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믿음
약 2:21-26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23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약 2:21-26 / 우리 조상 아브라함까지도 아들 ㄱ) 이삭을 잡아 제물로 바치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을 때, 기쁨으로 그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인정받은 것이 아닙니까? (ㄱ. 창22:9) 22) 아브라함은 조그마한 의심도 없이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어떠한 명령에도 기쁨으로 복종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그가 실제로 취한 행동과 선행으로 완전해진 것입니다. 23) 이로써 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주께서는 그가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자라고 인정하셨다'고 되어 있는 성경의 말씀이 이루어졌으며, 또 아브라함은 ㄷ) `하나님의 친구'라고까지 불렸던 것입니다. (ㄴ. 70인역 창15:6, ㄷ. 사41:8) 24) 그러므로 여러분은 신앙만이 아니라, 신앙과 함께 반드시 행동이 따라야 한다는 것을 마음에 잘 새겨 두어야 합니다. 25) 창녀 라합의 선한 행동이 좋은 예입니다. 그 여인은 이스라엘 정탐꾼을 숨겨 두었다가 다른 길로 안전하게 보내주어 구원을 얻었습니다. 26) 영혼이 들어 있지 않은 몸이 죽은 몸인 것과 마찬가지로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야고보는 참된 믿음이란 행함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남녀 한 사람씩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21-24) 21절의 배경은 창세기 22장 1-14절입니다. 이미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받은 의는 완전한 의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 30년이라는 세월 동안 크고 작은 실수를 합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믿음 자체는 완전하나 그것이 자신에게 적용되는 데는 불완전함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리는 행위로 믿음의 참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까지 받는 존귀의 사람이 됩니다. 결국 야고보는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25) 라합은 기생이었고,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녀가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하늘과 땅에 유일한 신으로 믿는 믿음이었고 그리고 그 믿음에 근거한 행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수 2:8-13; 히 11:31). 그녀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도피시킨 것은 신실한 믿음에서 나온 행동입니다. 그런 믿음의 결과는 가족과 후손들에게 이어진 구원과 축복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26) 몸과 영혼이 하나 되어 있어야 온전한 사람입니다. 영혼이 없으면 죽은 몸입니다. 마찬가지로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도 죽은 믿음이라고 확언합니다. 산 믿음이라면 반드시 행함이 뒤따라야 하며 행함은 반드시 믿음에 기초해야 합니다. 믿음에 행함이 따라야 온전한 신앙생활이 됩니다. 행함 없는 신앙생활은 감동이 없고 무미건조합니다. 살아 있는 신앙생활은 창조적 역동성과 매일의 삶에 감동을 줍니다.
적용: 당신은 아브라함, 라합에게서 어떤 행함이 있는 믿음을 배웁니까? 어떤 사랑의 수고로 믿음의 역사를 써가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숙고해 봅시다.
아브라함은 복의 통로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곳에,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통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통로는 깨끗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복을 흘려보내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의 통로에 불과합니다. 복의 통로는 세상 것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모든 족속들에게 축복이 흘러가기 위해 믿음의 싸움을 계속해야 합니다. 이 싸움은 하나님을 닮아 가는 싸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거룩한 싸움입니다.
< 설 교 >
믿음을 증명한 사람들
약 2:20-26 / 정근두 목사(울산교회)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우리 신교도들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 라는 명제를 사랑합니다. 한자로는 以信得義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 명제는 종교개혁의 가장 근본적인 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24절을 읽어보면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고 선언합니다. 마치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명제를 뒤집어 놓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흔히들 야고보하면 바울과는 대립되는 구원의 도리를 가르치는 사람으로 여깁니다.
성경을 해석하는데 가장 중요한 원리는 어떤 구절이든지 앞 뒤 문맥에 따라서 해석하는 것입니다. 성경해석에만 중요한 원리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데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의 말을 앞 뒤 잘라버리고 그 사람이 이런 말을 하더라고 하면 오해하기 알맞습니다. 한 사람 매장시키기 어렵지 않습니다.
말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한 사람이 바르게 살기 위해 어떻게 노력했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지금 넘어지는 것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걸어온 모습을 길게 바라보지 않고, 넘어지는 장면만 보면 “그 사람 처신이 바르지 못해”라고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이해할 때도 앞 뒤 문맥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선 로마서에서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십시오. 로마서 4장 1절에서 3절에는 이렇게 바울이 말합니다.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에 대해서는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까?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다면 자랑할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 자기 공로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얻었다면 과연 자랑할 만도 합니다. - 그러나 사실 그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성경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하나님은 이 믿음 때문에 그를 의롭게 여기셨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 인용한 로마서 4장 1절에서 3절의 요점은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 아브라함의 경우도 행위로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얻은 것이 자기 공로가 아니라 그의 믿음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여기셨다는 주장입니다.
문제는 로마서에서 바울의 그 주장과 오늘 야고보서의 우리 본문이 서로 모순되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야고보 2장 21절을 보십시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24절에서 야고보는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고 일언지하에 바울이 애써 가르치는 교리를 뒤집는 느낌이 듭니다. 여기 야고보는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았다고 하는데 로마서에서 바울은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기에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살다보면 두 사람 이야기가 어느 쪽이 옳은 지를 알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이 사람 만나서 들어보면 이 사람 이야기가 옳은 것 같고 저 사람 만나보면 저 사람 이야기가 옳은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이 맞는 것 같습니까? 누구 편을 들고 싶습니까?
그동안 야고보서 설교를 들으면서 정이 들기도 했으니까 야고보 선생 편을 드시렵니까? 아니면 설마 대사도인 바울이 틀렸으랴 싶어 바울 쪽에 줄을 서시렵니까? 서로 모순된 주장을 하는 것처럼 보이니 입장이 난처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에 성경 해석 원리가 필요합니다. 가장 중요한 해석 원리 가운데 하나가 “해석은 문맥의 흐름 속에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구절을 바로 해석(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구절의 앞 뒤 문맥을 살펴야 합니다.
앞뒤 문맥의 흐름 속에서 한 부분이 살펴져야 합니다. 전체의 흐름 속에서 부분이 이해되어야 합니다. 앞 뒤를 생각하지 않고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야고보는 저렇게 말하니 모순이 아니냐고 하면 나무는 보면서도 숲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합니다.
자 그러면 우선 로마서의 문맥부터 살펴봅시다. 로마서 4장 1절은 “그런즉”이란 접속사로 시작하고 접속사는 앞 부분과의 관련을 보여줍니다. 앞 부분 3장 21절부터 31절에서 바울은 사람이 어떻게 의롭게 되는지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되는 지를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4장 1절부터 아브라함의 경우를 예로 들어 그 사실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이 어떻게 의롭게 되는 지를 힘들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의롭다함을 받는 방법이 자신의 행위에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임을 말합니다.
그 다음 오늘 본문인 야고보서의 흐름을 살펴봅시다. 여기서 야고보는 한 사람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서 바른 사람으로 인정되는지에 대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죄인이 하나님과 어떻게 그 관계를 새롭게 할 수 있는 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야고보는 여기서 인간이 의롭다하심을 어떻게 받을 수 있는 지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야고보의 목적과 바울의 목적은 서로 다릅니다. 로마서 4장에서 바울은 유대인의 기존 관념을 반박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끝까지 율법을 지켜야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믿습니다. 율법대로 살아야 된다고 믿는 이들을 향해서 편지를 쓴 것입니다.
반면에 본문에서의 야고보의 목적은 실생활에서 아무런 열매가 없는 자들이 믿음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반박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1장에 보니까 하나님 말씀 듣는데는 신속하지 못하고 자기 말을 하는데는 빠른 사람들입니다.
목사에게 상담할 것이 있다고 전화를 하거나 찾아와서는 목사에게는 5분도 시간을 주지 않고 자기 말은 한 시간씩 하는 사람들입니다. 말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제게 할 말이 있다고 차라리 시작하든지, 말은 상담을 받겠다고 시작하고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합니다. 하긴 달리 말할 데가 없으면 제게라도 해야지 어찌하겠습니까?
말하는 것만 빠를 뿐 아니라 성내는 것도 한 수 하는 사람들입니다. 월례회든 제직회든 무언가 한 건 잡았다하면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습니다. 신앙이 있다고 말은 하는데 신앙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1장에는 신앙이 있다고, 경건하다고 주장하면서도 불쌍한 사람은 쳐다보지를 않는 사람들입니다.
10년을 교회에 다니면서도 자기 주위에 어려운 사람이 누군지 한 번도 생각해보지를 않았습니다. 물론 한 번도 도와준 적도 없습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가난한 이웃을 한 번 도와준 기억이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 야고보 선생은 지금 다룹니다.
잘 사는 사람이 교회에 나오면 “여기 앉으십시오”라고 하면서 가난한 사람이 오면 쳐다보지도 않고 심지어 물어도 친절한 대답을 기대할 수 없는 사람들을 야고보는 지금 다루고 있습니다. 인간차별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한 자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시키기를 기뻐하셨는데 가난한 이를 무시하는 사람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말은 잘합니다. “어떤 사람은 행동이 있고 어떤 사람은 믿음이 있고 그런 거지 뭐”라고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야고보서 2장에서 야고보 선생은 믿음의 삶을 살지 않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믿음과 행위가 마치 별개인 듯이 나오는 이들의 주장(18절)을 반박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상대한 청중과 야고보가 만나서 다루는 청중은 문제가 서로 다릅니다.
바울이 만난 사람들은 끝까지 자기 노력을 통해서 무언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겠다는 사람들입니다. 가끔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만납니다. 복음을 전하고 전도하면서 하나님 앞으로 나오라고 하면 꼭 주를 답니다. “예 교회에 가긴 가야 하는데, 먼저 제 문제를 좀 정리해 놓고 나가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정리를 다 해 놓고 나면 왜 하나님 앞에 나옵니까? 본래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을 때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 아닙니까? 자기 노력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오려고 하는 사람들은 바울의 논리로 접근할 수 있습니다. 행동을 바로 해서는 아무도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해야 합니다.
야고보가 만난 사람들은 다른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믿는다고 합니다. 또한 잘 믿는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행동은 아무 것도 따르지 않는 무리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야기 할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믿음이란 무엇이냐 믿음이란 행동으로 나타나야 믿음이 아니냐고 다그칩니다.
그러므로 각자의 청중 속에서, 그 말하는 흐름 속에서 보면 둘 다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한 마디씩 잘라내어서 말하면 두 사람 이야기가 서로 모순이 됩니다. 달리 말해 본문에서 야고보는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주장하므로 자기의 실천이 없는 삶을 옹호하려는 소위 교인들을 향해서 반박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을, 다른 이는 행동을 강조할 수 있는 것인데 어떻게 행함이 없다고 믿음마져 없는 것으로 취급하고 그런 믿음은 죽었고 자신을 구원도 못하는 것으로 말하는 것은 지나치지 않느냐’고 나오는 무리에게 야고보 선생은 아브라함의 경우를 예로 삼아 그에게 있어서 믿음이란 어떤 것이었는지를 보여주고 싶어합니다.
같은 아브라함을 예로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이 그 믿음 때문이라고 하고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이 그 행함이라고 말하는 듯 보입니다. 얼핏보면 모순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전체 흐름을 보면 바울은 의롭다하심을 받는 방법에 대해서 말하고 야고보는 산 믿음에는 행위가 도저히 분리될 수 없다고 하는, 믿음을 어떻게 입증하는가 하는데 관심이 있습니다.
야고보는 자신의 논지를 아브라함의 경우와 라합의 경우로 입증하고 있습니다. 14절의 경우, 특히 18절의 반론을 반박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야고보의 목적입니다. 저자의 의도에 비추어 구절을 해석을 해야 합니다. 18절에서 주장하는 것을 반박하는 것이 야고보의 목표입니다. 신자의 삶에 믿음과 행동이 별개로 작용할 수 있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것이 야고보의 당면 목적입니다.
말하자면 야고보의 논리는 바울의 로마서 결론에서 출발한 셈입니다. 야고보는 ①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받은 것은 믿음 때문이라는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야고보 선생은 여기서 더 나아가 ②아브라함이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은 맨 처음 믿은 사실에만 근거한 것이 아니고 시험을 받을 때에 이 믿음이 입증되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 여러분,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하나님께서 이를 저에게 의로 여기시고”란 표현은 창세기 15장에 나옵니다. 그리고 나서 30년이란 세월이 흐른 다음 아들 하나 얻습니다. 처음에는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뒤에는 첩 하갈에서 난 “이스마엘이나 살면 족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니다. 네 아내 사라에게서 난 자라야 네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행착오할만큼 한 다음에 하나님께서 아들 이삭을 주셨고 이삭도 상당한 나이가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하나님께서 이를 저에게 의로 여기시고” 이 일이 있고난 다음 적어도 30년 세월이 흘러간 다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고 나서 “네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명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의로움이 입증된 사건으로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린 사건을 예로 듭니다. 백 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바친 것은 그의 믿음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시집 장가가서 제때에 바로 낳은 자식도 귀합니다. 게다가 나이가 들어서 자식을 낳으면 부모들이 얼마나 끔찍히 여기는 지 모릅니다.
그런데 쉰살에 낳은 아들도 아니고 백세에 낳은 아들이니 눈에 넣은 들 아프겠습니까? 그런데 그 아들을 바치라고 합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 차라리 날 데려가십시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 안됩니다”. 부모 공경할 줄은 몰라도 자식은 얼마나 귀하게 여기는지 요즈음 사람들이 이런 명령을 받았으면 졸도할지 모릅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어서 자식을 낳으면 더 애지중지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경우는 나이 쉰에 낳은 쉰둥이도 아닙니다. 백세에 낳은 아들을 제단에 드리도록 요구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전혀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삭에게서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끝까지 순종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 것인지는 몰랐습니다. 이삭을 잡아서 제물로 바치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러면 “이삭에게서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이라는 그 하나님의 약속이 성립될 것인지 두 가지 명령은 서로 모순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말씀하시는 그 분이 자기 하나님이며 하나님께서 요구하심을 알았기에 자기로서는 풀리지 않는 두 명제였으나 순종했습니다. 이 순종으로 말미암아 그의 믿음의 진실성이 입증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매 하나님께서 이를 저에게 의로 여기시고”라는 그 믿음이 이제 진실된 것임이 입증된 것입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구원의 방도로서 - 의롭다 인정받는 방도로서 믿음을 강조하는 반면 본문에서 야고보는 믿음이 어떻게 살아있는 것인지 입증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바울은 의롭다 하심을 어떻게 얻느냐로 고민하는데 비해서 야고보는 어떤 믿음이 진짜 믿음이냐를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살아있다는 것을 입증할 아무 증거가 없으면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로 주장하는 이들을 그 거짓됨을 여지없이 폭로하는 것이 야고보의 목표입니다. “오 허탄한 사람아, (실없고 어리석은 사람들아!) 행함이 없는 믿음은 가치없는 것임을 알고 싶으냐, 더 무슨 증거가 필요하겠느냐”고 하면서 아브라함과 라합의 경우를 의도적으로 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는 그가 ‘이삭을 바침’으로 그 믿음이 입증된 것임을 증거합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고 입증된 것은 신앙 + 행동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하나님을 미쁘신 자로 믿을 때에 그 믿음을 의롭다고 여기셨습니다.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사랑으로 복종하는 행동을 하게 한 그 믿음입니다.
야고보는 믿음이냐 행위냐 택일하도록 하지 않습니다. 야고보는 오직 행위로 나타나는 믿음만이 유익함을 말합니다. 야고보에게 있어서 믿음과 행위는 항상 분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침은 그의 신앙의 표현이요 산물이며 그 신앙을 결정적으로 입증한 사건입니다.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항상 계속적으로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그의 믿음이 완전하게 된다”고 믿습니다. 믿음과 행함은 야고보 선생에게 있어서도 항상 동역관계입니다.
야고보 선생에게 있어서는 믿음이라고 불리울 가치가 있는 믿음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뜻을 사랑으로 준행하는, 살아있는 사랑의 행동을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그는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이전에 연약하던 아브라함의 믿음이 이 순종을 통해 강한 믿음이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 아이는 어린 아이대로 부모를 사랑으로 순종할 수 있습니다. 물론 부모는 어려운 부탁을 어린 아이에게는 하지 않습니다. “숱가락으로 밥 먹으라”고 말하고 거기 순종하면 순종입니다. 물론 어른은 어른대로 거기 걸맞는 순종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믿든지 안 믿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믿음이란 아무리 연약해도 사랑의 순종을 즉각 가져오는 것입니다. 물론 아브라함이 순종하는 것과 라합이 순종하는 것은 같은 무게가 실린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각자 자기 상황에서 자기 믿음의 분량에 합당한 순종은 나타나야 합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시조격인 아브라함의 경우를 예를 들고 나서 라합을 예를 들고 있습니다. 왜 많고 많은 신앙의 위인들을 그만두고 라합을 선택했을까요? 분명 의도적인 선택입니다. 보다 분명히 그 믿음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행동이 일치해야 함을 보여주고 싶어서 선택된 경우입니다.
훌륭한 믿음의 시조 경우만 아니라 이방 여인, 게다가 창기인 라합의 경우도 꼭같이 행동으로 믿음이 입증됨을 밝히고 있습니다.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25절) 히브리서 저자도 마찬가지 증언을 합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들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히11:31)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백세에 얻는 외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는 명령입니다. 수십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입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갈대아 우르를 떠났던 아브라함에게 걸맞는 문제가 출제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라합에게 그렇게 어려운 문제를 주었다면 라합은 감당못했을 것입니다.
라합이 살던 동네에는 지금 무서운 소식이 시시각각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온 동네가 두려움으로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요단 강을 말렸다는 소식이니까요? 요단강을 마른 땅을 건너듯이 지금 여리고 쪽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그 소식을 들은 여리고 성 사람들은 문을 철통같이 닫고는 아무도 움직이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완전히 두려워서 어쩔 줄 몰라합니다. 요즘 표현으로 하면 맨붕사태에 접어든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신 역사가 여리고 성의 모든 사람에게 두려움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두 남자가 나타났습니다. 라합은 눈치하나 빠른 여자입니다. 보자마자 자기 동네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기 동네사람이 아닌 타국 남자가 왔다는 것은 틀림없이 건수가 있어서 온 것입니다. 이 두 남자를 보는 순간 라합은 그 사람들을 최선의 대접으로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요?
바깥에서 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여리고 왕이 보낸 군사들입니다. 순간적인 기지로 그들을 따돌립니다. “예, 저희 집에 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왔다가 벌써 떠났습니다. 빨리 따라가면 잡을 수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지붕에 올라가서 “지금 바로 나서면 잡힙니다. 창문을 통해 내려가도록 하겠습니다. 산에 가서 한 사흘 숨어있다가 도망가십시오”라고 충고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가족에 대한 부탁을 합니다. 보십시오. 이 라합은 초신자 아닙니까? 그러니까 자기가 그 정탐꾼들을 잘 대접했고 이것은 신앙의 행위입니다.
그 신앙에는 거기에 상응하는 보상도 주어집니다. 여리고 성은 망한다는 것 분명합니다. 잘 숨겨주면서 가족들을 살려달라는 부탁을 한 것입니다. 라합과 아브라함의 상황은 서로 달랐습니다. 믿음의 년조에 있어서도 서로 달랐습니다. 그러나 둘 다 믿음에 바탕한 행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라합은 정탐꾼들이 자기 문전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전도자가 도착하기 전에 마음을 열고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듯이 그녀의 마음은 이미 열려 있었습니다. “왜 지금 왔습니까?”라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라합은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고 그들의 탈출을 도운 것은 그 마음에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승리를 확신한 라합은 그 믿음이 정탐꾼을 숨겨주는 행동을 산출했습니다. 야고보의 욧점은 라합이 주의 백성들을 도와준 행위로써 그 믿음을 입증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라합과 아브라함은 전혀 다른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둘 다 행동으로 믿음을 입증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엄청 어려운 결단을 했습니다. 독자인 아들을 희생제물로 바쳐야 했습니다. 거기에 비해 정탐꾼들을 숨겨주고 탈출 방법에 대해 알려준 대신 반대급부를 받을 수 있었기에 어려운 행동이 아닙니다. 그러나 둘 다 믿음을 나타낸 것은 공통점입니다.
아브라함은 경험이 많은 신자였지만 라합은 초신자였습니다. 오래 믿은 신자나 갖 믿은 초신자나 믿음이 있으면 행동으로 나타나야만 합니다. 모든 참된 믿음은 개인의 직면한 상황에 따라 행위로 드러납니다. 어떤 여건이든지 믿음의 반응은 당사자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를 반영해 줍니다.
행함은 우리들이 고백하는 믿음을 확인시켜 줍니다. 실천이 없으면 참 믿음도 없습니다. 또한 믿음이 없으면 행함도 없습니다. 믿음에 뛰어난 위인이든지, 보잘 것 없는 신분의 사람이든지, 행동이 동행하는 믿음만이 가치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행동이 없으면서 믿음만 있으면 된다고 변명하는 입들을 막아줍니다. 믿음이란 언제나 행위로 나타납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아라, 그리고 라합을 생각해 보아라고 제시합니다.
자, 이제 야고보의 결론을 들어봅시다: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26절) 혼이 떠나가면 죽은 시체입니다. 실천이 없는 곳에는 아무 믿음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야고보 선생이 제기한 본래 주제를 기억합니까?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질문에 대한 1차적인 대답을 17절은 했습니다. “이와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그러나 26절은 결론적으로 다시 엄숙히 대답합니다.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야고보가 부정적으로 말한 것을 긍정적으로 표현해 봅시다. 산 믿음이란 건강하게 자라는 몸과 같습니다. 어린 아이들을 보십시오. 건강한 아이들의 몸은 생기를 발산하며 피부는 곱고 신선합니다. 아이들의 피부는 상처도 잘입지만 낫기도 잘합니다.
아이들의 눈은 맑고 마음은 생동적인 호기심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삶을 사랑하고 내일에 대한 호기심이 큽니다. 지금까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큰 기쁨과 즐거움으로 내일의 일을 내다봅니다. 나이가 많아지면 이런 호기심이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알고 싶은 사람은 나이가 들어도 젊게 살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것이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건강한 믿음의 모습입니다. 산 믿음은 하나님이 하실 일들을 기대하며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실천하고 주님의 영원하신 미소를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야고보가 성도들 사이에서 발견하기 원하는 믿음입니다.
신선한 기대감을 가지고 하나님께 응답하고 사는 것을 야고보는 지금 바라고 있습니다. 다만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라고 결론내리는 것은 그들 삶 속에 행동으로 나타나는 참 믿음이 자리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오랫동안 믿음의 생활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처음 믿었을 때의 감격을 상실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하나님, 처음 믿을 때의 감격이 우리의 나그네의 여정이 다하도록 식어지지 않기를 원합니다. 행동이 없어면서도 믿음이 있다고 주장하는 어리석은 삶에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행동을 통해서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이 진정한 것인지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신앙인지를 살펴 볼 수 있게 하옵소서. 우리의 신앙의 연조에 걸맞는 믿음의 순종이 있게 하여 주옵소서. 초신자이면 그 자리에서, 오래 믿었으면 거기에 합당한 믿음의 행위가 우리의 삶에서 나타나게 도와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참으로 행동이 함께 하는 복된 신앙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믿음은 행동이다
약 2:21-26 / 최성규 목사
10월 31일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는 종교개혁에 앞장섰습니다. 독일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95개조의 반박문을 내걸었습니다. 종교개혁은 기독교의 본질 회복 운동이었습니다. 그로부터 493년이 지났습니다. 우리는 종교개혁 정신을 지켜야 합니다.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믿음은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제3차 로잔대회의 ‘케이프타운 서약’에서도 보면 “복음은 믿음뿐 아니라, 행동까지 의미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이 외쳤던 믿음은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종교개혁가인 쯔빙글리, 루터, 칼빈 등은 행동가였습니다. 종교개혁가들은 세상에 나가서 믿은 바를 행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믿음도 행동하는 믿음입니까? 깨달은 말씀을 세상에 나가 실천하는 믿음입니까? 구원은 믿음으로 받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믿었으면 행동해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약 2:26). 신앙은 행동으로 온전케 됩니다(약 2:22). 믿고 행동할 때, 종교개혁가들은 교회를 바꾸었습니다. 세상을 바꾸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권세와 능력을 우리에게도 주셨습니다. 세상에 나가서 믿은 바를 행동합시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행동입니다. 믿음은 행동임을 깨달아, 우리 모두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산 믿음, 잠든 신앙이 아니라 주인공 신앙이 됩시다.
첫째, 행동으로 성공한 성경 인물들
사람은 누구나 행동합니다. 문제는 누구나 성공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인물들은 어떻게 행동했기에 성공했을까요?
1. 불가능한 중에도 행동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환경이 불가능하면 자신이 하려던 일을 포기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등장하는 성공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 되기에는 불가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고향을 떠났기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자기 아내조차 지킬 수 없었습니다. 또한 큰 민족을 이루기에도 불가능한 사람이었습니다. 100세가 될 때까지 약속된 후대가 없었습니다. 보이는 것은 안 될 수밖에 없는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을 좇아 행동했습니다(창 12:4). 심지어 말씀을 좇아 사랑하는 독생자 이삭까지 번제로 드리려 했습니다. 행동함으로 믿음의 조상으로 성공했습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약 2:21).
2. 세상과 반대로 행동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라합과 다윗입니다. 세상의 대세는 여리고 성의 승리였습니다. 그러나 기생 라합은 세상의 대세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편에 서서 이스라엘을 도왔습니다. 정탐꾼을 숨겨주었습니다. 그러자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이 구원받았습니다. 어린 다윗도 세상의 대세를 거슬렀습니다. 세상의 대세는 골리앗의 승리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하시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행동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는 믿음과 행하는 믿음이 합쳐지자, 다윗은 성공했습니다. 골리앗이라는 세상과 맞서 싸워 이겼습니다.
3. 손해 보는 중에도 행동했습니다. 광야에 남자만 오천 명인데, 먹을 것이 없습니다(요 6:10). 이때, 한 아이가 자신의 오병이어를 내놓습니다. 자신의 것을 내놓는 행동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받으셨습니다. 축사하시고, 떼어주셨습니다. 그러자 모두가 배불리 먹었고, 그 아이는 기적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배고픈 아이에게는 금은보화보다도 오병이어가 귀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내어놓는 행동을 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고 행동합시다. 명령과 약속의 말씀을 좇아 행동합시다. 사도 야고보는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 1:22)고 교훈합니다.
둘째, 예수님은 행동가이셨다
마가복음을 읽으면, 재미난 사실을 발견합니다. 예수님께 “곧”, “즉시”라는 단어가 따라다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곧’ 제자들을 부르십니다(막 1:20). ‘곧’ 회당에서 가르치십니다(막 1:21). ‘곧’ 문둥병을 고쳐주십니다(막 1:42). ‘곧’ 사람들의 마음속 생각을 아십니다(막 2:8). 예수님은 게으른 적이 없으십니다. 머뭇거린 적도 없으십니다. 발 빠른 행동가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렛에 있는가 했더니, 사마리아에 가 계십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는가 했더니, 거리에서 치료하십니다. 산에서 기도하시는가 했더니, 갈릴리 바다에서 폭풍을 잠잠케 하십니다. 예수님은 열정적으로 행동하는 분이셨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무리가 더욱 굳세게 말하되 저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케 하나이다』(눅 23:5). 예수님은 온 나라를 다니며 온 백성을 돌보셨습니다.
예수님의 열정적 행동은 말씀에 순종한 행동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 출세를 위해 행동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서라 하면 멈추셨습니다. 가라 하면 가셨습니다. 십자가 지라 하면 지셨습니다. 예수님의 행동도 믿음에 기초한 행동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철저하게 믿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신다고 믿었습니다(요 15:9 17:24).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셨다고 믿었습니다(요 17:23). 믿었기에 그 모든 행동을 하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믿읍시다. 예수님의 사랑을 믿읍시다. 보혜사 성령님이 함께하심을 믿읍시다. 믿는다면 세상 눈치 보지 말고, 예수쟁이답게 행동합시다.
셋째, 행동은 나와 세상을 변화시킨다
불변의 진리가 있습니다. 모든 것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달라지는 데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변질과 변화입니다. 우유를 그대로 두면 변질됩니다. 상해서 먹지 못합니다. 그러나 똑같은 우유인데 좋은 균과 적절한 온도를 제공하면 변화됩니다. 요구르트나 치즈가 됩니다. 오늘날 세상과 우리는 달라지고 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무서운 속도로 달라지고 있습니다. 변질되고 있습니까, 변화되고 있습니까? 세상이 가는 대로 그냥 두면 변질됩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행동하면 변질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육체의 욕심을 따라 마음대로 행동할 때,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믿음의 행동이 변화를 가져옵니다. 나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도 변화시킵니다. 성경은 『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패망하면 기뻐 외치느니라 성읍은 정직한 자의 축원을 인하여 진흥하고 악한 자의 입을 인하여 무너지느니라』(잠 11:10-11)고 말씀합니다. 쉽게 말하고, 생각 없이 행동하지 맙시다. 삼사일행(三思一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번 행동하기 전에 세 번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약속의 말씀을 믿는 믿음 위에서 행동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자’라고 말씀하십니다(신 33:29). 행복한 얼굴을 하고, 행복하게 말합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고 말씀하십니다(롬 8:37). 자녀의 수능과 취직은 응답받았다고 미리 감사합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 되신다고 말씀하십니다(시 23:1). 미래에 대해 두려워하기보다 현실에 충실 합시다. 하나님은 복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신 28:6). 가난 때문에 쩨쩨해지지 말고, 나눠주고 베풉시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행동하지 맙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답게, 예수님의 제자답게 행동할 때, 나와 세상은 변화됩니다.
믿음은 행동입니다. 믿음은 행동과 함께 일합니다(약 2:22).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됩니다(약 2:22). 행함이 있는 믿음이 산 믿음입니다(약 2:26). 믿음으로 행동합시다. 그리하면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 받습니다.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약 2:23).
믿음이 없는 믿음의 조상
약 2:23 / 문기태 목사
아주 깊은 두메 산골에 사는 김서방이 처음으로 서울 구경을 왔습니다. 서울에 가면 구경할 것이 많다는 말을 듣고 몇 년동안 벼르고 별러 돈을 모으고 시간을 내어 온 가족이 큰 기대를 안고 서울에 왔습니다. 여기 저기 구경을 다니는 김서방네 가족들은 상상을 초월할만한 구경거리 천지였습니다. 김서방네 가족들은 온갖 좋은 상품으로 가득하다는 백화점 구경을 갔습니다. 백화점에 쑥 들어갔더니 온갖 화려한 상품이 번쩍 번쩍 빛나는 조명아래 가득하였습니다. 부인은 '워메, 세상에 이레 좋은 물건을 여 다 갖다 놓았고마' 하며 진열대앞에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부인과 떨어져 몇 발자국 옮겨 놓던 김서방의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눈 앞에 어떤 사람이 단추를 누르니까 곧 '뗑'하는 소리와 함께 조그만 문이 열리더니 그 속으로 할머니 한 사람이 쏙 들어가고 문이 닫혔습니다. '원 세상에 사람을 잡아 먹는 기계가 다 있노?'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뗑'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다시 열리더니 분명히 할머니가 들어갔는데 아주 늘씬하고 예쁜 아가씨로 바뀌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김서방은 급하게 소리쳤습니다. "세상에 별 신기한 기계가 다 있네! 아들아, 너 빨리 가서 엄마 좀 오라구해라."
아직은 이 세상에 할머니가 들어가서 단번에 젊은 아가씨로 바꾸어주는 기계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 믿기로 결단하면 모든 것이 단번에 송두리채 변하는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부흥회에 참석해서 한번 은혜를 받으면 신앙의 인격이 한꺼번에 바뀌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으로 삶이 급격하게 바뀌는 삶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시험이 찾아 오고 넘어지기도 합니다. 갈등도 있고 흔들리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거듭나고서 한순간에 변화되어 확실하게 성숙한 신앙 인격을 소유하고 큰 믿음을 소유하여 넘어지지 않고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그리스도인이 되셨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분명히 경험하고 감격속에서 결단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으나 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넘어지고 일어났다가는 또 넘어지고 하여 부끄럽고 좌절을 맛 본 분이 있습니까? 당연합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단번에 받지만 믿음은 단번에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은 한순간에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훈련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매 순간마다 씨름하여 믿음의 순종을 보이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몸부림이 있어야 더 강해지고 온전한 변화가 가능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오늘 우리와 같은 부끄러운 실수가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이의 표상입니다. 예루살렘교회 초대 담임목사님인 야고보는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벗'이라고 불렀습니다.(약2:23) 그런 아브라함도 처음부터 완벽한 믿음을 드러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이 없어서 이방사람들에게 더 큰 망신을 당했습니다. 믿음이 없어서 큰 실수를 하고서 망신을 당한 이야기는 아브라함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믿음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도 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는 요소들이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어야합니다. 우리가 어떤 때 조심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시험을 이기고 믿음을 인정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터득하여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며 어떤 때에 힘써 믿음을 보여야 할까요?
1. 어려운 현실을 만날 때 회피하려고 하지 말고 믿음을 보여야 합니다.(10)
아브람은 애굽에 우거하려고 내려갔습니다. 이유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으므로 얼마동안 기근을 피하여 몸붙여 살려고 내려갔습니다. 약속의 땅에서 생계에 위협을 받았습니다. 거느리는 가족들을 책임져야할 위치에 있는 아브람은 가만히 앉아서 굶어 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 듯합니다. 그러나 애굽에는 이런 가뭄때에도 나일강의 물이 마르지 않고 흐르기때문에 곡창지대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양식이 풍족했습니다.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만이 최선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가족을 이끌고 애굽으로 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고 실제 그에게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처음 들어갔을 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그래서 아브람은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았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확신하고 감사의 예배를 드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9절에 보면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더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왜 아브람이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을까요? 그것은 이미 하나님이 주신 약속에 땅에는 가나안 사람이 거하였습니다. 그들과 함께 지내려다보니 자꾸만 부딪쳤을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땅입니다. 그 사실을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흥분이 됩니다. 그러나 현실로 돌아 오면 그들이 자기 땅이라고 소유권을 주장합니다. 텃세를 합니다. 눈총이 따갑습니다. 그들은 수적으로 많고 아브람은 항상 혼자였습니다. 괴로왔을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적응하며 사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쳤습니다. 그리고는 가나안 사람들을 피해 터전을 잡기 위해 점차 남으로 남으로 계속 옮겨 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옮길 때마다 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지만 그것도 후에는 흐지부지 되었습니다.
아브람은 현실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돌아보아도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될 것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게다가 현실의 어려움은 자꾸만 늘어갔습니다. 정도 들지 않고 상황은 점점 불리하게 느껴졌습니다. 가나안 땅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도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애굽까지 내려간 것입니다.
오늘도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에 나가 적응하지 못하고 늘 한 발을 들고 도피할 장소를 찾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예수를 믿고는 새롭게 결단도 해 보지만 정작 현실의 벽은 높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 틈에서 견뎌내기가 어렵게 느껴지는 상황이 많습니다. 교회생활 역시도 힘들게 느껴지는 때가 있습니다. 처음에 하나님이 주신 꿈은 아름다운 것인데 현실은 많은 어려움이 앞을 가로 막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은 가슴 뛰게 하는 큰 것인데 현실속으로 돌아오면 너무나 작은 나를 직면하게 만드는 일들만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때 어떻게 하십니까? 도피하고 싶은 유혹이 강하지 않습니까? 그런 유혹을 받으면 어떻게 하십니까? 엉덩이를 들썩 들썩하지 마십시오. 지금 여러분이 있는 곳은 하나님이 보내신 곳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이 서린 약속의 땅입니다. 하나님의 사명이 깃들은 곳입니다. 가나안 사람이 텃세를 해도, 큰 기근이 찾아와도 사명을 다하기까지는 도망갈 꿈도 꾸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며 어떤 때에 힘써 믿음을 보여야 할까요?
2. 두려운 마음이 들 때 타협하지 말고 믿음을 보여야 합니다.(13)
애굽이 가까와졌습니다. 그런데 좋기만 하지 않습니다. 떠날 때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애굽이 막상 가까와지자 불안해집니다. 두려움이 가로 막습니다. 어떤 두려움이 앞을 가로막습니까? 죽음의 두려움입니다. 굶어 죽지 않고 살길을 찾아 멀리 왔습니다. 또 두려움이 찾아 왔습니다. '내 아내는 정말 아름다운데 만약 누가 아내를 차지하기 위해서 나를 죽이지 않을 까?...' 예쁜 아내를 탐내어 나를 장애물로 여겨서 죽이고 아내를 차지하려고 하지 않을까?.. 나야 이방인이니까 누구도 보호해주지 않을덴데.. 만약 누군가 내 목숨을 노리면 꼼짝없이 죽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앞을 가로막습니다.
그래서 살 궁리끝에 사래에게 말합니다. "나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이 얼마나 기발한 생각입니까? 남자들이 여인을 인하여 마음을 빼앗기면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그의 가족들에게 얼마나 잘 합니까? 아브람도 그 점을 노렸습니다. 그래서 사래를 이용하여 목숨을 보전해 보려고 거짓말을 만들어냅니다.
아마도 프로포즈하는 사람이 나와도 적절한 이유를 대면서 시간을 벌면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지참금을 과하게 요구하며 준비하는 시간을 멀리 잡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벌다가 기근이 끝나면 밤에 몰래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 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간에 남매행세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래에게 마음을 빼앗긴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애굽의 모든 권력을 한 손에 거머쥔 바로였습니다. 타협이 필요없는 사람입니다. 시간을 벌 수 있는 핑계가 먹히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사래는 바로의 궁으로 이끌려갔습니다. 거부하지도 못했습니다. 아브람은 반항하지도 못하고 무기력하게 그대로 보내주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댓가로 양과 소, 암나귀 숫나귀, 약대와 남녀 종들까지 얻었습니다. 이 얼마나 한심한 일입니까? 사랑하는 아내를 최고권력자에게 상납하여 팔아 부자가 된 꼴이니 말입니다.
아브람은 몹시 괴로왔을 것입니다. 바늘방석이었을 것입니다. 후회막급이었을 것입니다. 아내를 궁궐로 보내고 가슴을 쳤을 것입니다. 차라리 목숨을 잃을지언정 누이동생이라고 하지 말고 아내로 할 것을 .. 차라리 굶어 죽을 지언정 가나안 땅에서 버티며 애굽으로 내려 오지 않을 것을... 아내를 바로에게 후궁으로 바치고 어디가서 누구와 행복하게 산단 말인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큰 민족의 꿈은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의 머리는 혼란된 생각으로 가득차서 밤새 뜬 눈으로 지새었을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현실과 타협해야만 살아 남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직하게 살다가는 굶어 죽는다고 생각합니다. 적당히 거짓말도 해야 하고, 남도 감쪽같이 속여 넘겨야 살아 남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 것도 안했다고 안 한것도 했다고 얼굴 한 번 붉히지 않고 거짓말을 잘 합니다. 양심을 속이고 부정한 방법도 동원합니다. 그리고는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모두들 다 그렇게 산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살면서 실제 부자가 되는 사람도 제법 많습니다. 좋은 집도 장만하고 고급 차도 장만하고 재산도 늘어갑니다. 여행도 하고 온갖 풍요로운 것들을 누리지만 소중한 것을 팔아 부자가 된 아브람처럼 마음이 불편하지 않습니까? 마음의 평안도 점차 사라지고 하나님이 주신 약속도 희미해지고 이게 아닌데, 이런 것이 전부가 아닌데.. 내가 어쩌다 이 길로 오게 된 것일까? 안타깝기 짝이 없지만 그렇다고 다른 길도 보이지 않습니다. 웬지 행복하게 여겨졌던 것들도 시들하기만 합니다. 여러분의 상태를 아브람이 애굽에 내려가 사래를 내어 주고 부자가 된 미묘한 아브람과 한번 비교해 보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두려움앞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정직하게 믿음을 드러내십니까?
또한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며 어떤 때에 힘써 믿음을 보여야 할까요?
3. 중요한 결정을 할 때 하나님께 묻고 행동해야 합니다.
아브람이 처음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갔습니다.(4)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야 움직였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아무리 찾아 보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움직인 흔적이 없습니다. 가나안 사람들과 부딪치기 싫어서 옮겨갔습니다. 그냥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서라는 핑계로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지도 않고 자기 생각대로 애굽으로 내려 갔습니다. 살아 남기 위해서라면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승락도 안 받고 부부관계도 남매관계로 위장했습니다.
뿐만아니라 계속해서 하나님께 묻지도 않았습니다. 예배도 중단했습니다. 오로지 자기 생각대로 자기가 보기에 좋은대로 했습니다. 그러자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함정이었습니다. 쉬워보였지만 위험한 길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기에 앞서 행동합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기 전에 먼저 일을 벌입니다. 열심히 살고 있지 않느냐?고 변명하고 미화시키고 합리화하며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을 소홀히 여깁니다.
쉽게 사는 것이 좋아 보이나 함정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사는 것보다 본능대로 사는 것이 쉽습니다. 기도하는 것보다 그냥 행동하는 것이 쉽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것보다 땀 흘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찾아 움직이기보다는 감정적으로 충동받는대로 행동하는 것이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이 아닙니다. 그렇게 살다보면 하나님의 계획과 무관한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세상사람들이 살아 가는 방식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본능대로 사는 것과 다릅니다. 믿음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영적인 뚝심이 있어야합니다. 요동하지 않고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슴하시지 않으면 충분히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우리가 앞서 가서는 안됩니다.
아브람이 먼저 기도하고 응답을 받아 행동했다면 애굽으로 내려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브람이 먼저 기도하고 응답을 받아 움직였다면 사랑스런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둘러대지 않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한 번 단추를 잘못끼면 계속 잘 못 단추를 끼고 옷차림이 흉하게 꼬일 수 밖에 없습니다. 아브람도 첫 단추를 잘 못 끼고나니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습니다. 모양도 아주 우습게 되었습니다. 바로에게 큰 꾸중을 듣습니다. 이방인에게 책망을 듣습니다. 애굽에서 쫓겨나다시피 나오게 되었습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와는 아주 다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전혀 애굽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했습니다. 망신만 크게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엉터리같은 신자 아브람이 믿음이 없어서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상황을 수습하십니다. 바로에게 나타나셔서 그 집안에 무서운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바로로 하여금 아내로 맞은 사래를 취하지 못하게 막습니다. 그리고 사래가 아브람의 아내라고 가르쳐 줍니다. 돌려 보내라고 하십니다.
만약 하나님의 개입이 없었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아브람은 다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아내를 완전히 빼앗기고 웃음거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하나님의 백성의 조상이 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은혜가 풍성하신 분입니다. 아브람의 허물이 큼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형편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위해서 친히 일하십니다. 그가 복잡하게 만든 문제를 풀어 주십니다. 아주 위험한 순간에 나타나셔서 아브람을 위해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를 위해서도 같은 은혜를 베푸십니다. 우리의 행위가 완벽하고 믿음이 훌륭한 때만 우리를 위해 일하시지 않고 우리가 믿음이 형편없어 질 때도 우리를 위해 일하십니다. 우리가 실수하고 연약해지고 흔들릴때도 우리를 위해 은혜를 베푸십니다. 우리의 실패를 통해 우리를 깨우치시고 다시 일으켜 주십니다. 우리의 시행착오를 사용하여 깨닫게 하시고 믿음을 자라게 하십니다. 더 성숙하게 하십니다. 더 지혜롭게 하십니다. 더 귀하게 쓰임받게 이끌어 주십니다. 처음에 주셨던 비젼과 약속이 여전히 유효함을 입증해 주시고 포기하지 않으심을 나타내시며 우리의 손을 조용히 잡아 주십니다.
여러분, 실패하셨습니까? 시험에 걸려 넘어지셨습니까? 하나님의 계획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으셨습니까? 믿음 없는 행동으로 불신자들에게 망신을 당하였습니까? 믿음이 생각처럼 빨리 성장하지 않아 안타까우십니까? 실망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내민 손을 붙잡으시면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다시 회복될 수 있습니다. 다시 도전하여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처럼 실패한 여러분도 믿음의 거인을 만드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