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앙정(俛仰亭)>
여러 차례 왔던 곳인데, 다시 오니 숲이 더 깊어져 정자를 중심으로 한 일대가 더 고아해지고 고즈넉해진 거 같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후일(1654년) 후손이 중건한 것이라는데, 주변 나무들 덕에 아마도 그때보다 더 그윽해지지 않았나 싶다. 다행히 인근이 개발되지 않아 멀리 보이는 연산과 시내가 그대로인 것도 원인일 것이다. 지금도 앉아 있으니 시를 지어야 할 듯하다.
송순과 그때 모여들었던 시인묵객들의 흔적이 어디에 어떻게 남아 있나, 마음의 눈으로 더듬어본다.
문화재지정 : 전라남도 기념물 제6호.
소재지 : 전라남도 담양군 봉산면 제월리
방문일 : 2021.8.19.
1. 면앙정 소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건물.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시신(侍臣)이었던 송순(宋純)이 만년에 벼슬을 떠나 후학들을 가르치며 한가롭게 여생을 지냈던 곳이다.
송순은 41세가 되던 1533년(중종 28)에 잠시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이곳으로 내려와 이 정자를 짓고, 「면앙정삼언가(俛仰亭三言歌)」를 지어 정자이름과 자신의 호(號)로 삼았다 한다. 그러나 그 정자는 1597년(선조 30) 임진왜란으로 파괴되고 지금의 정자는 후손들이 1654년(효종 5)에 중건한 것이다.
건물은 동남향하고 있으며, 한가운데에 한 칸 넓이의 방이 꾸며져 있다. 기둥은 방주(方柱)를 사용하였으며 주두(柱頭)조차 생략되고, 처마도 부연(浮椽: 처마 끝에 덧 얹어진 짤막한 서까래)이 없는 간소한 건물이다. 주위에는 상수리나무·굴참나무·밤나무 등이 숲을 이루고 있다. 후면에 해당하는 서북쪽으로 평야 너머로 연산(連山)이 보이고 서남쪽에는 맑은 냇물이 흐르고 있다.
면앙정의 풍류운치는 당대에 명사들에게 흠모되었는데, 송순이 지은 잡가(雜歌) 2편에서 그 풍취를 살펴볼 수 있으며, 이 글은 또한 『청구영언』 등 가집(歌集)에 무명작으로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십년을 경영해야 초당삼간 지어내니 반간은 청풍이요, 반간은 명월이라. 강산은 드릴대 업스니 돌려두고 보리라.” 이 노래는 만년에 이 정자를 두고 읊은 것으로 전해진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송순의 <면앙정가>
송순(宋純, 1493-1583)은 벼슬이 우참찬에 이른 다음 만년에 고향인 전라도 담양으로 돌아가 여러 문인과 교류하며 여생을 풍류로 즐겼다. 그런 생활을 <면앙정가>(俛仰亭歌)로 나타내, 은일가사의 본보기를 정극인의 <상춘곡>에 이어서 다시 보여주었다.
<상춘곡>보다 시야를 더 넓혀, <면앙정가>에서는 자랑스러운 고장에서 우뚝하게 서서 구김살 없는 마음으로 산수를 바라보면서 저절로 얻는 흥취를 자랑했다. 격식에 맞는 수식을 피하고 구어체를 많이 사용했다. 사철의 경치마다 흥겹다고 하고, 결사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인간을 떠나와도 내 몸이 겨를 없다.
이것도 보려 하고 저것도 들으려 하고,
바람도 헤려 하고 돌도 맞으려 하고,
밤이란 언제 줍고 고기란 언제 낚고.
시비(柴扉)란 뉘 닫으며 진 꽃이란 뉘 쓸려뇨?
(조동일, 한국문학통사 2권)
<면앙정가>는 정철이 이웃에 있는 식영정(息影亭)이라는 정자를 찾아가, 주인 김성원(金成遠)이 산수에 묻혀 지내는 것을 칭송한 <성산별곡>을 짓는 데 영향을 주었다.
3. 송순과 호남가단
호남가단은 송순(宋純, 1493-1583)이 선도했다. 30년 정도 선배인 이현보나 10년쯤 연하인 이황처럼, 송순은 벼슬에서 물러난 다음 고향으로 돌아가 산수에 묻혀 지내는 즐거움을 누렸다. 그러면서 몇 가지 점이 달랐다. 돌아가는 이유를 설명하려고 하지 않고 도리는 따지지 않은 채 풍류를 자랑했다. 가사를 짓고 시조를 즐기는 동안에 주위에 많은 문인들이 모여들어, 자기 당대에 가단을 이루어 함께 읊조리는 동안에 직접 영향을 끼쳤다.노래를 지어 부르는 풍류생활을 즐긴 것이 호남가단의 일관된 특징이다.
송순은 <면앙정단가>(俛仰亭短歌)라고 한 것 일곱 수, <오륜가>(五倫歌) 다섯 수를 위시해 20수쯤 되는 시조를 지었던 것 같은데, 여러 시조집을 뒤져 찾아낼 수 있는 작품이 10수 가량이며 그것마저도 작자가 엇갈린다.
십년을 경영하여 초려(草廬) 한 간 지어내니,
반간은 청풍이요, 반간은 명월이라.
강산을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
십년을 경영해 초가 한 간 지었다는 것은 가난의 극치이지만, 청풍과 명월이 반 칸씩이고 안에 들여놓을 데가 없는 강산은 둘러두고 보겠다고 해서 무형의 것을 누리는 욕심은 한껏 부렸다. 은거를 자랑하는 시가 이 이상 멋진 표현을 갖추기는 어려울 것 같다. (조동일, 한국문학통사 2권)
호남가단은 16세기 중반 송순의 면앙정가단에서 시작하여 임억령의 식영정, 김성원의 서하당, 양산보의 소쇄원 등을 포함하는 성산가단으로 확대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들 가단의 구성원이 개별적인 활동을 하기도 하고 서로 겹치면서 교류하고 있었던 양상을 볼 수 있어서 넓은 지역을 포괄하는 호남가단이라는 개념과 함께 개별 지역에서의 교유 활동이 상호연관되어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인용)
정자 안에는 소쇄원의 양산보를 비롯해 호남가단에서 활동하던 문인들의 글을 많이 볼 수 있다.
4. 송순
송순(宋純, 1493~1582)
자는 수초(守初), 성지(誠之), 호는 기촌(企村), 면앙정俛仰亭). 아버지는 태(泰), 어머니는 순창조씨.
명문 양반가 출신으로 21세에 박상에게서 배웠으며, 26세 때는 송세림에게서 배웠다. 1519년(성종 14)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가 되었다. 이후 사간원 정언, 홍문관 직제학, 사간원 대사간을 거쳐 전주부윤, 나주목사 등을 지냈고 77세(선조 2)에 한성부윤, 의정부 우참찬 겸 춘추관사를 끝으로 벼슬을 사양하고 향리로 물러났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4대사화가 일어나는 등 혼란한 때였으나, 50여 년의 벼슬살이 동안 그는 단 한번 1년 정도의 귀양살이만 할 정도로 관운이 좋았다. 이것은 그가 인품이 뛰어났으며 성격이 너그럽고 의리가 있었으며 사람을 가리지 않고 고루 사귀는 등의 이유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성격으로 인해 "온 세상의 선비가 모두 송순의 문하로 모여들었다"(성수침), "하늘이 낸 완인"(이황)이라고 표현될 정도로 당대의 대표적 인사들과 친교를 유지했다.
교우로 신광한·성수침·이황·박우·정만종·송세형 등과 문하인사로 김인후·기대승·고경명·정철·임제 등이 있다. 그는 호남 출신이지만 영남 사림의 학통을 이어받은 박상·박우 형제의 영향을 받았으며, 선산부사로 재직할 때 그곳의 사람들과 교유하는 등, 학문적인 면은 사림파에 가까웠다고 한다. 또한 음률에 밝아 가야금을 잘 탔고 풍류를 아는 호기로운 재상으로 알려져 있다. 1533년(중종 28)에 김안로가 권세를 잡자 귀향하여 면앙정을 짓고 시를 읊으며 지냈는데, 이때부터 임제·김인후·고경명·임억령 등과 교유하며 면앙정가단을 형성했다.
작품으로 가사 〈면앙정가〉를 비롯하여 시조 22수와 한시 520여 수가 남아 있는데, 가사 〈면앙정가〉·〈면앙정단가〉와 같은 시조작품은 면앙정 주변의 빼어난 경치와 그곳에서 유유자적하며 내면의 심정을 수양하는 내용을 노래한 것으로, 강호가도의 선구적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 그의 시조 〈오륜가〉 5수는 주세붕의 〈오륜가〉와 함께 후에 정철의 훈민가류 시조에 영향을 주었다. 담양 구산사에 배향되었으며, 문집으로 〈면앙집〉이 있다. (다음백과 전재)
*식영정 등은 꼭지를 따로 작성하여 살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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