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정(邱井) 우물 이야기
내 고향 학산(鶴山)의 지명을 잠시 들여다보면 여러 가지 재미있는 생각들이 떠오른다.
학산리가 소속된 구정면(邱井面)은 면소재지(面所在地)인 여찬리가 있고 학산리(鶴山里), 구정리(邱井里), 어단리(於丹里) 금광리(金光里), 제비리(濟飛里), 덕현리(德峴里)가 있어 모두 7개 리(里)이다.
여러 가지 사연이 숨어있지만 구정면(邱井面)이면 면소재지가 구정리(邱井里)이던지, 실질적으로 면의 가장 중심부이며 역사가 가장 오래인 학산리(鶴山里)를 면소재지로 하는 것이 타당하겠는데 이런저런 사유로 여찬리(余贊里)에 구정면사무소(邱井面事務所), 구정지서(邱井支署/파출소), 우체국(郵遞局), 보건소(保健所) 등이 들어서서 면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에 보통교육이 일반화되면서 면마다 보통학교(普通學校/國民學校)가 들어서기 시작했는데 처음 면소재지인 여찬리에 개설한다고 하자 그것만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학산리 어른들이 들고 일어서서 우여곡절을 겪은 후 처음으로 구정면에 학교가 들어서게 되니 바로 학산리에 세워진 구정보통공립학교(邱井普通公立學校:1936년 개교)이다. 이후 제비리(濟飛里)에 공립분교로 제비(濟飛)분교가 세워졌다가 1999년 폐교되고 얼마 후 강릉예술고등학교가 들어섰다.
구정교가 들어서고 8년 후(1944년), 금광리(金光里)에 금광국민학교(金光國民學校)도 개교하는데 현재 구정초(邱井初)는 전교생이 105명으로 6학급, 금광초(金光初)는 전교생이 66명밖에 되지 않지만 6학급이라고 한다.
예전, 학교의 명칭은 보통학교(普通學校:한국인)와 소학교(小學校:일본인)로 나누어 불렀고 이 두 학교를 합하여 심상소학교(尋常小學校)라고 부르다가 1941년에 ‘국민학교령’에 의하여 ‘국민학교(國民學校)’로, 다시 1996년에 이르러 오늘날 부르는 초등학교(初等學校)로 개명(改名) 되었다.
6.25사변으로 학교가 불타서 내가 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교실이 없어 학교 옆 솔밭 속 소나무가지에 칠판을 걸어놓고 기다란 널판자 위에 책과 공책을 펼쳐놓고 잔디위에 앉아 공부하던 기억이 새롭다.
학교 오르는 경사로 / 현재의 학교 건물 / 내 졸업사진(단기 4293년/18회)
구정(邱井)이라는 한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언덕 구(邱)에 우물 정(井)자이니 ‘언덕위의 우물’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위에 열거한 7개 리(里)의 어느 곳에도 그런 우물이 없고 오직 학산리(鶴山里)의 가운데 우뚝 솟은 언덕위에 바로 그렇게 부를 만한 우물이 있는데 바로 구정초(邱井初)의 교내(校內)에 있던 우물이었다.
지금은 수도시설이 일반화되면서 메꾸어 없어졌지만 예전에는 학교 어린이들은 물론, 전 직원이 사용하던 귀중한 우물이었다. 그것으로 보면 구정면(邱井面)이라는 명칭은 바로 이 언덕위의 우물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는지....
학산(鶴山)의 역사는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고 굴산사를 비롯한 신라시대의 유물유적들이 산재한 역사의 고장이라고 보면 구정면(邱井面)이라는 명칭이 결정될 때 이 학산천변(鶴山川邊) 언덕위의 우물이 그때에도 있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하게 된다.
구정학교 내에 있던 우물은 학교와 교장사택 중간쯤에 있었는데 입구를 시멘트 노깡으로 만든 우물로, 너무 깊다보니 위에 도르래를 매달고 함석으로 만든 물통을 아래로 내려 줄을 흔들어 물에 잠기게 한 후 끌어올려서 물을 퍼 올렸다.
둥그런 노깡의 높이는 어른들의 가슴부위 쯤이었으니 아이들한테는 목 부분으로 까치발을 해야 속이 드려다 보였다.
구덩이를 파내고 돌을 켜켜이 쌓아서 만든 우물의 크기는 지름이 150cm쯤으로 깊이가 대충 7~8m는 족히 되었던 깊은 우물이었는데 아이들은 고학년이어도 물을 퍼 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까치발을 하고 드려다 보아도 물이 보이지 않으니 얼마나 깊은지 호기심으로 침을 떨구어 보는 아이들도 있었는데 귀를 기울이고 한참을 기다리면 '딱' 하고 침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면 손뼉을 치곤했다.
어떤 아이들은 나뭇가지를 떨구어 보거나 작은 돌멩이를 떨어뜨리기도 하고....
선생님들은 그런 아이들을 보면 호통을 치며 야단을 치곤 했는데 아이들은 개미새끼처럼 흩어지고....
우물의 물을 아이들도 마시고 선생님들도 마시다보니 특히 수질오염에 신경을 많이 썼는데 대체로 표백제(漂白劑) 가루나 소석회(消石灰) 가루를 뿌렸던 것으로 생각된다.
때 묻은 천을 깨끗하게 세탁하는 세탁제로 쓰던 가루가 표백제인데 물속의 미생물들을 죽여 소독하는 역할을 하고 표백제가 녹은 물을 마셔도 그다지 해롭지 않은 것으로 당시는 알고 있었지만 사실은 건강에 매우 해롭고 심한 구토나 설사를 유발할 수도 있다고 한다.
학교에서는 정기적으로 사람이 들어가서 청소를 했는데 우리 형님이 구정학교 소사(小使)로 근무할 때 청소하러 들어갔다가 죽을 뻔 했던 적이 있었다. 우리 형님이 비록 소사(요사이는 廳夫)이기는 했지만 정직하고 순박하다고 선생님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는데 청소를 하러 들어가자 선생님들이 모여 여러 명이 밧줄을 부여잡고 형님이 매달리자 조심스럽게 내렸다고 한다. 그런데 바닥에 이르자 지독한 냄새로 숨을 쉴 수가 없고 정신이 혼미해 졌다고 한다.
‘아악~, 숨을 못 쉬겠어요. 빨리 도로 올려주세요~~’ 기급을 한 선생님들이 ‘줄을 꼭 잡을 수 있어?...’
형님은 눈을 감고 죽기 살기로 매달렸고 선생님들이 힘을 합쳐 끌어내어 부축해서 무사히 나왔는데 기침과 구토는 물론 잠시 동안 땅바닥에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고 한다.
그 후, 잠시 동안 우물을 폐쇄하고 아랫마을에서 물을 길어다 썼다고 하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우리 형님은 1963년 군에 입대로 소사직을 그만두었고 제대 후, 서울 오류동에 살던 누님의 소개로 한전기계공작소(韓電機械工作所)에 일반직원으로 들어갔는데 몇 년 후 총무과장으로 승진하였다.
그러다가 곧바로 퇴사하여 친구와 둘이 경기도 부천(富川)에 원남산업(元南産業)이라는 건설회사(建設會社)를 차리고 사장(社長)이 되었는데 전국 방방곡곡으로부터 수주(受注)를 받고 활발히 돈벌이를 했다.
어느날, 한밤중에 집으로 돌아오다 수원근교 지방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유명(幽明)을 달리했는데 향년(享年) 49세였다.
형님이 군에 입대하던 바로 그해 내가 중학교를 졸업했는데 가난하다보니 진학을 할 수 없어 형님이 최태근 교장선생님께 부탁하여 허락을 받아 내가 소사로 들어갈 수 있었다. 형님보다 5년 연하인 나는 9개월간 구정학교 소사로 돈을 모아 이듬해(1964년) 강릉고(江陵高)에 진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