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문화연구회 9월 답사》
언제:22년 9월 29일
장소:경주 옥산서원 독락당 정혜사지 장산서원 양동마을
회비:실비(자체결산ㅡ6만원)
참석자:이세희 외 5명(전체6명)
회비잔액:215540원
경주 옥산서원
220929
<역락문>
낮 시간의 기온은 여전히 한여름입니다.
그래도 세월의 오고감은 여지없어
옥산서원으로향하는 길의 나무들은
벌써 가을빛으로 물들기 시작합니다.
옥산서원의 정문인 역락문을 통해 서원으로 들어갑니다.
문의 이름은 노수신이 짓고 글씨는 석봉 한호가 썼습니다.
그 뜻은 논어에서 취한 것입니다.
<무변루>
무변루는 특이하게도 물길을 건너도록 설계되어있습니다
궁궐이나 왕릉의 금천이 생각납니다.
원래는 밖으로 열려있는 건물이었는데 봉황이 알을 품는 형상이라하여
밖에서 보이지 않게 안으로 열린 폐쇄적인구조로 바꾸었다고합니다
무변루를 돌아서 갈 수도 있겠지만 무변루 아래로 출입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영남 북부지역 사찰들의 누하진입樓下進入의 구조와 같은 맥락인가 봅니다
무변루無邊樓
학문을 연구하는데 그 영역이나 정도의 한계가 없어야 된다는 뜻이겠지요?
늘 깨어 있고 쉼없이 나아가라는 뜻으로 읽히는데 그러려면 얼마나 고단할까요?
그 과정 자체가 즐거워야겠지요?
원전은 염계 주돈이의 인품과 기상을 설명하는 주희의 글 중
풍월무변風月無邊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바람과 달이 어딘들 마다하겠습니까?
또 이르지 못할 곳도 없을 것같습니다.
그만큼 학문하는 자세에서 경계를 허물고
자유로운 태도를 취해야한다는 뜻은 아니었을까요?
1572년에 누각으로 건립되었으며 당시에는 납청루納淸樓로 불렸는데
이후 노수신이 무변루로 명칭을 고쳐 지었다고 합니다.
석봉 한호의 글씨입니다.
무변루의 기와에서 숭정 38(1674년), 건륭 47(1782년),
도광 기해(1839년)명문이 확인되었으므로
이 때를 포함하여 1844년에도 중수가 확인된다고합니다.
토론과 휴식, 모임은 물론 숙식의 공간으로도 사용한 특이한 건물입니다.
통나무를 파서 만든 계단을 올라가면 마루에 학생들을 소집하거나
시간을 알려주거나 하는데 사용되었던 북이 매달려있습니다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로 토론과 휴식, 모임 등의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이는 다른 건물의 누각과 그 용도가 같습니다.
그런데 양 옆으로 두칸의 방이 있고 방 아래로 난방이 가능한 아궁이가 보입니다.
이는 고상식 아궁이라고 하는데 흔하지 않은 특이한 구조입니다.
그 옛날에 2충에 난방을 했다는 얘기이니 눈여겨 볼 필요가 있을 것같습니다.
안쪽에서 보면 동재와 서재에 가려 안보이는데 건물의 양 옆으로
눈썹지붕을 닮은 부섭지붕을 설치하고 그 아래에 누마루를 만들었습니다.
이 곳에서 스승이나 동료들의 시선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주변의 경치를 감상하며 휴식을 취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규제와 자율의 조화가 엿보이는 공간입니다.
<정료대>
마당에는 어둠을 밝히는데 쓰였을 정료대가 있는데
그 형태나 조각수법이 남북국시대의 신라의 것으로 보입니다
정혜사지에서 옮겨왔을까요?
<옥산서원 글씨>
1572년에 건립된 옥산서원은 그다음해 2월에 경주 서악의 향현사鄕賢祠에서
이언적의 위패를 모셔와 봉안하고 그 해 12월에 사액을 받았으며
1574년 5월에 편액을 걸었는데 글씨를 아계 이산해가 썼습니다.
1839년에 구인당이 불타고 현판도 불에 타서 추사 김정희가 다시 썼습니다
.
현판에 "만력 갑술 사액후
266년 기해실화 개서 선사"라고 다시쓴 이유와 시기가 적혀있습니다.
건물 안쪽에는 아계 이산해의 글씨로 후대어 다시 현판을 제작하여 걸었습니다.
이는글씨 원본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산해의 글씨와 김정희의 글씨가 유물관에 있습니다.
두 사람의 글씨 모두 네 장의 종이에 한글자씩 적혀있습니다.
<구인당>
옥산서원 강학공간인 구인당입니다.
회재 이언적의 구인록求仁錄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유배생활중 남긴 이 저서에서
회재는 인仁의 본체와 실현 방법에 대한 유학의 근본 정신을 확인하고자 하였으며
회재의 그 뜻을 후학들이 잇는다는 뜻입니다.
글씨는 한석봉이 썼습니다.
마루에 앉으면 무변루 지붕 너머로 자옥산이 보입니다.
옥산의 이름을 여기에서 가져왔겠지요?
구인당 건물은 정면5칸 측면 2칸인데 3칸은 대청마루이고
대청마루 양쪽으로 난방이 되는 온돌방이 있습니다.
이 곳은 현재의 교무실과 비슷한 곳으로 이 여기서 교수와 유사가 기거하였는데
양진재兩進齋는 명明과성誠을 의미하고 해립재偕立齋는 경敬과 의義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석봉 한호의 글씨입니다.
동재와 서재.
민구재와 암수재는 동재와 서재입니다.
학생들의 기숙하는 공간인데 방에 비해 마루가 많아 공간 구성이 답답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처마와 처마가 잇닿아 있는 폐쇄적인 공간인
옥산서원의 숨통을 이 곳에서 튀워주나봅니다.
민구재敏求齋는 민첩하게 진리를 구한다는 뜻으로 논어에서 취한 이름입니다.
공자는 논어에서 나는 "나면서부터 도를 깨달은 사람이 아니다.
옛것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힘쓰는 사람이다"
아비생이지지자我非生而知之者 호고민이구지자야好古敏而求之者也에서 가져왔습니다.
암수재闇修齋는 남몰래 묵묵히 수양한다는 뜻입니다.
주자의 글 중 "드러나지 않는 가운데 날마다 닦는다"는 뜻의
유암연이일수惟闇然而日修에서 가져온 말입니다.
이는 학생의 자세를 이르는 말로
공자와 주자같은 성현도 나면서부터 끼우친 사람은 아니었으니
그저 묵묵히 남들보다 더 열심히 공부해서 성인의 경지에 오르라는 당부를 담은 말입니다.
옥산서원은 건물들이 이렇게 지붕과 지붕이 이마를 맞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막힌 구조는 아니어서
건물과 건물 사이로 틈을 만들어 소통이 가능하게 합니다.
구인당의 옆모습입니다.
<경각>
구인당 뒤 사당인 체인묘의 왼쪽에는 경각經閣이 있습니다.
다른 서원의 경장각과 같은 용도로 서원의 책이나 경판등을 보관했던곳입니다.
그 중에는 국보322-1호인 삼국사기도 있는데
이는 선조6년인 1573에 경주부에서 옥산서원에 보내 준 것으로
고려시대 원판과 조선시대에 새긴 것 등 3종류의 판본이 섞여있는데
9책으로 구성된 완질본이라고 하니 이 서원의 위상이 짐작이 됩니다.
그 위상에 비해 건물의 크기는 작은데
근처 독락당에 어서각御書閣이 있어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담장 밖으로는 문집판각이라는 건물이 보입니다.
언제 지었는지 모르겠지만 역할은 역시 경각과 같을 것입니다.
경각의 보조로 지었을까요?
(설명이 없었습니다.)
<신도비>
구인당과 회재의 위패를 모신 체인묘 사이의
좁은 공간을 지나면 회재의 신도비각이 있습니다.
체인묘를 담장으로 둘러싸고 그 좌우에
비슷한 크기의 건물을 배치하여 균형을 맞춘 느낌이 듭니다.
퇴계의 행장을 근거로
기대승이 글을 짓고 글씨는 아계 이산해가 썼습니다.
양자 이응인이 퇴계에게 신도비문을 부탁하였으나
퇴계가 고봉 기대승에게 부탁하여
퇴계 사후에 기대승이 작성하였고 1577년에 건립하였습니다.
원래는 서원 밖 자계천변에 있었으나
보호를 위하여 서원안으로 이건하였다고 안내문에 적혀있습니다.
하지만 비문에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기(1476~1552)에 대한 부정적인 내용이 있어
지나는 사람들이 그를 욕하였으므로 그의 후손이 부탁하여
비용을 내고 서원 안으로 옮겼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수에는 청룡과 황룡 두마리의 용이 조각되어 있는데 색칠도 되어있습니다.
함양의 남계서원에서도 비석에 색이 칠해진 것을 보았는데
아직은 조금 낯설은 모습입니다.
영남지방의 문화인지 전국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인지
앞으로는 주의깊게 살펴볼 것 같습니다.
두마리의 용이 입을 벌리고
하나의 여으주를 다투고 있는 모습으로 조각 수법도 뛰어난 편입니다.
비문의 내용입니다.
이산해의 글씨입니다.
귀부를 여러 방향에서 보았습니다.
꼬리가 셋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비의 옆모습입니다.
앞면과 달리 비의 뒷면에는 안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참 얌전해 보입니다.
너무 얌전해서 그 내뿜는 서기마저도 온순하게 느껴지는데 왜 이리 얌전할까요?
비상을 준비하는 잠룡일까요?
답답한 창살안에 갇혀 있어 온순해 진 건 아니겠지요?
그런데 참 궁금합니다.
보통 신도비는 묘역에 있습니다.
이 신도비 보다 9년 늦게 세우기는 했지만
포항 회재의 묘역에도 신도비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곳에 왜 회재의 신도비를 세웠을까요?
<사당ㅡ체인묘>
담장 너머로 사당을 들여다봅니다.
맞배지붕의 전형적인 사당건물입니다.
회재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제향공간입니다.
옥산서원은 이렇게 사당이 뒤에 있고
앞쪽에 강학공간이 있는 전학후묘의 형식입니다.
1548년 설날 회재는 강계의 유배지에서
"학문은 도 얻기를 추구하였고, 뜻은 인을 체득함에 두었다."
학구조도學求造道 지재체인志在體仁이라는 글을 썼습니다.
거기에서 가져온 이름입니다.
비각에서 경각을 바라 본 모습입니다.
사당으로 들어가는 내삼문인 체인문입니다.
<자계천ㅡ세심대와 용추 그리고 하마비>
독락당을 가려고 역락문을 나왔습니다.
넓고 편편한 바위가 펼쳐져 있습니다.
세심대洗心臺입니다.
글씨는 퇴계가 썼다고 합니다.
이 곳에도 지난 폭우의 흔적이 있어
나뭇가지와 덤불이 바위에 앉아 쉬고 있었는데
이유인 선생님이 구지 그 큰 나뭇가지를 치우셨습니다.
마음을 씻기 전에 주변 공간을 먼저 씻으셔야했나봅니다.
시원한 물소리를 들으며 늦은 더위와 세속의 때를 잠시나마 내려놓습니다.
흘러내린 물들이 작은 폭포를 이루고
잠시 머물러 물살에 파여 상처난 자리를 어루만지며 쉬고 있습니다.
누군가 이 곳에도 용추龍湫라는 이름을 새겨두었습니다.
용추 아래 작은 외나무 다리를 건너 숲길을 따라 걸으면
예쁜 시골 길을 지나 독락당이 보입니다.
외나무다리 아래쪽에 징검다리가 있습니다.
원래 옥산서원을 가려면 이 징검다리를 건너야했나봅니다.
징검다리를 건너 계단을 오르면
이렇게 서원의 정문인 역락문이 정면으로 반겨줍니다.
이 사진 아래쪽 가운데 부분이 원래 신도비가 있었던 자리인것 같습니다.
서원에서 반대쪽으로 징검다리를 건너면
이 하마비를 만나게 됩니다.
하마비도 원래의 자리는 아니라고합니다.
원래는 큰길가에 있었는데 여기로 옮겼다고합니다.
이혜순 선생님이 징검다리를 건너 서원으로 향합니다.
옛날 사람들의 느낌이 어떠했을지 느껴보려함입니다.
옥산서원은 비교적 초기에 지어진 서원으로 그 구조가 독특하였습니다.
임진왜란 때도 불타지 않아 조선 전기 건물들의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인재를 길렀을까요?>
회재 이언적은 동방오현의 한 분으로 문묘에도 모셔져 있고
명종의 공신으로 종묘에도 배향되었습니다.
그에 걸맞게 많은 분들이 이 곳을 찾았습니다.
16~20세기 동안 이 곳을 찾은 방문객이 자필로
이름과 날자등을 간단히 적은 방명록인
심원록尋院錄은 170책이나 됩니다.
권율 유성룡 이항복 차천로 이현일 이형상 등의 사람들이
경향각지에서 이 곳을 찾았습니다.
명실상부하게 영남유림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곳에서 어떤 훌륭한 인물이 배출되었을까요?
그 이름을 듣지 못하는 것은 나의 무지때문인 것만은 아닌 것 같아 안타까웠습니다.
퇴계가 아니었다면 오늘 회재가 누리는 것들을 온전히 다 누릴 수 있었을까요?
혹시 오늘 그가 누리는 것들이 마땅히 다른 이가 누려야 했던 영광은 아니었을까요?
과문한 나는 이제부터 귀를 열고 눈을 크게 뜨고 찾아봐야 할 것입니다.
그래도 이런 장소가 있었기에
소중한 유물들과 서책들이 보존되고 전해져 내려올 수 있었고
그 공로는절대 적지 않을 것입니다.
정조때는 회재의 학덕을기리고자 세심대에서 초시를 치르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 곳은 쉬어가기 딱 좋은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궂이 회재가 아니더라도 다녀오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독락당과 정혜사지와 장산서원
그리고 양동마을을 묶어 9월 하루를 숨가쁘게 회재의 자취를 따라가 보았습니다.
함께 하는이들이 있어서 즐거웠고
오늘도 여전히 나의 무지와 부족함을 체감하는 하루였습니다.
<댓 글>
최고예요
최병규 님이 당신의 글에 표정을 남겼습니다.
최고예요
김미숙 님이 당신의 글에 표정을 남겼습니다.
최고예요
심상진 님이 당신의 글에 표정을 남겼습니다.
최고예요
황자혜 님이 당신의 글에 표정을 남겼습니다.
최고예요
신홍식 님이 당신의 글에 표정을 남겼습니다.
최고예요
김상희 님이 당신의 글에 표정을 남겼습니다.
최고예요
황보명숙 님이 당신의 글에 표정을 남겼습니다.
좋아요
지종석 님이 당신의 글에 표정을 남겼습니다.
좋아요
태오 김정환(9,16,17,18기) 님이 당신의 글에 표정을 남겼습니다.
이가경 서울64
답사기가 너무 늦었습니다.
분명히 쓰고 중간에 저장을 해놓았는데
나중에 보면 안보이는 그런 일들의 연속이었습니다.
뒤늦게 보고서를 쓰기도 민망하여 늦었지만 부족한 답사기를 올립니다.
이가경 서울64
건물 명칭의 연원들과 이야기들은 이세희 선생님의 글과 설명을 참고하였습니다
이세희(천안)
문집판각은 경각의 보조이기도하지만
주로 목판을 저장하기위해 지어진 것으로 보면될 것 같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이가경 서울64
@이세희(천안)
감사합니다
궁금했는데 설명이 없었습니다
건립연대는 언제쯤일까요?
운곡 김노운
저도 회재 이언적선생님의 옥산서원을 가보고 싶었는데,
오늘 이글을 올려주신 덕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이글을 올려주신 선비문화연구회장님과 이가경 선생님 고맙습니다.
이가경 서울64
@운곡 김노운
보탬이 되신다니 감사합니다
지금 참 좋은 때입니다
구석구석 잘 살펴보고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