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동궁과 월지’와 연결된 고대 물길 새롭게 확인
‘사량리 알영정에 계룡이 나타나 왼쪽 옆구리로 여자 아이를 낳았는데 입술이 닭의 부리 같아 목욕을 시켰더니 그 부리가 퉁겨져 떨어졌으므로 그 천의 이름을 발천(撥川)이라 하였다.’ 『삼국유사』 권1 기이 1편에 기록된 내용이다. 발천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 왕의 비인 알영과 관련된 이 『삼국유사』 기록에서 유래되었다.
지난 2019년 신라왕경 핵심 유적 복원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동부사적지대 발천 수로 일부에 대한 발굴조사를 착수하였다. 이 조사를 통해 문무왕 9년(679)에 만들어진 ‘경주 동궁과 월지’와 연결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 물길을 2021년에 새롭게 확인하였다. 현재의 발천은 1~2m 폭의 좁은 수로이며, 지하 수위가 낮고 겨울철 건기에는 물이 흐르지 않는 건천으로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이에 비해서 고대 발천은 최대 폭이 15m 내외로 넓은 유로였으며, 발굴 과정에서 삼국시대 신라 고분, 즉 적석목곽분(돌무지덧널무덤)의 시기를 대표하는 이단투창고배 등의 토기류가 다량 출토되어 적어도 삼국시대부터 현재보다 큰 규모의 발천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또한 통일신라시대 초기에는 고대 발천 수로를 520cm 폭의 석축 수로로 정비한 사실도 알아냈다.
신라 최초, 최대 규모의 석교지 발굴
발천권역 발굴조사를 통해 발천의 석교지(돌다리가 있던 터)도 새롭게 확인되어 세간의 관심을 받았다. 이 석교지는 신라 최초, 최대 규모이며, 통일신라시대 발천을 건너 신라 왕궁인 월성으로 출입하는 12m 정도 폭으로, 형태도 양호하였다. 지금까지 발천을 건너 월성으로 출입할 수 있는 통일신라시대 석교지는 이 석교지를 포함하여 총 5기가 발굴되었다. 하지만 나머지 4기는 다리 폭이 약 5m 이내이며 석교지의 형태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훼손이 심한 상태로 확인되었다.
2022년에는 통일신라시대 석교지에 연결되는 남북방향 대로를 연이어 조사하였다. 폭 20m 정도의 남북대로는 통일신라시대 북궁(北宮)으로 추정되는 전랑지서쪽으로 연결된다. 최근 전랑지 남쪽의 남고루 일부 구간의 발굴조사에 의해 고려시대 성벽이 확인되었고, 그 아래층에서는 남북방향의 자갈이 깔린 신라도로도 노출되었다. 이 도로와 연결되는 남북방향 신라도로와 남고루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 의해 발굴되어 현재 정비되어 있는데 그 길이가 약 150m에 달하며, 이번에 발굴한 통일신라시대 석교지와 이어지는 남북도로와 방향이 일치되어 연결될 것으로 판단된다.
신라 왕궁 밖의 관아(官衙) 유적 확인
이번 발천권역의 발굴조사 결과, 통일신라시대 석교지와 연결되는 남북대로의 동쪽과 서쪽에는 남북방향으로 연결되는 단랑(單廊)1)의 회랑(回廊)2) 건물로 추정되는 적심석(積心石)3)이 확인되었다. 남북대로 동쪽은 회랑과 도로 사이에 건물이 없는 반면에 서쪽은 서로 다른 형식의 초석 건물지가 도로와 회랑 사이에 일정한 규칙성을 가지고 배치되어 있으며, 그 사이에 통일 신라시대 우물도 1기 확인되었다.
이와 같은 건물의 형식과 각 건물의 배치 양상은 지금까지 신라 고대도시 유적에서 확인된 바 없는 구조로 신라 왕궁 밖의 관아(官衙)4) 유적으로 판단된다. 이외에도 신라 건물지 아래층에서는 3~4세기경의 타날문 단경호, 통형고배 등이 출토되었다. 이 방형 수혈주거지는 신라 초기 월성이 축조되기 이전 문헌기록의 금성과 관련지을 수 있는 연구 자료를 확보하였다는 데 의의가 있다.
1) 단랑(單廊) : 들보[樑] 사이가 한 칸으로 된 회랑. 대체로 단랑의 바깥쪽은 벽이나 창을 쌓거나 내고, 안쪽은 기둥만 세워 마당으로 트이게 하였다.
2) 회랑(回廊): 사원, 궁전에서 주요 부분을 둘러싼 지붕이 있는 긴 복도
3) 적심석(積心石): 돌 따위를 쌓을 때 안쪽에 심을 박아 쌓는 돌
4) 관아(官衙): 관 원들이 정무를 보던 건물. 관서(官署)·공해(公海)라고도 한다.
글, 사진. 조성윤(신라문화유산연구원 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