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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학당] 진여와 열반 23강 - 족첸의 궁극의 진리(43:11)
00:08 <소승과 대승의 차이>
겔룩파와 닝마파 이 얘기 차이점 얘기할 때 중관파 안에서 귀류논증 중관파라는 것과 자립논증파가 있는데, 자립논증파도 또 둘이 나뉘어요. 바깥에 어차피 모든 게 실재하다는 경량부(輕量部) 사상 초기불교 그 이후에 나온 부파불교에서 경량부 사상이 바깥이 실재하다는 거예요 대상이. 자립논증파가 있고 유식학 유가행(瑜伽行) 경량행(經量行)이라고 해요. 경량행 자립논증파랑 유가행, 유식을 요가를 한문으로 유가라고 번역한 거예요. 요가행 유가행 자립논증파가 있는데, 이 유가행파들이 일체유심을 갖고 있습니다. 중관파 안에서 보자면요. 그런데 이걸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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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해 두시면 좋은데. 소승과 대승을 가르는 제일 핵이 소승은 아공, 대승은 법공에 강조해 있습니다. 이때 이 법에는요 아(我)도 들어가요. 그런데 이 소승의 아공과 그러면 대승의 법공 안에 들어 있는 아공은 달라요, 내용이. 내가 공하다라고 하는데 그게 의미가 달라요. 아공과, 왜냐면요 여기선 아공 똑같은 논리로 여기는 아만 공하다 그러고 똑같은 논리로 법만 공하다고 하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아공 법공, 이름은 이렇게 구별 지어지지만 공에 대한 이해의 깊이가 다른 거거든요. 그러면 아공에 대한 이해의 깊이도 달라져 버립니다, 법공의 단계에 오면. 나라고 하는 것도 법일 뿐이거든요. 법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즉 아공과 법공은 대소승 가르는 아주 핵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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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공이요 승의(勝義)라는 말 안 익숙하실 수 있지만 승의라는 건 뛰어난 진실의, 궁극의 공이에요. 궁극의 공이라는 게 있고요. 나중에 나올 유식삼성(唯識三性)을 미리 제가 쉽게 소개해 드리는 거예요. 연기하니까 공하다가 있어요. 연기공(緣起空)이 있고요. 망상이라서 공하다가 있습니다(망상공妄想空). 공은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어요. 불교 학설에서 등장한 공은 크게 3개예요. 의미는 조금씩 달라요. 이 공을 지금 뭐라고 번역하죠? 풀죠? 무자성. 자성이 없다로 큽니다. 이것도 알아두시고요. 그러면 유식학 가면 승의의 무자성(승의공), 연기하는 것은 발생하는 거기 때문에 탄생의 무자성(연기공), 망상은 상이라서 상의 무자성(망상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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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의 무자성이 나뉘는데요. 그게 제일 엄밀한 무자성 공 이론이거든요. 유식학에 가면 유식학 때 하실 것을 미리 좀 공부한다고 생각하고. 그런데 용어는 제가 간단하게 승의공이라고 할게요. 연기공, 망상공이라고 합니다. 이름 좀. 그런데 이 연기공은요 어떻게 보면 현현하는 공이에요. 현현공(顯現空). 어떤 의미에서냐? 대승에서는요. 자 한번 구분해 볼게요. 부처님이 지금 께왓다경에서 초기불교에서 아공을 넣어놨다고 보자고요. 그게 소승과 아르침의 핵심이라고 보자고요. 께왓다경에서 승의공을 부처님 이야기하셨나요? 안 하셨나요? 오직 식(識)만 있다고 그랬잖아요. 여기는 오온이 없다고 그랬잖아요 아예. 아예 오온이 없어요. 그 식은 뭐예요? 열반이에요. 열반 자리요. 여기 진여 자리예요. 진여가 승의공입니다. 여기는 똑같아요. 여기도 오온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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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다를 수가 있나요? 이게 무분별지 상태인데. 궁극의 공이라는 건요 진짜 없어서 없는 거예요. 오직 식만 있고 어떤 것도 없습니다. 공적영지 자리에는 텅 비어 있어요. 알아차림, 즉 식만 있어요. 알아차림만 있지 어떤 것도 없습니다. 똑같죠. 승의공. 다 똑같으면요 아공 법공 차이가 없겠죠. 뭔가 달라지겠죠. 그다음에 연기하는 현상계에 대해서 현상계, 승의제에 대해서는 이렇게 얘기한다 치죠. 세속제, 세속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차이가 날까요? 세속제에 대해서는 무상 고 무아, 자 열반은 적정하다가 승의공입니다. 무상 고 무아는 지금 연기공을 얘기한 겁니다. 여기서 공이라는 건 무자성이에요. 영원한 게 없다 정도의 의미입니다. 단순히 없다가 아니에요. 여기서는 진짜 없다 예요. 승의공은 없다인데 연기공에 오면 여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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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성의 의미는 영원한 게 없다 예요. 지금 영원한 게 없다. 즉 무상하다는 뜻입니다. 무상하고 괴롭고 무아. 무아라는 것도 무상이거든요. 만법은 내 것이랄 게 없다. 무상하다는 거예요. 만법 자체가 없다고 한 게 아니에요. 만법은 무상해서 고정된 게 없다는 뜻이죠. 무상이라는 뜻이죠. 그러니까 공이라는 게 고정된 게 없다는 거예요. 있어요. 있는데, 고정된 게 없다고요. 계속 변하니까 열반의 자리에서는 아예 없고요. 세속에 나와 보니까 있어요. 오온이 굴러가요. 연기 따라 미치게 굴러가요. 그런데 고정된 게 없어요. 내 것이랄 게 없어요. 그래서 고정된 나라고 할 게 없어요. 계속 변해가니까. 자 됐죠. 그래서 여기에 대해서 만약에 우리가 오온이라는 이름을 지어서 집착하면, 이 오온을 갖다가 나라고 부르면 이게 망상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나라는 것은 영원한 나요. 영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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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 즉 독립, 독자적인 나라는 게 있나요? 나라고 하는 게 오온인데 오온이 이렇게 미치게 변해가서 공하니, 오온이 공하니 따라서 나라고 할 게 없어져요. 나라고 부를 수 있는 건 오온밖에 없는데 생각 감정 오감 색수상행식이 난데 색수상행식이 공해요. 자성이 없어요. 잠시도 머물지 않아요. 그러면 나라고 하는 게요? 나라고 하는 것도 고정된 나가 없잖아요. 독자적인 나라는 게 없어집니다. 그렇죠. 이 논리로 아공이 나온 거예요. 자 부처님은 여기까지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부파불교도 다 이 지배하에 있어요. 자 초기불교 아공 사상의 특징. 제법무아를 얘기했다는 것은 만법이 공하다라고 이미 얘기한 겁니다 부처님이. 여기서 공의 의미는 무상의 의미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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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무아 그랬잖아요. 만법은 공하다는 소리예요 제법무아가. 무아가 무자성이에요. “만법에는 고정된 나라고 할 자성이 없다. 영원한 게 없다.” 이 소리예요. 이해되셨죠, 놀랍게도 여러분은 소승만 이해했는데 왜 중관학파까지 이해가 됐죠? 중관학파가 소승의 변종이라서 그래요. 대승이 아니라고요, 제대로 된. 중관학파까지도 이해됐죠. 그래서 놀랍게도 귀류논증학파를 티벳불교에 딱 확립시킨 쫑카파 주장은 대승 소승이 깨달음에 차이가 없다를 주장한 겁니다. 역으로. 왜 그 주장했는지 아시겠죠. 소승 성자도 제법무아를 깨달았다니까요. 그러니까 중관파, 귀류논증 중관파, 달라이라마 그 학파의 입장에서는 소승도 똑같은 걸 깨달은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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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깊이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그렇죠. 법공에 있어서는 똑같은 걸 깨달은 거잖아요. 만법에는 고정된 나라고 할 게 없다. 제법무아가 법공이니까. 이런 말이 나오는 이유 아시겠죠. 그래서 여기에서 연기공이라는 것은 무상 고 무아. 그래서 이걸 아예 사법인(四法印)을 만든 경우가 있어요. ①제행무상 ②일체개고 ③일체개공도 있습니다. 그래서 공까지 집어넣으면요 일체개고 일체개공 ④제법무아 이렇게 해서 아예 사법인을 만들어서 무상 공 고 무아가 하나가 됩니다. 여기서 공은 무상하다는 소리밖에 안 돼요. 없다는 게 아니에요. 영원한 게 없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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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되셨죠. 그러면 지금 불교 절에 가서 “왜 우주가 공인 줄 아세요?” “연기하니까 공입니다.” 그러면 연기하는 놈은 있거든요. “연기가 있는데 왜 공이라고 할까?” 의심스럽지 않으세요. 물어보기에는 좀 그렇고. 연기는 있잖아요. 그래서 그게 공이라는 겁니다. “자성이 없잖아요, 자성은. 윤회하지 않는 변하지 않는 놈이 없잖아요.” 이 소리예요. 거기서 자성의 의미는. 됐죠. 그러면 이걸 아는데 왜 중관파까지 이해가 되냐고요? 지금. 귀류논증 중관파, 겔룩파가 왜 이해가 되냐고요? 닝마파는 이해가 안 돼요 여기까지 공부해서는. 그래서 법공이 나온 겁니다. 법공은요 승의공은 진여고요. 연기공은 연기공도 맞지만, 오히려 현현공(顯現空)이 맞아요. 진여의 작용일 뿐입니다. 진여의 현현일 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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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제(世俗諦)는 존재하는 모든 건 연기하는 모든 것은 공해요. 왜요? 진여의 작용이라서 공해요. 끝. 연기하니까 공하다가 아니에요. 연기하는 모든 것들은, 연기하는 게 공하다 이것은 의미가 달라요, 연기하는 게 공하다는 건 연기가 참나, 진여의 발현이기 때문에 공하다는 거예요. 진여가 공하니까 발현도 공한 거예요. “연기하니까 공하지 않나요?”가 아니에요. 다르죠. 완전히 다르죠. 이게 대승의 법공이에요. 이게 대승 법공이에요. 이게 대승법공이에요. 특히 이 부분이 포인트예요. 망상공(妄想空) 그래서 이게 오온을, 오온이, 오온 전체가 독자성이 있다고 보는 게 망상인 거예요. 오온 전체가 진여의 작용인데 어떻게 독자적인 오온이 있을 수가 있어요? 진여 외에 독자적인 나, 독자적인 만법이 있을 수가 없어요. 나니 만법이 다 진여의 작용인 거예요. 다릅니다.
11:08 <소승불교의 아공>
소승불교에서 아공은요? 소승불교에서 아공은 무상 고 무아니까 아공이에요. 무상 고 무아 공이니까 그것, 오온이 무상 고 무아 공이니까 오온을 나라고 여기는 게 불가하다는 얘기를 한 거예요. 이쪽(대승불교)은요? 나니 남이니 만법이니 모두가 진여의 작용이라서 공한 거예요. 다르죠. 그래서 홍익학당에서도 이거 다 가르칩니다. 아공까지만 인가가 되신다는 건 다 이거예요. 무상 고 무아. 에고가 부질없고 참나가 진짜인 것 같아요. “그런데 만법이 생각 감정 오감이 참나 작용 같으세요?” “네?” 이러면 아공까지는 알았는데 법공은 지금 이해가 안 되신 거죠. 법공을 이해하고 나면 아공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아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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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예요? “에고도 참나 작용이라 공한 거”예요. 이해되시죠. 이거 외워서 심사 때 쓰십시오. 어때요? 홍익학당은 이거 다 체험적으로 개념과 체험을 합쳐서 인가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장난 아니죠. 불교가 여기 와서 배워야겠죠. 지금 상월(霜月) 정신이니 전혀 혹한기 버티는 정신으로 버텨보자 하시는 것 같은데, 진리를 알아야지. 그죠. 자 여기까지 아시면 지금 왜 중관파가 뭐가 문제인지가 나오는 거예요. 달라이라마 주장의 문제는 달라이라마는 항상 무상 고 무아 공을 주장하면서 ①제행무상 ②일체개공 ③일체개고 ④제법무아니까 연기하는 모든 게 공하단 이 얘기만 계속 하고 계신 거예요. 이게 중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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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법공이라면서 이게 연기하는 모든 게 공하다, 만법이 공하다, 제법무아가 법공이다 하면서 계속 중관파는 이것만 강조하는데 이러면 아직 소승 논리를 못 벗어난 겁니다. 바깥의 대상이 다 실재하고. 부처님은 오온이 텅 빈 열반자리를 얘기하셨는데 부처님이 법공을 아주 논하지 않으신 건 아닌데 약하다는 게 만법이 다 공성의 작용, 열반의 작용이라는 얘기는 잘 안 하셨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너라는 게 고정된 너가 없지 않니” 하고 자꾸 자아의 해체만 주장하셨지. 에고에 집착하는 걸 알리려고 자아의 해체를 강조하셨죠. 그런데 대승이 와서 보니까, 반야경이 치고 나온 게 만법의, 모든 진여가 본래 공하고 만법이 하나더라. 오온 전체가 독자성이 없더라. 한 진여더라 우주가. 이게 반야경에서 등장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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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이해 못 해 가지고 반야경을 소승식으로 풀어버린 게 지금 용수보살의 중관송입니다. 중론, 중관론 이해되시죠. 왜냐하면, 당시 논리는 이거거든요. 부파불교가 이런 논리로 싸울 때 같이 논리로 싸우려니까 부파불교 논리로 맞짱을 뜬 거죠. 일체가 공하다는 걸 입증하려고. 그러다 보니까 결국 부파불교의 논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논리가 계속 쓰인 거예요. 이 중관 사상에. 그러다 보니까 문제가 발생한 거죠 지금. 그래서 용수보살 보세요. 만법은 연기하니까 공하고 무분별지에 들어가면 승의공을 직관화할 수 있다. 분석으로는 연기가 공하다는 걸 분석하고 망상들이 공하고, 직관으로는 승의의 공을 체득할 수 있다. 다 찢어져서 논단 말이에요, 용수보살 자체가. 이해되시죠. 그러면 변종 소승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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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수보살식 대승론은 소승의 변종입니다. 그래서 유식학이 도저히 안 되겠어서 이 유식학이 이 전체를 일체가 진여의 작용이라고는 바로 못하고 유식학은 아뢰야식의 작용이라면서 유식학이 치고 나옵니다. 뭔가 문제 있다 지금. 중관 사상 문제 있다. 일체를 아뢰야식의 작용, 내 의식의 작용으로 못 보면서 법공을 원한다는 게 문제 있다고 해서 치고 나온 겁니다 유식학이. 하지만 유식학도 아뢰야식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까, 한계가 생기니까 아뢰야식의 작용이 아니라 진여의 작용이라는 걸 더 강조하면서 대승기신론 같은 본격적인 대승사상, 대승법공사상이 등장한 겁니다. 선불교까지 이어지는. 닝마파도 선불교예요. 똑같아요 이론이. 그래서 닝마파는 간단하게 일체가 진여 작용인 거예요. 그래서 이런 거예요. 만법이 존재하는데 무상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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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하다는 파와 만법 자체가 공인데 원래. 이해되시죠. 그냥 다 공인데. 지금 보이는 천체가 내 마음 작용이란 말이에요. 여러분 지금 여러분 마음에 들어와 있는 우주가 그냥 여러분 마음이에요. 꿈속에서 별거 다 봐도 깨고 나면 여러분 마음이었듯이 여러분 마음인데 여러분 마음 자체가 진여의 작용이라니까요. 공의 작용이라니까요. 공의 현현이에요. 이게 다예요. 그러니까 공이에요. 그냥. 끝. 이게 닝마파식 논리입니다. 닝마파식 중관 사상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오히려 용수보살을 잘 이해했다고 주장하는 거예요.
16:40 <용수보살의 중관 사상>
그런데 용수보살은 그럼 어떤 의도냐? 문헌에 기록된 것만 봐서는 이런 해석도 가능하고 저런 해석도 가능한 거죠. 이해되시죠. 오히려 우리가 더 용수의 올바른 후계자라고 이렇게 치고 나올 수 있는 부분도 있다는 거죠, 닝마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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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용수가 설명해 놓은 행간들을 읽어내다 보면 이렇게 풀 수도 있으니까. 이런 겁니다. 용수보살이 해 놓은 걸 보면 아무래도 귀류논증적으로 풀기가 쉽죠. 이렇게 풀다 보면 소승의 변종밖에 안 된다는 거예요. 확실히 대승으로 치고 나가지 못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웃긴 거예요. 반야경은 오히려 대승을 열었는데 후대 학자인 용수는 오히려 소승 논리로 풀고 있는 거예요. 못 따라가고 있는 거예요. 이런 게 재미있지 않으세요. 경은 오히려 치고 나가요 경은 시대를 초월해서 이게 진리다라고 선포해 버려요. 논문이 못 따라와요. 소화를 못 해서. 그래서 부파불교의 논리로 대승을 이해하려는 그런 노력이 용수보살의 중관 사상이었던 거예요. 못 따라갑니다. 그 이전에 이미 화엄경이 다 나왔는데도 못 따라갔어요. 화엄경도 이해가 안 되고 반야경도 이해가 안 돼서 기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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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를 가지고, 부파불교들과 싸우던 논리를 가지고 입증해 보려고 언어를 해체하면서 접근한 겁니다. 그런데 그게 지금 또 불교의 주류가 돼가지고서 용수보살식 이론이 제2의 석가니 용수보살을 부른단 말이에요. 잘못되고 있는 거 아시겠죠. 진여와 열반 이 강의를 통해서 불교의 본질이 청정광명심이라는 것만 아신다면 잘못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오류마저도 다 청정광명심을 중심으로 놓고 보면 확인할 수 있다. 자 6번 가볼까요? [6. 닝마빠에서는 ‘금강심’을 ‘절대적인 진리’(승의제)라고 본다. 닝마빠의 입장에서는 이 ‘절대 진리’는 중관학파(귀류논증 중관파)가 주장하는 것처럼 ‘공성空性을 깨달은 의식’이 관찰하는 대상이 아니다. 닝마빠의 절대 진리는 시작도 끝도 없는, 윤회와 열반의 모든 현상의 그 기저에 있는 ‘청명한 빛의 마음’(정광명淨光明 ㆍ청정광명심), ‘가장 심오한 의식’이다. 모든 비본질적인 현상들을 넘어서는 것이 ‘절대 진리’이다. 이 ‘가장 심오한 의식의 활동, 현현, 발산 또는 조잡한 형태들’은 모두 세상에서 통하는 ‘세속적인 진리’이다. 달라이 라마. ‘달라이 라마 명상을 말하다’, 담앤북스.] 달라이 라마가 이제 닝마파를 어떻게 정리하는지 지금 이 정도 배경지식을 가지고 보시면, 이해가 돼요. 보세요. 닝마파에서는 이게 다른 번역본이라 닝마빠라고 번역했습니다 여기는. 달라이 라마 명상을 말하다라는 담앤북스 책인데요. 닝마빠에서는 금강심. 금강심이 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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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광명심이요. 다이아 같은 이 불변의 청정광명심을 절대적 진리, 승의제를 이렇게 번역하셨어요, 절대적 진리라고 본다. 자 계속 강조되는 거 아시겠죠. 달라이 라마의 논리를 이해해 보세요. 지금. 달라이 라마가 계속 같은 말하고 다니실 거 아니에요. 강의 때 일관된 말. “닝마파는 자꾸 마음을 진리라고 한다.” 아닌데. 겔룩파는 공성의 진리, 무자성하다. 연기하니까 공하다는 그것만 진리인데. 이 공성이 뭐예요? 연기공이요. 지금 승의공도 아니에요. 지금 연기공. 연기하니까 공하다는 게 이것만이 진리인데 이 연기하니까 공하다는 걸 알아차리는 그 의식, 이 정광명을 자꾸 절대적 진리라고 본다 닝마파는. 닝마파는 이 정광명 자체를 승의제라는 진리라고 본다. 공성의 진리란와 정광명을 둘로 보지 않는다. 같게 보고 있다. 불만인 거죠.
20:02 <닝마파의 절대 진리>
닝마빠의 입장에서는 이 절대 진리는 중관파, 즉 귀류논증 중관파가 주장하는 것처럼 공성을 깨달은 의식이 관찰한 대상이 아니다. 쫑카파 이래로 주장해 온 그건 뭐예요? 진정한 절대적 진리는 공성의 진리일 뿐이라는 거예요, 그 정광명의 대상이 되는. 무분별지의 대상이 되는 그게 영원한 거지. 무분별지니 정광명이니 하는 이 금강심, 이 마음은 진리랑 다르다는 입장인 거예요. 닝마빠의 절대 진리는 시작도 끝도 없는 윤회와 열반의 모든 현상이 기저에 있는 청명한 빛의 마음. 청정광명심이다 이겁니다. 윤회와 열반도 다 어디서 나왔어요? 청정광명심에서 시공도 인과도 다 청정광명심에서 나온 거예요. 자 윤회라는 건요? 정광명에서 우주가 펼쳐지겠죠. 그러면 세속제가 펼쳐지겠죠. 그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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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제라는 윤회가 나오죠. 그러면 윤회에서 벗어난다는 열반이라는 개념이 나오겠죠. 그러면 윤회라는 개념, 열반이라는 개념은 다 어디서 나왔어요. 청정광명심에서. 그렇죠. 인과라는 거, 시간이라는 거, 공간이라는 것 모든 건 그건 다 정광명의 작용인 거예요. 참나의 작용이에요. 됐죠. 그런 가장 심오한 의식이다. 가장 미세한 의식, 가장 심오한 의식, 번역자에 따라 다른데요. 아니면 지극히 미세한 의식, 지극히 심오한 의식, 이렇게 번역됩니다. 요게 정광명이에요. 이거 나오면 초의식입니다. 초의식. 그런데 안타까운 거는 달라이 라마는 이 가장 심오한 의식을 계속 무상한, 연기하는 의식연속체로 보려고 한다는 거, 생멸하는 의식으로 보려고 한다는 거. 모든 비본질적인 현상들을 넘어서는 것이 절대적 진리다. 의식 자체를 청정광명심 자체를 진리라고 본다. 닝마파는 자꾸. 달라이 라마 겔룩파랑은 입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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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다. 됐죠. 여기까지. 반대파한테 들어야 더 선명해요. 뭘 불편해하는지 바로 알 수 있거든요. 뭐 때문에 불편한지? 이 가장 심오한 의식의 활동, 자 청정광명심의 활동, 청정광명심의 현현, 청정광명심의 발산 또는 청정광명심의 조잡한 형태들은 모두 세상에서 통하는 세속적 진리, 세속제라는 것은 결국 청정광명심의 현현 발산 작용일 뿐이다. 이 책에 보면, 맥동이라는 표현도 있어요. 맥동 발산상, 그러니까 가장 심오한 의식이 바다라면 바다에서 일어나는 파도일 뿐이다, 만법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지금 내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요 내 공적영지 가장 심오한 의식의 작용입니다. 여러분이 보시는 지금 모든 것, 만상은요 가장 심오한 여러분의 의식, 공적영지, 순수 알아차리는 의식의 작용일 뿐입니다 지금. 뭐 있는 것 같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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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가 공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텅 비어 있습니다 지금. 보는 모든 것들, 들리고 만져지는 모든 것들이 텅 비어 있어요. 청정광명심의 작용이거든요. 이게 닝마파예요. 이게 선불교예요. 똑같아요. 홍익학당 주장도 이거예요. 달라이 라마만 지금 의견을 잘 맞춰주시면 지구의 평화가 올 수 있어요. 노벨평화상 받으셨잖아요. 평화를. 큰마음을 내시면 어떨까? 어때요? 이해되시죠 다. 지금 이 구절이 설명 이해가 되셨잖아요. 뭔 말인지 아시겠죠. 그 뒤에 닝마파 린포체가 쓴 족첸의내 궁극의 진리 한번 볼까요. [1.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는 순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깨달은 본성은 심오하고 평화롭고 희론에서 자유롭고, ‘밝은 빛’이며 조작으로부터 자유롭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① 심오하다는 것은 무한하고 힘이 넘치는 것이고, ② 평화는 고요하고 차분하다는 것이며, ③ 희론에서 자유롭다는 의미는 모든 생각과 감정을 초월했다는 것입니다. ④ ‘밝은 빛’은 모든 현상을 이해했음을 의미합니다. ⑤ 조작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은 단순하며 완벽하다는 의미입니다. 이것들이 ‘족첸의 견해’에서 ‘궁극의 진리’, ‘청정한 인식의 심오한 본성’의 특징입니다.]
[2. ‘자연스러운 상태’란 모든 개념과 감정 그리고 노력과 성취를 넘어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합성된 것으로부터 자유로움’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합성된 것으로부터 자유로움이 여러분 안에 있고 그것이 ‘자신’이며 자신의 ‘고유한 본성’입니다. 여러분의 ‘고유한 본성’은 견고하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를 ‘공성’이라고 합니다. 이 공성은 마음이 공허하거나 비어있는 상태가 아니고 전지全知하며 자비롭습니다. 모든 것을 초월합니다. 심지어 시간과 공간도요. 그러므로 이를 ‘원초지혜’라고 부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깊은 삼사라에 깊숙이 박혀 있더라도 ‘원초지혜’는 부서지지 않으며 변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 중 가장 값진 것이지요. … ‘절대적인 명료함’은 모든 것을 경험하기 때문에 ‘원초의식’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이를 ‘스스로 태어난 지혜’라고 부릅니다. 켄첸 빨덴 세랍 린포체ㆍ켄뽀 체왕 된걀 린포체, “깨달음을 얻는 티베트 수행 요결”, 운주사.] 티벳분들 이름이 어려워요. 켄첸 빨덴 세랍 린포체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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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뽀 체왕 된걀 린포체가 쓰신 깨달음을 얻는 “티베트의 수행 요결.” 운주사에서 나왔는데요. 여기서 인용했어요. 이 두 구절을 보면 촉첸의 대가인 린포체들이 말하는 진리 뭘까? 한번 보죠. 짐작은 다 되시죠. 청정광명심이 있고 일체는 청정광명심의 작용이다. 첫 번째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는 순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게 또 께왓다경이에요. 미치겠죠. 모든 곳에서 께왔다경이 발견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진짜 잘 잡은 거 아니에요. 시작부터. 아주 그냥 뼈대를 붙잡은 거 맞죠. 모든 경전에서 다 지금 께왓다경을 근거로 삼고 얘기하고 있잖아요. “지가 그런 것만 뽑아 놓고.” 이럴 수도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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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놀랍지 않습니까. 모든 이게 절대적 진리를 얘기하기 전에 꼭 이걸 근거로 댄다는 게. 보세요. 그런데 번역이 다 조금씩 달라요. 맛이 달라요. 내가 깨달은 본성은 좀 약간 의역한 거죠. 내가 깨달은 본성은 심오하고 평화롭고 희론에서 자유롭고 밝은 빛이며 조작으로부터 자유롭다. 즉 어떤 변화도 없고 형체도 없다. 모든 것에서 빛나는 의식이다를 이렇게 의역하신 거예요 이분이. 내가 깨달은 본성은 심오하고 평화롭고 희론. 희론이 언어유희예요. 언어놀음에서 자유롭고. 그러니까 이게 그걸, 그걸 지금 되게 축약한 거예요. 길다 짧다, 미세하다 거칠다, 좋다 싫다, 아름답다 추하다 이런 게 희론이죠. 지금 개념으로 따지는 것 이 모든 희론에서 자유롭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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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빛이다. 그리고 모든 조작에서 자유롭다. 이게 지금 께왓다기엔 그대로죠.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심오하다는 것은 무한하고 힘이 넘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분은 푼 거예요. 두 번째 평화는 고요하고 차분하다는 겁니다. 이 자리는요 무한하다 심오하다는 것은 지금 그거를 푸신 거죠. 형체가 없다는 걸 심오하다고 푸신 거죠. 무한하다 무량하다를 푸신 거죠. 무량하다. 심오하다는 것은 무한하다 무량하다를 푸신 거고요. 무형무량을 같이 푸셨겠죠. 형체도 없고 헤아릴 수 없다는 께왓다경의 얘기를 지금 심오하다라고 받으신 거고요. 여기에 평화롭다를 넣으셨어요. 고요하고 차분하다. 희론에서 자유롭다는 건 모든 생각과 감정을 초월했다는 거고요. 밝은 빛이라는 것은 모든 현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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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했음을 의미합니다. 모든 현상을 다 알아차린다는. 조작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은 단순하며 완벽하다는 의미입니다. 좀 풀이를 많이 하셨네요. 무형, 형체가 없고 헤아릴 수 없다. 요런 것들을 좀 이렇게 다양한 각도에서 푸신 것 같아요 이분이. 이것들이 족첸의 견해에서 궁국의 진리, 승의제죠. 청정한 인식의 심오한 본성, 청정한 인식은 정광명이죠. 정광명의 심오한 본성이다. 본성의 특징입니다. 이렇게 봤습니다. 이게 닝마파들이 주장하는 게 이런 식이에요. 그냥 이 자체를 절대적 진리로 봐버리잖아요. 정광명이 절대적 진리이고, 절대적 진리를 알아차리는 마음이 또 정광명이고, 그런데 둘이 아니고요. 자연스러운 상태란 말을 까규파나 닝마파는 많이 씁니다. 이 참나 상태를 자연스러운 상태라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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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어떤 인위 조작이 없는 상태. 그럼 노자가 말한 무위겠죠. 무위. 어떤 조작이 없다가 무위잖아요. 무위 상태입니다. 자연 그대로의 상태란 모든 개념과 감정 그리고 노력과 성취를 넘어선 겁니다. 그러니까 노력과 성취를 넘어섰다는 것은 그 자리는 더 닦을 게 없는 자리라는 거예요. 노력하고 닦을 게 없어요. 그리하여 합성된 것으로부터 자유로움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합성된 게 아니라는 겁니다. 만들어진 게 아니에요. 인연으로, 즉 오온이 합성돼서 만물이 만들어진다 이렇게 말하는데 그런 합성이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이 자리는 원래 스스로 현존하는 자리지, 시공을 초월해서. 인연으로 생겨난 게 아니에요. 합성된 것으로부터 자유로움이 여러분 안에 있고 그것이 자신이며 그러니까 이게 참나라는 얘기죠. 자신이라는 거 그게 나라는 거예요. 그게 나다. 진짜 나다. 자신의 고유한 본성, 자성입니다. 나이자 자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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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관에서 싫어하는 거 다 썼습니다 지금. 자신이자. 자신이 없다인데. 자성이 없다인데. 그게 나의 본성이다. 여러분의 고유한 본성은 견고하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리에, 그 본성 자리에 뭐가 있느냐 하면 존재가 있는 건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가 시공 안에 있는 어떤 존재들처럼 존재물이 있는 건 아니다. 그래서 뭐라고 해요? 공성이라고 합니다. 이 공성은 마음이 공허하거나 비어 있는 상태가 아니고 전지하며 자비롭습니다. 그런데 또 텅 비었냐 하니까 그게 아니라, 전지전능하대요. 전지전능 자비의 자리래요. 심지어 시간과 공간도 모든 것을 초월합니다. 심지어 시간과 공간마저도 초월합니다. 그러므로, 이를 원초 지혜라고 부릅니다. 닝마파가 원초 지혜 이런 말 쓰면 참나자리예요. 원초의 지혜, 즉 태어난 적이 없는 지혜라는 겁니다. 이건 원초지혜라는 건요 태어난 적이 없어요. 여러분이 아무리 깊은 삼사라(Samsā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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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업의 윤회에 깊숙이 박혀 있더라도 원초 지혜는 부서지지 않으면 변할 수 없습니다. 닝마파는 불변이라고 해 버리죠. 달라이라만 자꾸 이 자리를 변한다고 하려고 해요. 이게 닝마파랑 겔룩파 차이입니다. 불변이라니까 한쪽은. “거기는 시공을 초월했는데 뭐가 변한다는 거야?” 그런데 달라야만 자꾸 논리적으로 접근하면서 “무상하지 않은 존재는 없다, 우리 중관파 이론에. 그러니까 이 자리도 무상하다”고 자꾸 주장하는 거예요. 뭐냐면 정광명이라는 이름은 무상할 수 있지만 정광명의 그 실체가 무상하면 안 되죠. 닝마파는 실체가 무상하지 않다는 얘기를 자꾸 하는 거고. 달라이라마 쪽은 자꾸 언어를 붙잡고 늘어지는 거예요. 무상하다. 여러분이 아무리 깊은 삼사라에 박혀 있더라도 이거는 부서지지 않고 변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 중 가장 값진 것이죠. 절대적인 명료함은 자명함이죠. 절대적인 자명함은 모든 것을 경험하기 때문에 원초의식이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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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저기 도교 같은 데서 원신(元神)이라고 부르는 게 원초의식이거든요. 순수의식 원초의식. 순수의식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스스로 태어난 지혜라고 부릅니다. 태어난 적이 없어요. 그런데 자꾸 무상하니, 어떤 의식의 연속체니 이런 말을 자꾸 붙이려는 건 용수보살의 견해랑도 부합하지 않습니다.
31:24 <용수보살의 정광명>
용수도 그냥 정광명이라는 언어만 해체했지. 그렇죠. 정광명이라는 언어는 무상한 거다 하고 집착하지 마라고 하고 정광명이 실체랑 만나게 해 주는 게 용수의 원래 의도였는데, 달라이 라마 식은요 문제가 있는 게 뒤 겔룩파에 의해서 발전해 온 이 귀류논증 중관파의 문제점은 자꾸 이 정광명을 무상한 의식이라고 규정해 버리는 데 있어요. 그러니까 언어를 해체해서 언어를 떠나게 해서 본래의 정광명, 개념으로서 정광명이 아니라 본래의 정광명을 만나게 해 주는 게 용수의 의도일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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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용수의 일군의 제자들은 뭐가 잘못됐죠. 정광명을 무상한 의식으로 규정해 버린 겁니다. 그러면 이렇게 돼 버리면 이제 정광명은 실제 체험한 닝마파랑 견해가 달라져 버리게 된 거예요. 뭐가 잘못됐는지 아시겠어요? 정광명이라는 이 손가락 개념, 손가락은 무상하다는 걸 손가락은 진짜 정광명이 아니란 걸 알아야 진짜 정광명을 만나라고 한 얘기인데 용수보살은. 그 모든 것의 주인이 된 의식을 만나라는 건데. 달라이 라마는 이 손가락에다가 아예 정광명은 무상한 것이라고 정의해 버리면. 끝난 거죠. 이걸 초월해서 진짜 영원불멸한 시공을 초월한 원초지혜와의 만남을 갖더라도 언어화할 때 다 그걸 무상한 것이라고 말을 해야 되잖아요. 뭐가 잘못된 거예요. 그러니까 노자도 얘기했죠.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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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도 뭐라고 했어요. 도가도 비상도. 노자 강의도로 가겠습니다. 도은 말하다 예요. 명은 이름 짓다 예요. 말할 수 있는 도는, 이름 지을 수 있는 명은, 그러면 이 도는 진리고 명은 이름 개념들인데, 즉 우리가 이름 붙여버리면요 개념화 해버린 거. 개념이 아닙니다. 이름인데 이것을 개념화해 버린 거죠. 도라고 말한 것도 개념화한 겁니다. 개념화해 버린 진리와 이름은요 본래의 영원한 도 영원한 이름이 아니라는 거예요. 영원불멸 하는 이름이 아니죠. 그럼 영원하지 않다면 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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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들은 다 뭐라는 거예요. 이 개념화 해 놓은 거, 언어로 개념화 해 놓은 거예요, 언어로. 무상하다는 거죠. 노자가 주장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개념화 해 놓은 거, 언어로 이름 붙여 놓은 것, 언어로 설해 놓은 진리들은 무상하다고요. 영원한 게 아니라고요. 기본이에요 이거는. 이해되시죠. 노자도 얘기했잖아요. 그러니까 이름 붙여진, 정광명이라는 이름은, 도라는 이름도 무상한데 정광명이 아니라 이름도 당연히 무상하죠. 그러면서도 노자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라는 말을 쓰죠. 손가락이 필요하니까. 손가락을 나는 이제. 노자 입장에 이게 왜 나오냐면 “나 앞으로 진리를 도라고 부를래. 그런데 이거 도는 진짜 영원한 도 아니야. 손가락이야. 이름 붙여 놓은 거야. 여기에 집착하지 마. 이 도라는 이름을 넘어서야 진짜 도를 만날 수 있어.” 이렇게 얘기하고 시작한 거예요. 경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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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래요. 그래서 이 새끼손가락, 이 새끼를, 꼭 새끼일 필요는 없죠. 손가락을 활용하겠다는 얘기를 해서 모든 경전은 언어와 개념을 활용해야 되기 때문에 언어로 이름 붙여야, 이 개념을 담아야 되잖아요. 언어를 써서 생각을 담아서 개념화한단 말이에요. 이래가지고 모든 경전을 쓰는 거예요. 그런데 중관 사상 같은 거는 언어나 개념 자체를, 이게 영원하지 않다고 무상하다고 계속 공격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얘기는 뭐예요? 영원하지 않은 언어나 개념을 초월해서 진짜를 만나라는 의도겠죠. 용수보살의 의도를 우리가 잘 이해한다면. 그런데 누가 나와서 “이 도는 무상한 겁니다. 도 자체가 애초에.” 뭐가 잘못됐죠 지금. 누가 이렇게 주장해 버린다면. 열심히 질 얘기하는데 초치는 거 아닌가요. 완전히. 망해버려라 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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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도 비상도. “아, 선생님 도는 원래 무상한 겁니다.” 그러면 노자가 뭐라고 하겠어요? “매우 쳐라. 저놈을 매우 쳐라. 저놈을 매우 쳐라.” 뭔가 이상해졌죠. 이게 지금 겔룩파가 하고 있는 이상한 짓입니다. “정광명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정광명은 영원한 그 정광명은 아니다.” 왜냐? 정광명이라는 언어를 붙인 이상 이미 무상한 거예요. 중관 사상으로 보면 애초에 무상한 거예요. 보세요. 그 대상이 정광명이라는 이름에 의지해서 존재하죠. 벌써 무상한 거예요. 의지해서 존재한다는 건 독자적인 게 아니라는 얘기죠 청광명이라는 이름의 의지해서 존재하는 청광명은 이미 무상한 거예요. 이미 연기작용 속에 들어와 있어요. 그래서 무상하다는 거예요. 열반도 무상해요. 열반이라는 이름에 의지해서 지금 우리 마음속의 열반이라는 개념으로 떠오르는 그놈은 무상하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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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 속에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열반도 무상하고 정광명도 무상하다고 한 거예요, 용수가. 그 말을 듣고 정광명 자체가 애초에 무상한 거라고 정의를 내려버리면 또 잘못된 거예요. 이해되시죠. 정광명이란 언어가 무상하다는 거예요. 우리 마음속에 개념화돼 있는 그 정광명이 무상하다는 거예요. 여러분 마음속에 개념화되어 있는 공성이라는 것도 무상한 겁니다. 공도 무상한 거예요 그래서. 이 말이 이상하죠? “공도 무상해.” 아니 공이 어떻게 텅 비었는데 무상해요? 공이라는 개념이 무상하다는 거예요. 텅 비었다는 “말”이잖아요. 벌써 말에 의존해 있고 소리에 의존해서 지금 존재하죠. 그게 무상하다는 거예요. 그 공이라는 말 자체가 무상하다. 이거를 잘못 이해하면 큰일 나요. 일체는 연기 속에 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건 연기 속에 있어요. 그래서 연기공이죠. 존재하는 모든 건 연기해요. 시공 안에 존재하는 모든 건. 그래서 무상한 거고 공한 겁니다. 그런데 동시에 그게 참나의 작용이라서 또 공하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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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면도 아셔야 되고. 양 측면을 다 아셔야 돼요. 무상 고 무아도 맞는 말이지만 무상 고 무아 자체가 원래 다 참나 작용이라는 것도 아셔야 돼요. 그 자체가 공허다는 것도 알아야 돼요. 됐죠. 그런데 중간에 집을 지어 버리면 안 돼요. 거기다 갑자기 정광명은 원래 무상한 의식다라고 해 버리면 이제 누가 정광명을 찾아가겠어요. 그런데 지금 겔룩파는 견성이 안 되는 이유가 본성을 언어로 규정해 버렸어요. 제일 하지 마라는 것이 언어로 규정하지 마라는 건데 정광명을 언어로 규정해 버렸어요. 무상한 연기적 의식 연속체. 끝. 이제 안 찾습니다, 사람들은 정광명을. 알았거든요. 그렇죠. 이제 언어화돼서 알았어요. 무상한 연기 의식연속체. 언어를 초월하겠어요? 용수보살이 왜 언어를 공격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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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도 무상하다는 공격적인 말을 왜 했을까요? 그 언어에 집착하지 마라고 했는데, 언어의 집을 지어버렸습니다, 딱 언어를 가지고. 정광명을 멋진 개념으로 담아버렸어요.
39:16 <겔룩파식 귀류논증>
그러면 이제 무분별지에 누가 들겠어요? 정광명이 다 설명이 됐는데. 그러니까 달라이 라마는 계속, “다른 닝마파 무분별지를, 그런 무상한 연기 연속체가 진리를 딱 직관하는 순간만큼은 주객이 없을 수 있으니까 그때만큼만은 무상한 연기 연속체인 정광명도 진리랑 동급이 될 수 있지만 그 외에는 동급이 아니다.” 이 주장을 하잖아요. 계속 이런 식으로 해서 분리를 시키잖아요. 정광명과 공성의 진리를. 이게 겔룩파식 귀류논증 중관파의 문제점입니다. 아시겠죠. 이름은 모르셔도 돼요. 귀류논증 자립논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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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셔도 돼요. 두 개밖에 없는데. 한 5개 되면 제가 모르겠는데. 귀류논증과 자립논증. 즉 내가 내 주장을 해 보겠다. 자립논증. 귀류논증 남의 말꼬리를 한번 잡아 보겠다. 귀류(歸謬)는 남의 말을 붙잡아서 오류로 귀결됨을 주장해 보는 거예요. “야 문 닫고 들어와.” “문을 닫았는데 들어온다고요? 당신의 말에는 오류가 있습니다.” 귀류. 결국 오류로 딱 귀결되잖아요. “따라서 너의 말은 잘못된 거다.” 그럼 말을 못 하게 만드는 거잖아요. 귀류논증도 원래 말을 못하게 해서 견성하면 좋죠. 그런데 말로 설명을 해버리면 오히려 문제라는 거예요. 정광명을 말로 설명해버리면 문제가 돼요. 설명 안 할 건 설명 안 했어야 되는데. 이해되시죠. 그래야 언어를 초월해서 그리 들어가는데. 언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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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지어 놨으니 딱 언어에 묶여서 어떻게 들어가요? 아니 머릿속에서 정광용은 무상한 의식이라고 정의가 됐는데, 영원한 정광명을 체험할 수 있겠어요? 의식을 체험한들 그걸 그 의식이라고 얘기하겠어요? 이러면 문제가 돼요. 그러면 그때부터는 이 언어나 손가락이 진리를 가리키는 도구로서 기능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너무 언어의 해체에 집중하던 용수보살의 폐해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겁니다. 여기 와서. 달라이 라마 여기가 속한 겔룩파에 와서 저는 모순이 드러났다. 그래서 닝마파 옛날 닝마파의 미팜 린포체('Jam mgon Mi pham, 1846-1912) 같은 분은 아예 이렇게 주장해요. “우리가, 닝마파가 용수보살의 우리가 직전이다, 제대로 된 정통 가르침이고. 귀류논증 자립논증이니 이런 말도 필요 없다. 겔룩파의 문제점은 뭔가가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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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거다. 있는데 공하다고 주장한다. 있는데 연기하니까 공하다고 주장한다. 다 부질 없는 소리다. 애초에 공하다. 일체는 공의 현현일 뿐이고, 공하다는 건 그대로 대원만, 원만하다는 거다. 텅 비었다는 건 꽉 찼다는 거다”라고 주장하면 이 닝마파식 주장을 그대로 합니다. 우리랑 다를 게 없죠. 미팝 린포체 같은 경우에는 “아예 자립이니 중간이니 따지지 말고 그냥 용수의 가르침을 통으로 닝마파가 제일 잘 이해했다.” 이렇게 주장해버리는 사람이 나와요. 여기까지 아셨으면 더 아실 건 아니라고 봅니다. 이런 쪽에 대해서 더 아실 건 아니다. 여기까지 할게요. 그래서 족첸까지 대충 여기까지 하고요. 5분 쉬고 지난 시간에 못한 정토사상이 있어요. 오늘 한 장 추가로 나눠드린 거 있어요. 맨 끝에. 이거 보고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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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으로 들어갈게요 이거 풀고 “반야 사상과 정토 사상의 만남” 이 부분 한번 검토하고, 반야심경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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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녹취) [홍익학당] 진여와 열반 23강 - 족첸의 궁극의 진리(43:11) (홍익학당) | 작성자 수호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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