 / 고장난 네 시계에게(「추억도 진화한다」중에서)’라는 과거, 현재, 미래와 상관하는 의문으로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3. 인생의 징표 혹은 그 언어 최무자 시인은 이러한 사회적 요인이 내면의 지적 정서와 복합적으로 상충하거나 융화하는 단계에서 다시 광대한 인생의 가치관을 탐색하게 된다. 인생이라는 지표가 하나의 외적요인과 접합하면 인생관과 가치관이 시적 진실로 승화하는 구도를 엿볼 수 있게 한다. 나른한 오후 미용실에서 졸다 읽은 찢어진 잡지 나는 갑자기 무릎을 친다. 매뉴얼 읽으면 모든 답이 있는데 인생별거 없네. 가전제품 같은 인생. 근데 의원님 질문있어요. 인생도 리콜되나요?? --「인생사용설명서-어느 퇴역의원의 잡지기사에서」전문 요즘 시법으로 자주 등장하는 스토리텔링으로 시의 구도가 특이하다. ‘인생 별거 없네’라거나 ‘인생도 리콜되나요’라는 어조는 바로 ‘가전제품 같은 인생’에 대한 ‘사용기간’을 풍자적으로 묘사하고 있어서 그 의미성이나 메시지는 인생문제로 한정되어 더욱 확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살아있다는 모든 것 / 남모르게 떨군 무심의 허물 뒤 / 그대 언제나 돌아보라 // 모든 먼 지는 / 누군가의 손끝에라도 묻어 / 다시 일어서고 싶으니.(「먼지에 관한 명상」중에서) - 기계도 잠시 생각이 필요하다. / 세탁기처럼 돌기만 하던 날들. / 내 안의 센서가 넌지시 속삭인다. / 가끔은 하늘도 한번 바라보고 / 물소리, 새소리 들으며 / 쉬엄쉬엄 고개를 넘 으라고.(「몸살」중에서) - 낙과여, 그대에게도 한때는 / 한없이 어질고 따스한 햇살과 / 풍요로운 대지의 입맞춤 / 너울대던 훈풍의 위안이 / 왜 아니 없었을까.(「낙과」중에서) - 그래 우리 이렇게 물의 숨결처럼 흐르는 거다.(「저문 강」중에서) - 지기 위해 피어났던 / 한 때의 숨가쁜 / 추락마저 눈부신 / 어떤 목숨의 자태여.(「낙화 」중에서) 보라. 그가 적시하는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은 지금에사 돌아보는 인생 과정에서 성찰한 가치관의 탐구이다. ‘다시 일어서고 싶으니’ 혹은 ‘쉬엄쉬엄 고개를 넘어라고’하는 화자의 어조는 이러한 순정성의 주제가 인생의 징표이며 그 언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너울대던 훈풍의 위안’과 ‘추락마저 눈부신 / 어떤 목숨의 자태’는 바로 인생의 회상에서 탐색한 성찰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렇게 물처럼 흐르는’ 상황은 앞에서 보았던 갈등이나 고뇌의 요소들과의 화해를 통한 수용미학이 동승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어조는 주어진 한생을 위한 긍정적인 최무자 시인의 지고지순한 철학일 수도 있다. 그것은 그가 명징(明澄)하게 탐색하려는 인식의 지향성이 가치관이라는 근엄한 최상의 목표가 인생과 직결하는 흐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생을 지고 온 다리마저 불가마 속에 던져주고 가던 이 오늘 우리 곁에 왔습니다 못내 이승의 너울 벗고 흰 뼈의 넋이 되어 떠밀려 먼 길 떠나더니 지금 우리 식탁에 희디 흰 젖빛의 슬픔으로 다시 찾아와 한 그릇 물이 되어 바라봅니다. 누구십니까 죽어서도 한사코 갚으려는 전생의 무거운 짐 진 이 가없이 처연한 눈망울의 당신은. --「흰 뼈가 있는 식탁」전문 손 안의 그 까만 기계벌레만 던져 버리면 당신은 간단히 섬이 된다. 다시 시작하라, 그곳에서. 원시의 부싯돌로 불을 만들고 지천에 살아 있는 말없는 것들과 소통하라, 처음의 언어로. --「섬」전문 최무자 시인이 절규하는 ‘처음의 언어’는 예사롭지가 않다. 또한 ‘못내 이승의 너울벗고 / 희 뼈의 넋이’ 된 후생(後生-여기서는 현재의 진행형이다)의 상황이 현실적 일상성과 교합하면 시의 진정한 의미의 창출은 차원을 더욱 높이게 하고 있다. 그가 취택하는 ‘식탁’과 ‘섬’의 이미지는 다양한 창조의 분수를 제공하지만, ‘전생의 무거운 짐’과 ‘지천에 살아있는 말없는 것들’이 투영하는 메시지는 삶과 인생을 초월하고 있어서 ‘한 그릇 물이 되어 바라’보거나 ‘다시 시작하라’고 절규하고 있으며 ‘생전 망자의 뒤척이던 생의 징표처럼 제기 위에 올려져 알 수 없는 상형문자로 누워 있다.(「문어」중에서)’는 자아와 존재의 원대한 주제까지도 추적하는 심오한 언어를 조망할 수 있다. 4. 結-서정적 인식과 시의 교감 최무자 시인은 이 시집『밥, 꽃이 되다』의 표제시에서 읽을 수 있는 바와 같이 그의 인식에는 시의 사회성 그 이면에 완숙한 서정성이 내면 깊이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덕유산 무주 구천동 가을 햇살 따라 찾은 산채나물밥집. 꿀벌들이 내려앉아 나물냄새 맡는다. 시는 밥이 되지 못하지만 이런 풍광 속 밥은 한편의 시가 된다. 벌은 지가 시를 그리는지 모른 채 밥 꽃에 내려 앉고 밥은 지가 꽃인 줄도 모르고 소반 위에 정갈히 피어 있다. 누군가의 첫 수저를 기다리는 저 맑고 부드러운 목숨의 소리 벌과 나누는 가을 성찬 밥 꽃이 되다. 이렇게 ‘이런 풍광 속 밥은 한 편의 시가 된다’고 정의함으로써 ‘벌과 나누는 가을 성찬’에는 ‘밥, / 꽃이 / 되다’는 결론을 도출하게 된다. 그는 벌과 밥과 시와 꽃이 서로 상관성을 가짐으로써 가을의 시간성이 ‘산채나물밥집’의 공간성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면서 더욱 ‘시’를 극대화하는 상황의 구도를 확대하고 있다. 그가 시를 위한 헌사(獻辭)는 어쩌면 ‘어머니’와 함께 시작하는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적막의 세월 안고 / 어머니 // 아직도 / 이승의 강 못 건너 / 눈발 속에서 / 자꾸 자꾸 / 뒤 돌아보신다(「첫눈」중에서)’거나 ‘저녁 무렵 / 아궁이 연기에 어머니의 바튼 기침 담장의 키를 낮추면 / 길 떠났던 소년 / 다시 돌아와 가지런히 신 벗어 놓고 잠들다(「옛집 1-유년의 판화」중에서)’, 그리고 ‘산동네 김장철, 장짓문 너머 툇마루 부산히 오가시던 어머니 동동 걸음 소리 문득 추운 선잠에서 깨어나면 비스듬히 벽에 걸려 내려다 보던-(「옛집 2-거울에 대한 기억」중에서)’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어머니’와의 소재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다음 작품「어머니의 시」는 어떤가. 목련 꽃망울이 돋아나던 어느 봄날 나들이길 어머니 잠시 꽃그늘에 앉으신다. -목련 꽃망울이 새색시 비녀 봉오리 같구나- 목련이 곧 시적 변용되던 어머니의 아름다운 말씀의 시. 내 문학적 모국어의 첫 스승. 여기에서 최무자 시인의 ‘시’가 감동적으로 형상화하는 어조가 바로 ‘목련이 곧 시적 변용되던 / 어머니의 아름다운 말씀의 시’이며 이것이 그에게는 ‘내 문학적 모국어의 / 첫 스승’이라는 대단히 중요한 원류를 발견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지 못한다. 이러한 변용은 곧 ‘어머니=시’라는 등식을 가능하게 하면서 생명의 모태에서 이미지로 투영하는 과정이 시라는 다른 정서를 정착시키면서 그가 갈구하거나 기원하는 미래지향적인 새로운 인생관의 모색을 창조하고 있다. 그의 시적 발상이나 전개는 ‘시를 쓰던 지바고의 새벽 눈빛 속 / 생의 아름다운 비밀처럼 피어있던 / 유리창 순백의 성에꽃들(「눈꽃」중에서)’과 ‘어떤 시인은 -머리에 환한 불을 켠 강철벌레-를 / 그의 시 속에서 그리던 그때 / 벼랑 끝에 서본 자들은 평지가 그리웠다. / 마음의 평지.(「난시」중에서)’ 등의 어조와 같이 최무자 시학은 바로 이러한 서정적이면서 안온한 사유의 범주에서 정립하려는 여망이 보인다. 현대시의 위의(威儀)는 그 시인의 시정신과 무관하지 않다. 최무자 시인이 천착(穿鑿)하는 주제 의식은 이러한 자아의 인식구도가 일반적인 평범성을 초월하고 현실적 갈등들이 ‘어머니’ 혹은 ‘옛집’ 등의 서정으로 환기하는 시법이 우리들의 공감영역을 확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대체로 현대시의 경향이나 주제의 투영은 존재의 문제에서 인식하는 방식을 지양하고 변화하는 현실의 문제들을 침착하게 탐구하면서 인생과 시와의 조화를 통한 인식의 화해를 염원하는 작품들이 감동을 유로(流露)하고 있음도 이해하게 된다. 그는 ‘나는 / 차마 내가 / 이렇게 / 혼자 비어 있는 그릇인 줄 / 몰랐습니다.(「백자(白磁)」중에서)’ 는 자아(自我)와 ‘애당초 지급된 우리 몸 속 한뼘 / 시간의 채권만 회수하려 드는 / 악덕사채업자 같은 그의 / 남루한 눈을 보신 적 있는지.(「길을 잃다」중에서)’ 하고 대아(對我)의 개념으로 살펴보면 그의 실질적인 진실이 부상(浮上)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그에게서는 ‘영혼’과의 교통(交通)을 전제로 하여 기원의 의지가 충만되어 있음도 읽을 수 있는데 ‘우리 영혼의 두레박이 / 당신과 피로 가득 차게 하소서(「어느 날의 고백성사」중에서)’와 ‘내 안에 계신 손님이여 / 어서 돌아와 / 두 손을 제게 / 내밀어 주시지요(「동행」중에서)’ 라는 간절한 어조가 바로 자아와 대아의 대칭적인 정서의 정립을 의미하기도 한다. 현대시는 시인의 지적사고와 그 자양분을 요구하고 있다. 시인은 항상 그 예민한 정서를 하늘에서 땅으로 굴리면서 알 수 없는 형체를 상상으로 구체화시켜서 의미를 부여하거나 경이로운 실체를 탐색하는 일이 중요하다. 최무자 시인의 이러한 열린 의식은 ‘아직은 덜 여물어서 시거나 떫은 맛’이라는 자신의 시에 대한 편견은 새롭고 숭엄하면서 신성한 시적 본질이 비범한 영감(靈感)으로 승화한다는 예감은 그에게서 더욱 값진 작품세계가 전개될 것이라는 신뢰가 충만하기 때문이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