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헌신이란 무엇인가?
롬 12:1-2
오늘 주일오후예배를 남전도회 헌신예배로 드립니다. 헌신예배를 드리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주님 앞에 우리의 몸과 마음을 드리며 헌신할 것을 다짐해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헌신이란 단어를 자주 사용합니다. 그런데 성도들 중에 참된 헌신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채 단지 교회에서 봉사를 많이 하면 되겠지 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헌신”이란 단어의 국어사전의 의미는 두 가지입니다. “(1) 몸과 마음을 바쳐 있는 힘을 다하다. (2) 어떤 일이나 남을 위해서 자신의 이해관계를 생각하지 않고 몸과 마음을 바쳐 있는 힘을 다하다.”입니다. 그리고 헌신에 해당하는 영어인 'devotion'의 의미는 헌신, 충성, 충실(loyalty), 봉헌, 신앙심, 경건함 등으로 나옵니다.
이 말들을 종합적으로 생각해볼 때 헌신은 교회에서 봉사를 많이 한다는 의미보다는, 본질적으로 주님께 우리의 몸과 마음을 드려 충성하고, 충실한 믿음을 가지고 경건하게 살아가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이러한 신앙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갈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주님 앞에서 교회공동체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쁨으로 봉사를 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헌신과 관련하여 우리가 묵상할 말씀은 로마서 12:1-2입니다.
1. 너희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12:1)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1장에서 구원의 교리와 하나님에 대해서 진술한 뒤, 12장에서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할지 설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로마 성도들을 ‘형제들아’라고 부르고 난 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그들을 권고합니다. '모든 자비하심'('오이크티르몬')은 '자비'(고후 1:3; 빌 2:1; 골 3:12) 혹은 '불쌍히 여김'(히 10:28)으로 번역되는 단어의 복수 형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하심 때문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하나님은 창세전에 구원의 계획을 세우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시고, 성령을 통하여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구원받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의 관점에서(in view of God's mercy),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할지 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서만, 그가 권하는 것들을 우리가 행할 수 있다는 의미합니다. 바울은 사도적 권위를 가지고 로마 성도들에게 호소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 바울이 권고한 것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롬 6:13에서 바울은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합니다.
고전 6:19에서 바울은 “너희 몸이,,, 성령의 전인 줄 알지 못하느냐”고 말하고, 고전 6:20에서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린다는 것은, 우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고, 결국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몸은 몸과 마음, 즉 전인격을 포함하고 있으므로(Calvin), '너희 몸'은 '너희 자신'을 뜻하며, 우리의 인격 전체를 형성하는 모든 요소를 포함합니다. 이것은 세상과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구체적인 삶으로 표현되는 삶의 모습까지 포함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이란, 하나님께 전 인격적으로 우리의 생애 전체를 드리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생애를 통해 계속적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일에 힘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룩한'이란 말은 흠이 없이 순전(純全)하다는 의미입니다(엡 1:4; 빌 2:15; 골 1:22). 그러므로 거룩한 제물이란 죄의 종이었던 우리가(6:16,17; 엡 2:1,5)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 받아 그가 주신 새 생명으로 그분을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6:4-7,13,14,22; 갈 2:20).
‘산 제물’(living sacrifices)은 '지금 살아있는 제물'이란 뜻입니다. 이 말은 구약에서, 짐승을 죽여 피를 흘림으로써 드리는 희생제물과 대조됩니다. 또한 이것은 당시에 이교(異敎) 사회에서 성행했던, 몸을 부정(不淨)한 일에 악용했던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즉 '산 제물'는 구약 시대의 희생제물처럼 다른 존재로써 드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살아있는 자기 자신을 드리라는 것이며, 또한 지역이나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제물로서 살아 움직이며 생활하는 자체로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릴 때, 이것이 우리의 영적 예배(spiritual worship)라고 합니다. 이것은 이방인들의 미신적인 행동들을 경계하고(Calvin), 하나님이 요청하시고 기뻐하시는 예배, 즉 하나님께 가장 합당한 예배를 강하게 표현하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성전 예배의 외형적 의식과 대조하여 '영적' 예배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배'('라트레이아')는 구약의 제사를 지칭하기도 했는데, 본절에서는 단순히 제사 행위를 의미한다기보다는 삶으로서의 예배를 의미합니다. 즉, 삶의 모든 가치와 의미를 주께 두고 주님을 섬기는 삶을 사는 것에 역점을 두었습니다. 그러므로 예배(worship)를 '섬김'(service)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KJV).
2.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12:2)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 때, 첫 번째 행해야할 것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세대”의 '세대'('아이온')는 시간적이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의미하는데, 이것은 공간적이고 현상적인 세상을 의미하는 '코스모스'와 반대됩니다. 유대교 종말론에서는 시간을 '현 세대'(present age)와 '올 세대'(age to come)로 구분하는데, 바울이 사용한 '이 세대'라는 말 속에는 대부분 이러한 유대교적 종말론의 개념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이 세대'가 시대 구분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신' 혹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다스리는 '악한 세대'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세대는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있는 하나님 나라의 적대 세력을 의미할 뿐 아니라 '이 세대'의 삶의 방식과 가치 기준 등 시대정신도 포괄합니다. 따라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것은 표면적이고 흘러가는 ‘이 세상 풍습을 받아들이거나 순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삶을 위해 행해야 할 두 번째 것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것입니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이해가 새롭게 계속 변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마음'이란 도덕적 활동과 관련된 이해력이나 사고력 등을 말합니다. '변화를 받아'라는 말은 자신이 아닌 타자(他者)에 의해서 변화하며, 일시적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꼭 그렇게 되어야 함을 나타냅니다. 즉 우리의 인격 내부에 변화를 일으키는 성령에 의해 마음이 새롭게 계속 변화되어 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할 궁극적인 것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선하시고”('아가도스')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특별하게 주신 말씀을 기준으로 규정되는 '선'이라기보다는 모든 사람이 일반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개념으로서의 '선'을 의미합니다(2:10; 7:12,13,18,19). 그러므로 이 '선'의 개념을 교회 안에서(9절), 사회 속에서(21절) 그리고 국가에 대한 관계 속에서(13:3ff.) 사용하였습니다. 다만 본절에서 바울은 '선'의 기준을 하나님께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뜻이 이뤄지거나, 그의 뜻과 일치될 때 기뻐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신의 기쁨을 위해 뜻을 가지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생을 영위하거나, 피조 세계가 원래 목적대로 진행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인간의 뜻은 타락한 욕심이 작용하기에 그 어떤 뜻도 온전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계시된 하나님의 뜻은 그 자체가 온전한 것입니다. 신앙과 행위의 충분한 규범으로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것입니다(딤후 3:16,17). 이는 그 뜻을 가지신 하나님 자신이 온전한 분이기 때문입니다(마 5:48).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알아야 하며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뤄가야 합니다(엡 5:8-10; 빌 2:12). 이렇게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할 때, 비로소 우리는 교회공동체를 위해서 섬겨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12장 1-2절에서 성도의 거룩한 삶에 대해서 말한 후, 3절부터 13절에 교회공동체를 섬기는 자들의 자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거룩한 삶을 온전히 살게 될 때 교회공동체를 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공동체를 섬기는 자세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우리의 믿음의 분량대로 생각하는 것입니다(3절)
(2)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 교회인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4-5절)
(3) 우리의 받은바 각각의 다른 은사로 섬기는 것입니다(6절)
(4)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는 것입니다(9-10절)
(5) 부지런하여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는 것입니다(11절)
(6) 소망 중에 즐거워하는 것입니다(12절)
(7) 손 대접하기를 힘쓰는 것입니다(13절)
3. 주님 안에 쉼을 얻으라
우리가 이렇게 교회공동체를 위해 섬길 때, 때로는 우리의 마음의 짐을 느끼며, 그 마음의 짐 때문에 힘들어합니다. 그러한 때 우리는 주님께로 나아와 주님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여야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예수님만이 문제 해결의 유일한 길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해결방법을 찾을 때, 실패할 수밖에 없지만, 문제의 해결자이신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의 문제는 해결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오는 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쉬게 하신다는 말씀은 안식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안식이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을 때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평안과 기쁨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깨어진 인간은 결코 안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안식은 없습니다.
이제 인간에게 안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과 화평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겠습니까? 죄인이 하나님 앞에 서는 그날이 바로 심판의 날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죄인인 인간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간의 모든 죄의 값을 대신하셨고 부활하심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다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죄 사함을 얻고 구원받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와 하나님과의 화평을 주십니다(요일 4:10; 롬 4:25; 롬 5:10).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받아들이고 믿는 자들은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고 그 화평을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진정한 안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마 11:29).
온유함은 주님의 성품이십니다. 하나님은 늘 온유하심으로 우리를 대하십니다. 주님의 온유하심이 아니면 이 땅에 존재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온유하심은 이 땅에 오신 후에도 그대로 나타났습니다(삼하 22:36; 시 18:35).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이신 당신의 자리를 비우시고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시기까지 겸손하신 모습을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아지신 모습을 보이셨습니다(빌 2:7-8).
우리는 마음의 온유함과 겸손함을 배우지 못함으로 안식을 얻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은 우리의 노력으로 얻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 배워야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우려면,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멍에는 농부가 밭을 갈 때 소에게 일을 시키기 위해서 사람의 요구대로 잘 들을 수 있도록 이끄는 도구입니다. 주님의 멍에란 주님과 함께 갈 때에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잘 갈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끄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멍에는 주님의 온유하심과 겸손하심을 배우며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우면, 우리의 마음에 쉼을 얻게 됩니다. 마음에 쉼을 얻는다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평안을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의 평안은 우리가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평안을 주실 때 비로소 얻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있을 때 우리의 심령 깊은 곳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평안을 얻게 됩니다.
주님의 멍에는 우리 혼자 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쉽습니다. 만일 우리 혼자 멍에를 지고 간다면 그것은 짐이 되고 힘들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제까지 스스로 짐을 지고 가보려고 했으나, 그 짐은 너무 무겁고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의 짐을 대신 지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법을 보이셨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대로 가면됩니다. 우리에게 능력이 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닥친 문제들을 자신의 힘으로 해결해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상 아무런 능력이 없음을 압니다. 우리는 무한한 능력이 있으신 주님의 멍에를 주님과 함께 메고 가기만 하면 됩니다.
주님의 멍에를 멘다는 것은 주님의 원하시는 대로 우리의 삶의 기준을 맞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까지의 삶의 기준에서 자신이 왕이 되었던 자리를 이제는 주님께 내어주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가면, 우리의 목적지인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이르러 주님과 영원한 안식을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적용: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하여
우리는 헌신에 대해서 생각하며,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삶을 살아야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묵상합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육체를 정과 욕심과 함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입니다(갈 5:24). 그러므로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은 더 이상 그 육체를 따라 살지 않게 됩니다. 그의 삶은 이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어 더 이상 정욕된 삶을 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갈 6:14). 그러한 모습이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사람입니다.
둘째, 날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으로 우리의 심령을 씻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속에서 더렵혀진 심령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씻음 받고 새로워진 마음으로 갖고 주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 실패하였어도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다시 씻을 때마다 우리의 더렵혀진 심령이 깨끗함을 받게 되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보좌 앞에 더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심령을 씻습니다. 에베소서 5:26에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읽을 때 우리의 더렵혀진 심령이 깨끗하게 씻음받고 말씀을 순종함으로 거룩함에 이르게 됩니다. 그때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되어 변화되는 삶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넷째, 성령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면 우리는 쉽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살 수가 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찰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고전 2:10; 롬 8:27). 성령을 따라 살 때 성령으로 행합니다. 모든 것을 성령께 의뢰하며 자신의 생각이 아닌 성령께서 주신 생각으로 삽니다. 이렇게 거룩한 삶을 살 때, 우리는 교회공동체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 더 잘 섬길 수 있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