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의 메타포라 첫 수업이 있던 날, 합정역에서 <이후북스>까지 걸었다. 망원동이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가다 보니 둘째 언니의 집 근처다. 수업이 끝나고 그냥 가기 뭐해서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 나 지금 어디게? 여기 언니 집 근처다. 망원시장이 눈앞에 있어.” 목소리 톤을 한껏 높여 반가움을 전했다. 우리 자매는 특별한 용건 없이는 전화하지 않는다. 둘이 만나서 수다를 떠는 일도 거의 없다. 그런데 그날은 통화가 길어졌다. 나보다는 언니의 말이 많았다.
“너는 글쓰기 수업을 듣는 것보다 독서 수준 올리는 게 더 먼저지 않아? 아무 책이나 읽지 말고 좋은 책 좀 골라서 읽어. 그리고 책도 도서관에서 빌려 보지 말고 웬만하면 사서 읽고.” 단순한 안부 전화였는데 갑자기 훅 들어온다. 당황했지만, 읽고 쓰는 메타포라 학인으로서 품위를 지키며 대꾸했다. “알지. 그래서 요즘엔 인문학 책을 많이 읽으려고 노력하는 중이야. 여기 온 이유도 그런 책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읽으려는 거고. 그리고 예전에는 일 그만두고 수입이 없을 때니까 책 사는 돈도 아낀 거지. 나도 욕심나는 책은 사서 밑줄 치며 읽어. 이젠 돈 버니까. 아무튼 언니 말 무슨 뜻인지 알겠어.” 언니에게 또 감정적이라는 지적을 받을까 봐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사실 그때부터 기분이 조금 상했다.
언니는 어린 시절부터 책을 좋아하고 글도 잘 썼다. 활동적인 나와는 달리 차분한 모범생으로 선생님들의 신뢰와 총애를 받았다. 적성과는 달리 컴퓨터를 전공했고 강의도 하고 전공 관련 책도 썼다. 꽤 오래전에 일을 그만두고 전업주부로 살고 있지만, 여전히 책을 좋아한다. 언니 집 책장에는 두껍고 어려운 책들이 빽빽하다. 사회, 정치 분야에도 관심이 많아 내 남편과 남동생 틈에서 거칠게 자기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다. 나는 그런 언니가 좀 부담스러웠다. 한번은 내게 “너는 박박 우겨서 4년제 대학 나왔지만 나는 집안 형편 때문에 부모님 눈치 보느라 2년제 전문대학밖에 못 나왔어.”라며 오래된 억울함을 술주정으로 쏟아냈다. 또 언젠가는 우리 남편에게 “얘는 머리는 안 좋은데 그래도 노력파라 이 정도 된 거야”라며 우스갯소리를 했지만 나는 전혀 웃기지 않았다. 언니의 거친 조언은 내게 자주 지적질이 되었다. 가족애보다 느닷없는 오지랖으로 느껴지곤 했다.
언니의 이야기 소재는 책에서 내 아들에게로 옮겨갔다. 언니의 두 아들은 서울의 좋은 대학에 한 번에 합격했다. 비슷한 또래의 우리 아들들은 둘 다 대학에 떨어졌다. 큰아들은 재수하고도 대학 대신 전공을 바꿔 학점 은행제 교육기관에 들어갔고, 이번에 작은아들도 결국 재수를 시작했다. 아들 입시에 성공한 언니의 목소리는 기숙 학원 상담 실장처럼 친절하고 날카로웠다. “네가 평소 두 아들과 잘 지내는 건 아는데 아이들한테는 적당한 잔소리와 훈육도 필요해. 아직 완벽한 성인이라고 볼 수 없는 나이잖아. 그냥 좋은 엄마 소리 듣는 거에만 만족하지 말고 좀 강하게 이끌어야 할 때도 있어야지. 네가 그런 식이라 아이들이 자꾸 실패를 맛보게 되는 거야. 나중에 엄마 탓한다.” 결국 쩔쩔매는 목소리로 “그래, 언니 말이 맞아. 이번에 우리 둘째도 마음 단단히 먹고 재수한다고 하니까 지켜봐야지 뭐. 잘할 거야.”라고 대꾸하고 통화를 마무리했다. 다음 수업 올 때 얼굴 한번 보자 했지만 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집에 오는 동안 영화 <헤어질 결심>의 탕웨이처럼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를 되뇌었다. 내 독서 방법, 자녀 교육 방식에 대해 생각했다.
나의 독서는 한가롭지 않다. 읽고 싶은 책만 읽을 수는 없다. 직업이 논술 쌤이니 초등 4학년부터 중1까지의 아이들이 읽을 책을 먼저 읽는다. 영화마니아 큰아들에게 박찬욱 감독의 책을 먼저 읽고 권한다. 축구를 하는 것도, 보는 것도 좋아하는 작은아들에게 손흥민 아빠의 책으로 말을 건넨다. 배가 불룩해진 남편에게 죽을 때까지 함께 걷고 싶다고 애교를 떨며 건강 서적을 읽자고 한다. 그 틈틈이 내가 좋아하는 소설에 빠졌다가 도서관에서 학생처럼 인문학을 공부한다. 언니가 말하는 좋은 책의 기준이 무엇인지 대충은 알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나와 가족, 나의 일에 쓸모있는 책이 좋은 책이다. 책을 읽고 내 마음이 편해지고,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해지고, 일이 순조로우면 그걸로 족하다. 넓고 깊은 책의 세계에서 나는 한없이 작고 사소한 사람이 되었지만, 그 하찮음을 견디며 나를 사랑하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을 큰아들과 두 번이나 봤다. 아들이 예매해준 덕분에 난생처음 용산 CGV 아이맥스관에서 남편과 <탑건:매버릭>을 보며 흥분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드라이브 마이 카>를 원작으로 한, 3시간짜리 영화를 아들과 함께 보고 그 감동을 나눴다. 작년 11월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는 늠름한 군인 아저씨로 장례식장에 나타나 외할머니의 영정 사진을 들었다. 코로나와 함께 고등학교에 입학한 우리 둘째는 스포츠 관련 학과에 지원했지만, 입시 결과는 좋지 않았다. 아들은 입대와 재수를 고민하다가 한 번은 더 해봐야 할 것 같다고, 재수를 결심했다. 운동하면서 20kg 감량하고 눈빛이 깊어진 아들을 나는 1년 더 지켜보기로 했다. 큰아들이 군대에 들어가기 전, 그리고 작은아들이 입시를 끝내고 나서, 나는 아들과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다. 다 큰 아들이 엄마와 단둘이 3박 4일 여행을 간다는 것에 주변 사람들은 신기하다고 했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공부 잘하는 자식은 아니지만, 엄마와 함께 여행하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고 술 한 잔도 함께할 줄 아는, 감수성 충만한 아들들이다. 다른 이들은 우리 아들의 앞날을 걱정하지만 나는 아들의 미래가 기대된다.
그날 저녁 남편에게 하소연하듯 언니의 뒷담화를 했지만 사실 언니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은유의 말처럼 맞는 말로 사람을 설득할 수 없었을 뿐이다. 언니의 말은 하나같이 맞는 말이었지만 나를 설득하지는 못했다. 언니는 책을 많이 읽어서 독서 수준은 높을지 몰라도 사람을 편하게 하는 데는 실패했다. 나라면 다른 사람의 독서 수준이나 자녀 양육 방식에 대해 쉽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언니도 어렵게 말을 꺼냈을 수도 있다. 내가 눈치채지 못한 관찰과 시간의 누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때 나는 언니의 말을 곱게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말은 하고 싶을 때 하기보다는 상대방이 들을 준비가 되어 있을 때 해야 한다. 소통도 사랑만큼이나 타이밍이 중요하다. 다음에 언니와 대화할 때는 나를 설명할 만한 적절한 언어를 찾아 정확한 목소리로 말할 수 있기를…….
첫댓글 맞아요. 소통도 타이밍이 참 중요하더라구요. 말은 하고 싶을 때 하기 보단 상대방이 들을 준비가 되어 있을 때 해야한다는 문장 저장하고 기억할게요. 아이들에게도 해 주면 참 좋을 거 같아요. 그리고 나중에는 언니에게 꼭 유주님의 언어로 정확하게 이야기 할 수 있길..응원합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시고 첫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해요. 어린 아이들과 논술 수업을 하면서 눈높이에 맞춰 듣고 말하기를 배우게 된 것 같아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티라노의 "좋은데요"가 정말 좋네요. 잘 읽어주시고 응원까지... 과분한 칭찬도 감사합니다.
'하찮음을 견디며 나를 사랑하기 위해 글을 쓴다.' 제 가슴에 와서 콕 박혔어요. 잘 읽었습니다.
누군가의 가슴에 콕 박히는 문장이 제 글에 있었다니... 다행입니다. 잘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언니 말은 저도 설득이 잘 안 돼요...그리고...마음이 아팠어요. 언니에게 지적을 당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거든요. 이 마음이 절절하게 전달되어서 감정 이입 많이 하면서 읽었어요. 글 공유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주황처럼 제 글에 공감해주시고 함께 언니 탓(?)을 하니 내가 그렇게 나쁜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나아졌어요. 감사해요.
“너는 글쓰기 수업을 듣는 것보다 독서 수준 올리는 게 더 먼저지 않아?
→ 재밌어요. 재현이 훌륭합니다. 현실 자매 대화법.
품위를 지키며 대꾸했다. = 저와 수준이 같은듯 해서 좋아요 (( 기분 나쁘시려나? ))
자식 얘기를 글쓰기 소재로 삼는 다면 매일 수업해도 좋습니다
메타포라 글쓰기 네버엔딩 '자식 뒷담화'
저 '헤어질 결심' 감동적으로 봤어요. 탕웨이가 예뻐서 그런것 ((만은) .....
'논술쌤' 이란 단어를 마주했울때.. 내가 주제넘게 댓글을 달지말까 하다가 참았습니다.
뭐... 은유샘 책에 대해도 자유롭게 댓글 달수 있는거니까요...
역쉬 문단 문단 마다 재미나고 마무리도 훌륭해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탕웨이 만세 ^^
팬입니다
헤어질 결심에 탕웨이 정말 매력적이죠? 팬의 댓글과 쓰신 글을 읽으니 저와 수준뿐만 아니라 취향도 좀 비슷하지 않나 하는 생각에 반가웠습니다.
전 제 글이 재미있기를 바라는데 팬이 재미있다는 말을 두 번이나 해 주셨네요. 최고의 찬사입니다. 감사해요.^^
유주님의 두 아들이 부럽습니다. 부모에게 걱정보다 기대를 받는 자식은 어떤 마음일까요.
좋은 책을 스스로 찾아나가는 앞으로가 계속되면 좋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
물결은 부모에게 기대보다는 걱정의 말을 많이 들었나요? 물결의 글을 읽고 나는 앞으로의 글과 함께할 시간 모두 기대되던데요.
제 글 좋게 읽어줘서 고마워요.
어느 책에서 봤는데, 아이 키우는데 필요한 건 믿음과 사랑 밖에 없다고 하더라구요.
[어느 책일까요? 최근에 봤는데 ㅠ]
서로 존중하는 엄마와 아이들 사이. 그 어느 관계보다 멋지게 느껴지네요!
존경합니다!!
저도 아이들 어렸을 적에는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방관했고, 그래도 사랑한다며 서툴게 말하고 행동하기도 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성장하며 많이 여유로워진 거예요.
멋지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