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구 신부
연중 제6주간 토요일
히브리 11,1-7
마르코 9,2-13
참된 결심
사제라면 일 년에 꼭 한 번은 피정을 해야 하는 것이 교회법의 규정입니다.
물론 이 규정 때문에 피정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신자들도 마찬가지겠지만 피정에 들어가면 본당 걱정까지 잊고
편안한 마음으로 머물 수 있기 때문에 그 어떤 휴가보다도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피정만 하면서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피정을 마칠 때쯤이면 피정 동안 결심한 것을 적은 노트를 보면서 꼭 지키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그런데 언젠가 피정 지도 신부님께서 마지막 강의에서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이 피정기간 동안 결심했던 것들이 꼭 지켜지리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결심을 적은 노트가 있다면 그 노트를 한동안 보지 마십시오.
피정이라는 특별한 시간 속에서 결심한 것을 그대로 실천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쩌면 무슨 결심을 했는지도 모르는 내용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제 다시 세상에 나간다면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 사목활동을 하겠다는 결심과
기도의 마음만 잊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마치 베드로가 영광스런 변모 사건을 체험하고 자신도 모르는 말을 했던 것처럼
피정이라는 특별한 시간 속에서 지키지 못할 결심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진정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겠습니다.
수원교구 이철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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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성훈 바오로 신부
연중 제6주간 토요일
히브리 11,1-7
마르코 9,2-13
오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말 같지 않은 소리를 한다고 꾸짖으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셔야 한다는 말,
죽음을 당하셔야 한다는 말조차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여러 가지 능력과 기적들을 보고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보여주실 영광의 순간만을 기다리고 예수님을 따라 다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겪게 될 시련과 고난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서
종종 이야기 하셨지만, 베드로 사도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오늘 복음의 베드로 사도처럼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항상 희망과 기쁨에만 익숙한지 모르겠습니다.
또 우리가 신앙을 이야기할 때 항상 좋은 일만을 기대하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시련이나 어려움이 닥치면 쉽게 우리 신앙에 대해 회의가 듭니다.
신앙은 우리의 삶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고 쉽게 신앙을 포기해 버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오셔서 고난과 십자가 죽음의 고통을
겪으면서까지 우리에게 보여주시고자 한 것은 바로 우리 인간들의 삶을 예수님께서도
충분히 이해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 후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우리도 부활 하리라는 희망과 확신을 가지게 합니다.
당연히 우리가 기쁠 때 우리는 우리의 신앙에 대해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난이나 시련을 겪을 때도 역시 우리 신앙에 대해서 감사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들과 이 세상 사람들이 시련이나 고통을 받아들이는 방법이 다른 것입니다.
또 우리 신앙인들은 시련과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돌아가신 연옥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는 11월 위령성월이 되면
제가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 대한 복음을 들었다는 것에 대해서도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어떤 이의 죽음 특히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겪으면
그 사람의 빈자리가 가져다는 주는 아픔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채 계속 후회만 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물론 인간적인 아픔과 슬픔은 당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슬플 때 슬퍼하도록 만드셨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은 슬픔을 이겨낼 수 있는 신앙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들은 ‘죽음’에 대해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고
또 우리 모두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것처럼 신앙인들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 또한
세상 사람들이 익숙해져 있는 모습과는 전혀 다릅니다.
“죽음” 이것은 단지 우리 신앙이 시련과 고통 중에 어떤 힘을 가지는가를,
우리가 힘겨워 넘어졌을 때 어떻게 일으켜 세우는 가를 보여주는 많은 예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참으로 우리 신앙은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힘을 복돋워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열심히 살아가는 젊은 신앙인들에게는 더욱 더 용기과 힘을 복돋워 주고,
시련과 고통을 겪고 있거나 방황하는 젊은 신앙인들에게는
그들의 신앙 안에서 위로와 지혜를 찾을 수 있도록 다함께 기도하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신앙의 힘입니다.
대구대교구 추성훈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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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양 신부
연중 제6주간 토요일
히브리 11,1-7
마르코 9,2-13
미리 보는 그리스도의 영광
'타이타닉'이라는 영화를 보신 분들 많으시지요?
이 영화는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배경으로 해서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1912년 타이타닉 호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부러움 속에 1500명의 승객과
700여 명의 승무원을 태우고 처녀 항해를 나서서 대서양을 횡단하던 중에
큰 빙산을 들이받고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타이타닉의 안타까운 모습을 제임스 카메론이라는 감독이 영화로 만들었지요.
거대한 여객선이 빙산을 들이박고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하자
선장은 구명보트를 내리라고 명령합니다.
보트가 부족하여 모두가 다 탈 수가 없었으므로 먼저 어린아이와 여자들을 태우라고 명령하지요.
구명정으로 옮겨 타는 중에 스트라스라는 한 초로의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구명보트에 옮겨 타려는 순간 남편이 함께 할 수 없음을 알고 내려달라고 부탁합니다.
남편과 함께 배에 남겠다고 결정한 것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만류하지만 스트라스 부인은 끝내 구명보트를 포기합니다.
"남편과 나는 서로 사랑하며 오랜 시간 인생을 함께 살아왔습니다.
남편을 떠나서 나 혼자만 살기보다는 마지막까지 남편과 함께 하렵니다."
그녀는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남편을 바라보며 말합니다.
결국 부부가 나란히 침대에 누워서 손을 꼭 잡고 침몰하는 배와 함께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던 그 장면이 눈에 선합니다.
여기에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 스트라스 부인인들 어찌 살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아비규환으로 침몰하는 배가 어찌 무섭지 않았겠어요?
그런데도 그녀는 남편과 함께 하는 죽음을 택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남편과의 깊은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편과 함께 한 삶에의 신뢰와 애정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큰 믿음과 깊은 사랑의 체험은 시련과 절망에서 더 빛을 발합니다.
시련이 클수록 사랑은 더욱 커집니다.
그러나 일생을 함께 살아왔어도 사랑과 믿음보다는 원망과 불신의 상처가 많고
사랑에 대한 체험이 많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 생길 때 그 한계가 드러나고 맙니다.
감춰졌던 것까지도 들추어지게 마련이지요.
인생에 있어서 좋은 체험과 기억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좋은 체험을 가진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시련이 왔을 때 더 큰 용기를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앙인들에게도 해당이 됩니다.
신앙 생활을 하다보면 시련이 찾아오는 때가 있습니다.
이 때 하느님에 대한 깊은 체험이 있는 사람은 이 시련이 성숙의 시기이자
은총의 시기로 바뀔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에 대한 체험이 깊지 않고 신앙 생활이 건성이었던 사람은
시련에 그대로 휩쓸려 가기가 쉽습니다.
좋은 체험을 갖는다는 것, 이것은 참으로 은총이고 복입니다.
오늘 복음이 바로 그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참으로 좋은 체험을 만들어 주시지요.
바로 타볼산의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입니다.
많은 제자를 다 데리고 가실 수 없었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산 위에 올라가자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여 해와 같이 빛나고 빛과 같이 눈부셨다고
성서는 전합니다.
그리고 난데없이 구약의 대표적인 인물인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으로 변화된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 때 하늘에서 소리가 들리지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9,7)
제자들은 모두 겁에 질릴 만큼 놀랍니다.
예수님의 모습에 너무나도 황홀하고 너무나도 놀란 베드로가 얼떨결에 말하지요.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마르9,5)
그리고는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마르9,5)하고
이 황홀한 광경이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생각은 이와는 전혀 달랐지요.
계속 머무르기를 바라는 제자들을 데리고 산 아래로 내려오시며 예수님께서는 당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마르9,9)
산 아래는 바로 우리가 살아가야 할 현실입니다.
져야 할 십자가가 있고 생로병사의 고통이 진행되는 세상이었지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놀라운 광경을 체험으로 심어주신 이유가 있습니다.
어렵고 힘들 때 주님은 참으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이시고
하느님의 아들이실 뿐만 아니라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신 분임을 확신하는 믿음으로
그 고난을 극복하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잠시 체험한 이 놀라운 체험을 영원한 것으로 만들어주실 분으로
기억하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산 아래의 현실, 고통이 있는 세상으로 내려가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산 위의 영광스러운 자리에만 계속 머무르고 싶어 했지요.
초막 셋을 지어 천국 같은 그 곳에서 천년만년 살고 싶어 했습니다.
산 아래 현실은 피하고 싶고 눈물과 고통이 없는 영광스러운 황홀경 속에서만
안주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영광은 십자가의 길, 고통의 길을 짊어지고 승화시켰을 때
영원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가르치십니다.
하느님에 대한 신뢰는 어려운 시기를 성숙의 시기로 만들어 줍니다.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은 배반의 과정은 있었지만 예수님의 충실한 제자가 되었지요.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초대 교회를 이끌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합니다.
야고보 사도 역시 초대 교회의 초석이 되어 온 힘을 다해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합니다.
요한은 역사에 길이 남을 요한복음서의 저자가 되지요.
예수님의 수난 당시 그렇게 두려움에 떨었던 이들이 다시 회생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좋은 체험들에 대한 기억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 대한 체험은 시련 중에 더욱 빛을 발하며
목숨까지도 바치게 만들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우리 신자들에게 꼭 이런 체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체험이 없는 사람들은 늘 불안하고 작은 일에도 흔들립니다.
체험으로 인한 하느님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으면 시련에 무너지기가 쉽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확신과 주님께 대한 신뢰가 있으면 시련이 올수록 믿음은 단단해지는 것입니다.
신자들의 하느님 체험을 도와주기 위하여 사목자가 세운 사목 프로그램에 꼭 참여하십시오.
그것이 은총입니다.
우리는 매일 성체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을 체험하고 그 은총을 담고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세상의 어려움을 승화시킬 수 있는 힘을 얻어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미사가 생명의 말씀을 담고 주님의 성체를 통해서 주님과 합일되는
은총의 시간이 되기를 바라며,
비록 산 위의 영광은 아닐지라도 희망으로 산 아래의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 되기를 바랍니다.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
아멘!!!
감사합니다.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