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신문 [류제옥 수녀의 성서말씀 나누기: 후기 예언서]
류제옥 마리아 수녀(샬트르 성바오로수녀회 대구관구)
(51) 예언의 선포는 시대 초월한 계시
후기 예언자들은 기원전 8세기 중엽부터 등장한 참 예언자들로서 이들은 새로운 예언자적 비전을 제시하면서 나타난 저술 예언자들이다. 이들은 시나이 계약을 바탕으로 종교적 유일신앙을 한결같이 부르짖었다. 우리는 먼저 예언된 말씀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예언자라는 용어의 의미와 그들이 어떠한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상황에서 활동했는지를 알아 보고자한다.
하느님을 위해 말하는 이
Prophet(예언자)이라는 말은 희랍어 προΦητηζ(prophetes)에서 유래했다. προΦητηζ는 다른 이, 즉 하느님을 위해 πρΟ(pro) 말하는 Φημι(phemi) 사람 이다. 히브리어에서 예언자는 בָבִיא(nabi)인데 이 단어는 하느님에 의해 「불리어진 어떤 이」를 말한다.
성서의 예언자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서 그분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이들이다. 일차적으로 예언자는 영감받아 「말하는 이」다. 이렇게 볼 때 성서에 나타나는 「예언(prophecy)」의 일차적 의미는 「미리 말함(Prediction)」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하도록 그분에 의해 영감받은 사람의 「말」이다. 그것은 우선 「계시」요 「가르침」이다.
예언직은 세습제가 아니라 여러 가지 직업에서 하느님께 직접 불림을 받았다. 예를 들면 아모스는 목장 관리인이었고, 이사야는 귀족 출신으로 궁정 고문이었고, 에제키엘은 사제였으며, 호세아는 부농이었다. 에언자 가문은 사제 가문처럼 특별한 어떤 지파에 한정된 것도 아니다. 이렇게 개별적으로 불림을 받은 것이 이들 예언자들에게 있어 하나의 공통점이다.
이들은 백성들의 죄를 경고하면서 의기소침해 있는 그들에게 장차 구원의 희망을 주는 위안자이기도 했다. 이들의 선포는 본질적으로 예고라기보다는 진술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며, 이 예언의 선포는 시대를 초월한 영원한 계시이다.
혼란 시기에 활동
이스라엘 안에서 예언자가 특별한 존재로 부각되어 활약한 시기는 기원전 8-4세기이다. 예언자들은 자기들이 처한 악순환의 상황을 보고 하느님의 뜻을 선포하였다.
정치적 상황으로는 대제국들이 등장하여 전쟁이 치열한 때였다. 세계의 판도는 성지를 중심으로 아시리아나 바빌론 또는 에집트가 그 판권을 잡을 때였다. 따라서 팔레스티나는 전쟁의 와중에 몰려 불안할 때였고, 내세 또한 군주제 도입에서부터 왕조의 전성시기를 거쳐 남북으로 분열 된 혼란 시기에 통치자들은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했다.
경제적 상황은 새로운 환경에 정착하면서 자기들보다 문화적으로 발달한 가나안 문명에 물들어 국가 군주체제를 도입함으로써 문제점이 빚어진다. 권력층들의 권력남용으로 불의가 성행되어 백성들은 억압과 착취를 당하여 빈부의 차가 격심해진다. 왕정의 병폐는 백성들의 생활을 도탄에 빠뜨리고 권력층들은 온갖 영화를 다 누렸다.
종교적 상황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섬겨온 야훼 하느님에 대한신앙은 큰 위협을 받게 된다. 원주민들이 가진 토착 우상들 특히 바알신 신앙으로 위협을 받아 야훼 하느님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고 바알신은 풍요와 다산(多産)의 신으로 받아들여져 신앙에 심각한 혼란이 야기된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안고 예언자들은 큰 고통을 수반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외쳤던 것이다. 그러나 그 소리를 듣지 못하는 무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있다.
우리는 세례때 받은 그리스도의 예언직을 온전히 실행하기 위해 먼저 성서를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으로 무장하여 빠스카의 밤을 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각오아래 그리스도의 예언직에 참여해야 할 것이다.
[2001.11.18]
(52) 끊임없이 이어지는 예언 말씀
우리는 예언자들의 소명과 그의 메시지 전달방법을 통하여 예언의 음성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 보고자한다. 예언자들은 여러 가지 양상으로 불림을 받는다. 이 부르심은 일반적으로 내적으로 초대 받으며, 이 초대는 외적인 어떤 사건이나 목적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하느님께 소명을 받은 이들은 인간의 양심을 일깨워주어 하느님과 맺은 계약 관계가 그들이 처한 현재 상황들의 전후관계 속에서 갖는 의미를 깨우치는 일을 했다.
유일신앙과 윤리적 경고
예언자들은 인간의 심연을 뒤흔들어 마침내 한 인간의 삶을 하느님께로 송두리째 변화시키는 교화자들이며, 하느님 힘의 소유자들이다. 소명을 내리실 때 하느님께서는 완전히 주도권을 잡으시고 그 인격을 전적으로 지배하신다.
아모스는 『주 야훼께서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을 전하지 않을 자 누가 있겠는가?』(아모 3, 8)라고 했으며, 예레미야는 태내에서부터 꾀어냈다고 이야기한다. 호세아는 자기 결혼생활을 통해 하느님의 소명을 수행한다. 이렇게 예언자들은 갖가지 방법으로 불림을 받아 한정된 역사적 상황을 지니고 특정한 환경 속으로 파견되었다.
예언자들의 직무에 있어 먼저 유의할 것은 예언의 선물은 그들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청중을 위한 것이었다. 예언자들은 백성들로 하여금 출애굽 사건을 회상하게 하여 다시 시나이 사막에서 첫사랑을 속삭였던 그 아름다운 시기로 돌아가 구원에 동참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실제적 활동가들이었다.
예언자들의 메시지는 유일 신앙과 윤리적 경고, 즉 죄란 지극히 선하시고 능력 자체이신 하느님을 배신하는 행위로 하느님의 백성이라면 거룩해야 할 성성의 의무가 있다. 그리고 그 내용은 메시아가 탄생하여 새롭게 통치하실 것을 말하고 있다. 그 전달 방법은 여러가지 유형이 사용되었으나 주로 구두로 전달되었다. 그러던 것이 후에 예언자 자신이나 그의 제자들에 의해 문서화되었다.
신탁과 경고화법
예언자가 그의 예언 선포에 사용한 여러가지 문학 형태는 크게는 예언적 말씀(신탁)과 경고 화법을 볼 수 있다.
예언자의 말의 초기 형태는 신탁이다. 이 신탁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는 성대한 선언이다.
신탁 앞에는 제의 양식에 속하는 "코 아마르 야훼"(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가 자주 붙는다. 신탁의 내용은 현재의 삶의 내용과 방향이 미래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짓게 된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현재의 삶이 좋은 미래를 결정지을 수 있는 계기가 됨을 강조한다.
여기에는 심판 신탁과 구원 신탁이 있는데 전자는 잘못에 대한 하느님의 벌로 비난 내지 경고로 나타나며, 후자는 앞으로 잘하면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 주신다는 위로의 말씀이다. 신탁에서 사용되는 언어 및 표현수단은 마음의 언어인 시어(詩語)이다. 야훼께서 신탁에서 말씀하신 것은 이스라엘의 마음을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 때로는 예언적 고발과 고소로서 경고 화법을 사용하였다.
경고화법은 예언자들이 야훼의 이름으로 백성들을 교육하는 입장에서 「들어라」하는 말로써 시작한다. 계약 소송 양식인데 이는 야훼와의 계약을 깬 것에 대해 이스라엘을 책망한 것이다. 징벌을 예고, 엄포하거나 축복을 약속함으로써 회개를 재촉 권고한다. 그리고 예언적 격언, 찬양, 노래, 타원, 교훈 등으로 전달하는데, 애가나 찬미 시편들이 여기에 속한다.
이렇게 여러 가지 방법을 빌려 하느님의 뜻을 전달하는데도 이스라엘은 결국 재앙을 면치 못하고 유배의 고배를 마시고 나서야 제 정신을 차린다.
오늘도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돌아 오라 돌아 오라 내게로 돌아 오라』하신다. 우리는 이 말씀에 어떻게 응답드리고 있으며 또한 하느님의 파견을 받은 사람으로서 이웃에게 하느님께 대한 의무를 일깨워 주고 순종과 사랑을 회복하도록 말씀과 삶으로 선포하고 있는가?
[2001.11.25]
(53) 메시아가 이끄는 출애굽 기대
이스라엘은 북왕국의 멸망(BC 721년)과 남왕국의 몰락(BC 587년) 및 남은 사람들의 바빌론 유배 등 여러가지 참상들을 겪었다. 이런 역사적 상황 가운데 예언의 전달 수단과 메시지는 변화되어 왔으므로 우리는 예언을 유배 전, 유배기, 유배 후로 나누어 살펴 보고자한다.
고유한 사명 정립(유배 전)
유배 전 북이스라엘에서는 엘리야·엘리사·아모스·호세야 예언자가 남유다에서는 제1이사야·미가·스바니야·나훔·예레미야·바룩·하바꾹 예언자가 활동을 했다. 이 예언자들이 히브리 백성의 생활을 지도하던 시대는 팔레스티나 정복 후에 통일왕국이 수립되고 나서 다시 왕국이 분열되어 유다 왕국과 사마리아 왕국이 맥을 이어가는 시대였다.
이 시대 예언자들의 특징은 이스라엘 역사의 참된 진로를 부단히 상기시키는 활동이다. 그 역사의 진로는 에집트에서 백성을 해방시켜주신 하느님께 대한 충실, 아브라함의 선택을 기억하는 일, 다윗의 후손에게서 하느님의 「언약」이 반드시 이루어지며 그것도 이스라엘 안에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이루어지리라는 확신 등이다.
유배 전 예언자들은 본연의 성서적 신앙을 회복시키고 성서의 하느님께 대한 충실을 복원시키며, 이스라엘의 종교·정치·사회·법률3적 향방을 이스라엘의 고유한 사명에로 정립하고자 애썼다. 그러나 왕정시대에 와서 인근 백성들과의 동맹, 종교의 도구화, 우상숭배, 사회계급의 불균등과 부의 편중이 모두 예언자들의 규탄 대상이 되었고,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개입이 「유배」(流配)라는 형태로 서서히 구체화되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이스라엘(신명 5~11장),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스라엘, 우상숭배에 빠져 타락하는 이스라엘에게 이 예언자들은 유배를 예고하기에 이른다.
다시 일어설 희망(유배기)
유배기에는 에제키엘, 제2이사야가 활동을 했다. 이 예언자들은 기원전 587년에 국가적 재앙을 단순히 역사적·정치적 사건으로 다루지 않는다. 자유와 땅과 언약을 내리셨던 하느님께 대한 신앙에 비추어 이 사건을 음미하고 해독하였다.
이 예언자들은 당대의 패권 세력 앞에 무릎을 꿇은 자기 백성의 역사적 현실과 혼연일체가 된다. 이 예언자들의 메시지는 하느님의 개입과 유배를 앞두고 느끼던 커다란 당혹감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곧 성서의 하느님께 관련된 어휘들을 다시 채택함으로써 분명히 일어선다.
성서의 하느님은 출애굽의 기적을 「다시 이루실」것이며 약속의 땅을 「다시 선사하실」것이며 당신의 백성을 당신의 도읍과 거룩한 산 위에 '다시 모으실'것이며 생명과 평화, 역사와 후손을 다시 주실 것이다.
성서적 전통 복귀(유배 후)
유배 후에는 하깨, 즈가리야, 제3이사야, 오바디야, 말라기, 요엘, 요나의 활동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예언자들이 활동한 시기는 기원전 538년 페르샤의 고레스가 칙령을 내려 유배된 히브리인들을 석방하고 고국으로 돌아갈 것을 허락한 시기였다. 이때야말로 정치적·종교적·경제적 재건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러나 예언자들이 말하는 재건은 이스라엘의 본연의 성서적 전통으로 복귀하는 일이었다. 즉 각 사람이 타인의 형제가 되고, 각 나라가 이웃 나라의 형제국이 됨을 의미하고, 야훼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시는 바를 이스라엘이 만국에 행한다는 의미였다. 이스라엘에게 다시 역사가 부여된 것은 바로 이러한 재건을 이루기 위함이요, 유배에서 풀려난 귀환은 이것이 곧 역사의 참 목표임을 증명해 보인다는 뜻이다.
유배 이후 예언자들의 업적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두번째 출애굽」(바빌론에서의 귀환)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고 「야훼의 날」을 기다리며, 메시아의 영도하에 이루어질 결정적인 출애굽을 지향한 것이다.
이 시기에 이스라엘의 영광을 가져올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고조되어 가면서 예언은 서서히 사라져 갔다. 이 메시아에 대한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고 있다.
[2001.12.2]
(54) 야훼의 가르침과 뜻 담은 십계명
야훼께서는 이스라엘과 계약 체결을 통해 인격적 관계를 맺으시고 지켜야 할 십계명을 주셨다. 이 십계명을 통하여 예언자들은 야훼께 대한 이스라엘의 의무와 이스라엘의 상호간에 이행해야 할 공동체적인 의무를 강조하였다. 우리는 예언자들이 전하는 십계명의 근본 메시지를 보고자 한다.
야훼께 대한 의무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농경 문화권에 맞는 풍산신 바알 숭배와 접촉하면서 종교적 위기를 맞게 되었고 예언자들은 이 종교적 대결에 전력을 다해 가담하면서 야훼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 했다. 그것은 예언자들의 사명이었다.
예언자들의 활동은 야훼 신앙을 바알신 숭배와 바꿀 수도 있었던 위험에서 그 순수성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호세아 시대부터 「혼합종교」로 말미암아 바알신 숭배에 이용되어 오던 표상들과 종교의식들을 야훼 신앙에 끌어들여 그 위에 마치 겉옷처럼 씌워 입힐 수 있는 위험이었다.
이 무렵 유다 왕국은 이국신 숭배의 문제보다는 야훼를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이 문제였다. 종교 의식적으로는 야훼를 숭배하고 있었지만 현세적인 권력 수단과 국력에 더 의존하려 했던 것이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에 대한 야훼의 돌보심에 대해 인간이 야훼께 드려야 할 기본적인 응답은 야훼만을 의지하고 믿는 태도이며, 그것은 인간이 그분께 드릴 수 있는 으뜸가는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응답임을 강조한다(7장 9절).
유다왕 므나쎄 때에는 남쪽 왕국에서도 이국신 숭배가 예루살렘의 성전에까지 침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스바니야(1장 14절), 예레미야(7장 13절) 그리고 에제키엘(8장 1~16절)까지 야훼의 기본 계명을 수호하기 위해 나서야 했다.
유배를 거치는 동안에야 비로소 야훼 신앙은 그 순수성을 되찾을 수 있었고 이어 이스라엘에서 그 확고한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엔 제2이사야가 크게 이바지했다. 그 후에도 약간의 우상숭배의 잔재들이 되살아났으나 예언 현상이 완전히 자취를 감출 무렵(BC 5C)에는 「야훼만」이라는 「유일신 신앙」이 마침내 그 목표를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달성하였다. 이국신, 잡신 숭배가 많았기에 야훼만을 공경하는 것이 첫째가는 하느님께 대한 의무였다.
인간 상호간의 의무
이스라엘은 야훼종교를 실천하는 길이 「수직적 차원」을 돌보고 가다듬는 데 있는 것으로 보았고 거기서만 그 길을 찾으려 했다. 예언자들은 야훼계시의 명분을 걸고 이러한 종교관과 종교실천을 철저하게 배격하면서 야훼 신앙에 있어서는 수평적 차원도 그 본질을 이루는 구성 요소임을 강조하고 있다.
초기의 좋은 실례는 나단 예언자다. 왕의 비행에 대해 야훼의 이름으로 죄를 나무라고 회개를 요구한 것은 '인권 침해'에 대한 예언자의 항의의 예이다.
여로보암 1세 때 북이스라엘이 번영을 누리던 시절 아모스는 억눌림을 받는 사람들, 수탈당하던 사람들의 '인권'을 옹호하기 위해 격렬하게 항의하면서 이스라엘에게 죽음을 선고하였다.
이사야도 예루살렘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교하면서 「예배」는 많지만 「정의」가 없음을 개탄하고 규탄하였다(1장 10절). 특히 예레미야는 하느님의 신권을 옹호하면서 예루살렘의 모든 비리와 비정을 몸소 겪었지만 공정과 정의를 항상 부르짖었다.
에제키엘은 바빌론에서 활약하면서 우상숭배로 「제1계명」을 어겼음과 「인간관계의 일곱 계명」을 범한 잘못을 고발하고 있다. 그는 예루살렘은 소돔보다 더 고약하다고 하면서 야훼를 「계약의 헌장」을 통해 당신이 보장한 인권의 옹호자로 계시한다(18장 6절). 그러면서 『바르고 법과 정의를 지키는 사람』의 행동과 태도가 어떤 것인지를 밝혔다.
예언자들이 전하는 십계명의 근본 메시지는 바로 야훼의 가르침이요 그분의 뜻이다. 이 십계명에 대하여 예언자들은 하느님에 대한 수직적 차원 못지 않게 수평적 차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과연 이 두 차원은 우리가 사람들과 사건들 안에서 하느님의 뜻의 의미를 발견하고 실천하는데 나침반으로서 힘을 발휘하고 있는가?
[200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