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랑길을 걸으며(2)
(손화중 피체지∼인촌 생가, 2024년 6월 29일∼30일)
瓦也 정유순
일기예보가 적중한 것인가? 하늘에는 구멍이 뻥 뚫린 양 빗물을 쏟아붓는다. 도보로는 무척 불편하여 미당시문학관에서 버스로 손화중 피체지로 이동한다. 손화중 피체지(被逮地)는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인촌로 322-65(송현리 120)에 있다. 동학혁명 2차 봉기 시 강력한 나주 민보군을 제어하기 위해 나주·장성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1895년 11월 수강산 산당이씨 재실(齋室)에서 은거하던 중 재실지기 이봉우의 고발로 관군에 체포되었다.
<손화중 피체지>
이 과정에서 아들을 생포한 관군이 자수하지 않으면 아들을 대신 처형하겠다고 하자 손화중은 이봉우에게 자신을 관에 고발하여 상을 받으라고 권유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재실 주변은 낮은 야산이 둘러싸고 있으며, 재실을 관리하는 작은 농가 주택이 있다. 민보군(民保軍)은 보수세력이 조직한 반동학의 민간 자위 조직으로 동학농민운동 때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유생들이 조직한 군대다.
손화중(孫華仲, 1861~1895)은 전북 정읍에서 손호열과 평강채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밀양손씨 목사공파 42세손이다. 12세에 고흥유씨와 결혼하였으며, 1884년경 동학에 입도하였다. 이후 정읍 농소리, 입암 신면리, 무장지역 등에서 동학 포교에 전력을 기울였으며, 1892년 동학의 50여 포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성장하였다.
<백합>
1892년 11월 전북 삼례(參禮)에서 동학교조(東學敎祖) 신원운동이 발생하자 손화중은 많은 교도(敎徒)와 함께 삼례집회에 참여하였다. 또한 광화문 복합상소운동에도 참여하였으며, 1892년 전북 정읍포의 대접주로 임명되었다. 조선 후기 봉건 정부의 모순에 따른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수탈에 맞서 전봉준과 함께 고부 봉기를 전국적인 농민 전쟁으로 승화시킨 인물이다.
손화중이 무장지역에서 동학의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첫째, 1891년 공주에 은거하던 동학교주 최시형을 만나 두터운 신임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후 익산, 부안, 고부 등지를 순회할 때도 최시형의 지도를 받았다. 둘째, “비결이 세상에 나오는 날은 그 나라가 망할 것이오, 망한 후에 다시 흥한다.”는 믿음이 전하던 선운사 마애불 비기(秘記) 탈취사건으로 손화중이 이끌던 조직에 신비성까지 추가되었기 때문이다.
<수국>
김개남과 함께 총관령(總管領)을 맡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는데, 당시 동학농민혁명군의 근간(根幹)을 이루던 세력은 손화중이 이끄는 동학교도를 기반으로 하는 조직으로 추정되며, 이들은 동학농민혁명의 최대 승리로 기록된 전주성을 점령한 주역들이었다. 이후 손화중은 집강소 설치 및 기간 신분제 개혁과 토지 개혁을 실천하고 이 과정에서 동학농민혁명이 순조롭지 못함을 인식하고 조기 해산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산당이씨 재실(齋室) 침명재>
손화중은 9월 광주일대를 지키며 전쟁에 필요한 돈과 식량을 조달하였으나 우금치전투에서 일본군에 궤멸되자, 11월 말 원평, 태인 전투를 끝으로 12월 1일 농민군을 해산했다. 1895년 1월 6일 체포되어 일본군에게 인계된 후 나주 감옥에 갇혔을 때 손화중이 나주목사 민종렬(閔種烈)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자신을 ‘소인’으로 칭하자, 함께 투옥된 전봉준은 “진실로 짐승 같은 놈”이라며 사람을 잘못 보고 거사를 도모했다며 질책했다. 이 역시 양반 출신의 비교적 온건파에 속했던 손화중의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손화중(우) - 네이버캡쳐>
이러한 손화중도 서울로 압송되어, 법무아문(法務衙門) 권설재판소에서 3월 29일 사형을 언도받았다. 판결은 그날로 왕의 재가를 얻어, 3월 29일(양력 4월 23일) 새벽 손화중은 전봉준·최경선·김덕명·성두환 등과 함께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또한 동생 손익중과 처남 유용수도 처형당했고, 조카 손여옥 등 많은 친척들이 처형당하거나 체포령이 내려져 정읍의 손씨들은 각처로 흩어졌다. 이러한 난리 통에 손화중의 시신은 수습되지 못했다.
<손화중피체지 전경>
빗속을 가르며 다음 행선지인 인촌 김성수 생가로 향한다. 이 생가는 조선 후기에 건립된 집으로 고창군 부안면에 있으며 1977년 전북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부농(富農) 주거 형태이며 남북으로 긴 장방형 대지 위에 큰집과 작은집이 앞뒤로 나란히 북향해 있다. 큰집에는 안채, 사랑채, 곳간채, 안 문간채, 바깥 문간채, 솟을대문 등이 있으며, 작은집은 큰집에 비해 곳간채만 없을 뿐 집의 규모나 격식에 큰 차이가 없다.
<인촌 김성수, 수당 김연수 생가 안내판>
각 채의 건립 시기는 큰집 안채는 1861년, 사랑채는 1879년, 작은집 안채는 1881년에 조부 낙재(樂齋) 김요협이 건립하였다. 큰집 사랑채의 문간채는 1893년 김성수의 양부인 원파(圓坡) 김기중이, 작은집 사랑채는 1903년 친부인 지산(芝山) 김경중이 건립하였다. 이곳은 안채·사랑채·곳간 등 여러 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호남 토호의 집 규모를 보여준다.
<인촌 생가 대문>
집의 가장 안쪽에 있는 큰집의 안채는 팔작지붕의 ‘一’자형 홑집이다. 1907년 그의 일가는 당시 이 고장을 휩쓸던 화적의 행패와 귀화(鬼火)의 출몰로 현 부안군 줄포면 줄포리로 이사하였다. 이 집은 마을 사람에게 맡겨 보존해 오다가, 1977년 김성수의 동생 수당 김연수(秀堂 金秊洙, 1896∼1979)가 옛 모습 그대로 보수함과 동시에 복원하였다. 인촌이 태어나고 성장한 고창군 부안면 인촌리와 부안군 줄포리의 고택은 아직도 원형 그대로 보전되고 있는데, 두 곳 모두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작은집 행랑채>
특히 인촌가(仁村家)만큼 풍수지리를 신봉한 집안도 없다고 한다. 전라북도 고창·순창·부안, 전라남도 장성 일대의 유명한 명당은 모두 인촌 집안인 울산김씨가 차지했다는 소문이다. 부안군 변산면에 있는 증조부 김명환 묘는 비룡승천형, 순창군 쌍치면에 있는 증조모 전의이씨 묘는 갈룡음수형, 고창군 선운사 뒤에 있는 조부 김요협 묘는 복치형, 고창군 아산면에 있는 조모 영일정씨 선인취와형 등이다. 부부간이라고 합장하지 않고 1인 1명당을 쓴 것으로도 유명하다.
<작은집 사랑채>
인촌(仁村)은 고창에서 태어나 군산 금호학교를 졸업하고 1914년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졸업, 1915년 중앙학교를 인수, 1919년 경성방직(주) 설립, 1920년 동아일보 창간, 1932년 보성전문학교 인수 및 교장 취임, 1945년 한국민주당 결성, 1946년 고려대 설립, 1951~1952년 제2대 부통령의 약력이 말해주듯 교육자, 사업가, 정치가로서 현대사의 거인이라 할만하다. 인촌의 호는 그가 탄생한 인촌 마을 이름을 딴 것이다.
<생부 지산 김경중>
<수당 김연수>
이렇게 우리나라 정치, 경제, 언론, 교육, 문화계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지만, 김성수는 오늘날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평가되고 있다. 그 사례는 1941년 5월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이사 및 평의원, 8월에는 흥아보국단 준비위원회 위원 및 경기도위원, 9월에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에 참여해서 10월 감사, 같은 해인 1941년 조선방송협회 평의원과 조선사회사업협회 평의원, 1940년대에 학도지원병을 고무하고 징병제 참여를 독려했다.
<양부 원파 김기중>
<인촌 김성수>
대표적으로 신문에 <문약(文弱)의 고질(痼疾)을 버리고 상무기풍을 조장하라(매일신보 1943. 8. 5)>, <대의에 죽을 때 황민(皇民) 됨의 책무는 크다(매일신보 1943. 11. 6)>, <학병을 보내는 은사의 염원(매일신보 1943. 12. 10)과 같은 젊은이를 전장으로 끌어들이는 글을 실었다.
<작은집 안채>
학교장 대표로 1943년 11월 8일 국민총력조선연맹 등이 주최한 ‘출진학도(出陣學徒)를 보내는 밤’에서 학도지원병을 격려했고, 1943년 12월 17일 학도지원병 예비군사학교 입소식에서 축사를 했다. 징병제실시가 결정되자 <징병이 닥쳐온다, 군인원호사업에 한층 분발하자(매일신보 1944. 1. 22)>라고 주장했다. 1962년 대한민국 공로훈장이 추서되었으나 친일 행적이 인정되어 2018년 취소되었다.
<큰집 안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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