禮山 德崇山 修德寺 柱聯
(예산 덕숭산 수덕사 주련)
예산의 수덕사修德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의 본사로,
우리나라 8대 선종총림 중 하나인 덕숭총림德崇叢林이다.
창건과 그 이후 역사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있지 않아
절의 연혁을 알 수 없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 말
숭제법사崇濟法師가 창건하고 고려 공민왕 때
나옹선사懶翁禪師가 중수했다고 한다.
수덕사를 안고 있는 산 이름은 '덕숭德崇', 동네 이름은 ‘덕산德山’,
그래서 절 이름은 ‘수덕修德’, 이렇게 3덕德이 모여 있다고 한다.
서해를 향한 차령산맥의 낙맥落脈이 만들어 낸
덕숭산은 북으로는 가야산, 서로는 오서산烏棲山 ,
동남간에는 용봉산龍鳳山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다.
"백제는 승려와 절과 탑이 많다"라고 중국 사서史書인
북사北史, 수서隨書, 주서周書에 기록되어 있다.
그 문헌에 나타난 백제 사찰은 흥륜사興輪寺, 왕흥사王興寺,
칠악사漆岳寺, 수덕사修德寺, 사자사師子寺,
미륵사彌勒寺, 제석정사帝釋精寺 등 12개가 전하지만
현재까지 큰 규모를 유지하고 있는 사찰은 수덕사뿐이다.
일설에 의하면 수덕사는 백제 599년 (법왕 1)에
지명법사知命法師가 창건하고 원효元曉가 중수했다고 한다.
반면 또 다른 학설로 백제 사찰인 수덕사는
백제 위덕왕 (威德王, 554~597) 재위 시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도 하고 있는데, 수덕사 경내 옛 절터에서 발견된
백제와당百濟瓦當은 백제시대에 창건했다는 설을
방증傍證할 수 있는 자료라고 한다.
수덕사의 고려시대 유물로는 충렬왕 34년(1308)에 건축된
대웅전과 통일신라 말기 양식을 모방한 삼층석탑,
수덕사 출토 고려자기, 수덕사 출토 와당 등 있다.
임진왜란으로 대부분의 가람이 소실되었으나
수덕사 대웅전은 다행히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1937~40년 보수 당시 발견된 대웅전 동측 내부 전면에 기록된
단청개칠기丹靑改漆記에 의하면 중종 23년(1528)에 대웅전 색채보수,
영조 27년(1751), 영조 46년(1770)에 대웅전 보수,
순조 3년(1803)에 대웅전 후면의 부연보수와 풍판의 개수 등
4차례 대웅전 보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673년 조성된 수덕사 괘불과 18세기 제작된 수덕사 소종은
조선후기 수덕사의 꾸준한 불사 활동을 보여주는 유물들이다.
조선시대 말에는 경허선사鏡虛禪師가 선풍을 일으킨 뒤
1898년(고종 35) 그의 제자인 만공滿空의 중창으로 번성하였으며
현재는 36개 말사를 관장하고 있다.
주요문화재로는 수덕사대웅전(국보 제49호), 3층석탑
(지방유형문화재 103호), 수덕사7층석탑, 육괴정, 황하루,
근역성보관, 사리탑 등이다.
일반적인 산사의 가람배치처럼 수덕사도 대웅전을 중심으로 하고,
대웅전 양옆에는 스님들이 수도하는 승방인 백련당과 청련당이 있다.
이외에도 경내에는 명부전, 염화실 등의 건물이 있으며,
경외의 암자로는 만공이 참선도량으로 세운 정혜사定慧寺를 비롯해서
일엽스님이 삭발하고 수도했다는 비구니 참선도량인 환희대歡喜臺와
견성암見性庵, 만공의 영정과 유물이 보관되어 있는 금선대金仙臺
진영각이 있으며, 현재 이 절의 말사末寺는 66개에 이른다.
수덕사 일주문은 도톰하게 깎은 돌기둥 두 개에
기와지붕을 얹고 있다. 덕숭산수덕사德崇山修德寺’라고 쓴
현판은 손재형孫在馨의 글씨이며, 지붕의 처마에는 붉은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이 조각되어 있다.
소전素筌 손재형은 서書와 문인화文人畵를 모두 잘 했으며,
성당惺堂 김돈희金敦熙의 제자로 현대 한국 서예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글씨는 1962년에 쓴 것으로,
당해唐楷의 뼈대위에 전서의 획법劃法을
담은 소전 특유의 원윤圓潤한 행서이다.
이어 금강문, 사천왕문을 지나 황하정루黃河精樓,,
대웅전(국보 제49호)을 중심으로 좌우에 명부전冥府殿을 비롯한
백련당白蓮堂, 청련당靑蓮堂, 염화실拈花室, 심우당尋牛堂,
무이당無二堂, 황하정루黃河精樓,
범종각梵鐘閣, 법고당法鼓堂, 조인정사祖印精舍 등이 있다.
1. 修德寺 大雄殿 柱聯 :
(수덕사 대웅전 주련)
天上天下無如佛 (천상천하무여불)
천상천하 어느 곳에도 부처님같이 거룩하신 분 없나니
十方世界亦無比 (시방세계역무비)
시방세계 어디에도 비교할 데 없네
世間所有我盡見 (세간소유아진견)
세상천지 온 누리 다 돌아보아도
一切無有如佛者 (일체무유여불자)
부처님같이 존귀하신 분 다시없도다.
* 수덕사 대웅전은 1308년 (충렬왕 34)에 건립된 건물로서
건축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대웅전 안에는 중앙의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약사불, 아미타불의 삼세불이 모셔져 있다.
이 목조삼세불좌상 (보물 제1381호)은 만공이 전라북도 남원에 있는
만행산 ‘귀정사歸淨寺’로부터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 대웅전 앞마당에는 여래탑이라고도 불리는
삼층석탑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3호)이 있으며,
1936년 대웅전 중수 때 발견된 벽화는 건립 당시의 것으로서
주악공양비천도奏樂供養飛天圖, 수화도水花圖, 야화도野花圖,
금룡도金龍圖, 오선도五仙圖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서까래에 희미하게 금룡도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 수덕사 대웅전은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49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3칸, 측면 4칸의 단층 맞배지붕 주심포柱心包 집이다.
가구수법架構手法이 부석사 무량수전과 흡사하며
세부양식 역시 비슷한 점이 많지만 중요한 차이점은
그 구조, 장식, 양식, 규모, 형태 등에서 발견되었다.
외관은 각 부재部材가 크고 굵기 때문에 안정감이 있어 보이고
측면은 특히 아름답다. 약간 배흘림기둥을 연결하는 경쾌한
인방引枋, 고주高柱와 평주平柱를 잇는 퇴보,
고주간을 맞잡는 대들보 등의 직선재直線材와 이들을 지탱하는
다분히 장식적인 포대공包臺工, 그리고 곡률曲率이 큰
우미량牛眉樑들이 이루는 조화와 이들이 흰 벽을 구획한 세련된 구도는
한국 고건축의 아름다움을 대표할 수 있는 가장 뛰어난 것이다.
현존하는 고려시대 건물 중 특이하게 백제식 곡선을 보이는 목조건축이다.
건립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서
(1308년), 다른 건물의 건립연대를 추정하는 기준이 되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 대웅전은 국내에 현존하는 목조건물 가운데
건축 시기가 명확한 것으로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한반도 목조건축물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문화재이다.
안동 봉정사 극락전 (국보 제15호)과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국보 제18호)은 수덕사 대웅전보다 앞선 시기에 건립됐다 보지만,
두 건물이 언제 건립되었다는 기록은 남은 것이 없고
중수 기록만 전해져서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다.
따라서 봉정사 극락전과 부석사 무량수전은 중수 기록과
건축양식 등을 통해 대략적으로 건립연대를 추정하여
수덕사 대웅전보다 앞서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 그리고 삼층석탑, 수덕사 출토 고려자기와 와당 등은
고려시대의 수덕사 사세를 보여준다.
현대에 와서는 근대 선품禪品을 진작시킨 경허스님과 만공스님에 의하여
수덕사는 한국 선과 불교의 중흥처가 되었다.
만공스님의 문하로는 벽초스님과 혜암스님을 비롯한
수많은 스님들에 의하여 한국 근현대의 선맥을 잇고 있다.
* 만공선사께서 건립한 7층석탑은 기단부 없이 바로 탑신과
옥개석으로 되어 있다. 기단 면석 밖으로 두드러지게 우주隅柱를
표현하였고, 면석에는 두께 10Cm 정도의 사각 테두리가 둘려져 있다.
탑신부의 옥신屋身은 없는데, 옥신 대신 4개의
정사면체 석재를 주춧돌처럼 놓아 1층 지붕돌을 받치고 있다.
각 층의 면석과 지붕돌은 별개의 돌로 이루어졌고,
면석 마마에는 우주와 창방이 표현되어 있으며,
지붕돌은 2단의 지붕돌 받침을 가지고 있는데 반전이 매우 심하다.
상층부에는 찰주擦柱, 보주寶珠, 보륜寶輪이 올려져 있다.
대체로 간결하면서도 세련된 느낌을 주는 탑이다.
2. 修德寺 梵鐘閣 柱聯 (前面) :
(수덕사 범종각 주련-전면)
報化非眞了妄緣 (보화비진료망연)
보신과 화신은 마침내 허망한 인연이요
法身淸淨廣無邊 (법신청정광무변)
법신은 청정하여 광대무변한지라
千江有水千江月 (천강유수천강월)
천강에 물이 있으니 천강의 달그림자도 천 개요
萬里無蕓萬里川 (만리무운만리천)
만리에 구름이 없으니 만리 하늘이도다
梵鐘閣 柱聯 (後面) :
(범종각 주련 -후면)
願此鐘聲邊法界 (원차종성변법계)
원컨대 이 종소리 모든 법계에 두루 퍼지고
鐵圍幽暗悉皆明 (철위유암실개명)
철위 지옥의 모든 어둠도 다 밝아지며
三途難苦破刀山 (삼도난고파도산)
삼도와 도산지옥의 고통에서 벗어나
一切衆生成正覺 (이체중생성정각)
모든 중생을 바로 깨닫게 하여 주소서
3. 修德寺 法鼓閣 柱聯 (前面) :
(수덕사 법고각 주련-전면)
三界猶如汲井輪 (삼계유여급정륜)
삼계三界는 마치 우물의 두레박처럼 돌고 돌아
百千萬劫歷微塵 (백천만겁역미진)
백천만겁의 많은 세월을 지내도다
此身不向今生度 (차신불향금생도)
이제 이 몸 금생에서 제도濟度 못하면
更待何生度此身 (갱대하생도차신)
다시 어느 생을 기다려 제도할 것인가
法鼓閣 柱聯 (後面) :
(법고각 주련-후면)
범종각 주련 후면과 동일함.
* 사찰에서는 소리로 들리는 도구로 불전사물佛殿四物이 있는데
범종, 법고, 운판雲版, 목어木魚가 그것이다.
보통은 범종각을 크게 지어 함께 사물을 두지만, 수덕사에서는
범종각엔 범종만 두고 법고각에 법고와 함께 운판과 목어를 두었다.
양 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집으로 팔작지붕이며,
범종각에는 1973년에 조성된 무게 6,500근의 종이 봉안되어 있다.
* 수덕사 황하정루黃河精樓는 대웅전을 보호 하고 사세를 안정시키는
중요한 전위누각前衛樓閣으로 1985년 불사를 시작하여 1992년
준공하였으며 1994년 법장스님에 의해 이전 개축되었다.
황하정루라는 명칭은 덕숭총림 방장 원담스님이 명명한 것으로
'황黃‘은 부처의 정신을 뜻하며 ’하河‘는 큰 강이 흐르듯
‘정진精進'’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현재 이 누각의 지하에는 박물관인 근역성보관이 있고
지상 일층은 스님들이 거쳐하시는 요사로 이층은
강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건물에 걸려있는 ‘선지종찰수덕사禪之宗刹修德寺’와
‘황하정루黃河精樓’과 범종각의 현판은 수덕사 방장이신
원담圓潭 진성眞性(1926 ~ )스님이 쓴 글씨이다.
* 수덕사 환희대歡喜臺는 비구니들이 기거하며 견성암見性庵은 수도하는 암자로
김일엽金一葉 스님이 주석하셨다가 열반하신 곳으로 1926년 창건되었다.
계곡물이 흘러내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조그만 다리를 건너면
잘 꾸며진 원통보전이란 전각과 함께 두어 채의 요사채로 이루어져 있다.
일엽 스님의 아들 일당日堂 스님 김태신金泰伸은 자서전
‘어머니 당신이 그립습니다’에서 아래의 일화를 밝혔다.
일당 스님은 2014년 12월 25일 새벽 1시에 향년 93세로 원적에 드셨다.
일당 스님은 1922년 9월 일본의 도쿄에서
‘오다 세이죠’라는(-태전 청장-당시 법학도·일본황궁을 지은)
세계적인 은행가 아들과 당시 유학중이던 한국의
신여성 김일엽 사이에 태어나 한일근대사의
굴곡과 오욕의 역사를 온몸으로 살아낸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로 꼽힌다.
‘일당스님의 부친’인 오다 세이조는 아버지를 은행 총재로 둔
일본최고 명문가의 아들이며 당시 규슈제국대 학생이었다.
그러나 남자 부모님의 반대로 결혼하지 못하고 헤어지는 아픔을 겪는데,
이때 둘 사이에 아들<일당>이 하나 태어난다.
이 아들은 아버지 친구의 양자로 입적되어 자라나게 되며
이 사람이 한국과 일본에서 인정받는
유명한 동양화가 일당 '일엽스님의 아들'
스님이며 이름이 '김태신'이다.
일당스님은 지금도 김천의 직지사에서 활동 중이며
해방직후 김일성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김일성 종합대학에 지금도 걸려있다 한다.
당시 그 일로해서 조총련계로 오해받아 작품 활동에 고초를 겪기도 했다.
오다 세이조와의 사랑도 아픔으로 겪은 그녀는 곧 일본에서 돌아와 수덕사의 여승이 된다.
자신이 추구하는 사랑이 세파에 으스러지는
아픔을 이겨내고 또 다른 참 인생의 행로를 불자의 길로 선택한 것이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 어린 아들이 수덕사를 찾아 왔는데 불자가 되었으니,
“속세에 맺어진 너와나의 모자 인연은 속세에서
끝났으므로 더 이상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라” 하며
모질게도 모자의 정을 끊고자 이역만리 찾아온 어린자식을 절 밖에 재웠다 한다.
이때 김일엽의 절친한 친구인 나혜석이 수덕사 밖에 있는 수덕여관에서 같이 지내며
어머니처럼 자신의 젖가슴도 만져보게 하고 그림도 가르쳤다고 한다.
그때 흘리지 못한 눈물이 가슴에 쌓여 해탈로 녹아내렸을까?
비구니로써 그의 인생이 한국 불교계에
큰 족적을 남길 만큼 성공적인 것은 우연이 절대 아니다.
가수이자 음성 포교사인 '수덕사의 여승'의 주인공
송춘희씨를 기념하기위하여 절 앞에 있는 주차장에 노래 기념비를 세웠으나
2-3일후 수덕사의 스님들이 이 기념비를 무너뜨렸다고 한다.
* 수덕사 성역화 중창불사 도중 전탑좌대가 현 위치에서 발견되어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 높이 950Cm의 금강보탑金剛寶塔을 세웠다.
'금강金剛'이란 불괴신의 불佛, 법法, 승僧 삼보三寶와
계체戒體의 상징으로 이름 하게 된 신앙의 대상이다.
이 탑의 내부에는 1988년 덕숭총림 방장 원담대선사가
스리랑카를 방문했을 때 스리랑카 종정스님으로부터
한·스간의 우의를 견고히 하는 뜻으로 부처의 진신사리 3과를
증정하므로 10수년간 친견법회를 거쳐 본 탑에 봉안하게 되었으며,
불상 1,000불과 탑 모형을 동으로 주조하여 999탑을 소장하였기에
'천불천탑千佛千塔'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 탑은 국태민안과 세계평화는 물론, 청풍납자淸風衲子,
속성정각速成正覺하여 광도중생廣度衆生하고 박복 薄福者는
복덕구족福德具足하여 고통 받는 이 모두는 이고득락離苦得樂할 것을
발원發願하면서 2000년 7월에 세웠다.
* 한편 수덕사의 과거와 현재를 잘 보여주고 있는 성보박물관이 있다.
수덕사, 대웅전의 역사 그리고 고승의 유물들이 잘 전시되어 있다.
경허 스님의 진영, 친필, 심우도 6폭 병풍, 세계일화라고 쓰여 있는
만공스님의 친필들을 친견할 수 있다.
특히 만공스님의 유품인 거문고 (문화재자료 제192호)가 인기이다
그 외 금동여래좌상(고려문화재자료 제385호), 영탐사 금동
삼존불상(고려보물 제409호), 전적 그리고 현판들을 전시되어 있다.
4. 修德寺 白蓮堂 柱聯 :
(수덕사 백련당 주련)
假借四大以爲身 (가차사대이위신)
사대를 잠시 빌려 이 몸이 이루어졌으니
心本無生因境有 (심본무생인경유)
마음은 본래 생겨남이 없고 경계의 인연으로 있을 뿐이라
前境若無心亦無 (전경약무심역무)
앞의 경계가 없다면 마음 또한 없는 것이니
罪福如幻起亦滅 (죄복여환기역멸)
죄와 복도 환상이 일어났다가 없어짐과 같다
見身無實是見佛 (견신무실시견불)
몸의 실상이 없음을 보는 것이 곧 부처를 보는 것이요
了心如幻是了佛 (료심여환시료불)
마음은 환상과 같다는 것을 아는 것은 곧 부처를 아는 것이다
了得身心本性空 (료득신심본성공)
몸과 마음의 본성이 모두 공空하다는 것을 알면
斯人與佛何殊別 (사인여불하수별)
이 사람이 부처님과 어찌 다르리오
* 이 주련 글은 조당집(祖堂集 952년, 신라 정靜과 균筠),
종감록宗監錄(961년, 영명永明 연수延壽),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1004년, 도원道源) 등에
실려 있는 과거칠불過去七佛 중 제3존 毘舍浮佛비사부불의
전법게 1~4연과 제4존 拘留孫佛구류손불의 전법게 5~8연이다.
(경내 출입에 제한이 있어 백련당의 한쪽 면 밖에
촬영하지 못하므로, 백련당 및 맞은편에 있는
큰 요사 청련당의 각 면에는 과거칠불 전법게가
모두 주련으로 걸려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5. 修德寺 祖印精舍 柱聯 :
(수덕사 조인정사 주련)
靑山疊疊彌陀窟 (청산첩첩미타굴)
겹겹이 늘어선 청산은 미타의 굴이요
滄海茫茫寂滅宮 (창해망망적멸궁)
한없이 아득한 푸른바다는 적멸의 궁전이로다
物物拈來無가碍 (물물염래무가애)
사물과 사물의 가고 옴에는 거리낌이 없는데
幾看松亭鶴頭紅 (기간송정학두홍)
몇 번이나 소나무 정자에 학의 머리 붉음을 보았던고
* 수덕사 조인정사祖印精舍는 종무소宗務所로 사용되고 있으며,
‘조인祖印’은 '조상祖上의 도장道場'이라는 뜻이다.
* "...이 게송의 끝 구절을 ‘소나무 정자에 앉아있는
학의 머리가 붉어지는 것을 몇 번이나 보았던가’하고 더러 해석을 많이 한다.
이제 다시 읽어보니 단정학의 붉은 머리에 전깃불이 들어오는 소식이다.
단정학의 본래 빨간 머리꼭대기는 머리가 붉어지는 것을 새삼 볼 것이 없이 붉다.
그 붉은 머리가 전구에 전깃불이 들어오듯이 훤하게 밝아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미타부처님의 광명이 중생의 몸과 마음에서
환하게 전깃불로 켜지는 찰나이기도 하다.
첩첩한 청산은 아미타부처님의 굴이고 / 망망한 푸른바다 부처님의 궁전일세 /
사물을 마주할 때 대상과 걸림이 없어지면 / 소나무 정자 단정학의 머리에
전깃불 들어오는 것이 보이리라.
대학시절 여름방학 때 시골집에 갔다가 비로 칠흑 같은 어둠을 실감했다.
서울의 가로등에 지칠대로 지쳐있던 눈이 시골의 깜깜한 밤의 빛깔을
전깃불 끄고 보고 있노라니 한없이 편안해졌다.
은행나무들은 누가 들고 가지도 않는 가로등을 지키느라 저 고생을 하고 있다.
전깃불을 켰더니 깜깜했던 시골 방이 환하다.
전깃불에 마냥 익숙해져있던 온몸이 참으로 오랜만에 깜깜한 세계에서
광명의 세계로 찰나에 이동하는 체험을 한 것이다.
또 금방 전깃불에 익숙해지지만 그 환해지는 찰나에 사실은 온 몸이 감격하고 있는 것을.
소나무 정자에 앉아있던 단정학도 붉은 머리에 전깃불이 들어오는 순간
솔잎 하나하나의 잎맥까지 보았을 것이다.
자신의 발톱에 앉아있는 세균의 세 번째 뒷다리에서 뜀뛰기 운동을 하고 있는
미세 세균도 틀림없이 보았을 것이다.
사실은 전깃불이 들어온 것이 아니라 단정학의 내면의 눈이 떠진 것이지만."
-박상준 고전연구실 ‘뿌리와 꽃’ 원장 kibasa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