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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20일(일) 뿌리와 샘: 서울 지역 답사가 있었습니다.
이날 답사코스는 한글학회 --> 서울역사박물관 --> 경희궁 --> 경교장이었습니다. 오전 10시30분, 서울역사박물관 앞에서 이세용 회장님께서 오늘의 답사코스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을 하시고 답사에 나섰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 앞에서 일단 모였다가 이 앞에 있는 한글학회 건물로 이동했습니다.
오늘의 답사코스입니다.
서울역사박물관 앞에 있는 금천교 (7.10일 촬영)
금천교 석물. 해치(?), 사자(?)
금천교 앞 도로쪽에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이 있었습니다.
경희궁 흥화문터 표지석
아래는 경희궁 정문인 흥화문입니다. 일제시대 경희궁이 완전히 파괴.해체되면서 파란만장한 풍파를 겪었던 흥화문은 원래 위치에서 약 300 m 떨어진 서울시립미술관 앞에 설치되었는데 남쪽 방향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경희궁 답사 마치고 경교장으로 이동할 때 촬영한 사진을 미리 보여드립니다~ ^^)
오늘의 첫 답사지인 한글학회 건물 입구 도로에 놓여 있는 한글창제 기념석입니다.
훈민정음체에서 오늘날 한글체로 바뀐 것을 설명해 주시는 이세용 회장님
기념석이 있는 골목 위로 올라가면 한글학회가 있습니다.
한글학회 건물 현관에 한힌샘 주시경 선생님 흉상이 있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님와 동갑이신 한힌샘 주시경 선생님은 한글의 띄어쓰기, 쉼표 등 오늘날 한글 맞춤법의 기초를 세웠습니다. 큰스승의 제자이신 최현배, 이희승 등은 일제시대 우리말 큰사전을 만들었습니다.
* 우리말 큰 사전이란?
‘현대에 표준으로 쓰이는 순조선말, 한자말, 외래어, 숙어, 각종 전문어들’과 ‘이두말, 옛 제도어, 사투리, 변말, 곁말 및 유명한 땅이름, 사람이름, 책이름, 명승고적의 이름’들까지 망라한 사전이다. 총 수록어휘는 16만 4,125개에 달한다. 1929년 사전편찬회를 조직하여 1936년 조선어학회에서 편찬작업을 시작하였다. 1942년 가을까지 약 1/3의 작업이 완성되어 일부가 조판에 들어갔으나 일제가 일으킨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중단되었다. 1945년 10월 3일 서울역 창고에서 원고를 찾아 다시 편찬 작업을 계속했다. 1947년 10월 첫 권이 을유문화사에서 간행되었고, 1957년 10월 9일에 마지막 권인 6권이 간행되며 작업이 완성되었다. 마땅한 백과사전이 없었던 당시에 언어사전 이외의 기능까지도 수행한 사전이었다는 의미가 있다. 우리말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완성되었으며, 만들어진 뒤에는 한글에 대해 더 넓은 지평을 확보하는 역할을 했다. - 다음 백과
서울역사박물관에 갔습니다.
서울을 무대로 활약했던 예술인 들
일제는 경희궁을 완전히 해체하고 이곳에 서울고등학교를 세웠습니다. 아래 사진은 원래 경희궁 모습을 보여주는 미니어쳐입니다. 이 모습은 "서궐도" 그림으로 남아있어 미니어쳐로 재현은 가능했습니다만 실제로는 이미 많은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 있어서 원형의 완전 복원은 어려운 상황입니다.
경복궁을 중심으로 왼쪽의 동궐도와 오른쪽의 서궐도 (앞쪽 사진)
광화문 육조거리
대한제국 태극기
대한제국 여권
대한제국 경운궁(덕수궁) 석조전
석조전은 정면 54m, 너비 31m의 장대한 3층 석조 건물이다. 대한제국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신고전주의 양식의 석조 건물이다. 구한말 총세무사 브라운의 권유로 영국 사람 하딩(J. R. Harding)이 설계했다. 심의석(한국인), 사바틴(러시아인), 오가와(일본인), 데이비슨(영국인) 등이 감독으로 1900년 기공하여 1909년 준공했다.
뿌리와 샘의 서울답사 코스 가운데 하나인 서울시청 주변 대한제국 시기의 문화유적: 환궁우, 경운궁(덕수궁), 중명전, 정동교회, 러시아 공사관 일대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 - 대한제국관 그림
1897년 10월,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황제에 오른 고종은 이듬해 6월 13일 학부협판(지금의 법무부 차관) 민영찬을 1900년 4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박람회 준비를 총괄하는 ‘박물사무부원’에 임명했다. 10개월 전부터 착실히 준비해 대한제국의 존재를 세계만방에 알리겠다는 의도였다. 물론 나라의 위상을 높여 주변국들이 함부로 넘보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도 굳이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만국박람회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박람회장에 지어야 하는 대한제국관 건축비 10만 프랑과 박람회 기간 동안 대지를 임대하는 비용 54,000프랑 등 거금이 필요했지만, 대한제국의 재정은 충분치 않았다. 만국박람회에 한 나라라도 더 참가시키기를 원한 프랑스 정부가 대한제국에서 광산 채굴권을 따내고 싶어 하는 미므렐 백작을 소개해주었고, 얼마 후 경복궁 근정전을 모방한 대한제국관 건축은 순조롭게 시작되었다. 대한제국관 공사가 본격화될 무렵, 민영찬은 건축을 도울 목수 2명과 함께 인천항에서 프랑스를 향해 출발했다. 1900년 1월 16일의 일이다.
우리나라가 세계 박람회에 참가한 건 파리 만국박람회가 처음은 아니었다. 1893년 미국이 콜럼버스의 미국 발견 4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개최한 시카고 만국박람회에도 조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참가한 바 있었다.
프랑스 공사관 모형
러시아 공사관 모형
경운궁 (덕수궁) 정관헌
동양적인 요소가 가미된 서양식 정자인 정관헌(靜觀軒)은 1900년경에 건립되었다. 고종이 다과를 들고 음악을 감상하던 곳으로, 한때는 태조·고종·순종의 영정을 봉안하기도 하였다. 벽돌을 쌓아 올린 조적식(組積式) 벽체에 석조기둥을 세우고 건물 밖으로 목조의 가는 기둥을 둘러 퇴를 두르듯이 짜인 건물이다. 덕홍전 뒤편과 정관헌 사이에는 작고 아담한 후원이 있고, 건물 뒷켠 땅속으로 러시아공사관으로 통하는 비밀통로가 설치되어 있었다.
대한제국 황제 즉위식이 열렸던 환구단 건물 축소 모형 앞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대한제국의 역사강의를 듣고 있는 오늘 답사회원들
아래는 오늘날 한강을 중심으로 한 서울시 전체 축소 모형. 볼만 하더군요.
서울 역사 박물관에도 늦가을 정취가 물씬 납니다.
서울역사박물관 뒷쪽에 있는 주차장을 통해 경희궁으로 갔습니다.
고궁의 늦가을 정취가 아름답습니다.
일제가 만들어 놓은 방공호. 현재는 서울역사박물관 유물창고로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위쪽에 경희궁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더군요
경희궁의 숭전전. 경복궁의 근정전에 해당하는 건물입니다만 이곳의 건물은 전부 새로 복원한 것입니다.
경희궁은 서울도성에서 우백호 (풍수사상에서 왼쪽에는 용, 오른쪽엔 호랑이)에 해당하는 인왕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 사적 제271호인 이 궁궐은 조선시대 별궁으로 광해군 때 건축되어 270 여년간 사용되었다. 본래 이름은 경덕궁으로 경복궁의 서쪽에 있다하여 서궐이라고도 했다. - 뿌리와 샘 답사안내서 -
임진왜란 뒤, 궁궐의 재건사업이 한창일 당시 광해군은 (동궐에 해당하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법궁과 이궁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새문동에 왕기(王氣)가 있다는 말과 이궁인 궁궐을 하나 더 짓는다는 이유로 이곳에 궁궐을 짓기 시작했다. 당시 이곳에는 광해군의 이복동생으로 후일 인조의 아버지가 되는 정원군의 집이 있었다.
광해군의 대규모 토목공사는 왕으로서 권위를 과시하고 왕위계승을 둘러싼 잡음을 제거하려는 의도에서 시작되었으나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인력, 물력 동원에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1623년(광해군)에야 완공 단계에 이르렀다. 그 무렵 인경궁 (광해군 때 사직단 뒤, 인왕산 자락에 지은 궁궐로 인조 때 헐려 없어졌다.)과 경덕궁(경희궁) 공사가 마무리되어 이어(임금의 거쳐를 옮김) 준비를 하던 그해 3월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은 새 궁궐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쫒겨났다.
반정으로 왕이 된 인조는 (동궐인) 창덕궁과 창경궁을 법궁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1624년 이괄의 난으로 창덕궁과 창경궁이 불타자 인조는 경덕궁(경희궁)으로 옮겨 이곳에서 9년을 살았다. 이로써 경희궁은 실질적 이궁의 지위를 갖게 되었다. 1632년 인조는 창덕궁으로 다시 이어하면서 창경궁의 건물들을 수리하는데 인경궁의 건물들을 헐어다 그 자재를 사용하였다. - 뿌리와 샘 답사안내서 -
일제에 의해 경희궁 건물은 전부 해체되거나 파괴되었습니다. 오리지날 숭전전은 1926년 현재의 동국대학교 자리로 옮겨졌는데, 당시에 그곳에 조계사가 있었다고 하며 조계사의 불전으로 사용되다가 그 자리에 동국대학교가 들어서면서 정각원이란 법당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ㅠㅠ
전각으로 올라가는 계단 중앙에 설치된 봉황 부조
계단의 소맷돌. 용일까? 해치일까?
경희궁 - 숭전전
숭전전의 육각형 문양으로 이루어진 문창살
이 문양의 역사는 대단히 깊다. 지금부터 6천년전 고대 이집트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3천년전 고대 오리엔트 문명이었던 아시리아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오늘날 서양에서는 '생명의 꽃 (Flower of Life)'라고 불리는 문양이다. 이 문양은 실크로드를 따라서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까지 전달되었다.
숭전전 뒤에 있는 자정전으로 들어가는 정문인 자정문 계단. 용이 아닌 해치라고 한다. 머리 부분에 "Y" 자 뿔이 달린 것이 이채롭다. 그런데 정말 해치일까? 해치라면 광화문 해치에 없는(?) "Y"자 뿔이 왜 달렸을까?
경복궁의 강년전에 해당하는 자정전으로 들어가는 정문격인 자정문
자정전
자정전 왼쪽에 있는 건물(태령전) 뒤로 가면 이런 풍경이 나온다. 이곳은 거대한 암반지대이다. 왼쪽 바위 언덕에 올라가면 왕기(王氣)가 서린 작은 샘이 있다.
샘을 구경하기 위해 암반 위로 올라가 보자.
옛 선인들은 흙은 사람의 살로, 나무는 사람의 털로, 바위는 사람의 뼈로 생각했다고 한다.
요게 바로 왕기가 서린 샘이라 한다.
왕기가 서린 샘에서 오늘 답사여행을 따라온 기특한 쌍둥이 자매. 나라의 동량이 되길 기원하며~~
샘에서 내려다 본 경희궁 전경. 전각의 지붕들이 교차하면서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샘 아래 건물인 태령전. 이곳에 영조의 어진이 놓여있다.
경교장으로 가기 위해 경희궁을 나서며. 다시 정전인 숭정전과 그 아래 품계석과 박석
숭정전의 정문격인 숭정문.
이곳의 계단 일부는 옛 것 그대로다. 숭정문 좌우로 행각이 이어져 동서행각과 만나는데 이것도 최근에 복원한 것이다.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
경희궁을 나서 경교장으로 갔습니다.
경교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백범 김구 선생님께서 집무실과 숙소로 사용했던 역사적 장소로 2001년 서울유형문화재 제129호로 지정되었다가 2005년 6월13일에 사적 제465호로 승격되었다.
1938년 금광으로 돈을 번 최창학이 1938년에 만든 뒤, 8.15 광복이후 최창학이 김구의 거처로 제공하였다. 면적은 연건평 265평 (지상 2층, 지하 1층)이었다. 1938년 완공 당시 그 일대가 죽첨정(竹添町)이어서 건물이름이 '죽첨장(竹添莊)'이었으나, 백범이 죽첨장이라는 일본식 이름 대신 근처에 있는 경교 (京橋 - 경구교(京口橋: 한양입구 다리)의 약칭)라는 다리 이름을 따서 경교장이라 개명하였으며, 정치활동이 본격화되자 '서대문 경교장'이라 불렀다.
건물은 단아한 2층 양관으로 전면 분할의 비례가 아름다우며, 1층의 좌.우 창을 원형으로 돌출시켰고, 그 상부를 의장의 중심체로 하였다. 현관 2층부에는 6개의 붙힘 원주를 사용하여 5개의 들임 아치 창을 냈다. - 뿌리와 샘 답사안내서 -
경교장 1층 거실
1층 귀빈 식당
1층 응접실
경교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인들 뿐만 아니라 민족진영 인사들의 집결처로, 백범이 주도하는 반탁.건국.통일운동의 민주적 총본산 격이어서 이승만의 돈암장 (이화장), 김규식의 삼청장과 함께 정부수립 이전 건국활동의 3대 요람으로 각광받았다. 특히 임시정부의 공관으로 상당기간 활동본부 구실을 하며 남북협상의 자주적 통일정부 수립을 내세운 민족주의 추구의 우국정객들이 많이 모여든 경교장은 한국독립당 활동이나 건국실천원 양성에 주안점을 둔 보루로서도 주목을 받았다. - 뿌리와 샘 답사안내서 -
지하 1층 백범 유품 전시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딱 1년전인 1949년 6월26일 백범께서는 육군소위 안두희 흉탄에 이곳 경교장에서 순국하셨습니다. 응급처치를 하기 위해 왼쪽 소맷자락을 길게 찢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백범 선생님이 쓰신 유묵
1932년 4월29일, 상해 홍구공원의거 당시 윤봉길 의사와 교환했던 회중시계와 의거 후 중국에서 발간된 책, "도왜실기"
윤봉길 의사는 거사 당일 백범과 영원한 작별을 하면서 자신이 차고 있던 새 회중시계를 백범께서 차고 있던 낡은 회중시계와 교환하였다. "나에겐 새 회중시계가 필요없습니다. 그러나 거사를 위해 시계는 필요하니 선생님의 낡은 회중시계를 제것과 바꾸고 싶습니다."
지하 1층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걸어온 길
대한민국의 역사는,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불과 9년만에 전국적으로 일어난 3.1일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던 해인 1919년 4월 13일: 상해 임시정부 수립으로 시작됐습니다. 이게 바로 우리역사 최초의 자랑스런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첫 출발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는 고난과 불굴의 항일투쟁, 항일독립전쟁의 역사였습니다.
2층의 응접실
백범 선생님께서 서거하신 장소, 2층의 집무실
흉탄이 뚫고 지나갔던 2층 유리창
통일 대한민국의 국부로서 한치의 모자람이 없는 삶을 사셨던 백범 말씀을 상기하는 것으로 오늘 답사를 마쳤습니다.
▲ 외국의 간섭이 없고 분열 없는 자주독립을 쟁취하는 것은 민족의 지상명령이니, 이 지상명령에 순종할 따름입니다. 우리가 망명생활을 삼십여 년이나 한 것도 가장 비현실적인 길인 줄 알면서도 민족의 지상명령이므로, 그 길을 택한 것입니다. (1948. 3. 21. <신민일보> 사장과 회견기 중에서)
▲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어느 민족도 일찍이 그러한 일을 한 이가 없었으니 그것은 공상이라고 하지 말라. 일찍 아무도 한 자가 없기에 우리가 하자는 것이다. 이 큰일은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남겨 놓으신 것임을 깨달을 때에 우리 민족은 비로소 제 길을 찾고 제 일을 알아본 것이다. (〈나의 소원〉중에서)
▲ 우리 민족으로서 하여야 할 최고의 임무는, 첫째로 남의 절제도 아니 받고 남에게 의뢰도 아니 하는 완전한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 민족의 생활을 보장할 수 없을뿐더러, 우리 민족의 정신력을 자유로 발휘하여 빛나는 문화를 세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완전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운 뒤에는 둘째로 이 지구상의 인류가 진정한 평화와 복락을 누릴 수 있는 사상을 낳아 그것을 먼저 우리나라에 실현하는 것이다. (〈나의 소원〉중에서)
▲ 얼굴이 잘 생긴 것은 몸이 건강한 것만 못하고, 몸이 건강한 것은 마음이 바른 것만 못하다.
▲ 눈덮힌 들판을 걸어갈 때, 어지럽게 함부로 걷지 말라. 오늘 내가 가는 이 발자취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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