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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못자리 당진(솔뫼-합덕성당-신리성지-여사울)
김대건 신부의 생가, 솔뫼성지
내포는 충남 아산에서 태안까지 삽교천과 무한천 두 물줄기가 흐르는 충남 중서부 평야지대를 일컫는 지명으로, 내포의 사도 이존창에 의해 천주교가 전파되어 밀물처럼 교세가 확장되어 한국천주교회의 신앙의 못자리로 알려져 있다. 그 중 솔뫼가 있는 합덕은 내포신앙의 중심지로 보면 된다. '한국의 베들레헴'이라 불리는 솔뫼성지는 김대건 신부의 탄생지며, '조선의 카타콤바'로 불리는 신리성지는 충남에서도 가장 큰 교유촌을 형성했던 곳이다.
솔뫼-합덕성당-신리- 여사울까지 미지근한 신앙인이라면 초기 천주고 신앙을 기리며 박해시대의 숨결을 들으며 걸어보면 어떨까 싶다.
주변에 산도 없이 오로지 지평선만 눈에 들어온다. 김대건 신부의 카톨릭신장에 대한 사랑은 이런 풍요로운 땅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싶다. 주차장 초입에 '한국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탄생 솔뫼성지'라는 돌비석이 자리잡고 있다. 한국 최초의 사제를 배출한 당진사람들의 자부심만큼이나 큼직하다.
소담스럽게 핀 꽃과 이리저리 굽은 소나무의 유혹을 떨쳐버리고 생가를 먼저 찾았다. 어떤 집터이기에 4대의 걸쳐 순교자를 배출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면천군수이자 김해김씨 안경공파인 김진후는 내포의 사도 이존창으로부터 천주교를 접하게 된다. 천주학이야말로 참 종교임을 깨닫고 벼슬을 버리고 신앙을 다지게 되었다. 신해박해때 잡혀 홍주, 전주, 공주 감영을 드나들다가 결국 해미감옥에 압송되어 10년 옥살이 끝에 순교하고 만다. 2년 뒤 그의 셋째 아들인 한연이 아버지의 뒤를 이었고 23년 뒤 둘째 택현의 아들 제준이 순교했으며 다시 7년뒤 김대건신부 마저 순교했으니 4대에 걸쳐 순교자가 배출한 거룩한 장소이기도 하다.
김대건 신부는 이곳에서 태어났고 7살까지 신앙의 자양분으로 흡수하며 이곳을 지켰다.
생가 옆은 김대건 신부상이 서 있다. 이 땅에 태어난 것을 감사하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작약이 순교의 피처럼 붉다. 툇마루에 엉덩이를 붙였다. 주일날 기계적으로 성당을 다니는 내 보잘 것 없은 신앙이 부끄럽기만하다. 생가 뒷쪽에 우물이 복원되어 있었다.
안방 미닫이 문을 열자 고풍스런 분위기의 성체조배실이 나타난다. 원목과 은은한 한지로 도배해있어 어머니 품안에 안긴 것처럼 편안하다. 잡념을 떨쳐 버리고 주님과 만나기에 그만이다. 솔숲에서 풍겨나오는 솔향이 문 틈새로 스며든다.
솔뫼는 소나무 산이다. 그러나 산이라기 보다는 야트마한 언덕에 가깝다. 가장 먼저 맞는 소나무는 'ㄱ'자로 굽어 있었다. 순례객을 맞이하기 위해 꾸벅 인사하는 듯하다. 4대에 걸친 순교자의 기막힌 사연들 때문에 꼬부랑 할머니처럼 이러저리 굽어 있다. 고통의 감내를 이겨낸 어머니를 보는 듯하다. 고요한 오솔길을 밟으며 속내 깊숙히 들어간다.
그 끝자락은 도포자락에 갓을 쓴 김대건 신부의 동상이 서있다. 수령 100년 이상된 노송의 호위를 받고 있는데 유심히 보면 300년 이상된 노송도 볼 수 있다. 대건이 어린 시절, 키작은 사게오처럼 나무위에 올랐을 지도 모른다.
사시사철 푸름을 보여주는 소나무는 대건의 지조를, 두툼한 껍질은 수천리를 유랑한 대건의 굳은 살처럼 보인다. 노송은 둘러서 거룩한 성가를 바치고 있다.
풍성한 도포자락을 입은 김대건 신부는 갓을 쓰고 희미한 미소를 띄고 있다. 가슴에 성경을 품고 오른팔은 박해에 시달리는 조선천주교 신자들에게 축복을 내리고 있다. 뒷편 스키모양의 조형물은 마리아를 상징한다고 한다. 김대건의 뒤를 든든히 받치며 힘을 북돋아 주는 성모님을 형상화했다.
생가 옆으로는 솔뫼 아레나 광장이 펼쳐진다. 아레나는 고대 로마 원형극장 한가운데 모래를 깔아 놓은 경기장을 뜻한다. 검투사의 결투가 있었지만 순교자들의 치명터이기도 하다. 상해 금가항성당에서 신부가 된 김대건이 최초로 상륙한 장소 역시 바닷가와 인접한 금강변 나바위였고, 치명당한 곳 역시 한강의 모래밭인 새남터였다. 삽교호 제방을 쌓기 전 솔뫼는 바닷물이 유입되었던 갯말로 당시에는 소금배가 드나들었다고 한다. 실제 이 근처를 팠을때 소금에 쩔어있는 나무조각이 나왔으니 모래와는 뗄 수 없는 모양이다.
아레나는 내포 성지도보순례의 시발점이자 종착지이다. 생가의 경관을 해치지 않도록 광장은 지면 아래 건설했고 반원을 따라 12사도의 조각상이 서 있다.
솔뫼성모상은 한복을 입고 있다. 어린 김대건신부를 안고 있는 어머니 우르슬라가 아닐까 싶다. 4대가 순교를 당했으니 살아남은 자는 고통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한다. 그 찬란한 어머니가 우르수라다. 박해가 심해지자 더 이상 내포땅에서는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없어 가족들은 용인 골배마실로 이사를 했고 극소에서 신앙의 힘을 다지게 된다.
15세때 최양업, 최방제와 함께 은이공소에서 모방신부로부터 신학생으로 선발되었고 수 천리에 걸친 유랑생화를 끝내고 마카오에 머물렀다가 정쟁으로 마닐라까지 피신하게 되었다. 조선을 떠난 지 9년만에 상해 금가항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서품의 영광을 얻게 된다.
신부가 된 대건은 천신만고끝에 조선에 밀입국하고 만다. 이때 아버지는 참수 되었고, 어머니 우르술라는 이집저집 떠돌아다니며 걸인생활을 하며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당장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는 조선카톨릭 신부였지 우르술라의 자식이 우선이 아니었다. 위기를 거듭하며 산길을 따라 이동하며 활발한 사목활동을 하게 된다. 드디어 은이공소를 순방했을 때 어머니를 만나게 된다. 집을 떠난 지 딱 10년만이다. 그 애틋한 만남은 이승에서의 마지막 상봉이었다. 두 달후 김대건 신부는 연평도로 나갔다가 관헌들에게 체포되고 만다. 옥에 갇혔을 때 김신부는 페레올주교에게 어머니를 위로해달라는 마지막 편지를 남긴다. 그리고 9월 16일 새남터에서 거룩한 순교의 칼을 받게 된다. 그의 마지막 유언.
'나의 죽음은 천주를 위하는 것이며 나를 위한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다.'
이승에서 못다한 만남은 천국에서 영원히 누리리라 믿는다.
목조로 만든 십자고상. 평지 당진땅에 높이 15m로 하늘 높이 치솟은 십자가가 하늘을 향한 상승감을 보여주고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조각가 최영철 바오로의 작품으로 그는 파리 제2대학 예술학부 교수다. 한때 목수였기에 나무조각상이 어울린다.
솔숲을 따라 십자가의 길 14처 기도를 바칠 수 있도록 꾸며졌으며 에수 조각상들을 볼 수 있다.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최영철 바오로의 작품 예수상.
단순 절제미가 넘치는 조각상이 많이 보인다.
천사
성채의 해자처럼 성당은 연못 안쪽에 자리하고 있다. 성당은 상해를 떠나 조선에 상륙한온 라파엘호를 의미한다.
스테인드 글라스는 상해에서 나바위까지 폭풍우를 그려내고 있다. 제단 한켠에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해가 모셔져 있고, 엥베르주교, 모방, 샤스탕 신부의 모발을 볼 수 있다. 박해로 신음하고 있는 조국에 하루 빨리 복음의 빛을 전하고자 상해 금가항 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는 즉시 귀국길에 오른다. 그러나 그들은 폭풍우속에서 20여일을 헤메다가 제주 용수리 해안에 안착하고 배를 수리해 익산 나바위에 도착한다.
십자가의 길
예수의 발
생가 앞 조각상
전국에서 가장 사제를 많이 배출한 합덕성당
합덕성당은 꽃천국이었다. 연산홍이 가득한데 사목회장이 물호수를 가져와 뿌리고 있었다. 성당을 천국으로 만들려는 마음씀씀이가 무척 고마웠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성당으로 오르는 길이 일품이다. 난간은 두꺼운 밧줄로 이어져 있다. 기지시 줄다리기에 나오는 새끼줄이 연상케 한다. 왼쪽 성모동산은 꽃천국이다.
1929년에 지은 성당으로 벽돌과 목재를 사용한 연와조 구조로 종탑이 쌍탑인 것이 특징이다.
성당의 측면도 단순하면서도 절제된 미가 돋보인다.. 충남도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내부는 둥군 로마네스크의 천장을 가지고 있고 열주가 길게 이어져 빨려들어가는 느낌을 받는다.
내부에 김대건 신부님을 비롯한 샤스탕, 엥베르, 모방신부님의 유해를 볼 수 있다. 제단 옆에 작은 구멍이 하나 보이는데 고백성사실이다.
봉헌함. 성당이 비스듬한 것이 특징
성당 뒷편의 순교자 묘지에는 이 성당을 세운 백문필 페렝신부의 묘가 있다. 6.25때 납치되었고 그 옆은 사목회장으로 신부님만 보낼 수 없다고 자신도 함께 데려가라고 한 윤복수 레이몬드와 송상원 사도요한의 묘다. 1866년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자 그 곁을 지키며 함께 순교한 확석두 루가와 맥을 같이 한다. 유해는 없고 유물만 묻혀 있다.
프랑스 신부가 평야가 많은 이곳에 자리를 잡고 고국에서 가져온 돈으로 땅을 구입해 농민들에게 나눠주면서 선교를 했다고 한다. 그 은공을 잊지 못한 신자들은 아직고 헌금을 돈으로 내지 않고 쌀로 바친다고 한다. 그 쌀은 혜화동 가톨릭기신학교 학생들의 양식으로 사용된다고 한다. 지금 성당 땅은 없다고 한다. 가난하고 헐벗은 농민에게 모두 불하를 해줬기 때문이다. 진정 나누는 삶은 이런 것이 아닐까
조선의 카타콤바 신리성지
합덕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평원에 신리성지가 자리하고 있다. 내포지역 포교의 거점이며 신앙의 요람지다. 조선 최대의 교우촌으로 1866년 이전엔 무려 400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작은 밀알을 통해 들어온 천주교는 밀물처럼 전파된다. 마을이 통채고 일가가 한꺼번에 신자로 입교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합덕 신리에 터를 잡은 손자성 토마스 성인을 어찌 잊으리 사방 30리가 모두 손자성 토마스 성인의 땅이었다. 당대 최고의 부자였고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천주교를 접했고 그의 사랑채를 주교님께 내주었다. 주교를 만나기 위해 젓먹이 딸린 여인, 노인, 황량한 황무지를 따라 100리길을 걸어온 신자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이렇게 뜨거운 신앙촌이기에 한국의 카타콤바란 칭호를 가지고 있다. 그는 박해때 잡혀 공주 황새바위에서 순교하고 만다. 자신의 살을 입으로 뜯어내면서까지 천주사랑의 증거를 보였던 것이다.
조선 제5대 교구장 다블뤼 주교는 이곳에서 한국천주교회사를 위한 비망기와 한글교리서, 한불사전을 집필하게 된다. 이분의 기록이 없었다면 우린 거룩한 103위 성인을 모실 없을 것이다. 밤에는 교우들에세 성사를 주고 낮에는 집필활동 주교관 내부에는 천주강생이라고 쓰여진 대들보를 볼 수 있다. 1866년 병인박해는 이곳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이 마을에서 기록으로 찾을 수 있는 순교자는 41명에 이를 정도로 순교 행렬에 동참했다고 한다. 근처 공동묘지를 파보았더니 32기의 목 없는 시신이 발견되었고 묵주와 십자고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박해가 지나간 신리성지는 아무도 살지 않는 황무지로 바뀌었고 근처에 천주교 신자들은 단 한사람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한때 이곳의 주인이었던 손씨 일가들은 뿔뿔히 흩어졌고 타지에서 신앙을 이어간 사람도 있고 절대로 천주교를 믿지 말라고 유언처럼 간직한 후손도 있다. 오늘날 신리마을 역시 천주교 신자가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당시 얼마나 참혹했으면 2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트라우마로 자리잡았는지 모른다. 내부 주교관은 다블뤼 주교가 사용했던 용품이 보존되어 있다. 천사의 날개라고 불리우는 상복이 눈에 띄는데 선교할때 입고 다녔다고 한다. 당시 관습으로 상중에 있는 사람에게는 말을 시키지 않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큰 키를 가리느라 갓을 푹 눌렀을 주교님의 얼굴을 상상해본다.
성당은 측면 환조가 볼만한데 조각가 김종필님의 작품이다.
왼쪽은 무명순교자들의 무덤앞에서 오메트르 신부와 황석두 성인이 기도하는 모습. 오른쪽은 성다블뤼 주교와 성 위엥신부, 손자선 성인이 기도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신리성지의 신부님. 작업복에 장갑을 끼고 있어 신부님인 줄 몰랐다. 조근조근 하면서도 차분한 음성으로 신리성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대학을 다니며 교회사를 연구하고 계신다고 한다. 또다른 김대건 신부님을 뵙게 되어 얼마나 가슴 떨렸는지 모른다.
한국천주교회의 못자리, 여사울
한국천주교회의 못자리는 이촌창으로부터 시작된다. 내포의 사도 이존창이 없었다면 김대건신부가 나올 수 있을까.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는 이존창으로부터 천주교를 믿게 되었다. 김대건 신부의 할머니는 그의 조카딸이고 두 번째 신부인 최영업 신보는 그의 생질의 손자였으니 말이다. 그는 중국에서 신부영입을 위해 윤유일, 지황 등에게 여비를 주어 북경을 찾게 하여 마침내 주문모신부를 맞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그를 도와 사목활동을 하다가 순교하고 만다.
한국천주교회가 처음 들어왔을 때, 초창기 권일신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고향으로 내려가 전교를 시작해 충청도 지방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게 되었다. 그는 농부, 노동자, 소금쟁이 등 힘없는 서민들에게 집중 선교하면서노비문서를 불태우고 자신의 재물을 이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신분제도가 엄격한 당시를 생각하면 가히 혁명적인 사고였다. 그러나 한편 기득권층에서 볼 때 이 신앙이 퍼져나가면 큰일이 날 일이다. 선대부터 누려온 권력과 재산까지 포기해야하니 도저히 용납할수 없는 일이다. 결국 이존창은 사학을 전파한 괴수라는 죄목으로 해미감영에 수감시킨다. 심한 고문과 회유에 그도 어쩔수 없나보다 결국 배교를 선언하고 만다. 얼마나 괴로웠을까? 난 그를 이해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배교하면서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십자가가 눈에 아른거리고 진리가 살아 움직이는데 목숨을 부지하려고 베드로처럼 거짓말을 했으니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는가? 죄를 뉘우치고 그는 전보다 더 열심히 선교활동을 전개한다. 그러나 조선 가톨릭의 수장이 배교했다는 부담감은 늘 그를 괴롭혔다.
'배교의 죄를 용서받는 길은 오직 피의 순교뿐입니다.' 라고 기도를 바쳤다. 그의 염원대로 1801년 4월 10일 이곳 황새바위에서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순교의 칼을 받게 된다
그는 허망하게 죽었지만 복음의 씨앗 하나 남겼습니다. 어찌보면 죽은 것이 아니라 예수처럼 다시 살아난 것이다. 훗날 배출되는 최초의 사제 김대건 과 최양업 신부님은 모두 그의 혈연적 후손이기 때문이다. 아멘.
또 하나 아름다운 것은 가성직제도다. 교리를 살펴보니 카톨릭 신자라면 성체를 모셔야 하는데 스스로 독학을 했으니 신부가 없던 것이다. 명례방에서 신부가 된 분이 바로 이존창이다. 소꿉장난한 아이처럼 순박한 모습이 그려진다.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예쁜 성당이 있을까/ 바로 여사울 성당이다. 유럽의 어느 도시의 수도원처럼 보인다. 성당 앞은 이존창의 집터다로 그의 집은 늘 사람으로 북적거렸지만 지금은 터만 남았다. 한동안 이존차의 집터를 찾지 못했다. 1984년 생가로 추정하는 곳을 발굴했더니 중국에서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고상, 성모상, 등이 나오면서 생가가 되었다.
청양, 홍주, 보령등지에서 서울로 가려면 바로 이곳에서 배를 타고 아산만을 건너야 했다. 예로부터 한양의 부호들이 땅이 넓고 살기 좋은 이곳에 별장을 짓고 살았는데 기와집이 하도 많아 서울과 같다고 해서 '如서울'이 여사울이란 지명이 되었다.
뒷편 십자가의 길은 온통 꽃천국
그가 결코 죽은 것이 아니었다.
합덕 초원식당의 추어탕
하도 더위에 시달려 몸보신을 하려고 합덕 읍내를 둘러보다가 손님이 많은 것 같아 들어간 집. 주메노는 콩국수(6천원)와 추어탕(7천원)이다. 특히 진한 국물의 추어탕이 일품인데 들깨가루와 깻잎을 넣어 비린내가 나지 않는 것이 특징인데 탕안에 손칼국수가 들어있는 것이 특징. 추어탕에 간이 밴 칼국수를 건져 먹고 밥을 말아 먹는데 푸짐하다. 딸려 나온 반찬도 깔끔하다. 041-362-9992 충남 당신지 합덕읍 운산리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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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대장님~ 당진의 신앙성지 순례길 잘 보았습니다. 죽음을 마다않고 신앙을 지킨 순교에 경의를 표하고 싶어집니다. 좋은 사진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