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랑길을 걸으며(1)
(선운산∼미당 시문학관, 2024년 6월 29일∼30일)
瓦也 정유순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은 금방이라도 빗물을 쏟아부을 것 같다. 심원면 소재지를 거쳐 연화리 선운산 입구에 도착한다. 실개천 옆의 팽나무의 녹음은 여름을 한층 더 푸르게 한다. 팽나무 이름은 작은 대나무 대롱과 대나무 꼬챙이에 팽나무 열매를 넣어 쏘는 팽총에서 나는 소리가 “팽~”하고 난다고 해서 팽나무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해안에서 자주 발견되며 느티나무와 생김새가 비슷하나 팽나무 잎은 톱니가 없다.
<고창군 심원면 연화리 팽나무>
선운산(禪雲山, 336m)은 본래 도솔산(兜率山)이었으나 백제 때 창건한 선운사(禪雲寺)가 있어서 선운산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선운(禪雲)이란 “구름 속에서 참선한다”는 뜻이고, 도솔(兜率)이란 “미륵불(彌勒佛)이 있는 도솔천궁(兜率天宮)”을 가리킨다. 또한 불교에서는 세계의 중심에 수미산(須彌山)이 있고, 그 산의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 위에 있는 욕계(欲界) 6천 중 제4천인 도솔천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유순은 고대 인도의 거리의 단위로, 실제 거리는 명확하지 않지만 보통 약 8㎞로 간주한다.
<선운산 낙조대 - 2017년 3월 11일>
<선운산 천마봉>
소리재 쪽으로 오르막길을 오르는데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힌다. 한 고개 올라서니 누군가가 정성스레 쌓아 놓은 돌무더기 탑이 길 방향을 잡아준다. 잎이 무성한 나뭇가지 사이로 견치봉(일명 개이빨산, 346m)이 잇속을 드러내지만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낙조대 반대 방향인 참당암 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화살대로 많이 사용했던 시누대 터널을 이룬다.
<시누대터널 - 2017년 3월 11일>
전북 고창군 아산면 선운산에 있는 ‘죄를 뇌우 치고 참회(懺悔)하는 곳’인 참당암(懺堂庵)은 암자로 신라 승려 의운이 창건하였다. 현재는 선운사에 속해있는 암자이지만 예전에는 큰 규모의 사찰이었다. 사찰 내의 건물로는 대웅전, 약사전, 산신각 등이 있으며, 대웅전에 있던 참당암동종은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박물관으로 옮겨졌고 약사전에는 보물 석조지장보살좌상이 보존되고 있다. 조선시대 때에는 대참사(大懺寺)로 불리었던 규모가 큰 사찰이었다.
<참당암 대웅전>
참회하며 선운사로 내려오는 삼거리에서 다시 도솔암 쪽으로 올라가면 거대한 암벽에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크다는 마애미륵불이 있다. 고려 때 조각한 것으로 보이는 이 불상은 연꽃무늬를 새긴 계단모양의 받침돌 위에 긴 손가락과 우뚝한 코, 두툼한 입술 그리고 세상을 굽어보며 중생들의 모든 고뇌를 보듬는 다. 명치끝에는 검단선사가 쓴 비결록을 넣었다는 감실(龕室)이 있는데, 조선 말 전라도관찰사 이서구가 감실을 열자 갑자기 풍우와 뇌성이 일어 그대로 닫았는데 책머리에 “전라감사 이서구가 열어본다”라는 글이 쓰여 있다고 전한다. 이 비결록을 19세기 말 동학접주 손화중이 가져갔다고 한다.
<선운산 마애불 - 2022년 9월 18일>
그런데 마애불 앞에는 세상을 굽어보는 부처의 시야를 가리는 양 이름 모를 공사가 한창이다. 그 옆의 도솔암 쪽에는 윤장대(輪藏臺)가 있어 한 바퀴 돌려본다. 윤장대는 보통 팔각형으로 되어 있고 내부에 불경을 넣어두어 팽이처럼 돌릴 수 있다. 중국 양(梁)나라 때 선혜대사가 처음 만들었다고 하며, 글자를 모르거나 불경을 읽을 시간이 없는 신도들을 위하여 만든 불구(佛具)로 이것을 돌리면 불경을 한 번 읽는 것과 같은 의미란다.
<도솔암윤장대>
도솔암 옆으로 가파른 계단을 오르니 ‘선운사도솔암내원궁’이 있다. 천인암이라는 기암절벽과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 사이에 자리한 내원궁은 중생을 구원한다는 지장보살을 모신 곳으로 ‘상도솔암’이라고도 부른다. 이 불상은 고려 후기의 불상 가운데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그러나 내원궁에는 원래 미륵보살이 모셔져 있어야 하나 중생구제(衆生救濟)를 위하여 하생(下生)한 후, 그 빈집을 지장보살(地藏菩薩)이 지키고 있다.
<도솔천내원궁>
<도솔천내원궁 지장보살>
조금 더 밑으로 내려오니 수령 600년 정도로 추정되는 소나무가 눈길을 끈다. 높이 23m의 이 나무는 3개의 줄기로 그 위에서 여러 갈래로 갈라져 부채살처럼 퍼져 있는데 이곳의 옛 지명을 따 ‘장사송(長沙松)’이라고 하는데 바로 옆에 진흥굴이 있어 일명 ‘진흥송’이라고도 한다. 장사송은 천연기념물 제354호이다.
<장사송 - 2022년 9월 18일>
장사송 바로 옆에는 진흥굴이 있다. 이 굴은 신라 24대 왕인 진흥왕이 말년에 왕위를 버리고 머물렀다고 하여 진흥굴이라 부른다. 이곳의 암석은 응회암(凝灰岩)으로 풍화작용을 받아 갈라진 틈(절리)이 커지면서 천정과 옆면의 암석 표면이 양파껍질처럼 벗겨진 박리작용(剝離作用)에 의해 형성된 자연 동굴인데, 사람의 손길이 가해져 지금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동굴 내부에는 누가 기도를 드렸는지 촛불이 켜져 있다.
<진흥굴>
장맛비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지 빗방울은 점점 굵어진다. 숲 사이로 난 길은 이미 시냇물을 이뤄 졸졸졸 흘러 함께 선운사에 도착한다. 선운사는 백제 위덕왕 24년(577년)에 검단선사(黔丹禪師)가 창건한 천년 고찰이다. 대웅보전 뒤에 있는 동백나무 군락지(천연기념물 제184호)는 우리나라 자생 북방한계선으로 봄에 피어 춘백(春栢)이라고도 한다.
<선운사 전경>
선운사 거리에서 점심으로 오전을 마감하고 미당 서정주가 태어난 마을에 있는 ‘미당시문학관’으로 향한다. 이곳은 시인 미당 서정주를 기념하기 위해 지은 시문학관으로 폐교된 선운초등학교를 재개조 완공하여 그의 사후 다음 해인 2001년 가을에 개관하였다. 개관일인 11월 3일은 미당의 중앙고보 재학시절 광주학생의거에 참여한 것을 기념하여 정했다고 한다.
<미당 시문학관 입구>
미당 서정주(未堂 徐廷柱, 1915∼2000)는 본관은 달성(達城), 호는 미당(未堂)이다. 전라북도 고창(高敞)에서 태어났다. 고향의 서당에서 공부하고 줄포(茁浦)보통학교를 다닌 후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36년 중앙불교전문학교를 중퇴하였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으로 등단하여 같은 해 김광균(金光均)·김달진(金達鎭)·김동인(金東仁) 등과 동인지 시인부락(詩人部落)을 창간하고 주간을 지내며, 대표적인 친일매국시인이며 어용시인이 되었다.
<미당 서정주 생가>
1942년 7월 매일신보에 다츠시로 시즈오[達城靜雄]라는 이름으로 평론 <시의 이야기-주로 국민 시가에 대하여>를 발표하면서 친일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이후 1944년까지 친일 문학지인 국민문학과 국민시가의 편집에 관여하면서 1943년에는 수필 <징병 적령기의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 <인보(隣保)의 정신>, <스무 살 된 벗에게>와 일본어로 쓴 시 <항공일에>, 단편소설 <최제부의 군속 지망>, 시 <헌시(獻詩)> 등을 썼고, 1944년에는 <오장 마쓰이 송가> 따위의 친일 작품들을 발표했다.
<마쓰이 오장 송가>
1944년 12월 9일 매일신보에 실린 <마쓰이 오장 송가>라는 시에 언급되는 레이테만(萬)해전은 가미카제가 처음으로 등장한 전투다. 가미카제(カミカゼ)는 신풍(神風, 신푸)이라고도 하며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일본군이 연합군함대에 시도한 비행기 자폭테러 특공대이다. 폭탄 등을 실은 항공기로 적 군함에 충돌하여 유폭효과를 노려 타격하는 전술이다. 이는 국가가 군인에게 자살을 명하는 것으로 개인의 인명을 극단적으로 경시하는 전쟁범죄다.
<서정주 사후 칭송기사를 쓴 조선일보>
서정주는 해방 후 반민특위에 끌려가서 “적어도 일제 치하에서 몇백 년은 더 있을 줄 알았다. 해방이 이토록 빨리 올 줄은 몰랐다”고 고백했다. 이승만으로부터 친일행위에 대한 면죄부를 받고 <이승만 박사 전기>를 집필했으며, 박정희의 5·16쿠데타와 유신체제를 지지했다. 특히 전두환 생일 때는 <전두환 대통령 각하 56회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를 썼으며, 1987년 4·13호헌조치를 ‘구국의 결단으로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으며, 단군 이래 최고의 미소를 가진 대통령이라고 찬양했다.
<전두환 대통령 각하 56회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
서정주는 탁월한 언어 감각으로 현대 문학계에서 거목으로 평가받지만, 친일·친독재 행위와 반인륜범죄에 대한 미화 등 기회주의 어용문인이며 친일반민족행위자다. 1985년 서정주의 제자이기도 했던 소설가 조정래는 “사과 한마디에 자유로워질 수 있다”며 설득하였으나 오히려 크게 화를 냈다고 한다. 그는 죽을 때까지 끝내 억지 변명으로 일관했다. 이러한 행적에도 고창군에서는 국화축제가 열리고, 관악구는 남현동에 살았다는 이유로 관악산공원에 시비를 세웠다. 또 미당문학상 제정은 무슨 해괴한 짓인가?
<고창 국화축제와 미당문학제를 폐지하라>
https://blog.naver.com/waya555/223499262919
첫댓글 정말 읽기 편하게 글을 참 잘 쓰십니다.덕분에
오늘 아침도 지식 충만되어
기분 좋게 시작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