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동읍 전통가옥 구조 ‘멀빵’에 얽힌 사연들
(작성중 : 전통가옥 시리즈 1회)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 전통가옥에는 ‘멀빵(멀방)’이라는 방이 있다. 그 어원은 다르지만, 표준어(標準語)로 ‘머릿방’이라는 방이다. 그리고 ‘머릿방’이란 주로 ‘안방’의 옆, 또는 안방에서 대청을 지나 끝에 있는 방을 말한다.
“야야, 니 앤 바뿌머 ‘멀빠(멀방)에 가가 골미 바구리 일로 쫌 가 오나라.”, “야야, 니 ‘멀빵’ 쫌 치아라. 누럭 띠우구로.”라는 용례(用例)들이 있다.
“얘야, 너 안 바쁘면 ‘머릿방’에 가서 떡가래 바구니 이리 좀 가져 오너라.”, “얘야, 너 ‘머릿방’ 좀 치워라. 누룩 띠우게.”라는 말이다.
멀빵(멀방 ; 머릿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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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경우는 맨 좌측 방이 '멀방'이다)
‘머릿방’이란 지방에 따라 다양(多樣)한 기준에 의해 지칭되고 있다. 지방(地方)에 따라 안방 뒤에 달린 방을 말하기도 하고, ‘삼간(三間)집’일 경우 제일 좌측의 부엌에서 ‘큰방(안방)’을 지나 그 큰방 옆에 붙어있는 방을 ‘머릿방’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4간(四間)집’일 때는 좌측부터 부엌, 큰방(안방), 대청, ‘끝방’ 순으로 세 개의 방을 두기도 하는데, 이 경우 ‘끝방’을 ‘머릿방’이라고 한다.
머릿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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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떤 지방에서는 ‘머릿방’의 요건을 보다 엄격(嚴格)하게 규정하여 ‘일자(一字)집’이든, ‘ㄱ’자 집이든 부엌을 포함하여 반드시 4간 집이어야 한다는 점을 전제(前提)로 한다.
부엌과 부엌 다음의 안방(큰방)은 반드시 있어야 하고, 안방 옆에 대청마루가 있을 때 그 마루 옆에 붙은 방이라야 ‘머릿방’이 된다는 것이다.
‘일자집’의 ‘머릿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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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우측방이 ‘머릿방(멀방)’이다)
그러나 필자의 판단으로는 ‘머릿방’ 또는 ‘멀방’이란 방의 위치(位置)를 기준으로 정해진 이름이라기보다는 주로 그 방을 사용하던 사람이 누군가에 따라 지칭된 것으로 추정(推定)하고 있다.
예로부터 ‘머릿방’은 주로 ‘며느리방’으로 사용하거나 딸의 ‘신행방(新行房)’으로 사용했다. 그래서 당시 ‘머릿방’에 기거(寄居)하던 며느리를 ‘머릿방 아씨’라고도 불렀다.
그리고 딸의 신행(新行)은 며칠에 불과했고, 며느리는 오랜 세월 동안 기거(寄居)했기 때문에 ‘머릿방’은 결국 ‘며느리의 방’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머릿방’은 서울말이고, ‘멀방’은 경상도사투리 ‘메느리방’ 또는 ‘메늘방’이 변이와 축약(縮約)을 거듭하여 만들어진 말이라고 볼 수 있다.
메느리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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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없고, ‘작은 사랑방’이 별도로 없을 때는 큰아들이 장가를 들 때까지 기거(寄居)하기도 하고, 아들이 없거나 아주 어릴 때는 딸이 시집갈 때까지 기거하기도 한다.
또 일부지방(一部地方)에서는 이를 ‘안방에서 대청(大廳)을 건너 맞은편에 있는 방’이라 하여 ‘건넌방’이고도 하고, 건너편에 있거나 마루나 토방(土房 : 방에 들어가는 문 앞에다 약간 높고 편평하게 다져 놓은 흙바닥)을 사이에 두고 따로 된 방이라 하여 ‘건넛방’이라고도 한다.
건넌방(오른쪽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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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떤 지방(地方)에서는 안방은 ‘큰방’ 또는 ‘웃방’이라고 부르고, ‘건넌방’은 ‘상방(上房)’, ‘모방’, ‘아랫방’이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대청에 해당하는 공간(空間)은 ‘마룻방’ 또는 ‘마리’라 하고, 부엌은 ‘정지’라 부르는 곳도 있다.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에서는 부엌을 ‘정지’, ‘정지간’ 또는 ‘부직’이라고 한다.
정지간(정지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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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한 가지 유의(留意)할 것은 위에서 말한 ‘머릿방’으로서의 ‘건넌방’을 ‘건너방’, ‘건넛방’, ‘건널방’으로 부르는 것은 모두 틀린 이름이라는 점이다.
‘건넛방’은 ‘건너편에 있는 방’을 가리키는 것으로 부엌 건넛방, 사랑방(舍廊房) 건넛방, 곳간 건넛방과 같이 아무 장소든 그 곳을 기준(基準)으로 해서 ‘건넛방’이 될 수 있으며, 한 집에서 어떤 방도 어느 방이나 장소의 ‘건넛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ㄱ’자 집의 머릿방
(맨 좌측 방이 머릿방(건넌방)이다)
다만, 아래에서 말하는 ‘건넌방’은 방의 위치(位置)를 기준으로 한다는 점에서 그렇지 않다고 볼 수 있다. ‘건넌방’과 ‘건넛방’은 둘 다 건너편의 방을 의미하기는 하나, 이 둘은 의미가 약간 달라 쓰임에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一般的)으로 건너에 있는 맞은편 방을 가리킬 때 ‘건넛방’이라 한다. 그러나 ‘건넌방’은 ‘건너편에 있는 방’이란 뜻을 가지고는 있으나, ‘안방에서 대청을 건너 맞은편에 있는 방’을 가리키는 말로 ‘건넛방’보다 좀 더 특수(特殊)한 의미로 사용된다.
서민가정 머릿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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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건넌방’은 한옥(韓屋)과 같이 대청마루가 있는 집에서만 가능한 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에서는 대청이 없는 3간이든, 대청이 있는 4간이든, 일자집이든, ‘ㄱ’자 집이든 부엌에서부터 제일 ‘끝방’을 ‘멀방(멀빵)’으로 지칭했었다.
그리고 이 기준은 대청(大廳)이 있어야 한다는 기준(基準)을 제외하면 서울과 중부지방(中部地方)도 마찬가지다.
서울지방 머릿방(건넌방)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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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넌방’은 옛 소설(小說)에 자주 등장하기도 하는데, 나도향의 ‘벙어리 삼룡이’에서는 “그는 도둑놈처럼 조심스럽게 바로 ‘건넌방’ 뒤 미닫이 앞 담에 서서 주저주저하더니 담을 넘었다”는 구절(句節)이 있다.
그리고 염상섭의 ‘동서(同壻)’에서는 “남편은 들이닥치는 길로 한마디 하고는 ‘건넌방’으로 들어간다”와 같이 쓰이기도 했다.
중부지방 머릿방(건넌방)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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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시골엔 대청마루에 앉아 마당에서 먹이를 쪼는 병아리 떼를 볼 수 있는 한옥(韓屋)이 많았다. 그러나 요즈음은 칸칸이 가로막힌 방으로 구성(構成)된 아파트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건넌방’이 없어지고 ‘건넛방’만 있는 세상이 되었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한옥(韓屋)은 요즘 아파트와는 그 구조(構造)에서부터 다르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마당과 어미닭과 병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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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아파트에서는 어느 방을 ‘건넌방’이라고 해야 할지 명확(明確)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결국 지금의 가옥(家屋)에서는 ‘머릿방(멀방)’이 사라지고 없어진 것이다.
도시(都市)보다 농촌인구가 많았던 시절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안방’과 ‘건넌방’은 특별한 추억(追憶) 거리를 간직한 곳이다. ‘안방’의 경우 식구(食口)들이 단란하게 모여 이야기도 나누고 식사를 하며, 정이 들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건넌방
또 ‘건넌방’에는 대개의 경우 높이가 낮아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되는 자그마한 방문이 달려 있었는데, 자칫하면 이 방문에 머리를 박아 통증(痛症)으로 안절부절 못하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건넌방’ 앞에는 툇마루가 달려 마당으로 드나들게 되어 있었고, 툇마루 아래에는 아궁이가 있어 추운 겨울에 방을 데우기 위해 군불을 때고, 아궁이에 건 가마솥에 쇠죽을 끓이거나 물을 데워 쓰기도 했었다.
건넌방 문
앞서 말한 대로 ‘머릿방’, 즉 ‘건넌방’은 ‘며느리의 방’이라고 할 수 있다. 향우님들께서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옛적 우리들의 한옥(韓屋)은 기와집이든 초가삼간(草家三間)이든 식구들이 태어나서 자라면서 나이에 따라 생활하고 사용(使用)하는 방이 달랐다.
남자의 경우는 ‘안방’이나 ‘건넌방’에서 태어나서 ‘건넌방’에서 소년시절(少年時節)을 보내며, 자라서 결혼을 하면 아내와 그 ‘건넌방’에서 살았다.
머릿방
따라서 ‘안방’이 주인마님의 방이라면, ‘건넌방’은 표준어로 아들의 아내인 ‘며느리의 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며느리방’은 경상도에서 ‘메느리방’이라고 했고, 앞서 소개한 대로 세월이 흐르면서 ‘메늘방’으로, ‘메늘방’에서 다시 ‘멀방’으로 축약(縮約)된 것으로 본다.
말은 맞는데 표현력(表現力)이 부족해서인지 필자가 써 놓고도 필자 자신도 무슨 말인지 헷갈리기만 한다. 혹시 필자와 같이 헷갈리시는 회원(會員)님이 계신다면, 헷갈리게 해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머릿방의 주인, 그 시절 며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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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적 지체 높은 양반집의 남자는 어른이 되면 ‘작은 사랑(舍廊)’에 거처(居處)하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집안의 가장(家長)이 되어 ‘큰 사랑방’을 차지한다.
대신 여자들은 ‘안방’이나 ‘건넌방’에서 태어나 거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자라서 시집을 가면 정든 집을 떠나 다시 시댁(媤宅)의 ‘건넌방’에서 살게 된다.
머릿방
그리고 여자들은 세월이 흘러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거나 연세(年歲)가 많아지면, 그제야 비로소 그 집의 ‘안방’으로 옮겨 가게 된다.
그리고 이때부터 며느리는 ‘곳간’이나 ‘도장(道藏)’의 열쇠가 달린 열쇠꾸러미를 넘겨받아 집안의 안살림을 관리하는 권리(權利)를 가지는 안주인, 즉 ‘안방마님’이 된다.
부잣집 사랑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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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그 당시 ‘안방’을 차지한다는 것은 그 집안의 실질적(實質的)인 안주인이 된다는 뜻이다. 안주인은 그 후 나이가 많아지면 며느리에게 ‘안방’을 물려주고, 다시 ‘건넌방’으로 거처를 옮긴다.
제주도(濟州道)에서는 아들 내외가 ‘안거리(안채)’를 차지하고 부모가 안채에서 물러나 ‘밖거리(바깥채)’로 물러나는 것을 ‘고팡물림’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옛적 우리들의 한옥(韓屋)은 한 사람이 자기의 공간(空間)을 평생 동안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나이에 따라 여러 사람이 잠시 머물다 가는 공간으로 사용했었다.
머릿방(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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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좌측방이 머릿방(멀방)이다)
때문에 안주인이 쓰는 ‘안방’과 며느리가 쓰는 ‘건넌방’은 그 규모나 짜임새에 있어 서로 다른 점이 있었다. ‘안방’은 ‘건넌방’에 비해 훨씬 크고, 안주인의 권위(權威)에 알맞도록 가구가 갖추어지고 보료가 깔려 있다. 그리고 안방에서는 집안 살림이 보관(保管)된 ‘다락’과 부엌, 그리고 ‘곳간’으로 바로 통하게 된다.
하지만 ‘건넌방’은 크기도 작고, 윗목에 자그마한 장롱(欌籠)이 놓이고 그 위에 ‘실함’과 ‘반짓고리’가 놓일 정도다. 그리고 ‘건넌방’의 대청 쪽으로는 키가 작은 외짝 문이 달리고, 앞쪽으로 미닫이창을 달고 그 앞에 좁은 툇마루가 달릴 정도다.
머릿방
‘건넌방’은 시집간 딸이 친정(親庭)에 와서 아이를 낳는 곳이기도 하다. 물론 이 경우는 ‘건넌방’이 비어 있거나, 아들이 없거나 아들이 어려 며느리를 보지 않는 경우 등에 해당한다.
옛적 우리들의 선대(先代)들은 ‘머릿방’을 금남(禁男)의 방으로 관리하기도 했었다. ‘며느리의 방’이었기 때문이다.
머릿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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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우는 좌측 끝 장독대 앞방이 '머릿방(멀방)'이 된다)
며느리의 방이라면 당연히 며느리의 남편, 즉 아들이 같이 기거(寄居)하는데, 어떻게 금남의 집이 될 수 있느냐고 할 수 있으나, 무지렁이들의 경우는 그럴 수 있었어도 양반가(兩班家)의 자제들은 과거(科擧)나 향시(鄕試)에 응시하는 수험준비와 태생적으로 약질(弱質)인 건강을 지켜주기 위해 결혼초기부터 아예 각방을 쓰게 하곤 했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당시의 선대들은 아들내외가 가끔씩 합방(合房)을 할 수 있는 길을 터놓기도 했었다. 지금도 그런 경향이 있지만, 당시의 경우 한 가정을 대대로 이어가는 유일(唯一)한 수단은 자식을 낳고 길러 핏줄을 이어가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머릿방
그리고 아무리 체면(體面)을 중요시 하던 조선시대에도 이런 근본적(根本的)인 문제는 결코 소홀히 다룰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조상에 대해 제사(祭祀)를 중단 없이 계속 받드는 문제와 가문(家門)의 혈통을 이어가는 데 있어 가장 필요한 일은 자식을 낳아 기르는 일이다.
머릿방의 주인, 그 시절 며느리
때문에 장성(長成)하여 결혼한 아들의 학업(學業)과 건강을 위해서 부모는 젊고 어여쁜 며느리를 자신의 아들로부터 적절히 떼어 놓으면서도 외부 사람들에게는 드러나지 않게 은밀(隱密)히 자손을 보아야 하는 이중적(二重的)인 문제를 해결할 통로(通路)를 집안 어느 곳엔가 마련했어야만 했다.
그곳이 바로 아들이 기거(寄居)하는 사랑채의 ‘작은 사랑방’과 며느리가 기거하는 ‘머릿방’의 뒤쪽에 작은 외여닫이문을 설치하는 것이었다.
머릿방
공부에 매달리던 아들이 춘정(春情)을 이길 길이 없으면, 살그머니 자기가 기거하는 ‘작은 사랑방’의 뒷문을 나와 안채의 맨 끝에 있는 ‘머릿방’의 뒷문으로 스며들어 열기(熱氣)를 식히도록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적(絶對的) 필요성과 원초적(原初的)이며 중요한 일을 은밀하게 이루어 주는 그 시절 어른들의 지혜(知慧)와는 상관없이 가끔은 해괴(駭怪)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작은 사랑방의 뒷문과 반질반질한 통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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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방 아씨’를 죽도록 연모(戀慕)하던 머슴이 죽기를 각오하고 ‘머릿방’의 뒷문을 두드렸는데, 남편인 줄 알고 잘못 문을 열어준 ‘머릿방아씨’가 머슴의 아기를 잉태(孕胎)하는 경우 같은 것이었다. 사랑방의 아들과 ‘머릿방’의 며느리를 위해 뒷문을 만든 것이 화근(禍根)이 된 것이다.
1997년 TV드라마로 제작되어 안방극장을 장식(裝飾)했던 드라마 ‘미망’에서 가난한 소작인(小作人)의 아들로 태어난 ‘전처만’은 어마어마한 거상(巨商)이 되어 ‘동해랑’이라는 큰 기와집에서 자식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머릿방’의 뒷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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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며느리인 ‘머릿방아씨’는 머릿방 뒷문으로 잠입(潛入)한 친정집 머슴 '마당쇠'의 아이를 낳아 결국은 집을 뛰쳐나가는 대목이 있다.
어쨌든 ‘머릿방’이라고도 하고, 또는 ‘건넌방’과 ‘멀방’이라고도 하던 이 방은 결국 ‘며느리의 방’이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드라마 '미망'에서의 머릿방 아씨
그리고 ‘머릿방’ 또는 ‘멀방’이라는 용어(用語)도 가옥의 머리 쪽에 있는 방이라서 보다는 서울 등지에서는 ‘며느리의 방’이 ‘며느릿방’, ‘며릿방’ 등의 단계를 거쳐 ‘머릿방’으로 진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 말이 낙향하는 선비들과 벼슬아치들에 의해 외동읍까지 전해졌고, 외동읍의 경우는 전술한 바와 같이 ‘며느리방’의 사투리인 ‘메느리방’이 ‘메늘방’과 ‘메얼방’을 거쳐 ‘멀방’으로 변이(變異)되었다.
분례누나와의 ‘이거리 저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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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어린 시절부터 무작정 상경을 할 때까지 ‘멀방’에서 살았는데, 갖가지 사연들이 쌓인 방이기도 했었다. 함께 숙제(宿題)를 한답시고 윗집 ‘분례’누나와 어울려 수시로 ‘이거리 저거리’(다리짚기 놀이)를 하기도 했었다.
어떤 때는 서로가 어색한 시선(視線)으로 무엇인가를 찾고 더듬다가 할머니에게 들켜 한동안 금족령에다 구설수(口舌數)에 오르내렸던 일이 아련히 떠오르다 사라진다. 63년 전의 일이었다.
위에서 말하는 ‘이거리 저거리’라는 놀이 ‘다리짚기 놀이’라고 하는데, 지방에 따라서는 ‘다리 셈 놀이’, ‘다리 세기 놀이’, ‘다리 뽑기 놀이’, ‘다리 겹쳐 빼기 놀이’등 다양한 이름으로 전해 내려오는 놀이다.
'이거리 저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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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적 외동읍(外東邑)의 경우 이 놀이는 둘 이상의 사람이 엇갈리게 다리를 펴고 앉아서 제일 오른쪽 또는 제일 왼쪽다리로부터 하나씩 짚어 나가면서 “이거리 저거리 각거리, 정사맹건 도맹건 스무리바꾸 도빠꾸, 연지타가양 워리, 장두칼 침 포”라는 민요를 합창(合唱)한다.
마지막 구절(句節)이 끝나는 시점(時點)에 짚인 다리의 주인공을 뽑아서 이야기나 노래 따위를 시키는 등 벌칙(罰則)을 가하는 놀이였다.
엉성한 '이거리 저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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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칫 부주의하면 발끝에 상대방의 '거시기'가 닿을까 봐
발들을 멀찌감치 빼고 엉성하게 앉아 있는 모습들이다)
문제는 동성(同性)끼리 이 놀이를 하면, 별문제가 없었는데, 남녀가 같이 하면, 그것도 단둘이서 이 놀이를 하면 묘한 분위기(雰圍氣)에 빠져들곤 하여 몇 판이 지나면 서로의 얼굴이 홍당무가 되기도 한다.
키가 큰 누나와 사내아이의 경우는 누나의 발끝에 사내아이의 ‘거시기’가 닿고, 키가 큰 오빠가 키 작은 누이와 같이 하면 역시 오빠의 발끝에 누이의 ‘거시기’가 닿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냥 그대로 놀이만 하면 문제가 없는데, 피차 자꾸만 발끝을 꼬물거려 서로의 ‘거시기’를 화내게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남녀 아이들 여러 명이 할 때도 짓궂은 '종내기'나 번지럽은 '가시나'들은 의례 그러곤 했었다.
필자의 고향마을 생가집 ‘멀방’과 ‘분례’누나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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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집 맨 우측방이 ‘멀방’인데, 담장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 오른쪽 집은 그 당시 ‘분례’누나집이고, 가운데 생울타리 중간에 싸리울로 막아놓은 ‘분례’누나의 비밀통로가 있었다. 그 시절 분례누나의 감나무는 버혀지고, 지금은 필자가 60여년 전 활성리 고모집에서 꺾어와서 꽂아 놓았던 '엉게나무' 가지가 자라 거목이 되어 있다.
생가집 앞 차량용 거울이 있는 사거리는 동쪽 (오른쪽)으로 감산사와 동산령, 서쪽 (왼쪽)으로는 7번 국도와 동해남부선, 남쪽 (앞쪽)으로는 원성왕릉과 외동중학교, 북쪽(골목 쪽)으로는 신계리와 불국사로 연결된다. 황사로 희미하지만 집 뒤에 보이는 산이 토함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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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방’ 얘기를 시작하기는 했는데, 밑천이 짧아서인지 벌써 바닥이 나고 말았다. 그렇다고 얘기를 시작하다가 그만 둘 수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위에서 말한 필자와 분례누나와의 ‘멀방 사건’을 간략(簡略)하게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이 얘기는 어느 파일에서 소개드린 것인데, 여기에서는 부록(附錄)으로 다시 소개드린다.
머릿방
이야기는 1953년 10월 하순 경상북도 경주군 외동면(外東面) 괘릉리(掛陵里) 884번지 필자의 생가(生家)에서 시작된다.
필자는 고향집의 주소 번지(番地)를 반세기를 지난 지금까지 결코 잊지 않는다. 벌써 무슨 뜻인지 아시는 향우님들이 계시겠지만, ‘도리짖구땡’을 할 때 짖는 끗발 중 가장 멋있게 짖는 숫자조합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머릿방
지금은 누가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시의 필자 생가는 아래 위채가 모두 초가삼간(草家三間)이었다. 그리고 그 시절 서민가정 초등학생들에게는 자신의 공부방이란 건 아예 있지도 않았지만, 필자의 경우는 고방(庫房)으로 사용하기도 하는 ‘멀방(건넛방)’을 봄, 가을과 하절기(夏節期)에 한해 공부방으로 사용하기도 했었다.
겨울엔 온갖 곡식(穀食)들로 가득 채웠기 때문에 거처(居處)할 수가 없었다. 그날도 필자는 텅빈집을 보면서 안채 끝 ‘멀방’에서 밀린 숙제(宿題)를 하고 있었다.
머릿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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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머하노?, 숙제하나?”
“보머 알꺼 아이가.”
“내가 좀 갈채 주까.”
“아이다. 내도 다 안다. 잘 안빈다. 쫌 비깨두가.”
초등학교(初等學校) 한 해 선배이자 윗집에 사는 ‘분례누나’가 필자와 자기 집 사이에 만들어 놓은 싸리나무 울타리를 뚫고 건너와 어둑어둑해진 ‘멀방’에서 숙제(宿題)하는 필자에게 다가와 귀찮게 구는 장면이다.
머릿방
분례누나네 아랫채와 필자네 채마밭 사이에는 엉성한 대나무 생울타리가 있었는데, 시도 때도 없이 분례누나네 닭이나 병아리들이 울타리 사이로 넘어와 상추든 정구지든 모조리 뜯어먹거나 씨를 뿌린 이랑을 파헤치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싸리를 엮어 보조울타리를 만들어 두셨다.
싸리울타리를 만든 후부터 닭이나 병아리는 넘어오지 않아 좋았는데, 대신 분례누나가 시도 때도 없이 넘어와서 필자에게 접근(?)하곤 해서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머릿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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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례누나는 영지초등학교(影池初等學校) 6학년 졸업반이고, 필자는 5학년 2학기였을 때였다. 그 날도 할머니께서는 이웃동네로 ‘마실’을 가셨고, 부모님은 동생들을 모두 데리고 건너 마을 친척집 잔치에 가셔서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집은 비어있었다.
“니거 할매하고, 니거 아부지하고, 니검마 다 어데 갔노?.”
“그거너 와 묻노?”
“기양 물어밨다 아이가. 말 안해도 된다.”
“ ------------- ”
“갈채 주머 졸낀데.”
“할매너 건네 마실에 놀러가고, 아부지캉 엄마캉 다 잔체집에 갔다. 와!.”
“언제 올끼고?”
“그거로 내가 어예 아노.”
방안은 점점 어두워가고 있었다. 글자가 거의 보이지도 않았다. 방안이 컴컴해 지는데도 분례누나는 일어날 생각을 않는다.
머릿방의 주인, 과부 며느리
(독수공방에 힘이 겨워 대들보에 목을 걸기 직전이다)
거의 매일 같이 싸리울타리를 넘어와 필자를 괴롭혔지만(실제로 괴로웠는지는 잘 모른다), 잠깐 동안 말을 시키다가 그때마다 필자가 퉁명스럽게 쏘아붙이면 넘어온 싸리울을 다시 넘어가곤 했었는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늑장을 부리고 있다.
집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確認)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잡기장(雜記帳)을 거칠게 덮어 방 윗목에 던지면서 분례누나를 향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니 집에 안가고 뭐하노. 퍼뜩 가거라.”
“가라 안캐도 갈끼다. 내말 쪼깨만 더 드러바라.”
“무슨 소리고? 퍼뜩 말해바라. 떨기는 와 떠노?”
“니 ~ 내로 ~ 어예 ~ 생각하노?”
“그기 무슨 소리고?”
그때였다.
“멀빠에 누고?”
문이 홱 열렸다. 마실가신 할머니께서 돌아오신 것이다. 분례누나는 얼른 옆문으로 도망가려고 일어섰지만, 간발(間髮)의 차이로 발각되고 말았다.
“분례누부야 하고 숙제 했심더.”
“책도, 자끼장도 안비고, 깜깜한 바에 둘이서 문 닫고 앉아가주고, 무신 숙제고? ‘남녀 칠세 부동시기’라 캤는데 얄궂데”.
머릿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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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해도 춥지도 않은 날 왜 문을 닫아놓고 있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울타리 너머로 다니는 행인(行人)들이 들여다 볼까봐 닫았던 것으로 추측이 될 뿐이다. 당시의 울타리는 엉성하게 만들어 울타리 사이로 안방까지 다 보일 때였기 때문이다.
“그란데 분례 니너 다 큰기 머하는 짓이고? 이리 나오나라 니검마 자테 가자.”
“할매요, 아무 꺼도 안해심더. 울엄마 자테너 말하지 마이소. 말하머 나너 죽심니더.”
굳이 따지면 아무 것도 잘못한 게 없었는데, 분례누나는 독기(毒氣)를 품고 힐책(詰責)하고 있는 필자의 할머니에게 무슨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지레 겁을 먹고 싹싹 빌고 있었다.
머릿방의 주인, 지금의 며느리
(드라마 '미망'의 머릿방 아씨 홍리나)
눈물까지 흘리면서 울상이 되어 있었다. 난생 처음 연하의 머슴애에게 큰 맘 먹고 무슨 고백(告白) 비슷한 것을 하려다가 엉뚱한 사람에게 들통이 난 터라 안절부절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았다. 필자가 끼어들어야 할 처지였다.
“할매요, 그라지 마소. 분례누부 엄마자테 일이머, 지도 분례누부 오빠자테 맞아 죽심니더. 기양 나두이소.”
할머님의 노기(怒氣)가 금방 식어들었다. 손자(孫子)가 곤란해진다고 하니 귀가 번쩍하신 것이다. 분례누나의 오빠는 당시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 3학년에 재학하고 있었다.
훤칠한 키에 언제나 근엄(謹嚴)한 표정을 하고 있어서 필자들은 언제나 그의 앞에서는 얼어붙어 있었다.
“그라머 이분에 한 분만 눈깜아 주꾸마. 후재 또 이라머 참말로 일일끼다. 알았제, 퍼뜩 가거라. 대갈에 피도 안마린 지지바가 몬하는 짓이 없데.”
분례누나 말대로 그야말로 아무 일도 없었는데, 할머니께서는 끝내 우리 사이에 진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으로 단정(斷定)하시는 것 같았다.
분례누나는 심정적(心情的)으로 ‘무슨 일’을 저지른 것 같기는 했지만, 숙맥인 필자는 털끝만큼도 ‘무슨 일’을 생각해 보지도 않았었다.
굳이 생각했다면 저돌적(猪突的)이고 괜한 짓으로 필자에게 낭패(狼狽)를 가져다 준 분례누나를 미워했던 것뿐이었다.
머릿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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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울상이 된 분례누나의 팔을 잡고 그녀가 넘어온 싸리 울타리 개구멍으로 데리고 가서 넘어가기 편리하게 새끼줄을 늘여주면서 조그맣게 속삭여 줬다. “내리 부터너 참말로 오지 말거래.”
‘싸리울’을 넘으려던 오른쪽 다리를 도로 내린 분례누나의 얼굴이 흙빛이 되어 원망(怨望)어린 눈초리로 필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른 무마작전(撫摩作戰)을 폈다.
“대신에 내가 니거 집으로 가꾸마. 알었제.”
눈물에 범벅이 된 분례누나가 하얗게 웃었다. 분례누나는 가무잡잡하게 살찐 가랑이를 고무줄 할 때처럼 높이 쳐들고 가볍게 싸리울을 넘어갔다. 누나는 삼베 치마 밑에 새까만 광목(廣木) ‘사리마다’를 입고 있었다.
머릿방
싸리울 너머에서 분례누나는 뒤돌아서서 다정(多情)한 목소리로 타이르듯 속삭였다. “내가 ‘홍시’ 모다노꾸마. 니캉내캉 묵으머 숙제하자. 참말로 기다리꾸마.”
분례누나 집에는 그 당시 우리 동네에서 제일 큰 감나무가 있었다. 재래종(在來種) 감나무로 고목(古木)이 되어 감은 조그맣고 떫어 별맛이 없었지만, ‘홍시(紅柿)’는 그런대로 맛이 있었다.
머릿방의 주인, 독수공방 며느리
6.25때는 서울에서 피난 온 동급생(同級生)들이 ‘홍시’를 따러 그 감나무에 올라갔다가 떨어져 중상(重傷)을 입기도 했다. 그 당시에는 피난(避難) 온 학생들이 영지초등학교에 편입하여 피난민(避難民) 동급생이 많았다.
분례누나는 그렇게 그 ‘싸리 울타리’를 넘어갔다. 1953년 10월 하순의 일이었으니 벌써 60년 전의 일이다. 이튿날 학교를 파하고 교문(校門)을 나서는데, ‘분례누나’가 다시 다짐을 한다.
“니 어제 말한 거 참말이제?”
“머 말이고?”
“우리 집에 숙제하로 온다카는 거.”
“집에 가보고.”
“내가 오널 새북에 ‘홍시’ 니개 좌났다. 꼭 오거래.”
집에 도착한 필자가 부뚜막에 걸터앉아 식은 보리밥덩이에 물을 말아 ‘분례누나’ 집 ‘싸리울타리’ 옆 채마밭에서 딴 시퍼런 풋고추를 된장에 찍어 점심을 먹고 있을 때였다.
“니 밥묵고 내캉 ‘건네밭’에 콩밭 쫌 매로 가자.”
어머니께서 하시는 말씀이었다.
“숙제가 마이 있는데.”
“숙제너 밤에 하머 안되나, 잔주꼬 가자.”
부은 얼굴로 점심을 때우고 추녀 밑에 걸어둔 호미를 내리면서 ‘멀방’ 옆 싸리울타리 쪽을 흘끔 살펴봤다. 분례누나가 물기가 조르르한 모습으로 양손에 ‘홍시’ 두개씩을 들고 흔들어 보인다.
언제 감았는지 단발머리 머리칼은 물기가 가득 머금었고, 저희 엄마 ‘참빗’으로 빗었는지 하얗게 ‘가리마’가 갈라져 있었다. 필자를 맞이할 단장(丹粧)을 한 셈이다. 빨리 넘어오라고 싸인을 해댔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못 본 척 돌아서서 호미를 들고 어머님을 따라 ‘건네밭’으로 향했다. 분례누나와 그녀가 양손에 들고 흔들던 ‘홍시’가 눈앞에 어른거려 풀포기가 잘 보이지도 않았다.
분례누나 감나무와 홍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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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에 감이 익어 홍시가 되어 있을 때지만, 재래종 감나무라
크기가 너무 적다. 그러나 이 감나무는 지금 버혀지고 없어졌다)
분례 누나한테 미안한 말이지만, 그날은 그녀보다 그녀의 ‘홍시’가 더 탐이 났던 것이 사실이다. 사위(四圍)가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밭을 맨 터라 집에 돌아와서 저녁밥을 먹자마자 숙제(宿題)도 그만두고 잠에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이튿날도 하학길에 ‘분례누나’의 심문(審問)과 애걸이 되풀이 되었다. 그러나 이날부터는 더 큰 문제(問題)가 생겼다. ‘멀방’ 옆 추녀 밑에 할머니께서 ‘짝지(지팡이)’를 옆에 세워두시고, 필자가 학교에서 귀가(歸家)하는 시간부터 ‘싸리울’을 지키고 계셨기 때문이다.
머릿방의 주인, 그 시절 며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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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기 힘든 독수공방으로 허탈해 하고 있다)
전날 필자가 어머니를 따라 콩밭 매러 갔을 때 ‘분례누나’가 얌전하게 그냥 있었으면 별일 없었을 텐데, 20~30분마다 한 번씩 나타나서 필자가 돌아왔는지를 확인(確認)하기 위해 싸리울 개구멍에서 우리 집과 필자의 ‘멀방’을 훔쳐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장면(場面)들이 집을 지키고 계시던 할머니에게 들켜버린 것이다. 분례누나가 할머니의 집중감시(集中監視)를 스스로 자초(自招)한 것이다.
찬송가 314장
개편 찬송가 509장
1. 기쁜 일이 있어 천국 종 치네
먼 데 죄인 돌아왔도다.
부친께서 친히 마중 나가서
잃은 자식 도로 찾았네.
2. 기쁜 일이 있어 천국 종 치네
회개한 자 화목하도다.
죄의 종된 자를 놓아 주시니
성령으로 거듭났도다.
3. 천국 종을 치고 잔치 베푸네
돌아온 자 참여하도다.
오늘 귀한 영혼 거듭났으니
기쁜 소식 전파하여라.
[후렴]
영광 영광 주께 돌리세
하늘 비파 소리 울리네
파도 소리 같은 찬양 소리를
천지진동하게 부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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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동읍 모화3리 250-1번지 소재 모화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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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부설 노인대학 졸업식 기념촬영 장면이다)
할머니는 필자의 ‘멀방’ 문 앞 축담 그늘에 아예 거적을 펴놓으시고, 좌정(坐定)하여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하셨다. 나중에 분례누나에게 들은 말이지만, 할머니는 이 찬송가(讚頌歌)를 필자와 어머니가 밭에서 돌아올 때까지 부르셨다고 했다.
이 찬송가 314장은 할머니께서 가장 즐겨 부르시는 찬송가이기도 했지만, 이때부터는 분례누나에게 보내는 경고방송용(警告放送用)으로 겸용되었다.
머릿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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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동읍 모화리(毛火里) 출신이신 할머니께서는 엄한 가정교육에다 기독교 신앙이라는 청교도적(淸敎徒的) 윤리규범으로 중무장(重武裝)을 하신 분이라 필자와 분례누나가 하는 ‘놀이’가 무슨 큰일이라도 낼 것만 같아 못내 불안(不安)하셨던 것 같았다.
말이 나온 김에 필자의 할머니 얘기를 조금 더 보탠다. 조선조(朝鮮朝) 철종(哲宗)대인 1873년 7월2일(수요일) 외동면(外東面) 모화리(毛火里)에서 필자의 ‘진외할아버지’이신 최(崔)자 정(廷)자 수(守)자의 따님으로 출생하신 할머니께서는 당시로서는 상상조차 힘든 기독교인(基督敎人)이셨다.
처녀 때는 외동읍 모화3리 250-1번지 소재 모화교회에 출석하셨고, 할아버님과 결혼하신 뒤에는 외동읍(外東邑) 말방리(末方里)에 소재하는 장산교회에 다니신 조금은 신식 할머니이기도 했었다.
100년전 건립된 장산교회
![](https://t1.daumcdn.net/cfile/cafe/0135944D51D0DEC20C)
그리고 할머님의 이러한 신앙역정(信仰歷程)은 필자의 부모님과 필자, 그리고 필자의 자식들이 그렇게 착실한 신앙심(信仰心)은 아니지만, 모두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을 이어가는 근원(根源)이 되었다.
필자는 지금도 할머님께서 지도해 주신 신앙생활(信仰生活)의 기본자세를 철저히 준수(遵守)하고 있다. 주일성수(主日聖守 ; 일요일날 교회에 가는 일)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지키고, 삼일(수요일)예배나 금요일 철야예배, 토요예배 등이 있는 날은 어떠한 개인활동도 삼가고 있다.
머릿방의 주인, 신식 며느리
때문에 우리 재경 외동향우회(外東鄕友會)나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 재경동창회 활동에는 거의 참가할 수 없는 형편이 되고 있다. 거의 모든 활동이 필자의 교회활동 일정과 중복되기 때문이다. 향우회와 동창회의 양해를 부탁드린다.
어쨌든 그 당시 할머니의 집요한 방해공작(妨害工作) 때문에 분례누나도 필자도 그때부터 6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그 싸리 울타리를 한 번도 넘어오고 넘어가보지 못했다.
머릿방
분례누나는 그 싸리울을 넘어간 그 다음 해 초에 무슨 이유에선지 자기 집에서 윗마을 쪽으로 이사를 갔고, 그로부터 1년 후 필자는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에 입학하여 학교 다니기에 몰두하느라 분례누나와의 약속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게다가 그로부터 6년 후 필자는 말만 들은 서울로 단봇짐을 싸버렸기 때문에 ‘분례누나’와는 영원한 이별(離別)이 되고 말았다. 고향을 떠나 올 때의 분례누나는 그야말로 ‘말만한 처자’로 변모해 있었다.
머릿방
그 이듬해인가에 울산(蔚山) 어느 곳으로 시집을 갔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기도 한데 정확하지는 않다. 그리고 그로부터 지금까지 필자는 그녀가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고, 알아보지도 않았다.
물론 알아 볼 이유도 없었다. 지금도 그녀가 살아 있다면 73세의 노파(老婆)가 되어 있을 것이다.
고향을 떠나올 때의 '분례누나' 모습
배경음악으로는 ‘멀방’과 ‘머릿방’의 원래 주인인 이미자의 ‘애기 며느리’를 게재하여 음미하기로 한다. 시집살이 매움 서린 고달픈 세월(歲月)을 이겨내느라 안간힘을 쓰는 애기 며느리의 가시방석 시집살이를 그리고 있다.
가시방석 못지않은 쓰라린 한(恨)을 달래려 꿈길마다 친정(親庭) 어머니를 그려보며, 그리워서 울고 새는 애기며느리의 피지도 못하고 서리 맞는 서러운 ‘멀방’생활이 아리게 그려지기도 한다.
애기 며느리
이미자
시집살이 매움 서린 고달픈 세월
가시방석 못지않은 쓰라린 한을
서러움을 견디어낸 여자의 한숨
참아야만 하는 것이 타고난 팔자
피도 못해 서리 맞는 애기며느리
허구 많은 시집 식구 벅찬 살림에
아침 문안 저녁 걱정 끝도 없으니
잠 못 드는 긴긴 밤을 혼자 새우며
꿈길마다 그려보는 친정어머니
그리워서 울고 새는 애기며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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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집은 4 칸이라 대청 넘어 멀방이 있었는데
주로 항아리에다가 곡식을 넣어 두는데
내 노리방이었고 식초에다 소다을 넣어 가스가
나와 펑 소리를 내며 마개가 총알처럼 날아가는 걸 보고
어머니 안태 혼난적이 있었죠
그걸 보면 과학자가 무척 되고 싶었는데
모든 꿈이 다 접어지고...
그나마 아들이 삼성에서 스마트폰 개발 연구원으로 있다는게
대리 꿈 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버님 돌아가시고 사랑방에서 얄궃게 영화에
꿈구든 시절이 아련하네요
추억을 되살리게 하는 얘기 감사합니다
언제 뵈옵을 기회가 있기를 기원하며
내 내 건안을 비옵니다.
분례 누나 한번 찾아 보셔야 되는데...혹시 울산 거주하는 향우님들 관심 가져보면 찾아 볼수도 있을지..ㅎㅎㅎ 저도 분례누나같은 비슷한 추억을 가진 여인이 있기는 한데....그 얘기 꺼 내다보면 밤 세울꺼 같아서..ㅎㅎ 저의 집에도 머릿발이 있었고...그 방에는 선 책상에 의자가 있었는데..그게 그때는 참 귀한 것이라...책꽂치도 많았고..책도 많아서...그게 조금 자랑스럽기도 했던 기억이 나고...그 머릿방에서 추억도 많이 있습니다. 정말 재미나고 많이 배우고 많이 추억했습니다. 제가 요사이 시간 잘 못내서...카페 생활도 잘 못하고...죄송햇습니다. 정말 자랑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