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길도의 동천석실과 차 바위. 고산 선생이 동천석실에서 서책을 읽거나 시를 쓰고, 차 바위 위에 올라 앉아 차를 다려 마셨다고 함)
물끄러미 바라본다는 것
윤선도(尹善道)의 시조(時調)에 ‘강촌(江村)에 온갖 꽃이 먼빛에 더욱 좋다’는 것이 있다. 그는 꽃을 보기 위해서 도리어 꽃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하고 있다. 테니슨의 시 ‘금간 벽(壁)’에 나오는 시와는 정반대이다.
테니슨은 꽃을 잘 보기 위해서 그 비밀(秘密)과 본질(本質)을 알아내기 위해 꽃을 뿌리째 뽑아 손으로 움켜쥔다. 그리고 그것을 노려본다. 그 뿌리와 이파리의 모든 것을 알기만 하면 신(神)과 人間, 무엇인가도 다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테니슨의 이 현미경식 관찰 속에서 꽃은 시들고 만다. 포첩망 속에 잡혀 나프탈린 방부제 위에 핀으로 꽂힌 표본상자(標本箱子)의 그 나비가 이미 나비가 아닌 것처럼.
윤선도(尹善道)의 시선(視線)은 뚫어지게 사물을 꿰뚫어 보려는 테니슨의 그것과는 다르다. 꽃을 보면서도 꽃을 보고 있는 자신의 의지(意志), 이를 테면 그 목적과 의미마저도 없애려고 한다. 그것이야말로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인 것이다.
물끄러미 바라본다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어떤 시선(視線)인가? 나무꾼이 목재감을 고르기 위해 숲을 헤맬 때, 그들은 나무를 물끄러미 바라보는가? 약초(藥草)를 캐려는 사람이 풀을 물끄러미 바라보는가? 도둑이 물건을 훔치려하고 활로 새를 잡으려 할 때 그 사람들은 물끄러미 바라보는가?
아니다. 목적과 의미는 다 다를지라도 그들은 똑 같이 그런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려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 나무와 풀과 온갖 사물들을 노려볼 것이다. 파괴가 시작되는 시선이다.
윤선도(尹善道)는 바로 이 노려보는 시선(視線)을 거부하고 물끄러미 보려고 했기 때문에 더욱 아름다운 꽃의 존재(存在)와 만날 수가 있었다. ‘원시의 시학(遠視 詩學)’ ─ 그때 오히려 꽃과 나무는 시인의 품속에 안기ㅔ 된다. 도끼를 든 핏발선 나뭇꾼들의 눈앞에서는 모든 나무와 꽃이 자취를 감춰버리고 말지만, 아무 뜻 없이, 그리고 자신의 존재마저 잊고 숲속을 거니는 시인(詩人)에게는 가지와 그 이파리와 뿌리까지도 그 가슴속으로 파고든다.
그들에게서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비밀을 송두리째 드러내 보인다. 그래서 ‘강촌(江村) 온갖 꽃은 먼빛에 더욱 좋은 것이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視線). 멍청해 보이는 그 詩人의 눈에 존재(存在)를 꿰뚫는 바늘보다 예리한 역설의 통찰력이 숨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지은이: 이어령
출 처: 『문학사상 』1978.6
윤선도 (1587~1671)
앞내에 안개 걷고 뒷 뫼에 해 비친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밤물은 거의 지고 낮물이 밀어온다 /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江村에 온갖 꽃이 먼빛에 더욱 좋아라
(어부사시사 춘사 1)
테니슨 (Alfred Tennyson, 1809~1892)
갈라진 벽 틈새에 핀 꽃이여,
나는 너를 그 틈새에서 뽑아내어,
지금 뿌리째로 몽땅
내 손 안에 쥐고 있도다.
작은 꽃이여―
그러나 만약 내가 뿌리째 너를,
모두 통틀어 알 수 있다면,
나는 알 수 있으리
신과 인간이 무엇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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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을 등진 까마귀
난 한라산 자락에서 태어나고 자란 까마귀우다, 가악 까악. 그렇지만 고심 끝에 정든 고향을 떠나기로 작정핸예. 한라산을 왜 등지냐고요? 하이고 말도 마십쇼. 밉살맞은 천덕꾸러기 신세라 그렇습니다. 자손들에게는 물려주지 말아야지요. 직접 당해보지 않으면 그 비참함이랄까 설움을 잘 모를 겁니다.
예전에는 사람들로부터 극진한 대우를 받아낫수다. 한라산이 영산(靈山)이라면서 여기서 살아가는 동식물을 신령스럽게 여겼으니까요. 그중에서도 우리 까마귀들은 더 융숭한 대접을 받았더랬지요. 육지 사람들은 몸이 새까만 우리를 하시(下視)하며 재수 없다고 하는데 제주 사람들은 우리를 보면 경외감마저 느껴진다고 했죠. 몸이 까만 건, 태양을 오가며 그을린 거라나요. 심지어 ‘태양의 전령사’라는 별칭까지 달아줬답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수다. 아마도 육지 사람들이 떼거리로 몰려다니면서부터가 아닌가 합니다. 그들은 무슨무슨 산악회라는 꼬리표를 달고 왁자하게 나타나 해발 몇 십 미터 표지석 앞에서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습죠. 인증 샷까지 날리고 나면 그때부턴 산해진미를 펼쳐놓고 술판에 들어가기 일쑤입니다.
어느 날 어린 조카가 진수성찬에 홀려서 호로록 내려가서예. 그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디다만 보드카를 따르던 여자가 미소 짓기에 안도했지요. 그런데 살쾡이 같은 맞은 편 여자가 “에고, 재수 없어. 큰 까마귀가 나타났네. 누가 죽게 생겼나벼” 하지 않겠습니까. 태어난 지 한두 달이 안 된 아기한테 큰 까마귀라니요. 물론 몰랐을 겁니다. 생후 한두 달이면 어른 몸체만큼 커진다는 사실을요. 다만 분홍색 부리냐 검정 부리냐로 구분할 수 있는데 우리를 애정 어린 눈으로 봐주는 이가 몇이나 있겠습니까.
조카는 여자의 악다구니에도 다가감심게마씸. 배고픔을 참지 못하는지 가까이 있는 육포에 손을 댔습니다. 그때 얼굴이 불콰한 사내가 “ 저리 꺼져!” 하며 젓가락으로 휙 후려치는 게 아니겠습니까. 휴, 맞지 않아 다행입니다.
이쯤에서 포기하면 좋으련만 또 기웃거렴수다게. 새우깡 봉지에 눈독을 들염신게마씨. 아마도 통째로 물고 오려는가 봅니다. 드디어 봉지를 입에 물었습니다. “후딱 올라오렴”. 아, 그러나 사내에게 목덜미를 잡히고 마네요. “꼬록 꼬록 끼로로록” 숨이 곧 넘어갈 듯 위태위태합니다. 얼른 구해 와야 할 텐데 몸이 달달 떨려 날지 못하겠습니다.
바로 그때엿수다. 제수씨가 어디서 잽싸게 날아와 사내의 얼굴을 공격합니다. 피투성이가 된 그놈이 떼굴떼굴 구르고 있습니다. 얼마나 통쾌한지요. 순식간에 벌어진 일입니다.
아기를 안고 재빨리 올라온 제수씨가 날 쳐다봠서예. 눈에서 불을 뿜던 아까하고는 많이 달라진 눈빛입니다. 저는 바짝 쫄고 있습니다. 자책감이 들어서요.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조카를 일찌감치 구해와야 했습니다. 얼마 전에 제 동생이 나를 구하려다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져서 죽었거든요.
제수씨가 아기한테 먹이를 주고 있수다. 멀리 날아가 구해온 먹이를 놀랍게도 그 와중에 놓치지 않고 있었네요. 이번엔 아기 머리에 물을 얹어 토닥토닥 두드려주면서 삼신할망께 빌고 있습니다. “할마니임 손지아판 어떵하고 어떵하고 아맹이나 할망 자손 낫게 합서 낫게 합서…” 넋이 나간 아기한텐 인간들도 저렇게 해주더군요. 이런 의식은 인간이 먼저일까요. 우리가 먼저일까요. 굳이 파고들고 싶진 않습니다. 다만 놀라운 건, 인간이든 우리든 모성애는 똑같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모성애가 내재하지 않았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변했을까요.
어쨌든 그 사건 이후로 큰 결심을 했수다. 삶의 터전을 옮겨야겠다고요. 아무리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이지만 목숨을 담보로 살아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는 마음이 망가질 대로 망가졌지요.
망가진 건 우리뿐만이 아니마씸. 한라산 폐해도 심각합니다. 희귀종이 멸종 위기에 놓였을 뿐만 아니라 한라산 전체가 끙끙 앓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한라산이 언제 불을 내뿜을지 모를 일입니다.
작년 봄, 이곳에 둥지를 틀어서예. 여기는 해발 오백 미터인 OO오름인데 사방으로 열댓 개의 올망졸망한 오름이 보입니다. 남쪽으론 한라산, 북쪽으론 태평양 바당이 시야 가득 펼쳐지고요. 이곳은 올레 코스가 아니라 관광객이 잘 모르는 곳입니다.
저만치서 오동통한 사내와 여자 둘이 올라오고 이신게마씨. 오늘도 갈래머리 여자는 졸참나무 아래 멈춰서 위를 올려다봅니다. 설렘에 가슴이 두근거려 몸을 슬쩍 숨겼습니다. 갈래머리가 사라집니다. 친구인 듯한 파마머리 여자가 카메라를 들이대다가 사내를 부릅니다. “ 자기야. 요기 와 봐. 저거 까치 같지? ” “까마귀잖아게. 혼차 있는 걸로 봐서 홀아방이 틀림없네” ‘ 혼자라고?’ 그러고 보니 내 아기들이 사라졌습니다.
조급함에 정신없이 까악거리다가 부드럽게 불러봅니다. “ 가가악, 가악?” 그래도 응답이 없네요. 아무래도 멀리 나간 것 같아 여기저기 찾아 다닙니다. 어디서 다정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 어머~ 어쩜 이리 귀여울까 분홍 부리까지 잘도 아꼽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갈래머리한테 재롱떨고 있지 않겠습니까. 폴짝폴짝 뛰기도 하고 어깨까지 좌우로 흔들면서요. 곧바로 내려갔습니다.
파마머리와 사내도 다가왐심게 마씨. 사내가 흥분합니다. “ 혹시 카메라에 잡힌? 보랏빛 깃털도 반지르르하고, 풍채도 광장하다아이? ” 나는 으쓱해져서 날개를 옆구리에 착 붙이고 가슴에 힘을 꽉 줬습니다. “ 오, 보디빌더 못지않은데?” 남자가 육포를 내밉니다. 저 세상으로 간 각시가 생각나 눈물이 핑 돕니다.
각시는 독수리에게서 새끼를 구하다가 물려죽엇수다. 나뭇잎으로 각시를 묻어주고 있노라니 까마귀 몇 백이 삽시간에 모여듭디다. “ 아악 아악 아악 ” 애도하는 울음소리가 하늘을 뒤덮었지요. 속과 겉이 다른 인간들보다 훨씬 낫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태원이나 오송 참사에 어떻게 대응했습니까. 만물의 영장이라고 감히 말하지 마십쇼.
우리는 인간보다 정밀한 시각과 청각도 갖고 있어 마씨. 인간이 개발한 최첨단 장비보다 나을 겁니다. 지구의 편광(偏光)과 초음파까지 감지할 수 있으니까요. 굳이 누가 더 낫고 덜 낫고를 비교하며 잘난 체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저 오순도순 살아가는 게 최고라 생각합니다.
신혼부부가 사는 옆집에서는 깨가 쏟아지고 있수다. 신랑이 먹이를 물고 상체를 구부렸다 폈다 절하면서 색시에게 다가갑니다. 색시는 짐짓 모른 척하면서도 고고하게 걸어가고요. 신랑이 살그머니 쫓아가 색시 꼬리를 은근슬쩍 잡아당기자 토닥토닥 하다가 한 몸이 됩니다.
앞집 어미는 먹이를 구해와 “꾸르르 까르르 꾸륵꾸륵” 새끼를 부르고 있네요. “ 께께께 께께께” 스타카토로 빠르게 아우성치는 새끼들. 어미는 분홍빛 목구멍을 가장 크게 벌린 새끼한테 먼저 먹이고, 끈질기게 소리 지르는 새끼한테 그 다음 먹입니다. 배를 채운, 새끼들은 조용해지고, 어미 아비만 “그르르르 그르르” 만족한 소리를 내고 있네요.
오늘도 태양신께 감사 기도를 올리며 잠자리에 듭니다.
지은이: 고연숙
제주 출신. 제주교육대학, 한국방송통신대학(영어영문학과), 제주대학교교육대학원(영어교육학)을 졸업. 2003년 '한국문인' 수필부문 신인상을 수상. 수필집으로 <<내 삶의 아름다운 변주>> <<노을에 물들다>> 등. 제주여류수필문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제민일보 논설위원, 제민포럼 필진. 제주시교육청 장학사, 서귀포시 성읍초등학교 교장을 거쳐 현재 제주교육과학연구원 교육연구관으로 있다.
출처: [수필과 비평>2024.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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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신경림(1935~2024)
신경림 시인은 이제 저 하늘의 별이 되었다. 우리와 함께 같은 별을 바라보던 시인은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났다. 시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사랑했다. 농부와 광부와 지게꾼과 장꾼과 등짐장수를 사랑했다. 협동조합 구판장과 산골여인숙과 토담집과 막장과 장터와 국밥집을 사랑했다. 곡괭이와 삽과 물동이와 장독대를 사랑했다. 수제비와 틀국수와 봉지쌀과 꽁치 한 마리를 사랑했다. 갈대를 사랑했고, 진눈깨비를 사랑했다.
낙타가 본 것을 사랑한 시인의 눈 속에, 우리들의 슬픈 이야기가 알알이 박혀 있다가 시가 되었다. 우리 삶 곳곳으로 번져나갔다. 언제나 쓰러진 자들의 꿈을 일으켜주던 시인,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들을 시로 펼쳐 보여주던 시인은 낙타가 되어 “어리석은 사람”을 등에 업고,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와 “길동무 되어서” 저세상에 가서도 떠돌 것이다. 가장 낮은 별이 되어 우리에게 언제나 속삭일 것이다.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405262037015
<저녁 숲의 눈동자>
하늘보다 먼저 숲이 저문다
숲이 먼저 저물어
어두워오는 하늘을 더 오래 밝게 한다
숲속에 있으면 저녁은
시장한 잎벌레처럼 천창에 숭숭
구멍을 뚫어놓는다
밀생한 잎과 잎 사이에서
모눈종이처럼 빛나는 틈들,
하늘과 숲이 만나 뜨는
저 수만의 눈을 마주하기 위하여
더 깊은 숲속으로 들어간다
저무는 하늘보다 더 깊이 저물어서
공작의 눈처럼 펼쳐지는 밤하늘
내가 어디서 이런 주목을 받았던가
저 숲에 누군가 있다
내 일거수일투족에 반응하는 청설모나 물사슴,
아니 그 누구도 아니라면 어떠리
허공으로 사라진 산딸나무
꽃빛 같은 것이면 어떠리
저물고 저물어 모든 눈들을 마주하는
저녁 숲의 눈동자
손택수(1970~ )
시인은 저녁 숲에 들었다. “숲이 먼저 저물”어, “어두워오는 하늘을 더 오래 밝게” 하는 것을 보았다. 숲에서 본 저녁 하늘은 배고픈 “잎벌레”가 “천창에” 구멍을 숭숭 “뚫어놓”은 것 같았다. 빽빽한 잎 사이로 보이는 “빛나는 틈들”은 “모눈종이” 같았다. 밤의 숲에 들면,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눈을 깜박거리고 있는지. 그 눈들과 수많은 별이 만나서 함께 눈을 뜨는 것, 또 “눈을 마주”한다는 것이 얼마나 놀랍고 신비로운 일인지.
“저무는 하늘보다 더 깊이” 저문 후에야 환하게 펼쳐지는 밤하늘을 본다. 잎벌레들의 천창은 커다란 잎사귀, 숲의 천창은 하늘일 것이다. 시인은 숲에 온전히 들어서야 숲이 하늘보다 어둡다는 것을, 어둡기 때문에 더 잘 보이고, 잘 들린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늘의 별들과 달이 번갈아 가며, 전구를 갈아끼우는 아득한 밤에.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406022058025
6월 21일. 오늘은 하지, 달력상 첫여름임에도 불구하고 33~35도를 기록하는 무더위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제주도에서는 장마가 시작되었다지요. 제가 사는 곳의 더위도 심상치 않습니다.
유정독서모임, 6월 26일 수요일 14: 00, 춘천 실레마을 김유정문학열차에서 진행됩니다. 지난 번에 이어 김유정이 번역한 반 다인 원작의 소설, < 잃어진 보석>, 계속 읽습니다. 이렇게 무더운 날, 정신까지 혼미해질 정도의 날에는 역시 추리탐정소설이 좋지요.
집안의 창문이란 창문은 모두 활짝 열어 맞바람을 들이며 이 여름의 더위에 익숙해보려 하고 있습니다.
6월 26일, 김유정문학열차에서 뵙겠습니다.
2024.6.21 강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