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문학사전 - 갑오농민전쟁
hanjy9713
2023.10.17. 16:57조회 9
갑오농민전쟁
『갑오농민전쟁』은 1930년대에 『천변풍경』을 써서 유명한 작가 박태원이 북한에서 쓴 장편역사소설로서 북한에서 이 분야의 최고봉이라는 평가를 받은 작품이다. 1963년에 익산 민란을 소설화한 『계명산천은 밝았느냐』와는 별개로 갑오동학 혁명문제를 형상화한 이 작품은 3부작으로 되어 있다. 제1부는 1977년, 제2부는 1980년, 제3부는 1986년에 발표된 것이다. 특히 후반부는 병석에 있던 작가의 구술(口述)을 통해서 쓰여졌는데 나중에는 미망인인 권영희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한다.
1894년의 농민전쟁은 봉건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고 근대사회를 극복하려는 아래로부터의 혁명적인 변혁운동으로, 제국주의의 침략이라는 민족적 위기에 대응하여 민족의 자주성을 견지하려는 민족운동이었다. 이에 지배층인 양반들의 횡포에 농민계급을 대표해서 분연히 일어선 전봉준의 일대기와 함께 그를 주축으로 한 동학도와 총체적인 사회혁신투쟁의 역사적인 사실과 그 전말을 소설화한 역작인 것이다. 이 소설은 맨 처음 ‘차례’에 이어 등장 인물들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한 다음 본문으로 들어가고 있다.
제1부는 1892년 12월 초순, 호남벌 고부읍 양교리를 무대로 한 오수동의 외아들 오상민의 집에서 시작된다. 주인공 오상민이 전봉준의 영향으로 의식의 각성을 받음과 사회적인 성장 과정을 다루고 있는 동시에, 농민전쟁 폭발 전야의 각박한 정황을 제시하고 있다.
이 나라의 곡창으로 불리우는 호남벌.
그러나 이제는 무엇 하나 남은것이라고는 없는 그저 황량하기만 한 빈 들이다. 이따금 스산한 바람이 소리치며 그우를 지나가군 할 뿐.
1892년 12월 초순, 립동은 벌써 지났고 래일 모래가 소설···.
가난한 상민이네는 애써 농사를 지었으나 결국은 이진사와 관가에 의해서 모조리 빼앗기고 콩잎 팥잎으로 겨우 연명한다. 아홉 섬이면 올해에도 평년작은 되는 셈인데 절반을 지주 이진사에게 떼이고 수십 종에 이르는 가렴잡세를 다 물고 보니 겨우 종곡 내놓고 쭉정이 한 섬만 남는다. 그런데도 관가에서 온갖 명분으로 돈을 내라고 협박하는 바람에, 열 일곱 살의 상민은 노여움과 분노를 느끼면서 태인으로 옮겨간 스승 전봉준을 일념으로 생각하고 숭상한다.
1장에서는 오상민의 집안 형편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는데 오상민과 태인에서 훈장노릇을 하고 있는 전봉준과의 관계와 고부라는 지역이 동학혁명의 발상지임을 특징적으로 그리고 있다.
상민의 어머니인 한음전은 수배중인 상민의 아비 오수동이 죽은 것으로 알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 할아버지가 민란을 주도하다가 죽은 혁명의 가계인 오상민네는 1884년 갑신정변 때 개화파를 지원하다가 죽은 것으로 알아 왔던 아버지 오수동이 죽지 않고 살아 모처에 은신하고 있다는 소식을 칠성이의 방문으로 확인하게 된다.
실상 오수동은 황해도 수안 금점광산에서 노동을 하며 충의계를 조직하였고, 무기를 구입하여 서울에 그 근거지를 만들면서 가족에게는 연락을 하지 않고 있었다. 청일전쟁이 벌어진 시점에 서울로 가서 갑신정변에 가담한다. 광주 ‘두무개’서 살던 오수동은 1884년 갑신정변 때 아내 음전에게 “좋지 않은 소문이 들리거든 어머니와 상민이를 데리고 전주 구미리로 전생원을 찾아가라”는 말을 남기고 상경하였다. 시월 열아흐레에 동관대궐(창덕궁)에서 청국군사와 교전하여 총에 맞아 죽은 줄 알았으나 실상은 반동세력(민비, 청국세력)에 밀려 숨어 지내는 것이었다.
2장은 서울에 잠입한 오수동의 시선에 의해 서울의 시대적인 상황이 자세하게 묘사된다. 문호개방을 계기로 일본과 청국의 상인이 몰려와 뒤섞이고 있는 풍속이 묘사되고, 간고한 서민들과는 대조적인 사대부층의 삶이 형상화된다. 또한 호사와 무력에 빠진 왕실, 폭사와 흉계를 꾸미는 대원군과 민비의 거친 암투, 벼슬을 팔고 사는 궁중생활이 제시된다. 이를 지켜보는 가운데 오수동은 일심계라는 비밀조직을 결성한다. 그리고 정한순을 행수로 하는 ‘활빈당’이 등장하여 새로운 역사 형성력이 출연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3장에서는 신돌석이 돌연 등장하고 오상민의 집안 이야기가 중심부를 이룬다. 신관 구관 고마전과 동헌 안채 수리비로 한냥 닷돈을 마련하기 위해 상민은 두승산에서 나무를 하여 엽전 일백 쉰 닢을 마련하여 김첨지에게 바친다.
4장에서는 별명이 금송아지대감인 민영준을 매개로 하여 민비에게 7만냥을 바쳐서 고부 군수로 부임한 전 군수 조태순의 아들 조병갑이 허위와 간계로 선정을 베푸는 체하면서 실제로는 농민을 가혹하게 수탈한다.
5장에서는 보은에서 최시형, 손병희와 뜻이 맞지 않음으로써 새로운 항거의 무장화를 주장한 전봉준은 이들과 이탈한다. 전봉준은 여기서 ‘보국안민’과 ‘척왜척양’의 구호를 내건 가운데 뜻을 같이하는 접주 손화중과의 재회를 기약하고 서울에 있는 오수동, 정한순과 연대하기 위해 상경한다. 작가는 당시의 개혁세력을 동학(전봉준), 일심계(충의계, 오수동), 활빈당(정한순) 등의 범주로 설정하고 3대 저항세력의 합동을 다루고 있다.
동학도와 민중봉기로 나라가 소란해지고 각국 거류민의 보호 요청이 잇따르자 조정은 농민들의 항거를 다소라도 무마시키기 위해 종로 네거리에서 부정부패한 몇 사람의 죄인을 본보기로 다스리는 궁여지책을 꾸미는 한편, 청병을 끌어들여 농민투쟁을 진압할 계책을 꾸민다. 오수동과 정한순과의 협조를 확약한 전봉준은 다시 귀향한다. 전봉준을 만난 오상민은 30년 전에 ‘익산민란’에서 10명의 주모자에 끼어서 교수당한 할아버지 오덕순의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그 한을 풀겠다고 다짐을 하고, 염동을 통해서 검술을 배운다.
가을이 되자 조병갑은 농민들을 강제 동원해서 막은 만석보와 팔왕리봉에 중한 물세를 매기고, 3년간은 물지 않기로 했던 개간한 땅에 대해서도 세미를 징수하고 심지어는 그 황무지에서 베어 온 억새의 값까지도 받으라고 아전들을 독려한다. 조병갑은 청원서를 낸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을 옥중에서 살해한다. 이로 인해 원한과 분노에 찬 농민들은 고부에서 격문을 내걸고 봉기하여 갑오농민전쟁의 불길이 마침내 고부에서 타오른다. 이상의 제1부는 배경사(背景史)인 동시에 주인공 오상민의 성장과 함께 계급의식의 자각과 혁명의식의 성숙과정을 그린 것이다.
제2부는 농민 전쟁의 발단이 된 고부에서의 농민 봉기에서 비롯하여 전주성 진입까지의 3개월에 걸친 싸움을 다룬 것으로, 종교적 외피(外皮)를 하고 있는 동학혁명의 본질을 계급의식의 수준에서 접근된다.
1장은 오상민과 그의 애인 영아를 그리고 있다. 1894년 정월 전봉준의 지휘 아래 오상민, 염동이, 돌석 등이 이끄는 농민군들이 마침내 탐관오리 조병갑의 고부관가에 돌입한다.
2장은 악덕지주 이 진사와 그의 집안 묘사를 서자인 상무와 그 어미 오씨(이쁜이)의 박복한 운명과 하인으로 언년 어머니, 금녀, 길남이, 문 서방, 짝쇠, 서분이, 복만 등이 등장하여 희화적으로 보여준다. 스물 다섯해 전, 이쁜이가 열일곱 살 때 나주에서 소작하던 아버지가 유랑하다가 이쁜이가 감기에 걸리자 오서방 내외는 ‘이 승지댁’에 이쁜이를 맡겼었다. 아기를 가진 건넌방 아가씨가 몸을 풀러 본가로 떠난 날 밤, ‘서방님’이란 위인이 뛰어 들어 ‘상무’를 갖게 되어 첩으로 삼게 된 것이다. 스물 한 살의 상무는 전봉준을 찾아 흉악한 토호인 이진사의 아들인 운명을 저주한다. 한 냥을 빌리는 댓가로 하인으로 들어온 서분이는 오빠 순돌이 넉냥을 마련하여 가져오지만 이 진사 마누라는 해마다 곱으로 해서 네 해가 지났으니 서른두 냥을 가져오라고 한다. 어머니가 병이 위독해 서분을 한번만 보고 싶어하니 사흘만 보내 달라고 하지만 거절당한다.
3장은 이 진사 집안의 종문서 파기행위와 전봉준과 고부군수의 잠정적 대결을 그리고 있다.
4장에서는 “새야새야 파랑새야”의 민요 유행에 대한 묘사를 하고 있다. 군수 조병갑은 도망가고, 탐학했던 이 진사 집도 오상민에 의해 부서진다. 땅문서, 빚문서, 종문서가 태워지고 예속과 수탈 속에서 살아왔던 종과 천민들은 마침내 자유인이 되고 큰 힘으로 농민군에 합세한다. 그런데 함께 봉기하기로 한 이웃 고을에서 반응이 없고 대오마저 동요가 일자 전봉준은 일단 전열을 분산한다.
5장에서는 안핵사의 보복을 그리고 있다. 왕명으로 고부의 안핵사로 파견되어 온 이용태는 양교리에서 양민들에 대하여 잔인한 학살을 자행하고, 오상민은 전봉준의 지휘 아래 수악산 용천사에서 농민군을 집결, 태인에서 봉기한다. 호남창의소 명의로 창의문을 내걸고 태인 관가로 진입한 상민의 총포대와 창검대는 군수와 관료들을 징벌하고, 무기고를 접수한다.
6장에서 활빈당, 일심계, 동학(적극파, 전봉준)의 관계 묘사를 하고 있다. 전봉준은 ‘보국안민(保國安民)’과 ‘척왜척양(斥倭斥洋)’을 내걸고 접주 손화중과 재회를 기약하고 오수동과 정한순과 결속하기 위해 상경한다.
7장에서는 1894년 3월 29일 고부의 호남창의소와 ‘갑오세’ 노래의 유행과 그 민심동향을 그리고 있다.
8장은 관군 800여명과 양총무장의 인원과 그에 가세한 보부상 9천 여명의 대부대와 동학군과의 대결이 묘사된다.
9장에서는 황토현 전투가 시작된다. 태인봉기를 따라 농민봉기는 불길처럼 일어나고, 정한순과 오수동이 참여함으로써 결집된 봉기군은 홍계훈이 이끄는 관군과 접전하여 황토현에서 토벌군을 무찌르고 전주성에 입성한다. 대장 전봉준의 오른팔격인 오수동은 33년 전 익산 민란의 희생자 오덕순의 아내인 노모와 아내 음전과 손녀며느리 영아와 함께 전주성으로 향한다.
제3부는 전주성에 입성한 전봉준 휘하의 동학군이 한동안 기세를 올린다. 그러나 관군과 그에 결탁한 일본군의 출병 기미가 보이자 전봉준은 전주화의를 제기한다. 그러나 청일 양국은 전쟁을 일으켜 조정을 간섭하고, 김홍집을 내세워 합병을 획책한다. 이에 분개한 농민군은 다시 ‘삼례’에 모인다. 결국 전봉준의 주전론(主戰論)으로 기울어져 관군 및 일본군의 연합군과 싸움을 벌인다. 그들의 공격으로 동학군은 괴멸되고 전봉준은 서울로 가서 후일을 기약하려다가 피노리에서 김경천의 밀고로 붙잡혀 서울에 압송되어 처형된다. 이 처참한 광경을 오상민만이 남아서 지켜보게 되는 것이 3부의 핵심이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양호 초토사 홍계훈은 계책인 줄도 모르고 전봉준의 대장기만 따라 강진까지 내려가며 살인 방화 겁탈을 일삼다가 귀로에 장성에서 이학승이 거느리는 관군이 패한 것을 알고 놀란다. 정읍 태인을 거쳐 전주까지 와 보니 전주성은 이미 농민군 손에 떨어진 뒤라 완산칠봉에 진을 치고 조정에 외국 군대를 청해달라고 파발을 보낸다. 왕 이형은 봉기군에 의해 서울 공략의 위협을 느끼고, 민비는 민영준을 통해 원세개에게 출병을 요청한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청나라에 원병요청한 급보를 받은 일본은 ‘조선출병안’을 채택하고 미리 짜놓은 무력침공계획에 따라 6월 6일 8000명의 일본군을 출병시키고 상황은 반전된다.
정한순으로부터 일본군이 상륙했다는 급변한 정세를 전해들은 전봉준은 눈물을 머금고 관군과 강화를 한다. 12조의 폐정개혁안을 제출하고, 53개 군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민간의 서정을 처리하게 한다. 왕은 고성의 삼일포로 유람을 간다. ‘전주화의’가 이루어지고 조선정부에서는 동학농민군이 진압되었으니 청 일 양군이 철퇴하여 달라고 요청하지만 일본은 조선의 내정을 개혁하기 전에는 철병하지 않겠다고 한다. 오오또리 일본공사는 조선정부는 청병을 조선에서 물러나게 하여 독립국임을 증명할 것, 청국과 일체 조약을 파기할 것, 일본군 진영을 만들어 줄 것 이상의 3개 조항을 제시하고 회답이 없자 일본은 돌연 경복궁을 포위 공격한다. 이리하여 민영익, 민영준, 심상훈 등의 친청정권은 무너지고 김홍집을 수반으로 하는 친일정권이 서게 되고 일본군은 동학군 토벌을 자진해서 맡는다.
농민군이 재기하여 삼일포로 집결하고 여산에서 관군과 접전한다. 노획한 총과 전리품을 나누어주는 전봉준을 관군복을 한 왜놈이 저격하려 하자 오수동은 몸으로 막고 총탄에 맞아 숨진다. 농민군은 총진격하여 공주를 점령한다. 전봉준 오상민이 이끄는 농민군은 승리를 하기도 하지만 세성산 전투에서 화력이 우세한 일본군에게 진격을 저지당하고,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의 막강한 화력에 공격을 받음으로써 그 기세가 현저하게 약화된다.
지쳐서 정신을 잃은 전봉준을 현숙한 여인의 집에서 치료하도록 하고 오상민은 군사를 이끌고 장성의 입암산성으로 간다. 적의 군사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은 농민군은 노령에서 크게 패한다. 패전의 실의와 피곤 속에서 재기를 다짐하는 전봉준은 오상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피노리 주막집에서 일본군과 결탁하여 출세의 공명심에 들떠있는 김경천의 밀고에 의해 잡혀서 압송된다. 상민은 김경천을 처치하고 관군의 총에 맞아 쓰러지지만 대둔사 주지승에게 구출된다.
정한순, 상민, 봉득이 등의 구출노력도 허사로 돌아가고, 일본 영사관 감방에 감금당한 전봉준은 “너희는 나를 죽일진대 밝은 종로네거리에서 목을 베어 오고 가는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이 옳은 일이거늘 어찌 나를 캄캄한 적굴속에서 죽이느냐 내 우둔한 탓에 너희 놈들 손에 죽는다만 머지 않아 꼭 현인지자가 나타나리라”라고 꾸짖고 마흔한 살의 나이로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진다.
얼마후 한 총각이 금화산 아래 외딴집 울타리 밖에 발길을 멈추고 서 있었다.
소꿉놀이하며 부르는지 어린 계집애의 파랑새 노래소리가 울안에서 들려나왔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말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사 울고간다
한 손으로 삽짝 문기둥을 잡고 서서 이윽토록 노래를 듣고 있던 총각은 마침내 흑! - 흑! -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선생님! 선생님은 가셨지만 선생님을 추앙해 부르는 저 노래는 먼 후날까지 불리워 질것입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 제 폐부에 새겨 잊지 않겠습니다. 부디 안심 하소서.》
하며 보에 싼 물건을 손으로 으스러져라 움켜쥐였다.
그는 상민이였다.
이윽하여 말탄 세 사나이가 노을을 안고 금화산 기슭으로 사라져갔다.
그는 상민이와 봉득이 그리고 최공우였다.
결국 이 작품은 계급투쟁 민족해방, 노동계급의 고양된 의식 등의 정치적 목적의식을 뚜렷이 표방하고 있다. 부정적인 인물에 대한 노여움의 감정이 고양되어 있고, 그 인물들은 희화적으로 묘사된다. 반면 주인공 오상민은 반봉건ㆍ반침략의 농민 영웅으로 형상화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