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三章 광란(狂亂)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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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대에 묶여 곧이라도 찢어질 듯 펄럭이던 면포(綿布)가 조
금씩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휘잉! 꽈르릉……!
산더미만 한 해일이 배의 측면을 강타했다.
이번 해일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아니, 나쁘지 않다는 말
로는 부족하다. 천운! 그렇다. 기적이 바로 이것이다. 측면을
강타한 해일은 기울어져가던 배를 바로 세워줬을 뿐 아니라
방향까지 틀어주었다.
촤르륵……!
물레에서 아딧줄이 급속하게 풀려나갔다.
사장이 팽팽하게 펼쳐지면서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거력(巨力)이 아딧줄을 당겨낸 것이다.
"헉!"
천해원 중 한 명이 헛바람을 내질렀다.
그의 손은 이미 피범벅이 되어 버린 후였다.
촤르륵……!
"아딧줄을 잡앗!"
자연의 힘을 그대로 쫓아가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대
로 아딧줄을 놓아버린다면 마포가 마음껏 펼쳐지면서 범선은
그야말로 주인 없는 무주공산(無主空山)이 되어버린다.
"헉! 이것!"
다른 천해원도 입장이 같았다.
사력을 다해 물레를 붙잡고 있지만 사장이 빨아 당기는 힘
을 제어하기에는 역부족이다.
"하앗!"
적엽명은 물레를 잡고 마지막 한 방울의 힘까지 쥐어 짜냈
다.
이마에서 핏줄이 붉어져 나왔다. 팔목 핏줄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했다.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바람아! 한 번만 더!"
애타게 부르짖는 절규가 새어나왔다.
바람을 비스듬히 받아야 순항(巡航)이 보장된다.
범선은 횡범(橫帆:마스크에 달린 네모 돛)이 제 역할을 다
해줘야 한다. 지금처럼 종범만 힘을 받아서는 돛대가 부러질
우려가 있다. 주돛이 부러졌으니 앞돛과 뒷돛이 움직여 줘야
하는데……
"하부(下部)를…… 고정시켯!"
적엽명은 거친 숨이 턱까지 차 오르는 것을 느끼며 간신히
말했다. 전력을 다해 물레를 잡고 있는지라 다른 데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움직일 사람이 없다.
천해원은 돛대에 몸이 묶여 있어 움직이지 못한다. 돛을 끌
어올리는 선원, 아딧줄을 하부에 고정시키는 선원들은 선창에
틀어박혀 나올 생각을 못한다. 누구를 원망하랴. 폭풍의 중심
권에 근접해 있는 한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힘을 가
지고 있다 한들 한낱 범부(凡夫)에 지나지 않는 것을.
"우리가 잡고 있을 테니 하부를 고정시켜요!"
천해원 중 한 명이 고함을 질렀다.
"꼭 잡고 있어야 돼. 놓치면 끝장이다."
"하하! 우리도 선원이요."
적엽명은 자연스럽게 하대(下待)했다. 천해원들은 자연스럽
게 하대를 받아들였다. 목숨이 급박한 상황에서 사소한 일에
신경 쓸 사람은 없지만 평소 같았으면 양쪽 다 어림없는 일이
다. 천해원은 하는 일이 천한 만큼 대우만은 제대로 받고 싶
어했고, 타인이 무시하는 것을 참지 못했다. 적엽명 또한 대
놓고 하대하는 사람이 아니다.
적엽명은 현 상황을 타개하는 데 모든 초점을 맞추고 있다.
천해원은 적엽명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인간관계였다.
적엽명은 잡고 있던 물레에서 조금씩 힘을 거뒀다.
"끄응!"
천해원들이 고통스러운지 이맛살을 찌푸렸다. 손아귀가 찢
어져버린 천해원까지 달려들어 물레를 거머쥐었지만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적엽명이 힘을 거두는 만큼 힘을 더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천해원들 힘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무게가 얹어졌다.
몰랐을 게다. 무공을 익힌 사람의 힘은 범인의 수배에 달한
다. 그래서 쉽게 물레를 놓지 못했는데.
"마지막! 조금만 참아!"
적엽명은 냅다 고함을 지른 후, 물레를 놓아버렸다. 그리고
재빨리 하부고정용 아딧줄을 잡아챘다.
"헉!"
"엇!"
천해원들은 급작스럽게 밀려드는 힘을 견디지 못하고 비명
을 질렀다. 아딧줄을 놓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이 흡
사 거인에게 끌려가는 어린아이와도 같았다. 몸을 돛대에 묶
지 않았다면 벌써 질질 끌려갔을 터였다. 그 때,
휘잉! 처얼썩……!
엎친 데 덮친 격이란 이를 두고 한 말인가.
범선이 하늘을 날 듯 둥실 떠올랐다. 아니, 거칠게 솟구친
해일이 범선을 들어올려 멀찌감치 내동댕이쳤다. 그리고도 성
이 차지 않는지 저항능력을 상실한 범선에 까만 물덩이를 솟
아 부었다.
"컥!"
"앗!"
천해원 중 두 명이 물레를 놓치며 비명에 가까운 외침을 토
해냈다.
묵중한 둔기에 뒤통수를 후려 맞는 느낌이었으리라.
까만 장막은 언제 솟았는지도 모르게 살그머니 솟구쳐 뱃전
을 샅샅이 누빈 다음 하얀 물거품을 흘리며 사라졌다.
이번 해일에는 적엽명도 버티지 못했다.
마치 수천 마리의 황소가 끌어당기는 듯한 힘에 이끌려 정
신 없이 나뒹굴었다.
해일이 빠져나가면서 발휘한 흡입력(吸入力).
방향을 잃고 제멋대로 펄럭이는 종범.
순간, 적엽명은 품에서 소도(小刀)를 꺼내 뱃전에 틀어박았
다.
한 손에는 아딧줄, 다른 한 손에는 소도.
종범이 펄럭일 때마다 적엽명의 몸통도 가랑잎처럼 흩날렸
다.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종범이 끌어당기는 힘은 달려
가는 말에 못지않다. 죽으라고 버틴다면…… 그렇다. 오마분
시(五馬分屍)를 당하는 사람처럼 양팔이 찢겨 나가리라.
"헉! 어, 어떻게 좀……"
천해원 쪽도 사정이 급박하기는 매일반이었다.
네 명이 붙잡고 있어도 힘에 부친 물레를 두 명이 잡고 있
자니. 오마분시는 적엽명만 당하는 것이 아니다. 적엽명이 소
도와 아딧줄 사이에서 고전하고 있다면, 천해원은 물레와 허
리에 묶은 밧줄 사이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참혹한 고
통을 당하고 있다.
언제든…… 손만 놓으면 고통을 모면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렇게 되면 후장마저 걷어버린 지금, 범선은 눈 먼 장님이 벼
랑 가에 선 듯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게 된다.
한줄기 남은 희망, 그것만은 도저히 놓을 수 없었다.
"타앗!"
마지막 발악을 하듯 기운을 쥐어 짜낸 적엽명은 아딧줄을
팔목에 휘어 감았다.
이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조금만 힘을 풀어도 팽팽하게 당겨진 아딧줄은 사정없이 오
른 팔을 뜯어낼 것이다.
"조금만 참앗!"
"우리는…… 걱정…… 마쇼!"
"좋았어! 타앗!"
왼 무릎이 중심을 잡고 굽혀졌다. 뱃전에 박힌 소도를 뽑아
내고 오른 발을 한 걸음 내딛은 다음 다시 뱃전에 찔러 넣었
다. 실로 번개가 무색할 만큼 빠른 몸동작이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이번에는 천해원이 응원했다.
물레를 놓쳤던 천해원들이 정신을 수습하고 다시 물레를 잡
은 다음에는 한결 힘이 덜 들었지만 양팔이 빠질 듯한 고통은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실제로 물레는 조금씩 돌아 아딧줄을
풀어냈고, 그에 비례하여 천해원들의 손바닥에서는 붉은 혈흔
(血痕)이 점점이 방울져 떨어졌다. 손바닥 가죽이 벗겨지는
현상이었다.
틀림없었다. 세상이 노랗게 보일 만큼 쓰라렸다. 바닷물이
슬쩍이라도 스쳐 가면 쓰라림은 더욱 극심하게 찾아와 머릿속
을 울렸다. 하지만 아무리 손바닥 가죽이 벗겨진다 한들 어깻
죽지가 빠져나가는 고통에 비할까. 허리가 끊어지는 고통에
비할까.
"타앗!"
적엽명이 움직였다.
"조금만 버텨! 조금만 버티면 돼!"
천해원 중 한 명이 다른 천해원을 독려했다.
적엽명이 한 걸음씩 다가오는 것, 그것이 바로 희망이었다.
그 다음은 모른다. 적엽명이 아딧줄을 하부에 고정시키면 물
레를 더 잡고 있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 알고 있으면 된다.
그런다고 살 수 있을까? 범선이 폭풍우를 뚫고 나갈 수 있을
까? 생각나지 않는다. 당장 이 고통…… 이 고통만 멎게 할
수 있다면.
"타앗!"
적엽명은 다시 한 걸음 움직였다.
얼굴은 검붉게 변했고, 굵은 힘줄이 불쑥 튀어나왔다. 눈동
자의 색깔을 볼 수 있다면 분명 아귀(餓鬼)와 같은 붉은 색이
리라.
"하-앗!"
마지막 고함.
바다를 뒤엎어 버릴 듯, 뱃속에 있는 모든 힘을 쥐어 짜내는
듯 거칠게 고함을 지른 적엽명은 두 무릎을 굳건하게 고정
시킨 채 왼손을 들어 올려 앞돛에 소도를 틀어박았다.
끄르릉……! 꽈앙……!
해일은 어김없이 찾아와 전신을 흠뻑 적신 후 물러갔다.
아딧줄을 잡아당기는 것도 힘들었다.
종범 하나면 장정 스무 명이 덮고 잘 수 있는 이불을 만들
수 있다. 그만한 마폭이 성난 폭우에 마구 뒤엉키니 장정 서
너 명이 달라붙어도 제어할 수 없음은 당연했다. 하지만 적엽
명은 걷잡을 수 없는 힘을 받아냈고, 천해원들은 그런 점까지
신경 쓰지 못했다. 지금은 오로지 현 상황을 타개하는 것만이
중요했으니까.
"허억!"
"휴우!"
적엽명이 앞돛 하부 돌출부에 아딧줄을 동여매자 천해원들
은 긴 한숨과 함께 물레를 놓았다.
긴장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이제 겨우 고비 하나를 넘긴 것뿐인데.
적엽명은 돛대에 박힌 소도를 빼내 천해원들의 몸에 묶인
밧줄을 풀어주었다.
"뒷돛으로 가봐야 되는 것 아니가?"
천해원들은 몸이 풀리자마자 뒷돛을 걱정했다.
폭풍우 속에서 돛을 매단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행위
인지는 누구보다도 천해원들이 잘 안다. 육지에서 보낸 나날
보다 바다에서 보낸 나날이 더 많은 사람들이니.
자살행위.
한 마디로 단언하자면 자살하고 싶어서 반쯤 미친 인간들이
나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아니오. 횡범을 달아야 합니다."
"뭣?"
"횡범까지?"
"바다 속에 곤두박질하든 말든 그것은 하늘이 알아서 할
일…… 횡범을 올립시다."
적엽명은 한시가 급한 듯 횡범을 끌어올리기 위해 아딧줄을
잡아 당겼다.
하지만 천해원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종범에 이어 횡범까지 올린다면 질풍처럼 쳐오는 천군만마
(千軍萬馬) 앞에 단기(單騎)로 마주서는 형국이다.
바다를 경애하고 존중해야 한다.
절대적인 순종만이 있을 뿐, 반항은 용납하지 않는 것이 바
다다.
목숨 하나 던져서 가족들이 끼니나마 이어갔으면 하는 절박
한 심정만 아니었던들 은자 몇 푼에 목숨을 내걸고 먹구름이
가득한 바다로 뛰어 들겠는가.
살아서 돌아간다는 희망 따위는 부질없는 생각이다.
폭풍을 만나지 않았다면 모르겠거니와 이렇게 폭풍 한가운
데 들어서서는 견딜 재간이 없다. 그렇다고 미리 목숨을 끊을
필요가 무엇이란 말인가.
종범을 올린 것은 이해한다.
주돛이 부러진 상황에서- 주돛이 부러지지 않았다 할지라도
무슨 행동인가는 취해야 했지만- 선수(船首)를 돌리려는 마지
막 발악이지 않은가.
횡범을 올리는 것은 종류가 다르다.
종범은 돛이 비스듬히 세워져 배의 측면을 움직인다. 배가
나가는 방향을 조절하기 위해 세워진 돛이다. 횡범은 바람을
이용하여 항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배의 운항속도와 관계
있는 돛이다.
비바람을 고스란히 돛폭에 담는다면…… 아!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암초가 빼곡한 수면을 전속력으로 질주하자는 말인
가!
바람의 방향이 약간이라도 틀어지거나 해일이 용두(龍頭;뱃
머리)라도 때리는 날에는 꼼짝없이 전복(顚覆)이다.
쿠우웅!
해일이 또 배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가만히 있어도 이렇게 계속 옆구리를 강타 당하면 전복될
위험이 높다. 그런데 무엇이라고? 횡범을 올리자고?
천해원들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자 아딧줄을 놓아버린 적
엽명이 활활 타는 눈으로 한 명씩 돌아보았다.
"어차피 죽을 몸이지 않소? 죽을 바에는 빨리 죽는 것도 괜
찮겠지. 그나마 우리는 삼판에 올라와 있으니 뗏목이라도 주
울 수 있지만 비우[뱃바닥에 짐을 싣는 공간]에 탄 사람들은
어떻겠소?"
눈은 뜨거운 불덩이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으되 음성은 극도
로 차분하여 모질게까지 느껴졌다.
"불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서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굴며 엊
저녁에 먹었던 음식까지 모두 게우고 있겠지. 이제는 죽었구
나 하고 공포에 질려서. 칠흑 같은 바다. 광란하는 바다!"
적엽명의 음성에는 점점 힘이 실렸다.
"여기서 미치지 않는 인간은 비정상이야. 그래. 나는 미쳤
어. 그래서 횡범을 올리려는 거야. 미쳐서!"
이상했다.
머릿속으로는 아직도 횡범을 올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
서도 손은 밧줄을 잡아갔다. 이름도 모르는, 허나 선착장에서
늑대를 데리고 탄 덕에 얼굴은 익은 젊은이가 자신들을 아귀
(餓鬼) 같은 바다에서 벗어나게 해줄 것만 같았다.
"좋아! 해봅시다."
"횡범을 올린 다음 조정을 어떻게 할지 모르지만…… 믿겠
소."
천해원의 눈이 서서히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이런 경우에 소용되기 위해서 승선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정작 이렇게 거지같은 날을 만나면 명년 오늘이 제삿
밥을 얻어먹는 날이다. 체념하고 낙담하여 앉아서 죽으나 젖
먹던 힘까지 쥐어 짜내 발버둥 치다 죽으나 매일반이다.
전에는 편안히 죽고자 했다.
이제는 발버둥 치다가 죽을란다.
팔뚝에 힘이 용솟음쳤다.
"횡범을 최대한 팽팽하게. 그 이상은 없습니다."
적엽명은 이성을 회복한 듯 말투가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
의 눈은 더욱 뜨겁게 타올라 천해원에게 용기를 심어주었다.
"좋네. 그런데 우리 힘만으로 끌어올려질까?"
횡범은 좌우로 네 조각씩 모두 여덟 조각이다.
바람이 잔잔한 날에도 횡범을 올리기 위해서는 선원 네 명
이 매달려야 한다. 하물며 지금처럼 폭풍우가 드셀 때는 그
서너 배의 힘이 필요하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죠."
"응? 그게 무슨 소린가?"
"최선을 다한 다음 하늘의 명을 따른다는 말입니다."
"아하!"
"그럼 올립시다. 힘을 한데 모아서."
"운(韻)이나 떼어보게."
"하하! 그럴까요?"
"시작하지."
"장안 조각달에(長安一片月)"
"어허라! 엿싸!"
"집집마다 다듬이 소리여(萬戶 衣聲)"
"엿차!"
"님 계신 수자리로(良人征胡虜)"
"얼씨구! 엿차!"
"생각은 옥관에 가 있네.(總是玉關情)"
이태백(李太白)의 시(詩)였다.
무지한 뱃사람들이라 자자주옥(字字珠玉)에 얽힌 뜻이야 모
르지만 노랫가락으로 널리 알려진 만큼 내용은 이해했다. 그
들도 고향을 떠나 배 위에서 밤을 지새우는 날에는 종종 불렀
던 노래.
횡범이 제 모습을 갖춰갔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지난 팔 년 동안 놀고만 있지는
않았어. 그래, 나는 저 사람의 상대가 안 돼. 그 때 내가 느
낀 살기…… 무공을 익힌 무인만이 내뿜을 수 있는 예기(銳
氣)야."
유소청은 삼판 앞돛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놀란 얼굴로 바라
보았다.
적엽명이 무슨 의도에서 종범을 올리고 횡범을 올리는지는
어렵지 않게 판단되었다.
타고있는 배가 범선이 아니라 전선(戰船)이라면 적엽명의
행동은 지극히 옳았다. 전선에는 노(櫓)도 있고 키잡이도 있
지 않은가. 배를 자력으로 움직일 방법이 있다면 조그만 돌파
구는 준비된 셈이다.
범선은 경우가 다르다.
지금과 같은 상황은 처음부터 피했어야 한다. 그리고 충분
히 피할 수 있었다. 또한 고래라는 별명을 가진 선장 추형이
라면 해일의 예봉(銳鋒)쯤은 문제가 되지 않을 텐데.
어디서부터 일이 잘못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주돛이 부러졌을
무렵에야 사태를 파악해서는 손쓸 방도가 전혀 없다. 무공이
천인(天人)의 경지에 오른 사람일지라도 마찬가지. 자연의 위
대한 힘 앞에 무공을 익힌 사람과 익히지 않은 범부가 무에
다를까.
유소청은 허리에 두른 취옥검을 만지작거렸다.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려 좀처럼 진정시킬 수 없었다.
어제 새벽에 받은 충격과 비슷한 충격을 받은 탓이다.
새벽에 받은 충격이 등골서린 죽음의 공포라면 지금 받은
충격은 근육이 꿈틀거리는 힘, 맑고 순결한 땀을 대변하는 삶
의 충격이었다.
황폐한 들녘에 피어나는 한 송이 꽃처럼 절망과 죽음이 어
우러진 파도 위에서 본 고귀한 젊음.
전혀 색다른, 그리고 연이은 충격은 적엽명이라는 사람과
지냈던 옛날 기억을 현실로 끄집어냈다.
"저, 저 놈은!"
범위는 할 말을 잊은 채 멍하니 서서 적엽명을 응시했다.
그거 서 있는 곳에서는 적엽명의 모습이 명확히 보이지 않
았다. 성난 바다와 모진 비바람이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게
만든다. 하지만 앞돛을 움직이는 자가 늑대를 데리고 승선한
자라는 것만은 알아볼 수 있다.
그는 지금 두 가지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처음에 놀란 것은 배를 조정한 자가 선장이 아닌 외지인이
라는 점.
범위는 선창을 나오자마자 사태를 파악했고 고물 쪽으로 움
직였다.
선장 추형은 분명히 후장종범을 움직여 폭풍의 중심권을 벗
어나려고 할 것이다. 그것이 폭풍우 속에서 배의 중심을 잡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다.
뒷돛 종범을 활짝 펼쳐 맞바람을 받는다면 배가 빙글 돌게
된다. 최소한 지금처럼 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현상만은
모면할 수 있다. 앞돛과 뒷돛을 한꺼번에 움직이지 못하는 상
황에서 침몰을 모면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폭풍의 중심권으로 더욱 깊숙이 파고들
게 된다.
선수(船首)가 뒤바뀌면 배를 조정하기가 더욱 어렵고, 인간
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도대체 추형같이 능숙한 선장이 어쩌다가 폭풍의 중심권으
로 빨려들었단 말인가!
앞돛에서 들려온 소리는 위기에서 단번에 탈출하던지 아니
면 지금 바로 침몰하던지 양단 간에 빠른 결말을 유도했다.
- 사장을 활짝 펴라! 후장은 걷는다!
알아들었다.
고물 쪽으로 불어오는 바람은 그대로 통과시킨다. 대신 앞
돛을 최대한으로 펼쳐 방향을 전환시킨다. 운이 좋으면……
말 그대로 운이 좋으면 바람에 밀려 순식간에 폭풍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 바람이 배를 밀어주지 않고 퉁겨버린다
면……
침몰이다.
범위는 극(極)과 극(極)의 기로(岐路)에서 선장의 말을 받
아들였다. 그렇다. 선장이다. 선장의 명령이다. 만약 명령을
내린 사람이 외지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받아들이지 않았
을 게다. 천해원에게 명령을 내릴 사람은 선장밖에 없고 이물
(뱃머리)에서 들려오는 복창소리는 당연히 선장의 명령에 의
한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선장만큼이나, 어떤 면에서는 선장보다 더욱 바다를 아는
사람이라고 자부하면서도 선장의 결정을 따른 것이다.
바다에서만은 선장이란 존재가 절대 신으로 군림해야 한다.
학문이 낮아도, 무공이 낮아도, 바다에 대해서 아는 바가
부족하다 해도 선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으면 무조건 믿고
따라줘야 한다.
험난한 바다에서 사는 법이다.
노랫가락만 들리지 않았다면 뒷돛에서 움직이지 않았으리
라.
글자를 모르는 무지한 자들일지라도 입에서 입으로 회자되
는 노랫가락조차 몰라야 된다는 법은 없다.
정도가 문제였다. 적엽명이 부르는 노랫가락은 끊어질데 끊
어지고 이어질 데 이어지는 달인(達人)의 음정(音程)이었다.
이런 자는 둘 중에 하나다. 태어날 때부터 노래에 길들여진
음공(音工)이거나 문자를 배운 독서인(讀書人).
선장 추형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고집이 황소 같은 천해
원을 움직인단 말인가. 선장은 무엇을 하고 있기에 다른 사람
이 배를 조정하고 있단 말인가.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고 앞돛으로 이동하자…… 기가 막혔
다.
바다에서 자란 자도 아니고, 바다에 대해서 많이 아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바다에서 자랐는가? 바다와 배에 대해서 조금은 아는 듯 한
데?
아니다. 바다를 보통 잘 아는 것이 아닌데.
그러나 그를 더욱 놀라게 한 점은 다음이었다.
소도를 쳐대는 몸놀림과 종범을 끌어당기는 신력(神力).
'적어도 나보다 하수(下手)는 아냐.'
범위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이제 막 횡범 아딧줄을 하부에
고정시키는 적엽명의 등허림을 노려보았다.
"고수…… 유(劉) 매(妹)가 알고 있는 자……"
그는 고개를 돌려 상실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보았다. 유소
청이 삼판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는 모습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도대체 저 자가 누구이기에!
사내라면 목석(木石) 같이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유소청이
지대한 관심을 쏟는단 말인가. 이런 일은 처음이다.
적엽명 비건이 해남도를 떠난 이후, 유소청이 사내에게 관
심을 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범위는 음울하게 젖은 얼굴로 천둥번개가 무섭게 내리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쩌면…… 소청, 또 다시 네 마음을 찢어놓을지 모르겠구
나. 팔 년 전처럼……"
전신을 흠뻑 적시는 장대비가, 몸을 휘청거리게 만드는 해
일이 오히려 시원하게 느껴졌다.
"무공을…… 익혔다?"
한광은 눈을 가늘게 좁히며 삼판을 내려다보았다.
"하하하……! 이거 재미있어지는군. 그래, 이래야 말이 되
지. 우화가 고용한 살수라면 권각(拳脚) 쯤은 자유롭게 놀릴
수 있어야지."
한광은 눈길을 돌려 백포(白布)로 정성스럽게 감싼 시신을
사랑이 가득한 얼굴로 응시했다. 삼판을 바라볼 때의 차고 냉
정한 눈과는 전혀 다른 눈이었다.
"소예, 바다로 보내줘야겠구나. 바다는 어머니야. 바다 속
에 들어가면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처럼 포근해질 거야. 찌든
삶도, 더러운 인간도 없어. 소예…… 아!"
한광은 백포로 감싼 시신을 끌어안고 볼을 비볐다.
"이것만이 영원한 사랑이야. 이렇게 만나서 이렇게 헤어지
는 것이 영원한 거야. 우리는 서로 미워해야 할 일이 없어,
그렇지? 말다툼도, 싫은 모습도 보이지 않았고…… 우리는 서
로 깨끗한 인상만 간직하고 있어. 소예…… 이제…… 보내줄
게."
한광은 두 손으로 시신을 들어올려 하늘에 예(禮)를 취했다.
"이제 한 여인이 당신의 품안으로 돌아갑니다. 부디 이 여
인에게 평안을……"
휘익!
바다에 던져진 시신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휴우! 이제 이 놈 차례인가?"
추형은 발길에 채여 바다로 떨어졌다.
바다는 공평했다.
둘의 시신을 거의 같은 순간에 삼켜버렸으니.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