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략하게 정리해 보는 포르투갈 역사
한국의 ‘한(恨)’이라는 단어를 다른 언어로, 그것도 한 단어로 번역하기란 쉽지 않은데요,리스본의 알파마(Alfama)에서 저녁 식사를 하다가 구성진 포르투갈 전통 민요 파두(fado)를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우리의 한의 정서와 딱 맞아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았죠. 노랫말은 몰랐지만 포르투갈 기타(Guitarra Portuguesa)와 절묘하게 어우러진 여인의 음색을 듣고 있노라니 그녀의 어머니와 할머니가 겪었을 굴곡진 삶들이 오롯이 배어나는 느낌이 들더군요. 마치 포르투갈의 역사를 공부가 아닌, 그냥 단번에 마음으로 받아들인 것 같은 설레는 착각이랄까요?파두는 1800년도 초중반 리스본을 중심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음악 장
르입니다. 음악에 시를 결합해 그때그때 가수가 즉흥적으로 부르는 독특한 장르죠. 한때 브라질을 포함해 전 세계에 수많은 식민지를 거느렸던 강대국 포르투갈에서 어떻게 이런 한이 서린 민요가 생겨나게 되었을까요?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위치한 이베리아반도와 아프리카 사이의 지브롤터 해협의 경우 너비가 가장 좁은 곳이 14킬로미터밖에 되지 않아 오래전부터 외세의 침입이 잦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제로 622년 아라비아반도에서 태동한 이슬람교가 아프리카를 거쳐 무어(Moor)인들을 통해 711년 이베리아반도에 유입되었죠. 이후 포르투갈의 독립까지 400년, 에스파냐의 통일까지 800년 가까이 이베리아반도는 이슬람교의 지
배하에 있었습니다. 크리스트교를 믿는 원주민 입장에서는 정치적인 박해를 받으며 수백 년을 숨죽인 채 보낼 수밖에 없었고, 자연히 많은 한이 쌓였을 거라 생각됩니다. 참고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을 여행하다 보면 이목구비는 백인인데 피부가 거무스레한 사람들이 종종 눈에 띕니다. 아프리카를 통해 들어왔던 이슬람교도(무어인)의 형질이 남아 있는 것이죠.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를 배경으로 한 《오셀로(Othello)》는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데요, 그 주인공 오셀로 장군이 바로 피부가 검은 무어인이죠. 이슬람 세력의 오랜 지배에 숨을 죽이던 포르투갈은 1147년 북부 포르투(Porto)에서 남부 리스본(Lisbon)까지 국토를 확장합니
다. 정복왕으로 불리는 알폰소 1세(AlfonsoⅠ)의 업적으로, 그가 바로 포르투갈의 첫 번째 왕이죠. 이후 알폰소 3세 때인 1249년에는 포르투갈의 가장 남단인 파루(Faro)까지 영토를 회복해 현재의 포르투갈과 거의 유사한 국경선을 그리며 통일 왕국을 이루게 됩니다. 이 과정이 100년 정도 되었으니 그 사이 국민들의 삶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을 겁니다. 게다가 통일 왕국을 이루었어도 포르투갈의 사정은 여의치 않았습니다. 포르투갈은 1580년부터 1640년까지 60년 동안 바로 옆의 강대국 에스파냐에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 뒤 무려 28년 동안의 길고 긴 독립전쟁을 통해 1668년 마침내 에스파냐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인정받을
수 있었죠. 36년 동안의 일본의 식민 통치가 한국인의 정서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듯이, 에스파냐의 압제와 독립전쟁을 더한 88년 역시 포르투갈 국민들에게는 엄청난 고통과 한의 역사였을 것입니다. 게다가 1755년에는 진도 9.0의 강진이 발생해 무려 10만 명의 목숨이 한순간 사라지는 비극을 겪기도 했습니다. 포르투갈 전역이 큰 피해를 입었고, 특히 수도 리스본은 도시의 80퍼센트가 파괴되는 잔인한 재앙을 맞았죠. 이후 긴축 재정과 경제 혁신을 통해 성공적으로 도시를 재건할 수 있었는데요,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리스본은 이때 재건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이 서린 파두의 형성 이유에는 포르투갈 국민의 삶에
서 떼려야 뗄 수 없는 대서양도 한몫을 했을 것입니다. ‘조용하고 커다란 바다’라고 해서 마젤란이 이름 붙인 ‘태평양(the Pacific Ocean)’이 여성적이라면,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유래한 ‘대서양(Atlantic Ocean)’은 야수 같은 거친 남성의 느낌이 물씬 나는 바다입니다. 포르투갈 국민들은 생계와 탐험을 위해 이 거친 대서양을 개척해야만 했죠. 그 와중에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고, 가족을 잃은 이들의 마음속에는 분명 슬픔과 애환이 오롯이 새겨져 있을 겁니다. 실제로 포르투갈은 거칠고 변화무쌍한 파도로 전 세계 서퍼들의 천국으로 유명합니다. 한편 대항해 시대를 열었던 국가답게 포르투갈은 아메리카의 칠리(Chili) 고추를 인도에 소개
해 커리(Curry)의 탄생을 돕고, 영국에 홍차 문화를 소개한 나라입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왜군이 사용한 화약과 조총 역시 포르투갈에서 전해진 신문물이죠. 또 일본의 튀김 요리인 덴푸라와 빵도 각각 포르투갈어인 Tempora(‘시간’이란 뜻으로, 시간을 재서 튀기는 음식)와 pao(빠옹)에서 온 단어입니다. 얇고 바삭한 빵을 깨물면 부드러운 커스터드 크림이 왈칵 터져 나오는 에그 타르트(egg tart) 역시 포르투갈의 파스텔 드 나타(pastel de nata)가 원조로,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마카오(Macau)에서 홍콩, 그리고 중국까지 전해진 것이죠. 한과 함께 소박한 미를 간직한 포르투갈의 국명은 제2도시인 포르투(porto)에서 따온 것인데요, 포르
투갈에서 처음 만들어진 로제 와인과 포르투 와인에서도 포르투갈만의 맛이 느껴집니다. 또한 포르투갈은 그 어느 도시의 뒷골목을 거닐어도 수백 년을 훌쩍 넘은 가정집을 만날 수 있고, 거리의 외벽 타일 한 장에서조차 오랜 시간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그야말로 역사의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아름다운 고문서 도서관을 두고 있는 코임브라대학교를 빼놓을 수 없는데요,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코임브라대학교가 전 세계적으로 더욱더 유명해진 건 한때 코임브라에서 살았던 조앤 롤링 때문입니다. 그녀가 《해리포터》 시리즈를 구상하며 마법 학교와 망토를 두른 학생들이라는 아이디어를 얻은 게 바로 코임브라대학교인 것이죠. 실
제로 지금도 코임브라대학교의 신입생들은 망토를 두르고 수업을 받는다고 합니다. 끝으로 포르투갈은 자국민의 수보다 더 많은 애국심으로 가득 찬 해외 동포를 자랑하는 국가입니다. 또한 1932년부터 1968년까지 36년에 걸친 살라자르(Salazar) 독재 정권과 1974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군사 정권을 무릎 꿇린 카네이션 혁명(1974년)으로 기억되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이때 앙골라, 모잠비크와 같은 식민지들도 함께 독립을 했죠. 참고로, 영토가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큰 브라질의 독립은 이보다 150년(1822년) 정도 앞섭니다. 지금까지 포르투갈의 다양한 역사를 통해 전통 민요 파두의 구성진 목소리에 한의 정서가 스며들게 된 이유들을 살펴보았습니다. 포르투갈을 찾으신다면 파두의 멜로디에 꼭 한번 취해보시기를 권합니다.
유럽대륙의 서쪽끝에 붙어있는 포르투갈
우리나라에는 그저 축구 좋아하는 나라 정도로 알려져있는 포르투갈. (물론 요즘은 포르투갈 여행자가 많아지긴 했다.) 한때는 전 세계를 누비며 식민지를 개척하였으나, 지금은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되어버린 포르투갈.
< 이베리아 반도의 서쪽 끝에 위치한 포르투갈은 유럽대륙의 서쪽 끝이다. 사진출처:『셀프트래블 포르투갈』 >
'Portugal'의 기원인 'Porto'는 로마어로 항구를 뜻하는 '포르투스(Portus)'에서 유래한 것으로, 2,000년의 역사를 간직한 도시이다. 잠깐 동안의 여행으로 기나긴 한 나라의 역사를 다 이해할 순 없으나, 낯선 곳을 여행하는 자의 기본자세로 간단하게나마 그 역사를 정리해본다. (전체적인 흐름은 『셀프트래블 포르투갈』을 참고하였고, 여기저기서 살을 좀 붙임)
< Portugal의 기원인 Porto는 2,000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
◈ Portugal의 시작
구석기 시대부터 이곳 이베리아 반도의 한쪽 끝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켈트족이 처음 정착하여 살기 시작하다가 B.C 1C경에는 고대로마의 지배를 받기도 하였으며, 로마제국 멸망 이후 8C무렵에는 북아프리카에서 넘어온 이슬람 종족인 무어(Moor)인들이 이 곳을 차지하여 세력을 떨쳤다.
< 한때 포르투갈을 차지했던 무어인들이 남긴 성터 / Sintra >
오랜 기간 동안 외세의 지배를 받다가, 11C 접어들어 레콩키스타(이슬람 세력에 맞선 기독교인들의 국토회복운동)가 시작된다.
아폰수 엔리케(Afonso Henrique)가 무어인을 몰아내고 포르투갈을 건국하여 초대왕에 오르게 되고, 13C 디니스(Dom Dinis) 왕의 통치시절에는 제도 및 산업의 재정비, Lisbon 대학교 설립 등을 통하여 국가의 기틀을 다져 풍요로운 포르투갈을 맞이하게 된다.
< 포르타스 두 솔 광장 아래쪽에 그려진 Portugal 역사만화 / Lisbon >
< 12C 엔리케 1세는 발데베즈 전투에서 승리하고 스페인의 레온왕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다 / Porto >
◈ Portugal의 전성기
15C, 해양왕 인판테 동 엔리케(Infante Dom Henrique) 왕자가 나타나면서 대항해시대가 시작된다. 그는 해양학교를 발전시키고 범선 카라벨을 개발하여 대서양과 아프리카로 가는 미지의 항로를 개척하였고, 이로 인해 포르투갈은 전 세계의 식민지에서 들어오는 각종 금은보화와 노예들로 그야말로 황금의 시대를 누리게 된다. (이는 또한 유럽 제국주의의 시작이기도 하다.)포르투갈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마누엘 1세(Manuel Ⅰ) 시대에는 넘쳐나는 부로 건축과 예술이 크게 발전하였으며, 바스쿠 다 가마 등 위대한 항해사들이 인도와 브라질을 발견하였다.
< 해양왕 엔리케 왕자의 사망 500주년을 기념하는 발견기념비 / Belem 지구, Lisbon >
< 마누엘 1세(Manuel Ⅰ)에 의해 Manuel양식으로 지어진 제로니무스 수도원 / Belem 지구, Lisbon >
< 나침반 '바람의 장미'에는 대항해시대에 대한 포르투갈인들의 자부심이 남아있다. / Belem지구, Lisbon >
◈ Portugal의 시련
그러나, 황금의 시대는 영원하지는 않았다. 16C 후반에 왕권을 잡은 어린 세바스티앙 왕은 이슬람과의 전쟁에서 대패하게 되고, 이후 국권이 점점 약해지면서 60년간 이웃나라 스페인의 지배를 받게된다. 17C 접어들어 포르투갈이 영국과 동맹을 맺자 자국의 혼란으로 정신없던 스페인이 나라를 다시 돌려줘 포르투갈은 안정을 되찾는 듯 하였으나,,, 운명의 1755년 11월 1일, Lisbon 대지진이 발생한다. 이 5분간의 대지진과 그에 따른 해일과 화재로 하룻밤 사이에 Lisbon 전역이 완
전히 초토화되었다. 이후 주제 1세(Jose Ⅰ)와 폼발 후작의 노력으로 폐허가 된 Lisbon은 다시 재정비 되었으나, 영국과 동맹을 맺었다는 이유로 프랑스의 미움을 사게 되어 나폴레옹의 침공을 받게 되었으며 급기야 동 페드루 4세(Dom Pedro Ⅳ)는 리스본을 버리고 식민지 브라질로 망명을 떠나버린다. 영국군의 도움으로 프랑스를 몰아내고 왕실이 다시 포르투갈로 돌아오게 된 것은 그로부터 3년 후이다.
< Spain의 통치에서 벗어난 후 해방 60주년을 기념하여 만들어진 레스타우라도레스(Restauradores) 광장 / Lisbon >
< Portugal 최초의 왕 아폰수 엔리케에 의해 건설된 Lisbon 대성당(Se)은 Lisbon 대지진에도 살아남았다.
< 호시우광장에 서 있는 동 페드루 4세 동상-그는 나폴레옹이 쳐들어오자 리스본을 버리고 브라질로 피신했다 / Lisbon >
식민지 브라질에서 발견한 금으로 나라는 부유했지만 불평등에 불만을 갖는 노동자들이 늘어났고, 급기야 1908년 동 카를로스 1세와 그의 후계자가 이들에 의해 암살을 당하게 되고, 마누엘 2세를 마지막으로 포르투갈의 군주제가 막을 내리게된다. 제1차 세계대전 끝나고 공화정의 통치에 대해 내란이 이어졌고, 이후 안토니우 지 올리베이라 살라자르에 의한 독재정권이 50년 넘게 지속된다. 그는 국민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도록 3F 정책(축구 Football, 파두 Fado, 종교 Fatima)을 펼쳤다는데,,, 80년대 우리의 3S 정책(Sports, Screen, Sex)이 생각난다. 갑자스런 독재자들의 연결고리,,,,
< 코메르시우 광장에서 동 카를로스 1세와 후계자가 암살당하고 2년후 Portugal의 군주제가 막을 내린다 / Lisbon >
◈ 민주국가의 탄생
독재자 살라자르가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마르셀루 카에타누가 새로운 수상에 올랐으나 1974년 4월 25일 카네이션 혁명으로 독재정치는 끝이 나게 되었고, 국민투표에 의해 마리우 수아레스가 민간 대통령으로 선출되게 된다.
< '4월 25일 다리'의 원래 이름은 우습게도 독재자의 이름을 딴 '살라자르 다리',,,
이슬람의 지배와 대지진, 독재정치 등을 이겨내고 카네이션 혁명을 통하여 정치적 성장을 이루었지만, 전 세계를 누볐던 대항해 시대의 영광은 지금은 그저 추억으로만 남아있다. 한낱 여행자이자 이방인인 나는 포르투갈이 과거의 멋스러운 추억들을 그대로 간직한 채 변함없이 있어줬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그곳이 삶의 터전인 포르투갈인들은 변혁을 통해서 화려했던 과거의 부유함을 다시 되찾길 희망할 것이다.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하는 현재의 포르투갈은 이 숙제를 과연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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