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4.23 -정재근 기자-
동서대 학교기업 애니모션이 제작한 영화 '숨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다의 숨소리'가 23일
개막하는 제2회 북경국제영화제에 초청되어 상영.
류상수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숨비'는
가파도해녀 3대 이야기를 소재로 한 영화.
류 감독은 가파도에 3년간 살면서 주민들의
삶 속으로 파고들었고 해녀들의 삶 속에 밀착.
그녀들과 함께 호흡하며 생생한 영상을 만들었다.
2010년 제주영상위원회 영상제작지원작 '숨비'
2012.04.23
가파도 해녀
2017.4.16
2017.4.16 제주도민일보/ - 조문호 기자 -
사진가 유용예 씨가 가파도에 머물며 담은 컷.
제주해녀의 생생한 모습이 가파도에서 공개된다.
유씨는 오는 22일부터 다음달 10일까지
가파도 하동마을길 담벼락에서의.,개인전
‘낮은섬 가파도 할망바다'를 연다고 밝혔다.
유씨가 2013년부터 작업한 작품 40여점을 전시.
‘해녀의 삶의 제주의 바람 같다’고 깨달은 유씨가
‘가만히 할망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면 섬을 감싸고 있는
처연하고 구슬픈 푸른 제주 바다가 가득하다’는 작품이다.
가파도 벽화길
2017.05.14
가파도 짜장면
2017.03.06
가파도 해녀들이 채취한 전복.
가파도 해녀의 집
청보리축제
가파도 청보리밭
가파도(加波島)·.
비양도(飛揚島)·우도(牛島)·
상추자도(上楸子島)·하추자도·
횡간도(橫干島)·가파도(加波島)·
마라도(馬羅島) 등 8개의 유인도와
54개 무인도로 이뤄진.,제주특별자치도.
제주 8개 유인도 중 2곳.,가파도 & 마라도.
제주 여행객들 중에서 상당수가 마라도를 찾는다.
그러나, 제주도와 마라도 사이의 가파도는 지나친다.
가파도는 제주 본섬에서 마라도보다 가깝지만, 외딴 섬.
생각 같아서는 마라도를 다녀 오는 길에 가파도에 내려
1박 하며 가파도를 보고 싶지만 그런 배편은 없다고 한다.
마라도에서 내려 가파도로 가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슬포항으로 찾아가면
가파도, 마라도 배편이 따로 있다.
.........2015년 1월 현재........
가파도 왕복 요금은 11,4,00원.
해상공원 입장료 별도 1.000원.
가파도 첫 출항 시간은., 09 : 00.
.........주의사항............
물때, 간조 현상으로 인한
결항이 발생 할 수도 있다.
...................................
가파도에 가서 가능하다면 선주(船主) 집에 민박하며
섬과 바다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도 싶지만,
가파도에 민박집이 10 여 군데나 있다기에 욕심을 접는다.
가파도는 모슬포항에서 5.5km 배로 20분 거리.
마라도와 가파도 사람들은 꾼 돈을 '가파도' 그만,
'마라도' 그만.,이라고 우스게 소리로 이야기 한다.
'옛날, 마라도와 가파도 주민들은 살림살이가 어려워
외상 뱃삯도 갚지 못할 만큼 힘들게 살던 시절에 생긴 말.
한편, 두 섬에 주민이 많지 않아, 후한 인심 때문에 생긴 말.
어떤 사람은 험한 풍랑 속에 갇혀있는 외딴 섬이라
'가지도 오지도 말아야 하는 섬'이.,'가파도 & 마라도.'
"가봐도 마라도 그만."이란 말이 지명으로 바뀐 것이란다.
'가파도 마라도 그만.'이라 할 만큼.,오지.
가파도에서는 '본섬' 제주도를 '뭍'으로 여긴다.
그러니까, 가파도는 본섬 제주도에서도 '섬 속의 섬'
가파도
비양도(飛揚島)·우도(牛島)·
상추자도(上楸子島)·하추자도·
횡간도(橫干島)·가파도(加波島)·
마라도(馬羅島) 등 8개의 유인도와
54개 무인도로 이뤄진.,제주특별자치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도에 속한.,8개 유인도
'섬속의 섬' 중 8번째로 외딴 섬.
가파도는 한반도 최남단에 위치한
'마라도' 보다도 훨씬 더 외딴 섬이다.
그뿐만 아니라
추자군도 북단의
횡간도보다 외딴 섬.
제주특별자치도
최북단에.,횡간도.
...................횡간도(橫干島).........................
추자군도(楸子群島)의 북단에 동서로 길게 뻗어 있어
"엄동설한의 북풍을 막아 준다."는 뜻말 지명이.,횡간도.
섬의 서쪽 끝과 동쪽 끝에 각각 높이 130m와 170m의 산.
두 산의 안부인 중앙 남쪽 해안 부근에 횡간마을이 있다.
.
1851년 주민들이 입도한 것으로 전해지며
1970년대 이전까지는 멸치잡이가 성행하였다.
횡간도(0.602㎢)는 제주시 북서쪽으로 52㎞ 해상.
2007년 현재 14가구에 21명 주민이 거주.
주민들의 노령화로 밭은 거의 휴경 상태이며
주 4회 추자항(楸子港)에서 정기여객선이 운항.
..............................................................
태양광 발전
추자도
바다낚시 천국.,추자군도
추자군도
횡간도는 추자군도를 찾아오는
외지 낚시꾼들이라도 많이 찾지만
가파도는 청보리축제 기간 동안에만
외지인들이 반짝 찾아오는게 고작이다.
송악산에서 바라본 가파도 & 마라도.
뭍에서 가파도를 보려면 모슬포에서 가까운
송악산(松岳山, 104m)에 가면, 내려다 보인다.
송악산은 약 3천년 전에 화산 폭팔로 형성된 山.
그 사실을 믿기 어려울 만큼이나
송악산은 생성 역사가 짧은.,화산.
거기서 바라다 보면 수평선 상에서
나즈막히 떠있는 접시처럼 보이는 섬.
혹시, 바다 속에 잠기지 않을까 걱정된다.
가파도는 접시를 뒤집은 덮개 형태라서 처음에는
개도(盖島). 개파도(盖波島). 가을파지도(加乙波知島),
더위섬, 더푸섬 등으로 불리다가, 이 근처의 바닷길 조류가
배가 난파할 정도여서 더할 '加', 물결 '波'., 가파도(加波島).
섬의 크기는 마라도 보다 2.5배(0.84㎡)
넓은 가오리 형태의 섬으로서 주민 600여 명이
농사와 어업을 생업으로 여기며 살고 있는 섬이다.
섬 주변 거의가 암초지대여서 '전복, 소라, 해삼, 멍게,
미역, 톳' 등 해산물이 풍부한., 황금어장이기 때문이다.
논은 없고 섬 전체가 밭농사인데 겨울 보리, 여름 고구마.
이는 여름에 불어오는 태풍을
막아 줄. 산이 없기 때문이란다.
가파도(加波島) 이야기.
가파도 해안선 길이는 4.2㎞에 불과한 작은 섬.
우리나라 유인도 중에서 해발고도가 가장 낮은 섬.
마라도에서 가장 높은 곳이 20.5m(마라도 39m)에 불과.
마라도에는 산은 커녕, 언덕 하나 없어
바다 위에 마치 멍석을 깔아놓은 것 같다.
해안과 마을 말고는 들판 전체가 청보리밭이다.
약 18만평 보리밭 지평선이 수평선으로 이어진다.
바람불 때마다 바다의 파도와 같은 리듬으로 물결친다.
가파도 보리는 향맥이라는 제주 재래종으로
일반 보리보다 키가 더 커서 1m를 훌쩍 넘는다.
초록빛 보리밭이 바람에 넘실대는 모습이 장관이다.
가파도에서 1박 하면 일출과 일몰을 한꺼번에 볼 수 있고
제주도 한라산, 송악산, 산방산, 단산, 고근산, 군산도 보인다.
제주도에서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까지 볼 수 있는 가파도.
가파도는 상동과 하동, 중동으로 마을이 이루어졌다.
100여가구 200여명의 섬 주민이 평화롭게 살고 있다.
마을의 담벽에는 소나무 그림 등 벽화가 그려져 있다.
소박한 섬마을이지만 주민들의 삶은 억세고 거칠다.
이 섬은 '블루코너' 험란한 해저지형을 갖고 있기 때문.
해안가 수심 10m까지 평탄하다가 깎아지른듯한 해저 절벽.
비석을 얹는 거북등 석물 형태와 유사한.,가파도.
가파도는 해저절벽 위에 높이 얹혀있는 고도(孤島).
마치, 바다 속에서 용궁이 해수면 위로 떠오른듯한 지형.
불교에서는 '현세의 불법이 전하지 않게 될 때
용왕이 용궁에서 경전을 수호한다.'고 전해온다.
바다 속에 있다는 설화 속 용왕의 궁전.,용궁(龍宮).
가파도는 파도가 세고 조류가 거센.,다양한 어류 서식지.
가파도 해녀 약 70 여 주민은 이곳 조류, 바람, 파도를 뚫고
전복, 해삼, 톳, 모자반, 성게 등 해산물을 건져올려 살아간다.
숨 비워야 물질이 가능한.,바다 어장.
생사(生死)의 경계선을 넘나드는.,고통.
한겨울에도 나잠으로 작업해야 하는.,물질.
마치, 용궁과 인간 세상을 넘나들듯이
물질하며 살아가고 있는 가파도 해녀들.
“물살이 세서 물질이 힘들지만
그만큼 가파도 해산물이 맛 있어
제주도에서도 값을 훨씬 더 쳐준다.”
가파도는 바다어장 덕분에
1970년대까지는 부촌이었다.
지금은 젊은이들은 떠나고 주로 노인들만 남았다.
'바람의 섬.' '풍랑의 섬.'답게 표류와 난파가 잦은 탓.
‘정이월 바람에 가파도 검은 암소뿔이 휘어진다.’ - 속담.
기묘한 형상의 검은 바위들이 늘어선 해안 절벽.
1653년 네덜란드인 하멜 일행의 배가 난파된.,가파도.
하멜표류기에 등장하는 케파트(Quepart)가.,곧 가파도.
여객선이 닿는 '상동~하동' 북쪽 해안가에는 무덤이 많다.
바람이 센 탓에 무덤은 다른 곳보다 낮게 썼다.
제주도 새끼섬들 중에서 식수가 넉넉한 편인 곳.
상동마을 옆 해안가의 고망물 & 하동의 동항개물.
가파도 돌담은 제주도 돌담들 중에서도 특이하다.
제주도 돌담 대부분 검은색 현무암으로 담을 쌓지만
이곳은 바닷물에 닳고 닳은 수석인 마석(磨石)을 쓴다.
바닷돌 하나하나가 훌륭한 수석이기에
제주도 밖으로 가지고 나갈 수 없는 수석.
마을이나 방파제 곳곳에 수석들이 놓여 있다.
집담과 밭담은 제주도의 다른 곳보다 성글게 쌓았다.
가파도 거센 바람이 숭숭 뚫린 구멍으로 지나가는 돌담.
가파도 돌담은 ‘바람을 막아주는 방벽'이면서 ‘바람의 통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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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제주' 가파도는 조선 중엽까지.,마라도처럼 무인도.
그러다가, 1842년(조선 헌종8) 제주목사가 나라님에게
진공(進貢)하기 위하여 가파도에 흑우장(黑牛場)을 설치.
가파도에 흑우 50두를 방목한.,흑우장(黑牛場).
그런데, 영국 군함 한척이 무단 상륙하여 흑우를 잡아
배에 싣고 서해로 떠나 버렸고 이 사건이 일어난 이후에.
40여 가구를 입주시켜 개간하게 한 섬이 가파도(加波島)다.
가파도에는 남북으로 2개의 선착장이 있지만
간만의 차이가 심하고 수심이 낮아 출입이 불편.
거센 풍랑과 조류가 부딪쳐 난파 사고가 잦은 해역.
조선 효종 때 이곳에서 네델란드 상선이 난파.
용머리 해안에 구사일생으로 표도한 난파 선원들
그들이 조선에 약13년간 억류 당한 기록.,하멜표류기.
하멜표류기는 조선을 서구에
최초로 알린 계기가 된.,기록물.
하멜 표류기.
가파도를 걷다 보면, 만나게 되는., 표지판.
'네덜란드 선박이 가파도에 표착(漂着)은 널리
알려진 사실.' 글귀는 기록과는 약간 차이가 있다.
하멜(Hamel. H)은 네덜란드 사람으로
1653년(효종4) 무역선 선원 중 서기였다.
이 배를 타고 대만에서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가다가
가파도 근해에서 난파되어 산방산(395m) 인근에 위치한
용머리 해안에 표도할때 64명 중 36명이 중상을 입게 된다.
"육지다! 육지!
우리는 육지로부터
한 바탕 거리 안에 있다."
정박을 시도하고 있을 때 세 겹의 물결이
배 안으로 닥쳐 들어와 배가 쪼개지니
선창에 누워있던 사람들은
나올 사이 없이 익사.
갑판 위에 몇사람은 바다로 뛰어내렸고,
나머지 사람들은 물결에 휩쓸려 가버렸다.
육지에 표착(漂着)한 일행은 64인
그때 중상을 당한 선원이 36인이니까
얼마나 참담했는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정오가 지나 세 사람을 보았는데
그중 한 사람은 소총을 갖고 있었고
그 나머지 사람은 궁시(弓矢)를 가졌다.
그들은 중국인 비스름한 복색을 하였으나
머리에 쓴것 만은 말총으로 짜 만든 모자였기에
우리는 그들이 중국 해적이 아닐까 하여 염려하였다.
그로부터, 저녁 때 쯤 되어서는
약 2천명의 기보병(騎步兵)이 닥쳐 와서
우리 천막 앞에서 전쟁 준비 열(列)을 지었다.
- 하멜 표류기(이병도 역주 : 일조각)-
'병사를 이끌고 온 이들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 없다.
난파 생존자가 36명인데 말이 통하지 않고, 문자도 다르다.
눈은 파랗고, 코는 높은데, 노랑 머리에 짧은 수염을 길렀다.
- 효종 실록., 권 11 -
領兵往視之 卽不知何國人
而船覆海中 生存者 三十六人
語音不通 文字亦異 碧眼高鼻 黃髮短鬚
이들은 '13년 28일' 동안이나 조선에 억류 되었다가
하멜을 포함한 8명이 탈출 후, 귀국하여 그중 서기였던
하멜이 쓴., '난선제주도난파기' & '조선국기'(朝鮮國記)'.
두 권의 책이 프랑스, 영국, 독일 등 서구의 나라에서
각국어로 번역, 간행 되었는데 그 중 '조선국기' 를 보면,
조선인을 사기꾼으로 묘사하는 둥 조선을 비하 하기도 한다.
하여, 독자로 하여금,
얼굴이 뜨거울 정도로
부끄러운 기록들도 있다.
서귀포 산방산에 가면 하멜기념비가 있다.
네덜란드와 한국의 우호증진을 위해 두 나라가
각각 1만 달러씩, 출연하여 산방산 용머리에 세운 비.
월드컵 4강에 진출한 한국축구 히딩크 감독.
그후 그 아래 바닷가에 그 배의 모형을 만들고
그 속에 대형 선박 기념 전시관을 개관하여 놓았다.
가파도 해안도로 산책.
가파도.,상동 선착장.
가파도는 제주도 부속도서 중에서 4번째로 큰 섬이다.
자연촌락으로는 북쪽 상동마을, 남쪽 하동마을이 있다.
상동 선착장에서 내려 하동마을 도착.
민박집에 여장을 풀고 섬 일주를 나선다.
해안선은 4.2km로 가장 높은 곳이 20m 언덕.
가파도에서는 해발 20m 언덕이 가장 높은 산.
마라도는 아기자기한 해안 절벽이나 초원, 등대,
종교시설, 전동카트 등이 아기자기한 관광지 경관.
가파도는 '마라도'로 가는 중간에 있는 섬이라
이방인이 얼핏 보면, 이렇다 할 볼 것조차 없는 섬.
그러나, 가파도는 순박한 인정이 살아있는.,고향 같은 섬.
가파도는 '바다의 나라.' 이고
'바다에 갇힌 나라'여서, 여기에서는.,
시간도 멈추어 서있는듯 한가롭고 고요하다.
가파도 섬 내에는 은행도 없고
가파도초등학교는 전교생이 19명.
바다는 섬사람들에게는 '삶의 터전'이어서
폭풍 같은 비바람은 무엇보다 두려운 존재였다.
그래서, 제주민들은 바닷가에다 신당(神堂)을 짓고
풍어와 바닷길 무사 귀한을 비는 1만 8천 신들이 존재.
하여, 제주에는 금기도 많고, 민간신앙 등 신당도 많다.
숙소에 짐을 벗어놓고 나서니
거기가 바로.,하동 선착장이다.
'신비한 까메기 동산/
하동마을 할망당 입구 '
이정표따 라 제방을 향한다.
파도가 워낙 거센 고장이라서인지
선착장의 방파제를 높이 올려 막았다.
인근에 있는.,유어장.
스쿠버 다이버가 작살로
고기를 잡으려면 15,000원,
바다 낚시를 하려면 2,000원씩.
받는 지역이라고 써 놓은.,입간판.
까메기 동산이란 방파제 밖의 해안선 너덜겅지대,
거기가 바다 낚시터, 그중에 둥글고 큰 바위가 있다.
'선사시대 고인돌'로 추정되는.,큰바위.
선사시대 후부터 이 바위에 올라가면
꼭 폭풍이 몰아쳐 현재까지도 관광객 및
원주민들도 절대 안 올라간다는 금기(禁忌).
'까매기'란 까마귀의 방언인데
여기서는 갈메기 방언으로 쓴다.
.
거기서, 얼마 안 간 곳에 '할망당'으로 오르는 층계가 있다.
아까, 상동부두에 닿았을 때 건너편에도 할망당이 있었는데
거기는 본향당으로 '큰할망당', 하동마을 그것은 '작은 할망당'.
하동 할망당은 2년에 한 번씩 열리는.,풍어제 원당.
가파도 원주민들이 신당(神堂)으로 여기는 곳이다.
상동 선착장 건너편에 있는.,할망당.
상동마을 원주민들이 1년에 한 번씩
객지로 멀리 나간 가족의 무사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할망당이자 해신당이다.
물론, 마을의 안녕과 번영,
고기잡이 나가서의 무사 귀환.
등을 기원하는 신당이기도 하다.
4월은 청보리가 여물어가는.,시절.
그 봄 물결이 바람에 너울거리고 있고
청보리 축제로 섬 일주 해안도로가 포장.
해안에는 파란 바다가 흰 파도로
억겁을 두고 만든, 기암괴석이 많다.
기기묘묘한 모양의 검은 현무암이
가파도 특유의 해안을 이루고 있다.
해안도로에는 가로수 대신에 자연석을
죽 세워 놓은 것이 석로수(石路樹) 같다.
해안 곳곳에 쉬어가라고
멋진 이름을 가진 정자들
방풍을 위해 돌담을 쌓아 놓은 풍경이
제주 특유의 경치를 보여주는 것 같다.
청보리 이야기.
'가파도 청보리 축제'란 말은 생소하다.
가파도 청보리밭 걷기 전통 낚시대회는 물론
'뿔소라 구이.' '젓갈 무료시식 행사.'도 있단다.
그때 맞추어 오면,
가파도 일정을 조금 더
즐겁게 겪게 되지 않을까?
사실 상, '국토의 최남단' 가파도라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봄이 오는 가파도.
18만평 청보리 밭이 푸르름을 자랑하는 외딴 섬.
여기서 기르는 청보리의 품종은 향맥으로
다른 지역보다 2배 이상 큰.,제주도 향토 품종.
가파도 사람들은 태풍이 몰려 올 적마다
사나운 태풍 속에 시달리며 사는 사람들이라
논농사를 짓지 못하는 대신에 보리농사를 짓는다.
겨울에 싹 트고
태풍이 불어오기 전에
수확할 수 있는 청보리 농사.
여름에는 고구마 농사를 짓는다.
집터와 도로를 빼면 모두가 농토인
가파도는 평탄한 지형에 비옥한 토양.
가파도 고구마는 전국에 알려진 특산물
청보리는 맥주회사에서 전량출하 계약 재배.
청보리 밭길에서는 흥겨워 휘파람을 불게 된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발을 멈춘다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
고운노래가 귓가에 들려온다.
♩♫ ♬
둘러 봐야
아무도 보이지 않고
저녁놀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
작사자 박화목은 6. 25 때
고향 황해도에서 부산으로
피난해 내려온 실향민이다.
1952년 피란지에서
고생이 오죽하였을까?
거기서 두고 온 고향의 보리밭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에다 윤용하씨가 작곡한 것이 '보리밭'.
그래서 노랫말에도 곡에도 한과 외로움이 풍긴다.
가파도에서 저녁 무렵 홀로
낯선 고장 청보리 밭을 거닐다 보니,
갑자기 스스로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다.
무엇이 남해 절해고도 가파도에
나를 이렇게 불러 오게 하였는가?
무엇이 나를
가파도의 청보리 밭
사잇길로 거닐게 하는가?
고인돌의 천국 가파도.
'고인돌'이란
말 그대로 돌을 고여
뚜껑을 덮은 선사시대의 묘
기원 전, 그속에 시체나 토기 따위를 넣었던.,돌 무덤.
납작한 돌을 세우고 그 위를 큰 돌로 덮는 북방식(北方式)
땅을 파서 석실을 만들고 그 위에 큰 돌을 얹는 남방식(南方式).
가파도에는 남방식 고인돌이 확인 된 것만도 56개.
가파도에 선사시대 고인돌이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첫째는 비옥하고 드넓은 농토, 둘째가 넉넉한 식수 때문.
'동항개물'에 돌담을 쌓아
약 20년 전에 만든.,고망물.
지금은 길가에 나와 있는.,샘물.
하동마을 해안도로 해안에 있는.,'고망물.'
그 옆에 세운 입간판이 이를 증언해 준다.
제주도에서 유일하게 '고망물' 샘물이 솟는 가파도.
옛날이나 지금이나 물 걱정이 없는 섬으로 유명하다.
이 고망물은 가파도 원주민들의 식수를 해결했던 곳,
그곳 우측 50m 샘물가에서는 개수 및 빨래터로 사용.
가파도의 무덤/ 고인돌.
그런데 위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가파도 주민들은 부모나 조부모 묘소는
돌로 바람을 막고 지극 정성으로 묘역을 정비.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파도 남방식 고인돌 군락은
선사시대 인류 역사의 유물인데도 방치되어 있는 편.
가파도.,고인돌 군락.
전 세계에 위치한 고인돌 대부분
한반도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전세계 고인돌 2/3를 보유한., 한반도.
구석기시대 유물이 발굴되고 있는.,가파도.
'화산섬' 비양도에서도 나타난 신석기시대 유물.
비양도는 약 천년 전 고려 때 생성된 화산섬이지만
최근 4~5천년전 신석시시대 '압날점렬문' 토기가 발견.
신구석기시대 고산리 유적지에서 발굴된 것과 비슷한 양상.
비양도는 '애기업은 돌' 전설로 보아
약 천년전 고려 때 화산폭팔 훨씬 이전부터
해녀를 비롯한 어민들이 살았던 곳으로 여겨진다.
불과 수천년 사이에도
이 일대가 뭍과 섬 또는
해저로 들락날락 거린 증거.
'구석기시대부터 현재까지
몇차례나 들락날락 거렸을까?'
적어도 화산섬 비양도에서부터 가파도까지는
구석기시대에 뭍으로 이어진 저지대였다는 증거.
가파도 고인돌은 제주 본섬 그것보다 2배 이상 많다.
기원 전 1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 사이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가파도 고인돌.
.
1986년부터 2006년까지 여섯 차례
전문가 집단에 의한 학술조사가 이뤄져
고인돌 석재 135기, 상석 추정석 95기 발굴.
제주지역의 고인돌 약 180기 중에서
가파도 60기 만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서귀포시는 제주도 문화재 지정을 신청한 이후
2015년까지 고인돌공원 조성 계획. (32만8940㎡)
시는 이를 위해 가파도마을회에 가파도 안에서 나오는
선사시대의 돌도끼나 돌칼 등 유물의 외부 반출을 막고,
유물이 발견되면 신고해 주도록 요청할 계획이라고 한다.
제주 지역에서 유일하게 누워있는.,가파도 고인돌.
탁자식 고인돌(강봉호 가파리 하리부락장)덮개돌의 성혈들.
고인돌에 새겨진 북두칠성 등 별자리.,성혈.
선사시대 목적지 뱃길 방향을 알리는 항해 좌표.
그러므로, 성혈 그 자체가 고인돌 임을 알리는 증거.
그런데도, 가파도 고인돌을 발굴 조사할때
유물이 나오지 않는다 하여 "고인돌이 아니다."
하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고 하니 한심한 노릇이다.
'된장이 똥인지 아닌지, 먹어봐야 안다.'는 격.
수천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몇차례 지각변동.
해저 거센 조류에 휩쓸려 제자리를 벗어났으리라.
해발 20m 접시 모양으로
해수면에 떠있는.,가파도.
제주도 일대 화산이 폭팔할때마다
거대한 해일이 가파도를 덮쳤으리라.
제4 빙하기 말, 지구온난화로 빙하가 녹아
산이 패여나가고 바다가 형성되며 화산 폭팔,
지각변동, 지구온난화, 대홍수 등을 겪은 저지대.
그 역사를 알 수 있는 지질박물관.,제주도 일대.
애월읍 하귀리 조간대의 세계 유일의 해중고인돌.
가파리에서 새로 발견된.,거북바위형 고인돌.
...................탐라국 주호족.................
'삼국지. 위지, 후한서, 동이전' 등 고문서에
탐라국 사람들은 '주호족.이라는 내용이 있다.
남북조시대 송나라 법엽이 쓴.,후한서.
'마한 서해의 큰 섬에 주호족이 있다.
'몸집이 작고 언어는 한족 같지 않으며
머리를 짧게 깍아서.,선비족과 비슷하다.
그들은 가죽옷 윗도리만 걸치고 아랫도리는 입지 않으며,
소, 돼지를 잘 기르며 배 타고 한나라와 왕래하며 교역한다.
..............................................................................
1세기쯤 있었던 한라산 폭발로 인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고 전하는.,주호족.
당시 가파도는 지금보다 광활한 저지대였던듯.
역사의 어느 한 시점에서는 분명히
'가파도 & 마라도'는 이어진.,저지대.
제주도에서 가장 오래된 선사시대 유적은
애월읍 어음리에 있는 어음동굴 유적이다.
1973년에 처음 발견된 이 동굴에서 수집된 유물을 보면
황곰과 붉은사슴, 노루, 그밖의 동물뼈 화석, 목탄 등 50점.
그것들 중에서 황곰의 경우는 거의 완전에 가까운 골체 화석.
그밖 사슴 등 동물뼈 화석 가운데는
석기를 사용하였던 흔적이 남아 있어
선사인이 먹고 버린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 유적의 편년을 고고학자들은 대체로
구석기 중기 6~7만년전 것으로 추정하며.
제주도에도 구석기인이 살았던 사실을 증명.
이때는 한라산 화산폭팔로 인해 제주가 섬이 되기 전.
황곰이 살던 시기는 대륙과 이어졌던 제 4 빙하기 이전.
즉, 제주가 연륙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해 주는 것이다.
이밖에도 서귀포 바위그늘 유적 등 구석기 유적.,몇 기.
이미 구석기 시대부터 제주에는 선사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구석기인이 제주인의 조상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 뒤에도 제주도에서는 화산 활동이 계속되었으며,
그때에는 섬이 되기 전이라 이동이나 피난도 가능했다.
신석기 시대에는 소수 집단이 흩어져 거주.
청동기 시대 이후로 오면 대거 집단화하는 경향.
이것은 농목 문화가 발달하면서 집단 생활의 필요성.
그렇다면, 고인돌 선사인은
언제 어디에서 어떤 문명을 갖고
제주도까지 들어온 어떠한 민족일까?
'제주 본섬' 원주민이었던 주호족 유목민 보다는
고인돌 저지대 민족들이 선진문명을 갖고 있었던듯.
고인돌 중 큰 것의 무게는 소 열마리 무게인 30톤 전후.
고인돌은 고래 한마리 무게와 비슷한 것으로 보아
고인돌 저지대 민족은 고래잡이도 하였을듯 추정된다.
잡은 고래 운반과정이 고인돌 무덤을 가능하게 한듯 싶다.
가파도 유적으로는 조개무지, 선돌, 고인돌군 등이 있고
민요로는.,잠녀 노젓는 소리, 방아질 소리, 맷돌질 소리. 등.
"이여싸아~ 이여싸어~
이여싸나 허~ 어기여라 어~
어기여라 어~ 어기여라 허~
우리나 부모 어~ 날 날적에~~
가시나나무~ 몽고지에서~~"
해산물모듬 +짜장면
국토 최남단 짜장면집
마라도(馬羅島)..
마라도(馬羅島).
현재, 마라도(馬羅島)는 일제 강점기 지명이고
조선시대에는 '수풀이 덮인 섬' 마라도(麻羅島).
지금은 초원 위에 '마라도성당, 등대'가 눈에 띈다.
조선시대 제주에는 국유방목장이 2 군데 있었다.
가파도에서는 말을, 우도에서는 소를.,방목하여 관리.
마라도는 '어마(御馬)를 관리한 곳.' 이라고도 전해온다.
1844년, 조선 후기 헌종때,
우도에는 .,진사 김석린이 정착.
그때, 우도에 마을이 처음 생겼단다.
마라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1883년(고종20년)
그당시, '대정골(현재 대정읍)에 살고 있었다.'는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도박 등으로 모든 재산을 탕진.
그가 살길이 막막해지자 주변의 친지들이
원님에게 그를 보내 마라도 개척을 건의한다.
제주목사가 인가하여, '김씨와 이씨, 라씨 등이
처음 이곳에 입도해 살게 되었다.'는 말이 전해온다.
그래서, 제주 본섬 사람들은 마라도에서 진 빚은
갚아도 되고 말아도 된다’는 말이 생겼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후로 마라도 경제적 상황은 달라지고 있다.
마라도는 TV 광고에 등장하면서 관광 붐을 타고
당시 ‘짜장면 시키신 분’이라는 대사가 세간의 화제.
최남단 섬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짜장면은 마라도 명물.
가파도를 거쳐서 마라도에 이르는 뱃길은
파도가 거칠고 변덕스러워 접근이 용이하지 않다.
특히, 가파도 마라도 사이는 물살도 빠르고 암초도 많다.
그러므로 큰 배는 암초에 걸리기 쉽고
작은 배는 풍랑을 만나면 뒤집히기 십상.
마라도 둘레에는 암초가 많고
물살이 급한 조류가 흘러 파도가
조금만 높아도 뱃길이 끊기기 일쑤다.
'그러한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모슬포~ 가파도' 사이 평균 수심은 15m 정도.
'가파도~ 마라도' 사이는 평균 130m.,해저 협곡.
제주도 주변에 분포되어 있는 부속도서는 수심 10m.
'마라도~가파도' 해저협곡 사이로 통과하는 조류(潮流).
밀물과 썰물이 하루에 두차례 반복되며 거센 물길을 형성.
헤저협곡은 제주도 연안을 따라 타원형으로 깊이 패여 있다.
밀물에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고
썰물에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기 때문에
'밀물은 '서귀포 앞바다~모슬포~한림 앞바다' 행.
썰물은 그 반대로 흐르는 물길의 통로가.,해저 협곡.
그래서, '가파도~ 마라도' 해저협곡의 조류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의 해류가 발생하게 되는 것.
그리하여, 물때를 놓치면, 뱃길이 끊어지기 일쑤.
마라도에서 가장 높은 곳은 해발 36m.
그곳에 마라도 상징인 등대가 서 있다.
1915년 세워진 등대는 섬보다 유명하다.
섬의 남쪽 끝에 있는
‘대한민국 최남단비’.
'대한민국 최남단'
마라도 해안 풍경.
.
마라도는 우리나라 ‘땅 끝’이라는 상징성 외에
2000년 섬 전체가 천연기념물(제423호)로.,지정.
국토 최남단 풍광과 해양 생태를 자랑하는 관광지.
서귀포시는 도서개발 특수시책사업의 일환으로
2017년까지 40억원을 투입, 마라도 살레덕항 개발.
“앞으로도 지역 특성에 맞는 관광기반시설을 확충해
국내외 관광객들이 언제나 찾고 싶은 명품 섬으로 조성.
주민 소득향상, 지역경제 활성화에 힘쓸 예정.” - 시 관계자 -
우리나라 최남단 섬으로 대정읍 모슬포항에서
남쪽으로 11㎞, 가파도에서 5.5㎞ 해상에 있다.
동경 126°16′, 북위 33°06′,
면적은 0.3㎢, 해안선길이 4.2㎞,
최고점 39m, 인구 100명(2008년 6월 현재).
섬 전체가 남북으로 긴 타원형이고
해안은 오랜 해풍 영향으로 기암절벽.
난대성 해양 동식물이 풍부하고 주변 경관이 아름다워
2000년 7월 천연기념물 제423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마라도는 바다물 속에서 화산이 분화하여
형성된 섬으로 추정되나 분화구는 볼 수 없다.
마라도는 등대가 있는 부분이 좀 높고
전체적으로 평탄한 지형을 이루고 있다.
섬 전체가 완만한 경사를 가진 넓은 초원.
섬의 돌출부를 제외한 전 해안은
새까만 현무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해안선은 대부분 해식애를 이루고 있는데,
북서해안, 동해안, 남해안은 높이 20m 절벽.
파도 침식에 의하여 생긴 해식동굴이 많이 있다.
육상식물은 모두 파괴되어 경작지나 초지로 변했으며,
섬 중앙에 조림한 해송이 더러 있으나 해산식물은 풍부하다.
난대성 해조류가 잘 보존되어 제주, 육지 연안과 매우 다른 식생.
녹조류· 갈조류· 홍조류 등 총 72종이 자생하고 있으며,
해면동물 6종,·이매패류 8종, 갑각류 4종 등은 미기록종.
마라도는 분출한 용암의 두께가 얇은
복합 용암류(compound flow)가 흘러
겹겹이 쌓인 현무암으로 형성되어 있다.
이러한 흐름은 파호이호이 용암의 특징 중 하나,
파호이호이 용암은 굳은 표면을 부풀리며 흐른다.
그 결과 용암이 만든 겉모양이 대개 고래등 모양이다.
선착장 부근에서 용암류의 단면을 볼 수 있고,
이곳 용암류 윗부분이 고래등어리처럼 부풀어 있고,
곳에 따라서 용암류 내부가 비어 있는 용암관을 볼 수 있다.
원래 마라도는 대정읍 가파리에 속했으나
1982년 4월 1일부터는 마라리로 분리되었다.
마라도는 울창한 원시림이 덮여있었던 무인도.
1883년(고종 20년) 모슬포에 거주하던 김(金)·나(羅)·한(韓)씨 등
영세 농어민 4, 5세대가 제주목사 심현택으로부터 개간 허가를 얻어
화전을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삼림 지대는 전부 불타 버렸다고 전한다
마라도는 서귀포시 대정읍 마라리
동경 126˚ 북위 33˚에 위치하며,
본섬을 뒤로 하고 동쪽으로 대한해협 건너
대마도와 日本 열도의 구나카이현과 마주하고
서쪽으로 南중국 상하이와 마주하는 북태평양 섬.
북쪽으로.,모슬포항 기점11km, 가파도 기점 5,5km.
그 너머로는 송악산과 산방산 용머리 해안이 있다.
마라도는 조선시대 개척 전까지는 금섬(禁島)으로 불리웠다.
제주민들이 신비스럽게 여기면서도 접근을 꺼렸던 섬이었다.
옛날에는 울창한 원시림으로 뒤덮혔고 해안에는 해산물이 풍부.
주변 지역 파도가 높고 기후변화가 심하여
당시 교통수단으로는 접근이 어려웠다고 한다.
그러나 간혹 날씨가 풀릴 때에는 배를 부리는 사람들이
섬에 상륙하여 나무를 베고 해산물도 채취하였다고 전한다.
조선시대 고종20년(1883) 모슬포에서
김씨, 라씨, 한씨, 이씨 등이 입도할때
마라도는 아름드리 숲이 울창하였다고 한다.
이주민들이 화전을 일굴때 누구인가 퉁소를 부는데,
많은 뱀들이 몰려와 놀란 주민이 숲에 불을 질렀단다.
타기 시작한 나무는 석달 열흘이 지나서야 불 길이 멎었고,
뱀들은 꼬리를 물고 바다 건너 제주 동쪽지방으로 건너갔단다.
그래서인지,마라도에는 뱀과 개구리가 없다.
또한 해안선은 기암절벽은 해저에도 깔려 있어
이 지역 해안에 패류 해조류 연체류 해산물이 풍부.
전복 소라 해삼 성게 미역 톳 등이 적지이고
예로부터 여름철 벵어돔과 자리돔은 유명하다.
마라도는 조선시대 1842년(헌종8년) 이전까지는 무인도
이 섬 해안에 전복, 소라 등이 무진장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섬은 모슬포에서 배 타고 들어온 해녀들의 어장.
마라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1883년(고종20년)
그 이전에는 모슬포 해녀들의 바다어장이었던 곳.
이곳 바다어장에는 인신공희 '애기업개' 전설의 고향.
인신공희(人身供犧)는 제사 때 산 사람을
신에게 제물(희생물)로 바친 것을 의미한다.
.......마라도 '애기업개 처녀' 전설......
풍랑을 잠재우기 위해 해마다 제사를 지내는 신당.
신라시대 만가지 파도를 잠재우는 만파식적 무속신앙.
인신공회 제물이 살아 돌아와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믿음.
'알영이 박혁거세와 함께 일으킨 나라.'.,신라.
'죽은 고래(용) 뱃속에서 나온 女兒'.,알영.
'신라 건국의 토템' 고래 해신은 부모가 죽은뒤
그 뱃속에서 나온 딸에게서 시작되었다.'- 삼국유사.
마라도와 가파도는 파도의 섬이다.
서라벌 남산 신이 내려려와 헌강대왕(憲康大王)이
함께 춤춘 상염무(霜髥舞)는 고래춤이며 곧 처용무(處容舞).
그때 남산 신이 "지리다도파(智理多都波)"
즉, '모든 파도의 이치를 안다.'는 뜻말.
마라도와 가파도는 파도가 잠들었다가
다시 파도가 일었다가 하는 파도의 섬.
모슬포 해녀들이 가파도를 지나 마라도까지 가서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는 물질은 '용궁환생.'
신라시대 수로부인(水路夫人)은 물질 해녀를 뜻한다.
'애기업개'의 '업다'라는 뜻말은
고래(거북) 등을 타는 것을 의미.
'거북등 비신'은 비석을 등에 업은 '애기업개'.
'심청전'의 심청이 '연꽃을 타고 용궁환생' 하는 것
'별주부전'에서 토끼가 거북 등을 타고 용궁환생하는 것.
고래(용) 뱃속에서 살아나온 신라시조 알영 여아,
수로부인, 에밀레 처녀, 심청전, 작제건 부인 용녀,
바리데기공주, 삼척 해신당 애랑처녀에 이어지는 전설.
모두 풍랑을 잠재우는 인신공희 처녀제물 전설.
고래 등에 올라타는 신화는 용녀(龍女) 신화이다.
'마라도 애기업개처녀당'은 모슬포 뱃사람들의 사당.
동해 감은사 앞바다에 풍랑이 일어난 뒤에
외뿔고래가 나타나자 그 뿔을 잘라 만든.,피리.
에밀레종은 인신공희 '에밀레' 처녀가 등장한다.
풍랑을 잠재우기 위하여 바다에 던져진.,에밀레 처녀는
나라의 근심을 잠재우는 에밀레 종소리로 환생하였던 것.
'마라도 애기업개' 여아는 '해신의 딸' 용녀(龍女)라는 믿음.
애기업개 여아는 마라도 바닷가에 버려진 것은
해신인 어머니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심청이 용궁에서 어머니를 만난다.'는 것과도 일치.
심청을 제물로 바친 '인당수'는.,백령도 앞바다.
심청이 용궁에서 황후가 되고 심봉사 눈을 뜨게 하고
모든 어려운 노인들을 불러 위로한다는 스토리.,심청전.
.............애기업개 전설...............
옛날에 모슬포 해녀들이 물질을 하러
배 타고 노를 저어 마라도로 건너갔다.
이씨부인은 '애기업개' 여아도 함께 갔다.
물질을 마치고 마라도를 떠나려 하자,
잔잔했던 바다가 풍랑이 일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 오늘랑 돌아갑주." "가야되큰게."
해녀들은 섬을 떠나 풍랑이 이는 바다를 건너
모슬포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제물이 필요하였다.
"어망도 아방도 없는 여아니 여기에 두고 가야쿠다."
이씨 부인은 애기업개 여아에게
바위에 널어놓은 기저귀를 가리키며
"아이고~ 느가 려강 저 지성귀 거뒁 오라."
애기업개에게 기저귀를 가지고 오라고 시키고는
이씨부인과 일행은 배를 타고 마라도를 떠나버렸다.
"나도 데려가줍서~. 데려가줍서. 제발 데려가 줍서~."
배에 탄 사람들은 차마 뒤돌아 볼 수가 없었다.
그곳에 혼자남은 '애기업개'는 모슬포 쪽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울었지만 멀어져가는 그 배는 돌아오지 않았다.
거칠게 일던 풍랑은 잠잠해져서
해녀들은 무사히 모슬포로 귀환.
............................................
그뒤 3년 동안 모슬포 해녀들은 무서워
그곳 바다어장으로 갈 수 없었다고 한다.
하여, 매달 1일 17일 27일에 제를 올린다.
애기업개를 위하여 그 자리에 당을 만들고
해상의 안전을 기원하는 제를 올리게 되었다.
지금도 제주해녀들은 마라도 애기업개 처녀당에서 제사를 지낸다.
처녀당은 비바리당, 할망당 등으로도 불리지만, 바리데기처럼 다시
살아 돌아와 이 세상의 풍랑을 마져 잠들게 하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애기업개 처녀당은 비바리당이라고도 하고 할망당이라고도 한다.
애기업개 여아가 바다의 여신이자 한라산 산신인 설문대 할망의 딸.
고래 해신과 한라산 산신이 '설문대할망'으로 받들어 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