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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장 귀래(歸來)
건문2년 4월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전투가 다시 시작되었다.
바로 후일 백구하(白溝河) 전투라고 불린 일전이다. 그 전투에서 이경륭은 전력을 쏟아붓고도 도독(都督) 구능(瞿能) 부자를 비롯, 10여만이 넘는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덕주로 도주해야 하는 치욕을 겪는다.
거기서 발군의 용력(勇力)을 자랑한 것은 바로 주고후였다. 그는 수천기의 기병(騎兵)을 이끌고서 적진으로 돌진하여 구능 부자를 적의 진중에서 참살하는 무용을 뽐내 적진을 혼비백산케 하여 대승을 이끌어내는 견인마가 되었다.
5월이 들어서면서 연왕은 더욱 용력분전(勇力奮戰), 이경륭이 의지하고 있던 덕주를 함락하고 그가 제남으로 도주하자 그를 쫓아 제남까지 밀고 내려오기에 이른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
그 말은 언제까지라도 진실임을 증명하듯, 여기에서도 새로운 영웅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성용(盛庸).
제남의 도독이었던 성용은 참정(參政) 철현(鐵鉉)과 더불어 성을 굳건히 지켜, 욱일승천의 기세로 치고 내려오던 연왕마져도 그를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북평으로 돌아가야 했다.
연왕이 돌아감을 본 성용은 군대를 이끌고 진격하여 잃었던 덕주까지 되찾는 일대 전과를 이룩하기에 이른다.
연전연패, 수많은 대군을 이끌고도 연왕의 정병(精兵)을 당하지 못해서 쩔쩔매고 있던 건문제의 조정으로서는 실로 가뭄의 단비가 아닐 수 없었다.
그 숱한 명장기걸(名將奇傑)들을 주원장이 모조리 죄주어 죽인이래 장수다운 장수가 없었던 조정에서는 곽천수가 죽은 이래, 처음으로 대장군 다운 재목을 발견해낸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성용은 역성후(歷城候)로 봉함을 받고는 정식으로 이경륭의 자리를 이어받게 되었다.
그것이 그해 9월의 일이다.
대장군이 된 성용은 덕주를 중심으로 군세를 정비하여 호시탐탐 북평을 노리게 되었다.
그해 10월.
패장 이경륭이 돌아왔지만 황제의 인척이라는 이유로 그 죄를 사하여 죄를 주지 아니하니, 이미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황자징은 탄식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10월 들어 야밤에 강을 건너 덕주를 공격하던 서개(徐凱)가 성용에게 궤멸되면서 시작된 싸움은 그해 12월에 들어서면서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연왕에게 가장 큰 타격을 주었던 전투인 동창(東昌;지금의 산동성 료성현(聊城縣))의 싸움이다.
그 싸움에서 연왕 주체는 화기(火器)와 강궁(强弓)으로 무장한 성용의 군에게 오른팔과 같았던 장옥(張玉)까지 잃고 필마단기, 홀로 도주해야 하는 일생일대의 수모를 겪는다.
그때 주고후가 때맞추어 군사를 이끌고 달려와 구원하지 않았다면 후일의 역사는 다시 씌여졌을 터이다.
그로부터 성용의 군대는 승승장구, 말그대로 연전연승을 하면서 사기충천하여 연병(燕兵)을 핍박해 들어갔다.
이겼다는 말, 승전보를 들어본 적이 별로 없었던 건문제는 그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했다.
건문제는 태묘(太廟)에 동창의 승전을 고하고는 황자징과 제태를 다시 불러들였다.
축제의 분위기.
이제 모든 것이 제대로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건문제의 문약(文弱)은 바로 거기에서 드러났다.
-한 집안끼리 싸움을 벌이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부디 짐으로 하여금 후일 숙부를 죽였다는 악명(惡名)을 쓰게 하지말라.-
실로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전쟁터에 나간 장수에게 그러한 조서(詔書)를 내렸으니 어떻게 힘을 내서 싸울 수가 있을까.
연왕을 죽이기라도 한다면 그 죄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그것은 한창 분발하고 있던 군대의 기를 꺽어놓기에 족했다.
오죽하면 황자징등이 건문제를 일러 "부녀자와 같은 어진 마음씨를 지녔다."라고 평했을까.
가히 폭풍.
중원에 이는 전쟁의 바람은 주변 각국의 촉각을 곤두세우게 하기에 족했다. 그 싸움의 결과에 따라 향후 정세에 많은 변화가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먹구름이 끼면 천하가 어두워진다.
마찬가지로, 이미 자리잡은 명의 국권을 누가 잡느냐에 따라서 향후 나라의 진로가 달라질 것은 누구라도 짐작할 수가 있는 일이었다.
이란격석(以卵擊石)이라 하여 계란으로 바위치기로 보였던 연왕 주체의 반군은 시간이 갈수록 힘을 얻어 이미 수십만대 몇만의 열세를 상당히 회복하고서 틈을 보고 있었다.
최소한 성용이란 장애물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리고 그가 이경륭을 대신하여 군권을 장악하기 전까지는 분명히 그러했었다.
하지만 건문3년에 들어서는 지금에는 자신할 수가 없는 입장이 되었다.
북방의 세찬 겨울 찬바람보다 그것이 더 연왕 주체의 가슴을 무겁게 했다.
천하는 넓다.
그런 인재가 나타날 것은 연왕 주체도 짐작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물러날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적은 시시각각 주변의 세력을 무너뜨리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이미 3년을 끌고 있는 전쟁이었다.
만약 더 시간을 끌게 된다면 누가 불리할 것인가는 자명한 일이다.
세찬 바람이 황진을 일게 한다.
그 찬바람도 연왕 주체를 집안에 있게 하지는 못했다. 그는 굳은 얼굴로 후일 자금성이 될 왕궁의 뒤뜰을 거닐었다.
세상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 여기에서 오리를 키웠었다.
그 오리의 울음에 맞춰서 지하 대장간에서는 하나둘 망치질 소리가 요란했었고, 그렇게 만들어낸 병장기를 들고서 정난의 군을 일으켰었다.
확실한 승산이 있다고 보고 한 전쟁은 아니다.
어차피 그대로 앉아 당할 수만은 없어서 일으킨 전쟁이었다.
하지만 일단 싸움이 시작되면 반드시 승자가 가려지는 법이고, 어떤 수단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 전쟁에서 이겨야만 하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여기 계셨습니까?』
뒤에서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작달막한 키에 병든 호랑이와 같은 생김.
바로 그의 모사라 할 수 있는 승 도연이었다.
『어떻게 되었소?』
『사람이 출발했습니다』
『한심한 일이로군. 내가 그 오랑캐들의 원조를 청해야 하게 되다니…』
『원조라고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저들은 불리하다고 생각하면 출병하지 않을 것이니, 서로가 필요함에 따라 이용할 뿐입니다』
도연이 간단히 정리했다.
연왕 주체는 물끄러미 그를 본다.
그의 말은 어지러운 것을 아주 간단히 풀어내는 힘이 있었다. 그렇게 그는 늘 어려운 것을 간단히 정리하여 그의 마음을 가볍게 해주었다.
『그들이 올 것 같소?』
『올 겁니다. 귀력적은 전하께서 어떤 분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더구나, 그쪽에는 전하의 친정(親征)이 잦아 전하의 위용(威容)을 따르는 자들도 상당히 있는 걸로 들었습니다』
『재미있는 세상이로군…』
연왕 주체는 밤하늘을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도연은 그를 향해 다시 말했다.
『백방으로 손을 쓰고 있습니다. 일단 조정에서 성용을 기피하게끔 만들고 있고…』
『기피?』
『그렇습니다. 지난날 송의 악비(岳飛)는 그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진회(秦檜)라는 간신의 모함으로 인해 역적으로 몰려 죽었습니다』
『가능한 일인가?』
『조정의 내관(內官)들이 전하의 편입니다』
내관이라 함은 환관, 내시들을 일컫는다.
홍무제는 지난날 수많은 환관들의 전횡(專橫)과 횡포를 익히 알고 있었기에 아예 황궁의 앞에다가 철비(鐵碑)를 세워 환관들이 절대로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게 경계했었다.
그러므로 명 초기의 환관들은 황제를 가까이에서 모시면서도 사람다운 대접을 전혀 받지 못했다.
특히 건문제는 조부의 유칙(遺勅)을 철저히 지켜서 그들을 인간이하로 대우하였다.
그러니 그들에게서 원망이 싹트지 않을 수 없었고, 앙심을 품은 그들은 암중에 연왕 주체에게 조정의 비밀을 하나하나 흘러보내, 연왕측은 수천리 밖에 있어도 그 내막을 소상히 알 수 있었다.
쉽게 말해서 정보에 앞서 있었다는 말이고, 그것은 훗날 결정적인 승기(勝機)로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외에도 우리를 도와줄 힘을 교섭하고 있는 중입니다』
『누가 또 있단 말인가?』
『강호무림의 힘입니다』
『무림?』
『그렇습니다. 무림고수들을 끌어들일 수 있다면 막강한 힘을 얻을 수가 있을 겁니다』
『무림중의 고수라는 자들은 한운야학과 같아서 얽매이는 걸 싫어할 텐데? 그들은 원래부터 관부와는 친할 수 없는 존재들이 아닌가』
『개개인을 설득하고 불러 모은다면 별로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시간도 많이 걸리고… 하지만 단체를 끌어들인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도연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단체라…
연왕 주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단체라고 한다는 것은 아직까지는 일이 성사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일이 무르익는다면 묻지 않아도 스스로 말할 그일 터이다.
도연은 그러한 연왕 주체의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본다.
이제 때가 되었다.
그는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의 힘이 세상에 드러날 때였다.
***세찬 바람은 사막에도 불고 있었다.
모랫바람은 한기마저 휘몰고서 칼날과 같이 대막을 휩쓸었다.
하늘의 달은 차디차게 맑다.
그 하늘 아래, 어둠 속에서 말들이 허연 입김을 내뿜으면서 출발준비를 하고 있다. 대상의 말이 아니었다. 전투를 위한 기병들이다.
일천 이천도 아니었다.
그런 그들이 어둠 속에서 밝아오는 새벽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대오를 정비하고 있는 중이었다.
『말이나 됩니까?』
사나운 기세를 머금은 노호가 어둠을 흔들었다.
파오.
그 기병들의 대오 가운데 늘어선 파오중 가장 큰 파오에서 그 노한 음성은 터져나왔다.
홀가적은 검미를 곤두세운채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중늙은이를 노려보았다.
한칼이면 없애버릴 수 있는 존재.
하지만 지금의 그는 몽고 제일의 힘을 가진 존재다. 바로 달단가한이라 자호(自號)하는 귀력적이 그인 것이다.
『기회를 노려서 그 배후를 들이쳐야 할 판에 출병하여 연왕을 돕는다는 겁니까? 지금 이대로 이렇게 주저앉아서 연왕의 개가 되자는 뜻입니까?』
홀가적의 음성에는 날이 서 있었다.
그도 부족의 추대를 받는 사람이다.
비록 작년에 대한의 핏줄을 받은 유일한 존재인 야숙진이 쿠빌라이의 무덤에서 죽기는 했으되, 그의 약혼자로서 그의 위치는 결코 낮은 것이 아니었다.
파오 안에는 부족장들이 둘러앉아 있지만 누구 하나 귀력적의 말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었다.
『아직 젊군…』
이어 들리는 귀력적의 말에 홀가적은 눈을 부릅떴다.
『젊다니, 무슨 뜻입니까?』
『한가지만 생각한다는 뜻이지. 연왕을 돕지 않는다면 건문제의 군대는 연왕을 쳐 없앨 것이네. 그럼… 중원의 난세는 그것으로 끝이야』
홀가적은 입을 다물었다.
『중원의 전란이 끝나면 어찌 되나? 우리의 바람은? 다시 한번 천하를 우리의 것으로 하자는 우리의 염원은 아마도 우리들 세대에는 이루기 힘든 헛된 것이 되고 말걸세. 그렇지 않으려면 방법은 하나뿐이야. 난세에다 불을 질러주는 거지』
『빌어먹을!』
홀가적은 입술을 물면서 바위를 쳤다.
그의 무공은 여전하여 손은 쾅! 소리와 함께 바위를 깨고 박혀들었다. 돌이 모래처럼 그의 주먹에 비명을 지르며 바위에서 부서져 이리저리 튕겨져 나갔다.
오늘은 반드시 눌러주리라!
다짐을 했었다.
그것을 위해서 장로들까지 모이게 한 자리였다.
그런데, 그것이 보기좋게 한방을 맞고 그도 모자라 그렇게 모은 장로들과 권커니 작커니, 잔치판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일컬어 환송연(歡送宴).
졸지에 사람들을 모아 귀력적의 출병을 환송하는 꼴이 된 홀가적은 귀에서 연기가 날 지경, 치미는 열기로 인해서 머리카락이 오그라 붙을 것 같아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다.
그 빌어먹을 개자식이 나타난 이후, 그처럼 승승장구하던 모든 일들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그 최악은 바로 야숙진이 쿠빌라이의 무덤에서 죽어버린 일이었다.
그로인해 그의 입지가 흔들려 전과 같이 강한 주장을 펼 수가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문득 뒤에서 희미한 기척이 들렸다.
작달막한 체구에 탄탄한 체구를 가진 중늙은이 하나가 그의 뒤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나이 오십 줄.
세모꼴의 눈빛이 음침하다.
『여기 나와계셨군. 한참 찾았소.』
그가 주위를 둘러보며 은밀히 입을 열었다.
기온을 말하듯 하얀 입김이 서린다.
『어떻게 되었소?』
홀가적이 물었다.
『찾았소.』
『찾았다고?』
홀가적의 전신이 가늘게 진동했다.
『려구하에서 찾아냈소.』
『가능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언제 그를 만나볼 수 있겠소?』
『언제라도.』
『좋아……!』
홀가적이 암중에 불끈, 주먹을 쥐었다.
찾을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사람을 찾았다.
어쩌면 이건, 하늘이 돕는 일인지도 몰랐다.
그런 그를 중늙은이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바라보았다.
그의 이름은 아로태(阿魯台).
달단가한 귀력적의 심복이자, 암중에서 꿈을 키우고 있는 모사(謀士)다.
후일 연왕 주체가 천하를 장악했을 때, 반란을 일으켜 주인인 귀력적을 시해하고 대한의 후예라는 본아실리(本雅失里)를 내세워 실권을 장악했던 인물.
야숙진을 잃은 홀가적은 그의 야심을 알면서도 그와 손을 잡을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우선 야숙진을 대신할 혈통(血統)을 찾는 일에 착수했다.
몽고족에 있어 그 혈통이란 것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혈통을 이은 자를 이제 찾아낸 것이다.
그것이 본아실리임은 뒤에 밝혀질 일이지만.
잠시 밀담을 나눈 홀가적은 아로태와 헤어져 처소로 돌아갔다.
어차피 환송연은 밤을 지샐 것이지만 거기서 귀력적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이건?」
막 파오로 들어서려던 홀가적은 번개처럼 뒤를 돌아보았다.
쉬이이…… 쉬이이이……
세찬 바람만이 어둠 속에서 대지를 칼날처럼 휘저어대고 있을 뿐 보이는 것은 어둠 뿐이다.
그의 돌연한 행동에 출입구 문을 열고 서 있던 심복들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잘못 들은 건가?」
잠시 주위를 쓸어보던 홀가적은 천천히 자신의 거처로 들어섰다.
주변으로 경비병들이 깔렸다.
모든 것은 전과 같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눈이 있음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는 석상과 같이 서 있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홀가적은 결코 잘못 느낀 것이 아니었다.
바깥과는 달리 파오의 안은 넓고도 아늑했다.
여타의 파오와는 달리 홀가적의 파오는 양유로 불을 지피지 않아 깨끗했고 또한 더욱 밝았다. 거기 밝혀진 것은 중원에서 가져온 대황초였다.
한사람이 거기 있었다.
안석에 파묻히듯 앉아서 들어서는 홀가적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
거대한 체구.
붉은빛 승포를 걸친 그는 극도활불이었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전과는 어딘지 모르게 달라 보였다.
엄청나게 부푼 살에 파묻혀 제대로 보이지 않던 눈길이 음침해 보이는 것은 촛불의 음영(陰影) 탓일까.
그는 홀가적이 들어서는 것을 보고도 묵묵히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귀력적은 내일 출발할 겁니다. 예정대로』
『그럴 줄 알았지』
『여기까지 와서 왜 도와주지 않았던 겁니까?』
홀가적이 일그러진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극도활불의 눈빛이 묘하게 흔들거렸다. 그리고 그 눈은 깊게 웃으며 홀가적을 보았다.
『좋아. 북방영주의 신분이라, 이제 본불이 안중에도 없다는 건가? 흘흘흘… 하긴 그럴 수도 있겠지. 신분이 달라졌으니까』
그의 눈빛에 홀가적은 내심 아차 하는 심정이 되었다.
그는 몽고 일대의 전설적인 인물.
말 그대로 모든 사람들이 그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것은 귀력적도 마찬가지. 비록 절절매는 것은 아니지만 십분 존중하고 숭앙받는 존재가 바로 라마이고 그중에서도 활불이라 존칭되는 것이 극도활불인 것이다.
그가 극도활불과 동등한 위치에 선 것은 쿠빌라이의 무덤에서 나온 뒤부터였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그가 광명회의 호방존자(護方尊者)가 된 다음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살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그와 마주한 회의복면인은 거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는 무너지는 쿠빌라이의 무덤에서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한 극도활불을 구해냈다. 그리고는 그를 광명회의 호방존자로 선택했다.
상대와 협상을 하고, 상대의 선택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상대와 동등한 권리를 가졌을 때다.
하지만 대막의 전설 극도활불에게는 이미 그러한 권리가 없었다. 스스로 자진(自盡)할 수 있는 권리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만큼 광명회주라는 존재의 힘은 무서웠다.
『안중에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귀력적을 꺾지 않고서는 부족을 장악할 수가 없음을 활불께서도 잘 알지 않습니까?』
답답하다는 듯이 조금 누그러진 어조로 홀가적이 입을 열었다.
『본불 혼자의 뜻으로 그냥 있었을 것 같은가?』
음랭한 웃음이 극도활불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 그럼?』
『회주의 전갈이 있었지! 귀력적이 출병하는데 방해하지 말라는. 왕자는 본불이 회주의 유시(諭示)를 거부하라는 말을 하는겐가?』
『그, 그런 말도 안되는…』
홀가적이 입을 벌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분명히 회주로부터 귀력적의 출병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받았었다. 그런데 극도활불은 그와 또다른 명령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불이 여기에 있는 것이지. 왕자가 실패하고 오면 상황을 설명해주기 위해서, 그것이 회주의 뜻이었다는 점을 알려주기 위해』
『……』
홀가적은 입을 다물었다.
광명회주의 뜻은 늘 추측하기 힘들었다.
전에는 그렇지 않았었다.
광명회주가 있는지 없는지 제대로 알기 힘들었던 그때, 금곡노야가 전면에 있었을 때는 북방령주로서의 그의 권한은 의외로 컸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대체 전체적으로 무엇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채 그저 시키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고 있는 것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그것을 알면서도 감히 불만을 토로할 수 없다는 것.
『빌어먹을!』
홀가적은 다시 한번 주먹으로 벽을 쳤다.
벽이 아니었다.
파오 안이니 벽이 있을리 없다.
그의 손에 애꿎은 의자만 산산조각이 나 흩어졌다.
답답했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자신이, 무력하기만 한 자신이 답답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이것이 아니었는데….
정말 그가 원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었다.
위대한 제국, 그 위대한 제국이 전설화되기 전에 다시 현실에서 되살려보고자 했었는데 이따위라니!
홀가적은 입술을 깨물었다.
술이 생각났다.
중원에 다녀온 후로는 늘 중원의 술만을 마셨다.
하지만 지금은 어릴 때부터 마셔온 그 텁텁한 마유주(馬乳酒)가 그리웠다.
그렇게 홀가적은 홀로 술을 마셨다.
한 잔.
또 한 잔.
그는 이미 지난날의 그가 아니었다.
지난 날의 그라면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기에.
밖은 이미 충분히 어두웠다.
중원에서는 천하를 놓고 숙질간에 한판의 도박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지만 그까짓 사소한 일이야 대지가 알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대지를 할퀴던 매서운 바람은 모래를 휘몰아 세상을 온통 덮었다.
뜨겁던 바람은 밤이 되면서 뼈를 깎는 한풍(寒風)이 되어 사막을 얼린다.
그 어둠을 뚫고서 묘한 외침이 울리고 있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천천히… 그 외침을 흘리면서 어둠 속에서 매서운 바람을 뚫고서 전진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라마의 행렬이다.
거대한 가마를 옹위한 그 행렬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 대막에서는, 이 대초원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
바로 극도활불의 행차인 것이다.
그러나 작게는 수십명, 많게는 수백명이 옹위하던 그 거창한 극도활불의 행차라고 보기에는 오늘 밤의 이 행렬은 조금 초라한 감이 있었다.
가마를 멘 여덟명의 라마를 제외하고는 앞에서 불령을 흔들면서 길을 인도하는 두명과 뒤를 따르는 세명의 라마를 제외하고는 호위하는 자들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행렬은 다른 때와는 달리, 대단히 빠른 속도로 어둠을 뚫고서 달리고 있었다.
일행 모두가 경신술(輕身術)을 전개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때였다.
앞서 길을 인도하고 있던 두 라마의 눈에 돌연 긴장이 흘렀다.
무엇인가가 앞에 있었다.
사람이다.
매서운 초원의 밤바람을 맞으며 석상처럼 조용히 한 사람이 우뚝 서서 다가오는 행렬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찬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
여인의 것인 듯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며 언뜻언뜻 얼굴이 드러나지만 이 겨울에 걸친 허름한 옷은 부실하기 이를데 없다. 너덜너덜한 옷은 소매까지 다 헤어져 걸레를 방불케 한다.
그럼에도 그의 전신에서 느껴지는 기도는 남달랐다.
앞선 라마는 그의 늘어진 손에 한자루의 장검이 들려 있음을 발견하고는 소리쳤다.
『감히 누가 활불의 행차를 막는 것이냐?』
그의 외침은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가 행렬을 정지시키기도 전에 석상처럼 우뚝 서 있던 산발의 괴인이 검을 쳐들어 그를 향해 찔러왔던 것이다.
거리는 삼장 가량.
그러한 거리라면 손을 뻗거나 달려와야만 상대를 공격할 수 있는 거리다.
그럼에도 산발괴인이 검을 쳐들자 라마는 그의 검이 이미 자신의 가슴에 도달하고 있음을 보고는 혼비백산하여 수중의 금강탁(金剛托)을 들어 그의 검을 막으려 했다.
검끝에 달빛이 찬란히 부서졌다. 달빛을 가르며 검이 날아들고 있었음에도 검이 달빛을 가른다기보다는 검이 달빛에 묻혀서 달빛과 하나가 된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착각일까. 앞장선 라마의 무공은 분명히 약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향해서 날아드는 검을 막을 만한 능력이 그에게는 없었다. 금강탁이 헛되이 허공을 갈랐다.
채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가 신음과 함께 피를 뿌리며 거꾸러졌다.
산발괴인이 앞선 라마를 베어넘기고 앞으로 전진하는 순간, 앞선 두 라마중 다른 라마가 호통을 치면서 수중의 금강저(金剛杵)를 휘둘러 그 산발괴인의 목을 쳤다.
휘잉!
파공음이 무섭게 허공을 갈랐다.
그 일격에 산발괴인이 격중당한다면 한방에 목이 달아나고 말터이다.
하지만 그의 일격은 허공을 가르고 말았다.
분명히 막 동료 라마를 베어넘기고 달려드는 산발괴인을 향해서 금강저를 휘둘렀음에도 그 산발괴인은 이미 그를 지나 극도활불이 타고 있는 가마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서랏!』
라마는 몽고어로 호통을 치면서 그 산발괴인을 뒤쫓다가 두눈을 부릅떴다.
그 눈에 떠오른 것은 불신과 경악, 그리고 고통!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던 산발괴인의 검이 빠져나가면서 피분수가 일자, 그는 피가 뿜어져 나가는 것을 막아보기라도 하려는 듯이 가슴을 움켜쥐고서 천천히 그 자리에 쓰러졌다.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극도활불을 좌우에서 지킨다는 양대 호법존자가 제대로 손도 써보지 못하고 피를 뿌릴 줄이야.
산발괴인은 그 라마가 쫓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앞서 가던 신형을 돌리면서 검을 내밀었다. 라마는 졸지에 그 검을 향해서 가슴을 들이민 꼴이 되어 채 피할 엄두도 내기도 전에 그대로 심장을 꿰뚫리고는 쓰러져버린 셈이었다. 산발괴인은 피묻은 검을 들고서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앞에는 극도활불의 가마가 서 있었다.
그는 침착한 눈으로 여덟명의 라마가 메고 있는 그 거대한 가마를 쳐다보았다.
『누구냐?』
잠시 침묵이 흐른 다음, 가마 안에서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당신을 죽이기 위해서 왔소』
산발괴인이 몽고어로 대답했다.
여전히 침착한 음성.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호통과 함께 가마의 뒤에 서 있던 라마들이 날랜 범과 같이 앞으로 뛰쳐나왔다.
하지만 그들은 산발괴인의 상대가 아니었다.
성난 호랑이 같고, 노한 독수리처럼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그저 상대가 덮쳐오는 그 결에 따라 검을 내밀고 있었고, 과도하게 힘을 쓰지도 않았다. 살인을 하기 위해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지만 그의 검은 춤추듯 세명의 라마를 유린했다.
검이 멎었다.
밀종의 대수인도, 천룡수(天龍手)도 천산갑(穿山甲)의 호신공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그의 검은 마지막 라마의 기문혈(氣門穴)을 베고는 천천히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선연한 붉은 피가 그 검끝을 타고 달빛을 머금었다.
『……』
문득 침묵이 찾아들었다.
세찬 모래바람만이 칼날처럼 주위를 맴돌 뿐이다.
『왜 나를 죽이려 하나? 무엇 때문에?』
침묵을 깨고 가마 안에서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한 여인의 부탁을 받았소. 당신을 죽여 달라는… 그뿐이오』
『그게 누구지?』
『야숙진』
산발괴인이 망설이지 않고 짧게 대꾸했다.
낮은 경호성이 가마 안에서 들려왔다.
『그녀가 살아 있느냐?』
『죽었소』
『……』
다시 침묵.
『그렇군. 넌가? 죽지 않았더란 말이지…』
잠시 침묵이 흐른 다음, 가마 안에서 극도활불의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산발괴인은 머리카락를 찬바람에 휘날리면서 극도활불의 가마 앞에 묵묵히 서 있었다.
느껴지는 것은 그의 조용한 눈빛뿐.
그의 앞에 있는 가마는 이미 땅에 내려져 있고, 극도활불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움직이기 귀찮은 듯 안석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있을 따름이다.
『홀가적의 처소에서 누군가 그를 뒤따른다 싶었더니 그게 너였던가?』
극도활불이 물었다.
『……』
산발괴인은 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늘어뜨리고 있던 검을 조용히 쳐들었을 뿐이다.
길게 말을 하고 싶지 않다는 무언의 표시.
문득, 그늘진 극도활불의 눈에서 묘한 웃음이 물결치듯 일어났다.
『그런가? 각개격파를 위해서 본불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가? 그런데 왜 본불이 먼저이지? 너와 원한이 있는 것은 본불보다는 그일텐데?』
『그녀가 원한 것은 당신이었소』
산발괴인이 짧게 답했다.
일순 극도활불이 미간을 찡그렸다.
『본불을?』
그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이 되었다.
『왜 본불… 본불은 그녀에게 매우 잘해 주었었는데, 그런…』
『수도(修道)라는 미명하에 처녀를 유린하는 것이 법왕(法王)이고 활불(活佛)이라면 그런 자들은 이 세상에 남아있을 가치가 없다고 그녀가 나에게 부탁했소. 당신을 없애달라고…』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처녀의 순결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준비된 것이라는 말과 함께』
그의 말에 문득 극도활불이 나지막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후… 이제 알겠군! 그래, 그래… 계집이란 말이지. 너를 좋아했다는 이야기인가? 그래서, 네게 주었어야 할 몸뚱이를 이 부처님에게 바친 것이 한스럽다는 그런 말이로군 그래?』
『닥쳐라!』
산발괴인의 입에서 처음으로 호통이 터졌다.
동시에 그의 신형이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가히 섬광일순(閃光一瞬)!
그는 이장가웃 가량의 거리를 찰나간에 가로질러 검을 쳐냈다.
그가 노린 곳은 극도활불의 기문(氣門).
극도활불은 밀종 유가신공(瑜伽神功)을 연성하여 도검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쇠바늘 침상에 누워 잔다 하더라도 전혀 상관없이 잠을 잘 수 있을 정도였고, 거기에 도끼질을 하더라도 그를 상해할 수 없다가 정답이다.
그러한 그의 신공을 깨뜨릴 수 있는 것은 유가신공의 유일한 약점인 조문.
그것이 기문임을 산발괴인은 알고 있었다.
밤하늘을 가르는 유성처럼, 그의 검은 어둠을 뚫고서 날아들어 극도활불의 목을 꿰뚫었다.
극도활불이 미간을 찡그렸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반항하지 않고서 자신의 목을 뚫고 들어오는 산발괴인의 검을 바라보고만 있을 따름이었다.
놀람의 빛이 산발괴인의 눈에 떠올랐다.
극도활불이 전혀 반항하지 않고 자신의 검을 받을 것임은 상상도 하지 않았던 일인 까닭이다.
검이 자신의 목을 꿰뚫었음에도 극도활불의 눈에는 고통의 빛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희미한 웃음의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이제 되었나?』
그가 한어(漢語)로 말했다.
그때, 사방에서 노한 외침이 터져나오면서 가마를 메고 있던 여덟명의 라마들이 일제히 산발괴인을 향해 덮쳐왔다.
그들로서는 너무도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늘과 같은 존재인 극도활불.
그가 손도 쓰지 못하고 산발괴인에게 당할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일인지라, 일시지간 목석처럼 굳어있다가 대로하여 달려드는 것이다.
『물러나지 못할까!』
극도활불이 눈을 부릅뜨고서 소리쳤다.
천둥 같은 고함.
그 소리의 여파로 일대의 흙먼지가 바람을 휘몰고 피어오르는 가운데 극도활불은 피를 쏟아냈다.
『이 일은 본불이… 택한 일. 너희들은 물러나 있거라. 달려들어 봤댔자 쓸데없는 주검만 늘릴 따름이니…』
극도활불의 명에 따라 라마들이 물러나 무릎을 꿇고서 독경하기 시작했다.
알아듣기 힘든 독경소리가 어둠을 타고 멀리 번져갔다.
극도활불은 산발괴인을 바라본다.
그답지 않게 너그러운 눈빛이었다. 깊고 그윽한…
산발괴인이 그의 눈빛을 받자 입을 열었다.
『왜 피하지 않았소?』
희미한 웃음이 다시금 극도활불의 눈에 떠올랐다.
『욕된 삶을 이제 끊을 수 있게 되었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지. 살아 있었으면서 왜 이제야 나타난 것인가?』
『살아나오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었소』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입을 다물었다.
이제 그는 알 수 있었다.
극도활불은 처음부터 살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다.
그는 자신을 시험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누군가를 알게 되자 자신을 자극하여 손을 쓰게 한 것임을. 그는 처음부터 죽음을 결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일까.
휘이이잉…
세찬 바람이 일대를 쓸면서 산발괴인의 머리카락을 흩날려 그의 얼굴을 드러나게 했다.
창백한 얼굴이다.
나이는 별로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 가운데 자리한 눈은 정말 나이답지 않게 고요하고도 단아했다.
그러한 기풍(氣風)은 누구나 가질 수도, 흉내를 낸다고 해서 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왕승고.
쿠빌라이의 무덤.
그 깊은 곳에 파묻혔던 그가 무려 일년여의 시간을 넘기고서 다시 나타난 것이다.
대체 그는 그간 무엇을 한 것일까.
『그는 항거불능의 존재… 나는 죽음으로써 그를 벗어나나… 너는 조심하라.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으니…』
극도활불은 그 말을 끝으로 눈을 감았다.
목에서 흐르는 피가 그의 화려한 승포를 적셨다.
……
묵묵히 그를 바라보고 있던 왕승고는 말없이 등을 돌렸다.
독경소리만이 요란하게 더 커졌다.
남은 여덟명의 라마는 충실히 극도활불의 명을 지켜 그를 향해서 달려들지 않았다.
* * *
의외에도 그가 당한 상세는 간단하지 않았다.
회의복면인의 그 일격은 괴기한 기운을 남겼고 끊임없이 심장을 공격해왔다. 천하제일이라고 할만한 천부신공으로써도 그것을 완전히 물리칠 수가 없었다.
만에 하나, 이 지하능묘 내에 공기가 통하지 않았다면 그는 야숙진과 함께 생을 마쳤어야 했을 터였다. 묘의 내부, 그것도 그 거대한 묘지의 중심에 공기가 통할 수 있다는 것은 경이(驚異)로운 일이었지만,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고 그 이유를 왕승고는 야숙진이 남긴 혈서를 통해 통로를 조사하면서 알게 되었다.
그러한 일이 가능했던 것은 이 지하 능묘를 건설한 사람이 스스로가 살기 위해서 숨구멍을 만들어두었기 때문이었다.
건축이 끝나면 비밀유지를 위해서 공사에 참여한 사람을 남김없이 죽일 것임을 알고 있는 그는 공사 막바지에 이르러서 이 본묘에 숨어 들었었고, 예상대로 다른 사람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얼마의 시간이 지난 다음, 그는 지하능묘의 부장품까지 가지고 지옥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시공을 격하고 이제 왕승고가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하루하루.
상세를 치료하고 통로를 찾기 위한 투쟁의 나날이 시작되었다.
야숙진이 그처럼 심혈을 기울인 노력은 피가 범벅이 된 바람에 별 실효를 거두지 못해 왕승고 스스로가 통로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찾아낸 통로가 온전하지 않았던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오랜 세월의 흐름으로 인하여, 아니면 다른 어떤 문제로 인해서인지 통로가 무너져 길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한 것은 그 무너짐으로 인해서 한가닥 지하수가 능묘 한쪽에서 솟아오르고 있어서 목을 축일 수 있다는 것일까.
이끼를 벗기고, 통로를 파들어가면서 상처를 치료하는 가운데,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건 닥치는 대로 먹어야 했다.
고민 끝에 벌레도 잡아먹었고, 흙을 퍼먹은 적도 있을 정도로 그 생활은 가히 지옥과 같았다.
칠흑 같은 어둠.
그 어둠을 벗어난 것은 왕승고가 숨겨진 능묘의 보물을 발견하면서였다.
먼저 가져간 사람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그 보물들은 그 자체로 작은 나라 하나는 세우고 남을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고 그보다 당장 더 중요한 것은 그 보물중에 야광주(夜光珠)가 있었던 까닭이다.
어둠 속에서 스스로 빛을 낼 수 있는 야광주가 나타난 다음, 왕승고를 더욱 기쁘게 한 것은 능묘 내부에서 벽곡단을 발견한 것이었다.
벽곡단이란 식용으로 쓰기 위해서 솔잎이나 밤 등을 말려 버무린 것이다.
말 그대로 곡식을 멀리하는 식품으로 수도하는 사람들이 속기(俗氣)를 멀리하기 위해서 쓴다.
그것 또한 이곳을 통해 빠져나간 공사 책임자의 안배였으니, 만에 하나라도 시간이 걸릴 때를 대비하여 썩지 않을 음식을 준비한 것이었으리라.
다행스러운 일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 기보 속에서 영약(靈藥)들이 든 궤가 나왔던 것이다.
밀봉된 단환(丹丸)들은 잘 썩지 않는다.
더더구나, 영약이라 불리는 것들은….
그렇게 해서 왕승고는 상처를 회복하고 기운을 차려 지하능묘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거기에 소요된 세월이 무려 일년여.
전혀 무익하기만 한 세월은 아니었다.
깨달음만 있고 부족했던 수련의 깊이가 그 세월의 무게만큼 더해졌고, 깨달음 또한 더 커졌기 때문이다.
* * *
『학! 하아악…』
가쁜 숨소리.
계집의 탄력있는 몸이 어둠 속에서 격렬하다.
어둠과 동화된 가무잡잡한 피부는 땀으로 젖어 윤기를 더했다.
짓눌려진 풍만한 가슴이 크게 출렁일 때마다 계집은 어둠을 향해서 격한 신음을 토해내며 경련을 일으켰다.
홀가적은 자신의 밑에 깔려서 격하게 반응하는 계집의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이틀 전 대상에게서 산 서역의 계집이다.
색목인(色目人)은 아니고, 어디 멀리서 데려온 계집이라고 하는데 생긴 건 볼품이 없지만 몸매만은 대단했고, 방사(房事)의 힘은 더욱 승했다.
나이 불과 열여섯이라고 함에도.
하긴 그 나이를 어떻게 믿을까.
전신의 힘을 계집에게 쏟아붓고서 자그마한 계집의 품에 몸을 내맡기고 있던 홀가적은 문득 이상한 느낌을 받는다.
누군가가 보고 있는 느낌.
그랬다.
얼마전에도 느꼈던 그 느낌이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희미한 불빛.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홀가적의 얼굴이 굳어졌다.
뭔가 달랐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계집이 착 달라붙었다.
고무줄과 같은 다리로 그의 허리를 휘감고 놓지 않았다.
그를 보는 눈이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정말 좋은 체력이었다.
또 원하고 있었다.
홀가적은 계집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리 크지 않지만 풍만한 가슴이 그의 손에 의해 이지러지면서 팽팽히 곤두섰다.
계집이 그를 향해 웃었다.
계집의 손이 자신의 아래를 향하고 있음을 느낀 홀가적은 잠시 미간을 찡그렸다가 손에 힘을 주었다.
놀란 빛이 계집의 눈에 떠오르는가 싶더니, 계집이 고개를 떨구었다.
죽이지는 않았다.
필요 없어진 계집은 살려두지 않는다. 하지만 아직은 필요한 계집이었다. 잠시 기절을 시킨 것뿐이다. 그는 날렵하게 옷을 입었다. 옷을 입으면서도 그의 눈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사지를 활짝 벌린 계집의 몸은 이미 그의 관심 밖이었다.
그가 파오의 밖으로 뛰쳐나간 것은 한호흡에 불과할 정도였다. 더구나 그는 출입구로 나가지도 않았다.
그가 나간 것은 출입구가 아니라, 파오의 벽이었다.
두툼한 가죽으로 된 파오의 벽을 찢고 나가는 것은 그와 같은 고수에게는 일도 아니었다. 별들이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어둠과 차디찬 바람이 엄습해왔다. 밖으로 나온 그는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다가 눈빛이 굳어졌다. 모닥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그리고 여기저기에서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리가 요란했다. 출정을 위한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 소란스러움을 피해서 홀가적은 조금 떨어진 곳에 파오를 설치했었다.
파오 군(群)의 후면에 위치한 야산을 등진 셈인데, 그 야산 중턱으로 그림자 하나가 바람처럼 사라지고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흥!』
인영을 발견하자 홀가적은 냉소를 치면서 땅을 박찼다.
바람처럼 그의 신형이 야공을 갈랐다.
고원지대.
바람은 차고 내린 눈은 녹지 않아 야산 또한 눈으로 희다. 홀가적은 야산을 넘다가 문득 신형을 멈추었다.
한 사람.
긴 머리를 세찬 밤바람에 휘날리면서 한 사람이 우뚝 서서 그를 보고 있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홀가적이 입을 열었다.
상대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리만 치면 수천의 기병과 만여명의 병사가 몰려들 거리에서 홀로 자신을 기다렸다면 간단치 않은 상대임은 자명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람이 그의 산발한 머리카락을 날리며 드러난 얼굴을 본 홀가적은 경악으로 주춤 한걸음을 물러서고야 말았다.
『너, 너는?』
『오랜만이군』
『마, 말도…. 정말 너란 말이냐?』
『그렇다』
드러난 얼굴, 왕승고가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그럴 리가? 살아 있을…. 그, 그럼 야숙진은?』
갑자기 홀가적이 눈을 빛내며 다급히 물었다.
『그녀는 죽었다』
『죽어…』
홀가적은 나직이 신음하다가 문득 사납게 왕승고를 노려보았다.
『그 와중에서 살아났다면 조용히 엎드려 있을 것이지, 감히 나를 찾아오다니 죽고 싶어서 환장을 한 모양이로구나. 이곳이 어디라고…』
『너에게 알아볼 것이 있어서 왔다』
『알아?』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이 그에게서 떠올랐다.
『감히 내게서 알아볼 것이 있단 말이지?』
홀가적이 사나운 기세로 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상대를 주눅들게 하던 그 멋있던 모습, 엄지가 검을 밀어올리고 그렇게 올라온 검의 손잡이를 잡아 상대를 향해 발검하던 그 쾌검(快劒)은 여전했다.
변한 것이 있다면 멋이 사라진 대신 사나움만이 남았다는 것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그가 검을 막 움켜잡고 검을 쳐내려는 순간, 왕승고의 음성이 들려왔다.
『야숙진은 너를 죽이지 말라고 부탁했었다. 쓸데없는 짓을 해서 나를 화나게 하지 말아』
『닥쳐!』
그런 말을 듣고 멈출 홀가적이 아니었다.
야숙진이 부탁하여 나를 살려주겠다는 건가? 그런 모욕을….
그의 검이 어둠을 가르며 검초를 뛰쳐나왔다.
사내에게 있어 가장 모욕스러운 일은 계집을 빼앗기는 일일 터이다.
그러므로 몽고에서는 상대의 계집을 빼앗아 자신의 계집으로 삼는다. 승리의 증표인 셈이다. 몽고족이 가장 위대한 사람, 대한(大汗)이라고 일컫는 칭기즈칸도 그렇게 해서 태어난 사람이었다.
빼앗는 자의 기분이 나쁠 까닭은 없다.
하지만 빼앗긴 자는 반드시 복수를 꿈꾼다.
약탈이 관습화된 곳에서는 그 의미가 더욱 크다.
그런 면에서 홀가적은 왕승고를 증오하고 있었다.
스스로를 뛰어난 사람이라고 자부하고 있던 그였다. 그런 그를 버리고 왕승고에게 가버린 야숙진으로 인해 그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그런데, 야숙진의 부탁으로 자신을 죽이지 않겠다는건가.
건방진 놈!
홀가적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검은 한(恨)을 담고서 밤하늘을 쪼개며 내려꽂히는 번갯불과 같이 왕승고를 향해서 달렸다.
둘의 거리는 이장가웃 가량.
마음만 먹는다면 단 일검이면 두쪽을 낼 수 있는 거리였다.
더더구나 홀가적은 쾌검에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홀가적의 발검을 보고서도 왕승고는 묵묵히 서 있을 따름이다.
피할 생각도 막을 생각도 하지 않고 조용히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향해 날아드는 검을 보고 있을 따름인 것이다.
그가 공연히 나타나 죽고자 할 리는 없다.
화산에서의 일전 이후, 그는 이미 왕승고에게 거리낌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쿠빌라이의 능묘에서 이미 왕승고가 자신을 능가함을 보았었다. 그런 마당이니 왕승고가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검을 보고도 아랑곳하지 않자 내심 불길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상대가 움직이기 전에 다른 변화를 부릴 수는 없었다.
그는 이미 다음 변화를 준비하고 있었다.
상대가 움직이기만 하면 좌우 어느쪽이건 그를 따라가면서 검을 쳐낼 작정이었다. 그와 같은 쾌검수에게 있어서 선기(先機)를 잡는다는 것은 승리를 의미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왕승고는 움직이지 않았고, 검은 망설임 없이 그대로 그의 미간을 쪼갰다.
찰나, 왕승고의 신형이 옆으로 흔들리듯 반걸음 이동했다.
그리고 그의 손에서 검이 뻗어났다.
그렇게 되자 후발선제(後發先制)의 묘(妙)가 극대화되어 먼저 발동한 홀가적의 검은 허공을 갈랐고 뒤에 발출된 왕승고의 검은 전광과도 같이 홀가적의 가슴을 공격하고 있었다.
아무리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할지라도 찔러내던 검을 옆으로 쳐낼 그 짧은 순간은 고수에게 있어서는 엄청난 의미가 있는 법이다.
방법은 하나, 후퇴하는 것뿐이었다.
『흥!』
그순간 홀가적에게 냉소가 터져나왔다.
왕승고는 그의 눈에서 무서운 빛이 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허공을 가른 검을 옆으로 뉘어 왕승고의 머리를 향해 쓸어왔다.
그뿐이 아니었다.
왕승고가 자신을 향해 검을 찔러냄을 보면서도 오히려 그 공격을 도외시하고는 나머지 왼손을 들어 그를 공격했다.
마치 기다리고나 있었다는 쨉?
왕승고의 얼굴에 아연 긴장이 돌았다.
그의 일격이야 말로 쿠빌라이의 능에서 회의복면인, 광명회의 회주가 자신에게 가했던 그 다라천마지임을 알아본 까닭이다.
그대로라면 그는 홀가적을 죽일 수 있지만, 스스로도 성할 수가 없을 터이다.
죽지 않는다면 최소한 일어나기도 힘든 중상을 각오해야만 할 것이었다.
동귀어진(同歸於盡)!
홀가적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최악의 수단을 선택하고 있었다.
왕승고가 아는 홀가적은 스스로에게 자부심이 강하고 야망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은 절대로 자신에게 해가 될 일을 하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 무엇이 그에게 이런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게 한 것일까.
의문은 찰나.
생각을 굴리고 있을 만한 틈은 실전에서는 허용되지 않는다.
왕승고는 홀가적의 가슴을 찔러가던 검을 뒤집어 일검을 쳐냈다. 다라천마지와 자신의 머리를 쳐오는 홀가적의 검을 막아내기 위한 일검이었다.
공세라기보다 수비를 위한 검세.
쨍!
날카로운 음향이 일며 두 사람이 퉁겨나듯이 갈라졌다.
『더 강해졌군…』
홀가적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상대가 물러섰으므로 선기는 그가 잡았다.
하지만 그와 마주친 왕승고의 검세는 산악과 같이 견고하여 그에 부딪힌 홀가적은 그 충격으로 인해 동귀어진의 강수를 던져 잡은 선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왕승고는 침착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다.
그러나 홀가적은 방금의 격돌에서 받은 충격으로 한걸음 물러나 있었다.
선기를 잡은 상태에서 밀린다는 것은 상대의 공력이 자신보다 높다는 것.
『다라천마지… 역시 그의 명령을 받고 있나?』
왕승고가 물었다.
『닥쳐!』
짧은 외침.
동시에 홀가적은 먹이를 본 맹수와 같이 왕승고를 덮쳐왔다.
분명히 전보다 강한 기세.
하지만 전보다 못한 것이 있었다.
상대를 누르던 그 여유와, 상대를 질리게 할 정도의 그 냉철함을 왕승고와 맞닥뜨린 홀가적에게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왕승고는 검을 뻗어 그의 공세에 맞섰다.
그는 지난 일년여를 그냥 보낸 것이 아니었다.
지하의 어둠에 갇혀서 그 속에서 살아나오기 위해서 그야말로 죽을 힘을 다해 하루하루 땅을 파냈었다. 단순한 흙더미도 아니고 바윗덩이를 부숴내는 작업. 그것을 그는 다른 기구가 아닌 몸으로 해냈었다.
곁들인 것이 있었다면 검.
흙더미를 파내다 만나게 되는 바위.
그 바위를 결따라 쪼개어낸 것이 그의 장세였고, 그의 검이었었다.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천부신공은 그러한 수련을 거쳐 순후(純厚)한 상태에 이르러 있었다.
맞서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한번 부딪힐 때마다 거대한 철벽에 들이박는 충격을 느껴야 할 정도의 힘이 그의 검에서 이는 것이다.
홀가적도 예외일 리가 없었다.
서너번의 격돌이 일어난 다음, 도저히 힘으로 그를 상대할 수 없음을 깨달은 홀가적은 고함을 지름과 함께 변초(變招)를 시도했다.
힘이 아니라, 초식으로 승부를 내려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승기를 잡은 왕승고였다.
그리고 이곳이 적지임을 익히 아는 그다.
틈을 줄 리가 없었다.
그의 검은 황창검무의 그 춤추는 동작에 힘을 더해 홀가적을 핍박해 들어갔다.
피할 수가 없었다.
그저 맞부딪히는 수밖에.
홀가적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쨍!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그의 수중에 들렸던 검이 마침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두토막이 나버렸다.
물러서는 그를 향해서 왕승고의 검이 날았다.
가히 벼락이 떨어지는 것 같은 공세.
홀가적은 뒤로 물러났다.
고수의 대결에서 뒤로 물러나는 것이 금기라는 것은 이미 따질 겨를이 없었다.
쫓고 물러나는 속도는 가히 질풍과 같았다.
직선으로 물러나는 것이 바보짓임을 홀가적도 당연히 안다. 하지만 측면으로 돌만한 시간이 없었다. 왕승고의 검은 강할 뿐 아니라, 놀랍도록 빨랐다.
일견 춤추듯 부드러운 듯하지만 실제로 부딪히면 무섭게 강했다. 부드러운 것이 빠를 수는 없는데, 그 또한 실제로는 숨이 막힐듯 빨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윽!』
신음과 함께 홀가적은 결국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지고 말았다.
『죽여라』
홀가적은 일그러진 얼굴로 소리쳤다.
『처음부터 너를 죽이지 않겠다고 말했었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하나뿐이다. 광명회의 회주, 그는 지금 어디 있느냐?』
왕승고는 그의 목에다 검을 겨눈 채 물었다.
『죽이지 않고 대답을 얻어낼 수 있을 것 같으냐? 흐흐… 어림도 없다』
홀가적이 일그러진 웃음을 흘렸다.
『추하군』
그를 내려다보고 있던 왕승고가 문득 중얼거렸다.
『뭐라고?』
『지난날의 너는 적이지만 당당했었다. 멋이 있었다. 비록 남을 가장한 상태이기는 했지만…』
왕승고는 머리를 저었다.
『지금은 아니다. 가치가 없다』
말과 함께 그는 몸을 돌렸다.
「가치가 없다고…?」
홀가적은 망연히 중얼거렸다.
어깨에서 가슴에 이르는 긴 검상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가치가 없다?
『감히 네놈이!』
그의 눈에서 살기가 폭출했다.
그리고 그는 수중에 남아있던 반토막의 검을 들고 무서운 속도로 왕승고를 향해서 덮쳐갔다.
『최소한의 자존심마저 버린건가?』
왕승고가 꾸짖듯 소리쳤다.
등을 보이면서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다면 바보일 터이다.
다시금 격돌.
왕승고의 눈에 놀람의 빛이 일었다.
이미 상처를 입은 홀가적이 전보다 더 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공력이 그보다 떨어졌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거의 대등하게 그와 맞서면서도 밀리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강해지는 것 같았다.
홀가적의 눈빛이 어둠 속에서 강렬히 빛을 뿌리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하는 거냐?』
심상치 않음을 느낀 왕승고가 소리쳤다.
『죽여버리고 말겠다, 노옴!』
홀가적의 외침이 악마의 절규처럼 공세 속에서 들려왔다.
『어쩔 수 없군…』
왕승고가 신음했다.
그를 해치고 싶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이대로 밀린다면 결과를 예측할 수 없었다.
왕승고의 검이 다시 춤추기 시작했다.
달빛이 검을 따라 흘렀다.
일격에 검이 부서져 나가고 다시 일격에 피가 뿌려졌다. 그의 숨을 끊어놓을 마지막 한 수만 남은 상태였다.
피할 사이도 없이 왕승고의 검이 그의 가슴을 꿰뚫었다.
홀가적의 두 눈이 커졌다.
그 눈에 투영되는 지독한 고통.
『나는…』
막 입을 열던 왕승고의 눈에 놀람의 빛이 일었다.
그의 검에 가슴이 꿰뚫린 홀가적의 눈에 괴기한 빛이 일고 사악한 웃음이 그에게서 떠오른 것을 보았던 것이다.
순간, 홀가적이 가슴을 들이밀었다.
그러자 검이 그의 가슴을 더욱 파고들어 그와 왕승고와의 거리는 지척이 되었다. 누가 이런 상황을 짐작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홀가적의 손이 왕승고의 가슴을 쳤다.
다라천마지.
『으윽!』
신음과 함께 왕승고의 가슴에서 피가 솟았다.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왕승고는 쓰러지고 말았다.
『크크…』
괴이한 웃음을 흘리며 홀가적은 자신의 가슴을 자루까지 꿰뚫은 검의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땅!
검이 그 상태에서 수수깡처럼 부러졌다.
그의 무공으로 검을 부러뜨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자신의 가슴을 꿰뚫은 검을 그런 식으로 부러뜨릴 수 있다는 것은 상식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의 눈에서 살기가 이글거렸다.
『놈… 죽여버리겠다!』
그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중얼거림에 따라 입에서 피가 흘렀다.
흡사 악귀(惡鬼)와 같은 모습.
과연 그가 조금 전의 홀가적인지 믿을 수 없는 몰골, 전혀 다른 사람이 된 듯했다.
그는 괴성을 지르며 왕승고를 향해서 달려들었다.
쾅!
하지만 그 순간에 터진 굉음.
왕승고의 반격이 홀가적의 가슴에 다시 작렬한 것이다.
『크윽!』
홀가적이 그 일격을 맞고 비틀거렸다.
놀랍게도 그는 거의 무방비 상태에서 왕승고의 일장을 그대로 얻어맞았음에도 비틀거렸을 뿐, 쓰러지지 않았다.
왕승고의 눈에 재차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의 손은 쉬지 않았다.
천부신공이 운용된 소림의 대력금강장이 뒤이어 홀가적의 가슴을 치자 마침내 홀가적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가랑잎처럼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으윽!』
비틀거리며 몸을 가누는 왕승고의 입에서 선혈이 흘러내렸다.
그의 가슴은 피투성이였다. 비록 천부신공이 보호하고 있어서 즉사를 면한 것이긴 하지만 다라천마지의 지력(指力)은 가히 칼날과 같아서 결코 성할 수가 없었다.
뼈가 드러나는 중상.
『크으으…』
괴로운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홀가적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아직도?」
왕승고의 눈빛이 굳어졌다.
그의 마지막 일격은 전력을 다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위력에 홀가적의 가슴을 관통하고 있던 검이 퉁겨져 나갈 정도였었다.
그런데도 아직 움직일 수 있다는건가?
그러나 그뿐, 홀가적은 일어서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기는 했지만 정작 일어나지는 못했다.
그 모습을 본 왕승고는 길게 탄식하고는 신형을 돌렸다.
이 마당에 굳이 손을 써서 그의 숨을 끊어놓은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를 다그쳐서 알고자 했던 것을 알아낸다고 할지라도 큰 의미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그때였다.
『크으으… 거기… 거기 서라』
그의 발목을 잡는 신음소리.
홀가적이 그를 보면서 버둥거리고 있었다.
『……』
왕승고가 자신의 앞에 섬을 보자 홀가적은 문득 웃었다. 참혹한 웃음이었다.
『많이 강해졌군… 하, 하지만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그를 상대할 수는…』
왕승고는 그를 내려다 보았다.
조금 전과 달랐다.
그처럼 광기에 번뜩이던 눈빛이 진정되어 있었다.
몸은 만신창이였지만 정신은 제대로 돌아온 듯했다.
『그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겠나?』
『어디에나… 있을 수 있지. 그는 노야…와는 다르다. 광명회는 이미… 연합이 아니라… 문어발을 가진 조직… 거역하는… 자는 살아남지 못하는… 쿨룩!』
그의 입에서 덩어리 피가 솟았다.
그는 헐떡거리며 바닥에 누운 채로 문득 웃었다. 웃을 때마다 쿨럭거리며 피가 솟았다.
『그를 찾지마라. 찾는 순간, 너는… 지옥을… 지옥을 보게 될테니까… 누, 누구도… 그를 당할 수 없어…』
그의 말소리가 잦아들었다.
눈을 감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눈에서는 이미 생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가슴의 헐떡거림도 멎었다.
왕승고는 그의 눈을 감겨주고는 등을 돌렸다.
그를 죽이고 싶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결국 그를 죽인 셈이다.
그의 발길을 따라 핏방울이 점점 눈위를 물들이며 멀어져간다.
유명을 달리한 시신 한구를 두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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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즐감요
즐감
굿,,
잘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보고갑니다
즐감.
즐독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독
~♡♥♡~ 아싸,쵝오 항상 감사~♡♥♡~
감사합니다.즐감!!!!
즐감~~^*^
고맙습니다
그넘 가다.
즐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