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서천군 비인면 복종형(伏鐘形)(비인 복종의 總整理, 통맥법회를 통박함)
1. 전설이 많은 곳
무학대사가 삼성팔현 72대 재상이 날 곳이라 하고 만산도는 五星九賢 자리라 하여 호서(충청도)팔대혈중 두 번째 서열이라 하는 곳이다.
전설(傳說)이 많은데 예컨대, 종천들에 있다, 부내마을 부근(지금은 종천면 종천리이지만 예전에는 비인면 소속)이다, 종천위와 개복교(開福石橋, 예전에 설치한 돌다리) 아래에 있다, 토정선생(1517~1578)이 백일 기도 끝에 산신의 계시로 혈을 찾고 지장풀을 묶어 표시를 하자 山神이 치표를 한 것을 못 마땅히 여겨 들판 지장풀을 전부 묶어서 못찾게 하였다, 국풍 박상의(1538년 중종33~ 1621년 광해13)가 치표로 동판(銅板)을 묻어 놓았는데 민씨가 동판을 찾을려고 땅을 파헤쳤으나 실패한 곳이라 하여 민경들(閔耕坪)이라 한다, 상좌리 냇가와 랑평리에서 종소리가 들린다. 산도에 적힌 글을 보면, “임진란때 水軍도독 진린이 지나다가 보고 四拜를 한 뒤 이 혈에 장사지내는 자는 반드시 가난한 者일터라 민판서(閔判書)에게 천냥을 빌려 이땅에 묻어 두고 장차 장사지내는 가난한 자에게 도움을 줄까 한다. 온 세상을 평화롭게 할 현자가 탄생할 것이라”적혀 있다.
2. 행룡과 지명 정리
이혈에 관하여 문수산에 있다(유청림), 비인 월명산에 있다(도선국사풍수지리회의 통맥법학회), 문수산에 주혈이 있고 월명산에 차혈이 있다(장익호 유산록)고 견해가 나누인다. 산도 또한 문수산을 주산으로 표시한 것과 월명산을 주산으로 한 것의 2종이 있다.
옛날에는 문수산 방면의 종천면 (종천리, 랑평리,신검리)도 비인면(庇仁面)에 속하였다고 하므로 비인 복종혈 또는 부내마을 복종이라 할때에는 문수산 방면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또 결록이나 산도에 혈처가 개복교(改福橋)아래, 종천(鐘川)위에 있다고 기재된 것이 많으므로 그 위치를 알아 두어야 된다.
월명산과 문수산의 태조는 부여군 내산면 금지리와 보령군 도흥리에 있는 월명산(544m)이고(문수산에 혈처있다는 견해는 산도에 표시한 월명산이란 태조 월명산을 표시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월명산은 비인면과 부여 옥산면에 하나씩 더 있다), 천덕산, 병목산, 옥녀봉(368m)을 거쳐 조부 장태봉(350m)에 이르러고 거기서 비인 월명산(298m)과 종천면 문수산(311m)으로 나누인다.
** 태조에서 조부 장태봉까지---
장태봉에서 월명산과 문수산--
** 개복교, 종천 등--종천은 옛날에 粉川이다
3. 결록과 산도
결록은 옥룡자 유세비록에는 짧게 두 줄 있고 유선생이 인용한 봉안결이 있다(유청림2014.8카페) 두사충의 용혈도가 있는 외에 만산도 책(고광도 수집)에는 산도 6개가 실려 있으며 그밖에 수 많은 산도가 있으나 대동소이 하다. 장익호 선생님의 유산록(전편 275)에는 간산기와 산도가 게재되어 있다. 이와같이 12개 이상의 산도가 있는데도 볼 만한 근래의 간산기가 없는 것은 혈 찾기 어렵다는 말이 된다. 산도는 대표적인 것 4개를 게재한다.
옥룡자 결이 단 두 줄인 것으로 보아 옥룡자는 대혈로 보지 않았는데 전해 오면서 결록이 격상되어 대혈로 발전한 것 같다.
** 옥룡자 결--
** 봉안결--작자 불명
산도는 주산을 월명산으로 표기한 것과 문수산으로 표기한 것 두 종류가 있다.
** ① 두사충 용혈도(월명산표시)---개복교하, 종천상이니 문수산이다.
**② 만산도 제1도(월명산표시)--
위의 만산도에는 주산을 월명산으로 기재하였는데 붓으로 쓴 해설에는 종천上 개복교下라고 함에 대하여 펜으로 쓴 해설에는 비인면 관리로 표시했다. 그런데 앞에서 설명한 것 처럼 종천과 개복교는 모두 문수산 아래에 있으므로 붓글은 문수산 아래에 혈이 있다는 내용이고 펜글은 월명산 아래에 있다는 내용인데 펜 글은 뒤에 가필한 것이다. 그림상 청룡이 여러겹이므로 문수산 산도로 보는 것이 옳다. 펜 글씨는 어떤 高手가 비인 관리의 혈처를 사후에 기입한 것으로서 비인 월명산에 관한 기록이다.
** ③ 만산도 제2도(문수산 표시)---개복교와 민경들이 표시 되어 있다. 문수산下 복종에 관한 대표적 산도이다.
** ④ 만산도 제3도--비인 남15리는 종천리 (문수산)
** 어떤 산도에 게재된 詩-- 흥미있다.
** 유산록산도--
4. 각 견해
개복교하, 종천상은 文秀山下이므로 유산록에서 차혈이라고 하는 월명산 혈 그리고 제1산도에서 비인 관리라고 쓴 펜글씨 합계2건 외에는 전부 文秀山下의 복종혈이다.
각 견해(심도있게 볼 사람을 위하여 요지는 도표로 맨 끝에 게재한다.)를 종합하면, 종천상 개복교하, 대해조당, 무동안, 평지낙맥, 前有 大路가 키워드(key word)가 된다.(물론 모든 조건이 맞아야 되는 것도 아니고 산도가 가지 각색이므로 기존의 견해에 구속될 필요도 없다)
** 구체적 후보지는 필자의 추정이다.
국도밑 5번(초등학교 옆)은 이 글을 쓸 때 까지 공개적으로 지적하는 견해가 없었는데 카페에 올리려고 검색하니 00님이 최근 주장한 것을 보았다. 우리도 그 주변을 보았는데 래룡이 힘이 없고 무르며 앞이 산만하였다. 대명당으로는 부족?
5. 문수산 복종 진혈 찾기
첫째 문수산 줄기들은 높고 날카로워서 강기를 털어버린 낮은 곳, 둘째 만산도와 유산록이 대해조당이라 하였으니 바다가 들여다 보는 곳, 셋째 박상의가 동패를 묻은 곳이 민경평이라는 들판이고 토정이 치표로 지장 풀을 묶었고 산신이 치표를 못 알아보게끔 온 들판풀을 묶었다고 하니 평지일 가능성이 높다. 넷째 좌향은 해좌 묘좌 갑좌 간좌등 다양하고(다만 옥룡자결과 산도들이 서향이라 하니 해좌와 간좌는 배제되어야 한다) 童子안이라는 견해가 많다.
** 대해 조당--
** 이상을 참고로 랑평리 노인회관에 차를 세워 두고 발품을 팔면 진혈을 찾을 수 있다. 전체적 국세가 청룡세이고 월명산이 굽이치며 내려와 예쁜 童子案(仙童이 아니다)을 만들었다. 혈성은 너무 풍후하여 재혈하기 어려웠다. 묘좌유향이다. 애석하게도 백호가 낮아 상등이 못 되고(산도에도 外孫不蕃이라 하여 외손은 번성치 못한다고 적혀 있다.) 중등상급 대혈이다. 충남에서 10위권 안밖 아닐가.
6. 월명산하 복종형
두사충산도와 제1산도는 주산을 월명산으로 그리고 있으나 위치를 개복교하, 종천상이라 하므로 실지는 문수산 혈이다. 대부분이 월명산아래 즉 비인 관리에는 혈이 없다고 주장하는데 유산록은 次혈이 있다고 하고 만산도 제1산도중 펜 글씨는 관리에 있고 2대 발복이라 한다.
탐혈해보니 월명산에서 평지로 내려와 말락지에 0씨들 집장지가 있는데 앞바람이 침범하는 假穴이다. 진혈은 국세가 풍후하고 먼 바다가 조금 보이더라. 문수산 만큼 화려하지 못하지만 실속있는 중등 중급의 대혈이다.
** 0씨들의 집장지--
** 비인 관리의 혈처-
7. 물형에 관하여
이 곳 복종형은 물형을 현장에 맞추어 보기 어렵다. 종은 걸어 놓는 고리인 용뉴(龍鈕), 종치는 막대기인 당목(撞木), 종소리를 울리게 파놓은 명동(鳴胴), 당목이 부딛치는 곳인 종좌, 종을 치는 곳인 타종처(打鐘處)로 되어 있다.
문수산과 월명산의 혈은 모두 종치는 자리(打鐘處)로 보고 혈처와 연결된 산정상 이하를 종의 몸체로 보아야 될 것 같다. 유청림은 종이 땅에 떨어진 자리라고 하나 종이 떨어지면 흉조이다. 다만 종의 몸체가 크고 예쁘야 되는데 그렇지 않아 등급이 떨어진다.
말들은 많으나 알아 들을 수 있게 쓴 글은 적어서 총정리를 하고 필자의견을 제시하였다(2020.4.6.)
8. 통맥법회의 무지한 시비
복종혈은 월명산에 있는가, 문수산에 있는가? 유산록은 문수산은 당대 발복하는 주혈, 월명산은 2대 발복하는 차혈이라 한다. 제1도 제2도는 주산을 월명산 으로 표기하고 2대 발복이라 하지만 내용상으로는 종천上 개복교下라고 하여 문수산 아래를 지적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제1도의 펜 글씨와 유산록 次穴외에는 각종 산도와 결록에 월명산아래 복종혈이 있다는 말이 없다
필자가 간산해 본바, 위에서 적은 것과 같이 유산록이 정확하다.(다만 발복추산은 내 실력 밖이다.)
그럼에도 도선국사 풍수지리학회의 통맥법회는 “선철들이 비인 월명산에 복종형이 있다고 하는데 유산록이 유독 존재하지 않는 옥룡자 결을 빙자하여 문수산에 있다고 하니 사기꾼이라 한다”.(필자가 쓴 예산 해복형 공개토론을 보다. 참조) 그러나 짧지만 옥룡자 결도 있고 봉안결과 만산도4매(다만 제1도의 펜 글씨 제외)는 종천上 개복교下라고 하여 랑평리와 종천리 즉 문수산을 지목하고 있다. 물론 앞에서 기재한 설화도 문수산 아래이다. 선철들이 월명산을 지적하였다는 근거는 만산도 제1.2도에 월명산이란 표기한 것 이외에는 찾지 못했다.(그나마 내용상으로는 종천상 개복교하라 하여 실지는 문수산하를 지적하고 있다.) 만약 현장을 답사하여 개복교와 종천천을 찾아 보았다면 이러한 무뢰배(유산록이 즐겨 사용하는 표현이다)의 처사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장선생님 동호회가 점잖아서 명예회복에 나서지 않기에 그 회원은 아니지만 유산록 애독자로 사실을 밝히는 것이다.
** 혈처에 관한 각 견해의 도표---
첫댓글 수고하셨어요
공부 잘 하엤습니다
항상 건강해지고 행복하세요
예 ! 감사^^
량평리 오래전에 지인하고다녀온기억이있네요 수고하셨읍니다
감사합니다. 잘보았습니다.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