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
신 진기
인생은 직선이 아니고 곡선이다. 신작로 길만 다닐 수 없지 않은가. 취미는 누구나 한두 개 가지고 있다. 나는 수석을 좋아한다. 물주면 크나. 처음 수석을 접하는 분들은 관례처럼 묻는 말이다. 답은 똑같다. ‘예. 무생물이 크기야 하겠나 만은.’ 설명하기가 어려워 얼버무리는 말이다. 오랜 세월 강 돌에 물을 뿌리면 풍화 작용에 의해 돌 갗이 변한다. 그것을 양석이라 한다.
양석이 안 된 수석은 십 년이 지나도 생돌이다. 허구한 날 시간만 있으면 돌에 물주고 휴일은 망태기 하나 짊어지고 곡괭이 챙겨 돌밭 찾는다. 한탄강에서 서귀포까지 수석이 있다면 삼삼오오 모여 어디든 간다. 꼭 탐석만이 목적은 아니다. 주마간산 격이라도 산천을 살피고, 지역 음식도 탐하고, 그곳 벗을 만나서 명주도 한 잔 한다. 하루 자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돌 찾기는 선비들의 진정한 풍류가 아닐까. 총각 때 시작한 돌 줍기는 사십 년이 넘었다. 나가면 좀 부족해도 주워온다. 마당에 쌓이는 돌무더기 크기는 밖으로 나다닌 숫자와 비례한다. 어디 그뿐이랴. 돈 주고 사기도 한다. 집사람에게는 열 배로 줄여 말하거나, 탐석했다고 돌려대기도 한다. 일단 마나님과 충돌을 최소화해야 다음에 집 나갈 때 수월하니까. 수석 취미는 돌이 남는 취미다.
한번은 수석 회원으로부터 어처구니없는 얘기를 들었다. 회원 부인이 주워 온 돌이라고 신랑이 얘기한 것을 기억하고 누가 좋다고 선물하라고 해서 거리낌 없이 주어 버렸다. 사실 제법 주고 구입한 돌이었다. 다시 돌려받는데 발품 팔았단다. 마나님께 정확하게 말하지 않은 것이 화근이다. 갑자기 머리가 무겁게 조여오는 느낌이 들었다. 나도 조용히 석실에 마누라를 불러서 한 점 한 점 어느 정도 수준이고 값은 얼마 한다고 얘기해 주었다. 혼자 하는 취미지만 집에 돌을 모아둔 이상 집사람 손길이 절대적으로 필요해서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지금은 서로 벽 없이 대화한다. 그 후부터 마누라도 돌을 돈으로 보는 경향이 생기고 따라나서기도 하고, 돈 되는 돌 줍기도 한다. 즐기자고 하는 취미를 베일에 싸이게 하는 것은 또 다른 불씨를 낳지 않을까.
이층 다락에 물총새가 짝짓기하기 좋은 좁은 공간이 있다. 두 사람의 취미를 공유하는 작은 방이다. 일부는 수석으로 일부는 꽃꽂이 부대물인 화기를 모아 두는 곳이다. 가끔 외부 손님이 오시면 게스트 룸 역할도 한다. 먼 거리에서 울산 오시는분들이 주로 이용 하곤 했다. 팔구십 연대는 손님을 집에 모시는 것이 당연시했다. 속살을 보여 주는 것이 친근감을 주고 집에서 하루 유해야 대접다운 대접으로 간주하던 시절이라 많이 다녀갔다. 대포도 한잔하면서 돌을 안주 삼아 얘기 꽃피운 새집이다. 지금은 가정에서 쉬어 가는 경우가 적고, 모텔을 주로 이용한다. 인심이 각박하고 개인주의가 팽배하다 보니, 오시는 분이 신세 지는 것 같은 느낌 때문이 아닐지. 삶의 냄새는 바람을 타고 밖으로 나간다.
도회지 생활이 거기서 거기 아닌가, 기십 평 땅에 성냥갑 같은 집 짓고 손바닥만 한 마당에 나무 한두 그루 심어놓고 사는 것이 그래도 향수병에 덜 걸린다고 땅 집을 선택한다. 편리하고 값나가는 아파트가 좋지만 그래도 깡촌 출신은 마음 달래려고 초원 위에 집은 아니라도 흙 밟는 재미로 산다. 우리 부부는 농촌에서 나고 자라서 주택을 선호한다. 옛 생각 하라고 산야초도 옮겨 놓고 돌담도 치고 우체통도 만들고, 감, 대추, 대나무 심어 촌스럽게 해두고, 사이사이에 주워온 돌을 널브러지게 두었다. 돌에 물주면 나무도 얻어먹고 나무에 주면 돌도 얻어먹는다. 나무는 크고 돌은 색깔이 변한다. 그 과정을 지켜보면 빈손으로 시작해서 자신을 채근하면서 밤낮으로 애간장을 끓이며 살아온 나의 삶과 많이 닮아 마음이 짠하다.
돌의 미학은 좀 어렵다. 구구단 외우듯이 해서 외워지는 것도 아니고, 한두 권 이론서를 읽었다고 이치를 깨우치는 것도 아니고, 강이나 바다로 몇 달 다녔다고 물꼬가 터지는 것도 아니다. 관심 갖고 깊게 생각하고 좋은 사부를 만나 대화도 하고 현장 실습도 병행해서 한 십 년 하면 말문이 트인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돌 수업이 시작된다. 십 년 더하면 눈이 뜨인다. 마음에 문이 열리고 개안이 되기 시작한다. 나이도 쉰이 넘어야 한다. 십 년 차는 시끄럽고 이십 년쯤 되면 나선다. 다 허상이다. 삼 문이 열리려면 삼십 년은 배워야 한다. 눈 뜨고 마음 열리고 머리가 깨이면 좀 알만해진다.
수석이 중국에서 시작해서 우리나라를 거쳐 일본으로 전해져 그곳에서 꽃을 피웠다. 칠팔십 연대에 최고 절정에 이른 일본 수석이 이론이 정리된 책과 함께 다시 한국으로 상륙했다. 구십 년과 이천년에 수석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절정기가 되었다. 어림잡아 백만 정도로 본다. 모임을 결성한 단체가 오백여 개 되고, 해마다 전시를 통해 전국적으로 상호교류하는 수석회가 백여 개 된다. 이런 분위기가 중국 쪽으로 전염되고 있다. 일본 경제가 최고일 때 취미 생활도 극에 달했고. 한국과 중국도 경제 성장과 더불어 취미 생활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필리핀, 말레이시아, 독일, 미국에 수석을 즐기는 사람이 수석 문화 월간지에 자주 소개되고 있다.
지금 우리 경제가 다른 국가에 비해 어려운 것이 틀림없다. 수석 인구가 격감하고 돌의 가치가 많이 하락 하는 걸 보면 추론이 가능해진다. 울산도 레귤러 멤버가 반 토막 났다. 경제가 빨리 회복하여 돌 하는 사람이 많아지길 빌어본다. 투자나 투기가 아닌 순수한 취미로 돌을 수집하는 아마추어적인 마인드가 절실히 필요한 시기다. 수석이 부부가 같이 즐기는 생활의 일부가 되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