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문화포럼 발표문
중앙아시아 한글문학의 교감
김 송 배
(시인.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1. 서-고려인들과의 문학적 교감
유라시아에서 생존하는 고려인들과 이들 사회에서 정립된 한글문학에서 대해서는 문외한이다. 그러나 1992년도에 한국문인협회가 모스크바에서 개최한 ‘해외문학심포지엄’에 참가하고 카자흐스탄의 알마티와 러시아의 성 베테르부르크를 돌아보면서 알마티의 고려인 문인들과의 교감이 있었던 일 외에는 고려인들의 문학에 대해서 따로 연구를 한 바가 전혀 없었다. 필자는 그 당시의 그들에 대한 ‘까레이스끼’의 눈물어린 모국어를 발견하고 가슴이 뭉클했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특히 고려인 문인 중에 삼진(三眞)이라 불리는 ‘한진, 리진, 허진’ 시인들을 만나서 직접 인사를 나눈 바가 있고 모스크바에서는 한국문인협회가 시상하는 해외한국문학상을 수상한 리 진 시인과 주제를 발표한 한 진 시인이 어느덧 20년 전의 추억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알마타와 그곳의 문인들을 회상하면서 작품 한 편을 완성하여 그해 『월간문학』에 발표한 바가 있다.
누가 어둠을 몰아 황량한 시베리아쪽으로 우리의 피울음을 섞었는가. 강압으로 둥지를 옮긴 한 마리 새가 모국어로 섧게 울고 있다. 뿌연 달빛 반세기를 그리움 싸안은 채 텐산(天山) 마루에서 어둠 속을 빙빙 돌아나가고 나뭇잎 가녀리게 흔들릴 때마다 까레이스끼는 더욱 목청 돋구어 모국어로 노래를 불렀다. 아직도 따스한 피가 너를 기다리며 꺼이꺼이 눈물로 세월을 훔쳐내는 나를 닮은 저 새야…… 한진 리진 허진…… 비록 주름살로 감추어 역사의 골짜기에 머문 한 점 구름이 가쁜 숨 몰아쉰 채 내 가슴 피멍으로 엉긴 밤일지라도 새야 새야 어둠을 살라먹고 어이할꺼나. 이제 막 생기 도는 나뭇가지 위에서 박 미하일 강 겐리에따 김 블라지미르 예고르위츠 리꼰스딴진 김기봉…… 용케도 강줄기 뜨겁게 흘러온 아, 우리의 새들이여 밤으로만 비상하는 알마아따의 새여 오늘도 텐산산맥 저 너머로 아우러지는 긴 너의 슬픈 노래 한 음절……
* 여기 등장하는 이름들은 알마아따에서 만난 사람들임.
--시집『혼자 춤추는 이방인』 수록「알마아따의 새」전문
유라시아 대륙, 특히 중앙아시아에서 우리 고려인들이 정착하여 어렵게 살아가면서도 우리 민족의 정신과 한글을 통해서 그들의 문화와 문학을 정립시킨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이 연해주에 정착하였다가 강제 이주를 당한 배경부터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1860년 연해주 포세트 지역에 한인 13가구 최초의 기록에 의하면 시베리아는 흑룡강과 우쑤리강을 경계로 중국과 러시아가 마주 이웃해 있고 우쑤리강 하구는 조선의 두만강과 합쳐진다. 시베리아에 대한 제정 러시아의 식민정책이 시작된 때는 러시아인들의 흑룡강 왼쪽 지역을 점유한 1643년부터 1646년 사이였다.
우리 한인들이 연해주에 최초로 살게 된 시점은 1860년 북경조약이 있기 훨씬 전부터였다고 한다. 1863년에는 본격적으로 한인들이 연해주로 이주를 시작하여 다음 해에는 185가구 999명이었으나 1869년에는 한반도의 북녘에 대기근이 일어나 1만 명으로 급증하였고 1902년에는 총 3만 2천여 명이 이민하였다.
그후 1910년, 경술국치 후에는 6만여 명에 달해서 블라디보스토크에 신한촌(新韓村)이 건설되기도 했다. 1932년에는 한인학교 380개와 잡지 등 6종, 신문 7종이 발행되어 한인들의 문화의 광장이 마련되었으나 1937년 9월 21일부터 11월 15일까지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 이주정책에 따라서 한인들 전원 중앙아시아(약 6천 km)로 강제 이주 당했다.
이는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소비에트라는 거대한 지배질서 아래 놓이게 되었으나 그들은 한국어 교육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도 한글로 문화(특히 문학)활동을 감행했다. 한글이라는 모국어를 매개로 창작활동을 했다는 것은 그들 자신의 정체성을 거대한 소비에트 지배질서의 이데올로기에 환원시키기를 거부하는 저항의 한 양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이주해온 중앙아시아의 고려인은 첫째, 연해주에 살던 고려인들로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에 의해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키즈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으로 이주된 약 20만 명의 한인과 그 후손들이며 둘째, 일본군에 강제 징용되었던 일본 식민통치하의 한인들과 그들의 후손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할린에 잔류되었다가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사람들로 분류해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우즈베키스탄에 약 20만명, 카자흐스탄에 약10만명 이 거주하는 한인사회에는 우리말로 발행된 유일한 신문이었던 『레닌기치』(강제 이주 전까지 연해주(원동)에서 발간된 『선봉』의 후신으로 1990년 12월 31일자로 폐간됨.)는 고려인들의 언론매체였고 고려인들이 문학작품을 발표할 수 있었던 지면이었다. 그후 창간된 『고려일보』가 고려인 문학의 매체로 자리 잡고 있다.
이처럼 고려인들의 문학 개관을 위해서는 먼저 장사선과 우정권이 펴낸『고려인 디아스포라 문학연구』와 강회진의『아무다리야의 아리랑』을 통해서 그들의 문학사적 이해와 교감이 이루어졌으며 인터넷 까페 ‘카자흐스탄 문화마당’에 수록된 고려인에 대한 정보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음을 밝혀둔다.
2. 고려인들의 시문학의 양상
그동안 당시 중앙대 이명재 교수가 국제화와 다문화, 다민족 사회 추세인 오늘날 중앙아시아를 비롯한 구소련 지역의 고려인 문학이 우리에게 중요한 실체의 대상임을 절감하고 일찍이 이 방면에 심취하여 연구를 거듭하여 많은 담론과 교감 방안을 제시한 바가 있다.
그의 논문「고려인 문단의 현황과 자료의 체계화-중요성과 접근방향을 중심으로」를 살펴보면 1) 고려인 소비에트 문학 건설기(1925~1937)로서 구한말 이래 돈벌이나 독립운동 등으로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쑤리스크 등지에 모여 살던 조선 동포들 사회에 점차로 조선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문화예술적인 면에서 극장을 가진데 이어 초보적인 신문학을 시작한 단계이다. 이 기간에 당시 한반도의 유력한 작가 조명희가 망명하여 그곳에 한인 청소년들에게 한글문학을 가르치고 손수 모범을 보이며 창작활동을 이끌어온 주축을 이루게 된다.
2) 중안아시아 강제 이주 및 수난기(1937~1953)로 고려인에 대한 중앙아시아로 무자비한 이주가 행해진 이후의 척박한 문화여건과 스탈린의 공포정치의 탄압시기이다. 소련지역의 고려인은 암흑기라고 할 만큼 소련공민권의 지위도 확보하지 못한 채 겨우 한글신문 『레닌기치』에 소박한 한글 작품을 발표했다. 소련에 경직된 이데올로기와 레닌과 스탈린에 대한 직설적인 송가적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3) 재소 고려인 문학의 부흥기(1953~1991)로 스탈린 사후에 개선된 재소 고려인에 대한 지위 향상과 더불어 당이나 정부에서 고려인 문단활동을 지원받아 활성화하는 시기이다. 후루시초프 집권에 의한 다소 인권보장 추세 속에서 북한에서 선발된 모스크바 유학생 중 탈북한 여러 사람들이 당시 사회주의 종주국에서 생활하던 중에 북한의 정치와 제도에 회의를 느끼면서 새로이 고려문단에 합류하여 그들의 진실을 밝히고 바르게 살자는 의미로 본명 대신 필명을 사용한 삼진 문인(三眞文人) -리진, 한진, 허진)의 가세 역시 부흥기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4) 알마타 한글문단의 위기와 재정립기(1991~현재)에는 구소련의 붕괴로 변모되고 고려인 작품의 모국(母國) 왕래가 열렸지만, 소련 한글문단은 위축되고 있다. 당에서 출판비를 지원 받아 내던 작품집들이 끊기고 한글신문 독자가 격감하면서『레닌기치』가 축소되어 『고려일보』로 바뀐 채 새 국면에 이르게 되었다. 이처럼 한글문단의 쇠퇴현상은 한글 해독 능력을 지닌 세대들이 노화하거나 별세하는 현상으로 그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후 지난 2006년11월에는 중앙아시아문인협회에서『고려문화』를 창간하게 되었다. 편집위원 최 석은 ‘『고려문화』를 펴내며’에서 ‘『고려문화』는 이미 작고하신 고 양원식 선생과 최 석의 만남에서 발간의 뜻이 모아지게 되었다. 침체속에 서서히 퇴보해가고 있는 고려인문학을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작가적 사명감과 위기의식 때문이었다.--중략--이번 창간호에는 몇 분의 작가들, 그러니까 고려인이면서도 한글이 아닌 러시어로 작품을 쓰시는 분들의 작품도 게재되었다. 이는 확대된 의미로서 고려인문학의 한 부분으로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엄격히 말해서 『고려문화』의 편집방향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중앙아시아문인협회는 한글을 매개로한 순수 한글작가들의 모임이고 『고려문화』는 그 연장선에 있기 때문이다.’라고 발간의 취지를 상세하게 피력하고 있다.
그리고 ‘고려인문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고 민족주의자이면서도 사회주의자였던 조명희 선생의 특집으로 꾸몄으며 이의 발간을 위해서 격려와 옥고를 준 현지의 정상진 선생과 한국의 유안진 최동호 김종회 이명재 교수 김준태 시인과 후원을 해준 기업들 그리고 재 카자흐스탄 한인회 박희숙 회장에게 감사를 보내고 있으며 ‘어이 그리 바삐 가셨는지『고려문화』의 주인이기도 하신 고 양원식 선생님께 이 책을 바친다’고 쓰고 있다.
인터넷 까페 ‘카자흐스탄 문화마당’에 실린 작품 두 편을 감상해 보기로 한다. 먼저 현재, 카자흐스탄 KIMEP대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시집『우리의 다정한 긴 입맞춤이 끝날 때까지』를 상재한 김홍준의 작품이다.
노스탤지어
― 중앙아시아에 내리는 눈
중앙아시아 고원도시
알마티에는
철도 때도 없이 눈이 내린다
봄을 기다리는 이들의 꿈
흰 눈 덮고 명상하는
산맥을 넘어
이스크쿨 호수 남쪽 기슭에
풀꽃 단장이야기로
술렁이는데
중앙아시아 고원도시 알마티에는
눈이 몇날 며칠을 두고 쌓여
북극의 자작나무 가지들
모두 내려앉고
눈발은 오늘도
고국을 향한 그리운 깃발처럼
타국 꿈 낯설은 가슴 언저리에 마다
눈(雪)물젖은 노스탤지어를
쓸어주며 내린다
중앙아시아 고원도시 알마티에서 ‘눈발은 오늘도 / 고국을 향한 그리운 깃발’을 항상 떠올리면서 ‘타국의 꿈 낯설은 가슴 언저리에 마다 / 눈(雪)물 젖은 노스탤지어를 / 쓸어주면 내’리는 정황에서 그들의 간절한 그리움이 공감을 흡인하고 있다.
다음은 1959년 12월 27일 카자흐스탄 우스토베에서 출생하여 1985년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출간한 시집『이랑』과 1997년 서울에서 출간한 시집『별들은 재 속에서 간혹 노란색을 띤』」, 그리고 1999년부터 카자흐스탄공화국 11학년용 러시시아 교과서에 저자의 시가 수록된 이 스타니슬라브의 작품을 소개한다. 여기에서도 그들이 여망하는 ‘다시 전쟁이 없기를’을 ‘그렇게 소박한 / 지상의 바램’을 적시하면서 메시지를 띄우고 있다.
먼저 간 사람들에게
그들은 운명에 굴복하며 살았네.
밝은 미래를 믿으며, 왜냐하면
다른 믿음을 알지 못했느니
그들은 매년 산에 모여
소를 제물로 하늘에 제사를 지냈네.
피붙이의 건강과
알토란같은
가을걷이, 다시 전쟁이 없기를
그렇게 소박한
지상의 바램은 그들에게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인데도……
3. 조명희의 생애와 작품
유라시아(특히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명희의 생애와 그의 문학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조명희의 호는 포석(抱石), 목성(木星), 필명은 적로(笛蘆)(강제 이주 전까지 발행된 한글신문『선봉』에 발표된 작품에는 조생이라는 필명을 쓰고 있다)이며 1894년 충북 진천군 진천면 벽암리에서 가난한 양반 집안의 아들로 출생하여 중앙고보를 마치고 방황하다가 3. 1운동에 참가해 투옥되기도 했다. 1919년, 일본 동경 도요대학(東洋大學) 동양철학과를 고학으로 수학하면서 새로운 사상과 접하게 되었고 시창작과 연극 공연을 전개했다.
그가 일본에서 귀국한 후 희극 「김영일의 사」(동우회, 1921. 7)·「파사 婆娑」(개벽, 1923. 11~12)를 발표하고, 1924년 '적로'라는 필명으로 시집 『봄 잔디밭 위에』를 펴냈다. 「김영일의 사」에서는 도쿄(東京)유학생들의 가난과 사상적 갈등을 나타냈고, 「파사」에서는 은나라 주왕의 잔인한 학정을 그려냈다. 두 작품 모두 바람직하지 못한 인간을 다루었으나 설명이 충분하지 못하고 관념적이다.
이어 소설 「땅속으로」(개벽, 1925. 2~3)·「R군에」(개벽, 1926. 2)·「농촌사람」(현대평론, 1927. 1)·「낙동강」(조선지광, 1927. 7)·「아들의 마음」(조선지광, 1928. 9) 등을 발표해 프롤레타리아 소설의 형성과 발전에 이바지했다. 이 소설들에서는 초기의 시나 희곡에서 보여주었던 낭만적이고 관념적인 표현에서 벗어나 사실주의에 입각해 일제강점기의 지식인의 고뇌, 농촌의 궁핍, 노동자·농민의 계급적 연대와 사회주의 이상을 담아냈다.
대표작 「낙동」은 이전까지 자연발생적인 수준에 머물던 신경향파 문학을 목적의식적인 프로 문학으로 발전시킨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 작품은 사회운동가 박성운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비극적인 죽음을 통해 일제강점기의 민족해방과 계급운동의 전개를 잘 보여준다.
소련에서는 식민지 민족의 한을 노래한 시「짓밟힌 고려」와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학운동에 앞장서 농업집단화 정책을 선전·선동하는 시「10월의 노래」·「볼쉐비크의 봄」 등을 발표했다. 소설집으로「그 전날 밤」(1925)·「낙동강」(1928) 등이 있다. 그밖에 평론으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개벽, 1925. 6)·「직업·노동·문예작품」(중외일보, 1926. 12. 1~2) 등을 발표하였다.
1928년, 조선 프폴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 에 가담하여 이기영, 한설야 등과 마르크스주의 모임을 만들어 활동했으나 일제의 문인 탄압을 피해서 1928년, 소련으로 망명해서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에 거주하였으며 1938년, 스탈린의 소수민족 강제 이주에 따른 소수민족 지도자 숙청작업으로 총살당했다.
그는 블라디보스톡, 우리스크, 하바로포스크 등 소련의 원동(遠東)지역을 전전하면서 조선서범헉교 조선어문학과 교사, 조선사범대학 교수와 잡지 『선봉』의 문학편집자, 소련작가동맹 원동지부 간사 등의 직함으로 프로레탈리아 혁명문학의 기치를 높이 들고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는 한편, 재소 한인문학의 후진 양성에 힘썼다.
그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다룬 「민주 빨치산」을 집필하던 중 1937년, 간첩 형의로 KGB에 체포되어 하바로프스크 감옥에서 일본 간첩의 누명을 쓰고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에 대한 기록은 우즈베키스탄 타쉬켄트에 있는 ‘알리쉐르 나보이 박물관’에 아주 작은 ‘조명희 문학기념실’에 KGB 당국의 사망확인서와 당시의 연행상황을 서술한 러시아어로 된 증명서와 각종 자료 그리고 ‘조명희 육필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볼세비끼의) 봄
륙성 조생
봄! 새 나라에 떨쳐오는 봄
오년 계획 셋째 해의 봄,
하늘에도, 땅에도, 새봄이 나래를 친다
일어 서라! 천먼의 노력 대중아
봄과 한가지 떨쳐 일어서라
굴뚝의 연기도 구름이 되어 날으거던
쇠 깎는 소리도 하늘 우에 용솟음쳐 구르거던
하물며 로력의 용사들이야
힘오른 팔뚝을 뽐내지 않으랴
둘러라, 바퀴를 ! 쳐라, 망치로!
오년 계획을 여기서 넘쳐 하자
이리하여 우리는
봄과 한가지 떨치리라
가없는 벌판에 햇빛이 뛰놀고
바람도 거기서 손벽을 치거던
하물며 로력의 용사들이야,
힘오른 팔뚝을 뽐내지 않으랴?
잡아라! 뜨락또르채를, 뿌리라! 새 씨앗을
오년의 열매를 여기서 얻다!
이리하여 우리는 봄과 한가지 떨치리라
--『선봉』신문에 실린 전문
그는 위의 작품과 같이 리듬과 운율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로력자의 조국』(1937. 2호)에 게재된「로력자의 고향에 실린 시들에 대하여」에서 ‘초기 프로레타리아의 반항적 감정들이 문예적으로 아직 정서화되지 못하고 말이 아직 리듬화되지 못한데서, 작가나 시인들이 아직 기교를 소유하지 못한데서, 정치적 내용이 첫째로 중하기야 더 말이 없지마는, 그렇다 하여서 그것만 중히 여기고 표현하는 기교는 중대하지 않은데서, 건전한 내용은 좋은 기교에 담아 놓아야 선전의 효과가 더 많음을 깨닫지 못한데서 일종의 정치표어나 나열식의 작품들이 많이 나왔었다.--중략-- 개념의 소산인 시, 번역냄새가 나는 시, 다른 민족이 유창하지 못한 고려말을 억지로 하는 것 같은 시들이 나타났었다’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은 모두 짧은 서정시로서 운율과 리듬이 역동적이라서 ‘...하자’거나 ‘....서라’는 들의 청유형 어미를 사용해서 미래지향적인 세계를 드러내는 특징을 읽을 수 있다.
포석의 고향 충청북도 진천에는 2003년 10월에 ‘포석문학공원’을 조성하여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이 마을에서 태어나신 포석 조명희 선생의 탄생 110주년을 기념하여 선생의 민족 민중, 문학정신을 선양하고 진천문학의 발전의 반석으로 삼고자 정성으로 이 공원을 조성하다.’는 공원 조성 취지를 새겨서 포석 조명희문학제 10주년을 기념한 ‘진천군, 진천문화원, 포석회, 동양일보의 뜻에 따라 진천 후학 정상훈의 조각과 임정모의 글씨로 세워’졌다고 한다.
그의 시비도 건립되어 있다.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경이(驚異)
어머니 좀 들어주서요
저 황혼의 이야기를
숲 사이 어둠이 엿보아 듣고
개천 물소리는 더 한층 가늘어졌나이다
나무 나무들도 다 기도를 드릴 때입니다
어머니 좀 들어주서요
손잡고 귀 기울여 주서요
저 담 아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뚝하고 땅으로 떨어집니다
우주가 새 아들 낳았다고 기별합니다
등불을 켜가지고 오서요
새 소릴 맞으러 공손히 걸어 가십니다
4. 결-중앙아시아와의 문학적 교류
지난 2010년 2월 6일, 명지전문대에서 개최한 “서/타(S.T) 문학 . 교육 국제학술대회”에서 주제를 발표한 유라시아문화포럼 홍태식(명지전문대 교수) 이사장은 중앙아시아 고려인들과 문학적인 교류의 현실과 절박한 상황들을 「중앙아시아 고려인 문학의 현황과 교류 가능성」에 대한 의견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다.
고려인 문학은, 이제는 한글로 시나 소설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이 거의 사라지고 없다는 또 다른 불행에 직면하게 되었다. 한글 해독 세대가 줄어들고 이주 3, 4세는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고 있어 그들이 한글로 작품을 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표기 수단으로만 본다면 이제 멀지 않아 고려인 문학은 소멸될 위기에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가 이들 고려인 문학과 적극적인 교류를 추진해야 할 이유를 찾게 된다. 고려인 3, 4세들이 비록 한글로 시나 소설을 쓸 수는 없다 하더라도 가능한 데까지 그들에게 한국어를 교육하고 한국문학을 이해시켜 민족 정체성을 유지케 하고 나아가 한민족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게 해 줄 필요가 있다. 이것은 역사에 희생되고 억울하게 소외되어 온 고려인을 위로하는 일인 동시에 우리의 동족에 대한 책무를 다하는 길이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한국문학의 외연을 넓히고 우리가 중앙아시아를 통하여 세계로 나아가는 교두보를 마련하는 일이 될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둬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적시(摘示)한 바와 같이 고려인 문학과 적극적인 교류 추진의 이유는 바로 ‘민족 정체성 유지’와 ‘한민족의 자부심’ 고양이다. 이를 위해서는 고려인 3, 4세들이 한글로 문학을 할 수 없다고 하드라도 그들에게 한글을 교육하고 한국문학을 이해시켜야 한다.
한편 이명재 교수도 ‘새로운 통일문학을 이루는 완충지대일 수도 있는 공간’인 중앙아시아는 ‘분단시대 남북한 문학의 산 증인인 고려인 한글문단의 주역들을 비롯한 현지어 사용 동포문인들과 더불어 본국의 일선 평론가와 학자들이 자주 고려인 문학세미나 등을 열고 진지하게 접근, 협력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이러한 논의는 문학단체와 국내 각 대학 학회에서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나 지엽적으로 일부 관심 있는 학자들과 학회 차원의 자료조사와 의견의 상호교환에 머물고 있어서 본격적인 교류를 통한 모국어와 한인문학의 활성화는 아직 미흡한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소비에트 사회문화와 언어에 동화된 2, 3세대들 가운데는 일부 한국어와 러시아어에 익숙한 경우도 있지만, 거의 한국어에 서투른 대신 러시아어를 통해서 작품 활동을 하기 때문에 한인문학에서도 한글문학이 더욱 열악한 입지를 해소하는 데에 많은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게 되었다.
우리 한국문인협회에서는 해마다 해외한국문학 심포지엄을 개최하고 각국에서 모국어로 작품 활동을 하는 동포문인들에게 ‘해외한국문학상’을 시상하면서 해당 국가에서 활동하는 문인들과 현실적인 교류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지금까지 미국 캐나다 일본 중국(특히 조선족) 베트남 호주 독일 등에서 개최하여 성과가 나타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방법은 문협뿐만 아니라, 각 문학단체에서 계획하면 국가 차원의 행정 및 재정의 지원이 뒤따라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재외의 우리 대사관에는 문화원과 한국어 교육원이 있다고 하는데 이런 기관들이 앞장서서 한글과 한글 문학의 보급에 더 많은 투자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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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장사선 . 우정권『고려인 디아스포라 문학연구』2005. 도서출판 월인
. 강회진 『아무다리야의 아리랑』2010. 문학들
. 이명재 「고려인 문단의 현황과 자료의 체계화」2011. 카자흐스탄 문화마당
. 홍태식 「중앙아시아 고려인 문학의 현황과 교류 가능성」2010. 주제발표문
* 이 글은 2012. 2. 25. 명지전문대학 강당에서 발표하기로 하고 집필했으나 사장에 의해서 발표에는 참가하지 못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